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41)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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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 고난의 막중한 의미

이렇듯이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고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들처럼 이 한 세상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인 그런 존재가 아닌 이상 그리고 영원한 행복과 불행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라면 어떤 역경에서도 자기 신념과 소신을 굽히지 않는 그런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 영적인 존재로서의 지극히 인간다움인데, 그러자면 그 배경이 역경으로서 비쳐질 만한 상황이 필수적인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로서의 여건을 현재 이 세상이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를 위해 어떤 대가도 지불하고 어떤 고난의 역경도 불사하는 그런 지조(志操)를 나타내는지의 여부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바로 그런 연출을 충분히 진행시킬 수 있도록 하는 무대로서의 몫을 이 세상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사람됨, 이는 분명 그냥 단순하게 일반 자연계 생물들처럼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에 얼마만큼 충실하느냐 즉 의를 사랑하느냐, 비록 죽음에 이르는 고난에 임할지라도 거기에 흔들림 없이 소신대로 밀고 나가는지의 여부가 가름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이 세상에서의 의미가 심히 중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서 하나님과 동고동락함이요 우리의 실상["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을 스스로 증명함이다. 필요불가결한, 마땅히 있어야 하는 사항이요 절대로 없어서는 안될 그런 것이다. 히브리서에 "아들이시라도 그 받으신 고난으로 온전하게 되셨다" 하지 않았는가. 그 온전하게 되는 무대가 바로 이 고난 받는 세상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지극히 불확실한 것일 뿐 아니라 신령한 몸이 아닌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 제대로의 삶을 누리지도 못하는 것이니 바다에서는 물고기보다 못하고 하늘에서는 새들보다도 못하니 어찌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삶이라 하리요. 인간[원천적으로 자연계에 속한 생물이 아닌]으로서는 이런 죽음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 생명은 무슨 생명이고 삶은 무슨 삶이더란 말인가. 고로 이런 자리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인간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입증하고 그 마음의 굳음과 올곧음을 증명하여 나타내는 자리인 것이다.

나와 항상 그리고 영원히 함께 하셔서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이신 것처럼 하나가 되어주신 주님과 매일 매시 매순간 '하나'로서 사귀면서 동행 동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엄연한 살아 있는 예술 작품이다. 아름다움의 창조다. 더군다나 이웃 사람들을 살려 구원해낸다는 숭고하고 거룩하고 값지고 보람찬 일에 오직 종사하는 기간이니 인생이여, 이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또 있으랴.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하셨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두움의 세상에서 진정 사람 사는 법을 가르치고 그 방향을 가리키고 무미건조한 이 인생살이에 그 정확하고 영원한 의미를 풍성하게 부어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임무인 것이다. 시편에 탄식하기를,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하다"[man, though in honor, does not remain; he is like the beasts that perish - 시 49:12] 했다. 어떤 번역본은 다음에 오는 20절과 문형[文形]이 같다 하여 그 구절처럼 이 "장구치 못한다" 혹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로 읽으나 분명히 그 앞의 11절과 이 49편의 내용이 인생의 죽음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로 영존(永存)함으로써 썩음을 보지 않게는 못한다"[9절]는 것이 그 골자다. 그러므로 20절은 이런 인생의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는 어법(語法)을 쓰고 있다. 지금 이 시편 기술자(記述者)는 인간의 죽음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한탄하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부터 지으시고 모든 것이 "좋다" 하실 리가 없다.

인간 스스로가 자기 처지를 "좋지 않다"고 할 때에는 하나님께 좋지 않은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어찌하여 인간이 처음부터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고 성경을 곡해하고 에덴낙원이 영적인 세계이고 거기에 거처한 아담이 신령한 육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지를 않는 것인가. 자연계의 몸으로 그런 신령한 세계에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몸은 이 자연계가 그 거처이다.

신령한 몸이라야 신령한 세계에 거처할 수 있고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 영원한 것이라면 그 영혼을 담고 있는 즉 그 집인 몸 역시 영원해야 당연하다. 영혼은 영원한데 영원하지 못한 몸을 처음부터 만드시겠는가. 그런 식으로 조물주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니 매양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성경을 항상 그런 식으로 곡해하는 것으로 일관하게 된다. 영원한 영혼을 만드시고 몸은 나중에 영원한 것으로 만드실 의향이셨다면 그러면 아담의 범죄가 필요악이었다는 결론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실 수 없다는 사실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매양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니 다시 말해 문자 그대로 어린아이처럼 믿으려고 하지를 않으니 제대로 진리에 이를 수가 없다. 성경이 제대로 읽혀지지를 않으니 변명하기를 "성경이 어렵다" 한다. 예언의 말씀을 제외하고는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게 씌어져 있는 책이 성경이다. 모든 인간이 읽어 이해하도록 쉽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언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말씀하심이니 알 턱이 없다.

인간 자신이 벌어놓은 것이 죽음이기에 구원이 은혜가 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만드신 대로의 죽음이라면 영생하는 것 즉 인간 구원이 은혜일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담에게 경고하신 "죽음"이라고 엉뚱하게 해석하는 것은 영적인 관계만 조절되면 얼마든지 인간이 구원될 수 있다 하여 세상 종교의 허무 맹랑한 교리를 합리화시켜 주는 실마리가 된다.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는 영원하지 못하니 영생은 불가능하다는 이 과학적인 결론을 무시하는 인간의 망상만이 판치는 미신이 된다.

범죄한 인간이 죽음밖에 도리가 없는 것을 친히 그 죄의 저주를 자신에게 돌리심으로써 우리와 함께 죽으심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시니 그래서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은혜라 하는 것이다. 이같이 그 모든 죽음의 절차, 부활의 절차 등을 다 이루신 후 내 안에 그 영원하신 성령으로 계시니 비록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 우편에 계심이나 그 영[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 이는 그러한 몸으로 오심과 똑같은 것이니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성령으로 오시나 사람의 육체로 오심과 똑같기 때문에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나의 부활, 하늘에 앉히심이 내가 그와 같이 하늘에 앉아 있음 그대로의 현실이 되는 것이다[엡 2:6]. 하나님이시자 사람이 아니시라면, 그렇게 성령으로 오신다고 해서 그 죽으심 등이 그렇게 나의 죽음으로 연계되지 않는 법이다. 그리하여 내 안에 계시는 영원하신 성령을 따라 나의 육체 역시 영원한 것으로 변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담에게 영혼을 조성해주시지 않았으면 그 육체만으로는 신령한 몸으로 될 수 없음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아버지의 영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또한 내 안에 계심이니, 그리스도를 살리신 똑같은 식으로 우리 죽을 몸을 우리 안에 계시는 아버지의 영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롬 8:11]. 성령으로 계심은 아들과 함께 아버지 친히 계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요이 1:9]. 이와 같이 친히 담당하신 인간 죄의 저주로써 고난 받으심을 인해 얻으신 것은 그렇게 하여 새로 탄생되는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인간으로 말하면 해산의 고통[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을 통해 얻으신 아들들인 셈이 된다.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이렇게 하시니 하나님의 아들된 우리도 역시 같은 과정을 밟아 그 발자취를 따름은 당연하니, 바울이 말한 대로 택하신 이들을 위한 "해산의 수고"[갈 4:19/계 12:2]를 하는 것이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현재의 고난인 것이다.

"주님 위해 고난 받는"[빌 1:29]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난 받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머리로서 당신의 몸[교회]에 그 남은 고난을 마저 채우시는 과정에서. 우리 몸을 주님의 영이 계시는 전(殿) 곧 주님의 몸[육체]처럼 간주하셔서 이 몸을 통해 남은 고난을 채우시는 뜻이니. 이는 주님과 우리가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 나눌래야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됨을 확증함이 된다. 머리 없는 몸이 없고 몸 없는 머리가 없듯이 이렇게 나와 주님은 불가분의 하나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이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입해 들어가는 것이니 침입하여 빼앗는 자가 얻는다[the violent take it by force]"[마 11:12].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해[to press] 들어간다"[눅 16:16]. 사람마다 앞으로 밀고 압박해서 천국으로 들어간다. 사람마다 힘으로 밀어 부쳐 천국을 빼앗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옥중 질문을 받고 하신 말씀이다[마 11:7]. 세례요한이 받은 고난을 필두로 해서 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같이 고난을 통해 천국에 들어감을 나타내시는 말씀이다.

§  은혜의 양면성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했다. 그를 믿는 것은 우리가 받는 것이요 그를 위해 고난 받음은 우리가 드리는 것이니 곧 주님을 섬김이다. 구원을 단지 일변도로 받는 것으로만 착각하는 이가 많은데 똑바로 말하면 '주고 받음'이다. '받았으니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은 사랑이요 사랑은 주고 받음이니 주는 것 일변도일 수 없고 받는 것 일변도일 수 없다.

즉 주님께서 우리 위하여 이루신 일을 믿는 것이요, 이렇게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음이다. "주님을 위해서"니까 이것은 주님께 드림이요 주님을 섬김이요 주님의 일을 함이다.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은 당연하다. 감사로써 그 은혜에 보답함이야 마땅하다. 그 은혜를 과연 온통 그대로 다 갚느냐가 문제 아니라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은혜를 베푸는 것은 사랑이니 사랑을 치수로 잴 것인가, 그 무게를 달겠는가. 사랑에 무슨 적정량이 있겠는가. 사랑은 그 중심이 마음에 있으니 마음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마음도 영원하고 사랑도 영원하다. 한 때 일어났다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사랑을 받았으니 나도 사랑을 주는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시니 나도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 고난 받음이니 주님을 섬김이요 때문에 그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 하였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한 것이다.

주님의 남으신 고난을 주님 친히 마저 채우실 수 있는 몸을 내가 제공해드림이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우리 위하여 당하시는 고난을 그 아드님께서 우리 인간과 같은 몸을 제공해드림으로써[인간이 되심으로써]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 즉 아버지를 섬김이 이루어짐과 같다. 따라서 똑같이 즉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함께 우리 위하여 받으신 고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관한 그 예언[이사야서 53장]에서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상[傷]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한 것이다.

얼핏 들으면 아버지는 편안하게 계시면서 아들만이 고난 받으시게 된 것을 기뻐하신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그러나 건전한 상식적 안목에서 성경을 읽는 이라면 아버지와 함께 아들이, 아들과 함께 아버지께서도 고난 받으신 것임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식을 괴롭게 하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만부득이해서 그 자식을 고난받게 하는 경우 그 자식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 부모의 마음이 있으랴.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경우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항상 하나로 사랑 가운데 존재하시기 때문에 아들의 고난에 아버지께서는 문자 그대로 동참하신 것이다. 우리의 몸을 통해 주님께서 그 남으신 고난을 마저 채우시는 의미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주님과 나는 똑같은 고난을 받고 있음이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몸과 머리의 관계이므로 몸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는 머리 없고 머리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는 몸도 없다.

다 한 몸으로서 하나로 통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 하나로 통해져 있기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고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고 하나님[아버지]의 그 하늘 옥좌 우편에 계심도 내가 그와 같은 위치에 있음을 말함이 아닌가. 주님께서 그 고난 받으심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 그 몸된 교회에 그 일부를 전가하신 것이 아니라, 이러한 한 몸의 하나됨을 현실화하고 구체화하시는 목적으로 일부러 그렇게 남기신 것이다.

우리의 고난이 그와 같은 막중한 은혜의 배려이다. 이같이 우리가 주님과 하나라는 사실이 구체화하고 현실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첫째는 우리가 성령 받음이요 그 다음에 오는 것이 고난 받음이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사형수로서 형장으로 걸어가는 자세가 되어] 이 세상에서 세상을 과거처럼 사랑하기커녕 도리어 자기 목숨[생명]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사탄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감추어 왔다. 그러나 진실이 감추어질 리 없다. 성경[하나님 말씀]을 사랑하여 부지런히 읽고 실천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드러나질 수 있는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기에 감추어질 수 없는 것이다. 세상도 사랑하면서 구원받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 일이다.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생각함은 한낱 망상에 불과하다. 모든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가장 일차적으로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는 자는" 하고 주님께서 이미 분명히 선언해두신 바다.

고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님의 말씀대로 핍박받고 환란 받음은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고난 받음이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을 행함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에서 핍박 받는 것이 그러한 불가피한 요소가 되어 있으므로, 교회 형태와 운영이 세상 종교와 같은 것이 될 수 없음을 다시 강조한다. 세상 종교와 같은 것이 되어 있자면 불가불 또는 필연적으로 국가 권력을 등에 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세상 종교 치고 국가 권력을 마다하는 경우는 없다. 왜냐 하면 국가 권력을 업으면 그들의 포교 활동이 힘을 얻기 때문이고 그것처럼 또 이상적인 선교 방법도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가. 오히려 그 반대 방향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핍박받는 형태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하면 초대교회와 그 이후 300년간 지탱해간 사실들을 알면 충분하다. 즉 교회당 같은 특정 건물을 강조하지 않았고 신학교 같은 교육기관을 강조하지 않았다.

왜냐면 언제든 헐릴 건물을 지어서 무엇하며 언제든 폐쇄될 교육기관이나 시설들인데 얼마나 오래 간다고 그런 것을 운영한다고 앉아 있겠는가. 방금이라도 핍박이 날 수 있고 또 그렇게 핍박이 나면 그런 교육기관이나 시설이나 인력[강사진이나 또는 그런 제도권내에서 양성된 교역자들] 등등이 부재(不在)하는 혼란과 혼돈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처음부터 그런 것을 설정해놓겠는가. 핍박 받을 것 각오하지 않고 전도에 나설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생리(生理)를 생각할 때 응당 내리게 되어 있는 결론이다. 사탄은 복음 전파를 근원부터 막기 위해 처음부터 그런 위협을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전도 않는 교회는 사장[死藏]될 수밖에 없다. 이는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을 회피하려는 것과도 통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회피하는 교회에 풍성한 은혜가 내려질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지 않는 불복종의 자리에 축복이 내려질 수 없다.

우리는 초대교회 이후 교회가 300년을 내려오면서 별달리 불같은 선교 열정이 달아오르지 않았던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핍박을 받고 있으면서도 초대교회의 열성과 사랑은 식어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좀더 일찍부터 아시아 등지에 복음이 전파되지 아니한 사실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00년이 지나 콘스탄틴 황제 이후 "기독교 신앙"이 국가의 비호를 받는 종교로 변질되면서부터는 더욱 그런 현상이 두드러져 천년 이상이나 무기력한 상태를 드러낸다.

종교집단화한 기독교라는 이름의 거대한 세상 세력에 눌려 겨우 "왈도"파라는 이름의 미미한 복음 활동만이 연이어져 오면서 그나마 복음 활동은 명맥만 유지해온 것이다. 16세기초에 들어서서야 소위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그 후 모라비아[첵코 중부지방] 부흥운동 중에 괄목할 만한 선교 열이 불붙게 되는 정도다. 선교 열이 불타지 않는 교회, 자진해서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기를 꺼리는 교회는 결국 타락해 버린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긴 것일까.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썩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흘러가야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믿는 것과 섬기는 것, 이 양면성이 있어 평행선을 이어가야 함을 명심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고난을 주님을 섬기는 차원에서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시급하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부할 수 없는 필요악 정도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로 맞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는 것"[살후 1:5]이라는 말씀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로 알아들을 것이 아니라 <천국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즉 구원 받을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음으로써 천국의 구성원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모두 채워지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의미로 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고난에 참예하지 않으니 열매 없는 자가 되어 결국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미자격자가 되는 것이다[마 7:21].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 구원 받기 위한 밑거름이 되는 의미가 우리의 고난 받음인 것이다. 이를 다음의 핍박 받는 중국교회의 '순교자의 노래'가 잘 드러내고 있다.

§  "나를 핍박했으니 너희도"

"제자가 선생보다 크지 못하다.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다" 하셨으니 믿는 사람마다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제자가 선생보다 크지 못하다 하신 것은 선생께서 당하신 그 모습 그대로 제자들도 당한다는 말씀이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싫어 버린바 되셨으므로"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곤욕을 치르셨으므로 그 제자들 역시 필연적으로 그런 모양이 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인 것이다. 물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의미에서 내 모습이고 동시에 내가 이 세상에서 지내면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당연히 같은 모습이라는 그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의인이시고 아무 죄도 없으시다는 것을 아는 이상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일 세상이 그리스도처럼 의롭고 악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그리스도를 싫어하고 버릴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악하니까 의롭고 선한 것을 좋아할 까닭이 없다. 자기처럼 악하고 의롭지 않아야 서로 같은 동류 의식에서 한편이 되어 붙임성이 있겠으나 반대가 되고 더구나 악하여 선한 것은 그 본질상 그 악함을 책망하는 것이 되어 양심상 괴로움을 주는 존재이기에 미워하게도 된다. 이것이 사람이 이 세상에서 구원 얻게 되는 결과다. 구원 받았다고 세상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이유 때문에 구박하게 된다.

따라서 구원도 좋지만 이 세상에서 당장 그런 고난의 대상이 되라고 하니 그것이 싫어 많은 사람이 스스로 예수님에게서 물러갔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고난의 대상이 되라고 하는 것은, 구원 받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처음부터 사람 사는 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히 따르다보니 생기는 결과다. 의(義) 또는 선(善)이라는 것은 그것이 사람 사는 진리이기 때문에 즉 생명의 법질서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즉 악하다 또는 죄다 하는 것은 그렇지 못하고 그 법질서에서 어긋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사람 사는 도리이고 진리라는 것은, 이 세상이 고난 받는 세계이므로 함께 고난 받는 것이 생명의 도리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도리는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두 한 몸에서의 각 지체 역할을 하는 자기 부인 곧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한 몸 구조이므로 고통 받으면 다 함께 고통 받고 즐거워도 다 함께 영광을 받아도 다 함께 영광을 받는 것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것도 우리가 받는 고난을 함께 받으심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한 몸의 구조를 이루는] 과정을 친히 밟으셨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렇게 생명의 참된 도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담고 있는 성경이 과연 어떤 종류의 거짓이든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쓸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참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그런 아무도 따르려고 않을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말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진실대로 이야기하는 성경이 어떻게 거짓을 쓰고 속임수를 쓴다는 말인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고 속이려면 사람들이 싫어하는바 그런 고난 받는 것을 고난 받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말로 얼버무리거나 해야 거짓말이 되고 속이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그 뜻이다. 거짓말과 속임수란 것은 그런 데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즉 고난 받을 필요가 없다, 고난 받지 않아도 구원된다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너나 없이 믿을 것이므로, 믿기를 바라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신도들이 되는 것을 바란다면 그렇게 말해야 될 것이고 거짓말이나 속임수는 그렇게 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느 구석을 살펴도 믿는 신도 수가 많기를 바란다는 대목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오히려 믿는 자 즉 생명에 들어가는 자의 수가 적다, 많이 찾지 않는다, 오히려 멸망에 들어가는 자의 수가 더 많다 했고, 제자들의 말처럼 "누가 그런 것을 믿을 수 있는가", 구원 얻는 이들이 적습니까" 할 정도의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고, 기적 행하시고 하는 것을 보고는 많은 사람이 따르지마는[사실은, 그런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고 성경은 정직하게 밝히고 있다] 그 말씀을 듣고는 많은 제자가 물러갔다고 곧이곧대로 적어놓고 있을 만큼 믿는 사람이 극소수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할 정도의 성경 내용에서 무슨 거짓말과 속임수를 찾는다는 말인가.  

병 낫는 것도 좋지마는 약이 하도 쓰기 때문에 얼른 그 약을 입에 털어 넣으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 성경이다. 쓴 것을 억지로 삼키는 것, 삼키면서 너무 써 부르르 몸을 떠는 것과 같은 것이 성경이다. 쓰디쓴 약을 주면서 "병이 나으려거든 이 약을 먹으라"고 하는 그런 것이 성경이다. 쓴 것을 쓰다고 하지 달다고 하지 않는다. 달다고 하면 그것은 좋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거짓말인 것이다.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쓴 것을 쓰다 하고 먹기가 어렵다는 것을 사실상 시인하는 것이 성경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듣기 싫어하고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을 거침없이 과감하게 말할 때에는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그러한 줄로 알면 틀림없다. 교언영색(巧言令色,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얼굴빛)이라는 말도 있듯이 거짓말과 속임수의 특색은 우선 듣기 좋은 데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이 아닌 경우에도 때에 따라서는 마치 진리를 말할 때처럼 듣기 싫은 말을 혹 하는 수가 있지만, 그것은 그 자신 자기가 말하는 것에 정통하지 못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딴에는 실상인 줄로 믿어 그런 것일 뿐, 알고서 그런 식의 '듣기 거북한 내용'으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이렇게 제대로 말하고,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어 거리낌 없이 "꺼리지 않고"[행 20:27] 밝히는 것이 성경인데 거기에 거짓말이 있고 속임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이 거짓말과 속임수에 대해 여러 말을 하는 것은 성경을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것이 구원의 기본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구원 얻는 지식이 모두 이 성경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반(反)하고 성경대로 가르치지 않고 성경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집단이나 성경 읽는 것을 금할 뿐이다.

과거 역사를 볼 때 세상 군주들 위해 군림하여 정치 권력을 좌지우지한 그런 종교 집단은 아무리 기독교를 표방했다 하더라도 현저히 성경과는 다른 이질적인 것이니 그 스스로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뿐이지 세상 권력을 통하여 정치적 실력 행사를 취해온 것이니 핍박 받는다는 것과는 아주 반대인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공산주의 국가 체제가 들어서면서 종교를 아편이라고 선전한 그들의 손에 의해 핍박을 받은 것뿐이다.

종교 자체를 악이라고 보는 정치 권력 앞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 소위 "기독교"만 아니라 그런 체제하에서는 기타 다른 종교 역시 핍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이니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들이 이른바 기독교라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하므로 독자들이 혼돈스러워 할까 하여 그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 세상의 종교를 비판하지 않으려 해도 이 점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구원 받는 믿음의 근거가 성경을 읽음에 있을진대 성경을 읽는다고 끔찍한 방법으로 사형에 처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정체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성경 한 줄 읽었다고[설제니친의 소설에서도 그 사실이 드러나 있다] 시베리아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일급 정치범과 함께 수용되어 있었던 과거 소련 연방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이런 거대한 가짜가 진짜를 핍박한다는 사실 자체가 성경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면 인간의 자연계적 특성을 초월하는 영물로서의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존재를 부각시켜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영물의 조종이 아니라면 가짜가 그렇게 진짜보다 더 융성해지고 권력화할 수가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에서의 가짜, 진짜 관계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체가 이미 하나의 기적이니, 자연 현상이 아니고 이를 초월하여 나타나는 것을 모두 "기적"이라 하니까 하는 소리이다.

이런 가짜도 이제 멸절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이 세상 신 사탄은 이 가짜의 활용 가치가 이제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왜냐면 바울이 천명한 대로 "악한 자" 곧 "멸망의 자식"이 나타나 그 스스로 신이라 자처하고 다시 새로운 단계로 세상을 속이려 함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세주로 천명해온 그런 종교 집단이 더 이상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종교 집단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은 너무 늦기 전에 거기 연연해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 즉 참된 구원의 복음으로 시급히 돌아올 것을 간절히 권유하는 바이다.

이렇게 구원 받은 결과로서 이 세상에서의 쓰디쓴 약을 먹이려 드는 것은 세상 종교에는 없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보듯이 인생 구원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세속을 등지고 심산 유곡에 들어가 수도 수양을 한다든가 아니면 일정한 형태의 고행을 한다든가 하는 일은 권장되어도, 그 종교가 추구하는 바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 그렇게 세상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어 잔혹한 핍박의 대상이 되고 우선 겉보기에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기 부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 당연한 결과로서 이 세상에서 자기 부인을 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없으면 믿음이 없고 따라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됨이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부인을 해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이 없으면 믿음이 없기 때문에 구원을 못받아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런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구원 받으려면 하나님의 아들처럼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되는 것이므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연히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의 본을 따르는 의미이다.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양자(養子) 되었으므로 친자(親子)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을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모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앞에서 지적한 대로 사랑으로 함께 고난 받는 것 즉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바로 그 의미 외에는 없다. 지금은 만물이 다 함께 산고(産苦)의 고통을 치르는 국면이므로[롬 8:22] 그 고난에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하다. 조물주 친히 고난 중에 계시니[지금은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과거에는 친히 인간의 육체를 입으심으로써 나를 위하신 죽음을 목적으로] 피조물 역시 당연히 고난 중에 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세상에서 아는 고난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는 고난의 질적인 차이로서 고난의 성질이 다르다. 전자는 그냥 죄의 형벌 또는 결과로서의 비애로만 그치는 고난이다. 반하여 후자는 그 속에 넘치는 환희와 평안이 강같이 흐르는 그런 속성의 고난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죽음의 고난이요 후자는 생명의 고난이다. 전자는 자긴 자신 때문에, 후자는 순전히 타(他)를 위함이다. 전자는 아무리 좋은 의미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 한정되고, 후자는 영원 세계에 미치는 복락(福樂)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인간 구원은 이 현세에서 즉 믿는 즉시로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아들됨으로서 이는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시 그런 새 창조가 이루어지기에 합당한지 여부만 찾는 것이다. 그 유일한 요건이 믿는 것이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순종을 요구하는 터이므로 그 순종을 하겠다는 스스로의 결심과 하나님 약속으로서의 회개가 가장 먼저 오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하 만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 즉 명령하시는 것이 "회개하라"[행 17:30]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고는 내 아무리 믿어도 그 믿음이 구원이 되지는 않는다. "믿으면 구원된다"고 하는 그 "믿음"이, 이 회개를 필수적으로 포함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머리와 몸의 구조가 생명의 체제이므로 몸의 각 지체된 우리 각자는 반드시 머리께 순종해야 하는 것이니 이는 어떤 경우에서든 생명 있어 산 자에게는 필연적인 것이다.

삶 자체가 머리와 몸이 구조에서 자기 부인에 있기 때문이니 자기 부인은 갑이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서로는 상대방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고로 산다는 것 자체가, 오늘날의 세상 인간들처럼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나 자신을 위해[남이 나를 위해주거나 살아주지는 않을 것이니] 사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자기중심으로서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죽음의 지름길이다], 원래는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 이웃[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함이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요 죽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살기 위함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더 다시는 죽은 자가 아니요[이 죽은 자라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시한부 생명이라는 의미 외에도 자기중심으로 산다는 의미도 당연히 함께 포함함이다] 산 자라는 것은 이와 같이 한 몸 체제에서 머리이신 하나님께 대한 절대 복종을 전제하는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이러한 '한 몸' 체제에 있는 것은 아니니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시 않고 자기중심이 되어 있는 한 이 한 몸 구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내 이웃"일 수가 없다. 혹자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로 들어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신 것은[눅 10:29-37], 형제를 사랑하되 단지 형제라는 이유 즉 한 몸을 구성하고 있다는 이유로써 할 일이지, 이해관계, 친소(親疎) 관계를 따지지 말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유대인이라면 자기와 개인적인 관계나 친분이 있는 자가 아닌 남이라면, 남의 눈을 위해서라도 제사장, 레위인 등 하나님의 율법에 정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야말로 그런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떠나서 오히려 유대인들로부터 경원시당하는 사마리아인이 그 자비를 베풀었으니 오직 하나님 정해놓으신 인간 양심이라는 명령에 따라서만 거기 복종하여 그렇게 대가없이 사랑을 베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외인(外人)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불철주야 노력함으로써 위해서 기도하고 구원의 말씀을 알리며 그런 차원에서 선행을 하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사신"[고후 5:20]이 되어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요 4:34] 위함인 것이다. 그들을 "내 이웃"으로 여겨서가 아니니,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지 않는 한, 생명 가운데 있는 한 몸의 구조 아래 있지 않은 죽은 자인 것이다.

죽은 자와 하나님이 상관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따라서 산 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누리게 되어 있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 체제에서 사는 것을 말함이니,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께 당연히 순종하여 그 지시를 따르고 그래서 그 뜻을 받들어 위의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자기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요일 3:16] 사랑이 필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 얻어 영생에 이르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상과 같은 복종이 요구됨이니, "내[머리되시는 그리스도]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서로 간에 몸의 각 지체가 되어 있는]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심이다.

그런즉 "회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던 과거와 같이 목숨이 있다고 내 스스로 산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그렇게 착각하는 이가 많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육신대로"(롬 8:13) 살아도 구원은 얻는다는 제멋대로의 해석을 하고 있어], 이제는 엄정하게 머리와 몸의 구조로서 머리에 대한 절대 복종으로 이웃 상호간의 사랑을 하게 되어 있는 "행함"[약 2:20,26] 곧 순종이 필수인 것이다. 곧 "새 계명"[:34] 아래 있음이다. 이를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이라고도 한다.

새 창조가 이루어지기에 합당한지 여부 그래서 그 유일한 요건이 믿음이요 이는 처음부터 사랑의 순종을 요구하는 터이므로 이 순종이 시험대에 올려져 저울질되기 위해서는 구원은 믿는 즉시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고넬료-행 10:44, 빌립보 간수-16:34,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8:39] 이미 하나님 친히 이루신 사실을 믿음으로써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회개로 인한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을 그대로 수용해주셔서 성령의 선물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내 안에 임하심이다[요 14:23].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약속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고후 5:15/롬 14:7-9] 약속을 해놓고 당장 그 약속을 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내는 중에 시험을 받아 혹은 자기 스스로 자기 본색을 드러내어 자기중심이 됨으로써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참극이 재연되는 것이다[히 6:6/10:26,29]. 그러므로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거나 할 사람이 없다"[롬 14:7-9]고 단언한 그 초대교회의 기준에 비추어볼 때, 오늘날 거의 전부가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시 출생함에서는[요 3:3] 오직 '받는' 것이고 내 스스로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새로 창조되는"[고후 5:17] 것이라 하는 것이다. 내 노력을 주는 것도 아니고 내 공로를 주는 것도 아니다. 즉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받는 것이다. 창조되는 자가 정수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받는 것이고 받고 생겨나는 것이지 그 스스로 자기를 창조하지 않은 이상 그가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더란 말인가.

거저 받기만 하니까 은혜요 그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그 복된 사실을 믿는 것뿐이다. 하나님 친히 이루셨으니까 엄연한 사실, 현실이 되어 있을 뿐이다. 바로 그 사실을 사실대로 믿고 받는 것뿐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구원을 받았다고 곧장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바로 그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누가 들어가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미래에 속한다.

다시 말해 현재 구원 받은 내가 이 세상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바로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이 세상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행동이 요구된다는 의미이다. "행동"이 무엇인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함이다.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들이다. 현재 내가 아들이므로 아들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면 나는 구원 받은 즉시 곧장 천국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아들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이 세상 남아 있는 기간인데 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아들인가, 아닌가. 그런 아들로서의 모습들 드러내지 않으면 아들이 아니라는 증명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요 드러내면 아들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니 곧 그 믿음이 진실이고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다. 순종으로 말하면 역경일 때의 순종이 그런 목적에 부합한다. 즉 그 순종의 진실성을 가리기 위해서는 그 역경 가운데서 어떻게 하였느냐로 가름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세상에서의 고난 받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리켜 "아들이시라도 그 받으신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웠다" 한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온전하게 되셨다"[히 5:8] 하였으니 즉 명실 상부한 아들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셨다고 함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 받았으니 그처럼 명실이 부합한 아들로서의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와 같이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9] 한 것이니 바로 그와 같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과정을 완료한 자가 하나님의 아들임이 입증됨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증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를 그 스스로 만드는 결과가 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이니 그 결과는 믿음 없는 세상 사람처럼 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이 경고대로 하는 것인가. 성경은 그 방법을 알려주니 곧 "항상 복종함으로써"라고 한 것이다. 앞서 지적한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머리의 지시에 대한 절대 복종이다. 영혼에 대한 육체의 절대 복종이다. 엄마에게 아기가 절대 복종함이다.

세상에서 받는 고생 고난은 죽음이라는 명제 아래 있는 것으로서 그 바깥도 차고 그 심령도 공허하니 차다. 차니 춥고 따라서 비참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받는 고난은 바깥이야 물론 마찬가지로 차지만 그 안인즉 따스하여 그 바깥의 찬 것을 중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인식,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 속에서 실제로 그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친히 나와 하나되셔서 나와 함께 고난 받고 계시는 바로 그 따스함이다.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도 마찬가지이셨다.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 하나되심에서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함께 고난 받으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 고난을 참으심"[히 12:2]이니 희망이 넘치는 미래로써 위로 받으시는 고난이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임은 말할 것도 없다.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의 가벼운 것이 영원하고 무거운 영광을 이룬다"[고후 4:17] 한 것이다.

이 따스함이 크나큰 원동력을 이루어 나도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는다!" 하고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는 내 약함 즉 핍박 받고 고난 받고 능욕 받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노라!" 하고 이미 이긴 자로서의 기쁨을 즐기면서 고난에 들어가는 아니, 즐기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이런 기쁨을 모르므로 그래서 단지 우리의 겉모양만 보기 때문에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나아오기를 두려워하고 머뭇거린다.

그러나 언제까지 머뭇거릴 것인가. 이 머뭇거림은 옛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한 것이다. 엘리야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왕상 18:21] 하였다.

엘리야 당시는 이세벨이 왕권(王權)을 휘둘러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면 몇이든지 무자비하게 처참한 살육을 감행하던 극히 살벌한 때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너희가 언제까지 머뭇거리겠느냐" 하는 물음에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당신도 대답지 아니하려는가. 이왕 초개 같은 육체의 목숨이다. 원래 인간은 이런 모양의 초라한 목숨이 아니었다. 신령한 몸으로 에덴낙원에 보금자리를 펴고 있었던 신분이다.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인간에게는 죽음의 모습이지 결코 생명의 모양새가 아닌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네가 죽으리라" 하시던 그 말씀대로다. 다시 말해 죽기 위해 있는 그리고 죽음에 수반되는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는 그런 인간의 '육체적' 존재이다. 이것이 무엇이 아깝다고 머뭇거리고 이미 죽음인데도 그 "죽음"을 모면해보려는 구차한 어리석음을 보이려고 하는가. 이왕 죽을 몸, 고통 받게 될 육체를 두고 같은 값이면 멋지게 신나게 보람있게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는 양으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지 그것이 없다면 어찌하여 '고귀한 것이 사람'이라 하리요. 신념 따라 죽지 못하면 이성없는 짐승과 무엇이 다르랴.
 

§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 받는 또 하나의 이유
우리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가 고난 받으셨으니 우리 역시 그 고난에 동참함은 너무나 당연하나 그리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람 살리는 일을 하니 이 일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이 필수적이나, 또 하나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불간섭주의 즉 무엇이든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고 억지로 하게 하시지 않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즉 무엇이든 우리가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에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욥기에서 그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거니와 이 세상 신(神-고후 4:4) 사탄이 욥을 시험하기 전에 생각하기를, "주님께서 욥을 울타리로 쳐서 복에 싸여 지내게 하시니 그렇게 의로운 행동을 욥이 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지금이라고 그것을 걷어치워보자. 그러면 대번에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한 것이니, 사탄의 관점으로는 욥이 형통하여 잘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요청에 응하셨다. 이를 보아서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모든 피조물이 충분히 수긍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일하시는 것이지 피조물들이야 이해하거나 말거나 오직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시는 분이 아니심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이 없이 단지 사탄이 그런 청을 드린다고 해서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신 것이 아니고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시기 때문에 사탄에게 동의하신 것이다.

욥기는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물론 더 있기는 하다. 즉 사탄이 아무리 별의별 짓을 다 한다 해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하지 그 이상으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이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이면 일절 용납하시지 않는다. 해롭게 하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시종일관되게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만 일이 벌어지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 일어나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서 성경에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믿음을 인하여 고난을 받고 그럼에도 여전히 믿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간섭일 수가 없다. 그러나 고난 받지 않고 그 대신 세상이 보기에도 축복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받는다면 그것은 간섭이 되는 것이다. 즉 욥의 경우에는, [사탄이 말한 대로] 강제적으로 믿게 하신다든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시는 것이 되는 것이다. 역시 마찬가지 이치로서 믿지 않는다고 해서 일변도로 고난만 임하게 하신다면 그것 역시 강제이고 간섭이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고로 하나님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그 영광이 금시라도 이 세상에서 나타난다면 하나님의 불간섭주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피조물 중 그 누구든지 사탄의 말처럼 오해하거나 잘못 판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욥이 고난을 받은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은 필수이고, 또 욥이 그 후 더 큰 위로를 받아 오히려 전화위복되어 고난 받지 않은 것보다 받은 쪽이 더 큰 축복이 되어진 것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욥이 말하기를 "내가 고난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귀로만 들었더니 고난을 받음에 이르러 직접 뵙게 되었다" 한 것과 같다.

고로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은 여러 모로 필수 불가결한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벧전 4:12] 당연한 순서를 정상적으로 통과하고 있음을 알고 기뻐할 것이다. 아무리 험해도 이것이 그 유일한 길[방법]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는 한결 그 심적 부담이 덜하다. 그러나 의심이 있을 때는 그리하여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있는 힘마저 빠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것도 우리 자신 이를 좋아해서 사람 사는 도리인 줄 믿어 그 때문에 여러 악조건이 발생해도 의[올바름]에 대한 사랑은 불변으로서 의와 선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조물주 하나님과 그 피조물이 한 몸의 구조가 되어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며 다 같이 하나로서 함께 고통 당하고 함께 영광 가운데 즐거워하는 이 이치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우며 최고의 이상(理想)인가. 그 이상이 이상으로만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새 창조로써 현실로 나타나 있으니 이를 누가 사랑하지 않으리요. 오직 이 최고 이상을 원치 않고 연속하여 자기중심으로 나가려는 사람들만이 원치 않을 뿐이다.

사탄과 같은 악령들이 모든 지식을 가진 영물들 가운데에서도 있었으니 우리 인생들 중에서도 반드시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영물들이 그와 같이 스스로 분류되어 나타났듯이 분류되게 마련이다. 그 분류가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악한 자에게 속한 가인이 의인 아벨을 죽였듯이 악한 자들이 의인들을 핍박하는 세대로서 악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이 세상의 특색이다. 이 사실은 나름대로 그 역할이 있음이니 의인으로 하여금 의가 좋아서 의를 행하고 불법을 미워하여 한사코 불법과는 타협하지 않는 그 증거를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것이 그 하나다.

다시 말해 "불의가 좋아서"[살후 2:12] 악을 행하여 그대로 자기중심으로 나가고, 여하한 위협이나 유혹에도 아랑곳없이 오직 "의를 사랑하여 불법을 미워하기"[히 1:9]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게"[요일 2:29]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지 않으시고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심과 같이 우리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에게 거짓 것을 가르쳐 이 진리를 엉뚱하게 해석하게 만들지 말라"는 경고를 하면서[:7],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8]이라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8]이라 했으니 즉 우리를 죄 짓지 않도록 하려 하심이라는 그 뜻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난다" 하였고, 거듭하여 강조하기를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기"[:9,10] 때문이라고 아주 단정을 내린 것이다. 이는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는 자가 없다"[롬 4:7-9]고 단정을 내린 것과 똑같은 사안이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 했다. 주님께서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왔으니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듣는다"[요 18:37]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뜻이 변치 않으시고 거짓말하실 수 없다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 또는 특징이 있으신 것이다[히 6:18]. 그 뜻이 나중에 변하는 경우에는 그 먼저 나타내신 말 또는 의사는 결과론적으로 거짓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거짓이 아닌 것이 진리이나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는 거짓이 없는 것이다.

거짓이란 것은 그 거짓말을 듣게 되는 대상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벅찬 상대일 경우에 한한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대하기가 벅차셔서 거짓말을 아니하실 수가 없는 경우란 원래 없다. 벅찬 상대라면,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고로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예 만드시지를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는 것이다. 이 사탄이 사람[여자]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그 상대가 자기에게 벅차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여자로 하여금 그 선악과를 먹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여 그 스스로 그것을 따서 먹도록 한 것이다. 자기 능력과 권력으로는 인간을 그 선악과를 먹도록 할 수 없기 때문에 취한 수단인 것이다. 벅찬 대상이면서도 그 거짓말이 통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와 같은 동류이거나 자기보다 상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벅차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최소한 그런 거짓에 넘어가지 않을 동등한 지식 수준에 인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인간은 마귀의 거짓말에 넘어가 버렸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이 마귀 즉 영물만 못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벅찬 대상이면서도 자기보다 상위에 위치하면서도 거짓말이 통할 수 있는 정도로 지식상으로는 하위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식이 상위에 있다면 능력이 상위에 있다는 그 뜻이므로[원래 지식은 능력과 통하는 것이니 힘으로는 인간이 맹수를 대적하지 못하나 동물은 지식이 없고 인간에게는 지식이 있어 그 동물을 제압할 수 있음과 같다], 사탄의 목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 선악과를 먹게 하는 것이었을진대 자기 능력을 행사하여 그 선악과를 먹도록 조종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이 능력이다.

자기 의사에 반하여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는 얘기인데, 하나님 앞에서 인간에게 멀쩡한 거짓말을 하여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정도의 대담성이 있는 판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랴. 그러나 강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를 못한 것이다. 인간 스스로 하게 만든 것이다. 인간 스스로 하게 하는 데에는 거짓말이 필수이다. 속여서 그래서 속아 넘어가 그 스스로 선악과를 먹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사탄이 부추겨서 범죄에 이르렀다고 하나 사탄은 사탄대로 그 대가를 받는 반면 인간 역시 뚜렷이 범죄 행위가 성립되어 그 죄의 대가를 받은 것이다. 인간이 영물 곧 사탄에게 벅찬 존재라고 했는데, 과연 어떤 위치에 있기에 그런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단순한 그 사실만이 아니다. 자연계의 존재로서 자연계에 속한 피조물 가운데에서는 단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행세를 할 수 있지만 영물은 영물인지라 자연계에 속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그런 특성이 아무 영향을 미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핀 대로 인간은 영물들에게 벅찬 존재였던 이유는 그 영물들이 다름 아닌 창세기 에덴낙원의 "땅[ground]"으로 처음부터 아담을 위해 지으심 받은 "각종 짐승들"[물고기만 제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자기를 위해 창조된 영물들을 거느리며 그 보좌를 받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보좌를 받았다는 것은 그 영물들이 비록 인간 이후에 지으심 받아 창조된 서열로 따지면 인간 아래에 있으나 지식에서만은 인간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야 보좌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영물들이 서로 보완 관계에 있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그 영물들을 다스려 조절, 조화시키고 영물들은 그 대신 지식면으로 인간을 도와 상호간 분쟁 없이 '너 없이 나 없고 네가 있으니 나 또한 있다'는 사랑으로 하나됨을 형성하게 하신 것이다. 아담이 비록 애초 그 육체가 자연계에 속한 "흙[dust]"으로 창조되어 자연계에 속한 창조물의 수장이었지만 동시에 영혼이 조성되어 영적 존재가 됨으로써 에덴낙원 자체가 인간을 위하여 창조된 까닭에 더군다나 영물들 자신이 인간을 보좌할 목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영물들은 인간 아래 위치하게 된 것이다.

영물들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영적인 세계[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이 되어 있는 아담을 가리켜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영물들[각종 짐승들]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은 인간의 근원이 자연계에 속한 것이었으므로[그 육체가 자연계의 흙이었기에], 영계가 자기네의 근원인데 비하면 열등하다 하여 교만한 마음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은 인간[아담]은 육체는 뿌리가 자연계이지만 영혼이 조성됨으로 인해 에덴낙원[영계]에 속해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으니 이는 자연계와 영계를 아울러 다스리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정점(頂點,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므로)만 아니라 영계의 시발점(始發點, 인간의 영혼이 조성된 다음에 에덴낙원이 창설되었으므로 )이 되었던 관계로 비록 능력[지식]면으로는 영물들보다 못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피조물의 머리로서의 위치가 아담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아담의 권위로 인해 아담과 직접 수작하지는 못하고 여자를 상대한 것인데 여자 역시 아담의 분신이요 아담이 그 후광인지라 만만히 보거나 녹록하게 생각할 대상이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동원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귀[the devil]는 인간을 속임으로써 거짓의 아비[father]가 된 것이다. 당시 창조 초기에서는 무엇이든 먼저 하는 것이 앞서는 것이니 먼저 창조하심을 입는 자가 앞서는 것과도 조화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계의 동식물보다 나중 나기는 하였으나 영혼이 조성되었고 영계인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였으므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영물과의 관계에서는, 먼저 인간이 영적인 존재가 되어 있고[영혼이 조성됨을 인해] 그리고 식물[에덴낙원의]이 먼저 났으므로 그 식물의 과일을 먹음으로 그 몸이 신령한 육체로 변환되어 있는 중에 그를 보좌하기 위해 영물들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내조자[內助者]를 만들어주시려고 그렇게 영물들을 지으시고 그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자를 골라 자기의 조력자[helper]를 삼도록 하려 하셨는데["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려 하시니"가 그 뜻이다] 모조리 다 이름을 지어 버렸다. 여기서 "이름"이라는 것은 그 생긴 모양대로 짓는 것이므로 말하자면 별명 격이었고 별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되어 있는 아담의 눈에는 차지 않은 모습들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즉 그 중에 하나도 자기의 최 측근으로 둘 자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같이 생긴 여자를 보고 나서야 자기와 꼭 같으므로 그 특징을 찾지 못해 이름을 짓지 못했음이 그 증거다. 지어보아야 자기가 아담이니 아담이라고 밖에는 더 부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영물들이 자연계로 말하면 "각종 짐승들" 격이므로 저마다 그 특징이 있어 그 특징대로 지어 불렀다는 것이니, 그들을 다스리는 자로서 그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자기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녔으므로] 보았다 즉 아래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자기와 동등으로 여길 수 있는 영물이 하나도 없었다는 그 얘기다.

여자가 나중에 범죄하여 자기를 망침은 물론 남자를 또한 범죄로 유인했으니 남자를 돕기는커녕 도리어 망치게 한 꼴이 된다. 그래서 "여자를 다스리라" 하신 대로 여자가 자기의 다스림을 받는 자로 격하되면서[이 모두 범죄의 결과 즉 저주의 일환이다] 비로소 이름을 지어 "하와"라 한 것이다. 이미 이상적인 하나로서의 남녀 조화는 깨어져 버린 것이다. 한번 깨어지면 영구적으로 그것이 다시 복원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다.

하나님의 엄밀 엄정하신 원리원칙주의다. 한번 망가져버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 위치는 범죄로 인하여 영구적으로 회복 불능 상태인 것이다. 겉 모습은 그냥 그대로이나, 영존하지 못하는 존재가 어찌 감히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 받았다는 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즉 죽지 않는 것으로 만드셨다는 의미도 함께 포함된다.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과는 달리 영원히 존재하는 자로 만드셨다는 의미가 인간의 영혼 조성인 것이다.

그래서 그 코에 숨[생기, 生氣, the breath of life]을 불어넣으시고 영혼을 조성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의 당연 순서로서, 영적 존재[영혼이 있으니까]로서의 인간이 영원한 몸 즉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살 수 있는 영계로서의 에덴낙원을 별도로 창조하신 것이다. 이 때는 무엇이든지 만드셨다 할 때는 창조이다. 이미 자연계가 있는데 또 무엇[자연계에 속한]을 다시 만드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역시 하나님의 일사부재리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처음 지으심 받은 인간이 범죄로 인하여 다시 자연계로 복귀한 이상 이미 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 대로 소멸된 것이고 다시 인간을 창조하실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일사부재리다. 그래서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을 새로 만드시니 곧 새 피조물이다. 전혀 다른 인간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둘이 하나가 되어 있는 영구적으로 그렇게 둘이 하나된 구조로서의 인간형이다.

이 새 피조물 다음의 다른 계획은 없으시다. 왜냐면 이것이 끝이니 항상 대칭 원리에서 양면 구조이다. 첫 창조가 범죄로 인하여 유명무실화되니 한번의 새 창조는 있을 수 있다. 양면 원리에서다. 그러나 그 후는 없다. 그것으로 종결이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했지만 진리라는 것은 앞서 지적한 대로 거짓말에 상대되는 말이다. 거짓말의 원조인 사탄이 거짓말을 함으로써 세상에 거짓이란 것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거짓이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음을 말하고 따라서 속이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영원한 세상에서는 그런 것 역시 종결이다. 속일 필요도 없고 속아넘어간다고 해서 그 누구도 자기 욕심을 채울 그런 단계가 더 다시는 아니기 때문이다. 즉 거짓 또는 거짓말이란 것은 사탄[지금은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되어 있는]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개념인 것이다. 고로 진리란 것도 그 말의 뜻이 이 세상에서 통하는 것이다. 왜냐면 거짓에 대한 상대적인 의미로서 '참됨', 진실, 실상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빛과 어두움의 개념과도 통한다. 빛은 사실 그대로 나타내어 준다. 반면 어두움은 어둡기 때문에 아무 실상을 구분해서 볼 수가 없다. 길 아닌 것을 길이라고 하고 따라 오라고 해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상 거짓이 아니냐 하고 반박할 수도 없다. 길이 나타나야 그 길 따라 가면 그만인데, 길이 보이지 않으니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거짓이 없고 어두움이 없는 사실 그대로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든 것, 작용하는 그대로의 모든 것, 진실과 실상의 모든 것이다. 존재한다, 작용한다 등의 모든 개념과 의미는 처음 창조주께서 만드시고 작동시키신 그대로의 실상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진리에 속한 자가 내 말을 듣는다" 하셨는데 이 속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짓이 없는 사실 그대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알고 어떤 사람은 왜 모르는가. 주님께서 "내게 오는 자가 아무나 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에게서 배우고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야"[요 6:44] 오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떤 경우 그 가르치심을 받고 인도하심을 받는 것인가.

주님께서 자기에게 오는 자를 목 마른 자, 병들어 의사를 구하는 자, 수고하며 무거운 짐 진 자, 당장 죽게 되어 살기를 바라는 자 등으로 정의하셨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그런 갈증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찾는 자, 구하는 자,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고 하셨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두드리는 자가 아니면 그 문이 열려지는 법이 없다는 말씀이 된다.

목마르지 않은 자에게 물이 필요 없고 병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에게 의사가 필요없다는 말씀과 같다. 그런데 하나님의 불간섭주의 즉 철저한 자유 의지를 보장하시는 마당에 이렇게 목 마르게 하시고 자기의 병든 사실을 알도록 만드실 수는 없다. 그것은 강제가 되고 간섭이 된다. 그러므로 그 스스로 판단하고 사색하여 구원의 길을 모색할 때 그리고 그 의도가 진실할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즉 두드리고 찾고 구할 때에만 반응하시는 것이다.

그 의중의 진실 여부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목 말라 죽을 지경이다, 병들어 사는 맛이 하나도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 해법을 찾기 전에는 다른 그 무엇에도 만족을 볼 수 없고 그리고 그 해법이라 싶을 때는 그 해법이라고 믿는 것 외에는 달리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죽음 일색이고 이 세상 신(神)의 조종과 압제 아래 있으므로 그런 결론은 누구에게나 타당한 것이다. 단지 그 타당성을 눈이 어두워 어두움 가운데 있으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또 문제는 있다. 애초 그러한 갈망으로 그리스도께 온 그 초심(初心) 그대로 끝까지 나아가느냐 하면 불행히도 그렇지를 않은 수가 비일비재한데 그런 축에 들어가느냐 하는 여기서 또 가름된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마음이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자유를 충분히 누리는 의지 작용이라는 특색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람 사랑도 그렇듯이 처음 사랑을 그대로 지속하지 못하고 중도에 변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계시록에도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 어디서 떨어진 것인지 생각하고 회개하라" 하신 것이다. 또 "네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니 너를 토하여 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 그대로 처음 행위 그대로 보전하는 자가 복이 있다. 물론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말하기를 "나만은 그렇지를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도 않으니 어이 하랴. 스스로 경계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벧후 3:5] 했고, 그리스도께서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히 1:3]고도 했다. 천지 창조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게 된 것이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진 것이다[히 11:3]. 그래서 "진리의 말씀"이라 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우리가 살게 되어 있음"이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말씀"[요 3:1-3]이시다.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치되기 위해 현재의 이 천지 우주의 멸망도 말씀으로 되어지는 것이다[벧후 3:7].

앞에서 말한 대로 거짓이 없는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실상 그대로의 모든 것이 진리이다. 인간이 교묘하게 즉 그럴 듯하게 지어낸 이야기[벧후 1:16]가 아닌 모든 것이다. 사실처럼 지어낸 이야기가 거짓말이다. 사탄이 인간을 속임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모든 현상과 실상을 진리라고 하지는 않는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개입하여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대한 상대적인 모든 것이다. 이 세상 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오직 목적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게 있는 것인즉 구원과 관련된 것 곧 사람 생명과 관련된 모든 구조와 원칙과 실상을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이 세상에서의 강함은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면 이 강함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인즉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강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즉 바울이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이라 한 그 '약함'이요 '강함'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어떤 고난인가. 죄인이 아니지만 죄인으로서 받는 저주, 고난, 죽음이다. 죄인이 받을 저주와 죽음의 고난을 그들 죄인들과 함께 지는 것이다. 고로 세상의 눈에서 볼 때는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니, 심히 약한 자의 형편이 되어 그런 모습으로 당하는 고난인 것이다.

당하기만 하고 한번도 되받아 치는 일이 없는 고난이라 세상은 이를 가리켜 '어리석다'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음으로 통한다고 바울은 말했다. 이런 것을 견딤이 강함인 것이다. 목적이 뚜렷하고 의도가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고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통과의례 정도가 아니라 고난의 모든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초년 고생은 사서라도 하는 것이라는 말과 같은 희망이 넘치는 속에서의 고난이다.

말하자면 고난 받기 위해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격이다.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 받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람 살리는 일은 성경에 이름과 같이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성령의 역사는 기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기도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세상 사람들을 회개케 할 수 없고 제사장의 기도는 희생 제물로서의 고난이 없이는 그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다.

이렇게 고난 받는 것이 목적이다시피 된 위치에서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할 수 있는가. 주님의 경고대로 자기 생명을 잃어 버릴 따름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영생하도록 보존한다 하신 말씀 그대로다. 이렇게 고난 받음은 "진리를 사랑하는"[살후 2:10] 것으로 통한다. 심판의 대상인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것은 고난을 기피함과 통한다. 불복종과 통하는 것이다. 고난을 받지 않았다 하여 그렇다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한다는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그 각오 아래 그렇게 처신하면 되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도 명예요 영광이요 그 상급이 따르는 것이므로 보통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마음 자세로 생명의 도리인 "자기 부인하는" 것이 정작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우주에서 최고로 강한 자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런 고난을 무릅쓴다는 것은 일변 통쾌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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