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5일 토요일

(22)ㅡ끝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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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지금은 새 창조의 때요 이 세상은 그 장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영으로[성령으로] 나는 것 즉 다시 출생하는 것이 그 새 창조입니다. 창조 방법은 아담의 창조와 같습니다. 즉 다시 출생하는 것은 아담이 처음 출생한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되고 그 다음 단계로 영혼이 창조된 것이 아담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차이는 아담은 그렇게 해서 육체로 즉 육으로 난 것이고 우리는 영으로 즉 성령으로 그렇게 출생한다는 것뿐이지 그 순서와 단계는 같은 것입니다.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고 다음에 영계에 속한 영혼의 순서이니 영원히 영생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이 아담으로 치면 육체 격이고, 우리를 영생하게 하시는 것 즉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내게 오시어 나와 둘이 하나되심으로써 영생하게 하시는 것이니 이 성령 곧 성령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친히 내게 아담으로 치면 영혼 격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는 불가분이므로 둘이 하나됨이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과거 "육신"[롬 7:14-8:13]에 사로잡혀 있던 나를 "죄와 사망의 법"[:2]으로부터 해방시켰다 합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또한 "성령으로 산다"[갈 5:25]고 하고 이렇게 사는 것을 "성령으로 행한다"[:25]고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빌 1:21]이라는 뜻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즉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을 말합니다.

나 혼자 즉 과거 육체로 있을 때는 육체가 짐승처럼["짐승처럼"이라는 것은 ①영생하지도 못하고 ②자기중심의 본능으로 삶을 의미] 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아담이 그렇게 살도록 처음에 되어 있었던 상황이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나 아담에게 영혼이 생김으로써 육체는 이제부터는 반드시 영혼에 복종하여 영혼의 지시를 따라 살아 영혼과 육체가 머리와 몸의 관계로 정착되어 살게 된 이치와 같이 나 역시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고후 5:15]이라 함과 같이 된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 친히 내 영혼이 되시어 내가 영원히 살게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을 말함입니다[롬 14:7-9]. 그래서 과거 육체로 살 때와 현재 성령으로 살 때를 대조하여 생명과 죽음의 대립되는 양상임을 가리켜 "성령을 좇아[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니, 육체의 소욕(所欲, 하고 싶은 바)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름으로써 이 둘이 서로 적대 관계가 된다"[갈 5:16] 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된다"[:17] 하고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함은 이러한 육체와 영혼 관계가 나와 그리스도와의 둘이 하나됨의 불가분성이므로 육체는 철저히 영혼의 인도를 따름이 생명입니다. 아담의 육체와 영혼 관계는 그 육체가 물질계에 속한 물질이고 영혼은 영계에 속한 것이므로 물질은 무조건 기계적으로 영혼을 따르게 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나, 현재의 우리 처지는 육체가 바로 나 자신이므로 나는 인격적 존재로서 자유 의지를 행사하고 자유 선택에 의해 결정하여 행동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부단히 주님과 사귀는 가운데 주님께 여쭘으로써 그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목적으로 영원히 사는 그런 관계이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살전 5:17]. 그리고 주님과의 즐거운 사귐 곧 사랑의 사귐 속에서 그러하니 항상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16] 주님과 내가 혼연 일체가 되어 있으니 악한 자가 나를 만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요일 5:18] 모든 일들이 내게 유익[다시 말해 선(善) 즉 좋은 것이 됨]되지 않음이 없는 고로[롬 8:28] 항상 "모든 일에 감사가 충만함"[살전 5:18]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성령으로 사는 것이요 성령으로 행함입니다[갈 5:25]. 다시 말해 다른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내가 영혼과 육체 관계를 이루어 있으니 육체가 영혼에게 절대 복종하고 그 인도와 지시를 따라 육체로서 영혼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게 되는 이치를 말함입니다. 육체와 영혼으로서의 단 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육체와 영혼처럼 가까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 밖에는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으로 말한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가리켜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것들 즉 천하의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하시는 물음을 세 번이라 하신 것이니 이를 스스로에게 다짐하게 하심입니다. 때문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다"[마 10:37-39]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영혼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 따르고 사랑할 만한 것이 또 다시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영혼과 육체[나 자신] 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혼은 육체를 위하고 육체는 영혼을 위하는 둘이 하나되는 관계입니다. 이는 아내 남편 관계에서 아내의 육체는 남편의 것이요 남편의 육체는 아내의 것이 되어 둘이 하나됨 즉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으니 무릇 무엇이든지 둘이 하나되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이상으로 내게 가까운 자리가 없고 사람이 없고 그 어떤 경우라도 그리스도 이상으로 내게 소중한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습은 아버지의 모습이십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영혼으로 모심은 아담이 영혼이 조성되어 영생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 육체가 썩지 아니함을 입게 된 것과 같이 우리 역시 그러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때문에 이 경우 "생명의 부활"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심판의 부활"이 된다 하셨습니다[요 5:29]. 이 사실은 아담이 영혼이 조성되지 않았으면 그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썩어질 수밖에 없음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오늘날의 우리 인생들 역시 썩어지는 육체로 남는 것을 의미함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경우 그 육체가 말 그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였음에 비해 오늘날 우리의 새 창조에서는 우리 자신이 그 육체에 해당하고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친히 나[육체로서의]의 영혼이 되어 계시므로, 이 경우 육체[바로 나 자신]라는 것은 이미 영혼이 있어[나의 영혼이 있으므로] 영적 존재라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로서의 나 자신이 나의 영혼 격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할 때 바로 그 썩어지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영원 멸망인 것입니다.

그런즉 아담이 그 영혼이 조성되어 영생하는 자가 된 것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해 모셔야 영원히 생명에 들어가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영원 멸망에 들어가는 것이 이런 이치 때문입니다. 새 창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는 아담 자신이 신령한 몸이 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결과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의 아담이야 그 육체가 물질이므로 그런 선택을 할 상황이 아니지만 우리의 새 창조에서는 우리 자신이 그 육체에 해당되므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처음부터 신령한 몸으로 있어 영생하는 자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우리처럼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처음 창조되었다면 인간의 육체를 부정(不淨)하다 하실 리가 없습니다[민 9:6/19:11/레 21:11]. 사람을 부정한 것으로 즉 부정한 시체가 되도록 창조하실 아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자연스럽게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데 이를 깨끗하지 못하다 하시니 이는 처음부터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만드셨다고 하는 의미밖에 될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심판의 부활에 해당하는 신령한 몸을 "시체"로 묘사하여,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될 것"[사 66:24]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경우 "시체"라는 것은 "심판의 부활"에 이른 악인들 자신을 가리키므로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져져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마 22:13] 하신 그런 상태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12] 자를 그렇게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던진다 하신 것입니다.

이는 부르심을 받았으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이들 즉 처음의 회개할 당시의 약속대로 살지 않고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고후 5:15] 있음의 결괴인 것입니다[마 7:21/25:45]. 다시 말해 "무익한 종"[마 25:30]의 비참한 결말입니다. 이들은 모두 한 때 구원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즉 산 자가 되는 은혜를 입었으나 그 스스로 산 자로서의 소임과 책무를 다하지 못한['못한' 것이 아니라 '아니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나 아담처럼 된 것입니다.

왜냐면 같은 영물(靈物)들이라도 거룩한 천사들은 그 본분을 다했으므로 이들 악령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거룩한 천사들이 이들 악령들을 단죄(斷罪)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定罪)할 것이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도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것이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마 12:41,42] 하심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새 창조의 때에 위치하여 말하자면 아담으로 치면 에덴낙원에 들어가가기 전의 상태로서 잠시 머무는 곳일 뿐입니다. 아담은 에덴낙원에 들어가서야 진정 사는 맛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일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새 창조의 경우에서는 우리 자신이 말하자면 당시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던 것처럼[창 1:26-2:10]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아버지[그리스도로 나타나신]와 함께 일하고[고전 3:9/고후 6:1]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들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는 새 창조의 대상이나 그 스스로 악을 좋아하고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요 3:18-20] 불의를 좋아하여[살후 2:12] 악령들처럼 영원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을 스스로 취할 자가 없지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경고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아담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경고를 듣지 않은 결과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귀 담아 듣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가 대기하고 있다는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결과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랑하고[요일 2:15]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요 12:25] 이들은 [비록 하나님을 믿고 구원의 말씀을 따른다고 해도] 아담이 당시 창조될 때 에덴낙원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만일 거부할 수 있었다고 가정할 경우] 세상에 남아 있기를 더 선택하였다면 바로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에덴낙원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 육체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대로 남고 신령한 몸이 되지 않으므로 영생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날 믿지 않고 믿어도 복종하지 않는 이들이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아담은 당시 인간이라고는 자기 혼자뿐이었지만, 우리는 영혼 격으로 내 안에 모시는 그리스도 친히 나를 세상에 보내시는[요 20:21] 의미로 나를 구원하신 것이고, 따라서 앞의 설명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으로써 이루어진 구원이므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서 당시[아담 창조 시] 일하시던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때인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이 일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것을 거부함이요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거부함이요 이는 정확하게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의 구원됨을 거부하는 것으로 당연히 해석되는 것입니다.

고로 이 세상에서의 모든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일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저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이니 곧 시험하는 자의 시험 수단으로서의 함정, 덫, 그물, 올무 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얽매이고 자유롭지 못한 이들의 불행이야말로 엄청난 어리석음입니다. 바울이 내게 가장 고상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기타는 모두 분뇨, 분토(糞土)처럼 여긴다고[빌 3:7,8] 한 것이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그리스도는 아버지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아버지를 나타내신 것이므로] 그들의 그런 어리석은 결과로 인한 비참한 결과를 앞 두시고 눈물을 흘리시지 않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단지 불쌍하다고 해서 구원하실 수 없는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흐르는 눈물이셨습니다. 이러한 대목도 성경이 진실 그대로의 기록임을 자체 증명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쟁이는 이런 거짓말은 지어내지도 못하거니와 지어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도 지어내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고 가정해놓으면 그것으로 전부이고 만족스러운 것이지 원리원칙대로 행하시는 것이라는 둥 시시콜콜 따지는 그런 거짓말쟁이는 천하에 없습니다. 원리원칙대로 한다는 것은 거짓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 거짓말을 하면서 이런 쓸모없는 말은 하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이시니까 모든 것이 가능하시고 다 하실 수 있다고 인식함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리원칙대로 하는 것이 모든 법질서 확립의 기초이므로 원리원칙을 어기면서 움직이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께는 유일하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한번 작정하신 것은 변경하심이 없다. 그리고 거짓말을 아니하신다는 이 두 가지를 하나님되심의 특징으로 성경은 들고 있습니다[히 6:17,18]. 지금까지 이런 원리원칙주의로 나가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위해 친히 사람이 되시고 죽음을 맛보시기까지 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특성을 잘 아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인지라 지금까지도 그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해서 자기의 반역 행위를 멈추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때를 정확히 읽을 일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의 좌표(座標)를 정확히 인식할 일입니다. 새 창조의 때요, 에덴낙원에 들어갈 채비를 했던 첫 사람 아담의 창조 당시 상황의 재연(再演)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고로 이 새 창조에 해당되는 사람은 죄 문제를 해결한 이들에 한정되는 것이 됨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정확히 정의하기를 "자기 백성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그릇되게 알고 있는 대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영생을 주시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신 것입니다. 만물 만상의 만유가 이 인과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죄 때문에 생명을 잃고 죽음이 왔으니 이제 다시 생명으로 들어가자면 마땅히 이 죄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 문제라는 것은 죄 지은 결과로서의 죽음을 척결하는 것만 아니라 죄를 불가항력으로 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는 모든 장애를 말끔 청소해내고 제거하는 일도 당연히 함께 포함됩니다. 이 장애는 처음부터 있어 아담을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의 결과 죽음의 이 육체[자연계에 속한]가 되면서 생긴 것인데 무시 못할 엄연한 현실이 되어 있으므로 이 역시 함께 풀어야 할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자, 복종하는 자, 그리고 복종은 그냥 고분고분 말이나 잘 듣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됨의 이치에서  몸과 머리 관계를 이루어 몸도 머리도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와 상대를 이루어 있는 몸 또는 머리를 위해서만 오로지 사는 바로 그 생명의 법질서를 준수함을 가리키는 것이니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주시도록 되어 있는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복종할 의지도 없는 예루살렘[만 아니라 모든 믿지 않는 인생 군상들을 가리키는 의미라고 해도 하자가 없는]을 앞에 놓으시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슬퍼하셔도 그들을 구원하실 수는 없는 것이니 만일 그렇게 하실 요량이시라면 처음부터 아담을 죽지 않게 하시면 되고 평형을 이루도록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 역시 멸망에 처하시지 않으면 될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에덴낙원에서의 살인극, 이 지구상에서의 첫 살인극[가인이 아베벨을 죽인]이 여전히 되풀이될 것이니 이를 용납하신다면 창조의 목적과 의도가 수포화하는 것이므로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 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죄 문제 척결에 호응하여 순응하지 않은 이마다 마지막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만 범죄하지 않았다면 이미 사람들이나 영물들이나 선과 악으로 구별되어 이루어져 있을 마지막 심판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직도 선과 악으로 완전 구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악령들의 심판 역시 지금까지 유보되어 왔을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신 노릇을 하고 지배하고 있지만 곧 이 임시적인 기간은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세상은 이미 설명한 대로 악인들을 그 악 그대로 붙잡아 두기 위한 올무 구실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 상품이 진열되어 있어야[존 번얀이 지은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에서의 세상 상품 그리고 계시록에서의 상품들-계 18:11-17] 그런 것에 마음이 빼앗겨 악을 그대로 자행할 수 있어 덫에 걸리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덫에 걸리게 한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악을 좋아하는 악인들이 의인으로 위장하여 생명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한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회개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인들 중에서도 얼마든지 회개함으로써 영생에 들어갈 수 있고 역시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인들 중에서도 얼마든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악을 행함으로써[자기중심이 되어 자기 자신을 위해 살게 됨으로써] 악인들로서 재편성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모든 시간이 필요하므로 바로 그 시간을 이 세상은 충분히 제공해 주는 그런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우리가 사람의 육체를 물려받는 것이 되어 인간으로 태어났은즉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그 영[성령]을 물려받아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또한 다시 출생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3:3]. 이렇게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와 같이 되므로 이를 또한 성령으로 출생함이라 하셨습니다[:8].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 됩니다.

단 지금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이 되어 있으니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임하시는 사실이 바로 내가 그렇게 내 육체 안에 "새 사람"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이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영원히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인 나와 하나가 되시기 위함이므로 그래서 '제2의 나', '또 하나의 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그 움직이시는 모든 것이 우리 각자가 하는 것처럼 됩니다.

때문에 내게 성령으로 임하여 오심은 이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시어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현재 앉아 계심과 동시에 그 영[성령]으로는 내게 임하여 오시니 나 역시 이중(二重)의 의미가 되어, 영으로는 주님[육체로 계시는]과 함께[엡 2:6]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고[왜냐면 주님의 영이 나의 영과 더불어 함께 계시므로-롬 8:16] 육체로는 주님의 영과 함께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몸으로 하늘에 있음과 동시에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똑같은 말의 되풀이지만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리스도 홀로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습이시라는 것은 내가 그렇게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친히 내 영혼처럼 되어 그 육체로서의 나 자신과 하나로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심도 나와 더불어 바로 나의 모습으로 오심이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도 나의 모습으로 계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본과 근본에 충실하여 원리원칙대로만 나가는 것을 핵[core]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로 여기에는 예외도 없고 편법(便法,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도 없으니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소위 "쉬운 불교"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인이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이치로 되어 있는 것이 삶의 도리 곧 법질서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한 몸 체제에서 몸과 머리 관계이니 몸은 머리를, 머리는 몸을 위함으로써 결코 그 어느 똑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본질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지엽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다 포용합니다. 오직 근본적인 것에 관한 한 절대로 타협이나 양보나 이른바 "봐 주기"가 없습니다. 그 본질이 무엇이냐, 역시 머리와 몸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다"[롬 14:7-9] 한 그대로입니다.

머리와 몸, 주인과 종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 관계, 사랑으로 둘이 하나되는 관계이니 이것이 만유(萬有) 가운데 스며 있고 녹여져 있어 형체를 이루고 있음이니 이름하여 '삼위일체의 원리'라 하고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 '3운법칙'인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만들었으니 그 만든 것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것입니다. 의당히 나의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존재하게 된 근본이 내가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아주 간단한 이치가, 바로 앞에서 지적한 그 기본이고 근본인 것입니다.

불교는 인과론을 강조하면서도 항상 원인은 무시하고 결과만을 중시하여 그 이상으로는 일부러 보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다는 것은 만유의 제1원인이신 창조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런데 만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 것은 없으니 이는 나 자신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나갑니다. 나 자신도 내 마음대로 못하니 "내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양면성의 원리[짝의 원리 곧 정확히 표현해서 삼위일체의 법칙]를 완전히 무시하고 들어가니 해결점을 만년, 백만 년이 흘러간들 찾을 리가 없습니다. 만유를 모두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예 그 쪽으로는 눈을 일부러 돌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몸의 체제가 되면 모두 내 것이 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알려고 눈을 돌리려 하지 않으니 보려 하지 않고 보지 못하는데 알 턱이 없습니다.

내 스스로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그들 스스로 그 자신을 내게 고스란히 갖다 바치면서 "당신 마음대로 쓰십시오" 하는 데에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한 몸 관계에서 머리까지 그렇게 나오는데 몸의 다른 지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단 이런 관계에서는 머리가 있어야 하고 그러므로 몸도 머리도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는 일절 무엇을 하거나 욕심 내어서는 안된다는 유일한 조건이 붙습니다.

이 머리와 몸 관계가 애초 어떻게 해서 생겨났느냐 하면 머리가 몸이 되는 여러 지체들을 존재하게 했기 때문에 즉 만들어 내었기에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즉 원인이 있어 이런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은, 엉뚱한 방법 즉 위에서 말한 한 몸[머리와 몸으로 구성된] 관계가 아닌 도리어 그런 한 몸 관계가 아닌 '나 홀로' 주의에서 즉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순리일 수가 없으니 따라서 그런 무리가 없습니다.

무리한 것만을 내처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애초부터 말도 되지 않는 것이기에 가닥이 풀려질 리가 없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만드신 만물을 어버이 사랑으로[인간 부모의 자식 사랑과 동물의 새끼 돌봄이 바로 이 조물주의 사랑을 나타내는 그 증거인 것] 돌보셔서 한 몸 관계를 형성하여 그 머리가 친히 되어 계시는데 이를 부정하니 될 만한 일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셨으니 사실 그대로를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공연히 엉뚱한 생각을 하고 그래서 되지도 않는 말만 하고 앉았으니 말이 말을 만들어 도저히 풀 수 없는 뒤엉킨 실타래 같이 꼬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시되 이 한 몸 체제를 유지하시기 위해 영원히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는 머리의 위치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우리 위한 십자가 죽으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본을 보여 줬으니 너희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딱 그 한 마디 말씀만 하신 것입니다. 본으로 보여 주셨으니까 사실상 더 이상 긴 설명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즉 자기 부인입니다. 도무지 자기를 위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시면 자기를 우리 각자를 위해 그렇게 버리시고 주실 리가[갈 2:20]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하고 함께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 내 이웃들을 위하면 그것으로 그저 그만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의 최고도의 지혜인 것입니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살필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근본이고 기본입니다. 이것만 확실하면 기타 소소한 지엽적인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상과 같은 말을 한 것도[롬 14:7-9] 어떤 이는 한 날을 중히 여기고 어떤 이는 모든 날을 똑같게 여기는 등 견해 차이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분명 어느 한 쪽은 잘못 판단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지지 말고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것만 바로 하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 바로 우리 중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으니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만을 확실히 하라고 한 것입니다[고후 5:15].

왜냐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판단으로 우리를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같은 방법으로 하면 아무 문제가 생길 것이 없습니다. 큰 가닥만 잡아놓으면 나머지는 절로 풀려지게 마련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롬 14:9/고후 5:15]. 그저 영생만 거저 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 이런 삶의 도리를 따라 살고자 작정하는 이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거저 주시는 영생입니다.

왜냐면 처음부터 인간은 이런 생명을 누렸으나 이런 삶의 법도대로 살지 않고 머리의 말씀을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초한 죽음의 불행이기에 이제 생명을 다시 주실 때에는 당연히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선결 요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이고 믿지 않으면 구원이 되지 않는 것이니 믿음에는 반드시 회개가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행 2:38]. 세상에 허다한 유혹과 위협이 있지만 이런 자율성의 자기 부인을 가로막기 위한 함정들이요 덫인 것입니다.

자유 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이런 자율성으로 움직이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 몸 체제의 삶에서 이탈하여 대중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나가려는 것이 악을 행함이고 불의를 좋아하는 것인데 이렇게 생명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가든 아니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대로 나가든 자기 스스로 정하는 것이니 곧 자율적인 판단에 의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자율성에 영향을 주려는 것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즉 자기중심으로 뭉쳐진 세상의 각종 회유나 협박, 탄압인 것입니다.

시험 무대로서의 이 세상에 악한 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하는 자가 되어 있는 것은 이와 같이 자율성의 인간을 타율적으로 움직이게 하여 아무쪼록 자기중심으로 나가도록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율적이라 하면 긍정적인 의미에서 남이 시키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좋아하기 때문에 자진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선악 개념을 떠나 무조건 자유 의지를 따라 스스로 선택해서 행하는 것을 자율성이라 이름 붙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목적은 올바른 방향 즉 자기 부인으로 나가려는 이들을 위협이나 회유책을 통해 자기중심의 인간 유형으로 스스로 전환하도록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해도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강압이나 간섭에 의해 피동적으로 소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무의미함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측면에서도 의인은 갖가지로 불이익을 받고 모진 핍박과 고난으로 일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평안하며 형통하게 되어 있음은 당연합니다. 이 모두 영물들을 악하고 선한 성향을 따라 갈라내었듯이 인생들을 선악을 따라 영원히 구별하기 위한 임시 방편으로서의 조처가 이 세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요 12:25]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악인으로 분류시키고 그런 범주에 자신을 가두어 두는 위험천만의 일이 됩니다.

때문에 이 세상은 절대로 위로[고난 중에 있는 현재의 인생들에게 그 고난을 영구적으로 끝내게 하고 오직 삶의 낙만을 느끼도록 해 주시는] 받는 그런 곳이 아님을 밝히시고 그런 위로를 극력 회피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눅 6:24,25/16:25]. 때를 따라야 하고 제 때에 이루어지는 순리에 순응해야 합니다. 때가 아닌 때에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자멸행위가 됩니다. 무리로 억지로 하는 것은 모두 자기중심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가 아니라 함께 고통을 당하는 때인 것입니다. 산고(産苦)의 진통(陣痛)의 시간입니다[롬 8:22]. 계시록에서 진통 중의 여인을 묘사했는데[계 12:2] 곧 오늘날 이 세상에서의 교회의 그림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함으로써 욕심 내어 어떤 낙을 추구하는 것은 엄격히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응보[reward]를 바람이라"[히 11:24-26] 함과 같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는 그가 주도한 것이나 십자가상에서 내려 오시기만을 고대한 것입니다. 사람만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면 그것은 고통을 면하시려는 자기중심이 되시므로 그럴 경우 애초부터 자기중심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역시 이제는 멸망의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구실 또는 근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으니[히 5:8,9], 이는 처음부터 복종하지 않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대한 확고한 단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을 선으로 이김이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역시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황당한 생각을 품음으로써 고난을 기피할 때 자기중심이 되어 그만큼 구원 얻는 자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을 잘하셨으나 그 몸된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숫자가 또한 제대로 채워져야 하는 것이어서 여기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최후의 기대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고난을 통해 아버지께 대한 순종을 배우신 것처럼 이와 같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에 한해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9].

이성적인 판단으로 오직 옳으니까 그 올바른 대로 행하는 것을 하나님은 보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그에 대한 포상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 임할 엄중한 조처를 미리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나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음에 관련된 것이라 현재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코 앞의 유, 불리(有不利)를 따져 거기에 영향을 받을 때 자기중심이 되는 것이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지는 것이 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에서 그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어떠한 위협과 유혹에도 자기중심으로 나가지 않고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처럼 한사코 "의[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이니 곧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를 사랑하고 불법[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을 미워해야"[1:9]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천사들처럼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든 타율이 아니고 그 반대로 자율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는 갖은 고난과 핍박과 역경 중에서도 그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 세상의 의미는 장차 본격적으로 전개될 생과 사로 가름되는 대립되는 세계에서 그 영원한 각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생(前生)으로서의 의미뿐이라는 것입니다. "전생"이라는 것은 불교 용어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이고 성경에는 그런 표현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하기야 이 세상을 삶이라 보지 않고 "죽은 자"들의 죽음의 세계로 인정하므로 삶이라고 하기에는 어느 정도 어폐가 있어 성경에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요즘 많이 사용되고 있어 낯설지는 않는 용어이므로 이 세상의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데에는 적당하다고 생각되어 말해보는 것입니다.

불교 용어로서의 전생은 소위 그들이 말하는 "윤회"에서 내생, 금생, 전생을 말할 때 쓰이는 것입니다. 그런 유전(流轉). 전생(轉生)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혹 네피림에게나 해당될 수 있을지 몰라도 구원 대상으로서의 아담의 후예들에게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전생은 삼위일체 원리에서, 대립되는 두 세계를 말합니다. 즉 금생(今生이 전생이니, 금생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금생에서 각자가 스스로 정한 자기 운명의 결과가 내생(來生)에서 나타나는 것을 밝히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전생"이라는 개념은 금생으로 치면 내생에서야 이 우리의 현재 세상을 가리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완전한 인과(因果) 관계입니다. 금생은 내생을 결정 짓습니다. 내생은 금생에서 각자 스스로 정한 자기 운명의 결과를 따라서 죽음이든 생명이든 영원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이니 자기 자신이 정한 운명인지라 아무 불평도 불만도 말할 권리도 여지도 없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은 '사는 곳'이 아닙니다. 장차 영원토록 살든지 죽든지 즉 영원한 삶의 쾌락을 누리든지 죽음의 고난을 영원토록 받게 되든지 양단간의 결정을 하는 곳입니다.

죽음이라는 것도 생명과의 대립[대칭, 상칭] 개념으로 말하는 것이지 우리가 아는 대로의 죽음과는 다릅니다. 이미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어 인간[아담]을 위해 창조된 영물들과 함께 영원히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인생들이 죽어 나가도 육체만 썩을 뿐이지 영[영혼]은 그대로 있어 악령들과 함께 영원한 고난 속으로 들어가든가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라는 것도 구원 받아야 할 사람 다 구원되고 나면 [그 때가 바로 그리스도 구원의 복된 소식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일이 완료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지체없이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들은 그동안 계속 태어날 것이고 그 중에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 다 구원될 때까지만 이 세상이 존속하는 것입니다. 그 무렵이 되면 사람은 어떤 경우로든 출산이 제한될 것이고, 또 아무리 사람이 많이 출생하더라도 하나님은 미리 아심[foreknowledge]을 토대로 하여 미리 정하시는[predestination] 고로 누가 구원 얻을지 혹은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지를 아시므로 그와 같이 날을 정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아버지만이 아시는 사실이고 아들께서도 천사들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마 24:36/행 1:7].

삼위일체 원리에서 금생은 갑[a]이고 내생은 을[b]이고 이 둘이 하나를 이뤄 있으니 왜냐면 갑의 결과가 을이요 을에게 갑은 그 원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둘은 불가분인 것입니다. 이 '불가분성'을 가리켜 병[c]이라 하는 것입니다. 인(因)은 '갑'이요 과(果)는 '을'이요 인과 관계는 '병'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을은 갑 없이 존재할 수 없고 갑 역시 을이 없이는 그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둘의 하나됨'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3각(脚)구도[tripod]로 되어 있어 다른 것이 끼일 틈이 없습니다. 제1의 존재[갈], 제2의 존재[을], 제3의 존재[병]로만 완결될 뿐, 제 4, 5, 6... 하고 나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만유는 무상(無常)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다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지 않고 상주(常住)함이 있는 세계가 대립되어 있음입니다. 전자는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이 자연계이고 후자는 우리의 영혼이 속하고 영물들이 속해 있는 영계(靈界)입니다.

전자에 속한 것이 우리 육체이고 후자에 속한 것이 우리 영혼입니다. 그리고 자연계에 속한 육체 역시 신령한 육체로 다시 대칭[상칭]을 이룹니다. 이와 같이 서로 얽히고 설켜 "인(因)과 연(緣)을 이루고 있으나 모우 일사불란하게 삼위일체 원리에 의한 인과율을 그 뼈대로 하고 있는 것이니 단 하나도 이에서 벗어나는 예외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엄정하고 치밀하게 오직 하나의 원리를 따름이니 곧 삼위일체의 법칙을 따라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론(緣起論) 즉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과 그 원인과 협동하여 그 결과를 만드는 간접적 힘으로서의 인과 연으로 하여 모든 것이 생긴다고 하는 것 곧 모든 사물은 이 인연에 의해 생멸(生滅)한다 함은 이를 가리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제1원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돌쩌귀가 빠진 문이 되어 한 면 곧 자연계만 말하고 영적인 세계를 설명하는 것을 죄다 빠뜨렸으니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영적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생멸은 자연계에 속하는 것이고 영계는 영구적이어서 에너지 보존[불멸] 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은 부정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므로 진리에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무리로 고집하면 미신이 되고 종국적으로는 본의 아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됩니다.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삼위일체 원리가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것은 3운법칙인 것입니다.

그런즉 이 세상의 의미를 정확히 알았으니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헛된 망상을 버릴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받음으로 사람들을 건져내는 일에만 적극, 능동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임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자가 될 일입니다. 하나님 아들로서의 우리는 사람들을 건져내려는 것이 이 세상 남아 있는 유일한 목적인데 이를 이 세상의 지배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저지하는 것이 그로서는 유일한 목적인 고로 용납할 리가 없어 피차간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 치더라도 이를 오히려 반납할 지경이니 왜냐면 사람들에게 이 실상을 알리고 제대로 바로 선택하여 스스로 영생에 들어가도록 만드는 것이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마다하고 자기 자신을 위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삶을 낙을 누리고자 하니 자기 중심인지라 이를 악하다고 판정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악을 행함이요 자기 중심[우리말 번역이나 흠정역(NKJV가 아닌 KJV)의 "당을 짓는다"(contentious)는 것은 오역-롬 2:8]이니 그 종국은 멸망입니다[:7-10].

따라서 이 세상의 실상을 똑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선과 악이 판정 나는 즉 스스로를 선과 악으로 영원히 분류시키는 그런 중차대한 시기요 장소일 뿐입니다. 삶의 장소가 아니라고 해서 그 비중이 결코 작은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 것이니, 영원 세계와 가히 맞먹는 중요한 이 세상의 한 때이므로, 금생과 내생 즉 내생을 기준으로 하면 전생[오늘의 이 세상]과 금생[마지막 심판 후의 영원한 세상]의 대칭[상칭, 대립]되는 구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선과 악으로 스스로를 구별함으로써 영원한 세상에서의 죽음과 생명으로서의 과(果)에 대한 인(因)을 짓는 것이니 순수하게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과연 온당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사실과 부합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도 그 누구도 나 자신의 이런 결정에 간섭하거나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에게 영원한 나의 운명이 일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어찌 우리가 입을 봉하고 있으리요[고전 9:16].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사람이 지어낸 종교 교리에서, '믿는 것' 자체를 두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義)쯤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요 16:8]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를 행하지 않으니 자연히 죄를 짓게 되고 그러니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여기 그 어디에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그런 황당한 의미기 있는지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지금까지 죄밖에 지은 것이 없고 의를 도무지 행할 능력이 없었으니 죽은 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 능히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게 하심으로 심판을 면하게 하신 조처[새 창조로 인한 다시 출생함]를 취해 주신 것을 믿고 그래서 죄 용서 받아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산 자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산가 되었으니까 이제 비로소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신득의(以信得義)"입니다.

이제는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죄인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알릴 수가 있게 되었고 그래서 선을 행하지 않고 의를 행하지[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않을 때는 죄를 짓는 것이요 죄를 짓는 자는 심판인 것이니 이 심판은 믿는 사람이든 처음부터 믿지를 않은 사람이든 차별이 없어 선을 행하면 영생이요 악을 행하면 심판인 것입니다[롬 2:7-10]. 당연히 이 경우 선을 행하는 이는 믿어 구원 받아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왜냐면 믿지 않고는 선을 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그 가운데에는 믿는 사람[더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믿음 있다 하고 구원 얻었다고 자처하는]도 있고[마 7:21/25:45]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한 이들도 함께 있습니다. 처음부터 믿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유가 악을 행하기를 선택한 즉 어두움을 사랑하고 빛을 미워하여 빛이신 그리스도께 오기를 싫어했기[요 3:18,19] 때문이니 "불의를 좋아한"[살후 2:12] 까닭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16:9]이라 하셨으니, 믿으면 위의 설명처럼 죄를 짓지 않고 얼마든지 의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10]이라 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할 수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11]이라 하신 것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구원이 되심으로서 당당히 마지막 아담이 되시니 이제는 영물이든 인간이든 모두 심판을 할 수 있게 되어진 때문입니다[행 17:31].

아담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하나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정해졌으므로 영물이나 인간 모두를 심판하는 자리에 있었으나 그 자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라 범죄함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아래에 들게 되고 오히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들을 다스리게 되는 반전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나, 이제 마지막 아담께서 이기셨기 때문에 첫 사람 아담의 정상(正常) 위치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요 5:27].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창조의 취지대로 "다스리는" 자로서의 아담이 심판하게 되어 있었던 것으로서, 그래서 인자(人子, 사람)되심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전도할 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다"[행 24:25] 한 것도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의(義)"로 간주하셔서 영생을 주신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의를 행해야 함을 가르친 것이니 이를 강조하여 "절제"를 말한 것입니다. 절제[self-control]는 말 그대로 정도를 넘지 않도록 행동을 알맞게 조절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즉 이 세상에서 분수에 맞게 행함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믿음" 자체가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의를 행하게 되니 그 의를 행함 즉 "참고[이 세상에서의 모든 악조건을 견뎌] 선을 행해야 영생"[롬 2:7,10]인 것입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다"[3:10]는 것은 바울이 지금 죽은 자로서의 인생들을 설명하여 그리스도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지 왜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지를 밝히고 있는 중에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얼마든지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게 되어 있고 의인만 아니라 성인(聖人, a saint)들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聖徒)"라는 말을 오늘날 가볍게 쓰고 있어 교인들이라는 뜻으로 알아듣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의미는 세상에서 말하는 "죄"를 짓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바뀌어져 자기 부인을 하고 있는 판이니 말 그대로의 "성인"들이 되어 있음을 가리킴니다. 거룩하지 않는 생활을 함으로써 이름만의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성경에 쓰는 용어를 쓰기는 써야 되고 그렇게 땜질하듯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 소위 "성도"입니다. 얼마나 성경적 표준에서 모든 것이 벗어나 있는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오늘날의 "배도(背道)"[살후 2:3]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상 위치입니다.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자기중심의 생각이 들어올 때 우리는 이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접근인 줄 알고 당장 깨뜨려[파(破)할 때-고후 10:5] 버릴 때 이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대적하는"[약 4:7] 것입니다. 왜냐면 이 자기중심이 앞에서 설명한 사람 삶의 방법이 아니고 도리어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이니, 에덴낙원에서 바로 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듣고 따라 행함으로써 이같은 인간 비극이 초래된 것입니다.

자기중심은 천하 그 누구도 정상적이고 그래서 살기를 원하는 자라면 결코 취할 수 없는 죽음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기중심으로 나가시는 법이 없으니 왜냐면 피조물을 만드신 이후로는 그 피조물만을 위하시므로 그렇습니다. 피조물을 만드시기 전에만 자기중심이셨으니 왜냐면 우주 천하에 당신 자신밖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을 지으신 다음부터는 오직 그 피조물만을 위하시는 자세로 스스로를 영원히 바꾸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는 피조물 상호간을 위해서도 본을 보이실 뿐 아니라 이것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단 둘이라 할지라도] 사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의 근본"[계 3:14/골 1:15]으로서 아들을 지으신[낳으신] 것이니 아들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께서 별개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신지라 아들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를 위하심이고 아버지께서는 또한 아들과 하나로 계시므로 아들께서 하시는 일은 아버지 친히 아들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기에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히 1:2]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셨으므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아들을 위하심이기에 비록 아들께서 아버지를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나 아버지께서 또한 만물을 창조하심과 똑같은 의미인즉 결과론적으로 만물이 "아들을 위해 창조되었다"[골 1:16] 하는 것입니다. 아들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이런 것이 둘이 하나됨[이 하나됨을 "사랑"이라 하는 것]의 생명의 법질서입니다.

혹 말하기를 "그럴진대 지금부터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만 하면 영생하는 것이 아니냐" 한다면, 이미 설명한 대로 인생은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어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성경이 명시하고 있음을[롬 5:12] 간과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따라서 아담의 죽음은 그 신령한 몸을 잃고 자연계에 속한 육체[애초 창조된 대로]로 되돌아가는 것이므로, 신령한 몸으로 있던 기운이 그대로 남아 있어 노아 홍수 이전의 인류는 거의 천년 가까이 장수했습니다.

노아 홍수 후 기후 변화가 급격히 일어 [그 증거가 무지개이니 그 이전에는 무지개가 생겨나지 않았던 사실로써 확인되는 것] 인간 수명은 차츰 오늘날과 같은 정도로 단축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현재 상태가 이미 설명한 대로 비정상이고 따라서 정상 상태로 회복해 간다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이 세상 통치 기간이 대기 중에 있음을 이미 지적했지만, 이 기준에 맞추어 그 때 세상의 인간 수명 역시 아담 당시[영계에서 추방된]의 수명처럼 천년 가까이 이르게 됩니다. 그 때는 백 살도 못다 채우고 죽으면 요절(夭折)에 해당되어 저주 받은 죽음으로 인정되리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사 66:20].

만일 아담이 범죄할 때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이었다면 죽는 것이 정상이므로 선행[위에서 설명한 사람 삶의 도리를 따라 사는 것]을 하면 그것으로써 영생에 들어간다 즉 구원된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현재 우리가 죽은 자이므로 먼저 산 자가 되는 것부터가 급선무입니다. 죽은 자가 이 세상에서 선행을 하면 이 죽음의 세계에서는 주변으로부터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는 칭찬은 받을지 모르나 그가 영생에 들어가는 데에는 전혀 영향이 있을 리 없습니다. 죽은 자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감안해야 할 것은 죽은 자가 선행을 한다고 친다면 그 목적이 자기의 구원에 있을 것인즉 [우선 그것이 최우선 과제이기에] 자기중심인지라 삶의 도리에 전적으로 위배됩니다. 그리고 이 선행이라는 것은 원래 '산 자'가 그 삶을 향유하기 위한 방법인 까닭에 '죽은 자'에게는 아예 해당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먼저 구원부터 받아 산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는 일의 순서입니다.

그리고 이미 밝힌 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하셨으므로 [아담의 죄로 인해 죽음이 왔다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는 영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이는 신령한 몸으로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현재 이 자연계에 속해 있다는 것은 범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므로 죽게 되어 있으면 반드시 죽는 것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해야 법질서 확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로서 선행을 해서 구원 얻고자 하는 생각은 언감생심이고 오직 죽어야 그 다음 문제가 논의될 그런 실상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죽는 것인데 죽은 다음에는 죽음으로 끝나지 다시 살아나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게 되면 이 역시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자가 죽지 않는 것도 질서를 허무는 일이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인생은 구원 자체가 불가능입니다. 영생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허망한 생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자연법칙[모든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는]을 벗어난다는 발상 자체가 황당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원리원칙으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위치에서 보아도 한 마디로 불가능한 것이 인간의 구원[영생하게 되는]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하고 그리고도 넉넉히 다시 출생하여 살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밖에 없다는 결론이 되므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셨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엄정한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모든 일에 임하시는 하나님으로서는 어중이떠중이 주먹 구구식으로 일을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즉 죽은 것은 철저히 죽고 그리고 난 다음 산 자로 새로 만드시는 데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위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 친히 살아나셔도 될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려 주셔야 원리원칙에 충실하는 방법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상 설명과 같은 둘이 하나됨으로 인하여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는 둘이 하나됨의 이치에 부합한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단 한 분이시면 절대로 우리의 구원이 가능한 것이 아니니 왜냐면 한번 죽으시면 그대로 죽으셔야지 스스로 살아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스스로 살아나신다면 그것은 일종의 쇼에 불과하고 그 죽음의 진실성이 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잠시 한 때 죽으신 척 했다는 사실만 남게 되니 이 역시 일종의 거짓이요 속임수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하나님께 용납되지도 않거니와 친히 그런 일을 하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되어 계셔야 함이니 이렇게 하나로 계시는 모습을 가리켜 우리는 이 경우에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라 "성령"이시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고유 명사가 아니고 그렇게 표현된다는 의미만을 알고 있으면 족합니다.

아버지의 영도 성령이시고 아들의 영도 성령이시니 하나님께서는 원래 영이시므로 그래서도 성령이십니다. 단지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따로 계시지 않고 하나로 계신다는 의미만 알면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로 계시는 것을 가리켜 "아버지"시라 할 수도 없고 "아들"이시라고도 할 수 없을 때 "성령"이라는 "이름"[마 28:19]으로 나타낸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렇게 "이름"으로서 특별히 강조하신 것도, 이 그리스도 시대에 와서는 특별히 지적하여 설명할 때에만 "아버지" 또는 "아들"로서 분리해서 나타내고 평상시에는 "성령"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보편적인 표현인 까닭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시라 할 때는 아버지를 가리키게 됩니다. 이제 아들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전히 또한 하나님이시기도 하나 우리와 같은 사람들로서는 사람되어 계심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시라 할 때에는 성령으로 계심을 가리킬 때 주고 사용되어지고 한 날 한 시라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하나되어 계심을 설명할 때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것 역시 위의 설명대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아들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은, 과거 죄의 청산과 더불어, 현재 삶[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된]에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다시 말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사실로 직결되어 나타납니다. 세상에서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육신에 포로되어 살 수밖에 없으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써 우리가 구원된다는 주장은,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과 똑같은 세상 종교로서 복음의 견지에서 보면 사이비요 이단입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함께 죽은] 것은 죄의 몸["육신"-롬 7:5-8:13]이 멸하여[파괴되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롬 6:6] 즉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롬 14:7-9]이라고 성경이 밝히고 있음에도, 그래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명백한 성경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수용할 생각은 없이 자기 해석만을 고집하니 성경이 그토록 어렵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했고,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기"[:7] 때문이라 했으며,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악한 욕망을 순종치 말라"[:11,12]는 결론인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약 1:15] 한 그대로입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죄 짓는 것을 합리화하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든다는 대목이 없습니다. 죄는 크든 작든 죄요 회개 않으면 죽음 곧 멸망인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요일 5:16]. 그런 "짐짓 범하는 죄"[히 10:26] 외에는 회개하면 해결이 되나 회개를 않고 마치 기정 사실처럼 취급하여 불가항력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고집을 부리는 한[바울의 "육신"(롬 7:24) 설명을 바울 자신의 믿은 후의 개인적 체험이라 곡해함으로써] 그것은 회개가 없는 것이니 멸망에의 직행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설명은 성경의 세세한 풀이도 아닙니다. 단지 윤곽만을 그것도 대체적으로 설명한 것뿐입니다. 자세한 것은 각 사람이 자기가 모시고 있는 성령으로 계시하여 주심을 따라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각자가 하는 일이지 누가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로 통할 수 있는 길이 우리의 믿음으로 일단 틔어져 있는 이상 나머지 필요한 지식을 습득해 나가는 일은 각자 스스로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함에 아무 지장이 없다는 의미만이 지금까지의 설명일 뿐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miscellanea" 즉 잡록(雜錄)이라는 이름의 편편상(片片想, 短想) 형식으로 계속 설명을 엮어 나가려는 계획이기는 합니다마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 사람이 스스로 성경을 읽어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는 일임을 명심할 일입니다. 능동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움직이지 아니할 때 그 폐해는 누구도 감당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각자 스스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의미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설명해 온 양면성, 동시성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나 자신이 그와 같이 나의 운명을 정하는 것은 만고 불역의 진리입니다. 하나님 지으신 피조물[인격성을 지녀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의 일로서 이 짝의 원리에서 예외가 되는 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믿지 않는 이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그와 같이 스스로 처결하는 것이고, 회개하여 믿음에 들어온 이들도 끝까지 그 믿음의 약속을 이행하느냐 여부를 따라 즉 시험을 이기느냐 아니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지느냐 하는 것으로써 역시 스스로 그렇게 정하는 것이니, 이를 가리켜 성경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경고하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모든 인생은 이렇게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이 창조되고 다시 출생함으로써 되는 것이요, 후자의 경우 처음 믿을 때의 애초의 약속대로 복종함으로써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자동적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구원되는 것이니 역시 자기 자신의 운명을 정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러하였으니 시종일관성을 지녀야 하므로 이 세상에서는 끝까지 이러하여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중도에 그 믿음을 저버리면 그 구원은 완전 무효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믿음을 저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롬 14:0/고후 5:15]을 어긋나게 나가는 것을 말함이니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자기부인이 없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가 아무리 하나님도 믿고 성경도 믿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구원을 믿는다 해도 그래서 심판대에 이르기까지도 자기 구원을 스스로 확신하고 있어도 결말은 영원한 멸망이 됩니다[마 7:21/25:45]. 이는 성경의 부단(不斷)한 경고에 부단히 주의를 기울여 "조심해야"[고전 10:12] 하는데 조심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런 경각심과 경계심이 없어 조심하지 않고 어떻게 군인이 전쟁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현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 곧 악령들과의 전쟁 중임을 망각하고서 어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주님의 광야 시험에 나타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의 성격만을 보아도 이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훤하게 드러납니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 즉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영원한 삶의 방법에 충실히 따름이니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과 더불어, 상대[우리는 하나님을 확고하게 신뢰해야]가 나를 위하시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 나머지 하나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않고 스스로 고난을 자청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면서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는 것입니다[요 4:34].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0:21,22/4:34]. 이렇게 하는 것이 "양식을 먹는 것"[4:34]으로서 사람이 먹지 않으면 죽는 것과 같이 이 일이 없으면 멸망입니다. 이 셋째 시험도 따지고 보면 처음의 둘째, 셋째와 같은 의미이나 '이 세상'이라는 구체성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므로 색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영혼 없는 사람들과 영혼이 있는 사람들과의 구분되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영혼이라는 것은 성령으로 우리 각자에게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시 출생하게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새 창조를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구별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새 창조의 현장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창조되던 때와 똑같으니 그런즉 여기서는 시험[testing]의 무대까지 겸합니다.

아담은 에덴낙원에서 시험을 받은 격이어서 그 부(不)적격성으로 인하여 죽은 자가 되어 이 자연계에 속한 존재가 되었지만 우리는 이 자연계에서부터 즉 영계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걸러지고 추려지고 솎아지게 되는 차이입니다. 이 세상은 인생들의 새 창조의 공사장(工事場)입니다. 공사장은 원래 지저분합니다. 준공식을 해야 하나님의 세계는 말끔하게 단장됩니다. 그러므로 각종 기자재(機資材·器資材)가 어지러이 널려져 있는 모습이 다름아닌 이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도리어 고난 받는 등의 현상이기도 합니다.

산뜻하게 열리는 준공식은 마지막 심판 후에 열려지게 됩니다. 육체로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하늘의 공사장에서 그런 작업 중에 계십니다[요 14:2,3]. 우리 역시 구원 받은 다음에는 일제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 창조의 일에 돌입하게 됩니다. 우리의 적격 여부는 이런 하나님의 일에 여하한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으로 나타나지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나를 세상에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먹을 양식"인데 이를 먹지 않으면 나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생명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격리됨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일하는 현장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일하기를 싫어하는 이에게 화가 있으니 "무익한 종"[마 25:30]으로 취급되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30]입니다. 이 세상의 이러한 실상實相) 그 정체를 정확히 직시(直視)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요 6:45]. 우리는 이미 구원 받아 우리의 영혼[그리스도]의 생명과 같은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고로 "내 생명"[골 3:4]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어찌 하든지 그 명령을 준행하고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 곧 "우리의 구원을 이룸"이 되고 "무익한 종"이 되어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지 않게 됩니다. 주인 의식으로 일하는 자는 일하는 무한한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니 그래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살전 5:16]고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범사 곧 모든 일에 감사가 넘쳐 납니다[살전 5:18]. 어깨 춤추며 신바람이 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기쁨으로 해야 능률이 오르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의 힘을 좇아[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되어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른다"[골 1:11]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하는 것이니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고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 1:8] 함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고후 6:1].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라반을 섬겨 일했으나 그[라헬]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단 며칠 같이 여겼다"[창 29:20] 함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일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는"[빌 2:12]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경고를 하면서 동시에 성경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정도를 따라 자기를 나타내어 주시는 단계가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요 14:21]. 그러므로 순종하는 과정에서 차츰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지런하여 계속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쓰는"[히 4:11/12:28/고전 7:32,34/15:28/고후 5:9-11/롬 12:2/눅 13:24/벧후 1:10]] 것이 지속되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니 이를 증명하시기라도 하듯이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는 그 날 즉시 구원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경우 외에는 누구든지 임종시에도 능히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함은 잘못이니, 이와 유사한 경우가 그 이후로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무리 그 믿음을 미리 보시고 택하셨다고 해도 반드시 일정 기간 이 세상에서 바울 사도처럼 일하게 하신다고 못을 박아 두어도 좋은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 혼자 그 아시는 대로 행하시기보다 모든 피조물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움직이심을 원칙으로 삼으시기 때문이니 이는 그 피조물을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비밀이 없는 까닭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과 때에 대해서 "아들도 천사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막 13:32]고 말씀하신 것은 그 능력을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능력에 차이가 있어 "만유보다 크시고 아들보다 크시다"[요 10:29/14:28]는 사실을 가르치심입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벧전 1:5] 한 대로,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의 경우에서와 같이 즉각적인 구원이지만, 구원의 양면성 또는 동시성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내 스스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므로 성경이 우리 구원을 미래 시제(時制)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담은 애초 사는[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음에도 죽은 자가 되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영물들은 영원한 멸망에 그리고 반면에 거룩한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처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새 생명으로 새로 창조되되 이런 전례에 근거하여 마땅히 사는 법대로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요구를 하게 되므로 우리 스스로의 자유 의지를 따라 이를 이루어야 하는 까닭에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정하게 된다 함입니다. 바로 그 사는 방법을 분명히 가르쳐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므로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나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가 영접할 것이라"[요 5:43] 하신 것입니다.

적 그리스도가 그와 같이 자기 이름으로 오는 자 곧 자기중심이 그 특징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즉 갑은 을의 이름으로 살고 을은 갑의 이름으로 사는 사랑과 생명의 법칙이 바로 사람 사는 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요 5:39,40] 하시고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 하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다"[:42] 하신 대로, 서로 영광을 구함으로써[그리스도께서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신데 반해-요 5:41]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처음부터 믿지 않거나 또 믿어도 자기중심으로 변질됨으로 인하여 결국 "구원을 이루지"[빌 2:12]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적(敵)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일제히 거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살후 2:12].

멸아(滅我), 몰아(歿我), 무아(舞我), 망아(忘我)가 되지 않는 한 이 자기중심은 그대로 살아 있고 자기중심, 자기위주, 자기본위가 척결되지 않는 한 행복한 사랑의 삶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기 부인에 있는 것인데 이 핵심을 사람들이 잘못 알고 엉뚱한 것으로 해석하는 통에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즉 사형에 처해질 사형수가 자기의 사형 도구인 십자가를 지고 가듯이 해야 하는데[눅 9:23]. 이 십자가 말만 하면 많은 제자[지금껏 자칭해 왔던]가 지금도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아니라 자기 부인을 미워하고 자기중심을 끝까지 선호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행복한 삶이 불가능한데도 이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선 자기 욕심에 눈이 가려져 보지 못하니 영구 불치(不治)요 구제 불능입니다. 그 스스로 의를 사랑하고 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지 이를 억지로 강제로 하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믿지 않는 즉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신 것이 이 때문입니다. 아들의 모습은 아버지의 모습이시므로 아버지 친히 이와 같이 아들을 통하여 눈물을 흘리셨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눈물을 흘리시면서 동시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바로 이 모습을 마음 깊이 아로새겨 두기를 마지막으로 강력히 당부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모든 것은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이 창조되는 것만 아니라 이렇게 사람 사는 법대로 살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완전한 정수(精髓), 정화(精華·菁華)를 보게 됩니다. 보물을 가져도 그 가치를 모르면 그것을 소유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불원간 그는 그 보물을 버리게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와 천국이 바로 이와 같음을 부디 명심하시기 바랍니다[마 13:44-46].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면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린다. 세상 끝에도 이러할 것이니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마 13:47-50]. 그리스도의 가치를 모르는 자는 여기서 악인일 것이요 아는 자는 의인이 될 것입니다. 천국은 의인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제는 성경을 다 알았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성경을 제대로 읽기 시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지금부터 제대로 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읽어야 합니다.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읽는 것입니다.

"Walk before Me"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 앞에서 행하라"[Walk before Me.] 하셨다[창 17:1]. 하나님께서 막연한 말씀을 하실 리 없다. 그러면 이 말씀은 말씀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일거수일투족을 하는 것이니 바로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사는 삶을 말한다. 하나님 면전에서 모든 일을 하니까 어련히 그렇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의식'이 필수이다. 노아 그리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to walk with God]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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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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