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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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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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이 세상 그 어떤 서책이나 그 무엇이든 일단 발설되고 전달된 내용을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와서 "그 마음에서 빼앗아"[눅 8:12/막 4:15] 가는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즉시 와서 저들의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마 13:19]이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탈취해 가지 않으면 언제든 그 말씀의 내용을 생각하게 될 때 얼마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구원의 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은 간명하고 단순하기가 이를 데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못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들은 바 말씀이 더 이상 마음에 남게 되지 않도록 머물게 되지 않도록 함에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대로 "마음에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하심을 얻기"[롬 10:9]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서는 그와 같이 신속히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17]. 머리를 싸매어 연구하고 깨달으려 애쓰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히 사람이 되신 후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이미 이루어놓으신 구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듣고 마음에 믿고 마음에 믿으니 자연적으로 입으로 주님이라 시인하게 되니[:10] 곧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13].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 즉 나의 주인, 소유주로서 모신다는 뜻입니다. 즉 절대 복종입니다. 한 몸을 이룬 각 지체는 머리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몸과 머리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우러나는 절대 복종이 핵심이고[이는 영원히 사는 삶의 도리이자 법칙] 이 복종은 사랑이 그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며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증된[롬 5:8] 하나님의 사랑을 그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써 생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않는 한 다시 말해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된"[마 18:3] 사람에게는 아주 간단 명료한 과정이고 순서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에 뿌려지는 하나님의 말씀" 곧 마음에 생각하여 "밤낮 가릴 것 없이 묵상하는"[시 1:2] 것이 모든 것의 요체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까이하여 항상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새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즉시 와서" 탈취해 가 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풍성하게 들어도 마음에 생각하지 않으며 마음에 남아 있지를 못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마리아처럼 항상 "마음에 두는"[눅 2:51]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로서의 마지막 아담이시고 그리고 본이십니다. 그리스도와 나를 차별화할 것이 아니라 동일시해야 하는 것이니 즉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우리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차별화할 때는 무슨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임에도 모르기 때문인즉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경고하는 대로 기도에 힘쓰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가운데에서 주님과의 그러한 불필요한 격차를 좁힐 수 있게 됩니다.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을 우리가 제대로 안다면 주님께서 나타내신 것과 같이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몰라서 그런데도, 알려고는 않고 처음부터 나와 주님과의 경계를 그어놓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결코 온당하지 않습니다. 뿌리고 심은 대로 거둡니다. 100을 심었는데도 500을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콩을 심어놓고는 팥이 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성령으로 심으면 성령을 심은 대로, 육체를 따라 심으면 육신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갈 6:8].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한 대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지킨 만큼의 효력을 보려는 것은 주제넘은 생각이 됩니다. 지키지 않으면 지키지 못한 결과를 볼 것이고 지켜야 지킨 보람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생각하기에 믿음이 좋고 이만하면 되었다 하지만, 성경은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했으니 그런 줄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반드시 조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우리의 믿음을 "밀 까부르듯 하여"[눅 22:31]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당장 뒤엎어놓을 수 있습니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삽시간에 해치울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하라 했으면 당연히 그렇게 따르는 것이 지혜요, 그런 경고를 하고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담처럼 죽은 자가 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스스로를 영원히 망치게 만드는 지름길로 달려가는 교만이 됩니다. 패망의 앞잡이라고 성경이 경고하는 교만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21:33] 하신 그대로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22:32]는 말씀은 내 스스로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 내리시는 은혜입니다. 내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주님도 움직이실 수 없는 사실을 지적하시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을 것이라"[12:8,9]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스스로 노력을 기울였다 해서 내 힘으로 그렇게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우리 위해 기도해 주심으로써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가 그렇게 내 스스로 노력하여 거두는 결실임을 명심할 일입니다. 항상 동시성과 양면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는 또한 아무 것도 못합니다. 반드시 내가 믿어야 하고 믿는 가운데에서 스스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구원입니다.

"행위로 구원 얻지 못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없이 스스로 행할 수 있다는 착각을 지적해 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또 착각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행위는 필요 없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속이도록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다시 획책합니다. 위의 설명대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안에서 스스로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입니다.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조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얼마든 조심해서 해로울 것은 없습니다.

어떻게 조심하느냐, "항상 기도하여 깨어 있는"[21:36] 것입니다. 깨어 있는 것은 기도함을 말하고 기도하는 것은 깨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진다"[:34] 하신 그대로입니다. "나는 방탕하지 않으니, 술 취함이 없으니 깨어 있는 상태라" 할 수 없는 것은 "생활의 염려"가 결코 그렇지 않음을 입증해 보이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세상 사는 재미 혹은 낙에 묻혀 지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이 마음이 둔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필시 "덫과 같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곂코 바라지 않는 결과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항상 마음을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으로 중심을 잡고 이 중심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노력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능력이나 은혜가 아닙니다. 반드시 양쪽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일방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그 무지(無知)를 회개 않고 고집했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거룩한 천사들처럼 되지 못하고 저 모양으로 영원 멸망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구원은 회개를 가능하게 하심에 있고 비로소 순종이 가능하게 하심에 있습니다. 회개를 가능하게 한다는 말의 뜻은 그 회개의 결과가 분명히 나타나도록 모든 조처가 완비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도[혹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도] 회개하는 것 즉 뉘우치는 마음이야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목적 다시 말해 다시는 그렇게 회개한 것을 재범하지 않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런 결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요 오히려 매양 반복하기만 한 것이니 그것이 회개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서도 죄 짓고 회개하고 또 죄 짓고 회개하고 하는 이런 경우 정확히 진단하면 그리스도를 아직도 믿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르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을 믿는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시 말해 이상한 뜻 다른 의미로 믿고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믿는다, 구원 얻었다 하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실제 그는 구원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똑바른 제대로 된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행 16:30] 하고 빌립보 간수에게 지침을 준 것은 그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회개하는 심정으로 구원의 길을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결심이 서 있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믿으라”입니다. 회개함으로써 이제는 믿으면 영생이 되는 충분하고도 확고한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련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그런 명령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성령 충만한 말씀 전달에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 할꼬!”[2:38] 했을 때에는 이미 믿기로 결심한 터인데도 이런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아 죄 용서 받은 후 성령을 받는다”는 절차를 알리면서 회개하라고 한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구원[성령의 선물을 받음]은 죄 용서를 받은 다음의 결과이고 죄 용서는 회개를 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5:31]. 그냥 믿으라 한다고 그래서 믿는다고 일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 얻는 회개”[11:18]이므로, 믿기 때문에 회개하게 되는 것이고 회개하는 것이 믿음의 증거입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20:21]입니다. 이 둘은 항상 평행선을 긋듯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히 6:1]은 필수적으로 “죽은 행실을 회개함”[:1]과 맞물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철칙에서 벗어나면 사람 구원하는 일이 제대로 수행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상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킨다”[요 14:15,21,23] 하신 것이니 그 말씀도 연속적으로 반복하여 강조해 주신 것입니다. 즉 순종입니다. 불복종이 죄이므로 이는 아담의 선례에서 명확히 입증된 것이며 여기에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는 순종하지 않음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과거 전력에 대하여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핵심은 '사람'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함에 있지 특정 '사실'을 시인하는 데에 있지 않고, 직접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있지 ‘하나님의 사랑’을 단지 사실로서 시인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나, 여기 두 사람이 있는데 모두 경제적 여유가 없으나 차 한 대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일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차를 한 대 선물로 받습니다. 그래서 잘 이용합니다. 술 취한 채 운전하지 말라는 경고를 항상 받으며 그래서 조심합니다.

그런데 비 오는 어느 날 설마 어떠랴 하고 약간 술 기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전하다가 부주의로 그만 교각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집니다. 요행히 부상 정도로 끝났지만 차는 완전히 망가집니다. 그래서 그 결과, 두 사람 다 이제는 모두 전처럼 차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원 얻은 것을 차를 한 대 소유하여 운전하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현재 차를 굴리고 있을 때는 차를 갖고 싶다는 욕망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전부냐 하면 아닙니다. 조심하여 몰지 않으면 다시 차 없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더러 “조심하라”고 성경에 경고하고 있습니다[고전 10:12].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라", "네 자신을 구원하라"는 말도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차를 못쓰게 만들어 차 없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차가 있는 사람더러 “차 없는 사람이 되지 말라” 하므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사실은 아무 것도 이상한 것이 없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 보고 “네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 네 자신을 구원하라” 함과 같습니다.

아담은 당시 영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생하는 사람, 영생하게 되어 있는 사람,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아담더러 “네가 영생하지 못할까 하니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신 뜻이 곧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경고이신 것입니다. 이 경고를 받은 아담이 그러면 “내가 혹 선악과에 손댐으로써 영생하지 못하면 어찌하나” 하고 항상 전전긍긍하며 살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되는 일이라” 하고 “죽을 일을 내가 왜 미쳤다고 하겠는가” 하고 그냥 태평스럽게 삶의 낙을 누리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너무 태평스러웠기 때문에 불시에 닥친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조심은 했어야 하는데 그래서 돌발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항상 되어 있었어야 하는데, 어쨌든 그렇게 해서 인간[아담]은 영생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롬 5:12]. 즉 죽음을 모르게 되어 있던 아담이 자기 부주의로 혹은 방심 때문에 혹 기타 이유로 죽음을 보게 된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생명은 생명대로 즐기면서 조심은 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냥 말로만 “구원 받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생명력[능력]이 당연히 작용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단지 우리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므로 이 필요한 능력 역시 끝까지 믿음으로만 나타나 운용되는 것입니다. 이 힘으로 죄를 이기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결단코 우리 능력으로 하는 일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능력이십니다. 그래서 시종일관해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은 단지 조심하는 것이지, 구원을 잃게 되면 어찌 하나 하고 초조해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은 아닙니다. 차를 부릴 때는 신나게 몰고 다닙니다. 단지 항상 조심하는 것입니다. 항상 조심하는 것과 전전긍긍 불안해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아담의 예로써 이미 설명한 대로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선물로서 하나님의 새 창조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래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그 성령으로 내 안에 영접해 모시면 되므로,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믿어 의(義-다시는 죄인이 아닌)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9] 것이므로, “입으로 예수님을 주(主-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이시니 나는 따라서 그에게 절대 복종하는 종이요 하인)로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10] 것입니다.

내 편에서는 일체의 노력이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회개만이 필수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복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려”[행 3:26] 하심이라고 5000명[남자만의 숫자]을 회개시키며 성령 충만한 가운데 요한과 더불어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며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는”[:19]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설한 것입니다.

따라서 악을 버리지 않는 한 회개가 될 수 없고 “구원의 복(福)”은 없습니다. 내가 주님의 종으로서 절대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 친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서 나의 소유가 되셨으므로 절대적으로 나를 위하시는 분으로 영원히 정착해 계시는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종처럼 되어 계십니다. 엄마와 아기 관계와 같습니다. 엄마는 아기의 종입니다.

아기가 엄마에게 무엇을 이래라 저래라 시켜서가 아니라 엄마가 알아서 아기를 위해 다 해 주는 스스로 된 종 노릇입니다. 내가 주님께 이것 저것 하라고 지시해서 종이 아니시고 주님 친히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이루시는 즉 '스스로 되신' 그런 종 노릇입니다. 아기가 무슨 판단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엄마가 해 주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도 조물주이신 주님 앞에서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 가운데 너희를 섬기는 자로 있다” 하셨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이는 당연히 사랑의 용어(用語)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마음의 결실이 언동(言動)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에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그대로 언행으로써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은 마음의 형상 즉 표현입니다. 마음은, 생각하여 결정하는 모든 것의 총본산(總本山)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사람은 그 생각하는 것만큼 사람됨(爲人)이 결정된다”[As he thinks, so is he.-잠 23:7] 했습니다. 왜냐면 그 마음의 생각이 형상화하여 나타나는 것이 곧 말이요 행동으로서, 이는 곧 그 인품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이렇다 저렇다 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은 그 겉으로 드러나는 언동을 보고서 내리는 결과입니다. 고로 “무릇 지킬 만한 것 이상으로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거기서 생명의 근원이 난다”[잠 4:23]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죄 짓지 않는 것도 마음에 그렇게 결정함으로써 되어지는 일입니다.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마음에서 나오고, 어제까지 믿다가 오늘 갑자기 믿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마음의 변화, 변동입니다.

이는 자유, 자유의지와도 직결됩니다. 아담의 범죄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니 즉 마음의 변동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가 마음에 영접해 모십니다. 성령께서 임하여 오심도 우리 마음에 오심이라고 성경에서 밝힙니다[고후 1:22]. “항상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는 것”[엡 3:17]은 우리가 항상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의식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입니다.

따라서 항상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라[making melodies in your hearts to the Lord] 했습니다. 한 폭의 아름다운 ‘사랑의 풍경화’를 연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요일 1:3]이 우리의 매일의 일상생활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이 세상에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이[요 20:21,22] 우리의 이 세상 생활은 주님과 함께 일하는 데에 있습니다[고후 6:1].

사람은 마음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아무리 환경 여건이 나빠도 마음으로 만족하고 지내면 그 이상으로 행복할 수가 없고, 아무리 모든 것을 두루 풍족하게 갖추어 있어도 자기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어두우면 모든 것이 밝지를 못해 불행의 연속으로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 솔로몬의 잠언에도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도 그러하다"[잠 23:7] 한 것입니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안다. 독사의 후예(後裔)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단죄(斷罪)함을 받을 것이다"[마 12:33-7] 하심과 같습니다.

사물을 양면성으로 보아야 정확합니다. 이 양면성의 근본 원리는 삼위일체의 원리로 확정되어 있음을 보고 있고 그 확증이 3운법칙입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양면성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과 동시에 소멸하시는 불이십니다. 구속자(救贖者)이심과 동시에 재판장[행 17:31]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도 양면성적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됨이니 곧 영혼과 육체, 몸과 머리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희생 양"이신 동시에 마지막 심판 때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진노보다는 차라리 모든 산과 바위가 내 위로 덮쳐지기를 바랄[계 6:16 ] 정도의 그런 엄정 무비(無比)의 무자비하신 재판장 곧 심판주(審判主)이십니다. 이는 성경의 표현이니 가감없는 사실 그대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너무나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사랑만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날 적(敵) 그리스도의 출현과 맞추어 나타나 있는 "배도(背道)"[살후 2:3]의 특징입니다.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의 가르침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을 안다고 하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가르치는 대로의 인위적인 교리로써 성경을 대치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랑,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 부르듯이 말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입에 답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의인은 겨우[scarcely, 간신히, 가까스로] 구원을 얻는"[벧전 4:18] 반면, 절대 다수가 영원한 멸망의 고난[계 14:11]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현실적 비극을 인식 않고는 그 가까스로, 간신히 얻는 구원도 무척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양면을 두루 정확히 평형되게 한 쪽으로 쏠림이 없이 인식해야 합니다. 눈물 흘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만 연상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두려우심[the terror of the Lord]을 항상 마음에 동시에 간직해야 합니다[고후 5:11].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만 알아서는 안됩니다[빌 4:4]. "두렵고 떨림으로 항상 복종하는"[2:12]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12]는 것만 말해서는 안되고,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고 강조해야 합니다.

절대로 일방적으로 한 쪽만을 보거나 인식하거나 마음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양면성, 동시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원리는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 즉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사실로부터 비롯되었은즉 영원히 변함이 없고 그 어떤 피조물도 여기서 벗어남이 없고 그 어떤 것[우리의 구원까지도 포함해서]도 이 이치에서 이탈함이 없습니다.

갑과 을 둘이 항상 같이 산다고 합시다. 둘이 오래 함께 삶으로써 서로를 지겨워하지 않는다면 항상 상대를 마주 대하여 보는 삶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닮은꼴이 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둘의 마음, 생각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관한 것으로 그 마음과 생각이 채워져 있지 않고 오직 상대방의 마음과 생각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래서 갑은 을을 보고 을은 갑을 보는 삶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마음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항상 나는 내 앞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오직 우리 둘만의 세계가 나의 마음인 것입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을 모든 행함[행동, 행위]의 기준으로 삼고 있으므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있다고도 표현되는 것입니다[요 [요 15:7].

솔로몬의 잠언, 아가서, 전도서 자체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이런 모든 것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성경에 전도서도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 관계를 상징하여 묘사하는 아가서도 함께 수록되어 있을 정도이지만, 솔로몬 자신이 마음 하나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여 [이상과 같은 결론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가서는 처첩으로 거느린 이방 여인들이 범죄의 함정이 되어 그들을 위해 우상을 만들어 주는 하나님 앞에서 대역(大逆)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가 회개했다는 말이 없으니 그가 어찌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가 그러면 멸망했는지, 멸망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조차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놓은 것만 기록했지 그가 이를 회개했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대로 읽힐 성경에서 그런 엄청난 죄를 지었다고 기록을 했으니 솔로몬의 비중으로 보아서도 그에 상응한 회개가 있으면 마땅히 그 사실이 지적되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없는 사실에 우리는 경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즉 그리스도께서 그 성령으로 계시는 정(正) 위치가 바로 우리 마음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든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동거(同居), 동역(同役), 동고동락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 자체가 무척 어색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 복음'의 특징입니다.

항상 이 점에 유의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 구원에 관련된 지식에 치중하거나 특정한 날에 특정 의식을 [가령 예배 집회에 참석하는 등의] 거행하는 그런 외형적인 것에 '믿음'의 의미를 둔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오류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하셨습니다[마 18:3/막 10:15]. "사람아, 주님께서 선한[좋은]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올바른 것)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同行]이 아니냐"[미 6:8] 하심과 같습니다.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상대의 모든 뜻을 자기 뜻으로 삼아 그대로 행하게 됩니다. 사랑은 그 사랑하는 상대를 늘 생각하고 잊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 그 외의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이상 이하의 의미도 없습니다. 있다면 그렇다고 분명히 밝히실 하나님이십니다. 절대로 애매 모호한 말씀으로써 인생들이 그 말씀을 따르고 복종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 점을 명심할 일입니다.

어린 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도, 어린 아이는 사랑을 가장 잘 체득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믿음[신뢰]이 가장 순수한 그런 연령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 엄마와의 불가분성을 가장 잘 인식하고 또한 향유하는 상태이니 곧 사랑 하나만은 최고 '전문가'입니다.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무작정 울음보가 터집니다. 왜냐면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자기 분신(分身)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까닭입니다. 즉 아이의 의식 세계에서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엄마 아빠인 것입니다. 더욱이 엄마 품속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와 같아야 함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새 창조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원천적인 새 창조의 일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완료되었으나 그 창조로써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구원하시는 일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일하지 않으면 주님도 일하실 수 없는 구조임을 뜻합니다. 고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일하고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먹는 양식”이라 하셨습니다[요 4:34].

먹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요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를 “세상에 보내신”[구원하심으로 즉 성령을 주심으로써] 뜻을 행하지 않고 그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하고 나를 위해 사는 것이 되어[고후 5:15] 이는 곧장 죄와 악으로 직결되니 생명에서 끊어짐은 당연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서 완전 이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롬 14:9/고후 5:15/갈 2:20].

우리가 구원됨은 하나님의 아들됨으로써의 구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막강한 권능과 위세와 영광에 휩싸여 지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기 때문이니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본분과 도리를 다함이 그 핵심 요건[아들 됨의]이 됨이니 왜냐면 당장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건져내는 것이 하나님[아버지]의 시급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 본분과 도리를 다하시는 뜻으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위해 십자가 죽으심을 당하셨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본을 따라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우리도 행해야 합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현재 우리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내심 받았던 그 동일한 모습을 취하기 위함입니다. 즉 고난 받는 육체이니 사람 구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골 1:24]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우리의 이 세상 목적이 살고자 함이 아니라 일하고자 함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왜냐면 산다면 하나님의 아들처럼 위풍당당 모든 영광과 권세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 이런 나약하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살아보아야 당연히 위신 손상이지 다른 결과로 나타날 리 없습니다. 체면 깎이는 일을 왜 스스로 자청해서 할 것입니까. 그러므로 현재 이 세상에서는 사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 그리고 이 사람 살리는 일을 한사코 방해하려 드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입니다.

화사하고 영롱 찬란한 삶의 낙을 누리는 평상복 차림이 아니라 때 묻은 작업복, 그리고 피 묻은 전투복을 걸친 우리의 현재 모습입니다. 일할 때 함께 일하지 않고 싸울 때 함께 싸우지 않는 구성원은 그 집단의 부적격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터이므로 자동적으로 탈락됩니다. 자동적으로 탈락되는 바탕 위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탈락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 스스로 선택해 버린 결과 위에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날인 서명하시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벌어들인 결말이므로 누구를 탓할 거리가 처음부터 못됩니다. “주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주 하나님을 돕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도와 강한 자를 치지 아니함이라’ 하신다”[삿 5:23] 함과 같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일하는 것이요 따라서 싸우는 것으로 표현되므로 일하지 않고 싸우지 않는 자는 구원 받은 자가 아니라는 논리로 이어지고 결론으로 맺어짐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기 전에 우리의 믿음의 진실성 여부가 이 세상이라는 시험대에서 가려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앞에서 지적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정당당하게 아주 확실하고 합리적이게 하나님의 모든 일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반드시 현재와 같이 이렇게 진행되어야지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대하는 이 자연계의 자연법칙과 같이 질서 정연하게 만물이 진척되고 있으니 여기서 낙오하거나 탈락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할 일입니다. 아름다운 완결 단계로 최종적으로 정착되기 위하여 모든 것이 이와 같이 현재 작동, 작업 중에 있습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생각해도 이지(理智)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됩니다. 그 어느 것 하나 비이성적이거나 불합리한 데나 비뚠 데가 없습니다.

정밀한 톱니바퀴처럼 모든 것이 서로 맞물려 잘도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악과 선이 혼재(混在)하고 생명과 죽음이 뒤섞인 그런 뒤죽박죽의 형국이지만 속 내용을 볼 때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필요 불가결한 것들로서 시계의 각 부분처럼 정밀하고 엄정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계의 자연법칙을 일상 접하는 것처럼, 각자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 짓는 이 인간 세계에도 분명 일정 법칙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삶의 쾌락을 영원히 누릴 것이지만 잠시 한 때 이 중차대한 시기에 고난 받고 약해져보기도 하고[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히 강하고 더불어 대적할 존재가 없으므로], 역경 중의 강인함도 입증해 보일 수 있는 실로 황금 같은 기회가 부여되어 지금 활용하고 즐기고[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회는 영원을 두고도 두 번 다시 오지 않고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오직 한 번의 기회입니다. 이런 막중한 의미의 기회를 부여해 주신데 대하여 마땅히 감사드릴 일입니다.

고로 인식 전환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시각을 돌려 각도를 바꾸어 보는 지혜입니다. 고정 관념을 타파해야 합니다. 정면으로 보면 팽이[top, 둥글고 짧은 나무 토막 한쪽 끝을 뾰족하게 깎아 만들어 채로 쳐서 돌리면 돌아가게 됨으로써 재미를 느끼게 되어 있는 어린애 장난감]를 거꾸로 엎어 놓은 것과 같은 밋밋한 뒷동산을 닮은 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몇 걸음 더 걷는 수고를 하여 측면으로 돌아가 이 산을 관람합니다.

그러면 한 마리의 범이 너른 들판에 넙죽 엎드려 있는 웅장하고 호쾌한 모습 곧 명실상부한 임호산(臨虎山)으로서의 시원스러운 자태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기존 시각[관점]만을 고집하여 둘러엎은 팽이 같다, 아니다 하고 혼자 용쓰지 말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측면까지 돌아 성경을 똑바로 읽고 제대로 감상할 일입니다. 따라서 항상 성경을 가까이할 일이니 멀지 않은 장래 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할 그런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는 성경을 외워두고 있는 이들이 한없이 부러울 것입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이야기

우리의 구원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구원이 된 까닭입니다. 이 하나 됨은 하나님으로서의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 되어 계심과 같은 이치를 따름입니다. 이 방법 외에는 실상 가장 이상적인 인간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와 같은 피조물 인간이 되시기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작정하신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인간 범죄를 사전에 예측하시고 그 대책을 이미 강구하고 계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여름 더운 날 걷잡을 수 없이 부패해가는 것처럼 악해져 가는 인생들을 보시고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는 대목이 성경에 있는 것을 보면, 그 미리 아심이 예상(豫想)에 그치는 것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조종하신다는 의미가 아님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상은 정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미리 택하심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면 하나님이시므로 우리 각 사람 개개인과 얼마든지 사람으로서 하나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이므로 항상 일 대 일로서 개별적이고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 개개인에게 그와 똑같은 의미로 계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육체인지라 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다른 모든 사람과는 함께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바로 그 한 사람에게만 그런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관계가 가능합니다. 고로 마치 내게만 관계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내게 그런 확실한 의미가 되십니다. 고로 나와 함께 사시면 내게만 오셔서 나와만 함께 사시는 그런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똑같은 의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니 이것이 사람이시면서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 사람되심의 특성입니다. 같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런 일이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도 다름없는 사람이시지만 그리스도께서만은 가능하신 일이니 사람이시지만 하나님으로서 유일한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되심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실에서 또한 입증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스스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살려 주심'으로써 다시 살아나신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살아나시면' 진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꾸미셨다고 누구나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로는' 다시 살아나실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한 사람’으로서 이미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일단 누구나 죽으면 그 죽음으로써 끝나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신 것이니 이는 아버지께서 살리셨기 때문으로 그것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해서 아버지 마음대로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 되면 이 역시 아들 친히 스스로 살아나시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다”[롬 8:32]는 의미가 퇴색됩니다. 즉 다시 살리신다면 죽게 하셨다는 뜻이 처음부터 모호하게 되어 버립니다. 인간의 죽음의 고통을 맛보게 하셨다는 의미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와 같은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모든 것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죽는 경우에는 영원히 죽어야 합니다. 다시 살아나는 법은 없습니다. 아들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서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것은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 되어 계신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 됨을 말합니다. 영으로서 하나되심입니다. ‘영적(靈的) 결합’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로 “한 영으로 연합하여”[고전 6:17] 있는 것이 나의 구원인데 바로 이 결합이 그러한 아버지와 아들께서 연합하여 계시는 이치를 따름입니다.

둘로서 엄연히 각자 독립해 계시면서도 그러나 ‘따로’가 아니라는 그런 의미의 ‘하나’입니다. 이런 독특한 하나 되심 때문에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이시기 때문에 아들이 아무리 죽으셔도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는 한 죽어 있으실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 역시 ‘둘이 하나 됨’의 대칭 관계에서 큰 것은 작은 것을 따르게 마련이라는 대소(大小), 주종(主從) 관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즉 아들은 아버지를 따르게 되어 있는 이치입니다. 죽으신 아들은 살아 계시는 아버지를 따라 다시 살아나실 수 있는 이치를 따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이 ‘하나 됨’은 우리 인류가 인식해 오는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새로운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 되심은 아버지 친히 아들의 죽음의 고통에 고스란히 그대로 함께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또한 드러냅니다. 하나가 아니시라면 아들의 죽음의 고통은 아들만이 당하시는 것이고 아들만이 아시는 것이 됩니다.

아버지는 단지 그 고통을 짐작만 할 뿐 아들께서 마신 그 죽음의 고통의 잔, 그 받으신 죽음의 고통의 세례를 똑같이 함께 당하시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이시기 때문에 똑같이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고통은 함께 하셨지만 죽음 자체와는 무관하니 왜냐면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독립된 개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하나 됨의 신비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아들 혼자만 죽으셨고 그 죽은 아들을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아들과 하나 되심을 인하여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이 바로 이와 같은 하나 됨이므로 내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고난은 고스란히 주님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여 성도(聖徒, 성인[聖人]이라는 뜻)들을 해칠 때 “네가 왜 내 교회를 핍박하느냐” 하시지 않고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그리스도와의 하나 관계가 어떤 것인지 그 자세한 설명이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아들께서 세상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서[주로 요한복음] 충분히 드러남으로써 우리가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 되는 이치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아버지께서는 우리 위해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즉 죽기로 작정된 희생 양(犧牲羊),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즉 아들께서는 원치도 않으시는데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하나 됨의 오묘함이 드러나는 것이니 곧 아버지의 뜻은 아들 자신의 뜻이 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일치가 되느냐 할 때 사랑 때문에 그렇다는 답을 하게 됩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하나 관계도 이와 똑같이 사랑 관계입니다. 그래서 아들 친히 자기 자신을 우리 위해 내어 주심 즉 몽땅 내게 선물로 주심 그리고 영원히 주시기로 작정하시게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사부재리의 원칙에서 영원하지 않은 것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하는 것 역시 같습니다. 다시 말해 내 뜻을 행하고 나 자신의 일을 하는 의미가 됩니다.

역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니 결국 이 하나 됨은 사랑으로 하나 됨을 말함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순종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아직도 구원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구원될 리 없습니다. 구원을 목표로 순종하려 하고 죄 짓지 않으려 하고[죄 짓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은 알므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구원되지 못한 증거를 드러냄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고 죄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은 순종하고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즉 구원과는 아무 상관 없이 해야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순종이 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되기 전의 일체의 선행을 위선이라 하는 것이고 따라서 구원 전의 순종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때문에 누구나 자기 행위로 구원 얻지 못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내어 주시는데, “내어 주신다”는 의미 그대로 그 때는 아버지와 아들께서 분리되시는 순간입니다. ‘죽음’에 임하는데 어찌 ‘살아 계시는’ 아버지와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으로 단 한번 홀로 되셔서 인간의 태(胎)를 통하셨고 그리하여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동정녀(童貞女) 탄생이 아무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니, 당연한 일입니다. 영이신 하나님 친히 인간의 태를 통해 인간 세상에 오시니 그래서 사람이 되신 사실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한 분처럼 인식되어졌으나, 이상 설명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간 구원을 설명하자니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하나님이심이 만천하에 드러나진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자녀 생산에서 여자의 역할은 인간 육체를 남자의 씨[자식]에게 제공한다는 데에 있다는 것임을 앞에서도 설명했습니다. 남자의 ‘씨’라는 것은 사람으로 생성되는 모든 기본 요소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핵심 요소인 영혼도 포함됩니다. 왜냐면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고 남자로서의 아담은 처음부터 여자 없이 창조되었던 존재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남자의 씨”라는 것은 애초 창조된 그 ‘인간’이 계속 대대로 물려진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에다 남성 우월주의니 하는 불필요한 곁다리 말을 붙일 일이 아닙니다. 여자는 결국 남자의 분신(分身)으로서 단지 대칭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요 자녀 생산에서는 남자와 역할 분담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일입니다.

남자의 씨를 받음으로 인간 영혼이 생성된다고 했지만, 이 영혼은 남자의 것이 아니고 여자의 것도 아니고 자주 독립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나오는 것입니다[창 2:7/히 12:9/사 57;16/슥 12:1]. 그래서 하나님을 “모든 영의 아버지”[히 12:9]시라 했습니다. 여자의 태가 남자의 씨를 받아들이면서 이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탄생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단지 남자의 씨를 받아 그 씨에게 육체만을 부여하여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여자가 육체를 부여한다는 것은 여자도 남자에게서 났으므로 실은 아담의 육체입니다. 아담이 만일 그 스스로 능력이 있어 애초에 여자를 만들었다면 자기 육체를 여자에게 물려 주는 것이 되고, 그렇게 해서 생성된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자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아닌 하나님 친히 그 일을 하셨기 때문에 여자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모든 동식물의 암, 수컷을 나누어 거의 동시에 한꺼번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먼저 수컷을 만드신 다음 그 수컷의 대칭 꼴로서 암컷을 만드셨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소위 "진화론"이라는 헛된 소리를 최종적으로 단 한 방으로 내리치는 철퇴인 것입니다. 왜냐면 진화는 장구한 세월을 요하고, 이 세월을 위해서는 자식[자녀] 생산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남녀[암수]가 동시에 나타나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수컷이 먼저 생겨나 그 대칭으로 똑같은 암컷이 생겨나야 하고, 이렇게 똑같은 것들이 암수로만 구별되어 나타나는 것은 후대(後代) 증식을 목적하는 사전(事前) 고안, 기획을 말함이니, 이와 같은 사전 설계의 이지적인 주체를 가리켜 창조신 하나님이시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네피림[nephilim-창 6:4]”이라는 것은 악령들이 인간 여자들 앞에 사람[남자]으로 변신하여 나타나 관계함으로써 낳은 자식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영물(靈物)들이라 워낙 능력이 있으므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아닌 남자로 변신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자기 씨를 퍼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설명대로 여자는 단지 남자의 씨를 받아 그 씨에 육체를 부여함으로써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주는 역할임을 이런 사실에서도 확인하게 됩니다.

즉 그들 “네피림” 역시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사람인 것은 분명하나 그 속의 영혼 즉 그 정체(正體)는 악령의 분신이니 악령의 속성 그대로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네피림이 인간 여자에게서 났다고 해서 아담의 속성을 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영물은 그 자체가 우리 인간으로 치면 영혼 격입니다. 그래서 "영(靈)"[히 1:14]이라 합니다. 단지 그런 영이 일정 형체를 구비했다는 그 차이뿐입니다. 그러므로 "영"이라는 말도 육체인 우리 인간을 기준해서 나타내는 표현일 뿐입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춘다는 점에서는 육체인 우리 인간이나 영인 영물들이나 일반입니다. 단지 인간은 자연계에 속한 생물체의 완성품으로서 그 정점(頂點)을 이루었고 그런 다음 이런 인간[아담]의 육체에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이를 시발점(始發點)으로 해서 영계의 생명체인 영물들이 창조된 것이니, 말하자면 인간은 자연계와 영계를 통틀어 하나님을 대리하는 주인 격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네피림이 악령들의 분신이라는 것은, 자식에게 인간 육체를 부여해 주는 역할의 여자도 남자[아담]에게서 나 남자[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았으나 그 영혼[여자]은 아담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것으로서 그 고유의 독립성을 지녔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즉 네피림의 경우 악령의 속성을 물려받음으로써 악령의 씨가 되어 있고 이 자체가 그 영혼이 되어 있는데 여기에다 인간 여자[모친]가 인간 육체를 입혀 주니 그래서 태어난 것이 사람이라는 것뿐입니다.

식물[양성 생식의 경우]도 동물도 수컷의 씨를 받아 암컷이 자기 품종을 재생산하는 형태입니다. 이는 수컷으로부터 암컷이 나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생기게 된 원래의 모습[암컷이 생김으로써 현재는 수컷이 되어 있는]의 품종을 대 물림하는 의미밖에 없습니다. 암컷도 대칭 원리에 의해 수컷의 분신이므로 이는 당연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난 것이 있어 이를 본으로 해서 나중에 나오는 것이 그 대칭형이니, 이래서 수컷과 암컷이 구별되어 후대[후손] 생산이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아담]이든 동식물의 수컷이든 가장 먼저 최초로 생긴 그 자기 종류를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이 모두 하나님 친히 아버지와 아들 둘이서 하나로 존재하시는[아버지께서 아들을 만드심 즉 낳으심으로써] 모습을 따라 모든 피조물을 만드심에서 삼위일체의 원리가 형성되고 확립되어 있음을 앞에서도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이런 원리로 되어 있는 만물이 하나님의 제조표[make mark]처럼 되어 있는 이런 증거 등으로 인해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를 안다"[롬 1:20] 하고 만물이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간은 세 종류입니다. 아담의 씨를 받아 태어난 사람, 악령의 씨를 받아 난 사람 그리고 성령[하나님의 아들] 친히 인간의 태(胎)를 거쳐 세상에 임하신 유일하신 사람 예수 그리스도. 당연히 네피림[複數를 의미]은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육체로서 죽어도 그들의 근본인 악령들처럼 되어 이 지상을 떠돌아다닐 뿐입니다. 성경에도 나오는 각종 귀신들이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네피림 역시 인간이므로 자식들을 생산하는 그 번식력은 아담의 씨 이상으로 왕성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생기기 시작하는 인간 족속들은 이제는 아담의 씨와 뒤섞이기 때문에 유전학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바로서, 이 말을 하는 것은 부친이 아담 계열이고 모친이 네피림일 때 또는 모친이 아담의 씨이고 부친이 네피림일 때 거기서 생산되는 자녀들은 모두가 네피림은 아니고 일부만 네피림일 수도 있다 함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네피림인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되어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그렇게 식별해 보는 식견도 허용되어 있지 않습니다. 노아 대홍수 이전에 네피림이 생겨났는데 홍수 이후에도 그런 작태가 벌어졌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성경에 있고 또 이들 귀신들은 그렇게 방황하다가 그들 나름의 일정 규칙을 따라 스스로 인간의 태에 들어와 때로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장차 나타날 적 그리스도가 그런 예입니다[계 17:8].

악령들이 그 스스로 인간으로 변신하여 자기 씨들을 퍼뜨리는 판이니 그런 일을 하는 것도 이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소위 “환생(還生)”이라 할 수 있고 그래서 “전생(前生)”이니 “윤회(輪廻)”니 하는 따위의 말이 생기기도 하는데,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네피림의 장난질일 뿐 아담의 씨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예외적인 사항을 두고 마치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 같이 선전하는 것은 이 세상 신(神) 악령의 속임수입니다.

아무쪼록 인생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악마, 악령,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계략일 뿐입니다. 악령들이 네피림을 만들어 낸 이유는 인간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욕심을 채우려는 것도 있지만, 자기 씨를 통해 자기 세력을 인간 세계에 부식시켜 확장시킴으로써 세상에서의 절대 우위(優位)를 점하게 하고 그 다수(多數) 논리로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인생들로 하여금 구원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보다 고차원적인 획책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추정컨대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은 확실히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삼 강조하거니와 네피림과 아담의 씨를 간파하는 것은 우리 중 그 어느 누구에게도 허용되어 있지 않습니다. 비록 죽고 나서 그 죽은 이의 귀신이라 하여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이 네피림의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얼마든지 모든 수단을 통해 속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미리부터 이를 경고하여, 사무엘 선지자의 귀신[죽은 혼백]이라고 하여 나타난 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삼상 28:13]. 사무엘이 네피림일 리 없습니다. 그리고 그 혼이 귀신 들린 여인[점쟁이]이 건드릴 수 있는 그런 존재일 리도 없습니다. 그 증거로 성경은 “신들[gods, 엘로힘, 우리말 번역은 단수로 번역되어 부정확하나]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고 점쟁이가 사울왕에게 보고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복수일 리 없습니다. 사무엘의 영혼인 것처럼 위장한 귀신이 하나가 아닌 여럿이고 서로 합동해서 꾸미는 수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물들이 어떻게 해서 인간 육체로 스스로를 변환시켜 자식들까지 낳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선악과 나무가 어떻게 해서 신령한 몸이 된 아담의 육체를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생명과 나무가 어떻게 해서 이미 선악과를 먹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어 버린 아담의 육체를 다시 신령한 몸으로 되돌려 영원히 살게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생명체가 아닌 영계에 속한 생물들처럼 영원히 존재하게 할 수 있느냐 하고 묻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전적으로 영계에 속한 일입니다.

식물이 그 정도의 능력을 보유하였으니 보다 나은 차원에서의 동물[영물]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게 되면 그제야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어 있으나, 현재로서는 알 필요도 없고 또 알 수 있는 능력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이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의 한정성입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알고자 하는 것도 무리한 일로서, 무릇 무리한 일을 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고 악[자기중심]에 치우칠 뿐입니다. 이것을 모른다고 해서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또 안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더 촉발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위해 우리 각자와 하나 되실 목적으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빼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도 항상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 곧 사람)라는 단어로 당신 자신을 표현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해서 30세 가량 되시던 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기 전까지는 아버지 하나님과 분리되신 채 계셨습니다.

세례 받으실 때 즉 성령께서 임하신 바로 그 때부터 이전처럼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신 것입니다. 이 때의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십니다. “성령(聖靈, the Holy Spirit)”이란 말 그대로 “거룩하신 영”이시므로 아버지께도 해당되고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께도 해당되고 그리고 “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나타날 때도 적용되는 등 두루 쓰이는 “이름”[마 28:19]이십니다. “이름”이기는 하나 고유명사는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임하여 오심으로써 그 후로는 다시는 분리되심이 없이 영원히 하나로 계십니다. 그러니 분리되신 일은 그 때 꼭 한번 우리 위해 친히 버리심 받은[아버지께서 아들을 내어 주셨으므로] 모습의 “하나님의 어린 양”, 희생 양으로서의 상태이셨습니다. 그러면 다시 아버지와 하나 되셨으므로 희생 양으로서의 의미는 끝났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그 남으신 고난이 있음을 밝히고 있고[골 1:24] 그 몸된 교회를 통해 마저 채워지고 있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 위한 희생 양으로서의 죽으심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함께 하시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친히 함께 당하시는 죽음의 고통이시므로 그렇습니다. 원래는 아버지 친히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그 아들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게 되기를 희망하셨고 아들께서도 순종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같은 마음이신지라 친히 우리 각 사람과 하나되시려고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와 하나되시는 것이지 불복종하는 자와 하나되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 한해서 성령을 주시고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 함입니다[행 5:32/히 5:8][롬 1:56:16/16:26/요 3:36/히 4:11/벧전 1:2], 따라서 여기에서도 우리 "구원 얻는 믿음"의 속성과 본질을 알게 됩니다. 즉 순종입니다. 그리고 성령[아버지의 영]이 임하시기 전의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는 우리 각자의 성령[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아버지와 하나 되시는 모습으로서의 하나님의 영] 받기 전의 상태를 나타내[상징해] 보임입니다.

즉 우리의 버림 받은 상태, 생명에서 분리된 상태, 산 자가 아닌 죽은 자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킴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개개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모두 총괄하여 대표적으로 나타내셨으니 명실상부하게 우리 각자와 하나되심을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성령 받으시기 전에는 단지 목수의 아들로서 목수의 일을 하시는 다시 말해 우리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시지 못하는 그런 모양새로 계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세례를 받으신 것도 우리와 하나 됨 즉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지심을 나타내시는 의미였습니다. 성령 받으신 것도 우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 받으신 후 본격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시고 죽음에로 나아가시는 길을 걸으시며 우리 위한 생명의 역사(役事)를 하신 것이니 우리가 바로 그러합니다. 우리가 받는 성령도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실제로 이룸이니 이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 됨으로 복귀하시는 의미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문자 그대로 하나 되고 그 하나 됨이 현실화, 구체화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친히 성령을 받으심으로써 곧장 하나님의 일을 하시게 됨과 같이[요 5:17] 우리 역시 성령을 받은[구원] 즉시 세상에 보내심 받아[20:21,22] 하나님과 함께 일하게[고후 6:1] 되는 것입니다. 성령 받으심으로 그 때부터 비로소 아버지의 일을 하심 같이 우리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일을 시작하게 되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고후 5:15]됩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심으로 아버지와 다시 하나를 이루심으로 그 받으시는 죽음의 고통이 아버지와 함께 당하시는 것이 됨과 같이 내가 당하는 모든 고통이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받는 고난을 통해 그 남으신 고난을 마저 채우는 일을 하시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내가 성령 받음을 통해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 장사 지내짐[우리 식으로 하면 완전히 흙으로 끌어 묻힘]이 나의 장사 지내지는 것이 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당연히 그 부활이 나의 부활, 그 승천(昇天)이 내가 바로 그와 같이 하늘로 올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음이 되고 50일 후 성령 강림 때 성령으로 임하여 다시 오심으로써 각자 위에[안에] 계시게 됨은 내가 바로 그와 같이 하늘로부터 세상에 임하여 보내심을 받아 있는 것과 하나도 다름없는 동일한 의미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내심을 받음으로써 부여된 임무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의 계승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시기 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신 그 절규와, 본질은 같지 않지만 형식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동참하여 내 몸에 채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그 때 당시 아들께서 당하시던 죽음의 고난에 동참하셔서 그 모든 것을 맛보심과 같이 그리스도 친히 현재 내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 함께 하십니다. 나와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머리께서 당하신 것은 몸이 의당히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이요 몸이 당하고 있는 것은 머리께서 자연스럽게 함께 당하시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신체의 일부만 다치고 아파도 그 아픔이 몸 전체에 파급되는 바로 그 이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 곧 우리 위해 죽음을 맛보시는 그 일에 아들 친히 자기의 일로서 함께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사람 살리시는 일에 동참하여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일로서 수고하는 것이니 곧 사람 구원해내는 일입니다. 이래서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은 우리를 위하심이요, 우리의 고난 받음은 "그리스도를 위한"[빌1:29]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다고 해서 우리의 '위하심을 받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모든 하시는 일이 실제는 모두 우리를 위하시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위해 죽음의 고통을 친히 당하시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자기 몸을 그 고난 받는 몸으로[친히 사람되심으로써] 아들 친히 제공해 드리신 것과 같이, 우리는 우리 몸을 그리스도 친히 그 남은 고난 채우시는 일에 동참하여 제공해 드리는 바로 그런 의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입니다.

성경에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고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교제, 사귐, 함께 함]을 알려고 하여 그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3:10,11] 한 것이 그 뜻입니다. 왜냐면 억지로 하나님께서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요 내 스스로 하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내 스스로 죽으려고 하고 고난 받으려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부활의 영광에 이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인 것입니다.

그런 고난 없이 부활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렇게 고난 받음으로써 부활에 이르고자 함이니, 그 고난 받음이 내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즉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함이 되어 부득불 하지 않으면 안되는 강제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내 스스로 좋아서 다시 말해 내가 사랑하는 주님과 하나 됨을 인하여 내 스스로 주님 위해 받는 고난이요 이웃 살리기 위한 것이므로 그러합니다.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므로 “그의 죽으심을 본받으려 한다”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 사실에서도 보듯이 이 세상은 죽음과 고난, 고통 그리고 저주의 질서 이외에는 없습니다. 생명의 질서, 삶의 낙의 질서가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절규만이 메아리 쳐야 마땅한 그런 장소, 그런 때입니다. 정상적으로 현 상태를 바로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절규밖에 없는 이 현실을 외면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처럼 그런 절규요,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비명입니다. 

죄를 미워하면서도 짓는 것과 그런 것 없이 짓는 것 즉 불의를 좋아해서 짓는 것은 다릅니다. 미워하면서도 지을 때는 불가항력의 그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니 성경은 이를 가리켜 “죄의 몸”[롬 6:6]이라 했습니다. "육신"[7:14-8:13]이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원수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멸해진 것입니다[6:6]. 고로 더 이상 미워하는 원수에게 매여 있을 필요가 없고 자유인이 되어 있으니 미워하는 죄를 다시는 짓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고후 5:15] 된 것입니다. 나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요 나 자신을 위해 살 필요가 없게 된 것은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는 위치에 영구적으로 정착해 계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죄 짓기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문제가 다릅니다. 구원 받게 되는 것을 막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같은 죄인이라도 죄 짓기를 미워하는 자들을 구원하심이지, 죄 짓기 좋아하는 즉 불의를 좋아하는 자는 모두가 심판의 대상입니다[살후 2:12].

죄, 불의, 불법의 대표적인 것이 거짓말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는 악령이 인간[아담]을 죽음 가운데 몰아넣은 것도 이 거짓말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이 악령의 특징을 가리켜 성경은 “온 세상을 속이는 자”[게 12:9]라 했습니다. 그런 성경이 가히 거짓말을 지어내어 만들고 속이는 일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 판단할 일입니다. 세상이 다 거짓말을 한다 해도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만은 홀로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말은 원래 약한 자가 쓰는 수법입니다.

강자라고 하면 구질구질하게 거짓말을 지어낼 필요도 없이 처음부터 한 주먹으로 때려 눕혀 강압해 버리면 그뿐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그런 거짓말이라는 술수를 쓰는 것입니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처음부터 인간을 속이려 든 것은 인간[아담]이 그들 영물들 위에 군림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권위를 지녔으니 하나님의 대리자 격이라 이런 지위가 지니는 의미는 대단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강자이니, 그 아래 약자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거짓말로써 속이는 방편을 취한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되어 있는 지금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육체에 불과한 인간에 비하면 훨씬 강자인데 여전히 “세상을 속인다”[계 12:9]고 하느냐 하겠으나, 원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그리고 이 세상이 아직 존속하고 있는 것도 인간 구원이 그 목적인즉 아무리 현재 인간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아래 노예화되어 있다 하나, 이상 설명한 두 가지 의미가 반반으로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즉 거룩한 천사들에게는 여전히 인간은 아담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구원 얻을 하나님의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히 1:14]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해서 악령들은 감히 인간을 어찌하지 못합니다. 오직 허용된 범위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오늘과 같은 이런 현실입니다. 그래서 속이는 일을 합니다.

인간[아담]의 범죄도 전적으로 사탄 탓이라기보다 인간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의한 범법행위인 것입니다. 세상은 원래 거짓말의 아비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주관하는지라 얼마든지 거짓말, 속임수 일색(一色)일 수 있습니다. 그런 거짓말이 속성인 세상이니만큼 성경을 “거짓말이다, 믿을 것이 못된다, 진실일 수 없다” 할 때는 당연히 그것은 그 자체가 거짓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입니다.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는 말처럼 대개 그 자신이 믿지 못할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남도 믿지 못합니다. 성경은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합니다. 비단 성경만 아니라 진실된 것은 사물이든 사람이든 으레 그 자체 증명이 숨길 수 없는 큰 특징이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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