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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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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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을 주신 것은 자유인으로 만들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를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내 자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 원하지 않는 것을 아니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악을 좋아한다고 마음대로 악을 행하는 것도 자유이기는 하나 그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아닌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마땅해 해서는 안되는 일은 아니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법칙대로 행하여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그 반대되는 죽음의 길은 아니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진정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따라서 인식부터 새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나쁘고 생명의 길이 아니고 무엇이 생명의 길로서 좋은 것인지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그 반대로서 거꾸로 알았습니다. 눈을 뜨고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눈을 뜰 수 있게 됩니다[행 26:18]. 그렇지 않고는 운명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결단코 눈을 뜨지 못하고 바로 볼 수 없습니다[고후 4:4]. 여기서 다시 ‘운명’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스스로 만든 결과입니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라 범죄하게 됨으로써 그 수하(手下)가 된 연유입니다.

즉 그를 따르는 자가 되어 있어 완전히 종속되어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눈을 감겨 놓았으니 그 누구도 손을 못대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요 8:36/고후 3:17].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롬 7:14] 있던 몸이었습니다. “죄 아래 팔렸다[to be sold under sin]”는 것은 육신에 속했기 때문이고 육신에 속했다는 것은 종족 보존이 유일의 목적인 자연계에 속한 일반 동물의 자기중심의 본능적 성향을 말하는데, 기계적 생명의 동물이니까 자기중심은 퍽 자연스러운 것이나 영적 존재인 인간으로서는 부자연스러운 정도를 넘어 곧바로 죽음에의 직행이니 자기중심이 범죄의 뿌리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아담]도 처음에는 그런 육체로 창조되었으나 후에 영혼이 조성되고 몸 또한 신령한 것으로 변환됨으로써 그런 성향이 선악과 나무로서 응집되고 잔류되어 그런 기계적인 자기중심의 성향은 더 이상 아담의 신령한 몸과는 무관하게 되고 따라서 아담은 오직 자유 선택에 의한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써 죄를 지으면 짓고 아니 지으면 안짓는 그런 자유를 향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어 버림으로써 자기중심의 본능적 성향으로 되돌아온 것이니 말하자면 이로써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죄는 자기를 위하는 자기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짐승들의 자기중심적 성향은 기계적인 생명이므로, 기계적으로 움직여 그 이상의 일은 하지 않도록 장치된 그대로만 움직이므로 좋은 것[선]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영혼이 있어 영적 존재로서 자기 자유 선택으로 무조건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니 그래서 완전히 자기 육체로 인하여 삶 자체가 자기 위주, 본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 곧 “죄의 몸”[롬 6:6]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는 의미입니다. 이 "죄의 몸"을 해결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입니다. 애초의 아담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으나 범죄 후 즉 선악과를 먹고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면서 이렇게 되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아담의 범죄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 되돌려 놓는 방법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되셔서 나와 하나 되시는 방법밖에 없으므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되는 것으로써 구원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만 그치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오히려 아담의 범죄가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아담의 범죄 행위가 정당시될 수는 없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 역시 아담처럼 범죄할 때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게 될 것이고 그 죽음은 이제는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 됨으로[롬 6:6, 그리스도께서 그 영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써] 나의 이 원치 않는 육신은 “멸(滅)해지고[to be destroyed, 롬 6:6]”나는 이로써 자유 해방을 맞은 것입니다[8:2]. 육신에 속해 있다가 그 육신으로부터 해방되었으니 자유입니다[요 8:32,36/고후 3:17].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 곧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시는 모습으로서의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니 또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의 완전 해방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이께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보다 크심[요일 4:4]이 조물주께서 모든 피조물보다 크심[요 10:29]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혹은 나]를 해방하였다”[롬 8:2] 한 것입니다. 곧 나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모든 악(惡, 좋지 못한 일체의 것 즉 그것이 도덕적이든, 정신적 폐해를 말함이든, 신체적 고통이든 또는 죽음이든)과 죄의 뿌리는 자기중심으로만 치닫던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 훌훌 털어 버리고 나면 온갖 번민 번뇌가 사라지는 것임을 세상 사람도 본성으로 알고 있는 터입니다. 세상 종교는 억지로 자기를 없앤다고 “몰아(沒我), 멸아(滅我), 망아(忘我)” 등으로 소리 높여 외치나 전혀 현실성도 없고 근거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어[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신” 것] 망아(亡我)가 된 바탕에서 새 생명[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어 있는 생명-롬 6:4]으로 다시 출생함으로써 새로 창조되어야 비로소 해결이 되고 자유인이 됩니다.

이 자유는 또한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아들이므로]가 되어 있음입니다. 다시 말해 만유의 주인입니다.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므로, 내가 얻지 못해 그 얻고 싶은 것을 못얻는 부자유도 없고 하고 싶으나 하지 못하는 구속(拘束) 사유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차지하였으므로 완전 자유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오직 이 사람 사는 도리를 좇아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도 구원을 모르고 따라서 구원도 받지 못한 상태임을 스스로 확진(確診)할 필요가 있음을 이상 성경의 권위로써 단언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임호산(臨虎山)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보는 관점을 바꿀 일입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시각에서 볼 것이 아니라 애초 인간이 창조된 신령한 몸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이 죽음과 저주와 고통의 세계임이 금방 드러납니다. 이 세상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세상임이 자명해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신음[진통(陣痛) 중의]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롬 8:22]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음"[우리말 번역은 "탄식"이라 했는데 이는 오역]은 여자가 해산할 때에 겪는 진통이니 극통(極痛)을 말합니다. 이런 고통의 때에 삶의 낙이 있을 리 없습니다. 땅은 이미 인간의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은 터입니다[창 3:17]. 저주 속에 있는데 생명의 낙이 있을 리도 없습니다. 그것은 법질서 차원에서 보더라도 이탈 행위입니다. 정상 상태가 아니므로 처단 대상입니다. 영원히 존속될 수 없습니다.

저주와 죽음의 고통은 영원한 불 못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 할지 모르나, 그러나 나름대로의 이 세상의 현실 자체가 저주입니다. 인생이 죽음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구원의 날이요 은혜의 때”[고후 6:2]입니다. 그리고 시험 기간입니다. 따라서 “세세토록 고난의 연기가 올라가는”[계 14:11] 때는 아닙니다. 시험의 때라는 것은, 이런 고통과 저주와 죽음의 질서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살 만하고 즐길 만한 무엇이 있다’는 표시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올가미, 덫, 함정 역할밖에 아니한다는 사실을 앞에서도 설명했습니다.

왜냐면 정상적으로는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죄를 짓는 것을 미워 않고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이들마다 걸려 들도록 만들어진 올무입니다. 이런 현실이 무섭다고 하면 가히 무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살인자(殺人者) 악령이 이 세상의 신(神)으로 그리고 지배자로 공중에서 설쳐대며 철권으로 통치하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악령이 무섭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위장(僞裝)된 덫, 허물, 올가미에 걸려 멸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무섭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오셔서 밝혀 말씀하시기를 “지금 웃는 자는 화가 있으니 장차 울게 된다” 하셨고 지금 우는 자는 반대로 복이 있으니 장차 웃게 된다 하셨습니다. 지금 우는 자는 웃을 수 있는 세계를 동경할 수 있는 확률이 그만큼 상대적으로 높다는 뜻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부유하여 삶의 낙을 누리는 사람은, 자기 위로를 이 세상에서 다 소모한 탓에 장차 받을 아무 위로까지도 해당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은 그 어떠한 위로도 받을 만한 때가 아님이 명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 받으시고 그 이후 오직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일심으로 기도하시는 중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달하며 가르치신 것은,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 없고 오직 기도를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여 사람 살리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만이 정상임을 명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영생 가운데로 부르신 그대로 즉 믿을 때의 그 위치에서 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노예[종]로 있을 때 믿음에 들어왔다면 그 후 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더라도 그렇게 종으로 있는 때를 활용하여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구원해 내려고 일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뜻입니다[고전 7:21]. 왜냐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다시는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술 파는 장사를 했으니 계속 그런 장사를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때문에 도둑질하던 사람은 그런 일을 버리고 “선한 직업을 택하여”[엡 4:28] 일하라고 했습니다. 상식대로 행하면 되는 것이요 억지로 무리하게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하면 됩니다. 악을 좋아해서 하든 선을 좋아해서 하든 사람은 자기 좋아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 의지의 뜻입니다. 따라서 선행은 가상할 만한 일이지만 억지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악은 억지로라도 안해야 정상이지만 그러나 억지로 하는 그 경우 하나님 앞에서 생명 얻기를 바라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구원부터 해놓으시고 그런 후에 각자의 행적을 살펴보시는 것입니다. 즉 그 구원에 걸맞는 그래서 산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사는지 여부를 보시고 최종 판결하시는 것이 은혜로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의 특징이요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 전 상태로 되돌리시는 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의미는 아담처럼 범죄하면 아담의 본보기처럼 죽음의 결말밖에 없음을 명시함입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고 이거 웬 떡이냐 하고 달려드는 것은 악인이 걸려 들도록 만든 함정에 단단히 걸려 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것을 속임수라고 하는 것은 합당치 아니하니, 믿기만 하면 되고 선물로 은혜로서 받는 것이 분명하나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영생만 욕심 내는 사람만이 걸려 드는 함정이요 덫이 되는 까닭입니다.

회개는 앞으로 선과 의를 사랑하여 이를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약속을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의미입니다. 왜냐면 과거 잘못을 뉘우친다는 것은 그런 일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세상 모든 사람 앞에서 하는 서약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회개한 대로 과연 실천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지 지켜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영생은 “약속”[요일 2:25]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밝히기를, 이 약속은 “하나님 뜻을 행한 후에”[히 10:36] 받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하다”[:36]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처음 믿을 때 회개한 그대로 즉 약속한 그대로 이행한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이전에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았는데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므로[고후 5:15]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곧 “그 뜻대로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룸”이기 때문입니다[요 3:34].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20:21,22] 아들께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으신 것과 똑같다 하셨기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의 속성

앞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거짓말로써 첫 사람 아담을 죽음에 빠뜨렸다 했는데 성경은 그 간략한 기술(記述)에서도 그 속임수의 특질을 잘 드러내어 주어 우리로 경계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여자를 거짓말로 속일 때 “선악과를 먹으면 죽기커녕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좋고 나쁜 것'을 알게 된다” 했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으니 아담 내외의 “눈이 밝아 자기네 몸이 벗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리나케 아랫도리를 가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중에 아담을 찾으시며 부르실 때 아담 내외는 숨었고 그 숨은 이유로서 아담은 “제가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렇게 접근하기 전에 기록하기를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전에는 벌거벗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다가 이제는 선악과를 먹고 벗은 것도 알았고[전에는 몰랐다는 뜻] 부끄러운 것도 알았으니 부끄러움을 탔기 때문에 아랫도리를 가린 것입니다.

이 기록을 얼른 보면 “과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이 옳았구나” 할 것이나, 그것은 한 가지의 고정 관념에만 사로잡혀 인식 전환을 못한 탓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대답한 아담의 말이 그 열쇠입니다.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 해야 하는데 “두려워서 숨었다” 한 것입니다. “부끄러워 숨었다”고 해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대로 자기를 이제까지 눈 뜨지 못하도록 만들어[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셔서] 정작 벗은 줄도 모르게 하고 부끄러운 것을 그대로 드러내게 하신데 대한 당당한 항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거짓말하셨지요, 보세요, 이제는 저도 벗은 것도 알고 벗은 것이 나쁘다는 것[악(惡), 나쁜 것]도 알게 되었고 이제는 모든 선악[善惡, 좋고 나쁜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하고 의기양양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벗었으므로 부끄럽다” 하지 않고 “벗었으므로 [하나님을] 무서워한다“ 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앞이므로 그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은 결과를 두고 두려워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도 이제는 모두 다 드러난 판에 즉 자기에게 거짓말을 하신 하나님이 도덕적인 측면에서 나쁘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므로 하나님을 몰아세움으로써 자기 변호 겸 상대의 잘못도 들추어 상쇄(相殺)시키는 효과를 내기 위해서라도 "벗었으니 부끄럽다"고 당당히 말했을 것이고 또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처음부터 꼼짝달싹도 못하게 하나님을 그다지도 무서워했다면 아무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킨다 하더라도 감히 그 먹지 말라 하시는 것을 먹을 생각조차도 못했을 것이나, 그렇게 스스로 판단하여[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믿고] 선악과를 먹은 것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두려워했느냐 하면, 몸에서 나는 광채를 잃어버림으로써 신령한 몸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자책감과 함께 하나님의 일[자기네를 신령한 몸으로 만드신]을 스스로 망쳐 놓았다는 두려움이 엄습한 것입니다. 이 외에 달리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편견, 선입관 등 고정 관념으로 읽지 말라는 경고가 여기서 나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항상 한 쪽 면만 보게 합니다. ”저 산은 팽이를 둘러엎은 모양으로만 보이지 않느냐“ 합니다. 그럴 때 정면으로 보는 데에서 눈을 떼어 과감히 측면으로 돌아서는 지혜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호랑이 형상이 산명(山名)과 부합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과연 호랑이가 임해 있는[臨虎] 모습이군” 하게 됩니다.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처음부터 “당신네가 뭐니뭐니 해도 하급 세계인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던가요?” 하고 빈정거리며 모멸하는 태도로 여자에게 접근한 것입니다. 이는 영물들 위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군림해 있던 아담 부부에 대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평소의 감정 그대로였으니 즉 시기심의 발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어디까지나 자연계에 처음 속했던 아담의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그런 못된 언사(言辭)를 농(弄)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또 그런 식으로 기술했느냐. 성경 역시 이제는 아담의 신령한 몸은 옛 시절의 추억거리이고 엄연한 현실로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므로 역시 이 자연계의 육체라는 기준으로써 서술해 나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상 둘의 관점(觀點)이 묘하게 일치하나, 그러나 이 경우 그 진위를 가려내고 진실을 밝히고 있는 대목이 바로 아담의 그러한 대답입니다. 즉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두렵다”고 하여 숨은 것입니다.

부끄러워 숨은 것이 아님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이제까지의 신령한 몸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되돌아가면서 신령한 몸으로서의 광채[빛의 옷]가 사라진 순간, 그 때 비로소 아담 부부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의 실상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떨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아주 크게 잘못되었음을 본성적으로 자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자기를 신령한 몸이 되게 하신]을 다 망쳐놓았다는 두려움입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눈이 떠졌다는 뜻입니다. 자연계의 육체에 속한 눈으로 만상(萬象)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신령한 몸에 속한 눈이 따로 있고 그런 별다른 기능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살다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눈의 기능을 비로소 하게 되었다는 그 뜻입니다. 몸이 다르니까 눈 역시 같을 수 없으니 그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눈이 비로소 띄어졌다, 열려졌다[to be opened]는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는 현란한 광채로 몸이 아름답게 단장되어져 있어 벗은 것이 아니었으나[그럼에도 성경이 "벗었다"(창 2:25)고 한 것은 앞의 설명처럼 현재의 자연계에 속한 몸을 기준하여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니 옷을 입지 않은 상태이므로 벗었다고 할 수밖에 없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어 버려 몸을 감싸고 있던 광채의 옷을 잃으니 몸이 벌거숭이가 된 것을 아담은 인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부끄럽다"는 것도 이제까지 영물들을 다스리며 군림해 있던 위치에서 하등 세계인 자연계의 동물들의 암수[컷] 구조의 몸을 드러내자니 그들 영물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고 불현듯 느낀 상대적 수치감입니다. 영물들은 아무도 그런 몸의 구조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에게나 그런 암수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너희가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 아주 정색을 하고 강조한 것도 이상 설명과 같이 어디까지나 “너희가 원래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더냐” 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생명은 원래 시한부이므로 일정한 때를 살다가 죽으니 천수를 누림이요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동식물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 즉 영혼이 있어 영혼은 영원하므로 육체 역시 영원한 즉 썩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있었는데 이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아가면 죽으므로 죽으리라는 경고는 영원히 살지 못하게 된다는 경고이셨는데도 이 말씀대로 따르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으니 비록 천년을 산다 한들 오직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생명을 기준으로 말하였으므로 “결코 죽지 않는다”고 자신 있는 다짐을 주었고 이 확신에 찬 말에 여자는 넘어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모든 속임수의 특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 면을 조화 있게 살펴 보도록 되어 있는데 일면만을 강조합니다. 그 일면에서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자신감 넘치게 아주 진지하게 말함으로써 거짓을 숨기고 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도록 스스로를 꾸미는 그런 재주에 능통하고 사람들은 또 거기에 넘어갑니다.

그 일면대로 하면 사실이기는 하나 일면만 관찰하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데 그 일면만을 강조하는 데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교활한 속임수가 있음을 간파해야 합니다. “팽이를 둘러엎은 모습이 아니냐” 하는 것은 ‘정면에서 보면 그렇다’는 단서를 붙일 때에 한해서만 진실입니다. 그러나 정면만을 보아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측면을 함께 보아야 진실이요 진리인데 이것을 감추는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입니다. 이런 점에 유념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과 모든 속임수를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여자를 속일 때처럼 이렇게 지능적으로 그리고 간교하게 속임수를 쓸 때 성경의 자체 증명[진실성에 대한]은 그런 모든 불 화살[火箭]을 넉넉히 막아내는데 큰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입니다. 앞으로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도 이런 수법을 동원할 것이니 미리부터 이런 관점에서 철저히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즉 일면만을 보게 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에 응하지 않고 여러 모로 살피는 여유 또는 여지입니다. 최면술에 걸려 드는 것이 술사의 암시를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아담은 마침내 자연계의 육체로 자연계에 속한 삶으로 쫓겨났고 그 때부터 한 살, 두 살 세어가기 시작하여 천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가면 그 말대로 적중하였다 할 것이니 그 후 장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영생하게[죽지 않게] 되어 있었던 당시의 신령한 몸을 기준하면 천년 아니라 만년을 살았다 한들 죽음입니다.

당시의 인간이 노아 홍수 전까지 그 정도로[천년 가까운 수명] 산 것은 아담의 몸이 원래 신령한 몸이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신령한 몸이었으니 아무리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아왔다 하나 그 기운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또 당시의 기후가 그 한 요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은, 노아 홍수 이후에야 무지개가 생겼음을 보아 기후 변화가 필연이었음을 알 수 있고, 그 홍수 이후로 인간 수명은 단축되어 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범죄 후 하나님 찾으시는 음성을 듣고 “제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하는 말을 들으시고 “누가 네게 벗은 것을 알려 주었더냐” 하신 것은, 처음부터 아담이 벗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악과를 먹지 않고는 자기가 벗고 있다는 말을 아니할 터인데[벗지 않았으니까] 즉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그래서 몸이 빛으로 감싸져 있으면 벗었다고 말할 리가 없는데도, 아담 스스로 자기가 벗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가 그런 말을 해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므로[그런 말을 할 까닭도 없지만 그러나 아담 스스로 벗었다고 우선 듣기에 엉뚱한 소리를 하므로]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아무도 그런 말을 할 리 없고 아담 역시 그런 말을 할 리도 없기 때문에 결국은 “네가 선악과를 먹었더냐?” 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를 모르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따라 해결해 가는 순서로 혹은 그 전(前) 단계로서 그런 논리를 따라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  우리 인생들을 살리시려고 친히 사람이 되시고 사람으로서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하나님 사랑의 애틋하신 마음을 최소한으로 헤아릴 수 있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전신전력을 다하여 단 몇 사람이라도 건지기 위해 일생을 다 바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던 당시의 나 자신의 비참함을 안다면[실상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은 그 자신의 구원도 확신할 수 없는 것] 아직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매여 눈 뜨지 못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죽음 가운데 방황하는 이웃을 절대로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두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뛰어들게 만드는 동인(動因)이요 동력(動力)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마음, 심장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그 뜻을 행하게 됩니다. 때문에 “내 형제 곧 골육 친척을 위해 내 자신 저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3]는 말도 하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도 불사(不辭)할 정도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을 불태우는 심령에 자기 구원을 위하고 자기 구원을 의식하고 그래서 혹 범죄하여 자기 구원을 잃게 되면 어찌 될까 전전긍긍해 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 자세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하늘에 올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신분으로서 이 세상에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요 20:21,22] 하나님의 아들로서 일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친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보내심 받아 우리 위해 일하신 바로 그 형상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실 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합니다”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니[고후 6:1]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나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은 하나님과 함께 부지런히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는 때요 이 세상은 그 작업장입니다. 그래서 “손에 쟁기[경운기가 없던 옛날 마소에 끌려 논밭을 갈던 농구(農具)의 하나]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 하셨습니다. 지금의 경운기는 더욱 더하니 전방을 주시하지 않고 기계를 운전해 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일하는 자는 일하는 것뿐이지 일하는 것 외에 이것저것 관심을 가질 때에는 주님 말씀대로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시간과 세월을 보냈다는 증거가 되는 까닭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 우리 구원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일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신데 나는 딴전을 피운다면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함입니다. 한 몸에 속해 있지 않음 즉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니 어찌 멸망이 아니리요. 일하라고 보내심 받은 것이요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라고 보내심 받는 것이니 곧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라고 보내심 받는 것입니다[요 4:34].

그래서 이와 같이 하는 것을 보내심 받은 자의 “먹을 양식”[:34]이라 하셨습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고로 그와 같이 일해야 하는데 일하지 않으면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멸망을 의미합니다. 원래부터 인간에 관한 한 "죽음"은 멸망입니다. 영생하도록 창조하셨는데도 죽음일진대 그것은 영원히 살지 못함 즉 멸망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사는 것은 한 몸 체제로 사는 것이요 공정공평하게 똑같이 하나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 외의 어떠한 삶도 용납되지 않고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이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에 한하는 시한부입니다. 그것도 일정 기간 사는 것도 아니고 내일이라도 죽고 지금 이 시간 후에도 여차하면 죽게 되어 있는 것이 이 자연계에 속한 생명의 덧없는 실태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작업장만 아니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장(戰場)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사람 살리는 일을 한사코 반대하고 방해하는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입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인생들로부터 경배 받는 따위의 일은 어린애 놀음입니다. 딴에는 사력(死力)을 다해 이 사람 구원의 일을 저지하려 하므로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상대적인 힘의 강약에 의해 편파적으로 쏠려 있는 터이므로 의지력으로 좌우되는 정신적인 우열(優劣)을 다투는 한판 전쟁입니다.

우리는 사력을 다해 사람들을 구원해내려고 하는 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은 이를 한사코 저지하려 하니 그럴 듯한 한판 싸움입니다. 우리가 굽히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기는 것이고 우리가 굽히지 않고 초지일관으로 사람 살리는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온갖 고난을 참아가며 죽는 것도 기꺼이 사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을 요한 계시록에 “이기는 자[overcomer]로 표현한 것이고 주님 친히 천국은 ”침노하여 빼앗아 차지하는“[눅 16:16/마 11:12]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려운 일을 쉽게 해 주시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든 쉽든 그런 것은 불문하고, 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데에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주시는 힘이지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우리 스스로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할 만하기 때문에 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다고 물러서고 어렵다고 물러서고 고생스럽다고 물러서는 자에게 화가 있습니다[히 10:38]. 그러면 하나님께서 알짜배기 사람들만 골라 구원하시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은 내치시는가 하겠는데, 사람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되는 구원에는 똑같이 평균되고 평등하며 더 주고 덜 받고 하는 일이 본질상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강한 자로 새로이 창조하시지 약한 자 그대로 남겨두고 창조하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한 사람 그리스도를 선물로서 똑같이 받기 때문에 개인 차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이시므로 여기에는 많이 받고 적게 받는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열매를 맺어도 사람 따라 30, 60, 혹은 100배라는 차이가 나는데 이는 오직 각자가 얼마만큼 사랑하느냐 하는 그 차이에서 오는 것뿐입니다. 단지 내가 얼마나 사랑하느냐 함에 따라 나타나고, 나타나되 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내게 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지는 능력입니다.

즉 많이 사랑하여 열심을 더 내는 자에게는 그만큼의 힘이 나타나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또 그만큼의 힘밖에는 나타나는 것이 없습니다. 내 나름이고 나의 사랑 나름인데 부질없이 누구에게 책임을 씌우려 할 것입니까. 한 몸으로서의 삶은 모두가 똑같이 평균됨에 있습니다[고후 8:13,14]. 이런 것이 진정한 평등주의입니다. 이 세상과 같이 부자는 부유하고 가난한 자는 가난하고 하는 빈익빈 부익부의 불평등은 절대로 삶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물거품으로 돌아갈 아주 일시적 현상입니다. 한 몸 구조에서 하나만 아파도 모두가 다 아픕니다[고전 12:26]. 고로 이 세상이 고통 받는 세상임을 감안하더라도 나 혼자 편안하여 삶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님을 자체 증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신음[여인의 진통(陣痛) 시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있는데 나 혼자 안락을 즐긴다면 이는 복이 아니라 화근(禍根)이 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살고 형통한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커녕 사람 삶의 ABC도 모르는 어린애 같은 유치한 말로서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른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 아이라도 그런 생각은 아니하니, 이는 양심이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도 구원에 입문(入門)조차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절대로 그런 식으로 가르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도 하나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니 통일되게 가르치십니다. 성경과 반드시 일치하게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믿을 때 똑바로 올바르게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가까이하여 항상 읽게 되면, 이와 같이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이는 친히 약속하신 대로[마 7:7] 항상 하나님이 상대하시고 가르치시므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일부러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자를 만들어 이단 사상을 주입시키는 술책도 당연히 벌입니다. 이는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방식의 방해 공작입니다. 금식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지나치게 하는 이들을 만들어 같은 수법을 씁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지는 않습니다. 성경대로 하면 됩니다. “성경대로 하니까 이러하니 보라, 어떻게 되었나” 하는 것은 마귀의 술책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므로 그에 따라 보상하십니다. 성경을 읽어도 자기 스스로 무엇을 알아내어 사람 앞에서 과시하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이들도 예컨대 있는 것이니, 그런 이들은 영락없이 마귀의 올무에 걸립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니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십자가 상에서 부르짖으신 것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의 유일무이의 의인으로서 그렇게 고통 중에 부르짖으신 것입니다. 오직 우리를 위하신 죽음이셨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자신을 버리시기까지 자신을 우리 각자에게 선물[선물이란 뜻은 영원히 나의 소유가 된다는 뜻]로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이니 우리와 이제는 일심동체라 우리와 운명을 같이 하시므로, 하나님이 갑자기 마음이 변하셔서 어떻게 하시지나 않을까 하는 것은 이제는 완전한 기우에 속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라 하면 전지전능 무소부재의 창조자로서만 인식하여 혹 무엇이라도 여의치 못하시면 그 피조물을 어떻게 해버리실 수도 있는 그런 존재로 착각하고 전전긍긍 불안해질 수 있다 하겠지만,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써 그런 모든 것이 한낱 부질없는 생각임을 증명하심으로써 영원히 정리해 주신 것입니다. 고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후 우리 모든 인간[물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의미]에게 하나님을 가리켜 선언하시기를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 관계를 완전한 가족 개념으로 확고하게 정착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임마뉴엘[Immanuel-God with us, 우리와 함께 되신(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만 ‘임마뉴엘’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 모든 인간이 모두 ‘임마뉴엘’에 속합니다. 그래서 구약 예언서에서 “그 이름을 ‘임마뉴엘’이라 할 것이다” 하신 후로 성경에 다시는 그 이름으로 예수님 친히 불려지신 일이 없으니 이는 그리스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된 우리 모두의 공통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그 아이들[God and His children]”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이 우주에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연히 그 중의 맏아들이심을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여러[많은] 아들들입니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 그런 가족 개념으로 예수님 오실 때까지 상징화되어 존속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여 말할 때 스데반은 모세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광야(廣野, 荒野)를 통과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 교회”라 지칭했습니다.

왜 ‘광야’이냐 즉 광야란 말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죽음과 고통의 저주 받은 세상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우리가 알다시피 사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광에서 생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실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광야 교회가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고전 10:6]고 하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나가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니 곧 홍해의 사건을 우리의 세례 받음에 바울 사도는 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나온 이들이 다 가나안 땅[천국으로 상징된]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비율로 따지면 60만 장정[20세 이상] 가운데 겨우 갈렙과 여호수아 둘뿐입니다. 이는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그래서 부르심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심 받은 자는 적다 하셨습니다. 때문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경고입니다[히 3:7-4:2/고전 10:1-11].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 9:27]고 말한 다음 곧 이어 이와 같은 이스라엘 광야 교회가 “거울이 된다”는 경고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집트로부터 탈출했다는 사실만으로 방심할 일이 아님을 이로써 분명히 보여 준 것입니다. 아담이 방심하고 있다가 죽음에 이른 것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방심하다가 영원 멸망에 처해진 것이 또한 우리에게 거울이 됩니다.

부활하신 후 50일 만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상에 강림(降臨)하시기까지 [혹은 승천하시기 전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분부하시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남은 자들”로 상징된 유대인들[12 지파 중 유다 족속과 벤야민 족속] 역시 ‘교회’ 또는 ‘하나님의 백성들’ 또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강림 후에는, 유대인들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민족 중 그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 이들로 구성되는 하나님의 대가족이 신설되어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어록(語錄)은 그런 배경으로 그 몸된 교회에 주시는 가르치심입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하나님의 가족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난 이스라엘이 앞서의 언급대로 유대인들의 유다와 여타 종족[혹은 지파]들로 구성된 이스라엘로 나누어졌다가, 후자는 그 후 범죄로 인하여 이 가족 구성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나가 그 종적이 끊어져 버렸으니 이는 아무리 하나님의 가족으로 처음에는 구성되어 있으나 스스로 범죄하는 개인마다 이 가족의 구성체에서 탈락되고 낙오됨을 상징하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을 먼저 이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부터 시작하게 된다고 성경에 밝히고 있습니다[히 10:30/벧전 4:17]. 말하자면 염소와 양이 구별되는 것과 같이 갈라 내어지는 것입니다[마 25:32]. 이 양과 염소 비유에서 “모든 민족을 모으신다”는 것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자처하고 있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들 모두가 다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그 비유 말씀에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고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은 이 한 몸을 이루어 있는 교회 구성원을 가리킵니다. 한 아버지를 머리로 모신 한 몸의 가족입니다. 물론 기타 이 구성에서 제외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역시 사랑함은 당연하나, 나 자신과 함께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 나 자신처럼 지체가 되어 있는 나의 믿음의 형제와는 그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갈 6:10]. 이러한 사람들은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차원에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고 그들에게 베푸는 선행도 그런 차원입니다[:10].

그들 역시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의젓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고로 우리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천국이라는 이상향은 하나님의 대가족 구성을 말하는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이 가족 구성원이 될 사람들을 찾아내어 새롭게 만드는 일 곧 하나님의 새 창조에 동참하여 새 생명 탄생시키는 일이니 따라서 산고(産苦)의 진통이 필수, 필연입니다. 저주, 죽음의 이 세상 질서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죽음과 저주에 이르지 않았다면 이런 산고 없이 인간[아담]은 자녀들을 생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자가 받는 저주로서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여 네가 고통 중에 임신하게 된다”[창 3:16] 하신 것이 이 의미입니다. 왜냐면 저주 받기 이전에 아이를 잉태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몸과 자연계에 속한 몸의 차이를 나타내시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남자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이 챙겨질 수 있다 하셨는데[:19]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에덴낙원이 영계가 아니라 자연계였다고 가정한다면, 앞으로 태어날 많은 인구가 그 에덴동산에서만 살 것이 아니라 지상에 널리 흩어져 살 것이고 그리 된다면 자연 노력하고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밖에 없는데 이 또한 굳이 ‘저주’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주가 되려면 신령한 몸으로 신령한 세계[에덴낙원]에 있을 때는 먹고 살기 위한 그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노동과 노력이 필요 없었다는 사실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선악과를 먹어 범죄한 결과로서의 저주를 내리시는 시간인데 “네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시고 새삼스럽게 지적하실 리도 없습니다.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처음부터 영생하게 되어 있는 까닭에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처음은 창조되었으나 나중에 영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다시 그렇지 않을 것이기에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저주로 인한 죽음의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친히 우리와 하나 되심으로 저주 받으심으로써 우리 위해 나무에 달리신 것이니[“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다”-갈 3:13], 이런 저주 가운데에서의 우리와 하나 되시지 않고는 우리와 그 하나 되심을 통해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골 1:24]이라 함은 바로 이런 성격의 고난입니다. 즉 상대의 죽음의 고난과 내가 먼저 하나 됨을 통해 당연한 그 다음 순서로 상대가 나의 생명과 하나 되게 함으로써 그 상대를 합법적으로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 전환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즉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고난 받음은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일에 필수 불가결의 요소입니다. 우리 자신의 고난으로 이 살리는 일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어디까지나 동참(同參)함이니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의 이치로써 그러합니다. 그리스도 친히 나의 몸을 통해 그 남으신 고난을 마저 채우시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사람 살리는 일이 시급하고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일인데 그리고 사람 살리는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고 죄인들의 저주로부터 건져내는 데에는 그 저주와 함께 됨으로써 가능한 것이니, 불에 갇힌 사람 구조하기 위해서는 불 속으로 뛰어듦과 같고 물에 빠진 사람 구출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 물과 멀리해서는 안되는 이치입니다.

그런즉 이 세상 어디에서 나 자신을 위해 삶의 낙을 누리고 “하나님의 축복 운운”하며 잘 살고 형통하기를 감히 입에 담을 일입니까.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복음 전파로 사람이 구원되는 데에 있어 오늘이라도 이 일만 종료되면 내일이라도 세상은 종료되는데[마 24:14] 정신 나갔다고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할 것입니까. 그래서 이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의 의인들은 사람 살리는 일에 매달려 있어야 하므로 그래서 죄인 아닌 죄인으로 반드시 위치해 있어야 하는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죄인의 위치에서 고난 받으심과 같이] 소수이고 약하고 핍박의 대상이 되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제대로 견뎌야 하나님의 아들됨에 합당하다는 판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끝까지 의인은 고난 받으라고 독려하는 판인데 억지로 믿게 한다고 믿을 사람이 있겠으며, 오직 진실이고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기 때문에 고난 받는 것도 불사하는 법이니, 굳이 성경을 거짓말로 꾸며댈 필요가 없다는 것이요, 거짓말로 꾸며댄 것이 조금이라도 드러날 경우 그런 사람들마저 아예 믿기를 거부할 것이니 이런 자가당착의 일을 성경이 할 리가 없다고 앞에서도 설명했습니다.

고달픈 인생살이에서 아무도 고난 받는 것을 즐기지 않는데 도리어 고난 받을 것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인간의 소리일 수가 없고 엄정 엄숙한 하나님의 말씀일 것이 분명하니 마땅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고난을 받아도 세상에서 인정을 받음으로써 그 대가를 얻는 것도 있으니 힌두교[인도]의 소위 성자(聖者)들이 그 예입니다. 그들은 그 고행(苦行)으로 성인들로 숭앙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난은 자기 부인이 그 밑바탕입니다. 자기를 과시하다가는 모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 판입니다. 우리가 황공하게도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의당히 우리가 자격이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부터 먼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즉 순종하겠다는[아들로서] 약속만 진실성 있게 하면[이것이 회개입니다] 그 약속을 액면대로 수용하시고 즉 순종하리라고 믿어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부터 되게 하십니다.

양자(養子)의 영으로서의 성령을 받으니[롬 8:15] 그런 당연한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은혜이고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 곧 ‘하나님의 아들됨’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이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생은 약속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못박았음을 앞에서도 지적했습니다[요일 2:25/히 4:1/10:36/약 1:12]. 하나님의 아들됨이 실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굉장한 조건을 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무엇이든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으나, 오직 친히 관여하실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므로 그래서 “내 아들아, 네 마음을 재게 달라”[잠 23:26]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을 어린애 같은 마음이면 그 ‘마음’ 하나로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실 수 있는 것이므로 “뜻밖”이라 할 것도 없고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막 10:15]. 어린애 같이 믿고 사랑하고 따르는 마음, 자기 자신의 의견대로 하지 않고 제 멋대로 행하지 않고 입맛대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마음입니다. 아이가 엄마 시키는 대로 하는 것과 같이 하는 마음, 단지 그 조건을 다시고, 그리고 철저히 이를 요구하십니다. 이런 요구 하나 응해 드리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커녕 피조물로서의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를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지극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는 줄 알면서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을 성령으로 내 안에 모심입니다[요일 5:11,12].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고 영생이 있으나 내 스스로 그 약속을 이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대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관계이므로 어느 누구든 대신해서 사랑한다는 그런 말은 하지도 않고 그런 일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본인 당사자 스스로 사랑하면 하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않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마땅한 본분을 다해야 하는 것이 오직 내게 달려 있습니다.

순종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도 내가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도 내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구원을 이뤄야 하는 것이고[빌 2:12] 내 자신을 구원해야 합니다[딤전 4:16].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자기의 의지를 밝히고 그 의지대로 행하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구원 받은 상태입니다[빌 3:10]. 자동적으로 내가 부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부활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반드시 내 스스로 부활에 이르려 할 때 즉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과정에서 반드시 받게 되어 있는 고난을 받고 그 결과로서의 부활에 이르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 곧 “항상 복종하는”[빌 2:12] 것이 곧 "나의 구원을 이룸"입니다. 그 순종의 믿음으로 내 스스로 “나를 구원하고” 내 스스로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빌 2:12/딤전 4:16/빌 3:8,9/딤후 3:15].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 했고[히 5:9],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임을 명백히 한 것입니다[행 5:32]. 물론 내 스스로 이룬다고 내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능력, 그리스도 친히 그 능력으로 ‘나를 위하시는’ 자기 역할을 하시게 됩니다. 내 역할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 그리스도의 역할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는 것이므로 내게 모든 능력이 되시는 그 의미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아들부터 되게 하셨습니다. 능력이 있어야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능력되시는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시기 때문에 은혜로 구원 얻음이요 거저 주시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므로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능력부터 먼저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취지를 많은 사람이 오해하여 그 마땅한 순종을 스스로 생략해 버리는 과오를 범하는 어리석은 자멸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너무 동떨어지게 하나님의 구원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 구원을 사력을 다해 방해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책동에 넘어간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  혹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실진대 좀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기술하도록 왜 조처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이와 같은 복음서 몇 편 및 사도들의 편지 글을 모은 형태의 성경이 가장 이상적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이 인간 세상 배후에는 항상 악령들이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니, 인생들만의 세계, 인생만이 활동하는 데가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온갖 장애를 고안해 내어 어찌하든 진리 아닌 것을 믿도록 유도하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는 그들입니다.

따라서 일목요연하게 체계가 선 설명이 되어 있다 가정할 때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서는 이에 대처하기가 상대적으로 훨씬 쉬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핵심 대목이 여기 저기 산재해 있고 그것도 간략한 한 줄의 문장 혹은 단어로써 기술되어 있을 때는 아무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 할지라도 집중력이 산만해져 어느 것을 어떻게 먼저 손대야 할지 종잡을 수 없게 된다는 말도 일리가 있게 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도 사람을 통해 나타나게 되어 있으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이 아니라 그 사주를 받는 사람[들]이 그렇게 산만해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계시를 믿고 부지런히 성경을 읽음으로써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자에게만 진리가 열려진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렇게 일견 허술하게 중구난방으로 기술되어져 있는 것도 크나큰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진정으로 찾지 않는 자는 그 찾은 것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덜 느끼게 되고 따라서 소홀히 하여 걸러지고 솎아지게 되어 있는 그물에 자연스럽게 걸려 드는 그런 장치 역할을 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자기 구미에 맞는 몇몇 대목만을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해석하고 고집하도록 하여 교만한 심령들이 추려지는 효과도 있게 됩니다. 앞에서 설명한 악한 자들을 걸러내는 함정, 올무 역할입니다. 사도들의 서신 특별히 바울이 쓴 편지들 가운데 당시의 특수 사정에 해당되어 오늘날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주제가 장황하게 설명되는 있는 현상을 보는 것도 그런 예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당시는 믿는 이들 가운데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생겨나 모세 율법이 지시하는 할례까지 받아야 구원된다는 주장을 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는 때였으므로 이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 역점을 두었던 내용이 그대로 가감 없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뿐인데, 이를 오해하여 마치 “행함이 없는 믿음”[야고보가 헛것이라 하고 죽은 믿음이라고 그렇게 강조해서 밝혔음에도 불구하고]을 믿음인 줄로 인식하는 오류에 많은 사람이 빠져 지금까지도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왜 행함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믿음으로만 구원이 되는지에 대한 앞의 설명과 같은 그 분명한 이치는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않는 채 덮어놓고 순종의 행위 없이 특정 사실만을 사실로서 인식하기만 하면 구원되는 줄로 알아 심지어는 내 스스로 믿는 것이 확실할진대 경우에 따라 극한 상황에 이르러 가족 기타 등등을 고려해서 주님을 부인하더라도 구원은 받는다는 식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소위 기성교회를 부정하고 성경대로 잘 믿는다는 이른바 소(小) 그룹 집회를 강조하는 집단들이 그런 주장을 합니다. 제멋대로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찢어놓은 대로 천 갈래 만 갈래로 멋대로 해석하고 풀이하여 자멸(自滅)의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흘려갑니다. 이런 것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것을 싫어하고 도리어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이들이 누구나 걸려 들게 되어 있는 함정 역할을 하는 소리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는 사람들이 걸러지는 역할도 성경이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수선하고 엉성한 것 같으나 그럼에도 한결같은 무섭도록 일관성 있는 논리를 유지하여 오직 하나의 메시지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를 열망하시지만, 이미 영물들 중에 일부가 타락하고 그 영향으로 아담이 범죄한 사실에서도 보여졌듯이, 하나님의 사랑스러우신 뜻에 어긋나는 것은 불가피하게 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 몸 체제에서 암세포와 같은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암적 폐해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모든 짓거리에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악인들이 자행하는 결과로도 넉넉히 입증되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설명해 온 것은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 이상으로 최고 선(善)이 없습니다. 그 이상으로 최고의 의[義, 올바른 것]가 없습니다. ‘공동체 의식’이니 ‘하나님의 대가족’이니 ‘구원’이니 ‘영생’이니 하는 것이 모두 이 사랑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롬 13:9,10].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원리원칙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생명의 법질서 역시 사랑의 법질서입니다. 이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하나님의 위엄이 엄존(儼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소멸(燒滅)하는 불”[히 12:29/10:27]이시라고도 합니다. 이 하나님의 양면성은 항상 존재합니다. 즉 “위엄”과 “인자”[롬 11:22]입니다. 엄할 때는 아주 엄하고 사랑이실 때는 한없는 사랑이시니 이런 것이 이상적인 어버이 상(像)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범죄할 때에는 반드시 꺾입니다[:20]. 범죄하기 전에는 범죄하지 않도록 만단설화로 우리를 타이르시고 경계하시고 오래 참으시지만 일단 범죄의 경우 절대로 아껴 보시지 않습니다[:21].

광야 교회 즉 모세가 가나안을 목표하고 광야 길로 인도하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읽는 우리 자신이 보기에도 짜증이 날 정도로 몇 번이고[성경은 “열 번”이라 했습니다] 변덕을 부리고 하나님을 실망케 해드려도 하나님은 참고 또 참으신 것을 봅니다. 그러다가 최종 시점에 이르러서는 인내의 한계에 달하셔서[무작정 참으시는 것은 오히려 일을 더 악화시킨다는 것을 우리도 상식과 체험으로 알고 있음과 같이] 더 이상 용납하시지 않고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갈렙과 여호수아 단 둘만 제외한 당시 60만의 장정]을 40년 기간에 걸쳐 광야의 시체가 되게 하셨습니다[히 3:17].

그래서 “두려워하라”[:20] 했습니다.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입니다[빌 2:12]. 우리 위해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신 한없는 자비와 사랑의 화신으로서만 우리가 주님을 일방적으로 아는 것이 일반적 현실이지만, 성경은 “주님의 두려우심”[고후 5:11]을 말하여 그 양면성을 밝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자이심과 동시 심판주[審判主, 재판장]이십니다[:10/마 7:23/25:45].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 떠나든[살든 죽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9]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 만드신 동식물의 모습과 생활 양태를 얼핏 보아도, 유머감각이 아주 풍성하신 분임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육체로 계실 때 웃으셨다거나 어떤 일을 즐거워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짧고 간결한 성경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우셨다”는 대목이 복음서에 두 번 나옵니다. 그리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는 기록이 히브리서에 한번 더 나옵니다. 그만큼 우리의 현재 실상이 너무나 비극적이고 참담하기 이를 데 없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 얻는 방법을 여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막 10:19].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하시고 “가진 모든 재산 다 처분하여 가난한 자에게 흩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탐내지 말라”는 등의 계명을 다 지킨다는 청년에게 탐심의 본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자기를 위하는 모든 것 곧 자기중심입니다. 고로 계명[율법]의 본질은 그것과는 반대로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음[고후 5:15]에 있는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따라서 청년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낙심 중에 물러갔으므로 결국 탐내지 말라는 계명 따라서 모든 계명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약 2:10] 자신임을 자각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 청년이 주님의 말씀을 수용하는 자세라면 하나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임을 스스로 깨닫고 모든 것 다 버리고[왜냐면 그런 것은 영생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장애가 되니 영생을 진정 얻기 원한다면] 베드로나 요한처럼 주님을 따랐어야 하는 것입니다.

청년이 예수님을 “선하신 선생님”이라 불렀을 때 “어째서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하신 것은 청년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닌 사람으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 않고는 영생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청년은 처음부터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사람이 계명을 지키면 영생한다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행함으로 구원 얻으려는 혹은 구원될 수 있다는 망상입니다. 계명을 지키면 사람이 선할 수 있고 따라서 영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선한 인간이 아예 존재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지은 그 죄악[이미 범죄한 결과]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물어 그 대가[죽음]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서 이렇게 죽은 자가 아무리 계명을 지킨다고 될 일이 아니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으므로[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통해] “나를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계명 지키는 것을 말씀하셨던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하면서 “탐내지 말라”[계명 중 하나] 한 것을 예로 든 것을 기억합니다[롬 7:7]. 청년은 부자이기 때문에 그런 탐심을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네 가진 것을 다 처분하여 가난한 자에게 흩어 주라”고 핵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설명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율법]은 우리가 계명을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죽은 자’임을 깨우쳐 그리스도로 나오도록 하는 그 안내자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첫째 의미이니,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둘째는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하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두 죽은 자로서 계명을 지킴이 아무 의미가 없고 그 계명은 바울의 설명과 같이[롬 7:12-8:13] 우리 스스로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게 하는데 있지만, “계명들을 지켜야 생명에 들어가게 되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확고합니다. 다시 말해 죽은 자로서는 지킬 수 없는 계명으로서 이 경우 계명은 죽은 자임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당연히 하게 되는 것이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있으므로 산 자이기 때문에 그 계명은 지켜야 마땅하다는 의미입니다.

지킬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지킬 수 있는 것이며, 지킬 수 있음에도 지키지 않으면 짐짓 범죄하는 즉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죄를 고의적으로 짓는 것이 되어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계명[율법]을 지키는 것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을 말함입니다. 고로 부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영생 얻는 길은 하나님의 계명 지킴에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목적이기도 합니다[고후 5:15]. 계명 지킴 곧 이웃 사랑의 핵심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이니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으로 통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통합됩니다. 머리와 몸 관계입니다. 머리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몸은 그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처음 대하는 사람은, 이전의 자기중심의 버릇을 따라 영생을 추구하던 것을 버리게 되는 것이니,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위주했던 모든 것을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만을 위해 살기로 작정할 때 지난 날의 죄가 용서되고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자기를 위할 아무 필요가 이제는 없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를 살려 주셨고[구원해 주셨고] 영원히 그 사랑으로 나를 변함없이 위해 주실 것이니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래서 그런 생각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위해서만 살리라는 새로운 결심이 생기게 되는 까닭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아 그리스도께서 나와 하나 되어 계시기 때문에 영생이든 영광이든 만물이든 다 내가 그 상속자(相續者)입니다. ①모두가 내 것인데 그래서 나를 위할 필요가 없습니다. ②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를 위하시기 때문에 나를 위할 필요가 없는 것이 그 다음 이유[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심에는 나의 믿음의 형제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나를 위하는 것도 물론 포함되는 것이니 주님의 이름으로 위하니까 이는 주님 친히 위하심의 뜻이 되는 까닭]입니다. 또 내가 ③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나'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무덤 속에 묻혔으므로 나를 위하지 않는 것 역시 그 이유입니다.   

이 세상은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로써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과 그렇지 못할 사람들을 걸러내는 장소입니다. 이 선별 작업은 영물들은 이미 에덴낙원에서 다 끝마친 상태입니다. 그래서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로 현재 양분되어 있습니다. 인생들은 이 세상에서 그런 작업을 합니다. 벌써 이 세상에서부터 이와 같이 걸러지는 관계로 천국에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와 같이 걸러내는 일이 없어집니다.

혹자는 무리한 해석을 하여 영생 얻는 것은 물론이고 가외로 상(賞) 타기를 위해 노력한다고 하는데 이는 성경의 구원에 대한 기초 지식마저도 없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상이든 무엇이든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 구원 받음입니다[고후 5:15]. 또한 만유를 다 차지해 있는데 무엇을 또 얻을 것이 있다기에 상을 탄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까.

주님 좌우편에 앉는 것을 상이라 가정해도 이것은 사람이 얻으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 밝히셨습니다[마 20:23]. 욕심 낼 것이 아닐뿐더러 방금도 지적했듯이 이런 것은 순수하게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자기중심의 부끄러운 모양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목적에 위배됩니다[고후 5:15/롬 14:9]. 앞에 설명한 바 각자 자기 구원을 이루라는 성경의 경고를 전혀 엉뚱한 것으로 착각하는 데에서 빚어지는 혼돈입니다.

§  성경에, 하나님께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인간에 두셨다고 했습니다[전 3:11]. 그러나 영역(英譯)은 ‘영원성, 영원한 것[eternity]’을 마음에 두셨다고 되어 있고,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는 말이 이어집니다. 고로 이 두 대목을 반드시 연결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즉 훨씬 오래 전 과거 그리고 먼 미래의 일까지 두루 섭렵하려는 인간의 이지력(理智力)을 가리킴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영생하기를 바라는 욕구를 마음에 두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성을 이해할 수 있는 지성(知性)을 주셨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라 해석해야 옳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반절(下半節)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 밖이라”는 말이 살아나게 됩니다. 성경을 급하게 읽을 일이 아닙니다. 또는 의무로 여겨 하루 몇 장씩 읽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 아닙니다. 단 한 절이라고 깊은 명상 속에 기도하면서 읽는 것이 옳습니다. 죠지 뮬러는 대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세에서 읽었다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6일” 창조

창세기 기록으로 다시 돌아가, "6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대로의 날[이는 4일째 창조의 결과이므로] 수 계산이 아니고 '창조의 날 수 계산'이므로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날 수 계산"이라 별도의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그러므로 그 창조의 날 기간은 도대체 우리가 아는 연월일로 따지자면 얼마가 되는지 알 수 없고 성경도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말씀대로 빛이 있게 되었고 그리고 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셔서 빛을 낮이라 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하시고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것이 첫째 날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태양광으로 인한 낮과 밤의 구분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4일에도 동일하게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는 말씀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제1일의 "낮과 밤", 제4일의 "낮과 밤"이 다름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아는 대로의 낮고 밤은 아직 생기지도 않았는데 벌써 하루 이틀 등으로 세어 가고 있으니 우리가 아는 대로의 낮과 밤, 아침과 저녁이 아님이 명백한데도 우리가 아는 6일이라고 황당하게 읽고 이해하니 성경을 읽을 때 얼마나 인간의 편견, 선입관이 작용하여 성경 해석을 그릇되게 하는지 이로써도 능히 알만 합니다.

태양광이 하늘에 아직 비치지도 않는데 어떻게 여기서 여기까지는 낮이요 그 나머지는 밤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해가 돋아야 아침이요 해가 져야 저녁입니다. 또 우리가 아는 대로 식물은 광합성(光合成)이 생명인데 제4일의 태양광이 생기기도 전에 제3일의 식물 창조부터 먼저 있느냐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겠으나 그 빛은 이미 제1일에 생겨난 것입니다. 4일의 태양광은 그 빛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태양만 아니라 모든 천체의 발열체(發熱體)에서 나오는 광채가 그 제1일 창조된 빛이 근원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주 천체(天體)가 그 때 창조되었다는 의미라기보다 이미 있던 것이 그 때 비로소 발광(發光)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창세기에 "별들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단지 "별들"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광명(光明)을 만드셨다"와 연결시켜 "별들의 광명도 만드셨다"로 읽어야 타당성이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다는 뜻이라기보다 그것들이 빛을 내도록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밤을 주관하는 작은 광명”[창 1:16]으로서의 달은 그 빛이 비록 반사(反射) 광이기는 하나 해가 발광함으로써 빛을 내기 시작했으니 그와 같은 표현이 가능합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모세 당시의 인간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설명이므로 “지식이 더해진”[단 12:4] 오늘날의 우리가 읽기에는 차질이 불가피하나 그러나 흠결(欠缺)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에덴낙원에서의 아담의 행적에 대한 성경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어디까지나 자연계에 속한 이 지상(地上)을 중심하고 이 지상 인간의 관점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것을 간략히 서술하고 있음을 앞에서도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령 “별”이라고 하면 지상에서 쳐다볼 때 밤하늘에 영롱하게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이상(異象) 중에 나타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다”[계 1:16]는 등의 표현이 그런 측면의 한 가지라 여겨집니다. 물론 이 경우 그 “별”이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안전하다 할 것입니다.

6일 창조 이전의 “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진 것은 물론입니다. 다만 이 "6일 창조"에서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6일 창조"의 "6일"이 우리가 아는 날 수 계산과 별도의 의미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고 그 이상은 현재로서는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자연계의 세상을 버리고 본격적인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면 그 때 자연히 알아지게 마련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특정 지식을 제공하자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사실만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일 창조 이전의 상황 즉 왜 물(水)이 처음부터 느닷없이 튀어나와 기존(旣存) 물질로 언급되고 그 물과 물 안의 뭍(the dry ground)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이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생략해 버린 것입니다. 구원에 관계된 최소한의 필요한 지식만 말하는 터이므로 태양 빛, 달 빛, 별 빛 등 모두 우리 지구와 관련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은하계와 그 외 많은 은하계 등이 모두 당시에 창조되었다고 억지로 한정해서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하는 말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우리가 아는 시간 개념의 하루 이틀 만에 만드실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6일 창조를 인간의 편협한 관점으로 무리하게 해석하여 이렇다 저렇다 속단함으로써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그 뜻입니다. 단지 그 상황에 맞는 표현을 우리 인간[그렇게 기록되던 당시의 인간의 지식 수준-모세가 이를 기록했다고 믿어지는 대로]에 맞게 그 정도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는 점만 감안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1일에 생긴 빛으로 인하여 밤낮이 정해지고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었다 했지만 그 빛의 특성과 그래서 생긴 밤낮을 우리가 모르는 이상, 아침과 저녁이 되었다는 것 역시 우리가 아는 것[제4일의 결과물]으로써 기준 삼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는 주야의 길이는 같은데 그런 식으로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주야 개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마치 자연계에 속한 생물체로서의 인간이 어두운 밤에는 일하지 못하고 밝은 낮에만 일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역시 사리에 맞지 않으므로 유치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그런 식으로 낮과 밤을 적용시키는 것이 제대로 된 해석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좋은 이상적인 해석은, 이 모든 기록이 진실이기는 하나 그 진실을 우리 식으로 꿰어 맞추려 하여 무리한 해석을 하려 하거나, 그렇게 안되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방자한 결론을 내리거나, 모두 어리석은 시도임에는 마찬가지이니 “진실이지마는 현재로서의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완전히 접어두고 더 이상 그런 데에 신경을 쓰거나 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쭙잖은 결론으로 섣불리 결론 내려 “창세기의 6일 창조의 기록이 우리의 이성에 반하는 것이므로 성경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식의 날림 공사나 일시 땜질과 같은 결론을 우리는 경계하는 것입니다. 자연계와 대칭이 되어 있는 영계는 물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연계마저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모든 것을 죄다 알고 있는 듯이 하는 그런 반응은 썩 이성인답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맨 마지막에 인간이 창조되니 이는 지금까지의 모든 "6일 창조"의 최고 정점(頂點) 또는 총결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인간을 기준해서 자연계와 대칭이 되는 영계를 만드시기 위해 인간의 육체에 영혼을 조성하셨고 그리고서 "에덴"낙원을 창설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자연계 창조의 종점(終點)이 됨과 동시에 영계의 시발점(始發點)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에덴"낙원이라는 영계(靈界)입니다. 이는 인간이 영계와 자연계를 아울러 다스리기 위함이니 그리 하자면 양 세계에 다 소속되어 있는 것이 합당한 까닭입니다. 이 영계에서 각종 영적(靈的)인 즉 신령(神靈)한 식물과 동물이 창조됩니다. 식물로 말하면 선악과(善惡果) 나무와 생명나무가 대표적입니다. 그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좋고(善) 나쁜 것(惡)을 알게 된다든가 또는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든가 하는 것이니 이런 나무는 이 자연계에 속한 식물은 아닙니다.

그리고 동물로 말하면 "뱀"이라고 하면서 사람과 대화를 하는 등 사람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직립보행입니다. 때문에 저주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배로 다니게" 됩니다. 처음부터 배로 기어 다니는 자연계의 생물이라면 그런 것으로써 저주를 내리실 리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동물 역시 이 자연계에 속한 존재는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영물(靈物)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곧 이 "뱀"으로서[계 12:9]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대로 "아담"의 아내 곧 최초의 여자를 거짓말로 꾀어 이 최초의 인간 부부를 죽게 만든 장본인 곧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즉 용입니다.

그런데 이 영계를 만드실 때 "에덴" 동쪽에다 그 동산을 창설하셨다는 것이 창세기의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에덴"이라는 곳이 있고 그 동쪽에 한 동산을 만드신 것이므로 이전에 없던 것을 처음 만드셨다기보다 기존(旣存)의 영계에다 사람["아담"]이 살만한 장소를 별도로 지으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그 기존의 영계가 언제부터 있었느냐 하면 앞에서 설명한 "그룹"과 "스랍"들이 창조될 당시의 자연계에 대칭되는 영계였다 하겠습니다.

자연계는 훼파되었으나 영계만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영계의 이름이 "에덴"이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없던 영계를 지으시고 그것을 "에덴"이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영계["에덴"이라는 이름의]의 동쪽에 사람["아담"]이 거처할 수 있는 곳을 따로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존재하던 자연계에 대칭되는 기존 영계에다, 이제 "6일 창조"로써 새로 구성되어 있는 자연계에 대칭되는 영계를 별도로 조성하셨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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