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23)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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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 청년의 질문

이미 주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은 "구원 얻는 자가 적습니까?" 하고 여쭈었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겠습니까?" 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 얻는 것이고 그것이 그 방법이므로 현재 주님을 따르고 있는데 이 따름이 자기 부인인 줄 알므로 당연히 그렇게 여쭌 것이나[자기 부인을 하는 자가 많지 않으므로-눅 13:24], 부자 청년의 그런 물음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자기 부인을 말씀하신 것이다.

부자 청년이 지켰다는 그 하나님의 계명의 본질이 자기 부인에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으므로 "어떻게?" 하는 그 방법을 여쭙지 않고, 자기 부인과 관계된 것을 여쭈는 것이었으므로 그래서 "구원 받는 자가 적습니까?" 하고 물은 것은 당연하다. 이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마 19:26] 하신 것이다.

사람 홀로로서는 천하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자살도 자기 부인이 아니고 산중에 홀로 들어가 소위 수양(修養) 득도(得道)하여 자기에게 관한 일체의 욕망을 끊는 것도 자기 부인이 아니다. 자기의 행복을 위하는 [그것이 아무리 정신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일체의 것이 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므로 자기 부인일 수가 없다. 부자 청년이 일체의 것을 버려도 그 행위 자체가 자기 부인일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을 따라야" 함이다. 부자 청년이 모든 것을 버렸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자기 부인을 위한 준비 작업은 될 수 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름과 같이 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주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그 부활을 내 부활로, 그 승천하심을 나의 승천으로, 그리고 그의 성령으로 내게 임하심을 내가 하늘로서부터 보내심을 받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되고 그것으로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로 그 토대 위에서 나는 하나님의 새 계명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된다. "사람은 못하나 하나님은 가능하시다"는 말씀의 뜻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질문 "구원 얻는 사람이 적습니까?" 한 것은 자기 부인과 관계된 것으로서 자기 부인하는 이들이 적다는 그 뜻으로 요약된다. 그 대답으로 주님은 좁은 길, 좁은 문을 말씀하시면서 그런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 경고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문, 그 길로 들어서기를 "힘쓰라" 하셨다. 그 질문에 그 답변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기 부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다. 그리스도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요 그리스도 안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당연히 이 은혜를 지켜 간수하고 끝까지 그 믿음대로 행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니 우리가 할 일이기 때문에 "힘쓰라" 하신 것이다. 이 같이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으니 곧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으로 양면이 조화되어 있어야 하고 어느 일방으로 될 수 없는 것임을 유의할 일이다.

고로 믿음은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힘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할 필요가 없다. 이 곧 믿음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믿음을 잘못 이해해온 것뿐이다. 믿으려고 힘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었으니 그 믿음대로 살도록 노력함이니 곧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힘씀이다. 이는 또 믿지 못하도록 하려는 시험이 많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 대처해야 할 것이 아닌가. 대처하지 않고서 그 시험을 막을 수 있는가? 대처한다고 해도 시험하는 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험해오는 터인데 하물며 대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랴.

이 믿음을 지키지 않을 때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빌 3:18] 것이 된다. 그런 사람들의 종말은 멸망이다[:19]. 시험하는 자가 바로 이런 결과를 노리고 시험하지, 할 일이 없어 시험하겠는가? 사탄은 딴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몹시 바쁜 자다. 결단코 필살[必殺]을 기하지 않고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만큼 또한 영리한 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도우심은 사실이나 그러나 이 도우신다는 말의 뜻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몫까지 도맡아 하신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닌 것이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끝까지 내 자신이 하는 일이지 하나님께서 하시면 그 때는 간섭이 되고 강제가 된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어도 하고자 하는 의지만은 나의 것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래서 은혜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은혜로 믿음으로서 그리스도의 이 능력 곧 생명력이 내게 임하셨기 때문이다.

사탄이 욥을 시험한 것도 그 때문이니 즉 욥 스스로 결정하고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 경우 뒤로 물러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욥기가 기록된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자기 부인을 믿음으로써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실 일도 아니요 자기 부인은 나 자신의 행동으로 입증되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내 스스로에 달려 있다. 주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하신 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말씀이시고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가 있다는 말씀이시니 곧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당연히 믿어야 하는 것이니 믿음이 해결책이다. 진실을 사실 그대로 믿는 데에서야 즉 불이 불이고 섶이 섶인 줄 아는 바에야 누가 감히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고자 할 것인가. 미치기 전에는 없다. 그러나 "믿지 않는 악심을 품을"[히 3:12] 때 그런 미친 마음이 된다. 고로 항상 이런 미친 마음을 스스로 경계해야 하는 것이니 그래서 "힘쓰라"는 경고를 하신 것이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피차 서로 경계하여 죄의 강팍하게 됨을 면하라 한 것이다[히 3:13].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는 관계에서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는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신다는 것은 그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이미 확증된 것이다.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그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요 한번 주신 것은 영원히 주신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을 가리켜 성령의 선물이시라 하는 것이다[행 2:38]. 영원히 나의 소유로 게시므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는다는 것은 똑바로 말해 나로서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을 뜻함이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이제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줄을 믿는 고로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다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고후 5:15/롬 14:7-9]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영원히 확증하셨고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확증할 차례가 온 것이 이 세상인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나 위해 죽으심으로 내가 영생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내가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자기 부인을 수반하지 않으면 그 믿음이 믿음일 수가 없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이라 했으니 그 심각성을 감지할 수 있음이 아니랴. 성경은 한 마디라도 허투로 말하는 법이 없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졌다 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 그렇기 때문에 매일 모인 것이다. 안식일이라 해서 그 한 날에만 모인 것이 아니다. 안식일이라 해서 모이면 제도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으니 수동적으로 모이는 의미가 되지만 매일 모일 때는 정작 필요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능동적으로 모이는 의미로 나타나게 된다.

매일 모일 정도로 각자 서로 경계해 주고 힘을 돋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기에 그러하다. 그 때의 상황이나 지금 이 때나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구원을 이루라 하지만 세상 종교에서 자력 구원을 시도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가 "구원을 이룸"은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므로 그 속에 불의가 없다" 하신 대로 자기 중심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 부인이기 때문이다.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천국이란 것은 우리 인간의 본향[本鄕]이 이 자연계가 아니라 바로 영계임을 말하는 것이다. 영계이기 때문에 하늘 나라 곧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다. 우리가 신령한 몸이 되면 이 땅만 우리의 주거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에덴낙원이 아담의 거소(居所)였던 것처럼 하늘과 땅이 모두 우리의 거주지가 된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 구름을 두둥실 타고 하늘로 오르셨고 세상에 오실 때도 구름을 타고 오신다 함이 이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영계의 존재로서 신령한 몸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영생하는 것이 인간 아담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연계가 절대로 인간의 거처할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죽음의 상태에서 즉 죽은 자로서 이 자연계에 있음이다. 이는 또한 새로 창조하심을 입어야 인간이 그 영계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첫 사람 아담이 먼저 자연계의 흙으로 그 육체가 조성된 후 그 안에 영혼이 창조되고 그 다음 순서로는 에덴낙원이라는 영계가 조성된 것으로써도 확인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여 다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오니 이는 다름아니라 이전 아담이 영혼이 있기 전 육체로만 있을 때와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이 영혼을 받아 영적 존재가 되자 거기 걸맞게 영계에 들어가게 되어 영생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처럼, 새 창조의 시대인 오늘날 그 당시 영혼에 해당되는 영이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이렇게 바로 그런 과정을 동일하게 밟아 그 때 그 에덴낙원에 해당되는 곳이 지금은 "천국"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처음 창조와 새 창조의 관계이니 동일한 순서를 밟으면서도 다름이 있어야 새 창조라는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즉 새 창조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 이루어짐이니 그래서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가 이상 설명과 같이 '영혼'과 '육체'의 관계라면 영육일체(靈肉一體)인지라, 영혼에 해당되시는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그 육체에 해당되는 내 자신이 한 일이 됨은 당연지사 중의 당연지사다,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 주님의 부활은 나의 다시 살아남과 현재 살아 있음, 그리고 그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음이 나의 현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과 위치, 그리고 성령으로 오심이 내가 다시 세상에 보내심 받음이 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육체'적으로는 이 세상에 그대로 있지만 나의 '영혼'이신 주님을 통해서는 이미 하나님 계시는 하늘에 갔다 온 격이다. 그리고 내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체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심은 [성령으로는 내 안에 그리고 이 세상에 계시나] 내가 현재 그와 같이 하늘에 위치한 것이 됨이다.

고로 나란 존재는 이제는 더 이상 나 혼자가 아니요 성령과 나 곧 그리스도와 나로서 구성되어 있으므로 이 육체 또한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몸의 구속을 받아야 '나'라는 존재는 전체적으로 옛 에덴낙원에 해당되는 천국에 들어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처음 창조와 새 창조와의 차이이니 곧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이다. 그리고 그냥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첫 사람 아담의 '영혼' 역할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 창조를 완벽하게 청산하고 명실 상부한 새 피조물로서의 새 출발에 관한 모든 구비 요건을 다 충족시킨 다음인 것이다.

즉 죽어야 마땅한 것은 죽음으로 청산하고 다시는 죄에 사로잡혀 죄를 짓는 일이 없고 죄에 팔려 죄를 짓는 일이 없이 오직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죄를 짓든지 의를 택하든지 하게 함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죽은 자는 죄로부터 완전 자유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은 세상 나라에 속해서, 마귀가 그 지배자 노릇하는 세상 나라의 그 권력과 영광을 맛보고 있는 터이다. 그러므로 이와 대칭되어 나타나야 하는 곳이므로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 또는 그리스도의 나라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기도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히 속해 있음"을 확인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 세상의 현실을 반영함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탄압하고 핍박하는 세상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우리가 실감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영계인 에덴낙원에 들어가 거기서 시험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범죄를 하게 되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죽음에 이른 것과 같이, 당연히 우리도 하나님의 새 피조물로서 첫 사람 아담과 같은 시험의 대상이 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아담처럼 그런 영화스러운 곳에 있으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 그런 종류의 시험을 공평하게[왜냐면 아담도 받았으니까 바로 그 기준으로써]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시험에서 떨어지면 에덴낙원 곧 생명의 세계로부터 <추방> 당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의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차단>되는 결과를 빚는 것만이 다르다. 첫 사람 아담이 그런 자유 선택의 기로에 서서 자기 운명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우리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 구원을 이루라[빌 2:12: 이 말을 하면서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빌 4:4) 했다] 함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것은 이와 같이 아담이 그 생명의 세계에서 추방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법질서를 지키라는 의미이므로 그렇게 그 법대로 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움직인 모든 것을 뉘우치고 다시는 동일한 짓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우리의 결의를 촉구함이다.

이 법질서 지키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영생 얻기만을 구한다면 그 사람의 종말은 아담의 상황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없으므로 회개하지 않는 것이요 따라서 구원에서는 제외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믿음과 구원을 자기 식대로 곡해하여 바로 이 비극적 상황을 되풀이하면서도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고 있으니 슬픈 일이다. 이것이 오늘날 "배도(背道)"[살후 2:3]의 주류를 이룬다. 생명의 법질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

이는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다. 누구나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부담되는 것도 없다. 어렵거나 복잡한 것도 없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그 사랑 가운데서 피조물을 만드셨으므로 그 피조물을 무척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을 따라 동료 피조물들을 사랑한다는 그런 간단하기 짝이 없는 취지다. 또 조물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니 나 역시 나를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내 사랑을 받을 대상일 수 있으랴.

이웃 사랑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하는 것이니 따라서 이 사랑에는 내 개인적인 기호 즉 누구는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 하는 것이 발붙일 틈이 없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사랑하지 않을 때는 바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판정되어 영원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마 25:45]. 때문에 요한 사도는 이 형제 사랑 없음을 가리켜 곧바로 살인죄라 한 것이다[요일 3:15,16].

바로 이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간단명료하게,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그 전부다. 과거에는 그렇다는 것을 비록 안다고 해도 힘이 없어 못했다. 그래서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라는 막강한 힘을 개인적인 선물로서 은혜로 거저 주신 결과로 넉넉히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하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그 속성을 알고 본질을 알고 그 의미를 알아야 함이다.

그런 것을 모르면 그 사랑은 절대로 사랑일 수가 없다. 사랑이라 스스로 착각하는 것뿐이지 실제 사랑은 아닌 것이다. 즉 사랑은 오직 자기 부인에서 우러나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진품(眞品)이다. 다른 것은 다 허울만 있고 알갱이는 빠진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는 조물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피조물이 한 시도 살 수 없다는 논리와 같다.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음'으로써 이미 달성된 터전 위에서 시작하는 까닭이다.

모세 율법은 인간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영원히 절대로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아주 엉뚱하게도 그런 줄로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만이고 오신 후로부터는 이야기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구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킬 수 있게 되기까지는 지킬 수 없음을 가르쳐주는 것이 모세 율법의 역할이다.

지킬 수가 없으니 자연 그리스도를 앙망하게 된다. 지킬 수가 없으니까 지키지 않은 그 결과로써 당연히 죽음밖에 없다. 죽은 자가 생명을 구하는 것이지 산 자로 자처하는 자가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법이 없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고대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모세 율법이 있었던 것이다. 즉 인간이 현재 죽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과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한 절대로 하나님의 의(義)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 따라서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기 부인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가장 이상적으로 지킬 수 있는 힘이 가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니, 그래서 회개하라고 한 것이다. 이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있음을 가리킴이고 또한 전제함이다. 지키고자 하는 우리 각자의 의지 여부만을 묻는 것이다. 지킬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라는 막강한 힘이 그 준비를 완료했다는 의미이기에 그러하다.

이를 설명하여 바울은 전도하기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으나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셔서 회개하라 하셨다"[행 17:30]고 했다. 이렇게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말씀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 자연 그 지키고 지키지 않음에 대한 심판 역시 가능하게 된 것이다[:31]. 따라서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고후 5:9,10]이라 했다. 이를 가리켜 "주님의 두려우심"[:11]이라 한 것이다.

또한 바울은 최후의 심판의 성격을 가리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자기 중심이 되어["당을 지어"의 우리말 번역은 오류]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심이니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다" 했고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고[롬 2:7-10] 둘을 대조해서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 세상이니까 선을 행해도 참고 선을 행함이다. 사탄이 그 신이 되어 재배하고 있는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야 즉 영원한 나라에서는 선행 자체가 무한한 삶의 낙이다. 자기 부인이 그러함과 같으니 자기 부인은 모든 사랑의 행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선행이란 것은 다름아닌 사랑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으로 뭉쳐진 세상이므로 선행을 하기가 여의치 않아 참고 인내로 행함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마지막 때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마 24:12,13] 하신 말씀의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갚으신다 함이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 혹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 하지 않았다. 믿음의 결과 또는 그 증거를 말하고 있는 까닭이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나타내리라"[약 2:18] 함과 같다. 실제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선행 즉 순종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니 그리스도께 우리를 인도해내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한 모세 율법이 가르친 바가 바로 그것이었다[롬 7:24]. 성경에서 선행을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으로서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은 우리 구원 자체가 아니라 그 모든 피조물이[인간이든 영물이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함으로 말미암아 이를 기반으로 하여서로 이웃을 위하게 하심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 얻는' 것만이 구원의 유일한 의미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결과로, "육신대로 살아도"[8:13] 구원은 얻고 죽는 것이 아니라는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방금 설명했듯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은 영원히 나의 짝이 되시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시는 '제2의 나', '또다른 내'가 되어 계심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죽음에 동참하심으로써 나의 죽음과 함께 하셨고 그리하여 나와 함께 다시 살아나심을 인하여 영원히 나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에서 나를 위해 영원토록 사시는 것이 됨을 따라 나 역시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고후 5:15/롬 14:7-9] 삶으로 혁신시켜 주신 것이다.

§ 구원은 약속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밝혀 두었다[고후 5:15]. 때문에 이 목적을 따른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마 7:20] 하셨고,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다"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어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임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이어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니까?' 할 것이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혀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21-24] 하셨다.

"많은 사람"이 그와 같이 한다 하셨으니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다. 행함이 있는 자라야 반석 위에 세운 집이라 하셨으니 바로 이 같은 경우를 그대로 족집게로 집듯이 말씀하심이다. 핑계 댈 수 없고 피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의 성격을 명확히 하셨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것이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하고,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라" 했는데[요 3:18] 웬 심판이냐 하겠지만,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하나님과의 약속임을 알아야 한다.

믿기 전에 회개가 필요함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신 사실을 시인하는 것으로 즉 세례 받는 것으로만 끝날 일이다. 그러나 회개가 선행되는 것은 향후 절대로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다는[고후 5:15/롬 14:7-9] 약속 즉 다짐이 필수인 까닭이다. 그래서 구약시대도 약속이고[구약] 신약시대도 같은 약속[신약]이다. 때문에 주님의 흘리실 피를 두고 "새 언약"이라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

약속은 절대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무슨 약속이든 그렇다. 가령 "내가 오마" 하고 약속할 때는 그 약속 상대자가 자기의 올 줄을 알고 기다려 줄 것을 다짐 받으려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즉 그  고난 받으심으로 생성되는 약조는 무엇인가? 성경에 이른 것과 같이 "산 자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심"[고후 5:15/롬 14:8/갈 2:20/빌 1:21]이다.

따라서 내가 그 약속을 어길 때 즉 나 자신을 위하여 살게 될 때면 주님 또한 나를 위하여 죽으신 사실이 무효가 된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약속 관계이기 때문이니, 이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 구절에서 "산 자"라 한 사실에 주목할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산 자, 다시 말해 과거 죽은 자로 있다가 이제는 산 자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모든 자가 죽었음을 의미할진대[고후 5:15] 이는 당연하다.

다시 말해 산 자라는 것은 구원 받은 자라는 의미가 된다. 구원은 바로 이렇게 산 자가 됨이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었으니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약속대로 내 편에서 제대로 이행하는 경우다. 바로 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여부가 심판되는 것이 마지막 심판의 의미다. 처음 약속대로 즉 처음 회개한 그대로 끝까지 나아가면 그 구원은 그대로 유효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무효이다.

이는 주님 말씀에 "나를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하고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하리라" 하심과 같다. 이는 바로 이 같은 약속 차원인 것이다. 처음부터 믿지 않는 이들은 물론 여기서 제외된다. 약속한 일도 믿은 일도 없는 까닭이다. 그들은 이와 같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들과 함께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멸망은 생명 곧 삶의 낙을 기준해서 하는 말이니 존재한다고 해도 삶의 낙이 없다면 그것이 죽음이요 곧 멸망인 것이다.

다시는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구원 즉 산 자가 되어 있다는 증거요 그 또한 삶의 철칙이므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아 자기를 부인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되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으로 이어짐은 필연적 귀결이다. 더 달리 결론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자기 부인 여부는 이 세상에서 대체적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갖가지 불이익 핍박 등 육체의 고난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보내심 받는 목적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과 같은 성격의 것임을 밝히셨으니["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즉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 곧 사람 살리시는 주님의 일에 적극 관여함으로써 대행(代行)하는 오직 그 일이 이 세상 머물러 있는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2] 한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의 구원의 의미를 부디 재고(再考)할 일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교리에 물든 얼룩지고 더럽혀진 구원관을 하나님의 진리 말씀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 이미 성경에 예언된 바 오늘날의 "배도(背道)"[살후 2:3]"의 특징이다. 배도의 일이 먼저 있고 악한 자가 나타난다고 한 것이다. 지금은 그 누구나 확신하고 있는 말세 곧 악한 자가 임하는 것을 예상하는 때다. 따라서 진리에서 떠나 인간의 교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하는 "배도"의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때가 되어 있는 것도 아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실례 중 하나가 소위 "양성 평등"이다. 이것은 진화론이나 무신론보다 더 교묘한 성경 박멸 획책인데도 그 어느 교회에서도 이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여 반박하는 일이 없다. 그야말로 꿀 먹은 벙어리로 일관할 정도로 진리에서 너무나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악한 자 자신이 자칭 하나님으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성경부터 다시 말살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이름으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도록 해야 함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버지", "아들", "남자는 여자의 머리" 등 표현으로만 일색이니 구태 의연한 구시대 골동품에 불과하다는 사탄의 공격을 막기 위해 그럼 성경을 당장이라도 뜯어 고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감히 손질하는 자는, 웃사가 하나님의 법궤를 보호한다는 생각에 함부로 손대다가 당장 척결처분을 당해 급사한 것과 같은 중죄가 될 것이다[삼하 6:6]. 하나님을 위해도 말씀대로 해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은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는 자가 거의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미 완전히 "배도"의 상태에 들어가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떠났다는 의미다. 물론 복음은 전해지고 있다. 요한 복음 3장 16절 하나만 해도 완전한 복음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어린 아이 같은 겸손한 그야말로 복 받은 사람에 한해서 통할 수 있는 소리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어린 아이 같은 사람 만나기가 그리 쉽던가. 모두가 똑똑해지려 하는 데에 몰두해 있는 세상이다.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가 어찌 복음이냐 하겠지만, 구원이 무효가 될 수 있는 경고를 말하지 않고 구원만 말하면, 마치 잘 쓰면 신통한 신약(神藥)이고 못쓰면 극약인데 극약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 않고 영약(靈藥)이라는 것만 알리면 그것이 과연 희소식이 될 수 있는가! 오늘날 숱한 사람이 이 소위 "신약", "영약" 때문에 빈사 지경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태가 이다지도 심각한데 이 엄청난 실상을 자각할 줄 모른다. 이 심상치 않은 병을 고칠 의사가 없이 약도 없이 그대로 세상은 흘러갈 일이 아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주님 다시 오시기 전에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처처에서 울려라!

§ 그리스도의 의미


몸은 영을 위하고 영은 몸을 위한다. 육체가 먼저 창조되고 나중에 그 육체에 거처하도록 영혼을 조성하신 것이다. 고로 육체는 영혼을 거슬러서는 무엇이든 할 수가 없다. 절대 복종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육체로서의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고히 하게 된다. 결단코 영혼이 존재한다고 해서 육체에게 손해나 지장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영혼의 제어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욕구가 너무 세어 영의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다면 말하자면 과식, 폭음 같은 것이라 할까.

그러나 영혼이 실제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의 자제력이 미약하여 육체의 욕구대로 방임되었다 해서 그 육체에게 절대로 유익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절제 없는 육체의 욕구는 결국 육체 자체에 파탄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육체는 항상 영의 지시에 따름이 필수이다. 우리가 불가항력으로[아담의 범죄로 시작되어] 죽음에 빠져 현재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처한 상황이 말하자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만 첫 사람 아담이 애초 창조된 것처럼 되어 있음이니, 현재 인간의 범죄 타락한 몰골이 그와 같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이 그 후 영혼이 조성된 것과 같이 우리 구원 즉 새 창조에서 이 영혼 조성에 해당되는 경우가 우리의 그리스도 영접이다. 첫 사람 아담이 먼저 육체이고 나중에 그 영혼이 조성된 순서대로 하면 우리가 아담의 육체를 물려 받아 인간으로 태어나 세상에 나오는 것도 가장 먼저 이 육체부터 조성되고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우리 영이 조성되는 바로 그 방법이다. 육체는 물질적인 것으로 기계적 생리 작용에 의해 조성되나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함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첫 사람 아담의 육체[범죄하기 전 즉 처음으로 육체로서 조성되던]와는 다르다. 우리 육체는 이미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탓으로 처음 신령한 몸이었다가 자연계로 되돌아온 과정을 거친 것이므로 더 다시는 신령한 육체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의 육체가 조성될 때는 아무 그런 내력이 없고 곧장 완전 성인(成人)으로 창조되어 영혼이 생기면서 이러한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위해 조성된 신령한 세계인 에덴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불순종은 그 이후에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로 이런 상태로는 더 이상 신령한 세계로 들어갈 수 없으니 그래서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한다"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육체가 다시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 영생하게 되는데는 부득불 하나님의 새 창조가 필요하게 되니 이를 가리켜 "다시 나야 한다"[요 3:3] 하신 것이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영혼이 있어 현재 영적 존재이기는 하나 이 같이 육체가 이미 더럽힘을 당한 또는 불가항력적인 죽음의 운명을 달고 나오는 자연계의 동물과 같은 육체로서만 한정된 것이므로 다시 말해 첫 사람 아담의 애초의 그 육체와는 전혀 다르므로, 이 육체는 어차피 죽어야 하고 죽음 외에는 달리 쓸모가 없고 항구적으로 사라져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이 애초 그 육체로 조성된 방식을 따라야 하는데 이미 나의 육체는 그런 버림 받은 상태이므로 그 육체는 버려져야 하고 애초 그 육체부터 창조되던 첫 사람 아담처럼 그런 육신을 새로 지니고 영혼도 받게 되려면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나와 같은 사람이 되셔야 함이다. 사람이 되신 이유는 이런 육체의 삶을 종결 지워야 하는 것이 그 첫째이고 둘째로는 범죄하기 전의 첫 사람 아담과 같은 그런 육체를 내게 조성해주셔야 하는데 있다.

왜냐면 지금 나의 육체는 아담처럼 영혼이 없는 순수한 육체가 아니고 영혼이 있어 그 영혼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여 죽어야 마땅한 죄인으로서의 육체이기 때문에 이 육체는 죽음으로 종결되는 과정이 필수, 필연이다. 그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고후 5:15], 부활하실 때는 완전히 다른 육체로 부활하신 것이다. 그 죽으실 때의 몸 즉 우리와 같은 몸이 아니셨던 이유다. 곧 신령한 육체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내 안에 오실 때는 그 몸 그대로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하나되심이므로 나는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으로 다시 날 때는 영혼이 생기기 이전의 아담의 육체에 해당되어 그렇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육체로 먼저 창조되어 영혼을 조성하시게 된 바로 그 순서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되는 나 역시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애초 창조되던 당시 아담의 모습 그대로 아담이 처음 창조되던 당시의 그 몸과 같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육체를 원천적으로 소유함과 동시에, 그 다음 단계로서 아담에게 영혼이 조성되던 순서를 따라 당연히 그 영혼에 해당되는 것을 받음이니 다름아닌 그리스도시다.

즉 성령으로 임하시는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은 영이신지라 비록 영으로 움직이셔도 이미 사람이 되어 계시는 다음이므로 마치 육체를 가진 사람처럼 사람으로서 활동하심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고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만이 지니실 수 있는 유일무이의 특성이시다. 처음에는 현재 우리와 같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셨다[롬 8:3]. 그러나 나 위해 죽으신 후 부활하신 후에는 신령한 몸이셨으므로 같은 육체가 아니라 판연하게 다른 양상이다.

그러면 이 사실이 나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아담의 애초 창조되던 당시의 그런 몸이 아닌 에덴낙원에 들어감으로써 아담이 지니게 되었던 그 신령한 몸을 원천적으로 소유한 몸이 내가 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앞에서 그 신령한 몸으로 내게 임하신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특이한 상황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현재 나의 몸은 그리스도의 그런 신령한 몸이 아니라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대로다. 이것은 내가 성령으로 다시 나는 순간, 이 세상에 보내심 받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보내심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보내심 받는 것과 같다고 하셨으므로 그 육체는 당연히 고난 받는 그리고 선악과를 먹은 결과가 그대로 남은 즉 내가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바로 그 육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설명대로 하면 나는 이중(二重) 육체를 지니고 있다 할까. 즉 선악과를 먹은 것과는 관계 없는 육체를 그리스도의 영께서 내 안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원천적으로 보유하게 되어 그리하여 영혼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을 모시게 됨과 더불어, 그리스도 친히 나와 같이 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실 때 범죄한 아담의 육체를 그대로 물려 받은 죄의 육신 그대로 [믿기 전의 내가 그러한 육체에 있으므로] 세상에 오신 바로 그 육체를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함이다. 나 역시 그렇게 세상에 보내심 받은 모습과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연히 다른 점도 있으니 왜냐면 그리스도의 당시 입으신 육체는 우리처럼 범죄하는 육체가 아니었던 것이니 바로 그 모습이 나의 현재의 육체의 양상인 것이다. 과거 범죄했던 더럽혀진 육체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이니 바로 그 사실이 그렇게 나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하나되심을 통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고로 나의 현재의 육체는 그리스도께서 입으셨던 죄 없는 육체 바로 그 모양새이다.

애초 창조될 당시의 아담이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에덴낙원에 들어간 것처럼 나도 이제 새 창조로써 '영혼'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받은 것이며 그리고 아담처럼 에덴낙원에 들어가 신령한 몸을 입은 것이니 왜냐면 현재 나와 하나되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늘에 오르신 상태이시고 오직 그 영[성령]으로 내게 임하여 오신 것임이다. 이는 물론 성령으로 즉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나의 부활, 그 승천이 나의 승천,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이 내가 그렇게 앉아 있음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엡 2:5].

이 모든 과정을 양면(兩面)으로 그리스도 친히 한꺼번에 나를 위해 대행(代行)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새로 창조됨으로써 거쳐야 할 모든 일을 주님은 내 이름으로 도맡아 수행해 주신 것이다. 죽으심, 부활, 승천 등이 모두 그러한데 승천이 말하자면 나와 함께 하신 것이라면 내가 영혼[그리스도]을 받은 후 애초의 아담처럼 에덴낙원에 들어간 격이 되고도 남는다. 성령[아버지와 하나되어 함께 계시고 움직이시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내게 임하심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문자 그대로 하나되어 있고 따라서 주님의 하신 모든 일이 바로 내가 한 일이 되어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은 사실 그대로이지 일개 이론도 아니고 상상도 아닌 엄연한 현실 그대로이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임하셔서 나와 하나되심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일을 나 위해 이루신 의미의 일들을 완수하신 그리스도께서 내게 영원히 임하여 거처하시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 안에 강림하심이니 곧 성령 강림이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 성령으로 오심이 또 무슨 의미로 나타나는 것이 되느냐 하면, 내 자신 에덴낙원에 갔다가 그래서 신령한 몸을 입고 있다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심 받는 바로 그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하늘에 계시다가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바로 그런 의미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는 나 역시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을 그대로 입고 있는 현실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현실로는 이렇게 자연계의 몸 그대로 있어 아무 변화가 없는 듯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성령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임하셔서 나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이상과 같은 막중한 의미의 현실이 고스란히 한 순간에 내 안에 다 이루어져 있음이다.

이렇게 나의 새롭게 창조되는 의미가 성령으로 다시 나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에[요 3:6]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시 나는 것이니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함께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심이다[요이 1:9].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맏아들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본을 보이신 것처럼 나도 아버지의 그 일을 수행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왜냐면 지금 아버지 친히 일하고 계시는 까닭이다[요 5:17/고후 6:1].

하나님의 온 식구 즉 아버지와 아들과 많은 아들들이 함께 나서서 매달려 일하시고 있는 중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하인들인 거룩한 천사들도 일제히 달려들어 일하는 중에 있음을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나도 이 하나님 식구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당연히 이 일에 뛰어드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가족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만일 이렇게 일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를 어디서 찾는다 하리요.

그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증거를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고 그리스도 함께 하나되어 있는 우리 앞에 만물이 복종하는 것을 보아야 그 증거가 되겠는가. 그러나 그런 증거로는 분명 아직 때가 아닌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특징 지워지는 새 창조의 새 생명 탄생시키는 산고(産苦)의 역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된 증거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 즉 하나님의 맏아들[우리처럼 사람되심으로써]께서 본을 보이신 그대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증거는 없다.

사람 살리는 일이 시급하고 화급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로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눅 9:62] 하셨으니 이렇게 일하는 자는 아담이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지만[롬 5:12] 범죄함으로써 스스로 죽은 자가 되어 버린 것처럼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니 즉 천국에 들어가지 못함이다. 천국에 못들어가는데 구원 얻은들 무슨 소용인가. 구원은 우리가 영생하는 자로서 새로 창조됨 즉 산 자가 됨을 말한다.

그러나 영생하는 자가 도리어 죽은 자가 된 아담이나 영생하는 자로 창조된 영물들이 영원한 멸망의 대상이 되어 악령들이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범죄하면 즉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살면 다시 말해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23]고 성경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이런 경고 없이 무턱대고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생한다고만 말하니 그것이 어찌 복음인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는" 경우는 그런 경고를 못들어도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 그 경고를 언제 어느 곳에서든 들을 수 있으니 성령께서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오로지 사랑하여 그 뜻대로 행하기로 하여 일구월심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어"[고전 8:3]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대로 영혼[그리스도]은 육체[나]를 위하여 있고 육체는 영혼을 위하여 존재하는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립된 것이다. 고로 육체는 영혼에게 절대 복종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한다"[엡 5:29]고 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육체를 위하는 영혼의 역할을 의미함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호, 양육하신다"고 했다.

아담의 아들들이 육체를 물려받음으로써 "육으로 나는"[요 3:6] 것과 같이, 성령으로 나는[출생] 것, 즉 "영[성령]으로 나는"[:6] 일 역시 성령을 "물려받는" 것이다. 무릇 "난다는 것은 자식이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음으로써 된다. 그리고 모든 '생겨남'은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하시는 창조의 일이다. 모든 '남[출생]'은 "먼저 나신" 이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기에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 1:15]라 한 대로다.

아버지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즉 피조물이 영원히 볼 수 없는 분이시다. 오직 아들께서 그 형상이시다. 그래서 "말씀"[요 1:1]이시라고도 표현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요 4:24] 하심은 형상이 없으시다는 뜻이니, 그러니 형상이 없으신데 어찌 보겠는가? 피조물은 다 형상이 있다. 없는 것이 없다. "형상"[고후 4:4]이신 아들로 말미암아 지으시니 그래서 무릇 만들어지는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예외없이 다 형상이 있게 마련이다. 영들이라 하는 영물[천사]들도, 그룹, 스랍, 천사들 모두 그 형상이 있다.

그러나 형상 없이 만드시니 다시 말해 당신과 같은 영을 만드시니 그가 아들이시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시자 비로소 아버지의 형상이 되신 것이다. 아버지의 형상이시라고 해서 처음부터 형상을 갖추신 분으로 만드셨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형체가 없으시다. 그러나 영이시라도 이미 창조되셨을 때는 형상이신 것이다. 그리고 형상이란 하나뿐이다. 둘은 필요치 않다. 그래서 독생(獨生)하신 하나님, 독생자(獨生者) 하나님이시라 한다. 즉 독자, 외아들이시다.

모든 창조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시므로 즉 아들께서 만물을 지으셨으나 이는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만드신 것이므로, 피조물도 자기와 같은 형상과 모양을 낳는 것, 즉 복제해내는 일도 같은 모양과 방식을 따른다. 그래서 인간인 경우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창 5:3]이라 하고, 동식물인 경우 "자기 종류대로["according to their kinds"]"[창 1:25]라는 표현을 쓴다. 여기서 "같은 모양과 방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지으신 것처럼 즉 단독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시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함께 즉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원리를 따라 무엇이든 하심을 가리킴이다.

그러면 피조물이 둘이서 함께 작업하여 무엇을 생성(生成)시키는 모습이 어떤 것이냐 하면, 동식물 특별히 동물들 그 중에서도 조류, 포유류 등 큰 짐승은 암컷과 수컷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둘이 함께 함으로 즉 한 육체가 되어 새끼를 낳는다. 이 '둘'은 똑 같은 한 종류인데도 그 육체적 구조가 암수로서 약간 다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우리의 하나님 아들들 됨은 명목상의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합리적인 바탕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 하나도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확인해 주는 대목 중 하나다. 진실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이다.

§  진화론, 무신론의 허구성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바보 같은 질문을 더 이상 입에 올리지 말고 "암컷이 먼저냐, 수컷이 먼저이냐?" 하는 좀 사람답게 질문 같은 질문을 할 일이다. 그것이 사람다운 이성적인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할 때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사람의 예를 보아 수컷이 먼저다. 즉 암컷은 수컷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스스로 수컷이 암컷을 낳았다면 즉 만들었다면[조물주 하나님이 아닌데 어찌 만들 수 있는가] 암컷이 안되고 새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와 같은 즉 어린 것이 아닌 다 큰 즉 성년이 된 성장한 자기와 같은 것을 세상 밖으로 내는 것이니까 새끼일 수도 없고 자기 스스로 내는 것일 수도 없다. 수컷 자신이 창조된 것처럼 그 자기와 똑 같은 것이므로 암컷 역시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보 같은 인생들은 이 사실을 빠뜨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무척이나 똑똑하게 즉 지혜있음 직하게 만드셨지만 이 세상 신[神, 현재는 그러하나 원래는 범죄 이전의 아담 아래 있던 자였다]인 사탄이 육체인 인간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주무르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즉 눈을 가리니까 이런 지극히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사실 하나도 제대로 음미할 줄을 모르는 바보가 되어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동식물이 암, 수컷 동시에 진화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일이다. 동시에 그렇게 똑 같은 것들이 생겨날 때는 그것은 진화도 아니고 우연은 더더욱 아니고 철저한 사전(事前) 기획, 사전 고안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바로 그 증명인 것이다. 암컷과 수컷 꼭 그렇게 동시에 창조된 것이요 또 그 목적이 또한 명백한 것이니 곧 번식을 위한 분명한 목표가 있음이다.

분명한 목적을 두고 암컷과 수컷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니 이를 두고 진화라느니 우연 발생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낸다면 그야말로 보통 바보가 아니라는 딱지를 그 자신에게 갖다 붙이는 것이 되므로 조심하여 함부로 말하지 말 것이다. 그와 같이 암컷이 수컷과 똑 같게 만들어져 생겨났다면 먼저 생긴 수컷 역시 창조의 산물이지 진화해서 생긴 것은 아닌 것이다. 즉 개, 소, 말, 인간 등 모두 개체별로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이다.

진화해서 침팬지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이 암, 수 구별의 엄연한 현실 앞에서는 천치따위나 하는 소리다. 세상에 동식물의 종류가 하고많은데 예컨대 한 종류가 진화해서 즉 침팬지가 인간으로 변화하는 것도 어려운데, 암, 수컷이 동시에 인간의 남녀로 진화해야 한다. 인간으로 진화한 침팬지만 아니다. 모든 동식물이 그 종류대로 암수로 동시에 생겨날 확률을 생각해보라. 멍청이나 그런 진화론을 생각할 것이다.

세상에서 소위 고등 교육을 받았다고 똑똑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니 자연계에 속한 인간이 안다는 것은 영물들에 비하면 너무나 초보적인 기초 지식밖에 더 되지 않는 것이요 더군다나 그 영물 사탄의 농락으로 그 이(理智)마저 흐려져 있는 상태다. 소위 진화론이라는 것이 생겨난 지도 150년 세월이 흘렀는데 그렇게 이 지구상에 숱한 사람이 오가고 했건만 진화론을 신주처럼 위하기만 했지 이 평범한 사실 하나 제대로 눈 여겨 보지를 못했으니 인간의 소위 지식, 지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만 하지 않은가.

즉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그 얘기다. 물론 이런 결론은 그 소위 "지식"이나 "판단"이니 하는 것이 성경과 배치되게 나타날 때 한하는 말이다. 사탄이 농락하는 것은 오로지 이 성경의 진실성에 관련된 것에 한하지 다른 데에서야 일체가 그의 관심 밖인 것이다. 방금도 지적했지만 이 세상 신에게 한번 조종 당하고 농락 당하면 천하 없는 그 어떤 지성(知性)도 한 장의 휴지 조각처럼 무용지물이 된다는 증명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려 하지 말라.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결국은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리고 스스로가 만든 올무에 옭아 매이는 것이 된다. 이것이 자기중심의 말로다. 그래서 수컷을 먼저 만드시고 다음에 그 수컷을 소재(素材)로 해서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셔서 여자를 만드신 것처럼] 똑 같은 암컷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암컷이 수컷의 씨를 받아 새끼 다시 말해 같은 종류를 만들어 내게 즉 낳도록 장치하신 것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먼저 자기 형상으로서의 아들을 만드시고 그 형상이신 아들을 통해, 무릇 형상을 갖춘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원리에 맞추어, 이 같이 동식물의 생식이 가능하게 하신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아담[사람]의 아들들 즉 인자[人子]들을 만드는 방법도 이에 준하게 하심은 물론이다. 그런데 처음 아담을 도울 도우미[영역으로는 "helper", 우리말 번역은 "배필"인데 이는 처음부터 남녀라는 선입견으로 시작한 잘못된 번역이다]를 지으실 목적으로 그 에덴낙원에서 영적인 동물들 즉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들"[창 2:19]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조력자들 중에 아담의 눈에 드는 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자연계 동물들의 암, 수컷 조성의 이치를 따라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사람[아담이니, "아담"의 뜻이 "사람"이란 의미다]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신 것은 인격성을 갖춘 존재는 주변에 아담 혼자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담의 말 동무가 될 즉 교제를 위한 인격성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그 의미이신 것이다. 그래서 자연계의 동물들과 대칭을 이루고 있는 영적인 동물 즉 인격성을 갖춘 영물이 창조된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 마음에 드는 형상, 형태로 된 자가 하나도 없어 시답잖았다. 자기 형상은 "하나님의 모습과 형상"이니 당연히 그 동물들[영물]의 모습이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고 할까. 이렇게 여자를 만드시지 않고 먼저 그런 영물들을 지으셨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낳는 일도 영계에서는 자연계에서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암시함이다. 아담이 아직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남자의 육체로 지으심 받았다면 에덴낙원에 아담을 들이시기 전에 여자부터 먼저 창조하셨을 것이다.

즉 여자가 생기기 이전의 아담은 남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도 아닌 것이니 이는 바꾸어 말하면 여자이기도 하고 남자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아담 혼자로서도 자식들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냄이다. 이것이 지나친 생각이라면 그냥 일소에 부치면 된다. 그러나 영계에서의 자식 생산이기 때문에 자연계에서의 암수 교접으로 인하는 방법과는 다르다고 해도 지나친 억측은 될 수 없음을 반드시 명심할 일이다. 

그리스도의 족보를 나열할 때도 복음서 기자들은 남자 위주이다. 여자의 이름은 특별한 경우에만 나타난다. 그리고 남자가 즉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새가 다윗을 낳았다고 한 것이다[마 1:6]. 아담에게서 여자[하와, Eve]가 났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이 경우는 하나님의 직접 창조에 의함이다. 그러나 그 육체를 물려받았다는 의미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육체는 어머니의 육체에서 물려 받지만 사람의 영혼이 창조되는 때는 남자의 씨가 여자의 태를 통해 나옴으로써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피림의 경우는 남자[아담]의 씨가 여자의 태를 여는 것이 아니라, 인간 육체로 변환한 영물[악령] 자신의 씨가 여자의 태를 열고 들어가서 사람의 육체가 되어 나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 경우, 영물들의 능력이라기보다 그 영물들의 창조가 이 자연계의 동물들에 대한 대칭성을 따라 창조된 까닭에 능히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동물이나 인간의 육체로 그 자신을 얼마든지 변환시킬 수 있으므로 본질 문제라 하겠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악령들 즉 영물로서의 씨 아닌 씨인 것이다. "씨 아닌 씨"라고 하는 것은 영물들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창조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그 "능력"[벧후 2:11]이라는 것도 자연계의 동물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 생존과 종족 보존을 위해 발휘하는 이성적이고 그리고 지혜가 충만한 행동들을 보면 인간을 초월한다. 이는 그 스스로 이지력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기계적인 기능을 하도록 그 내부에 장치해 두신 본능을 따라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까닭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는 그 만드신 만물을 보고 충분히 알 수 있는 고로 인간이 핑계치 못한다고 했다[롬 1:20].

이런 자연계의 동물들과 대칭이 되어 있는 영계의 동물들이므로 그 능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대칭이라 하면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단 전자는 자기 종족 보존[생식]을 위함이고 후자는 인간 보좌를 위해 그 능력을 활용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아담]이 자기 형상들을 만들어 낼 때 아담을 돕기 위한 거기 필요한 모든 힘과 능력이다. 영물들은 본래 인간을 위해 만드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위해 즉 하나님이 부리시기 위해 '그룹'들과 '스랍'들이 창조된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므로 그룹과 스랍과 같은 존재 대신에 그런 영물들이 주위에 있게 하심일까. 따라서 영물들의 모든 능력들은 자기 종족 생식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종족 증식을 위해 그 보좌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음이다. 물론 그 역할만을 위함은 아니다. 그 중의 하나의 역할이 그렇다는 얘기다. 인간의 자식 생산도 무한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숫자에 차기까지일 것이 분명하고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 영물들의 역할은 자기 종족 보존이 아니라 인간의 종족 보전을 돕는 역할이다. 물론 이 역시 항구적이다.

왜냐면 인간 역시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천사들을 가리켜 "구원 얻을 하나님의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 받은 영들"[히 1:14]이라 한 것이다. 이는 천사[영물]들이 창조된 목적을 나타냄이다. 우리가 장차 천사들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게 됨도 이 이치를 따름이다[고전 6:3]. 그러므로 인간을 위해 그런 모든 힘과 능력을 사용하여야 할 것임에도 사탄은 교만해져 도리어 인간을 속여 결과론적으로 인간의 지위를 찬탈한 셈이 되어 인간 위에 군림해 있고 사탄을 위시한 악령들은 인간의 씨를 생식해 내는 일에 사용되어져야 할 능력을 도리어 자기 씨들을 퍼뜨리는 방법으로 악용한 것이다. 그 사실이 "네피림"[창 6:4]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런 못된 짓들을 한 악령들은 무저갱에 갇혀 있어 마지막 심판 때까지 그 불 못에서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고 유다서는 밝히고 있다[유 1:6,7]. 창세기의 아담과 사탄이 받는 저주의 기록에 보면 사탄의 씨가 있음이 분명하니 사탄도 그 짓을 감행했음이 분명하고 [하나님께서 이를 미리 아신 때문이니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자유 의지를 꺾지 않으시므로] 그러나 사탄 자신은 이 세상에서 활동해야 하는 필요악이기에 그 자식이 대신 무저갱[bottomless pit]에 들어가 있다가 장차 적 그리스도 즉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살후 2:3]로 나타날 것이다.

그 나머지 네피림[복수를 가리킴이니 단수라면 "네필(nephil)"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룹의 복수는 그루빔, 스랍의 복수는 스라빔, 그리고 신(神)의 복수는 엘로힘인데 하나님을 가리켜 엘로힘이라고도 하고 사울왕의 명령으로 무녀(巫女)가 사무엘이라 하여 불러 올린 "사무엘"도 엘로힘인 것을 보아서도 사무엘 자신의 영혼이 아니라 사무엘로 가장한 귀신들의 조화(造化)임을 알 수 있다]은 그 애비들만이 무저갱에 들어가고 네피림은 이 지상에서만 떠돌고 있어 바로 "귀신"들이 그 정체이다.

그리스도는 친히 성령[하나님의 아들]께서 여자의 태를 여시고 그 태를 통하여 그 정해진 임신 기간을 따라 이를 채우신 다음 세상에 오신 경우이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에서든 사람이 단순히 육체를 물려받게 되는 것은 모친으로부터 되는 것이나 이와 같이 육체를 물려받게 되는 계기는 여자 스스로의 것이 아닌 외부의 힘이 작용해서 이루어짐이 분명해지는 것이니, 인간의 경우에는 남자[아담]의 씨를 받음으로써 태가 열리고 잉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일들은 정작 우리의 구원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이므로 이런 주제를 가지고 갑론을박할 필요는 없다. 각자의 의견 개진 정도로 그치고 끝날 뿐이다. 따라서 여자의 씨가 아니고 남자의 씨라고 하는 것은 네피림의 경우 다른 인간과 달라 영물들의 씨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여러 특징 즉 신체가 장대하다든가[골리앗을 비롯한 아낙 자손들이 다 거인들이라는 사실이 그 예다] 지능이 특별히 우수하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하겠다.

이들이 죽으면 신약성경에서 주님께서도 "더러운 귀신들"이라 하심으로써 인정하신 귀신들이 되는데, 이 귀신들이 원래의 그 속성을 따라 인간 여자의 태를 통해 들어와 인간이 되는 수가 있다는 것은 성경이 "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장차 나타날 자"[계 17:8]로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살후 2:3]을 지목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런 것이 곧 "환생", "전생", "윤회"에 해당한다 하겠다. 물론 당연히 이런 일은 네피림에 한한다.

아담의 씨인 인간의 경우에는 해당될 리가 없으나, 사탄은 전체 인류가 다 그렇다는 식으로 속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근거가 있기 때문에 사탄이 속이는 것이지만 그래서 그런 환생의 증거를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지만, 성경을 믿지 않으니 그런 따위 "증거"를 더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인간으로 재차 태어날 때는 처음 때와 같은 그런 신체적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소위 환생도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일정 틀에 해당되어야 하고 그 제약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참고로, 이렇게 설명하면 혹자는 "네피림이 그렇게 거인 족속이고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되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보다 더 우수한 면모를 지니셔야 할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악령들 자신이 인간 여자의 태에 들어온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럴 필요도 없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 가정하면 그들은 한 인간으로서 육체의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그런 불리한 짓 자멸의 길을 어느 악령이 감행할 것인가.

네피림이 생긴 것은 악령들이 일단 인간의 육체로 스스로를 변신시킨 후 인간 여자와 관계해서 생긴 "씨"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변신한 육체에 걸맞게 그래서 생겨난 자식들도 그런 거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아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문자 그대로 나와 같은 완전한 사람되시기 위함이니 나와 달라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거인일 수가 없으니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육체이기 때문이다.

네피림은 육체는 인간 여자[모친]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나 원래 그렇게 해서 생겨날 수 없는 존재인데도 악령들의 변칙, 반칙적 행위이므로 네피림의 영적 몸으로서의 기운이 가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이시니까 영 그대로이시나 영물들은 영이면서도 영적 육체를 말함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순순하게 나와 같은 육체의 사람이 되셨지만 네피림은 이미 영적 육체로서의 이상(異常) 기운을 타고 났기 때문에 그 육체가 순수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는 육체일 수가 없다.

영물의 육체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가미된 육체다. 물론 나와 다름없는 인간이 되시느라 하나님되신 기정사실까지 없애시고 사람만이 되신다는 것은 불가능하시니, 그리 되실 수도 없거니와 그리 되셔도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친히 사람되실 때는 모든 면에서 나와 같으신 연약한 한 인간으로 스스로를 창조하신 셈이 된다. 창조는 이전에 없던 것을 이제는 현존하는 것으로 만드심이니, 이전에는 사람임과 동시에 하나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람이란 존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으로써 아담 범죄 이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니 곧 성령으로[요 3:8] 나는 것 즉 다시 나는 것이요[요 3:3,7/벧전 1:23], 이상 설명과 같이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많은 아들들을 낳으시는 것이다[요일 3:9/4:7/5:1,4,18]. 즉 아들로 말미암아 낳으시는 것이니 아들로 말미암아 처음 창조를 하신 것과 같음이다. 새 창조 역시 동일하다. 새 창조의 경우 아들의 영을 각자가 물려받게 하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육체인 경우 아담의 아들들이 아담의 씨를 물려받아 되는 것과 같으나 남자와 여자 관계에서 여자로부터 육체는 물려받는다. 그러므로 아들의 영이니 곧 그리스도 자신으로서 곧 마지막 아담이시다. 그리스도를 각자가 개별적인 선물로 받음이다. 네피림의 경우 아담의 씨가 아니라 악령들이 인간의 육체[남자]로 일시 변환하여 인간 여자와 교접한 후 자식들을 낳으니 육체는 여자로부터 물려받아 인간이기는 하나 씨는 네피림으로서 여자의 것이 아니라 악령에 속한 것으로서 악령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다 인간 아담의 씨로서 일정하고 일률적이라면 과연 남자의 씨인지 여자의 씨인지 헷갈린다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중간에 네피림이 생겨 그 자식들은 아담의 씨가 아니라[비록 인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으나] 악령들의 씨로서 죽어서는 죽은 인간의 영혼들이 가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땅 위를 유리 방황하는 귀신들이 됨으로써 명확히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씨가 아니라 아버지의 씨임이 확증된 셈이다.

그러므로 네피림의 씨라고 해서 인간이 아닌 것이 아니니 여자[자기 어머니]로부터 육체를 물려받아 사람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틀림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씨로 따지면 아담의 씨가 아니라 악령의 씨로서 아주 판이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경우는 육체는 여자[마리아]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나 그래서 사람이시지만 실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이 경우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친히 여자의 태를 여신 것이므로 "씨"든 무엇이든 아무 것도 해당되시는 바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 홀로'이시다. 즉 사람이시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제는 사람으로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대대로 자자손손 아담의 씨가 여자의 태를 간섭함으로써 즉 엶으로써 자식들을 낳는 것과 같이, 새 창조 즉 "다시 남" 또는 "성령으로 남"에서 우리가 받는 성령은 아들에게서 나오심만 아니라 동시에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것이다[요 15:26/행 2:33].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씨"[요일 3:9]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육체를 물려 받아 아버지의 씨를 받음으로써 인간으로 우리가 태어나고 아버지의 혈통을 잇게 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를 다윗의 혈통에서 나시고 다윗의 자손이라 한다. 씨 곧 혈통 또는 자손으로 말하면 남자를 따르고 여자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마리아라는 여자의 태를 통해 사람이 되셨으나 그 여자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요셉의 혈통이 다윗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실상 요셉은 복음서의 족보에 따르면 헬리가 양부(養父)요[눅 3:23-38] 야곱이 그 생부(生父)이다[마 1:12-18]. 이는 그리스도께서 요셉의 양자 격이시라는 의미가 되고 그리고 우리 또한 하나님의 '양아들"[롬 8:23]들이라는 사실을 상징함이다. 새 창조에서 우리는 아들[마지막 아담]의 영을 물려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지만 아버지의 영 친히 아들의 영과 함께 하시므로 아버지의 씨를 받아서 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우리가 육체로는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음으로써 아담과 육체적으로 하나인지라 아담의 씨를 받아서 된 아담의 후예들인데 선악과를 먹은 육체를 물려받은 것이므로 우리 육신의 죄 성향[자기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마지막 아담의 영을 물려받음으로써 무릇 육체는 영혼을 거스를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이제는 "내 몸을 쳐 복종시킬 수 있게"[고전 9:27] 됨이다. 물론 앞서의 설명대로 죽은 육체가 다르고 다시 살아난 육체가 다르다.

육체가 영혼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아담이 에덴낙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제대로 통용된 원칙이었다. 그래서 영혼이 조성됨으로 인해 영적인 존재가 되니 영계에 들어가게 되고 이 영혼에 걸맞게 육체 또한 신령한 몸으로 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인간의 범죄 행위로 인해 역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영적인 존재로서의 그 모든 향유하던 것을 다 잃어 버리고 도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도로 돌아감에 따라 이제는 육체가 영혼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영혼이 육체에게 종속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단말마의 비명을 올리게 하는 것이[롬 7:24] 모세 율법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수용하게 되는 믿음에 이르자 그 육체는 원천적으로 죽고 영혼이 자유 해방을 얻어 되살아난 셈이다. 이제는 성령 안에서 영혼이 주도하게 되는 원위치로 환원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물론 이 경우 나의 영혼 따로 있고 새 창조에서의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의 성령 따로 계심이 아니라, 내가 "주님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어 있는 이치를 따름이다. 그러나 또 한번 마지막으로 되풀이되는 단계 또는 과정 하나가 남아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다시 죄에 빠지는 경우이다. 처음 창조 때의 첫 사람 아담처럼 우리 역시 새 창조에서 시험 받아 범죄하는 경우이다.

새 창조의 과정이 처음 창조의 그 과정 그대로 밟고 있다는 것은 이 시험의 경우에서도 반복되는 성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입증한다. 그래서 반복의 마지막 단계라고 한 것처럼 이번에 시험 받아 첫 사람 아담처럼 범죄하는 경우에는 육체적인 죽음만 아니라 곧장 사탄 이하 악령들처럼 영원한 멸망뿐이다. 이제 더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 때문이고 이 시험의 결과로서 모든 반복은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이 시험 결과가 최종적으로 평가되는 그 날로서의 마지막 심판은 펼쳐지고 따라서 영원한 불 못과 영원한 생명의 세계인 천국으로 가름되어진다.

되풀이 또는 반복도 양면성 또는 대칭성으로 되어 있어, 이 이상의 되풀이는 없다. 그래서 시험 받는 것도 이 세상으로 마감하고 천국에서는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는다. 때문에 그만큼 이 세상은 중요하다는 것이니 삶의 낙을 누리는 측면에서는 제로이나 이와 같은 의미에서는 영원한 천국과도 맞먹는 중대 의미를 지닌다 함이다. 오늘날 여자가 남자와 평등이라고 하는 억지 주장은 이런 천리(天理)를 어기고 창조의 질서를 유린하고자 하는 이 세상 신[神, 현재는 그러하나 원래는 범죄 이전의 아담 아래 있던 자였다]의 책동에 의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통을 송두리째 부정하려는 이런 대담한 시도는 결코 인간으로부터 나는 것일 수가 없다. 왜냐면 일부 계층의 주장으로만 그치지 않고 국가 차원에서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대규모의 변혁은 신적(神的)인 요소가 분명히 개입해 있지 않고는 가능해질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신 사탄의 일들인 것이다. 성경이 이상과 같이 질서 정연한 창조의 도리를 보여 주는 것이므로 이 성경에서 나타내시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자기의 씨[창 3:15]를 드러내려는 사탄의 의도, 즉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위한[살후 2:3] 사전(事前) 정지(整地) 작업을 하는 즉 성경 박멸 운동의 일환임을 분명히 확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남이다. 이러한 창조의 과정과 다시 남의 구조와 체제가 그 대칭을 이루는 처음 창조와 그리고 육으로 나는 것과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치밀한 짜임새로 나타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 인간의 지능을 때로는 초월하는 동물들의 지혜를 말했거니와 이 하나만 보아도 진화론을 웃음거리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왜냐면 예를 들어 거미의 생태(生態)를 보아도 진화론적 논리를 따를 때 그 지능으로 치면 인간보다 우수하니 인간보다 나은 지성(知性)이나 영성(靈性)을 갖추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거미는 거미지 인간은 아니다. 인간의 지적 수준이 높은 것이 진화의 결과라 가정한다면 그 거미 역시 인간보다 월등한 아니면 그 정도 수준의 진화를 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동물은 자기 스스로의 진화가 아닌 창조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져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곤충인 개미만 보아도 그렇다. 최근 중국에 큰 지진이 나기 전 이를 감지한 두꺼비들이 큰 무리를 지어 어디론가 이동하는 광경이 목도된 것처럼 큰 비가 오기 전 개미 떼는 낮은 데에 있는 서식처를 떠나 높은 지대로 전체가 나서서 피난 대열의 장사진을 이루어 올라 가느라 야단법석이다. 그런데 이런 개미들의 이동은, 낮은 데에 있거나 전혀 그런 물 난리 위험이 없는 고지대에 있거나 간에 한결 같은 대이동이다. 만일 그 개미들이 이성이 있다면 저지대가 아닌 고지대에 있을 경우 "아하, 여기는 저 아래 쪽에 사는 개미 동네보다는 훨씬 안전하니 저렇게 남부여대하고 번거롭게 떼지어 올라 갈 필요가 없고 우리는 태평으로 있어도 좋다"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고지대에 있는 개미나 저지대에 있는 개미나 무조건하고 떼지어 대이동을 하는 판이다. 고로 이런 미물들이 이성이 있어 그런 이지적인 머리를 쓰기 때문에 물난리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정교하게 장치된 본능적 감지 능력과 종족 보존을 위해 만반으로 대비하는 세밀한 기계적 작동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명백하다. 고로 이런 것을 두고서도 진화(進化) 운운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이지적인 작동을 하도록 처음부터 기계 장치를 그 생물체 내부에 설치한 고안자요 설계자에 의한 작품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그들 동물들은 이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본능 즉 그 내부의 기계적 구조에 의한 자동적인 행동인 것이니 그들이 만일 진화한 것이라면 그런 이지적인 행동은 반드시 그 자체의 이지적 판단에 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미 하나만 보아도 전혀 그렇지를 않다. 이와 같이 전연 시답잖고 어쭙잖은 쓰레기 같은 가설에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이 진리인 양 하늘처럼 떠받들어 왔고 그것도 장장 세월로서의 150년이나 끌어 오늘에 이르렀다.

고로 이제부터는 성경에 대하여 어긋나게 말하는 그 어떤 인간의 말이든 신뢰할 가치가 없음이 드러난 이상 거기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그 실체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 실체란 다름아니라 자연계에 속한 인간 지성으로서 그 한계가 뚜렷한 것도 무엇한데 그마저 이 세상에 "이 세상 신"으로 군림해 있는 사탄에게 그와 같이 마음껏 휘둘리고 있으니 무엇 하나 제대로 신용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이 같이 증명이 된 이상 이를 근거로 판단할 일이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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