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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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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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단하는 불로서의 고난

마치 광석을 불로 정련하여 순금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 정련하는 불이 곧 이세상의 고난의 죽음으로서, 이 죽음의 고난이 그 연단하는 불 구실을 만족하게 해내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 고난은 운명적인 것이다. 일단 한번 정해진 것이므로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운명이라 한다. 운명이란 말은 이런 데에서나 정확히 쓸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은 또 법질서의 엄정함을 말한다. 변하거나 다시 고친다는 말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다 이 죄의 대가가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혹은 하나님을 믿으면 이 세상의 고난을 면하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잘 살 수 있다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이다. 반성경적이니, 고난의 죽음이 운명인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이 운명 즉 법질서를 유린하여도 된다는 것은 망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처럼 죄의 결과로서 저주로서 고난 받는 의미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대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새로운 의미와 차원의 고난에 들게 되므로 고난이 운명적이라는 데에는 예외 없이 적용된다. 이것이 법질서의 엄정함이다. 그럼 악한 자가 이 세상에서 형통한다고 성경에서 불평하는 것을 보는데[예를 들면 하박국 선지자가 그런 질문을 하나님께 하는 것을 본다] 그렇다면 그런 악한 자나 불신자는 예외인가. 천만에. 그들은 이 세상 끝나자마자 곧장 들어가는 곳이 고난의 세계다.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차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강조하고 있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탈피하는 것이 아니다. 또 포함하지도 않는다. 법질서를 벗어나는 것을 용허하지 않는 것이 법질서가 관장하는 세계의 특징이다. 단지 그 의미와 차원에서 하늘과 땅과 같은 차이가 있다. 즉 세상 사람의 고난 받음과 그리스도인의 고난 받음이다. 전자는 불가항력으로 마지못해 받는 것이요 후자는 그 스스로 자진해서 받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경우 받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뜻은 아니다.

만일 받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하나님 아들된 위치를 저버리는 것이 되므로 그 대가는 각오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특색은 무엇이든 강제나 억지로 하지 않고 주인 의식으로[하나님의 상속자이므로 당연히 만유의 주인인 것이다] 자발적으로 하는 데에 있으므로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기에 그 원인을 스스로 만듦으로써 그 결과를 거둔다는 이치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고난의 운명적인 것을 강조하고 알려야 죄인됨과 죽은 자됨을 깨달음으로써 그리스도께 스스로 나아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정학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처럼 덕을 끼치는 것은 없다. 우리는 정확한 정보를 에누리 없이 전달하는 것이다. 그럴 의무가 있다. 세상이 이런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은 엄정한 법질서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은 물론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 법질서의 엄정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연질서의 그 엄정한 규칙성은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웅변으로 나타낸다고 하는 것이다. 이 정밀한 법질서[그것이 자연 법질서이든 영적인 것이든]와 조물주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조물주' 하면 그 법질서를 상기하고 '법질서' 하면 반드시 그 법' 제정자 또는 고안 당사자로서의 조물주를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법에 따른 재판장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 법질서에는 변역(變易)이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왜냐 하면 이것이 모든 법질서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 사랑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대하여 반역을 하든 아니하든 한결같이 제한없이 차별없이 사랑하는 것이 조물주의 사랑이라" 한다. 그럴 듯하게 들려도 실상은 허공에 뜬 말이다. 왜냐면 현실에 없는 공상이기 때문이다. 한가지만 알고 두 가지든 몇 가지든 그 나머지는 전연 무지한 탓이다. 조물주께서 법질서 입법자[제정자], 집행자, 그리고 그 법질서의 재판장이신 사실은 왜 망각하는가.

사랑은 막연히 좋아하는 그런 감정 차원에서 언급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엄연한 법질서다.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것을 우습게 볼 것이 아닌 것이다. 인격성을 지닌 모든 존재에 군림하는 생명의 법칙이 사랑이다. 자연계 동식물 같은 존재는 인격성이 없다. 그러므로 그런 종류의 법 적용이 없다. 그러나 인격성을 지닌 영적 존재는 차원이 다르다. 때문에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하고 나를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할 것"[눅 12:8,9/마 10:32/딤후 2:12]이라 하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 인간이 평상시 이야기하는 식으로 해석을 하니 제대로 된 이해가 나올 리 없다. 지금 이 표현은 하나님의 법질서 차원에서 그 법 집행과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을 왜 동률 선상에 놓고 비판하고 판단하는가. "하나님의 위엄과 인자를 보라"[롬 11:22]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법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너희가 그 인자 안에 있고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혀버림을 당한다"[:22]는 것은, 사랑의 법칙을 지키면 그 법칙을 지키는 결과 혹은 대가 또는 포상을 의당히 받고, 이 생명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당연히 또는 부득불 생명에서 끊어질 것이라는 당연한 상식 차원의 설명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과 인간을 자꾸 혼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흠이다. 더구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그런지는 몰라도, 분명히 알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라는 사실이다. 이를 언제나 숙지해둘 필요가 있다. 엄밀한 이 우주 삼라만상의 자연의 법질서를 보라. 이것은 바로 조물주의 존재를 말하는 그대로의 언어(言語)다. 겉모양으로도 이렇게 명백히 나타나는 현상을 무시하고 외면하니, 아무리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인간도 고차원의 단수 높은 영물인 사탄의 장중에서 놀아나면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놀아나는 것이다.

이렇게 사탄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놀아나는 자신의 비참한 실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외면하고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그런 창조신은 싫다" 하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엄정한 법질서 의식 없이는 조물주를 아예 언급하지도 말 일이다. 인간 내부에 양심이라는 도덕률 자체가 벌써 인간이 하나님의 작품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양심 외에도 확실하게 해두는 방편으로서 즉 엄정한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온 세계에 나타내 보이신 것이 모세 율법이다. 말하자면 불문율의 양심을 성문화한 것이라 할까. 법은 법대로 하고 사랑은 사랑대로 그 구실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한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요 그 구원의 경륜인 것이다.

현재 내가 구원 받아 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영광의 몸을 아직 입지 않았으니 몸이 구속되지 않았고 몸이 구속되지 않았다는 것은 고난 중에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몸의 구속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을 맞는다. 이와 같이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그것이 생명이 아니라는 증명이다. 즉 생명의 법질서가 아닌데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미워하라 하신 것이다[요 12:25]. 미워해야 영생하도록 보존하고 사랑하면 잃는다고 하셨다. 몸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 위함이니 이 고난은 "온전한 순종"[히 8:9]을 이루는지의 여부를 시험하는 측면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발자취를 우리 역시 그대로 밟아가는 것이다.

§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믿지 않는 이유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한다"[요 5:41]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실 때 베드로가 듣고 예수님을 붙들고 "무슨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할 때[막 8:31], 예수님께서 돌이키시어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마음에 둔다]"[:33] 하심과 같은 맥락의 뜻입니다.

그래서 이 때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므로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할 것이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3,44] 하신 것입니다. 즉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유를 밝히심입니다. 때문에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다"[:42]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롬 5:8]고 성경이 단언하고 이로써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 참 의미를 알았노라고[요일 3:16] 하는 것과 같이, 사랑은 몸과 머리의 관계에서 둘이 하나를 이룸 즉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 즉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을[고후 5:15]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 사랑의 본래의 의미를 따르는 창조의 본디의 위치로 우리를 다시 복구시키심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를 구원의 목적이라 합니다[롬 14:9/고후 5:15/살전 5:10].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됨이니 무릇 둘이 하나됨에는 즉 하나를 이루어 존재함에는 비록 남녀가 한 몸을 이루어도 절대로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자기 상대의 것으로 인정하고 인식하는[고전 7:4] 것과 같이 자기 자신을 절대로 위하지 않는 데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을 가리켜 위의 말씀에서처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므로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즉 "너희가 나를 모른다"는 뜻의 말씀이십니다. 함께 할 수가 없고 같이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한 편이 되기는 영 글렀습니다. 그래서 이 자기 부인의 말씀을 듣고 즉 나의 살과 피가 너희 먹을 양식과 마실 음료가 된다 하시자 즉 '나라는 존재가 너희를 위해서 있다'라는 의미의 말씀을 듣자 많은 제자가 "이 말씀을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고 그리스도를 버리고 떠나가 버렸습니다[요 6:66]. 최대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최고의 삶의 지혜를 최대의 불행을 안겨 주는 것처럼 착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을 비롯한 모든 악령들, 악인들의 근시안적 어리석음입니다. 멀리 내다보지 못합니다[벧후 1:9]. 눈앞, 코앞의 일에만 매달리니 지혜 있는 양 의기양양하나 실은 무한정의 어리석음입니다. 모든 범죄의 특성입니다. 느긋하지 못하고 조급합니다. 성질이 사나울수록 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에는 "오래 참는 것"이 포함됩니다[갈 5:22]. 성령의 열매는 선(善, 모든 좋은 것)이요 의(義, 모든 올바른 것)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면 그냥 모르는 것으로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기존 법칙을 따르면 될 일인데 끝까지 자기가 옳다고 하는 고집이니 이것이 교만입니다. 모든 죄는 바로 이런 교만에서 오는 것입니다[딤전 3:6]. 아담의 범죄도 이런 교만에 물든 결과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여, 먹으면 죽는다고 하시는 그 선악과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감히 입에 넣는다는 말입니까. 자유를 주신 것은 사랑으로 머리께 복종하라는 뜻이지 머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머리처럼 행동하라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할 것이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하셨으니,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고 강조하신 것은 머리가 하나뿐이니 하나님 친히 머리가 되심을 밝히심입니다. 그러므로 몸은 머리를 위해야지 몸 스스로 자기 이웃들 즉 함께 지체된 것들끼리 위해서는 안됩니다. 몸으로서 머리를 위하는 차원에서 즉 머리의 지시를 따라 복종하는 의미에서 자기와 이웃한 지체들을 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온다" 하심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세주로 오셨으니까, 또 다른 엉뚱한 자가 "내가 그리스도라"고 속이면서 오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심이니 이는 이미 인간과 사탄이 원수지간이 되는 때로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사탄을 저주하실 때 "너의 씨[seed]와 여자의 씨와 원수가 되게 할 것이라"[창 3:15] 하신 데에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그를 영접한다 즉 인정하고 따른다는 것은 머리되시는 하나님은 무시하고 몸으로서의 피조물끼리 서로를 위함입니다.

피조물끼리 위한다는 것은 사랑을 둘이 하나됨으로써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데에서 동류(同類) 의식을 느껴 한데 어울리나 이는 사랑으로써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상대를 이용해 먹자는 자기중심일 뿐입니다. 그래서 약육강식(弱肉閣食)의 자연계에 속한 생물체의 생존[종족]본능의 기계적 작용을 따름이니 이는 인간에게는 치명적이어서 생명에 역행하는 죽음과 멸망이 됩니다. 짐승들은 기계적 삶이므로 즉 하나님께서 장치하신 대로 사는 것이므로 종족 보전 외에는 일절 욕구가 없어 이웃[자기 종족]을 해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자연계에 속한 육체[자연계의 일반 짐승들과 같은]가 되면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데에서 입증되듯이 그 스스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을 해치고 멸절시키기를 예사로 합니다.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은 영혼이 없어 그렇게 기계적이나 인간은 영혼이 있어 이는 곧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므로[영물들은 이런 인간에 준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역시 그러하고] 이런 육신의 지배를 받으면 그런 만행(蠻行)을 저지르게 되니 이를 가리켜 죄, 악, 불의, 불법이라 합니다.

모름지기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은 모두가 악[좋지 않은 것]이고 의[따라서 올바른 것]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망하고 남까지도 망하게 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와 같이 이런 육신에 처해 있는 인생으로써 일반적으로 당연시하게 되어 있는 자기중심 곧 자기 자신을 위하는[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말을 베드로가 했을 때 그와 같이 책하신[꾸짖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책망하신 후 무리와 제자들을 함께 불러 가르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막 8:34]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시기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할 것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막 8:35-38] 하셨습니다.

자기중심 일색의 세상이니 자기부인은 따돌림의 대상, 따라서 증오의 대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사탄이 그렇게 되도록 이 세상을 조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할" 수 있는 모든 요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믿는 이들이 극소수라든가 이유 없이 핍박을 함으로써 사회에서 따돌림을 자연스럽게 받도록 한다든가 하는 그런 일들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자체에 무슨 하자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현상은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변함이 없을 것을 확인되는 대목이 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막 8:34] 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인하신 대로 우리도 자기를 부인함을 말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심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싫어하니까 아예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요, 믿는다고 자처하더라도 결국 그리스도를 버리게 되고[요 6:66],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버리시게 됩니다[마 7:21/25:45].

왜냐면 그들 스스로 이미 그리스도를 버렸기 때문입니다[눅 12:8,9/마 10:32/딤후 2:12].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꾸준히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자기를 스스로 성찰해[벧전 2:2]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다는 것뿐입니다. 비극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죄인을 부르시려고 오셨지 악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죄인은 회개하면 얼마든지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고로 구원에서 제외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고 해서 많은 악인들이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사탄은 이런 사람들을 오늘날 많이 양산(量産)해 놓았습니다. 악인들이 구원될 바에야 사탄 마귀도 같은 피조물인데 구원될 것입니다. 위의 말씀은 사람이든 영물이든 악한 자는 절대로 구원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악인이든 죄인이든 죄를 짓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입니다. 그러나 전자는 "불의가 좋아서"[살후 2:12]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의적으로 범죄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히 6:6]. 그래서 구원될지 못합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사람도 그 마음이 중도에 변함으로써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는 경우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삶으로써 자기중심이 될 때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히 6:6/10:26,29]. 이는 다시 말해 불의를 좋아하는 악함은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의지에 관계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회개하면 되는 일이나 이 회개가 억지로 즉 강제하거나 회유함으로써 간섭해서 될 일이 아니므로 자기의 자유 선택이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악을 고의적으로 행하는 불의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오기를 싫어합니다. 때문에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 그 정죄[단죄]는,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함이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요 3:18-20] 하심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너희가 하나님 사랑함이 없다"[요 5:42]. 사랑은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과 머리와 몸 관계를 이루어 있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있으므로 머리의 지시를 따라 한 몸으로서의 함께 지체된 이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13:34]. 결국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율법은 바로 이 간단한 사실에 있으니 그래서 이를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40]이라 하신 것입니다.

즉 아담 이후 지금가지 인류에게 가르치신 것이 총체적으로 이 한 몸 구조 안에서의 머리 사랑, 그리고 한 몸을 이룬 함께 피조물된 자들끼리의 서로 간의 사랑입니다. 악인들은 이런 사랑이 통하지 않으니 한 몸이 되어 있기를 거부하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영원히 사는 것인데 올바로 살기를 거부하니 생명도 해당되지 않고 당연히 우리 인간으로서 구원이 해당될 리가 없습니다. 때문에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 즉 구원되지 못하는 이유를 명확히 밝히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부인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중심 일색인 이 세상에서 절대로 환영 받지 못하고 인기가 있을 리 없으며 무차별 공격의 대상이 되므로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여 항상 마음에 두는 것이라 설명하시고 그래서 자기 부인을 하여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고[스승을 따르고 그 삶의 본을 따르는 것이 제자이므로] "나를 핍박했으니 너희도 핍박을 받을 것"[요 15:20]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후 곧 이어 위로의 말씀을 하신 것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 하셨고,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셔서 과연 그렇게 되는 것을 세 사람으로 하여금 직접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막 9:1,2]. 이와 같이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다"[요 5:45]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을 것이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다.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46,47]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어떤 것을 믿어야 했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이 죄를 지어 죄인이 되어 있음을 말한 것이고 그래서 자기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하는 까닭에 도저히 영생에 이를 수가 없고 구원될 수가 없는 것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일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 인생 구원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을 자기 스스로 지키지 못하여 아담이 죽은 자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사탄 등 악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스스로 벌어들인 결과입니다. 그러나 한번 이렇게 범죄로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이상에는 내 구원에 관한 한 내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 친히 세상에 오시어 나의 죽어야 할 죽음을 나와 함께 하나되심을 인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후 나와 문자 그대로 영혼과 육체 관계를 이루어 하나가 되어 계셔야 비로소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내 스스로 나를 구원하는 단계입니다. 즉 아담이 실패했던 것을 거울로 삼아 아담처럼 되지 않고 사람 삶의 도리 즉 생명과 사랑의 법칙을 따라 내 스스로 나에게 주신 영원하신 생명을 지켜 나가는 것이 나의 구원을 스스로 이룸입니다[빌 2:12].

이제 비로소 나 자신의 생명을 내 스스로 보존하여 지켜 나가는 것이 가능해진 것인데, 그러나 이 역시 이전 삶[실제는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동작이었을 뿐이나]처럼 나 자신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삶과는 단절한 것입니다. 즉 다시는 나 자신에 관한 일은 일절 의식하지 않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입니다. 새로 창조되어 다시 출생한 새 사람으로서의 새 생명의 의미가 이렇게 180도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별 짓고 특별히 이런 삶의 양상을 가리켜 "새 생명"이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는 방법이 완전히 다릅니다. 죽은 자로 있던 이전에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었으나 산 자가 되어 있는 지금은 아주 그런 방향과는 정반대인 나 자신을 부인하는 삶입니다. 오로지 머리되시는 하나님만을 위해 사는 삶이므로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기커녕 마귀의 농락에 빠져 하나님 계시는 것조차 부정하는 이 세상에서 삶이 원활해질 리가 없고 원활하기에 앞서 그런 삶이 불가능하여 오직 죽음의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이 죽은 자로서의 모습이셨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실제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으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이런 실상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알고 보니 나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죽음이요 오직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지 그리스도[그리스도를 위함은 아버지를 위함임]를 위해 사는 것이 생명인 줄을 알고 이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골 3:17/고전 10:31/벧전 4:10,11][요 14:10/5:19].

즉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이름으로 오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고 나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하여 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니까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않고 나를 알지 못한다" 하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한 마디로 사랑이므로 사랑을 아는 자는 즉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자는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이나 그렇지 못한 자는 구원의 길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장차 적 그리스도께 자기 이름으로 오면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인생들이 모두 그 쪽으로 가서 달라붙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달라붙는 것이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 되어 마치 불나방이 불로 뛰어듦과 같아 멸망의 지름길로 스스로 뛰어드는 꼴입니다. 사탄이 쳐놓은 함정, 그물, 덫, 올가미에 걸려 드는 형상입니다. 적 그리스도에게 달라붙는 것은 적 그리스도를 머리로 생각하여 그들나름의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머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십니다. 이 한 분 머리로서의 하나님 외에 그리고 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 어떤 머리 역할도 거짓이요 속임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리하여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 자기 부인으로써 사랑함이니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고후 5:15/롬 14:7-9]. 왜냐면 이것이 사람 사는 올바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살지 못하는데 살려 주어야 살게 해놓아야 스스로를 망치도 남까지도 망치는 것을 에덴낙원에서 사탄이 아담에게 행한 살인행위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인이 아벨에게 행한 살인 행위를 보아도 넉넉히 입증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생명의 법칙 즉 사랑하는 것은 한 몸 구조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설명을 주님은 다음 말씀으로서 밝히신 것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니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것이다"[요 6:57]. 보내심을 받아 그 보내신 뜻을 행하는 것도 사랑의 원리를 따르심이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는 것도 사랑의 원리를 따라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되는 이치를 말씀하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 받음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산 자가 됨을 말씀하심임은 물론이나, 이는 머리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오로지 우리만을 위하시는 것을 가리키심이요,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머리되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께서 행하시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심을 나타내심이니 즉 갑과 을 둘이 하나됨에서 갑은 을로 인하여 살고 을은 갑을 인하여 사는 관계를 말씀하심입니다.

고로 머리도 몸을 위하고 몸도 머리를 위하는 서로가 서로를 위함으로써 불가분이 되어 있음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머리는 전적으로 몸을 위해 자기의 전부를 바치고 몸은 머리를 위해 살아 전적으로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이요 사랑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을 내가 알았다" 하시고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니 너희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나[내 말을 듣지 않고 배척하나]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받아들일 것이라" 하신 것이 이 뜻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즉 몸은 머리를 위해 살고 머리는 몸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즉 자기 부인입니다. 이런 사실을 백 번 강조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너무 모른 채 이 세상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은 세상이므로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나 가능하지 생명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용인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바로 이렇게 아담처럼 범죄하여 죽는 자가 되지 않고 악령들[사탄을 위시해서]처럼 멸망하지 않고 거룩한 천사들처럼 영원히 사는 자들이 되도록 하려 하심입니다.

반드시 사랑을 알고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천국 곧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 무엇이냐, 오늘날의 이 세상처럼 악한 자는 일정 기간 가두어 두었다가 뉘우치면 즉 개과천선하면 풀어 주어 올바르게 살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 굳이 그런 악한 자들을 영원한 멸망에 보낼 것까지야 없지 않으냐 하겠지만, 이 세상 삶은 정상적인 인간 삶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세계요 죽은 자들의 이른바 "삶"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는 법대로 살아야 사는 것입니다.

사랑을 배워[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람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거기서 한사코 떠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 천국이어야 함은 마땅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런 선악간의 결정을 스스로 내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괜히 엉뚱하게 이 세상 살고자 하여 금덩이보다 더 귀한 시간을 허송해서 그렇지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시기에는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렇게 오래 기다려 주셔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영원 세월을 두고서 기다려도 절대로 회개하지 아니하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일단 인간에게 그런 자유 선택권을 주신 이상, 이는 더 이상 어찌 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 삶의 사랑[부모 사랑, 남녀 사랑 등]은 하나님 사랑을 가르치기 위한 또는 사랑으로써 사는[영생하는] 법에 대한 즉 불원간에 전개될 천국에서의 삶에 대한 사전(事前) 또는 예비 교육 차원이라 할 것입니다. 에덴낙원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아담]과 아울러 인간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사람 혼자 지내는 것이 좋은 것이라 아니라 하시고] 영물들을 만드셨으나 자기의 가진 바 월등한 지식을 가지고[물론 사탄을 가리킵니다] 자기 손위의 인간을 죽음에 몰아넣는 하극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이하 모든 인생들이 애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의 영생하는 생명체가 아니라 내일도 기약 못하는 한시적인 생명의 불확실성 속에서 불안에 떨며 지내왔는데 때가 이르자 하나님 친히 구원자가 되심으로써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을 누구든지 이러한 아담의 전례를 따르지 않는 자에 한해 구원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장차 오는 영원한 생명 아니면 죽음에 대한 말하자면 그림자 격이요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악이 어떤 것이냐, 어떤 결과를 낳는 것이냐 하는 점에서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물이 나도록 목도하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선[좋은 것]과 의[올바른 것]는 이 사랑으로 하나됨 즉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오는 모든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장차 사탄이 스스로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는 자를 조종하여 그리스도 행세를 하게 함으로써 마지막으로 대대적으로 인류를 기만할 것이라 하는데[살후 2:3-12], 실상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하나님 이상 가는 올바르시고 선하시고 이상적인 하나님이 다시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라 또는 그리스도라 자처하고 오는 것은 무조건 거짓이고 속임수임이 드러납니다. 왜냐면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하나님 이상으로 이상적인 하나님이 없으시고 따라서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의 그리스도의 구원 이상으로 완전한 구원의 논리가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고 보다 완전한 것이 있을 수도 없는 까닭입니다. 물론 적 그리스도는 나름대로의 "완벽한" 논리를 가지고 인류를 꾈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 그리스도 친히 심판하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극악하게 나타나는 죄인이라도 우리가 절대로 손댈 수 없고 오직 회개하기만을 바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데에만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나, 이 적 그리스도의 처음부터의 행색대로 반대파를 무차별로 무참하게 학살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할 때도 그럴 듯하게 이유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도록 함이 유일한 목적이므로 마지막 심판 때까지 기다려도 늦지 않는 것이 세상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런즉 그런 식으로 반대자들을 숙청하는 것이 적 그리스도의 거짓된 특징이 될 것입니다. 우리 진리 편에 있는 이들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박해하고 무차별로 그 반대자들을 청소할 때 다시 강조하지만 그럴싸한 이유를 말하겠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심으로써 그런 적 그리스도와 그에게 붙은 모든 사람들을 청소하신다는 사실만을 계시록에 있는대로 인정할 뿐, 그런 변화 없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정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오실 때에는 주님께서 미리 경고하여 말씀하신 대로 동편에서 서쪽까지 비쳐지는 신령한 몸의 영광으로 나타나실 것이므로 적 그리스도는 그렇게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나타나실 때에는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이들 역시 모두 그런 몸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이 차이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천년 간의 그리스도 통치가 시작됩니다. 이는 적 그리스도가 출현할 때 혹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하여 나타나는 경우에 대비하는 경고가 되겠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는 분명히 신령한 몸으로 오신다고 하셨으므로 이 사실이 뒤바뀌어질 아무 근거나 이유가 없는 것인즉 이 말씀과 어긋날 때 무조건 거짓으로 판정을 내려도 하자는 없게 됩니다. 그리고 요란스럽게 기적 등을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차별화를 시도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그런 기적을 앞세우실 필요가 없는 것은 정의가 강 같이 흐르는 세상을 확립하고 이를 운영함에 목적이 있으므로 그런 기적 같은 것이 나타날 필요가 없음입니다.

그 때가 되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모두가 다 하나님을 알고 있을 것이므로 굳이 기적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하나님이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는 더 다시는 기적 같은 것으로써 사람에 대한 은혜를 나타내는 때가 아니고 오직 그 가르치심이 합당하고 논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적 그리스도는 명백히 기적 즉 거짓 기적으로써 한 몫 본다고 성경에 미리 경고를 해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확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살후 2:3-12].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로 위치해 계심을 소상하게 밝히신 이상 더 다시 우리가 이에 대해 목말라 할 필요가 없으니 이 이상으로 여럿이 하나처럼 자기 자신처럼 되어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고의 삶의 지혜 자체를 이미 알아 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가는 삶의 진리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로써 대 만족이고 어떤 새로운 진리라고 해서 가장해 나타나는 것도 용납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배부르고 의[모든 올바른 것, 올바른 이치]에 배부르므로[마 5:6]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어떤 신기한 것도 우리는 거들떠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워낙 자연계에 속한 육체인지라 영물[사탄 등 악령들]이 부리는 각종 조화와 요술은 현란하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이런 것은 악령들이 인생들을 속이기 위한 악한 저의가 깔려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사악한 것에 흥미를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의지(意志)입니다. 항상 적극적이고 능동성을 띠는 주인 의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 세신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를 밝히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만큼 전폭적으로 나를 위하신다는 의미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없으니 육체이므로 한 사람 또는 몇 사람 외에는 상관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마치 한 사람만을 위하시듯이 하지만 전체를 다 골고루 한 쪽으로 쏠림이 없이 공평하게 똑같이 사랑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히 1:14]이 천사들도 그 신령한 육체를 두고 영이라 하는 것이므로 일정한 육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다르고 우리와 같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영"[요 4:24]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머리터럭이 모두 몇 개인지 다 아시는 하나님, 그렇게 세시고 있는 하나님이시니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는지라 내가 나 자신을 위할래야 위할 수도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필요 없는 일을 무엇 때문에 하겠습니까. 그토록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선물로 주심이[갈 2:20] 영원한 기정 사실이 되어 있으니 나 역시 이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로서 오직 그리스도와만 단 짝이 되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분 없습니다"[시 73:26]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통틀어 사람으로서는 그리스도밖에 내게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면 누구나 이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으니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깊이 마음에 우리가 새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미가 이렇게 놀라우므로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害)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7-9] 한 것입니다. 아는 사람만이 알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압니다. "내게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음"[갈 6:14]은 그렇게 나 위해 죽으심으로써 이와 같이 나와 불가분의 하나가 되어 계시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구원의 희소식]과 세상 종교와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진실 진리와 거짓 것의 차인데 그 현저한 증거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입증됩니다. 이는 솔로몬의 명쾌한 판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왕상 3:16-28]. 서로가 그 산 아들의 어머니라는 두 여자의 주장은 오늘날 종교가 서로가 자기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은 그 직접 낳은 어머니의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음"이라 할 것입니다.

세상 종교는 거짓말이기 때문에 그런 애틋한 행동화한 어버이로서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말만 가지고 이렇게 저렇다 하며 진리 연(然)하는 것입니다. 아이의 실제 엄마가 아닌 여자가,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왕상 3:26]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 엄마는 즉각 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즉 "산 아들을 저 여자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십시오" 한 것입니다.

불교는 그래서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변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교는 창조신을 인정한다 해도 폭력에 호소합니다. 칼을 들이대며 네가 이 교리를 수용하겠느냐 않겠느냐 하는 데에서는 할 말이 없게 됩니다. 목숨이 아까우면 거짓이라도 수용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성경의 하나님은 인정하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참 뜻을 희석시킴에 있습니다. 마리아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구원이 완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대체적으로 개신교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합니다. 구원 받는 은혜를 멋대로 해석하여 "공짜로 얻는 영생"으로서 착각하는 그것입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품속의 아기를 절절하게 사랑하는 산모(産母)의 어찌할 수 없는 불 타는 마음이 그대로 표출된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을 통한 우리 구원입니다. 인간이 이와 같이 죽음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이 인간 자신의 저지른 결과이니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아기'로서 '엄마'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 인한 스스로 불러들인 죽음의 대가인 것입니다. 육체의 아기는 당장 입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엄마의 젖이므로 그렇게 불복종할 수가 없다 하지만 피조물로서의 하나님의 아기들은 자유 의지가 완벽하고 충분하게 보장되어 있는지라 엄마 품을 떠날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구원은 영물(靈物, 곧 천사)들로 치면 거룩한 천사들과 같이 순종할 수 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지 사탄 등 악령들과 같은 불복종하는 이들을 위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불복종하더라도 구원하신 양이시라면 첫째 아담부터 죽지 않게 만드시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하여 즉 불복종하여 아담이 죽을 수밖에 없도록 된 것은 이와 같이 순종하는 자에게만 영원한 생명이 가능하게 되어 있음이 이미 기존 법칙으로 확립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엄정한 법질서 확립으로 인하여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우리 위해 죽으실 것 없이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우리를 살리시거나 아니면 방금 지적한 대로 아담을 죽지 않게 하셨으면 될 일입니다.

다시 말해 죄 짓고서는 즉 생명의 법칙[하나님을 머리로서 그리고 모든 피조물은 그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 관계를 충실히 유지하려는]을 벗어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이니, 즉 ①이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 나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히 6:6] 사실을 알아 다시는 사랑하는 주님을 해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또 ②나 자신이 죄의 보루요 온상인 육신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그리고 ③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나만을 위하시는 내게 친히 주신 선물로 계시게 됨을 인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도록 하려 하심입니다[고후 5:15/롬 14:7-9].

그러므로 영생을 공짜로 얻어 챙기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산 자가 되게 하시어 산 자로서의 복종을 할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아담을 처음부터 죽는 자로 만드시지 않고 산 자로 만드셨으나 스스로 이 생명의 법칙[계명, 곧 율법이니 모세의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율법-고전 9:21]을 어기고 죽은 자가 되니 살릴 도리가 없으셨음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담처럼 범죄하여 또 죽을 인생이라면 그런 나를 구원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기가 절대로 엄마의 말을 벗어날 수 없고 엄마의 품속을 벗어날 수 없음과 같은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벗어난 것이 아담의 죽음이요 악령들의 영원한 멸망의 운명인 것입니다. 만일에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근거로 하여 죄를 지어도 즉 나 자신을 위해 여전히 살아도[롬 14:7-9/고후 5:15] 영생을 얻게 하신다면 사탄과 같은 악령들도 그렇게 살아나는 무슨 방법을 마련하셔야 할 것입니다. 형평 차원에서 그래서 공평공정하시려면 그렇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은 그들은 이 삶의 법칙을 잘 알면서도[그들은 영물이기 때문에 모든 지식과 지혜가 있어] 고의적으로 범죄했기 때문에 그런 고의성은 영원을 두고도 다시 되풀이될 수 있는 까닭에 이미 한번 떠나 버린 마음이라 이것을 억지로 붙잡아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멸망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만이 그런 자유 의사대로 범죄를 하고 아니하고가 결정될 수 있었지 이미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아담의 허리에서 난 인생들인지라 그런 자유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힘]이 원천적으로 없으니 왜냐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자유 '의지'와 그 의사 또는 선택대로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구별해야 합니다. 의지는 있습니다. 즉 선[머리와 몸 관계에서 머리이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는 것을 선이라고 하고 의(義, 올바름)라 하는 것]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어 그래서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롬 7:22]. 즉 의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나를 사로잡아 오는 까닭에 번번이 행하는 것은 악이지 선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고민 중에 있는 이들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켜 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능력으로 산 자가 되어 산 자의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그러면 사람마다 이렇게 자유 의지는 선하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영물들의 예에서도 입증되어 있습니다. 즉 선과 악으로 구별되어 전자는 거룩한 천사들이고 후자에 속하는 것이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입니다. 즉 처음부터 사탄처럼 악이 좋아[불의를 좋아하여-살후 2:3] 선을 버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그대로 있어 이미 심판을 받은 상태입니다[요 3:18].

성경은 순리대로 읽으면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자꾸 엉뚱한 고집을 부려 말씀하시는 그대로 읽지 않고 딴 방향으로 무리하게 풀어 나가려니까 그것이 어렵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간다는 말을 온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 한에는 그 사람은 그 아주 간단한 "온다"는 말을 평생 가야 깨달을 수가 없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영원을 두고도 그 사람은 그 말 한 마디를 두고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불교의 사물(事物) 이해도 소위 기독교인들의 성경 이해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가리켜 성경은 이미 명백히 설명해놓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대상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즉 순종하는 자에 한해서 나타나지고 주어지는 구원입니다[고전 2:9/약 2:5/1:12/행 5:32/히 5:8]. 순종은 사랑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순종 자체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되는 구조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이 대칭을 이룰 때에는 반드시 크고 작은 구별이 있으니 작은 자가 큰 자를 위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과 관계는 영원하고 그리고 영원토록 변함이 없고 만물의 기본이고 근본입니다. 불교는 인과론(因果論)이라면서 소위 연기론(緣起論)을 말하나 제일원인이신 조물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가당착 모순 속에 있으니 진리일 수가 없고 거짓이라 하는 것입니다. 실상 알맹이는 버려 두고 빈 껍질만 붙들고 있는 허풍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관계로 인과의 법칙이 생겨난 것이고 만물을 관장하는 모든 법칙의 기반이 되어 있는데 정작 중요한 조물주의 존재를 부정하니 속이 빈 허울만 너풀거리는 양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인과 관계를 명확히 설명하는 것이 삼위일체의 원리이고 이를 증명하는 것이 3운법칙인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쌍으로 된 자연계와 영계의 양면성을 모르므로 극히 일부분만 보고서는 인과의 법칙을 부정합니다. 모든 것에 이 법칙이 두루 미치지는 않는다고 스스로 정의하니 몰라서 그런 것이고 모르니까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 단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이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피상적인 해법인지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공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재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말하기를 공기는 보이지는 않더라도 그 실존을 과학적인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지 않으냐 합니다. 과학적인 실험은 자연계에 속한 자연법칙의 영역입니다. 실험도 그런 영역으로 한정됩니다. 영혼은 영계에 속하여 또다른 초자연법칙으로 관장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잣대[尺度]를 들이대는 것부터가 비(非)과학, 반(反)과학입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 자체만 두고 이렇다 저렇다 하고 단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험으로 증명되는 것이 있고 실험 아닌 그 나타난 결과로써 증명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타난 것은 그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타나져 있는 것은 그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오직 이 결과만 놓고 씨름하니 해결이 나지 않고 영구적인 미궁 속을 헤매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무상(無常)은 자연계에 한정됩니다. 그 반대가 영계입니다. 영계는 "모든 것은 다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다"는 무상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영역입니다. 앞에서 영계를 무시하고 자연계에만 집착하여 소위 "과학"이 이렇다 저렇다 단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냐 했지만 불교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합니다. 양면에서 한 쪽 면만을 고집하니 양면을 아울러 보아야 비로소 그것이 진리가 됩니다.

3운법칙은 삼위일체의 원리를 그 구조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림을 그려놓고 설명하듯이 하고 있는 그 독특한 구조입니다. 이렇게 거창한 영원한 법칙을 하나님께서 그림으로 나타내어 설명하시듯이 하는 것을 인류는 일찍이 구경한 적이 없습니다. 이 삼위일체 원리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3운법칙[트리지 호모, trini homo]가 그 유일한 예입니다. 아마 그런 것이 일찍이 보여졌더라면 감히 사탄이 무신론으로써 지금까지 인류를 기만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신론은 사탄의 작품일 뿐이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만큼 사탄은 인생들의 사고방식을 밀가루 반죽을 하듯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사탄은 스스로 그 무신론의 장막을 걷어치우고 유신론이라는 색다른 장막으로 인류에게 덮어씌우려고 획책하는 오늘날입니다. 사탄이 유신론을 펼 때는 절대로 성경에 나타나신 대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적 그리스도를 통한 자작(自作) 창조신의 형상입니다[살후 2:3-12]. 이 거짓에 넘어갈 때는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니 조심할 일입니다.

삼위일체의 원리는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 즉 아버지와 아들로 영원히 계시는 상태를 원리로 삼는 것이어서 영원하고 그리고 기본적인 것입니다. 모든 과학적 법칙의 기본이라 하는 것입니다. 실상 과학이라는 것은 이 우주 만물의 제반 법칙을 다루는 학문이므로 영계가 알려지면 그 영계의 모든 법칙도 과학의 영역에 당연히 들어가게 됩니다. 단지 지금은 영계의 실상을 너무나 모르고 있는 터라 자연계에 한정해서 말하기 때문에 도리 없이 자연법칙만을 말하는 것으로 제한되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영계와 자연계를 통틀어 아우르는 법칙이 삼위일체의 원리요 성경은 처음부터 이를 공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오늘날에 와서 3운법칙이 나타나져 이를 마침내 증명하고 있기에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뿐입니다. 이 3위일체 원리에서 대칭[상칭, 대립]을 이루는 양자가 대등할 리 없고[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하나님께서 하나로 계시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므로] 대소(大小), 주종(主從) 관계를 이루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인과(因果)의 법칙이 증명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버지께서는 원인이시요 아들께서는 결과이시기 때문입니다. 대소, 주종 관계는 필연적으로 인(因)과 과(果)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증명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이 나왔다는 뜻이니 곧 앞에서 말한 대로의 어버이와 자식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 관계는 어버이와 자식 사이로서 이보다 더 밀접하고 가까운 관계는 없다 합입니다. 이런 근본을 가리켜 아내나 자식이나 부모나 그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게 합당하지 않다 하신 것입니다[마 10:37].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미 아담은 이 점에서 낙오한 것입니다. 왜냐면 가장 가까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자기의 분신이라 하여 여자의 말을 더 들음으로써 죄를 지어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천하에서 나를 두고 기준할 때 항상 가장 먼저 오는 가장 가까운 단어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부모의 자식 사랑, 짐승의 새끼 사랑이 모두 이를 기반으로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은 후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하기도 하지만 구원 받은 후 첫째 말씨가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구원"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신 것이 바로 이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정상적인 의미에서 다시 말해 죽은 자로서의 죄인들인 인간을 기준하지 않을 때] 전적으로 그 자식을 위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식된 도리 즉 영생하는 도리는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요 따라서 불복종은 여하한 경우에든[비록 처음에는 믿어 잘 순종했더라도-마 7:21/25:45] 죽음의 멸망일 뿐입니다.

인간의 육신의 아들들은 억지로라도 즉 어릴 때에 간섭이나 강제를 해서라도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만들려고 하지만 하나님과의 아들 관계는 그런 것이 없으니 오직 순종하려는 자에 한해서 회초리를 드시는 "징계"[히 12:7,8]도 있고 바울처럼 육체에 가시를 주시는 은혜도 베푸시는 것입니다[고후 12:7]. 처음부터 순종하기를 거부하든지 처음에는 순종할 의사가 분명했으나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방향으로 흐를 때[빌 3:18]에는 하나님도 버리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롬 1:24,26,28/눅 12:8,9/마 10:32/딤후 2:12].
 
유일한 차이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한다는 이 둘이 하나되는 사랑의 법칙은 누가 들어도 환영할 일입니다. 왜 그러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세상에서 배척을 당하느냐 하면 이 세상이 마귀의 지배 아래 있다는 그 사실뿐입니다. 다시 말해 사탄은 어찌하든지 이 세상 삶을 사랑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삶을 삶으로 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만을 전하려고 하는 데에 있는 여기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를 믿어도 이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도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 사탄의 교묘한 술책입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라는 것이니 왜냐면 복음만 전파되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존속될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도 이 세상 일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 흥미를 느끼고 세상과 더불어 살려고 하는 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요 20:21,22] 의미의 구원의 목적에서 벗어남이 되므로 멸망의 대상일 될 뿐입니다.

사탄은 무신론도 만들어내고 각종 종교도 만들어내었지만 오직 목표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어 구원 얻지 못하게 함입니다. 제 아무리 하나님 믿고 그리스도도 믿고 성경을 믿는다고 해도 세상을 사랑하는 한 멸망은 필지이기 때문에 이를 사탄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속임수로써 적 그리스도를 출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색깔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사는 삶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현재 고난 중에 계시고 이 고난 받음은 앞으로 구원될 사람들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것이므로 우리가 당연히 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일부러 고난을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이 바울 사도처럼 그리스도를 곳곳에 다니며 전파하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서 핍박 받고 멸시 받고 따돌림을 받는 등의 고난으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면 고난을 자연적으로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되어[고후 5:15]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는데, 실제 자기를 위해 살면서도 이것이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자기를 속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는다는[요 12:25] 경고를 하신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세상 삶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린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울 사도가 교회를 가르치면서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더 복이 있다 하였고, 세상 물건을 쓰는 자는 다 쓰지 않는 것 같이 하라 했고 아내/남편이 있으면 없는 것과 같이 없으면 있는 것과 같이 지내라든가, 종으로 있을 때 믿음에 들어온 사람은 나중에 자유인이 될 수 있어도 종으로서의 신분으로 그대로 지내라고 한 것 등이 모두 그런 내용을 강력히 나타내는 것입니다[고전 7:1-40].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는 일도 있다 하시고 누구든지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고 선언하신 데에서도 명백히 드러납니다[마 19:12]. 그러므로 이 세상은 존재하는 목적이 구원될 사람 다 구원되기까지만 존속하는 것입니다. 이 일만 끝나면 내일이라도 이 세상은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는 것이 뜻이라면 바울 사도 자신이 그렇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함으로써 고난을 자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특별한 위치가 되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한 것입니다[고전 11:1]. 베드로도 "양 무리의 본이 되는"[벧전 5:3] 것이 목자의 의미라고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세상 삶을 즐기는 자가 일을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손에 쟁기를 들고 뒤로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자 않다고 경고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눅 9:62].

그런즉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우리의 육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의 존재 자체가 기도를 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행 1:8] 하신 대로 "말씀을 전파할 것이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는"[딤후 4:2] 데에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런 전도자는 자기 고장을 떠나 외국에 가서 전도하는 것을 가리킬 뿐입니다.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반드시 복음 전도자 역할을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남의 종으로 있던 사람이 믿게 되면 자유인이 될 수 있어도 종으로 그대로 지내라는 것도 이와 같이 주변 사람들에게 구원의 희소식[복음]을 전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는 복은 전도자이므로 한 곳에서 그렇게 전도하는 것이 핍박으로 인하여 불가능하게 될 때는 그 곳을 떠나 다는 곳으로 옮겨 가서 전도 일을 하는 것이므로 이 세상 삶의 낙을 즐김에 있지 않고 일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일하는 낙을 누린다고 해야 옳은 것입니다. 이런 낙은 비록 핍박을 받아 죽임을 당해도[고후 1:8,9] 변할 수 없고 끊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어 기도에 전념하는 사람이 사람 사는 맛에 얽매일 리가 없습니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pleasure]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다"[딤전 5:5,6] 함과 같습니다.

사람[아담]을 만드실 때 처음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만드시고 그 후에 영혼을 조성하심으로써 육체가 영혼을 따르게 하여 [이런 대칭(상칭, 대립)관계는 반드시 주종, 대소 관계가 되어 하나는 다른 것을 필시 따르게 되어 있음] 그 결과 영원한 영혼을 따라 육체도 영원성을 띠게 되어 신령한 육체로 변환되었던 것입니다.이 일은 에덴낙원에서 이루여졌으니 인간에게 영혼이 있게 됨으로써 비로소 영계인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것이고 인간 안에 영혼을 조성하시지 않았다면 에덴낙원을 별도로 만드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의 단계와 순서를 따라서 산 자가 되어 있는데도 아담 스스로 자기의 자유 선택[자유 의지로 인한]을 따라 머리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거역함으로써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원래부터 즉 하나님의 생명체의 창조의 질서는 하나님을 머리로 하고 피조물은 그 몸을 이룬 몸의 각 지체 역할이 개체[인격성을 지닌 피조물 생명체]의 생명의 위치인 것입니다. 그냥 목숨이 있다고 즉 살았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계적인 삶은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요 인간은 처음에는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되었지만 인격성과 영원성을 갖추게 되어 있는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영계에서 영생하는 것이고 이 자연계에 속한 기계적인 생명체처럼 한시적인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연, 필수적인 이 머리와 몸 관계에서 그래서 하나를 이루어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인데 감히 머리의 말씀, 그 뜻, 그 지시를 듣지 않았으니 스스로 이 생명 권역(圈域)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입니다.

일단 죽었으니 폐물이라 폐기된 상태요 다시 영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입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이 육체는 다시 자연계에 속한 것이 되었으니 육체는 썩는다고 하지만 영혼이 있으므로 그 영혼은 생명에 세계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고 영원히 존재하되 이제는 생명 아닌 생명과 대립 개념 속에서만 지내게 됩니다. 이를 표현하여 "죽음"이라, "멸망"이라 하는 것뿐입니다. 세세토록 고난의 연기만 솟구치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계 14:10/20:10]이 그런 곳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원한 죽음 또는 멸망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이와 같이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에서 이탈하고 아담처럼 복종하지 않은 영물들은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런 기정 사실로서 악을 행하고 불의를 좋아하는 피조물[인격성이 있어 그렇게 자유 선택을 할 수 있는]들이 들어가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되는 경우 거기 해당되는 인생들은 단 하나라도 불의를 좋아하는 자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고 현실과도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위의 설명대로 악령들은 그 곳에 들어가도록 정해져 있는데도 인간만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이나 영물들을 구분하시지 않고 똑같은 고난에 처하심으로써 똑같은 결과인데 원인이 달라질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결과가 동일하면 원인도 동일할 수밖에 없으니 즉 불의를 좋아하는 자마다 인간이든 영물이든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게 된다 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도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시라고도 일방적으로 말할 수 없는 오직 근본이시고 근원이시라는 표현에만 해당되십니다. 다시 말해 양면을 두루 갖추시므로 '갑'이라고도 '을'이라고도 못하고 오직 '병'이라는 표현만이 적당하고 거기 해당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요일 4:8]이라고 표현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는 말도 함께 따라 붙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롬 11:22] 이 양면을 두루 골고루 갖추신 분으로 하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구원은 이러한 우리의 죽음의 상태를 산 자로 만드심인데, 이로써도 아담의 "죽음"이 범죄하기 전의 영생하는 신령한 몸을 박탈당하고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말함인 줄 확인하게 됩니다[롬 5:12]. 그러므로 죽은 자를 산자가 되게 하시는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서 사람을 이전처럼 산 자로 만드실 때에는 현재의 이 죽음의 상태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지닌 인생들에게 아담 때처럼 영혼 격이신 성령을 영원한 선물로 주심으로써 그리하여 이렇게 새로 창조하게 된 인간의 모습 "역시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를 따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우리의 "영혼' 격이신 성령 앞에서 "육체"가 되어 있는 우리는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벗어나 [범죄하기 전 즉 처음으로 창조되던 아담처럼] 영원히 사는 신령한 몸을 입게 되어 영생하게 될 뿐 아니라 위의 설명대로 다시는 불의를 좋아하지 않는 다시 말해 악을 행하지 않음으로서 이 생명의 한 몸 체제에서 불복종으로써 이탈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하는 조건이 붙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외침이 주님 앞서 보내심을 받은 세례 요한이나 그리스도 자신이시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였습니다. 

즉 이런 죽음의 세계인 자연계의 삶을 벗어나 애초 인간을 창조하시던 때의 창조 의도처럼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할 일이 아담처럼 악을 짓지 않겠다, 악령들처럼 불의를 좋아지 않겠다, 따라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하나님]의 지시대로 절대로 복종하겠다는 의지 표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회개한다 하는 것이며 또한 "믿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믿어야 구원되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하여 무식한 사람들은 이 이유를 알지 못하고 단지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를 영원 전부터 그렇게 택하셨기 때문에 남들은 안믿어도 자기는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논리에 지금까지 절대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물들어 온 것입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종교인이지 성령을 받아 모신 이들일 수가 없습니다. 대체적이라 표현한 것은 비록 그런 중에도 즉 그렇게 가르쳐도 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못 배웠어도 개중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극소수나마 있어 그런 "어린 아이 같은"[마 18:3] 상태에서 사랑에서 우러나는 순종을 하므로 구원을 넉넉히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실상 우리 구원은 너무 간단 명료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그 증거가 그 아들의 우리 위한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인즉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어 명령하시고 시키시는 일을 우리가 감히 아니하고 아니 들을 수 있느냐 하여 순종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바로 이런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질렀다가 회초리를 맞는 아동이 그 회초리를 든 어른 앞에서 그런 약속 않는 경우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 아이가 나는 절대로 복종하지 않겠노라고 고집을 피운다면 그럴 경우 어떻게 하겠습니까. 회초리를 더 심하게 한다 해서 그런 "죽으면 죽었지 나는 절대로 시키는 대로 않겠다"는 그 외곬으로 나가려는 마음이 변할 리 없고 그렇다고 혹독하게 매질을 가해서 죽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예 그 경우에는 그 아이에 대한 모든 미래의 기대를 포기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포기하시는 것이니 곧 멸망에 버리시는 일이 됩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버리실 때에는 생명으로부터의 버림 받는 일이므로 곧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멸망입니다. "인자"가 아니면 오직 해당되는 것은 "엄위"[진노]뿐입니다. 그래서 아담처럼 또는 영물[사탄을 위시한 악령]들처럼 우리도 얼마든지 될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은 미리부터 경고하기를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떪으로써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합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지 구원 받기 전에는 구원을 이루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 성경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라고 명령을 하고 지시를 내리는 것이지 불가능한 것이면 그런 경고를 하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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