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5일 토요일

(21)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솔로몬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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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결론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아 전도서와 잠언과 아가서를 기록하여 후세에 남긴 솔로몬은 전도서의 말미에 적기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한다"[전 12:12] 하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행방불명입니다. 그렇게 크신 은혜를 입고도 말년에 마음이 변하여 변절하고 하나님의 진로를 산 것입니다. 다윗처럼 회개하였다는 말은 없고 오히려 자기의 죄과로 인해 나라를 자기 아들로부터 쪼개 나누어 가질 여로보암을 죽이려고까지 했으니 회개를 아니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맛보고도 결국에는 그 종적을 우리가 알 수 없게 되는[마 7:22] 비극을 맞았으니 하나님은 사람을 그 행한 대로 갚으시고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두려운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항상 복종하여[이 복종을 솔로몬은 말년에 가서 하지 않은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 하는 것입니다. 그가 죄인이 되었으나 그의 말은 하나님 주신 지혜이므로 그대로 성경에 수록되어 있고 또한 우리의 경계로 남아 있습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여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고로 우리도 지금까지 여러 말을 되풀이하였으나 간단히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원히 살고 행복하게 살도록 처음 만드셨으나 사람 사는 도리 그 법을 말씀하신 명령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불러들인 죽음이요 불행입니다. 오늘 우리 인생들은 그 결과를 맛보고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도 기약 못하는 목숨에다 이런 나약한 육체의 꼴불견은 들의 백합화의 영광만도 못합니다[마 6:28,29]. 인간 고유의 영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롬 3:23].

그러므로 현재 죽은 자의 몰골로부터 벗어나 산 자부터 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어 그 분을 성령으로 내 안에 모셔 영원히 그 분과 하나가 되어야 함이니 그래서 영혼과 육체 관계, 몸과 머리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미 그 사람 사는 도리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죽을 것이라고 선고를 받고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니고는 절대로 애초 인간을 창조하셨던 그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 복귀됨으로써 우리가 살아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 사는 법을 어김으로써 이런 죽음의 불행을 맞았으니 향후 다시 살게 되면 절대로 그런 일을 또다시 범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우리 구원의 핵심 요소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어야 회개해야 구원이 됩니다. 그리고 회개해도 그 마음 변하지 않아야 즉 솔로몬처럼 변심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는 도리라는 것은 몸과 머리 관계에서 결코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이 윤곽이 우리가 잘 아는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으로서, 그 실례를 임진왜란에서 이공 순신을 중심한 당시의 역사적 무대에서 배우게 됩니다.

이제 이 우주는 대칭 개념으로 확립되어 있습니다. 생명 아니면 죽음, 구원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 생명의 쾌락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영원한 고난입니다. 물론 하나님 친히 미리 보시는 결과대로 이루어졌지만 피조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결과입니다. 고로 우리는 이런 것을 골고루 일단 다 맛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위로를 잃게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 세상에서 일시적인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눅 6:24,25/16:25].

그리고 영원한 고난을 면하게 되려면 이 세상에서 잠시 고난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필수입니다. 이와 같이 상반되게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야 영원한 생명의 쾌락이 우리 것이 됩니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위로를 먼저 받으면 영원 세상에서는 다시는 위로가 없습니다. 영원한 고난뿐입니다. 이런 대칭 원리를 제대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곧 영원한 삼위일체 원리입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것이 3운법칙입니다. 동양의 정신세계를 주름 잡은 형이상학적 음양사상과 물질문명을 대변하는 서양의 형이하학적 과학 탐구가 결국은 한자리에 만나 하나의 결론에 이른 것이니, 이 사실을 다시 최후 확정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트리니 호모[trini homo]'입니다.

이름 그대로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이 세상 삶[생애]에 대한 운명의 법칙입니다. 법칙이니까 강제성을 띱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명확히 자유 의지가 있는데 이 세상 삶이 그런 운명적이라면 운명적이지 않은 즉 우리 스스로에 의해 결정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름아닌 영원한 운명이니 이는 철저히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이 세상 것은 강제성을 띠므로 우리의 결정에 의하지 않으나 영원한 생사 문제는 완전히 우리의 자유 선택의 결과로 말미암는다는 이 엄숙한 현실을 직면하라는 것이 우리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지적한 솔로몬의 결론입니다. "솔로몬의 결론"이라는 것은 여러 장황한 말을 할 필요 없이 단 몇 마디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단도직입으로 밝히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즉 이 세상 삶에 연연하지 말 것이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위로 받는 것을 극력 회피할 일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일상생활을 지금부터 영위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올바른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지금부터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는 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면 모든 의[올바름]와 선[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창조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행복하게 사는 모든 요건이 모두 의이고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이 죄요 악이고 불법이요 불의입니다. 모든 비극과 불행이 여기서 나오므로 한사코 우리는 이를 미워하고 회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사는 올바른 도리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는 것이 솔로몬의 결론입니다. 지혜자의 지혜로운 결론인 것이니 세상에 여러 학문적 분야가 많고 인간 삶의 영역도 많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온갖 것이 있으나 결론은 이상 말한 것 한 마디로 정리하고 요약될 수 있으므로 솔로몬의 경고 또는 결론이라 합니다. 솔로몬 그 자신이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경고가 되어 있음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 자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알았지만 그 자신 끝까지 이를 지키지 못한데 대한 우리의 경악이요 아연실색인 것입니다.

이 자체가 바로 이 결론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 아닐까요. 왜냐면 그렇게 경고한 경고의 당사자 자신이 그런 경고를 무시한 실질적인 본보기가 되어 있음입니다. 그냥 경고로만 그치지 않는 의미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의미로서 천만 금보다 더한 무게로 우리를 짓눌러 오고 있습니다. 그 자신도 지키지 못한 경고를 말했다는 뜻이 아니니, 경고의 주체는 하나님의 말씀이시지 그 자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경고와 같이 "저들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으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1,12]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것은 제1순위에 오는 의인의 자격 즉 의롭다 하심을 얻는 요건입니다. 왜냐면 의를 사랑하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것이 현재의 모든 인류의 불행의 원흉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회개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만이 세례를 받아 죄 용서를 받게 됩니다.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것은 그 어떤 복종의 행위 이전의 마음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가 구원 받았으면 당연히 즉 상식적으로 또는 양심적으로 판단해도 내 이웃을 역시 구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 즉 성령 받음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것"[요 20:21,22]으로 명확히 정의(定義)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이렇게 복음이 완전히 세상에 전파가 되면 끝나는 것으로도 분명히 말하셨으므로[마 24:14] 이 세상의 정의 역시 명명백백하게 내려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존재 의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고난 받음은 귀중한 자산

사람답게 삶에는 역경(逆境)은 귀중한 자산(資産)입니다. 극한 고난도 중하고 귀한 것이요 죽음도 빛나는 것이요 영광이요 모름지기 한번 겪을만한 겪어야 마땅한 억만 금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이를 “은혜”[빌 1:29]라 하는 것이니 강제로 ‘지우심’이 아니라 우리의 영광을 위해 선물로 ‘주심’입니다. 모름지기 정의에 불타고 불의를 못참는 열혈(熱血) 남아(男兒), 열혈 여장부(女丈夫)는 이 보람찬 인간다운 멋진 삶의 도전에 쌍수를 들어 환영하여 응할 일입니다.

어떤 고난에도 위축될 이유가 없습니다. 의(義) 곧 올바름을 위해[마 5:6]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 죽음은[마 5:10]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진실로 휘황찬란한 것입니다. 짐승은 짐승다워야 하고 사람은 사람다워야 하며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 지으신 목적답게 살라는 것이요 사람으로 지으셨으니 당당히 사람다우라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세상을 속이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최후발악적인 그리고 절정에 이르는 수단으로써 “악한 자”,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살후 2:3]이 곧 나타나게 되는데, 요한 계시록에 보면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계 16:13]고 했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판(版) 삼위일체 이론을 내세우려는 것인지는 모르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짐승도 잡히고 그 앞에서 기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다 했는데[계 19:20] 이 거짓 선지자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각종 기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했고 둘 다 산 채로 유황 불 타는 불 못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20].

이 거짓 선지자를 “또 다른 짐승”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땅에서 올라와 새끼 양처럼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한다”[13:12] 했고, “모든 권세를 받아 먼저 나온 짐승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13]라 했고, “큰 기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한다”[:14] 했고, “받은 바 능력으로 짐승 앞에서 기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칼에 상했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해 우상을 만들라’ 하고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몇이든 다 죽이게 한다”[:15]고 했습니다. 

이 거짓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의 세례 요한의 흉내를 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악한 자는 그리스도라 참람(僭濫)되게 사칭(詐稱)하고 나타날 것인즉 예수님은 가짜 혹은 예비 혹은 상징적으로 왔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아무 능력도 행할 수 없었으나 “이제 참 그리스도가 왔으므로 참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능력을 베푼다”는 식의 논리를 둘러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먼저 오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는데 같은 의미로 올 때에는 아무리 거창하게 와도 가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지금까지 설명된 그리스도의 의미는 아주 완벽합니다. 이 이상으로 완벽할 수 없고 더 이상의 의미도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점을 상쇄시키기 위해, 그 대신 온갖 거짓 기적으로 요란하고 시끌벅적하게 하는 것이 거짓과 속임수의 속성입니다. 따라서 기적[성경은 이를 거짓 기적이라 명시했음]도 더 현란한 것으로 그리고 규모가 클 것은 명약관화입니다[살후 2:9,10]. 그리고 “칼에 상했다 살아난 짐승”[계 13:14]이라 했으니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방할지도 모릅니다.

이 악한 자는 네피림의 하나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자식입니다[창 3:15]. 그리고 그 거짓 선지자도 네피림의 하나일 것은 먼저의 짐승과 같이 “짐승”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능력 행하심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인생들을 불쌍히 보시는 마음으로 병을 고치시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능력을 자제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목적이셨고 자기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시기 위함이었으므로 기적을 행하시는 데에 목적을 두시지는 않으셨으나 굳이 그것을 억제하시지도 않은 것입니다.

단 기적을 행하심을 인하여 사람들이 왕으로 강제로라도 추대하여 죽으시지 못하게 할까 하여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그것만을 마음에 두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적 그리스도는 그런 것은 전혀 모방할 수도 없는지라 기적 행함에 치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한다”는 것은 우리는 어디까지나 육체들이고 영물들은 공중에서 활동하는지라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만 과연 그 의미가 그대로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를 상징해서 말하는지는 현재로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기적은 악령들이 얼마든지 행할 수 있으니 기적 자체에 의미를 두지 말 일입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마 12:39]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시고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거짓 것과 참 것의 방향 설정이 다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기적으로 한 몫 보려 할 것이니 별의별 기적이 나타나도 거기에 현혹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의 “기적”[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이를 “거짓”이라 하였으니 거짓과 모방에는 한도가 없는 법]을 나타낼 것은 분명하여 기적의 다과 또는 규모의 크고 작은 것으로써 진위(眞僞)가 가름되어질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적만으로써 인생들을 가르치려고 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왜냐면 그것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모세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던 당시 이스라엘이 그러하였습니다.

그 많은 기적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그렇게 큰 기적들을 나타내셨으나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고[막 6:6/요 6:66] 그 위에 한 술 더 떠서 “하늘로서 오신 표적을 보여 달라”고까지 했습니다. 기적은 어느 정도이지 그 자체로써는 아무 목적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적이 크면 클수록 능력도 비례한다고 착각하여 따라서 기적이 크고 많으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강한 하나님’이라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적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속임수로 임하게 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기적은 그 한 때뿐임을 이미 성경은 위의 설명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면 크면 클수록 보다 더욱 큰 것만 계속 요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경우 그렇게 일시적으로 써 먹기에는 안성맞춤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활동은 일시적인 속임수이지 영구적이고 진실된 것이 될 수도 없고 그럴 의도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교 우위에 그 목적이 있으므로 즉 성경의 기적보다 더 큰 역사라는 점을 과시함에 있어 그런 목적에는 아주 제격인 것입니다.

능력의 한도이어서 주님께서 그 정도로만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기적만으로는[물론 기적이 어느 정도 기여하지 않는 바는 아니나] 목적을 달할 수 없는 것이므로 불필요한 일은 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의 기적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잘라 말씀하심은 더 이상 기적이 필요가 없다[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일에서는 이미 나타내신 기적만으로 충분하므로]는 의미이시고, 오직 믿든 안믿든 하나님의 목표는 인간 구원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한 개개인의 구원에 있음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계시록의 표현대로 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는 그런 ‘기적’들로써 승부를 결하고자 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바울도 이를 가리켜 “악한 자의 임함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살후 2:9,10]이라 했고, “하나님께서 유혹을 저들 가운데 역사하게 하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11] 했으니 이 때의 “유혹”을 영역은 "strong delusion"[KJV], "a powerful delusion"[NIV], 즉 “대단한, 가당찮은” 기만술(欺瞞術)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능력의 선지자이므로 엘리야가 와서 능력을 행한다는 식으로 성경을 아전인수 격으로 그릇되게 풀어갈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우리 위해 죽으시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렇게 죽으시기 위해서는 기적 행함이 저해 요인이 될 수도 있어 굳이 많은 기적으로 자신을 나타내려 하시지 않았으며, 세례 요한 역시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회개의 세례를 주님 앞서 전파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습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모실 수 없기 때문에 회개를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능력”[눅 1:17] 으로 왔지만 능력 행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으니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능력이 그 정도인데 세례 요한이 그보다 더하거나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기적을 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일절 능력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적 그리스도를 위해 기적을 행하게 될 그 “거짓 선지자”는 엘리야[자칭 그리스도 앞에 보내졌다 하여]라 사칭하고 능력을 행할 듯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능력이 인간 구원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보는 터에 아무리 요란한 기적이 행해지더라도 거기 동요될 필요가 없음을 거듭 강조합니다. 영물들이 얼마든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었으나 단지 지금까지는 그런 것을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은 “막았기 때문”[살후 2:7]인데 이제는 자기 때가 왔으므로 거침없이 그 속임수를 부릴 것입니다. 짐승이 "칼에 상하였다가 죽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 모두 자작극(自作劇)이니 혼란스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류 위한 홀로 죽으심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죽으심이니 곧 인간의 처참한 죽음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주 받은"[갈 3:13] 죽음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저주"는 별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난 모든 비정상 상태를 말합니다. 저주든 죽음이든 인간이나 영물이나 그 피조물 스스로가 벌어들인 결과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와 죽음으로써[롬 5:12] 우리 인간은 죽음의 실상을 그 맛이나마 현재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혹독한 것은 장차 임할 것이요, 생몀의 최고 낙[極樂]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 예외 없이 거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생명도 마찬가지로서 지금은 단지 그 맛만 보는 정도이고 본격적인 생명의 낙 그 모든 좋은 것은 장차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비정상인지라 처음의 정상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다시 말하면 사람을 낳기 위한 해산의 수고처럼 진통(陣痛)의 단계입니다[롬 8:22]. 아이만 일단 낳게 되면 과거의 모든 것은 깨끗이 잊어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요 16:21]. 그러므로 이 때, 이 세상[그리스도께서는 이를 가리켜 "이 세대"(this generation)라 하셨습니다]의 본질을 성경이라는 현미경이나 망원경을 통해 정확하게 보는 지혜와 지식이 각자에게 필요합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여[요 12 :25] 살고자 하고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이 엄연한 현실의 도피 행각입니다. 비겁하게 도망치는 자에게는 현실은 무자비합니다. 오직 정면으로 맞닥뜨려 대응하려는 자에게는 구원의 고마운 손길이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은 부당하게 불의한 자들의 손에 죽으신 결과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낸 증거입니다. 악마의 지배 아래 놓인 실상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단순히 우리의 ①영생을 안겨 주시기 위함이 아니니, ②세상의 실상과 현재 인류가 위치한 처지가 과연 어떤 것인지 그 본질적 의미를 만천하에 밝혀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②이런 실상과 본질을 제대로 알아야 ①그리스도의 구원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까닭에 누구든지 아무나 그리스도께 오는 것이 아니라고 미리 처음부터 선언하셨습나다[요 6:45,65].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타내는 두 가지 분명한 측면인 것이니 이는 화폐의 양면과 같아서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그 나머지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폐단 즉 자멸에 가까운 오류는 ②를 무시하고 ①만 보는 편견에 있습니다. 악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런 식으로 소위 믿는다는[그리스도를] 이들을 농락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믿음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 우리 구원인데, 영광과 영생으로만 하나되는 것만 생각하고 그의 고난과 욕됨 즉 "부끄러움"[히 12:2]과 하나됨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철로로 치면 외가닥 레일뿐이라 구원이라는 열차가 달릴 수 없는 것입니다.

전쟁

창세기 첫머리에 전쟁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여자의 "후손[씨, seed]"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후손" 사이의 전쟁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리스도 오신 후부터 전쟁입니다. 그래서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 사이의 전쟁으로서 세상에서의 모든 전쟁과 다름없는 “혈과 육”[엡 6:12]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오신 후부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발꿈치를 물리고” “머리가 짓밟히는”[창 3:15] 것으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혈과 육에 대한 싸움”처럼 그런 동작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고, 한번 물리고 나면 마지막 단 한번으로 머리를 밟아버리는 그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현재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때로서 즉 발꿈치를 물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스도[사람의 대표가 되시고 머리가 되시는]께서 재림하심으로써 단번에 인간의 원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머리를 밟아 버리심이 됩니다. 그러나 물릴 것은 다 물리고 난 다음의 일이므로 ‘고통’은 불가피합니다. 한참 물려야 하는 그런 때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교회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지배자이므로 상대적으로 당하는 “약함”[고후 13:4]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이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필수적입니다. 하나 되는 이치를 따른 영혼 구원이니, 상대의 죄의 고난에 우리가 동참함으로써 우리의 생명에 우리의 상대로 하여금 동참하게 함으로써 죽음을 벗어나게 하고 생명으로 진입하게 하여 살린다는 이치입니다. 이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하늘 전쟁에서 패한 후 지상으로 추방 당한 상태라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내려갔다”[계 12:12] 했습니다. 이판사판이 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제 광포해질 대로 광포해져 있어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고 땅과 바다는 화가 있다”[:12]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회개하라 하시지도 않았고 심판도 없었던 것은[행 17:30] 생명 얻는 회개가 불가능했던 것이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직 이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오시면서부터는 세례 요한이 세상에 대하여 선포한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이 오셨으므로 비로소 회개가 가능하게 되었고 심판도 확정된 것입니다[:31]. 동시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인간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앞으로 길어보아야 10년 안팎으로서 복음 활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남았다고 생각됩니다. 이순신은 임진, 정유 왜란 7년 전쟁에서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전쟁이라 하더라도 그렇게까지야 할 필요가 있느냐 하겠지만, 전쟁에서 이기는 것 외에는 일절 생각하지 않는 그래서 외적의 침입을 당한 국토를 끝까지 지켜 자기 소임을 완수하겠다는 그 의기(意氣)가 우리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됨은 바로 이러한 때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함이니 곧 사람들 건지는 때에 임하여 사람들 건지는 일을 하기 위함이요 그 외에 아무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에스더 왕후가 당시 왕후가 되는 영광을 입은 것이 “바로 이 때를 위함이라”[에 4:14] 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행할만한 가장 합당한 때에 그런 아들 구실을 못한다면야 차라리 그런 아들들은 이 돌들로도 능히 만드실 수 있다 함이 세례 요한의 경고입니다[마 3:9]. 그래서 믿어야 구원입니다. 믿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하는 상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니[요 4:34] 그 뜻을 자기 뜻으로 그 일을 자기 일로 삼는 까닭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자발적으로 즐거워서 기쁨으로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고난 가운데에서 이런 사람 구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시점이 이 세상인데, 어느 여가에 삶의 낙을 누린다는 생각을 감히 품기라도 할 것입니까. 전혀 그런 여지도 없을뿐더러 허락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허락되어 있지도 않은데 정신 차리지 못하고 세상과 함께 흘러가는 이들에게는 실로 화가 있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과의 전쟁 중에 임하는 우리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마땅한 도리는 젖혀둔다 가정하고라도, 최소한 이공(李公)의 양식(良識)과 의지(意志)는 닮을 일이 아닙니까. 세상 일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일이겠습니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자기에게 속하고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해서 형통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나와 똑같은 피조물로서 능력이 많다는 차이뿐입니다. 이런 차이도 인간[아담] 스스로 벌어들인 결과입니다. 원래 창조될 때는 아담 아래 있던 영물들이었는데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이와 같은 꼴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속하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속고 있는 것뿐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가 대기 중인 것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감추고 그 실상을 보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 세상만 끝나면 모든 것은 자연적으로 알아지게 되나 그 때는 너무 늦습니다. 뒤늦게야 속은 줄을 모든 인류가 다 알게 되지만 그 때 가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거저 그러려니 저러려니 하는 막연한 생각에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맡기는 위험 천만의 일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미심쩍으면 끝까지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 사람다움이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하고 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하도록 인간들을 만드셨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셨음을 한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창 6:6]. 그런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을 단지 불쌍히 여기신다고 천국에 들여보내실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에덴낙원에서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될 것을 다시는 용납하시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고로 사람다운 사람들, 사람답게 행동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천국]에는 그런 사람들이 섞일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중간 지대는 없으니 왜냐면 생명 아니면 죽음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득불 그들이 가는 곳은 정해져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이나 사람답게 행동하지 못하여 진리를 알고자 하지 않고 또 알았더라도 그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으니 누가 더 악하고 덜하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차별을 두고 등급을 매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이 아닌 속을 보시기 때문에 같은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음을 아십니다. 에덴낙원에서 직접 나서서 사람을 속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저주를 받았고 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피동적으로 놀아난 인간[아담] 역시 같은 저주의 대상이 되었으며 차별이 없었으니 범죄에는 죽음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다움 곧 마음이 올곧고 똑바르고 반듯한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똑같은 수준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차별을 두고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혹 말하기를 "날 때부터 지적 장애인으로 혹은 저능아로 태어나는 것이야 부정할 수 없지 않으냐?" 하겠지만, 우리는 그런 모든 일의 속 내막을 알고 있지 못합니다. 잘 알지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판단하여 섣부른 행동을 취하는 것은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죽으심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림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심과 같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사랑은, 만물을 지으신 분으로서 원리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게 모든 일을 처리하신다는 점만이 우리와 다르면 다르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만물을 지은 창조자가 아니고 만물의 근본이 아니기 때문에 원리원칙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도 있지만, 그 점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시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원리원칙을 따르시기에 철두철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아는 것이 없는 피조물인 우리들과는 판단 자체부터 다르심은 당연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사 55:8,9] 하신 바와 같습니다. 한마디로, 원리원칙 가운데에서의 사랑, 이 이상 가는 믿음직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우리는 전폭 신뢰하고 그 말씀을 따르고 행하여 순종하는 것만이 이성적이고 이지적인 인간다움입니다. 몰랐을 때는 몰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이제는 어느 면으로든 일단 알게 되었으니 결단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지식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하는 한 가지 방편일 따름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입니다.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뜻을 행하게 되므로 그는 넉넉히 구원됩니다. 그래서 그런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지식만 있으면 교만하게 되니 오히려 역효과만 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다”[고전 8:1-3] 함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사람, 그 사람은 “나는 너를 모른다”[마 7:23]고 하시는 것과는 반대이니 진정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고후 5:15]. 곧 자기 부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려는 것 외에는 딴 생각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는 모두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롬 14:7-9].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한 몸의 원리로서 사는 법을 정하셨으므로 이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의 준법정신을 또한 역설하는 것입니다[롬 13:1-7]. 공중도덕에 솔선하여 행하고 모든 선을 행함에 앞장서게 됩니다. 아무리 세상 권력이 부패 무능하고 악랄하더라도 그런 정치 세력의 번복을 꾀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사가 아닙니다. 로마 압제 아래에서 초대교회 유대인들은 그 로마인들의 구축을 위한 운동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을 공경하라 했고 그런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정치 권력에 빌붙으라는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핍박을 당하면 순순히 그 곳을 떠나 타지(他地)에 가서 전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니[마 10:23/마 10:23] 우리가 이 세상 있는 것이 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사람 구원하는 데에 있고, 세상 자체가 이 복음 전도가 끝나면 언제라도 끝나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받을 때 성실한 시민생활을 했다고 그런 정치 권력자에게 탄원서를 내는 따위의 일은[옛날 왈도 파 사람들이 그러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로서 절대로 체통이 서지도 않거니와 필요하지도 않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 받게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그 뜻을 따를 따름이지 굳이 살려고 또는 현상 유지를 위해 어떻게 해보려 하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은 일로서 끝까지 고난 받는 것으로 일관하여 사람 구원하는 일에만 집중할 일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게 되면 주님의 명령하신 대로 그 곳을 떠나가 타지에 가서 전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고로 정처없이 떠도는 말 그대로의 나그네입니다.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리라는 믿음 가운데서 행할 일입니다[빌 4:19]. 믿는 사람이 고난 받는 것을 보고 그것이 전도에 걸림 돌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옳은 지식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께로부터 배우지 않은 터이므로 구원 받기 전에 먼저 이 세상의 죽음의 실상부터 배워야 합니다[요 6:45].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지배자라고 해서 세상 권력이 그에게서 난다는 그 뜻은 아닌 것입니다. 모든 권력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롬 13:1].

권력 자체와 그 권력의 행사는 별개입니다. 그리고 그런 권력의 권위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압제자가 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사하는 폭력 역시 별개입니다. 비록 국법(國法)이라는 허울을 쓰고 복음 전파를 금지한다 해도 그런 것은 준법 차원에서가 아니라 폭력이라는 개념으로 다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행 4:19].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우리로 죄 짓게 만드는 이유는, 하나님 친히 우리를 형벌하시도록 하는 것이지 그 스스로 우리에게 한 손가락도 댈 수 없습니다.

욥에게 손댈 수 있게 된 것도 오직 하나님의 허락 아래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권력자가 우리를 죽이든 살리든[12:2]]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런 권력자들을 조종하든 않든 모든 것은 하나님 허락 아래 되어지는 일들입니다[요일 5:18]. 모세의 인도를 따라 광야 교회가 광야 가운데로 통행할 때 발락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자 하여 발람을 시켜 이스라엘을 먼저 저주하게 했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시고 지키시는 한 난공불락이었습니다.

이 때 “미친 마음”[전 9:3]을 품은 선지자[벧후 2:16] 발람은 발락에게 결정적인 계교를 일러 주었으니, 즉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 짓도록 다시 말해 이방인의 여인들과 음행하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던 것입니다[계 2:14]. 그 결과 발락이 손을 들어 이스라엘을 치지 않았어도 하나님 친히 이스라엘 사람 2만 3,4천이 축나게 하신 것입니다[고전 10:8/민 25:9].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스스로 아담을 죽이지 않았어도 아담 스스로 그런 자멸의 길을 택하도록 충동 질을 한 것으로써 충분했던 것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온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to do the truth] 아니 함이라"(요일 1:6) 했는데 이 경우 "진리를 행한다"는 말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온다"[요 3:20,21]고 했을 때의 "진리를 따른다"[to do the truth/to live by the truth /to do what is true/to live the truth/actions are true]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한다"는 것은, 양심대로 행하지 않아 숨기는 것이 있어 드러내놓고 할 수는 없는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중심이 아니고 이웃을 위함이라면 오히려 드러내어 자랑할 만하고 떳떳할 뿐이지 숨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당연히 진리를 행해야 하지만[요일 1:6], 진리를 알지 못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았어도 진리를 행할[따를] 수 있느냐 하고 문제를 제기할 만한데 요한은 분명 그렇다고 말하는 것입니다[요 3:21]. 이렇게 진리를 행하는 이가 그리스도께 나아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따르는" 것이 무엇이냐 할 때, 하나님 정하신 순리를 따르고 벋대어 역행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작용이 그런 순리의 하나입니다. 바울의 설명과 같이 인간의 마음[본성-롬 2:14,15]에 심어진 것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알려 주는 기계 장치입니다. 기계적으로 울리는 신호음이고 경종이므로 이 양심의 소리를 사람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으나 단지 가책에 시달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가책마저 무시하면 그것도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와 그 이후로는 그 어느 누구든지 완전히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을 지으셨건만 하나님의 이 뜻을 무시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만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눈 어둡게 하는 탓에 그럭저럭 지냈다고는 하나 사실은 절대로 무사하게 넘어갈 리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이유를 가리켜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요 3:19] 하였으므로 그 믿지 않음으로써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18]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 왜냐면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여 믿지 않는 수도 간혹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믿기를 거부할 때 그 경우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뜻이니 이런 사람들에게는 더 다시 구원의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의 사정은 우리가 겉모양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고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판정을 내리기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니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믿지 아니하는 이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 4:3,4] 작용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눅 5:32].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은 있을 수 없고, 성경은 회개해야만 죄 용서가 된다고 분명히 했습니다[행 2:38]. 죄인[만]을 부르신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롬 3:10,11].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죄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선을 행하는 의인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만 준비하신 것이요 성령을 주심은[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셔야 구원이 되기에]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만 주시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고전 2:9/약 2:5/1:12/행 5:32/히 5:8]. 먼저 각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고 순종하기로 작정하는 가운데에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하나님께 순종의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은 새 언약인데 이를 상징하여 그림자로 나타냈던 첫 언약도 반드시 이스라엘 회중의 순종의 서약을 받아냄으로써[출 24:7] 가능했던 바로 그대로입니다. 순종하겠다고 약속하는 터에 하나님께서 이를 거절하실 근거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고전 13:7]. 순종의 약속을 하고 과거의 모든 죄 청산을 했으므로 현재 순종의 사람으로서의 모든 요건을 구비했으니 이런 경우를 의인이라 하지 의인이 아니라고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의롭다 하시는[justification] 것이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의인이 되어 있는 이들은 내처 그 약속대로 순종을 잘 해 나가므로 말 그대로 의인으로서 하자가 없으니 절대로 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의인으로서 일관해서 지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단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심중(心中)을 아시므로 누가 진정으로 회개하는지 또는 순종의 약속을 하는지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사람은 모르지만 다 아십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고도 말로만 회개했다고 스스로 믿는 이는 아무리 세례 받고 자기는 성령 받아 구원된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어도 그런 이에게 하나님의 죄 용서가 임할 수가 없음은 자명합니다. 오늘날 이렇게 자기를 속이는 이들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진정으로 회개하여 한동안은 순종을 잘 해 나가다가도 성경의 경고대로 따르지 않고 그 마음이 변하여 불복종의 길로 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경고대로 하면 절대 다수를 차지하여 이스라엘의 60만 장정 중에 겨우 갈렙과 여호수아뿐이었던 그 상징성과 같으므로] 처음부터 미리 경고하시기를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적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그 숱한 경고가 넘쳐 납니다. 부디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경고로서 성경은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선수처럼 일관되게 이 세상에 있을 때 달려나가라고 하면서 바울 자신 역시 그렇게 푯대를 향하여 달려나감으로써 "내가 이루었다 하지도 않고 이미 얻었다 하지도 않고 오직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빌 3:12,13] 한 것입니다. 여기서 "상"[:14] "얻는다"[고전 9:24]고 했는데 그 상[reward, prize]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다"[to gain-빌 3:8] 했으니 곧 그리스도께서 그 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발견하는"[:9] 것이 여기서 말하는 "상"입니다.

"이상하다, 내 안에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계시고 있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계시는 것'이 나의 구원인데 마치 지금까지 구원을 통 모르는 사람처럼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내용을 알고 보면 참으로 지당한 말이 됩니다. 이 바로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의 '양면성'이고 '동시성'입니다. 영역 "to gain"으로 표현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다"는 것은 '노력해서 얻는 것 즉 획득하고 쟁취하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려 하는 것 역시 같은 뜻입니다.

은혜로 선물로서 거저 얻는 구원과는 내용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이는 다름아닌 같은 편지에서 경고하고 있는 바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과 똑같은 맥락에서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루라"는 것 역시 말 그대로 노력해서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영역으로, "to work out"]. 구원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닌 선물로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 창조로서 다시 출생하게 되는 '피동성'과, 일단 산 자로서 새로 창조되고 다시 났으면[성령으로] 그렇게 산 자답게 스스로 행동하여 살아가는 것은 적적으로 내게 태인 몫이요 역할이기에 '능동성'입니다. 이것이 양면성이고 동시성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 주었다고 전부가 아니고, 살되 거룩한 천사들처럼 올바르게 살아야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처럼 올바르지 못하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본을 따라 아담도 행동하여 마침내 죽음에 이른 것은 우리에게 충분히 경종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내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물론 우리 구원의 모양새요 특성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인격 대 인격 간의 사랑의 의지로써 유지되는 것으로서 결단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런 능동성과 적극성으로서 상호 움직여야 이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는 데에 핵심이 있습니다. 내 스스로 그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것이므로 이 하나됨을 내 스스로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유지 보전하려 하는 것이 바로 다름아닌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해 살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살아야 합니다. 둘이 사랑하는데 일방적인 짝 사랑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님과 같은 이치입니다. 서로가 동시에 움직여 사랑하는 데에서 그 사랑으로 하나됨이 보전됩니다. 그래서 자유 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주셨습니다. 사랑이 바로 생명[삶]의 핵심이고 사랑은 자유[의지]가 바로 그 뼈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것은 나와 더불어 둘이 하나를 이루어 계시는 그리스도를 계속 "붙어"[요 15:4/행 11:23] 있어 나와의 하나 관계를 이루도록 나로서의 할 책무를 다하는 것을 가리킴은 당연합니다. 그 방법 혹은 책무가 다름아닌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 나라는 관계를 내 스스로 유지하려는 내 편으로서의 사랑의 노력이요 삶의 당연한 행동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 발견되도록"[빌 3:9] 힘쓴다는 뜻입니다.

고로 성경은 결단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혀 엉뚱하게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하여 "믿는" 이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거듭 강조하거니와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가르치심을 사모하며 기도하는 마음 자세로 성경을 부지런히 읽음으로써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하여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어린 아이 같이"[마 18:3] 받아들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모든 뜻과 말씀에 절대 순종하기로 작정하여 그렇게 겸손하게 살기로 작정하고 나가면 그것으로써 구원이 되기에 아무 하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면 성령의 세례를 당연히 받게 되어 있습니다[행 10:47].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됩니다[고전 8:3]. 지식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오늘날 저희가 저희들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줌과 같이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는 대목이 있다고 하여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①"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어"[요일 5:16,17] 이 죄는 절대로 용서가 안되니[히 10:26], 그러므로 언제나 죄 짓고 용서 받고 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의 죄 용서를 구함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요일 :18] 것이지마는 그래도 혹 형제로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16] 한 것과 같은 경우에 한합니다. 또한 주님 가르치신 기도로 우리가 배우는 사실은, 우리의 모든 기도는 나를 중심하는 사적(私的)인 기도가 아니라, '우리' 중심의 공동체 의식에 기반한 공적(公的) 기도의 성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에는 별별 사람들의 별별 경우가 다 있을 것이므로 그렇게 죄를 짓는 형편에 있을지도 모르는 형제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미 성경은 죄를 짓지 말라 하고 죄를 지을 수 없다["He cannot sin."]고 선언해 두고 있는 까닭입니다[요일 3:9].

찬양

삶의 낙에는 반드시 노래가 있습니다. 이전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나 자신이 흥겨워 노래도 부르고 흥얼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관계에서 내 생명은 다시는 자 자신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육체의 생명은 영혼인 것입니다. 새 창조에서 그리스도께서 영혼이시고 나는 그 육체 격입니다. 영혼이 떠나면 육체는 아무리 건강해도 즉시 시체가 됩니다. 또 육체가 병들어 죽어도 영혼은 최소한 산 자의 세계에서는 무용지물, 무의미 그 자체입니다.

나 자신은 육체이고 주님은 나의 영혼의 위치이시니 따라서 이렇게 둘이 하나 되어 있는 구조에서는 당연히 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님으로서[골 3:3,4] 나는 주님을 노래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의 정상적인 삶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니 머리는 몸을 대표하고 몸의 각 지체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런 의미로 주님은 충분히 나의 상대가 되어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나 자신까지도 당연히 상징하시고 대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삶의 낙, 즐거움, 행복을 표현하는 것으로써 노래 즉 주님을 찬양함이 반드시 따르게 마련입니다. 내 자신을 위해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피차의 영광을 구하여 노래하는 것도 아니고[요 5:43,44]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도리 그대로입니다. 그러면 머리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역시 노래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노래하시며] 기뻐하실 것”[습 3:17]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또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실 것이라”[사 62:5]는 말씀도 있습니다. 잠잠히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 가장 적합한 광경으로 말하면 젊은 엄마가 그 아기를 품에 안고 사랑에 겨워 미소 지은 얼굴로 내려다보며 자장가를 부르는 그런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노래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언어(言語) 자체가 모두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이상 모든 설명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신 바가 된 하나님의 영원한 복음의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것입니다. 간략히 몇 마디로 요약해서 나타낼 수 있는 내용임에도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반복 학습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기타 우리가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할 것은 너무나 많으나 이런 것은 우리 각자 자기의 믿음 생활 중에서 자연스럽게 보완되고 보충될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기 부인을 자기 부정으로 오해하지 말 일입니다. 무턱대고 자기를 무시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서 자기가 위해지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자기중심 일변도이므로 그런 자기중심의 자기를 미워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생명의 법칙에서 그 핵심이 되는 자기 부인은 이 세상에서만은 마치 죽음의 어리석음으로 비쳐지므로 자기를 부인함을 자기의 십자가 형틀인 십자가를 지고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음을 명시하신 것입니다. 즉 세상이 이 죽음의 세계를 사는 것과 같이 착각하니까 자기중심으로 나가지 않는 것은 모두 죽음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내 남편으로서 남녀가 한 몸이 되는 이치도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되는 이치를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남자는 절대로 자기 육체를 자기 것이 아니고 여자[아내]의 것으로서 철저히 지켜 나가면서도 동시에 "자기를 사랑하는" 지혜로운 방법인 것입니다.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함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한다"[:29]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도 그래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를 알고 보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빌 3:7]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害)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길"[빌 3:8,9] 리가 없습니다. 단순히 영생을 얻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 자체가 너무나 좋으므로 그래서 스스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고 " 나 자신이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9]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랑함으로써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오직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머리로 하여 모든 피조물이 그 몸의 각 지체가 되어 있어 하나님 중심으로 나가는 생명의 체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고후 5:15]는 말도 맞고 "나 자신을 사랑한다"[엡 5:28]는 말도 맞습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되 내가 직접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이웃이 나를 사랑하게 만듦으로써 그들이 나를 사랑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 나 혼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모두 남김 없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드는 지혜입니다. 그렇게 만드는 지혜로운 방법이 다름아닌 내가 나 자신을 부인하여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게 가장 가치 있는 방법을 따라 나를 사랑하게 만들되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는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확고한 신념과 각오로 임해야 합니다.

"세월을 아낄 것이니 때가 악함이라"[엡 5:16-"Redeem the time, for the days are evil."]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시간이 금(金)입니다.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뺏으려고 그야말로 결사적입니다. 그래야 자기 목적[사람들을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는]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빼앗을 수 있는 여러 가지를 만들어 놓고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입니다. 불신자들은 그런 데에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새 죽음이 득달같이 내달아 영영 생명으로 들어갈 기회는 끊기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그런 데에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마침내 열매 없는 자로서 남게 됩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오직 찍혀 버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눅 13:6-9]. 이런 경고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시의적절하게 들을 수 있으니 항상 성경을 손 가까이 해서 읽기를 노력하되 성령의 가르치심을 간절하게 사모하며 읽을 일입니다. 절대로 시간을 낭비하고 허송세월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나의 시간은 없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입니다. 이런 인식이 생명력 곧 살아가는 힘입니다. 모두 그리스도의 것이지 내 것은 없으니 마치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시간을 허비하여 아무렇게나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데로 피동적으로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드는 어리석음은 곧장 죽음[멸망]으로 통할 수 있으니 극력 조심해야 합니다[고전 10:12눅 21:34].

사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은 그 사는 법을 말합니다. 목숨이 있다고 살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짐승[자연계에 속한]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짐승도 그 사는 법이 있습니다. 단지 우리 인간과의 차이는 기계적으로 그렇게 법 따라 사는 것인데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처음부터 보장 받은 영적 존재[영계에 속한]이므로 우리 스스로 그 사는 법을 따라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고로 법을 따라 살 수도 있는 반면 그렇게 아니 살 수도 있습니다.

전자에 속한 것이 거룩한 천사들이고 후자에 속한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입니다. 전자에 속한 것을 거룩하다 하고 후자에 속한 것은 범죄라 합니다. 죄, 악, 불법, 불의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후자에 속하여 결코 살 수 없는 살아서는 안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오늘날까지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것은 오직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니 시험하는 자로서 시험하기 위함이요 이 역할은 구원 얻을 사람 다 구원 얻기까지의 시한부입니다.

마지막 단 한 사람이라도 [여기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미리 택하심의 의미가 있음] 구원되는 즉시 세상은 끝나고 따라서 악령들의 활동도 끝나는 것이니 다시 말해 악인들의 모든 활동 곧 죄인들의 이른바 "삶"도 끝나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사는 것"이라 한 것은 실제는 그것이 삶일 수가 없기 때문이니 이유는 위에서 밝힌 그대로입니다. "악인", "죄인"이란 말이 나타내듯이 사는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악령들처럼 시한부 활동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면 그 사는 법을 따라 일정 기간 사는 시기가 있습니다. 이는 천국에서의 삶이 아니고 이 땅에서의 잠시[계시록에서 "천년"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상을 다스리는 그런 통치 기간입니다. 이 기간이 왜 필요한가 하면 아담이 애초 범죄하지 않았다면 나타냈을 바로 그 세상의 모습이므로 이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요 순서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마지막 아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아담 역할을 끝까지 하시는 의미가 됩니다.

즉 아담이 그 자신 범죄하지 않았다면 모든 의[올바름, 정의]와 선[좋은 것]으로 세상을 통치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처한 이 세상은 비정상이고 때문에 죽음의 세계임이 이로써도 입증됩니다. 다시 말해 정상의 상태도 아니고 생명의 세계도 아닌 것입니다. 정상 세계라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지배할 리가 없습니다. 아담이 처음 범죄한 것부터가 정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정상에서 벗어난 인간들이 이룬 세상이니 정상일 수가 없습니다.

정상 상태의 세계에서도 역시 범죄자는 생깁니다. 왜냐면 에덴낙원에서의 영물들 가운데 악령들이 생기고 그 나머지는 거룩한 천사들인 것과 같습니다. 범죄자가 생겨도 에덴낙원 자체는 비정상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 중에는 그 세계 자체가 비정상이 아니라 완전한 정상 상태이지만 범죄자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이나 부추김이나 선동이 없어도 그 스스로 범죄하는 경우입니다.

그 세계가 정상(正常)이므로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그 때는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맹수들도 육식을 않고 초식 동물이 됩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으며 놀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에덴낙원은 아니지만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만물과 영물들과 자기 허리에서 나온 인생들을 다스리기로 되어 있었던[그러나 범죄하여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이제 수행하시는 것] 그런 양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다스렸을 그런 세계라도 영물들 중에 악령들이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인생들 중에 악인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천년 기간에는 통치자가 의(義)와 선(善)으로써 통치하므로 그것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잠재해 있을 뿐인데, 그동안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 그 세상으로 나오지 못했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풀려 나와 그 때에 세상에서 다시 활동하게 됩니다[계 20:7].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활동하게 되니 그동안 내재해 있던 악인들의 악한 행위가 이제는 거침없이 밖으로 드러나지게 되고 악인의 숫자가 바닷가의 모래와 같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앞의 지적대로 에데낙원에서 영물 가운데 악령들이 생긴 것처럼,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심으로써 의가 통치하는 세계이지만 악인들은 여전히 생겨지게 마련입니다. 물론 그 때의 세계에서는 현재의 "네피림"과 같은 존재는 없습니다. 순수한 인간 곧 아담의 후손들이지만 그와 같이 악행을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 해도 그 후손들이 일부 그렇게 범죄했을 것이요 이들을 아담이 심판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영물들도 아담을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아담의 심판 대상이 됨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아담 자신부터가 범죄했으므로 일은 완전히 망가져 그리스도 곧 마지막 아담께서 출현하시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시어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公義)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행 17:30,31]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심판하게 되어 있었던 원래의 아담의 위치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구현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시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人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요 5:26,27] 하심과 같습니다. 물론 아담이 에덴낙원에 살면서 다스렸을 경우 신령한 몸으로 있었을 터이므로 지금의 우리와 같지는 않을 터이지만 삶의 본질은 같으므로, 사는 법대로 살지 않는 경우 영물들이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로 분류된 것처럼 인간들도 반드시 그와 같이 분류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이렇게 분류된 다음에 아담처럼 그리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처럼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아담이나 악령들처럼 신령한 몸으로 살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나[그 때 에덴낙원에서 아담의 소생들로서 인생들이 죽음에 이를 때에는 영물들처럼 신령한 몸 그대로 형벌의 장소에 들어가는 것], 우리처럼 이 자연계에 속한 세계에서 분류된 후 최종적으로 신령한 몸을 입게 되거나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불 못으로 들어가게 되는 경우도 반드시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하셨습니다[요 5:29].

즉 악인들도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들어가는 것이니, 때문에 거기는 불도 꺼지지 않고 벌레[구더기]도 죽지 않는다 하셨습니다[막 9:48]. 고로 이 세상은 사는 곳도 아니고 생명의 낙을 즐기는 곳도 아니니 절대로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죄인[악인]과 죽음의 세계 및 의인과 생명의 세계로 영원히 분리되기 위해 의인과 악인의 분류 작업이 진행되는 곳이 세상입니다. 분류를 하자니 부득불 악인은 이 세상에서 형통하게 되고 의인은 고난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그 교회를 적대시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배후가 되어 있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 자체가 세상 앞에서는 가증스럽게 보여 핍박을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도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런 모진 고난을 받을 리가 없습니다. 핍박을 한다고 해서 사람 건지는 일을 아니한다면 우리를 보내신 목적 다시 말해 우리를 구원하신 뜻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용맹을 내는 것이니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인들이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엄금하는 세상 권력자들 앞에서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 하였으니 이것이 그리스도의 증인(證人)으로서의 역할인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행 1:8]이라 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사지(死地)에 뛰어들어 복음을 전하는 이들과 우리가 한 몸이 되어 있은즉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 한 것입니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힐 것이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칠 것이다...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일 것이다"[암 6:4-8] 하심과 같습니다.

산다는 것은 그저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칙대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당당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 삶의 이치를 사랑하여 그 법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대개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공(李公) 순신(舜臣)의 사례에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릇 산다고 할 때에는 자기 부인으로 살아야 함이니, 이는 한 몸 체제로 사는 것을 말함이고 하나님께서 머리가 되어 계심을 뜻함이므로 반드시 머리의 지시를 따라 사는 것인즉,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계명[사람 사는 법질서]에 순종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해당됩니다.

회개하는 것은 이렇게 복종할 것을 약속하고 곧장 그 약속 이행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것이니 왜냐면 이 둘은 하나로서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까닭인즉 머리도 몸을 가리켜 "나 자신"이라 하게 되고 몸도 머리를 가리켜 "나 자신"이라 하게 되는 그런 구조입니다. '남'이 아니라 바로 '나'이입니다. 머리이신 하나님의 위치에서 보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난 피조물이기 때문이고, 몸의 위치에서 보면 '나'이든 '남'이든 다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가리켜 "나 자신"이라 함은 당연합니다.

이 머리와 몸의 관계는,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를 믿어 머리로 모시고 각자 자기의 지체(肢體)된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그냥 하나님의 피조물 인간이면 다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니, 죄인이나 악인이 악을 행하는 것은 그 스스로 이 한 몸의 조직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머리와 몸으로서 한 몸을 이루었다는 것은, 서로가 자기 삶을 상대와 맞바꾸어 사는 삶을 가리킴이니 이 곧 사는 원리요 삶의 질서입니다. 즉 각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니 자기 부인입니다.

의인과 죄인은 이 자기 부인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눅 9:23]이라는 말도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경향이 실제로 나타나 범죄가 드러남으로 인해 생긴 대칭[대립] 용어입니다. "거룩함"이라는 말도 죄가 생김으로 인하여 그와 대칭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거룩함이 있는 것은 아니니 왜냐면 처음 창조될 때는 모두가 거룩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굳이 그렇게 별도로 표현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새 창조에서도 해당되는 의미이니, 왜냐면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출생하게 되면[요 3:3,6] 거룩한 바탕으로 나오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처음부터 거룩한 자로서 새로 창조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있는데도 거룩하다 하지 않고 의롭다 하지 않습니다. 죄는 죄이고 의는 의이니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혼잡스럽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인데도 의인이라 하게 되면 이는 일종의 거짓말이 됩니다.

성경에 우리가 거룩함에 이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롬 6:22/벧전 1:16]. 이는 거룩하지 않으니 거룩하라는 뜻이 아니라 거룩함을 그대로 계속 유지하라는 것이고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자유 의지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이를 포기하면 다시 우리는 거룩하지 않은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라"[빌 2:12]는 경고와도 같은 내용입니다.

우리가 다시 출생할[요 3:3] 때부터 거룩하다는 것은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친히 거룩함이 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聖靈) 곧 거룩하신 영 즉 하나님의 영께서는 거룩한 곳에 계시지 죄 있는 더러운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거룩한 곳이라는 말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바탕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 둘이 하나되어 있는 바탕을 이루고 있는 그런 자리라는 뜻입니다. 왜냐면 성령께서는 절대로 당신 자신을 위하시는 일이 추호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편이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야 서로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게 되면 서로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울리지 않아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곳에 계실 리가 만무합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아름답고 아담하지 않고 추하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죄 있는 더러운 데에 임하시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하시기 전에 반드시 먼저 우리는 앞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고후 5:15]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이요 그래서 죄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죄 용서는 반드시 우리가 회개하는 경우에 한합니다. 즉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골 1:17]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오직 살겠다는[고후 5:15/롬 14:7-9] 결의 표명이 있어야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이 됩니다] 세례 받음으로 죄 용서가 되는 법입니다[행 2:38].

이런 결연한 의지 없이 아무리 세례 받아보아야 성령께서 임하실 리 없고 아무리 나는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하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오실 리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하고 구원 받았다 하나 그리스도 없이 어떤 구원이든 불가능합니다. 성령 세례가 따로 있고 성령 받음이 따로 있고 그리스도를 영접해 모심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의미입니다. "성령 충만"[엡 5:18]은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하는"[약 4:8] 데에서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가까이하느냐 하면, 적극적으로 항상 하나님께 여쭙고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고 기도에 깨어 있기를 악착 같이 하라고 경고합니다-살전 5:17/엡 6:18] 무엇이든 하는 등 그리스도와 함께 의식적으로 동거(同居), 동역(同役)할 때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앞에 "마귀를 대적하면 피한다"[약 4:7]고 했는데 어떻게 그를 격퇴시키느냐 하면 주님께서 그 예를 보이셨습니다. 즉 베드로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영향을 받아 자기중심으로 유인하는 책망 비슷한 말을 [주님께서 어떻게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시느냐, 그런 약한 생각을 품으시면 안된다는 식으로] 했을 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아, 내 뒤로 물러가라"[막 8:33] 하신 것입니다.

즉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34] 하시고, 군중들과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할 것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35-38] 하신 것입니다.

왜 부끄러워하게 되어 있느냐 하면 교회가 시작하자마자 핍박의 표적이 되었던 것처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시종일관해서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가짜 또는 사이비[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간판만 내다 건 세상 종교 집단]를 핍박할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핍박이 없다는 것은 가짜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모조품이 세상에서 대부분 차지하고 있음을 역으로 증명한다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모습은 없습니다. 이제 나의 모습은 오직 그리스도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의 모습이십니다. 나의 모습이 되어 계십니다. 과거 나의 모습은 죄와 죽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자기 모습을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공동의 머리로 모시고 있는 문자 그대로의 한 몸으로 살게 됩니다. 한 몸이라 함은 말 그대로 거대한 나 자신입니다. 우리 각자는 그 몸의 지체인데 저마다 말하기를 "이는 나의 거대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진정한 평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입니다.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고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해야만 하는 것도 없고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일도 없습니다.

바로 그래서 불의를 좋아하면[이런 사람은 빛을 미워하고 어두움을 더 사랑합니다-요 3:19,20] 불의를 좋아하는 대로 모이고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면 또 그런 사람대로 모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십니다[히 1:9]. 생명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요 5:26]. 그러면 끼리끼리 모이게 되니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그리스도처럼 죽기까지 사랑하고 미워함으로써] 쪽에 생명이 있고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쪽에는 생명이 없으므로 생명과 반대되는 것만이 자연히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름하여 불 못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습의 그리스도께서 심판 자리에 앉아 계시는 것을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세상의 모든 믿지 않는 인생들을 향하여] 눈물 흘리시며 우시는 바로 그 모습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빌 3:20]이심과 동시에 심판하시는 재판장[행 17:31/요 5:27]이신 의미입니다. 항상 양면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심과 동시에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십니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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