2016년 3월 9일 수요일

(21)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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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의 경고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 1:3]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정욕[이 세상의 육신을 위한 모든 욕구, 세상 사랑,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요일 2:16]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을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 1:4],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욱 힘쓰는"[:5] 것이다. 어떻게 더욱 힘쓰는 것이냐, 믿음에 덕을 공급해야 한다. 그것만 안된다. 또 지식을 공급해야 한다. 역시 그것만으로도 안된다. 절제를 공급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안된다. 인내를 공급해야 한다. 거기에 경건을 또 공급하고 형제 우애를 공급하고 최종적으로 사랑을 공급해야 한다[:6,7], 이런 것을 공급하지 않아 없으면 어찌 되느냐, 이런 것이 "있어야" 하고 있어도 "흡족하게" 있지 못하면 어찌 되는가[:7,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게 된다[:8]. 열매 없는 자가 된다[:8]. 소경이 되어 멀리 보지 못하게 된다[:9].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게 된다[:9]. 실족하여 넘어지게 된다[:10/고전 10:12].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벧후 1:11]. 그러므로 "더욱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10]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미 베드로는 여기서 "더욱 힘쓰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연달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목자(牧者)된 사람들은 그렇게 "더욱 힘쓰도록" 항상 경고하기를 역시 "힘쓸"[:15] 것을 거듭거듭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한다" 하였고,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는 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로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알므로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한다"[:12-15]고 되풀이하여 힘 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경고한 그대로다. "구원을 이루지"[빌 2:12] 못함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실태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뜻에서 오늘날의 소위 기독교교회가 얼마나 이탈해 있는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양면성의 원리에서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일[눅 11:23] 뿐이지 그 중간은 없다. 양면성의 원리에서[3위1체의 법칙이 이 원리와 인과율(원인과 결과 즉 조물주와 피조물 관계)을 함께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자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워하기까지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필시 미워하는 것이다. 주님 말씀대로 하나님과 재물[돈]을 겸하여 섬길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니 이를 분명히 해부하여 "하나는 미워하고 하는 사랑하는 것"[마 6:24]이라 하신 것이다. 이를 더욱 명확히 하여 "주인과 종"의 관계로 설정하신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24] 하신 것이다. 이것이 양면성의 원리다.

양면성에서는 반드시 주인과 종의 관계이지 둘 다 주인일 수 없고 둘 다 종일 수도 없다. 요한 사도 역시 이를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이니 살인자는 영생이 그 속에 없다고 확실히 단언한 것이다[요일 3:15].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한다"[:14]고 재차 강조하고 있기는 베드로와 마찬가지다. 요한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고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전했지만 그 말씀의 듯을 여기서 밝힌 것이다.

즉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 한 것이다. 주님께서도 이 말씀을 하실 때 "나를 믿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를 밝혀 "내 말을 듣는 것"[:24]이라 하셨음을 알 수 있거니와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말]을 지키는 것"[요 14:21,23]이라 하심과 같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롬 5:8]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여[고전 2:9/약 2:5/1:12] 그 말을 듣고 그 계명을 지켜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행 5:32/롬 1:56:16/16:26/요 3:36/히 4:11/5:8/벧전 1:2]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1서의 주제 역시 믿음에 들어왔어도 그 마음이 변하거나 하여  처음 회개할 때와는 달라 형제를 미워하게 됨으로써 살인 행위를 저지를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이 살인죄를 회개하지 않고 "죄 없다 하지 말라"[요일 1:8]는 데에 있음이다. 이는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변함'없이'] 저주를 받을 것"[고전 16:22]이라 함과 똑같은 의미인 것이다. 이는 불신자 곧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에게 준 말이 아니라 교회에 준 경고인 것이다.

사랑은 얼마든지 "식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님 친히 경고하신 바와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마 24:12]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13] 하셨으니 사랑이 식어진 자는 구원의 대열에 다시 합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끝까지 사랑이 식지 아니하거나 식어도 즉각 이를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한 이만이 구원을 얻음이다. 이는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으니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하심과 같다[계 2:4,5]. 회개하지 않으면 회개 없이 영원으로 빨려들어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달리는 자세이다. 왼발 오른발 쉴 새 없이 떼어놓으며 목적 지점에 이르기까지 한 틈의 여가도 없고 휴식도 없다. 오죽하면 바울이 이 세상에서 인생들의 소위 성공하기 위해 불철주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각고면려(刻苦勉勵, 고생을 무릅쓰고 부지런히 힘쓰는 것)하는 것에다 비유했겠는가[고전 9:25]. 그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고 한 것이다. 오늘날 이른바 구원 받았다고 하는 기독교교인들의 태도는 이와 얼마나 다른 모양새인가.

그런 종교인들은 자기 구원은 이미 다 이루어져 과거사가 되었다고 만사 태평이다. "넘어질까"[10:12]. "빼앗길까"[계 3:11], "안식에 미치지 못할까"[히 4:1], "믿지 않는 악심을 품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3:12] 실로 경성하여 "염려하는"[:12] 것이 없다. 이 염려는 나 자신을 위하는 자기중심에 뿌리가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이 되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은 나를 위하지 않으심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데 나를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키시는데 내게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인지 아래 되어지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일에 나는 마땅히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겉으로는 아무리 흉하고 내게 손실이 오여 일절 유익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나를 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가 부지런히 목적점을 향해 달려가는 그 발걸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요한 사도 역시 바울이나 베드로가 교회에 경고한 것과 같이 얼마든지 의인으로서 죄인이 되어[겔 33:12,13/3:20/18:24]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가 있으므로 더욱 힘쓰고 또 더욱 힘쓰라고 하는 경고인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빌 2:12] 위함이지만 자기 구원을 목적하는 것은 아니니, 바울이 밝힌 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22,23] 함과 같다.

즉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일편단심으로 나가는 바로 이것이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이다. 왜냐면 나는 이제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었으니 산 자로서의 마땅한 도리를 다함이 산 자가 된 증거이다. 산 자가 산 자로서의 구실을 못하면 그것은 죽은 자이지 산 자가 아닌 것이다. 산 자가 되어 있는 것은 나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스스로 나를 산 자로 만들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양면성이니 하나님께서 아담을 산 자로 만드셨으나 산 자로서의 마땅한 구실, 역할, 책무를 다하지 못할 때 그 스스로 죽은 자가 되어 버린 것과 같은 바로 그런 이치다. 사탄을 거룩하고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지만 사탄 스스로 자기를 악령으로 만들어 불원 장래 영원한 불 못에 위치하도록 정한 것이다. 산 자로서의 책무가 무엇이냐,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함으로써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요 4:34].

머리께서 하시는 일이 몸을 위함이요 몸을 위함은 바로 그 몸의 한 구성원이 되어 있는 나 자신을 위하심이다. 사람들을 구원함이 바로 그와 같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함이니, 몸의 제대로 된 지체를 다 갖추는 것이야말로[구원 받을 사람들이 모두 그 지체의 각 부분잉 될 터이므로]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전체로 누리는 삶의 행복을 최대한으로 확장하는 것이요 완벽하게 만듦이다. 이타(利他)가 곧 이기(利己)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과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요 그 직접 동기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절대 금물로서 그것이 바로 죄요 악인 것이다. 그 경우 이기도 이타도 아닌 자멸(自滅)로만 이어진다.

남이 나를 위하도록 하는 것이지 그래야 삼위일체의 원리에서 갑은 을로 을은 병으로 병에서 갑으로 그래서 다시 갑에서 을로 영원히 일방적인 흐름의 순환이면서도 을로부터 갑으로도 끊임없이 역류되기도 하는 오묘한 삶의 법칙인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면서도 자기가 위해지고 섬겨지고 더욱 충실히 됨으로써 결코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 비결이다. 자기를 부인함이므로 때로는 고난의 표적이기도 하고 죽음의 고통에 처해지는 것도 된다.

이 세상이 바로 그러한 양상을 보이는 유일한 곳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한 때만 그러하지 이 세상 끝나면 영원히는 그렇지를 않은 것이다.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니 영원히 그러할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과 또한 대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먼저 대립되는 이 영원과 일시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칭[상칭] 관계이므로, 그런 것이 영원히는 절대로 되풀이되지 않는다. 이 세상으로써 끝이다.

옛 것과 새 것이 또한 대립 양상을 보이는 것이므로 옛 것이 그와 같이 물러간 다음에는 새 것의 세상에서만 통하는 기타 다른 대립 개념들이 교차하면서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라질 것과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과의 대립 개념이었으나 이제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 가운데에서의 양면성만 지속됨이다. 따라서 생명에는 다시는 죽음이 없고, 죽음에서는 다시는 생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  어떤 이단에 대한 질문에 답하여


"그 이단들이 말하는 걸 보니, 예수님의 피로써 우리의 죄가 씻어졌으므로 다시 반복해서 씻는 일은 옳지 않다고 하며, 다만 우리가 구원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고, 인간인지라 죄를 아주 짓지 않을 수 없으나 예수님이 단번에 씻으심으로 용서를 받았기에, “교만했습니다,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습니다” 하고 기도할 수 있고 마음으로 뉘우치며 돌이키면 다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면 된다고 하던데, 표현만 다르지 기존 교회들과 같은 말이 아닌가 싶어서 질문합니다".

데덴동산에서 사탄이 여자를 꾈 때 쉽게 말해서 반은 거짓말 반은 진실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100% 진실을 말해야지, 가령 그 중 핵심 부분에서 단 1%라도 거짓이 있을 때는 그런 거짓말하는 목적이 그 1%로써 속이자는 데 있으므로 나머지 99%를 보고 진리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1%를 보고 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이들 이단들은 핵심적인 부분인 그 ‘1%’로 말하게 됩니다.

위에 지적한 대로 그들이 아무리 구원에 대한 것을 비슷하게 말한다 해도 기도 부문에 가서 성경과 다르게 말하고 가르치며 행동할 때 그들의 이른바 "구원"의 간증이 아무리 그럴 듯하게 보여도 (실상은 자세히 음미해보면 그 진상이 드러납니다만), 하나님께선 한 성령으로 서로 배치되게 말씀하실 리가 없는 관계로 성령으로 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말해 기도를 아니합니다. 물론 기도라고 하기는 해도 성경적인 의미에서 하는 기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대별해서 보면 판별이 쉽게 납니다. 그렇지 않고 구원이면 구원과 같은 세목(細目)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재고 따지다 보면 특별한 성경지식이 없는 한 혼란을 일으키고 결론이 잘 나지 않게 됩니다. 즉 그들에게 말려들어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비진리에 속하는 그룹들의 특징은 진리 또는 진실에 가깝고 비슷하게 얘기를 하는 까닭입니다. 반은 진실, 반은 거짓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씀 전파’와 동시에 열차의 두 가닥 레일처럼 비유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행 6:4].

사탄이 말씀보다 더 집중적으로 차단시키려는 것이 이 기도 부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도를 아니하게 만드는 것이 그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비진리 활동의 계략입니다. 아래 글을 올리신 분이 지적한 바대로, 구원 얻은 그 사실에만 역점을 두고 구원 얻은 다음부터 그 구원에 합당하게 사는(순종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그런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 이들 이단들입니다. 은혜로 구원 얻은 다음 그 은혜 가운데 성장하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성경의 한결같은 역점입니다.

말하자면 처음 절반은 강조하고 나머지 절반 즉 중요한 것은 등한시할 때 그것은 전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됩니다. 그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의 의미를 물어보면 필시 엉뚱한 대답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말로써 말을 만들면 되지만, 성경에서 강조하는 의도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므로 정확하게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이 미완성이라는 뜻이 아니라, 구원은 어떤 물건을 받아 챙기는 것도 아니고 법적인 수속 절차를 완료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주님과 하나 됨으로써(이렇게 하나 됨이 구원이므로) 영원한 사랑의 사귐이 시작되어진 것을 의미하기에 그렇습니다.

이 시험 많고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주님과의 사랑을 끝까지 유지 보존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고 골자입니다. 주님과 하나 됨은 이 세상에선, 주님께서 우리 몸을 통하여 주님 자신의 일을 이 세상에서 계속하시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소극적인 의미에서, 그 "신앙의 보존"이란 것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고이 유지 보존하는 그런 보존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하라고 보내시는 바 되었으니[요 20:21] 그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 이런 적극적인 것이 그 핵심인 줄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성령의 인도라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인도하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원래 구원의 요체인 고로[영생만 달랑 얻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위해 기도하시며 일하심 같이 우리도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일하는 것이 우리 구원 받은 삶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기도를 아니하니 핵심 없는 구원,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지 아니한, 즉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퍼뜨리고 있는 그들 이단들입니다.

내게 사명을 맡기신[나를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내가 온전히 이루는 것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온전히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 것입니다. 구원 받음은 주님과 하나 됨, 한 영 됨이요, 한 영 됨은 주님과의 영원한 다함 없는 사랑의 교제를 의미함이요, 이는 다시 말해 주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에서 그 한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을 이룬다는 뜻이니, 주님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함이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지금도 일하시는 까닭에 나도 주님과 함께 일하는 의미가 바로 우리의 '구원 받음'의 핵심입니다.

주님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실 때 그 일이란 것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통한 우리의 속죄, 구속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 주님의 일을 하면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 함으로써 완수하게 되어지는 일입니다. 그냥 구원만 받아놓고 이 세상에서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서 기도가 없이는 되는 일이 없고, 성령께서 말할 수 없으신 탄식으로 기도하시므로 우리 역시 그러하고, 주님 세상에서 육신으로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으니 우리 또한 세상에서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데, 이들 이단들이 그런 기도의 의미와 본질을 부인한다는 것은 구원 자체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즉 조물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을 "죽은 자"[마 8:22]라 하신 그대로입니다. 죽은 자들의 세계인데 <사는 것>이 통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죽음의 세상이라 선언하셨고, 천사들이 이 세상을 죽음의 세계로 알고 있고. 사탄과 악령들이 모두 이 세상이 죽음의 세계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사탄으로 말미암아 눈 어두운 인간, 오직 인간만이 이 세상을 마치 삶의 세계인 양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 육신의 삶은 첫째가 식도락(食道樂)ㅡ먹는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형제가 실족할까 싶어 고기를 평생에 입에 안댈"[고전 8:13] 그런 것도 서슴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 삶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술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한 잔 술도 좋지만 나보다 약한 형제가 만일 내가 술을 거리낌 없이 마시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술을 마시게 되고 그래서 술의 노예가 될 수 있을진대 나는 평생 술이라고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겠다는 것이 '바울의 태도'입니다.

식욕 다음에는 성욕이라 합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종족 존속의 본능으로서 당연합니다. 이렇게 인생은 이런 짐승과 같은 자연계 육체로 전락한 비극적 실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사람이 그냥 지내 는 것이 좋다"[고전 7:1-40]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면서 "나도 성령을 받은 줄 안다" 했는데, 이는 "성령의 명령"은 아니나 "성령의 권고"라는 완곡한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이 혼자 지낼 수 있으면 그것은 "천국을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 19:12]. 그 다음에 오는 부귀영화도 사탄이 이 세상이 그에게 넘겨져 세상의 부귀영화가 그의 장중에 있다고 호언하는 것을 알진대 그런 것들은 우리와는 담벽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이 어두워도 현저히 보고 듣는 모든 현상이 죽음이란 사실을 나타내고 있건마는, 가령 어릴 때도 죽고, 시도 때도 없이 죽어 나가는 사례들을 보아서도 드러나고 그렇게 명백히 밝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은 그렇지 않겠지" 하는 막연한 요행수, 근 거 없는 망상 속에 자기 생명을 걸어놓고 있는, 이성적인 인간으로서는 그야말로 아주 비이성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것이 우리네 실상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진정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은 오히려 속박하는 독재자처럼 인식하고, 사탄에게 완전히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을 자주(自主)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아무도 행할 수 없는 그런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누구나 다 믿었어야 할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 인간 이성에 반하여 믿지 아니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를 보시 고 주님께서 괴이하게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막 6: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와 같이 사탄으로 말미암아 눈이 감겨 보지 못하고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을 무분별하게 살고자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함에는 사도들이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할 것이다”[행 6:4] 한 대로 기도가 가장 중요 역할을 함을 다시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이 기도에 반(反)성경적인 해석을 가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로서의 기도에 전혀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는 거듭하는 말이지만 영생만 받아 챙기면 되고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일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음을 말합니다. 영생만 주시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믿어야 구원된다”고 한정하실 이유가 없이 믿든 안믿든 모든 사람이 다 자동적으로 구원 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구원되게 하심으로 천국 가게 하시면 여전히 천국에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처럼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되어 천국 삶이 이 세상 삶처럼 됩니다.

그러면 가히 천국이라 할 수조차 없습니다. 고로 이 세상에서 반드시 악한 자는 걸러지고 솎아지고 추려진 다음의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악인과 의인을 어떻게 구별해서 걸러내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되었으니 아들로서의 책무를 얼마나 충실히 하는지 그것이 다루어질 것은 물론입니다. 아들의 책무라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요 4:34]. 이것이 “내가 먹을 양식”[:32,34]이라 하셨으니 아들로서의 존폐(存廢) 문제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즉 아버지의 일을 하면 아들이고 아니하면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사람이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 것과 같은 맥락임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므로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 것이다”[6:57] 하셨습니다. 이는 보내심을 받아 그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생명 자체임을 밝히셔서 “내가 먹을 양식”이라 하셨고 그런 의미에서 “나를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산다” 하신 것입니다.
곧 우리가 "보내심을 받아"[20:21] "그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4:34]이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것이나[6:57], 그것이 ‘먹을 양식’이고 그래서 그렇게 ‘먹음으로써 생존하게 되는 것’이나 ‘보내시는 이로 인하여 사는 것’이나 모두 같은 맥락이고 의미임을 이로써 밝히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의 의미가 정작 어떤 것인지를 이로써 명백히 밝히신 것이 됩니다.

때문에 “성령을 받아라” 하실 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 하셨고,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6:47],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48],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한다”[:51], “나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53],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56],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58] 등이 모두,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니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 것이다”[:57]는 말씀으로 집약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가 믿어 구원 얻는 그 믿음의 정의(定義)가 여기에서 정확히 내려져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확증된[롬 5:8] 하나님의 사랑에 제대로 반응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기로 작정할 때[고후 5:15/롬 14:7-9] 우리의 이 작정[이것이 "회개"입니다-행 2:38]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우리가 세례 받을 때 이 일이 이루어짐] 그 바탕 위에서 성령의 선물을 주심이니[행 2:38/5:32] 곧 우리를 보내시는 의미입니다[요 20:21,22].

이와 같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일하라고 세상에 보내심이 '우리의 구원 받음'이므로 이런 위치에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함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능히 판단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시지 않은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오직 각자의 욕심 즉 살고자 하는 맹목적인 욕심에 눈이 어두워 판단을 흐리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만일 세상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 사는 것이므로 삶의 낙을 누림에서 일절 편차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기만 하면 그 믿는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다 평등하게 부귀 권세 영화를 누려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것[또는 삶의 낙을 누리는 것]이니까 믿지 않는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닌’ 세상 사람들 즉 주님의 말씀대로 하면 ‘사탄의 아들들’[요 8:38]과 당연히 구별이 되도록 그들보다 월등히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살고자 할 때는 믿음이 좋기 때문에 잘 산다는 아주 위험 천만한 발상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못사는 사람은 믿음이 출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고난을 많이 받은 바울은 누구보다 믿음이 없다는 결론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하였으니 그런 ‘믿음 없음’을 본받으라는 의미가 됩니다.

고로 살 바에야 철저하게 최고도로 모두가 잘 살아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든지 아니라면 아예 산다는 생각을 아주 접고 오직 일하는 것에만 전신전력을 다하든지 둘 중 하나이어야 화끈하게 하는 일이지 어정쩡하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세를 취함은 근본적으로 그 본질이 악이라는 방증이 됩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고후 6:1]께서도 물론 그렇게는 즉 세상에 사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니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상식에도 통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 운운”하지 말 일입니다. 성경에 대한 자기 무식함만 드러낼 뿐입니다.


§ 심는 대로 거둔다

갑은 을더러 "이단"이라 하고 을은 그 갑을 보고 "이단"이라 하는 판이니 초보자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할 만하나, 성령의 인도하심과 보우하심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고로 이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해결책은 각자 스스로 성경을 읽는 일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그 심성이 고상하여 바울의 기적 행함이 따르는 능력으로 뒷받침되는 말씀 강론을 듣고서도 그 기적 하나만 보고 바울에게 무조건 심복(心服)하지 않고, "그것이 참말 그런가 하여 성경을 읽으므로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다[행 17:11,12].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기를 구함이요 찾음 그리고 두드림이다. 어떤 교역자는 노골적으로 성경을 깊이 읽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이도 있다. 성경 읽을 수 있도록 격려를 못할망정 그 길마저 가로막는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렇게 "제멋대로 읽고는 제멋대로 해석할" 염려가 있고 그래서 "이단"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인데 이단에 빠질 사람이 따로 있다. 그럼 그 베뢰아 사람들이 이단에 빠졌던가. 성경은 오히려 그들을 본받으라는 논조다.

교인들이 성경을 읽고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게 되면 교역자의 설교가 발붙일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는 걱정이다. 이것이 “경건을 유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자세다[딤전 6:2]. 즉 복음의 일을 밥벌이로 착각하는 요즘 세태다.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는 것은 불가하고 자비(自費)로 군인되는 일은 없지만[고전 9:7,9] 그래서 복음 전하는 자가 복음을 말미암아 살지만[:14], 직업으로 여기는 것과는 전연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 이단의 주동 역할을 하는 K목사가 주도하는 데에서는 예를 들어 기도에 대하여 단순히 ‘비성경적’이라기보다 ‘괴상망측하게’ 해석하고 있다. 신앙인의 생활 자체, 그 염원(念願) 자체도 기도라는 것이니. 우리 상식으로는 기도가 필요 없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무엇인지부터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구원을 바로 깨닫고 성령의 인도와 가르치심을 제대로 받아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 "거듭났다"느니, "구원 받았다"느니 하는 말들을 즐겨 쓰게 하는 것은 사탄이다. 혼란과 혼돈을 유도하려 함이다. 그러나 항상 저울질하는 잣대가 되는 것은 "그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께서 한 성령으로 각기 다른 말씀을 하실 리 만무하니, 그들이 성령으로 나지 않고 요한 사도가 말한 바 "다른 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금방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런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적마다 자기 자신도 언제 어느 경우에든 그런 같은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두려워하라”고 한 성경의 경고대로[갈 6:1] 가일층 스스로 경성(警醒)할 따름이요 그래서 필요 없는 자긍(自矜)에 빠져 그들과 똑같은 범죄에 휘말리지 않도록 깨어 있을 일이다. 교만이란 것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 일생을 두고 말할 때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요 걸리기 쉬운 덫이다.

그리고 치명적인 것이다. 죄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사탄의 죄목이 바로 교만이 아닌가[딤전 3:6]. 바울 같은 대사도도 자기야 백 번 그렇지 않으리라 장담했겠지만,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전혀 그렇지를 않았기에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와 같은 제동 장치를 주심으로 교만하지 않도록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던가. 이렇게 은혜를 베푸심은 바울 스스로 “구원을 이루고”[빌 2:12] “자신을 구원하는”[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자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자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시면 그것은 간섭이 되고 강제가 되므로 주님으로서도 어찌하실 수 없는 것이 되어 손 놓으실 수밖에 없다. 이는 차별하심이 아니라 “이같이 큰 구원을 게을리 하고 등한히 여기면 피할 수 없는”[히 2:3] 것이기에 그러하다. 사람은 누구나 그 심는 대로 거둔다[갈 6:7].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8]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셔서 교만하지 않게 하는 역사(役事)를 나타내어 주시지 않는다.

오직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지”[:8]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8] 수는 없는 것이다. 무조건 죄는 ‘자기를 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된 자로서 아무도 자기를 위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님 친히 자기를 위하시기 때문이다. 피조물이란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주시는 것을 알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 데에 있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는 데에 있으니 곧 자기를 지으신 목적과 뜻을 나름대로 행하는 데에 있음이다.

이 원칙에서 벗어날 때 무조건 그것은 죄가 된다. 그리고 그 창조[자기를 지으신]의 목적에서 벗어나므로 자기에게 생명을 주시고 존재하게 하신 의의를 상실함이 되어 더 이상 산 자로서 삶의 낙을 누릴 수 없고 죽음 또는 멸망 가운데 처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삶의 낙을 누린다는 것은 모두가 한 몸처럼 되어 한 몸의 체제에서 자기를 위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시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는 이치도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한다. 서로 위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그 누구도[머리를 포함해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음이다[:15/롬 14:7-9]. 성경을 아무리 봐도 뜻을 세운 사람, 의지가 당찬 사람, 목표가 분명한 사람, 그래서 그 목적을 위해 목숨이라도 버리고 어떤 수고나 고통도 감내할 줄 아는 그런 지사(志士, 세상적으로 말하면) 급의 인물들이 들어가는 곳이 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런 것을 우리가 인격자라 한다면 이 인격은 오직 '사랑[love]'이라는 공작실(工作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 만인 공통, 공유(共有), 고유(固有)의 자산이다. 처음부터 타고나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할 일이다. 사랑의 유무만을 스스로 점검해볼 일이다. 처음에 부르심을 보면 "누구든지"이다. 거기엔 심지어 평소 의지박약한 사람이라고 자타 공인하던 이도 있다. 인간쓰레기라고 지목 받던 이들도 물론 “얼마든지 오라”는 초대, 초청의 대상이다.

이런 이들도 일단 은혜를 안 다음에는 완전히 그 성격과 기질이 획기적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급진적으로 또 어떤 이는 너무 안타까울 정도로 그 자라나는 속도가 느리는 등의 차이는 있으나, 한결같은 그들의 모습은 바로 그 같은 고매한 다시 말해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같이 정신적으로 말해 이목구비가 바로 박힌 형상이 반듯한 사람이 된다. 왜 그런 지난 시절 독립투사(獨立鬪士) 급의 인사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이들의 모습이 되느냐 하면 성경에 누누이 밝히고 있는 경고들이 바로 그런 인간의 입상(立像)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힘으로 밀어붙여 침입해 들어가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 천국이다[마 11:12/눅 16:16]. 우승하기 위해 고독한 마라톤 경주를 달리는 자, 성공하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는 사람...등등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천국 들어가는 자세를 드러냄이다. 세상에서 이런 뜻을 세운 사람들의 하나같은 공통점은 수고 즉 고통과 고난을 감내함이다. 음악에 달인이 되고자 하는 이는 물론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자든지 깨든지 식사를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오직 그 음악 하나, 음악 외곬의 고독한 길을 걷는다.

남 놀러 다닐 때 놀러 갈 시간도 여유도 생각도 없다. 성경에서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해놓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남 가는 데 다 가고 남 하는 것 다 하고 그렇게 삶에 정신없이 빠져 있으면서 천국에 들어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는 그 뜻이다. 이 대목에 와서 또 "이단" 시비가 붙고 그래서 하는 말이 "행위로 내 노력으로 구원 받는단 말이냐"가 튀어 나올 법하다. 남들은 다 친일(親日)하여 잘 살고 잘 지내고 입신출세도 하고 아무 걱정 없이 태평으로 사는데 반해, 사서 고생하러 낯 선 땅 험한 간도 지방으로 간 독립 지사들은 ‘대한민국 국적 취득하려고’ 그런 고생길에 접어든 게 아니라 ‘대한 국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함이니 이 하나님의 일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의 '비뚠 생활 자세' 곧 자멸로 통하는 자기중심이 아니라, 영원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되는 사람 삶의 정자세인 것이다. 아들은 성경에 누누이 강조하는 것처럼 상속자이다. 상속자라는 것은 다음 세대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경우 "상속자[heir]"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다음'부터는 어찌 되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만유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요 우리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의 주인은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말함이요, 바로 이 주인 의식이 우리 믿음 생활의 핵을 이루는 것이다. 이 주인 의식을 잘 설명하여 나타내는 것이 다름아닌 하나님께 대한 사랑인 것이다. 사랑의 특성 중 하나는 이런 주인 의식에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런 성경 지식이 없어도 비록 일자 무식꾼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사랑 알고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이라면 그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아들 노릇, 곧 주인 행세 다시 말해 주인 의식으로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찌하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려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분명히 언급하기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심만 아니라 아들로서의 절대적인 순종 여부를 스스로 시험대에 올려놓으시기 위함이라 하여, 이것 또한 고난 받으심의 이유라 한 것이다. 즉 "고난으로 말미암아 순종함을 배우셨기에"(히 5:8), 그래서 당연히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심"[:9]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렇게 하셨으니 우리 또한 그렇게 됨은 당연한 것이다.

순종 여하로 아들로서의 자질 여부를 묻는다는 것은 그 자질에 미달이면 부적격자 즉 <아들로서의 구원>에 대한 무자격자로 낙인 찍힘이다. 자격이란 앞에서 설명한 대로의 우리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에서 우러나는 순종 여부를 가림이요 그렇게 가려 내는 곳이 이 세상이요 그 방법이란 것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일을 함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순종을 입증하심 같이 우리도 당연히 똑같은 모습과 방법으로 그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시장철 혹독한 고난만 받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 걸어가신 그대로의 모습을 띨 뿐이다. 이 세상에서의 고난은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만 받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혹독하고 처참한 고난과 죽음을 당하고 이 세상 삶을 끝낸 인생들이 인류 역사상 그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인은 그런 고난에 예외가 되지 않고[단지 그 의미가 하늘 땅 차이라는 것만 다르다] 그런 세상 사람들과 함께 당한다는 것이지, 특별히 별나게 당하거나 견뎌야 하는 것도 없다.

같은 고난을 받되 우리 스스로 자진해서 기쁨으로 당한다는 데에 있다. 왜냐면 이와 같이 우리가 고난 당하는 의미가 위의 설명처럼 두 가지로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 그에 대한 보람을 충만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과 권세를 누릴 신분이지만 그렇게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고난을 당한다는 거기에 의미를 두는 것은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막중한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다 하나님께로서 난 것은 아니다. 기독교란 이름으로 각종 이적을 행하며 '하나님의 역사(役事)'라고 선전한다. 그러나 그 열매를 보면 그 정체가 드러난다. 문제는 사탄도 그런 기적을 행하는가 하는 것인데, 악한 자가 출현하면 “거짓 기적으로써”[살후 2:3-12] 주님 미리 경고하신 대로 '택한 자까지도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려 하는' 것으로 되어 있은즉, 물론 그러하다. 그래서 구별하는 방법은 그 열매를 보고 안다고 한 것이다.

'거짓'은 그 속성상 당장 판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직 시간이 그 정체를 증명해줄 뿐이다. 때문에 '저것은 거짓이다' 하고 처음부터 미리 아는 경우 외에는 그 거짓을 어떤 근거로든 거짓이라고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가짜도 겉으로는 진짜와 똑같다는 얘기다. 양의 탈을 쓴 이리는 겉으로는 누가 보아도 양이다. 단지 그 탈을 벗겨 보아야 하는 것인데 시간이 지나야 그 탈은 자동적으로 벗겨질 뿐이다.

우리의 경우 미리 그 거짓됨을 간파하여 아는 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그 열매로 아는 것이니 성령께서 계시해 주시는 것으로 알게 된다. 따라서 믿음으로 알게 된다. 세상 종교도 열심히 기도하면 각종 소원 성취하고 현대 의학으로 못 고치는 불치병도 고치고 심지어는 몸에 몇 십 년이나 붙은 악신(惡神)까지 쫓아낸다면서[쫓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끼리의 조작극일 뿐이지만], '악귀를 쫓아내니까 선한 것이요 진리임을 입증한다'라고까지 선전한다. 바로 이런 말을 하기 위해 그런 조작극을 사탄은 꾸미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기도로 해서 집 나간 아이들이 뉘우치고 돌아오고, 외도(外道), 도박, 담배, 술도 끊고 “착한” 남편이 되어 가정으로 복귀도 한다. "사악한 사람들"의 심리까지 완전히 바꿔놓고 억울한 소송사건이 바로잡아지기도 한다. 현저히 눈앞에 나타나는 사실이다보니까 아무도 이를 반박하지 못한다. 당사자들은 우선 고통 받고 있던 현실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가서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사탄의 일이요' 해보아야 먹혀 들지 않는다.

요한도 그 서신에서 "적 그리스도의 영이 올 것이라 했지만 이미 와 있다"고 했다. 와서 이미 활동 중임을 확인하면서 그들을 식별하는 방법으로서 '기적' 여부/유무를 들먹이지 않았다. 기적을 행하면 하나님의 역사요 그런 기적이 없으면 악령이라고 한다면 식별이 아주 쉬웠으리라. 그러나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해보라' 하면서 그런 겉모양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말씀에 비추어 보아 어긋나는지의 여부만을 가려 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거짓 선지자, 거짓 사도들도 각종 놀라운 기적을 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고로 어떤 기적을 보고서 그 때문에 믿고 안믿고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또한 지식으로[물론 구원 얻는 지식이야말로 최고도의 지식이기는 하나 여기서는 소위 ‘첨단 과학 지식’이라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달려들지 말 것이니 그렇게 하면 사탄의 함정에 빠지게 되어 있다. 에데낙원에서 사탄은 인간에게 지식이 많은 양 하여 그 권위를 세우는 척하며 접근하였고 여자는 바로 거기에 넘어간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 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인데[잠 1:7] 근본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붙들고 엉뚱한 것에다 생뚱맞게 한눈을 파니 사고가 아니 날 수가 없다. 뿌리가 통해 있는 밑둥치를 항상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시험하는 자 사탄의 지식에는 우리가 필적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세세한 것은 지엽적인 것이므로 버리고, 우리는 그 전체를 파악하고 그 결론부터 말하는 것이니, 모든 지식의 꼭대기[頂點]에 [성령으로] 이미 서서 아래를 조망(眺望)하고 있는 것이 성경인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의 권위는, 역설적이라 말할지 모르나 처음부터 하나님의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시종 죽음의 고난으로 일관한다는 데에 있다. 주님 친히 그렇게 가르치셨고 이 분명한 가르치심을 따라 사도들이 그렇게 초대교회를 가르쳐 본을 보였고 실상 그러함을 하나님 친히 싫증(實證)해 보이신 것이다. 즉 교회가 시작되자마자 교회의 기둥 같은 야고보 사도가 무참히 칼에 맞아 쓰러지고 교회의 초석 같은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돌무더기 속에서 순사(殉死)하는 비참한 꼴[세상이 보기에는]을 당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성경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진실 그대로임을 자체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면 무릇 거짓말이라는 것은 그 한결같은 특성이 당장 유익이 돌아오는 현재에 있지 미래를 내다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거짓말은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져 탄로가 나게 되어 있는 성질의 것이기에 그러하다. 고로 거짓말은 항상 미래를 두려워하는 법이라 미래에 어쩌고저쩌고 하여 기약하는 법이 없다. 당장 효과를 보려 하기 때문이다.

즉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당장 일을 저질러놓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거짓과 속임수의 기대(期待)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반대로 현재 그리고 미래[이 세상에서의]를 통해 한결같은 고난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의 고난을 강조하는 마당에 거짓과 속임수가 무슨 필요가 있기에 거짓말로 꾸며서 말하겠는가.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믿을 사람이 거의 없는데 거짓말을 한다고 믿을 리는 없는 것이다.

고로 모름지기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그 무엇이든 일단 거짓이라 속임수라 단정해버리고 접어두는 것이 지혜다. 그 진상은 나중에 반드시 밝혀지게 되어 있다. 현재 밝힐 수 없다고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당장에는 그것을 밝힐 수가 없기 때문에 첫 사람 아담은 그렇게 범죄해서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당장 밝힐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가 된다. 당장 밝혀진다면야 거짓과 속임수 자체가 세상에 존재하지를 않을 것이다.

이 경우 ‘어린 아이’의 단순함이 ‘어른’의 ‘힘 자랑’을 이기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사탄의] 시험하는 일이 많은 세상인 만큼 그래서도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단정하여 말씀하셨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이것저것에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지엽적인 것에 일일이 대응하지 말 것이다. 즉 바람에 쉴 새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잎사귀 및 잔 가지들과 요지부동의 밑동의 차이다. 따라서 그런 ‘바람에 일렁이는 것’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 그런 것에 일일이 반응하다보면 나 자신까지도 일렁이게 마련이다. 확고부동한 것만 붙잡고 있으면 나 자신도 요동치 않는다.

참고로 말해 둘 것은,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것을 두고 그것을 어찌 악령의 일이라 할 수 있느냐?' 하는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 냐 하는 것이다. 즉 선악 개념을 분명히 해두는 일이 중요하다. 그보다도 사탄이 왜 사탄인지 그것부터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로 모셔 이와 같이 머리의 지시를 받드는 의미에서 머리를 위해서만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는[고후 5:15] 일체의 것이 악이다. 이것이 죄의 정체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위해서' 얼마든지 "선"을 부르짖고 "정의"를 편들 수 있다. 그러나 그 구극적인 목적이 자기 자신일 때 그것은 선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고 성경은 한 마디로 그런 것을 거짓, 속임수라 부르고 악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은 얼마든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다고 성경은 밝힌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고 사랑하라 할 수도 있다. 단 그것이 구원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일 때다.

구원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도록만 하면[마 7:21] 충분하기 때문이다. 머리로서의 하나님[모름지기 삶이라는 것은 머리와 몸의 관계로 된 한 몸 체제에 있으므로]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선을 말하고 정의를 말하고 선행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속임수요 악이요 죄인 것이다. 앞으로 나타날 악한 자 곧 적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고차원의 '도덕적인 존재'로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악한 자라고 무슨 폭군이나 정신 잃은 미치광이나 살인마 정도로 착각하면 큰 오해다. 그리스도와 방불함을 목적하므로 능력은 물론 도덕성까지 갖춘 인물로서 반드시 등장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적(敵 ) 그리스도'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빼고는 거의 차이가 없어 보이는 어느 면으로 보면(즉 세상의 안목으로는) 월등하기까지 한 그런 존재로 스스로를 부각시키도록 되어 있다.

이천 년 전이기에 직접 볼 기회가 없던 [우리 자신 그리스도께 관해] 바로 그런 능력, 그리스도를 직접 보는 듯한 그런 착각에 빠질 정도의 기적으로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오직 문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말하자면 자기가 세상의 구세주라고 하는 그 차이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는 믿음의 기반이 닦여져 있지 않은 모든 '기독교인'이 휩쓸리게 될 것은 당연하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경고대로 '진리를 알되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살후 2:10] 즉 진리를 순종하지 않는,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히 1:9]이 없는 모든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게 된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이 다 이 ‘속이는 자’를 경배하게 되어 있다. 요컨대, 그들이 말하는 바 선과 행복이 영원세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어차피 죽음의 세계로서 존속할 수 없는 무대요 그러한 운명인데 이 한 때의 행복과 영원한 삶의 행복을 맞바꾸는 어리석음에 이 함정의 특성이 있다.

사탄은 바로 그런 술책을 쓰는 것이다. 병도 낫고 잘 살고 문제 해결도 하고 행복을 느끼고 ... 그러나 그것뿐이다. 이 세상은 죽음의 세계이기에 갖가지 고통이 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 이에 대한 해결이 진정한 문제 해결이 아닌 것이다. 생명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죽음과 고통 이면에 있는 원인 분석을 해야 근치(根治)가 되는 것이지 미봉책에 불과한 우선 눈앞의 고통을 면하려다가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 가니 영원한 고통을 자초하는 꼴이다.

모든 일에 핵심이 되는 것은 인간 이성(理性)이다. 이것이 짐승이 아니고 사람된 소이(所以)다. 이 이성적 판단으로 창조주의 어떤 기적`적인 현상을 목도하지 않더라도 창조주의 실존을 능히 감지(感知)함이다. 논리적으로 약간만 보충해 주면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혼의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비록 앓던 이를 고치는 것처럼 세상 종교에서 현실 문제를 속 시원히 해결한 다음이라도 영혼 구원이라는 대명제 앞에 이르러 논리적인 판단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적 그리스도가 제아무리 그럴싸한 인생 구원의 방책을 내세워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인생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상적인 것은 없음을 아는 그 지식의 바탕, 그 확신의 토대 위에 서서 진리를 행하는 자는 꾀임에 빠질 수가 없다. 이런 바른 논리를 따라 합리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들은 그들의 이성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이성이 사탄에게 속박되어 제대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후 4:4].

이런 사탄의 악랄한 구속력(拘束力)을 해제, 해체시킬 수 있는 것이 그러므로 말씀 전달과 더불어 기도이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내가 이루리라'고 주님이 특별히 약속하신 것을 보아서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고 성도들의 합심 기도가 막강한 힘을 발휘함을 알 수 있다. 1900년대 초 한국 교회 부흥도 주한 선교사들의 끈질긴 합심기도의 결실이었다. 우리가 외국에 나아가 어떻게 복음을 전달할 것인지 그 지름길을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 피조물을 위하심이요 공평공정하게 모든 피조물의 안녕과 행복을 위하심이요 이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으시다. 모든 말씀이 이에서 한 치도 어긋나심이 없다. 악인을 멸하시고 악한 세상을 종결시키심도 당연히 이런 차원에서다. 구원의 복음 전파가 종결되자마자 이 세상을 끝내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세상은 단지 구원 받아야 마땅한 사람 다 구원되고 그리하여 더 이상 구원될 사람이 없을 때 지체없이 종결된다.

그리고 이 때는 인생 구원의 복된 말씀이 세상 끝까지 증거되기 위해 다 전파되어 있는 무렵이다[마 24:14].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온 천하에 전파하는 것으로서 여생을 보내는 것 외에 달리 있을 수 없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이 외의 일이 양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죽어가는, 멸망해 가는 사람을 두고 무엇에다 신경을 쓰겠는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그 사람부터 살려놓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성경이 그 말씀인 줄을 안다면 결론은 이것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악이 창궐하는 세상을 그냥 두실 리가 만무한 것이다. 내일이라도 구원의 복음만 완전히 전파되면 내일이 바로 세상[지구가 아닌] 종말의 날인 것이다. 이미 적 그리스도는 출현하기로 만반이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바로 그 때가 당도한 것임이 분명하다.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필연적으로 이내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 그리스도가 세상을 완전 제압하기 전에 계시록에 예언한 대로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의 "두 증인"들이 활약하게 되어 있다[계 11:3-7].

다시 말해 최종적으로 복음 전파가 그 완전한 의미를 따라 온 세상에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무릇 구원 받았다고 스스로 믿는 이들은 모름지기 이 복음 전달의 일에 일로 매진할 일이다.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리하여 목숨을 바칠 일이다. 그 어떤 고난도 수용하여 감내한다는 각오로 임할 일이다. 사람 사는 도리를 알리는 일이다. 사람으로서 사람 사는 도리를 아는 것이 가장 기본되는 지식인즉 이를 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머리와 몸의 관계, 영혼과 육체의 관계가 이 삶의 도리의 근간(根幹)이요 핵심인 것이다.

이 하나 의식, 한 몸 의식, 공동체 의식이 바로 올바른 것이요 선한 것이요 정의이니 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악이요 죄요 불의요 불법이다. 삶의 법질서를 어기는 것이다. 이공 순신으로 인하여 이 참된 인간 삶의 도리의 그 효용성이 잘 입증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예사로 여기고 보통으로 생각하던 자기중심의 폐해를 원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니 이런 자기중심의 악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의 선과 의를 따르라는 것이 우리의 외침이다.

§ 둘이 아닌 하나


둘이면서도 하나라는 것은 말 그대로 둘이지만 실제 모습, 나타난 것은 하나로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말함이다.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고 있는 나는 모습은 옛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지만 실제는 나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니 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역시 홀로 그리스도이시지만 나와 불가분이어서 바로 나의 모습이신 것이다. 나를 떼어놓고는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없음이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요 그리스도와 아버지께서 하나이시고 나와 하나님께서 하나이실 수는 없다. 그러면 나와 하나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나와는 하나가 되시지 않고 아들[그리스도]과 하나이신 아버지와는 보다 내게 더 가까운 사이가 아니시냐 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나는 사람이니까 하나님과 하나가 됨은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것은 그리스도 친히 사람이 되셨고 사람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인 나와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지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서 하나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서 나와 하나이시므로 비록 내가 아버지와 하나가 아니라 해도 '관계'나 '의미'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인 것처럼 똑같이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면 명백히 아버지이시고 아들의 모습으로 보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실체와 형상으로 항상 계심을 명심할 일이다. 아들의 아버지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이신 것이다[고후 4:4].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주체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이시므로 형상이 주체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표현은 아버지께서 중심이고 핵심이다. 그러나 호칭할[부를] 때에는 아버지라 보면 아버지 그대로이시고 주님[그리스도]이라 하면 바로 주님이시다.

성경에서 이렇게 호칭에서는 아무 제약 없이 자유스럽게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위일체 원리의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갑으로 보면 갑이고 을이라 보면 을이기는 하나 결코 갑이나 을로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갑과 을 둘이 하나되어 존재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도외시되시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라 부른다 해서 그리스도께서 외면당하시는 것도 아니다. 둘이 하나로 계시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의미다.

그러므로 그렇게 알고 어느 쪽으로든 부르면 되는 것이고 이 때문에 혼돈이나 혼동을 느낄 필요는 없다. 물론 이 자연계보다 원천적으로 모든 것이 출중하고 월등한 영계인 천국에서야 보다 훨씬 나은 그 무엇이 분명 있겠지만, 우리가 이 자연계에 속해 있는 이상, 이 정도이면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하시는 것도 "아버지께서 들으신다"[마 6:6/7:11/18:19/]고도 하셨고 "내가 시행할 것"[요 14:13,14]이라고도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요 5:21]도 같은 의미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일하는 것을 의미함이다. 일한다 할 때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만 전력을 다한다 함과 같이[행 6:4] 우리 역시 그렇게 함이다. 이는 사도들만의 일이 아니냐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사도들은 오직 직접 가르치심을 받고 보고 들은 것을 전해야 하는 증인으로서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당시는 믿는 이들 중에는 그 열두 사도 외에는 없다시피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런 구별이 없다. 사도가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모든 언행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터라 우리들 자신이 바로 그런 본을 따라 행하게 되어 있음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대중 앞에서 가르치든 개인 전도를 통해서 하든 말씀하시는 이는 나와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주님이시므로 내 편에서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즉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전도를 받는 이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는"[:1,5] 노력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때문에 베드로 역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5] 한 것이다. "대답할 것을 미리 염려하지 않기로 하라"[눅 12:11/마 10:19/막 13:11] 명하시지 않았느냐 할 것이 없는 것은, 여기서 베드로가 의미한 것은 그 앞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벧전 3:15] 한 대로 성령 친히 말씀하시게 되어 있다는 그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임이다.

바울의 말대로 하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 함과 같고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전 2:3] 함과 같은 것이다. 단지 말의 내용만은 성령께 완전 일임하고 그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라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막 16:20/고전 3:9/고후 6:1] 주님을 의식하는 것과[이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 말씀의 내용을 어떻게 할 것인지 미리 생각해 두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렇게 주님 의식하는 것을 두고 흔히 말하기를 "기도 중에 한다" 함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가 구원 받아 하늘로 들어올려지지 않고 이 세상에 이 육체 그대로 남아 있음은 고난 받으시는[영광 중에 계신 주님이 아니라 그 몸된 교회의 머리로서 그 교회의 고난에 동참하시는]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면서[골 1:24] 나를 보내신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함인 것이다[요 4:34].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친히 아들과 함께 일하신 것처럼[5:17] 나를 보내신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계셔 함께 일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이를 가리켜 우리가 "수고를 그치고 안식에 들어간다"[계 14:13/히 4:10] 한 것이니, 이 세상에 우리가 머물러 있음은 수고하기 위함이요 일하기 위함이다. 일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도 놀면서 일하는 자는 없다. 그래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로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 9:62] 하셨다. 즉 "구원을 이루지"[빌 2:12] 못함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일이냐,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 9:60] 하신 대로 모두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죽음의 세상에서 사람 살리는 일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는 이 세상을 직시(直視)하고 정확하게 바로 보는 것이다. 그냥 덮어놓고 영생하자는 것도 아니고 살았으니 삶의 낙을 누리자는 것도 아니다. 인과율에서'현재의 '결과'를 내게 한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는 정확한 정보를 얻음이다. 나폴레옹은 정확한 정보를 그 부하들에게 요구했다. 그렇지 않고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따르겠습니다" 했을 때, "그래, 나를 따르라" 하시지 않았다.

왜냐면 정확한 정보 없이는 전투에 임할 수 없는 까닭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8] 하셨다. 이것이 정확한 정보다. 정확한 정보부터 소화해낼 수 있는가를 따지신 것이다. 이는 망대를 세우고자 할 때 그 예산부터 정확하게 셈해보라고 하신 것과 같다[눅 14:28]. 전쟁에 임하는 자가 승리할 가능성 여부부터 따지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32]. 아무리 결사각오의 항전 태세가 되어 있어도 적(敵)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인류의 새 대표이시다. 이전의 대표이던 아담은 범죄로 죽은 자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창조된 인간이 공중의 새나 여우 같은 작은 들짐승만도 못하게 이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현주소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 마지막 아담이 하신 대로 따르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 자체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사람되어 있는 것이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비록 죄인으로서의 죽은 자이지만] 육체로 인함인 것과 같다.

사람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은 생기자마자 죽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만드신 것이므로 바로 그렇게 영생하지 못하는데 사람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영생하지 못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실진대 우리도 구원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그렇게 우리에게 본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는데도 머리 둘 곳 하나 없는 인간이 이런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 자체부터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우리 역시 머리 둘 곳이 없는 세상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따라 행동 통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을 따라서는 죽은 자요, 마지막 아담을 따라야만 산 자이다. 다시 출생했고[요 3:3] 새로 창조를 받은[고후 5:17] 자들이다. 더 다시는 죽은 자가 아니라 이제는 산 자가 되었으면 마땅히 산 자로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산 자로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위에서 말씀하신 대로의 자세를 취함이다. 죽은 자와 산 자가 한데 섞일 수 없다. 그 모습을 함께 할 수가 없음이다. 따라서 죽은 자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으로 여겨지고 비쳐질 때에는 정작 산 자는 죽은 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앞에서는 그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고 오직 소수인 믿는 자들에게만 그 부활하신 것을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세상 앞에 그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나타내셨다면 교회가 핍박을 받을 이유도 없고 세상은 금방 믿는 사람들의 천하가 되었을 것이다. 단 한 사람도 믿지 않을 사람이 없고 복종하지 않을 자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믿음으로써 우리가 구원 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믿음에는 즉 의인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 것"[합 2:4]이라는 선언에는 의인의 고난 따라서 악인의 승승장구(乘勝長驅)라는 함의(含意)가 깃들여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참고 선을 행함"[롬 2:7]이다. "인내로써 결실함"[눅 8:15]이다. 즉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실 것이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다' 하셨다"[히 10:36-38] 함과 같다. 사람의 진가(眞價)를 다루어보기 위해서는 삶의 유혹[세상에서 살고자 하는-요 12:25]과 고난의 연단[징계-히 12:6,7]이 함께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게 우리 속에 거해야 우리 자신에게도 성령의 검[엡 6:17]이 되어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칠 수 있을 뿐 아니라[마 4:4-10] 사람들을 가장 효과 있게 가르칠 수 있으니 그러므로 부지런히 성경을 가까이하여 읽을 일이다. 구원의 도리는 간단 명료하여 어린 아이라도 능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고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기 위하여"[딤후 3:15]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라 했으니 즉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으나 "구원을 이루는"[빌 2:12] 지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여기에 또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 있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지어낸 것이라면 인간 구원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으로 정해놓지 부활을 설정할 이유가 없음이다. 왜냐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부각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만일에 또 그 부활이 우리의 구원과 직결된 것이라면[고전 15:14-18] 그리고 그리스도를 "인자(人子)"라고 하여 사람이심을 강조해놓았으면 사람답게 부활하신 그대로 이 세상에 살아 계시도록 설정해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 구원은 한정시키지 부활까지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거짓말쟁이도 진실처럼 위장하므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것을 결코 말하는 법이 없는 까닭이다. 처음부터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심을 강조하지를 않든지 부활을 설정하여 강조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이다. 또 그렇게 부활하신 것으로 정해놓고 하늘로 오르신[승천] 것으로 설정하여 "하늘이 잠시 그를 받아두어야 한다"[행 3:21] 했고 "만유를 회복할 때까지":21]라고 했으면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설명이 일절 없다.

거짓은 이런 식으로 지어내지 않는 법이다. 자세히 알아듣도록 설명을 하지 않으면 그 거짓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위험을 알고 있으므로 아예 그런 위험을 스스로로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는 그 뜻이다. 진실이기 때문에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어서 오늘날이 성경이 그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유의 회복'을 연결시켜 설명할 수 있는 이가 과연 그 몇이나 되는가.

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든가 아니면 처음부터 사람이 지어낸 하나님, 사람이 지어낸 성경이든가 둘 중 하나인데, 그런 순수한 인간의 조작을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믿어 왔고 세상 종교의 절대 과반수를 이루어 있는 현실이니, 그러면 그런 많은 인간이 그런 거짓말을 믿을 정도로 그토록 어리석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무슨 마력(魔力)에 끌린 듯이 되어 있지 않은가. 타율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런 순수한 인간의 거짓말을 그 정도까지 신봉하고 있으니 감히 인간의 자율로는 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러면 그렇게 거짓말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고 초월적 존재라는 말인가. 그래서 그 마력으로 인생을 이 정도로까지 자기 거짓말을 믿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인가. 마땅히 생각할 만한 기괴한 일이 아닌가. 불교만 제외하고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나 다 구약성경을 믿는다. 단 이슬람교는 신약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고로 또 이런 생각을 할 만하다. 즉 이슬람의 경우, 만약 구약성경만이 진실이라고 할진대 신약성경과 같은 것이 세상에 나타나도록 구약성경의 창조신이 이를 허용하겠는가.

이는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에게도 해당된다. 즉 구약성경에 상치되는 것이 신약성경인데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그런 신약성경과 같은 것을 용납하시겠는가. 반드시 없애 버리거나 처음부터 그런 것이 생기지 않도록 조처하셨을 것이 아닌가. 여기서도 그들의 논리적인 모순이 드러난다. 왜냐면 그런 신약성경이 온 세상을 뒤덮어도 손을 못대는 하나님으로서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이 어찌 전지전능하신 유일신일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 권력을 쥐고 세상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천주교나 일부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일부 개신교라는 것은 개신교를 국교로 정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경우 강제적으로도 모든 국민, 모든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게 하려는 의도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세상 사람들 위에 군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이들 역시 이슬람교나 유대교와 같은 논리적인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무릇 진리는 논리적 모순이라고는 없다. 그런 것이 개재되어 있을 때는 순수하지 못하고 불순하다는 것을 자체 증명하는 것이요 이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국가 권력으로 강제로 믿게 할 필요가 없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실진대 그 부활하신 모습으로 지금까지도 세상에 계시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전인류를 믿게 할 수 있다. 굳이 세상 권력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그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몸을 봄으로써 모든 인생들이 그에게 승복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단들을 피비린내 나는 탄압과 핍박으로 숙청하여 제압할 필요도 없다. 그들 모든 이단들이 부활해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있는 터라 자진해서 이단 사상을 버릴 뿐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생기지도 않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그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 모든 인종들을 교화시킬 수 있는데도 "하늘이 잠시 그를 받아두지" 않으면 안되는지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못한다.

그러니 모순이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세상에서는 언제나 믿는 이들이 소수로 남아 세상 권력화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교회는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만 보아서도 성경은 진실이고 사람이 결코 지어낸 것이 아니고 그들 천주교 및 세상 권력화를 도모하는 일부 개신교가 진리에서 떠나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모순성을 내포하지 않으려면 절대로 세상에서의 권력화를 시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도 이 세상은 과연 성경이 밝히고 있는 대로 악령 사탄이 조종하고 지배하고 있음을 직감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성경에 배치되는 이단사설들이 성행하고 세력화를 이루어 있음이 자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결론이다. 성경의 권위는 이러한 자체적인 증명에 있는 것이다. 구차하게 외부로부터 꾸어다가 자신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가히 하나님의 말씀다우심이라 할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인간 로봇처럼 만드시지 않고 선악간에 그 자율적인 선택을 따라 행동하여 그 영원한 미래를 결정하게 하신 것이 부활의 사실로도 드러나는 것이다. 즉 그렇게 기계적인 존재로 만드시지 않더라도 부활하신 사실만을 온 세상에 나타내시더라도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믿도록 하시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왜냐면 현재의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의 연약함과 구차함에 비하면 신령한 몸은 실로 매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결국 죽음에 이르고 사탄을 위시한 영물들이 영원한 멸망에 운명에 들어서 있는 것과 일치하게 오직 생명의 법질서를 따르는 자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나 그리스도께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6:65] 선언하신 것과 같다. 또 그렇게 그리스도께 나아와 구원을 받아 산 자가 되어도 아담처럼 범죄하면 역시 죽은 자가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순종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행 5:32/롬 1:56:16/16:26/요 3:36/히 4:11/벧전 1:2/고전 2:9/약 2:5/1:12] 선별적으로 구원되기 위해서는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어떤 역경과 고난이 있어도 끝까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히 1:9] 위해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일정 기간 "하늘에 감추어진"[골 3:3,4] 모습으로 계셔야 하는 필연성이 대두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의인은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그런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다 한 대로 회개하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죄를 버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의인[은혜로 구원 받음으로써]으로서의 위치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전에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었으므로 그리고 구원이 불가능한 상태였으므로 죄를 안짓는 일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순종하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죄가 불복종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이전의 대표적 인물로 아브라함 역시 순종은 철저했으나 죄를 안짓는 일은 능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윗도 그런 사례에 속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명실상부하게 순종도 철저하고 죄를 안짓는 일도 충분히 할 수 있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또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 가운데 있어[요 8:32/고후 3:17]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죄에 얽매여[히 2:15] 지내는 그런 때는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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