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5일 토요일

(19)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


화(禍)와 복(福)

주님께서는 산상 보훈을 말씀하시면서 8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화 있는 사람과 복이 있는 사람으로 구분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복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복 받는 요건은 우리의 구원의 요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복 받을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화 받을 일은 하지 않아야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이 죄를 지어야 되느냐 지어서는 안되느냐 하는 것도 여기서도 드러난다 하겠습니다.

이 복 받는 일 중에, 옳은 일[의]을 위하여 세상에서 핍박 받고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음란하고[바르고 떳떳한 도리에서 벗어난] 죄 많은” 세상이라 규정하셨습니다[막 8:38]. 주님 오실 때까지는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써 세상을 교화하신다거나 강제로 이 세상을 정의로운 세상으로 만든다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신 줄 알면 그 말씀을 믿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 즉 순종만을 각자에게 명령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믿지 않기 때문에 버려 두시는 것이고 그리고 이 믿는 일이 억지로 강제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 자유 의지로써 되는 일이므로 그러합니다. 이런 기준대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니까 그리고 올바른 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로부터 적고 많지 않다고 하셨으니까 우리는 단지 그런 줄 알고, 또 현재 우리가 보기에도 그러하고 역사적 증거로도 사실상 그런 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일은 언제든지 어느 시대에서나 있을 수 있고,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이들은 주님도 장차 세상에 오실 때 부끄러워하실 것이라 경고하신 것입니다[막 8:38]. 죄 많고 음란한 세상이니 당연히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대세를 이루는 세상이므로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이들을 핍박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고난의 대상이 되니 "부끄러워할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여 걸러낼 사람은 걸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인하여 핍박 받을 때에는 기뻐하고 아이들처럼 껑충껑충 뛰놀라 하셨고[눅 6:23], 의를 위해 그와 같이 핍박 받는 자는 천국을 차지한다 하셨습니다[마 5:10].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을 억지로 길들이는 데에 있지 않고, 오직 각자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모든 일을 행하기를 바라시고 그런 개개인들을 찾으시고 보살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만 믿게 하시는 것이 아니니, 왜냐면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즉 성령을 받아 모시기 전에는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오직 죄인이었던 까닭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런 순종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렇게 믿음으로써 올바르게 행하게 되는’ 이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데에는 당연히 각자의 의지가 필수입니다.

그렇게 행하고자 결심을 해야 가능합니다. 아무리 가능한 일이라도 스스로 즐겨서 하지 않는 한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에 감동되어 이러한 결심을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 없이는 세례를 받을 수 없고, 세례 받아 죄 용서되지 않고는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하고 시인하는[이것을 많은 사람들은 “믿는” 것이라고 주장하나 천부당 만부당의 소리입니다]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에게 그래서 올바르게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향후 살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와 같이 인간 양식(良識)과 상식[이 양식과 상식은 하나님 주신 것이고 하나님 주셨다는 말은 바로 그렇게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명백히 하는 것입니다]에 맞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죄를 지어도 즉 여전히 죄인이면서도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하심[“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된다고 하는 미신 가운데 절대 다수가 빠져 있는 것이 오늘날 개탄할 현실입니다.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은 옳은 일을 하기 때문에 옳다고 하는 것이지 죄인이고 못된 일만 골라 하는 등의 살인자나 강도 질을 하는 사람들을 어느 누가 올바른 사람이라 할 것입니까.

사람이 그러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큰 것만 죄고 작은 것은 죄가 아니라는 말도 성경에는 있을 수 없으니 하나님은 각 사람의 마음을 보십니다.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마음일 때, 산 중에 혼자 독거(獨居)해도 그는 죄인이요 죽음[멸망]의 운명입니다. 영원토록 그렇게 혼자 살 수는 없는 일이요 여럿과 뒤섞여 살게 될 때에는 그런 자기중심으로는 반드시 이웃에게 해와 악을 가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상식과 양식에 어긋나는 일이건만 이를 태연히 믿기 때문에 미신(迷信)이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도 진리의 측면에서 보면 미신입니다. 그릇된 즉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하여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올바르지 못한 것이냐 하면, 한 몸으로 사는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이 나쁘고(惡) 옳지 못한(不義, 不法) 것인데 이 정도까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나, 그렇게 행하는 방법론에서 가장 먼저 왜 이와 같이 죄가 오고 죽음이 왔는지 그 사유를 설명하는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음으로써 그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와 악의 뿌리는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 말씀에 불복하는 데에 있습니다. 머리를 인정하지 않는데 한 몸으로 결성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제각기 자기 멋대로 하고 스스로 머리되려는 북새통에서 반드시 이웃과 화합할 수 없어 상호 쟁투를 일삼다가 결국 함께 망하는 것이기에 불의, 불법, 죄와 악이라고 규정 짓습니다. 이런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으로서의 공동체 의식과 반대되는 것이 이기주의(利己主義)입니다.

누구나 이 이기주의를 매도하고 질타합니다. 죄를 짓는 것 곧 죄인은 이런 이기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차이는, 사람은 겉모양만 보고 따지나, 하나님은 그 마음, 그 밑 뿌리를 말씀하시고 지적하시는 데에 있습니다. 그 뿌리를 뽑지 않고는 같은 자리에 계속하여 뿌리 내려 번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단지 미봉책으로 만족하나 하나님 앞에서는 근절(根絶)만이 통하므로 새 창조, 다시 출생하는 것만이 해결책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 각자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펼쳐집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의미입니다. '개성(個性)'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고유한 자주 독립성입니다. 인간만 아니라 영물들을 포함해서 무릇 영적 존재는 그러합니다. 이것은 자기중심과는 별개입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한 손가락도 간섭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서부터 이미 그러함을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천국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의 죽음은 이 자연계에서의 삶이 종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있어 영원히 존재하는 인간으로 말하면 이 자연계에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데 이는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이고 따라서 자연법칙을 초월하자는 것이므로 그래서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별도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니 영계입니다. 천국은 당연히 이 영계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즉 새 창조는 이 영계에 속한 존재로 다시 출생함에 있습니다.

과거 즉 첫 창조에서는 아담이 자연계에 속한 존재로 있다가 영계에 들어가 신령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하여 거기 에덴낙원에서 자식들을 낳아보기도 전에 범죄하여 자연계로 추방됨에 이르러 그로부터 아담에게서 출생하는 모든 인간은 자연계에 속한 존재로 태어난 것인즉 이제 영계에 속한 존재로 다시 출생해야 하는 것이고 그 일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성령 받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그와 같이 위치해 있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비록 사람이 되셨으나 아버지와 하나 되심을 인해 여전히 하나님으로 계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는 비록 이 땅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현재 머물러 있으나 동시에 신령한 몸으로 하늘에 있는 당당한 모습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나고” “다시 난[to be born again]” 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현재 이 세상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는 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요 20:21,22].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인간의 몸 곧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태어나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왜냐면 아직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것이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나와 함께 계심으로써 나와 함께 일하시는 것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서 그 성령으로 아들 안에 계셔 아들과 함께 일하셨음과 역시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생명이신 하나님과 동일시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멸망할 염려가 없다고 생각함은 착각입니다. 기계적인 하나가 아니라 인격적 교류[사귐, 교제]의 하나됨이므로 마음의 문제이고 그리고 이 세상이 시험하는 자의 활동 무대이기 때문에 이 마음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변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 달려 있는 까닭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아담의 경우와 같이 시험하여 죽음[이제는 멸망]에 빠뜨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 또는 새 창조가 하나님의 아들되는 방법을 통하셨는데 즉 우리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하여 오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영물로서 창조되었으나 거룩한 천사들처럼 되지 못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이 그 스스로 범죄하여 멸망의 운명에 처해진 것이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른 것이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되었음에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아 자기중심으로 나가 범죄하면 죽음에 이르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니 즉 우리로서는 멸망이니, 이제 "죽음"의 의미는 아담과 달라 멸망인 것입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믿음에서 떠나 나 자신을 위해 살도록 만드는 시험을 받아[이미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밝혀진 대로]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히 3:12] 믿음을 버릴 수 있으니[딤전 6:21/5:8/4:1/1:19/5:12/딤후 3:8/계 2:13/2:4]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되”[빌 2:12], 구원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즉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로 창조하셨으므로 내 스스로[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스스로, 아담 스스로 그런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했으나 그렇지 못함으로 죽음에 이른 것과 같이] 아담처럼 되지 않도록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처럼 되지 않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내 스스로 범죄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과, 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이룬다거나 구원을 잃어버릴까 싶어 전전긍긍한다거나 하는 것과는 근본적 차이가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를 보고 초대교회 당시 “온 교회가 크게 두려워했는데”[행 5:11] 그러면 당시 교회가 시종일관 이 두려움 가운데에서 두려워 떨고만 있었던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나 사랑하여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 1:8]고 베드로가 거침없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면서도 역시 같은 편지에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는”[고전 10:12] 것입니다.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무리 완성되어 있어도 내 스스로 믿지 않으면 그 구원이 아무 소용이 없는 그런 차원입니다. 다시 말해 계속하여 그 믿음을 변치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순종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말함이니 바로 이를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것이 우리의 구원이기[요 20:21,22] 때문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주었으니 산 자의 일을 함입니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일을 여전히 한다면 살려 준 보람도 의미도 없어지는 것이니 그런 경우 구원 받았다며 살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살아 움직여야 산 자가 되었다는 증명이니, 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은 기계적인 생명체가 아니라 영적 존재 즉 영원히 존재하고 자기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인간에게는 다름아닌 ‘순종’을 의미한다는 그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 아무리 살아 움직여도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었음은 순종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을 할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순종해서 영생에 들어가면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할 수가 없었으니, 순종은 자기 부인이라야 가능한데 자기 부인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죽기를 무서워하여”[히 2:15] 무턱대고 살려고 하는 마당이라 무조건 자기를 위하게 되므로 자기 부인은 처음부터 불가능이었습니다. 자기 구원을 위하는 마음, 영생하겠다는 욕구뿐이었습니다.

순종을 한다고 해도 자기 구원이 우선 목적이니 순종일 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결과로서의 일색(一色)이니, 죄만 짓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이런 면에서도 자기 부인이 불가능하고 순종 역시 그러했습니다. 순종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순종의 의미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소, 주종 관계로 이루어진 대칭 관계에서 작은 자가 큰 자를 위하는 것을 ‘순종’이라 합니다.

이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위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작은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어서 그 대신 큰 자를 위함이니 곧 자기를 위해 주는 큰 자를 위함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순종의 근본 의미이고 본질이고 따라서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순종일 수 없습니다.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이니 고로 순종은 항상 자기 부인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에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되어 있는 생명의 원리, 사랑의 원리에서 되어집니다. 처음부터의 순종도 그러하고 현재의 순종도 그러합니다. 이 순종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거부했기 때문에 범죄한 것이고 아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위하시는 분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필요가 없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원래부터 그러합니다.

그런데 방정맞게 자기 자신을 위하고자 한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교만이요 범죄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신뢰하지] 않거나 자기 욕심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믿어[신뢰, 신용] 주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무시, 모독이 됩니다. 하물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관해서리요.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 11:6] 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병을 고쳐 주셔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항상 하셨습니다. 왜냐면 믿음 없이는 하나님의 능력도 내게 적용이 되지 않으니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막 6:5,6].

구원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니 다시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나 혼자 무엇이든 행하는 것이 아니니 나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함께 둘이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둘이 하나 됨에는 절대로 그 어느 쪽이든 자기 자신을 위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다면 그것은 제각기 홀로 독립해 있는 둘이지 하나가 아닙니다. 둘이 하나가 될 때는 피차가 그 상대에 대하여 종속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고전 7:4].

즉 상대는 주인으로 자기는 그 종으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피차가 그러합니다. 따라서 내 스스로 나의 주인이 아니라 상대가 나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름도 주님께서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 그리고 나는 그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 스스로 나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의 삶을 살아 주는 것입니다. 작은 자로서는 큰 자가 자기 삶을 살아 주니까 그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면 자기보다 상대가 크니까 자기 자신보다 더 잘 자기를 위해 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 되어 있는 관계가 바로 그러합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완벽하게 나를 아시니 나를 위하심도 나보다 당연히 완벽하십니다. 그리고 둘이 하나 됨은 이렇게 피차간 상대를 위하는 터이므로 갑은 을이 되고 을은 갑이 되어 있으니 둘은 항상 불가분입니다. 불가분이므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의 핵심이 나의 절대적인 순종에 있음이 자명해집니다. 죄는 불복종입니다. 따라서 우리 구원 얻은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없고 죄를 짓지 않는다고 성경이 누차 강조하는 것도[요일 2:1/3:6-10/5:18/고전 15:34] 그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바울은 우리의 “죄의 몸의 멸해졌으므로 죄에게 다시는 종 노릇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롬 6:6]. 베드로는 “육체에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다”[벧전 4:1]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무장(武裝)하라” 했고 이를 다시 명백히 설명하여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2] 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 여기서의 영적 ‘무장’입니다. 죽었으니 자기 자신을 위할 그 자기기 무덤 속에 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의에게 복종함입니다. 당연히 할 것을 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니 머리되신 주님의 지시대로 내 이웃을 위하게 됩니다. 이웃을 위하니 이 곧 선을 행함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뜻은 이상 설명과 같이 올바르고 선하기[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모든 편지에서 죄를 짓는 것을 강력히 경고하고 “참고 선을 행함으로써 영생에 이른다”[롬 2:7]고 했습니다[롬 2:7].

이 모두 우리가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을 밝히는 중요 대목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해서 곧장 신령한 몸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어야 그렇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은 우리의 순종 여부가 다루어지고 그 결과에 따라 비로소 나타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도 영생은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요일 2:25/약 1:12/2:5]. 쌍방 간의 약속 이행이 생명입니다. 즉 우리로서는 순종이 그 생명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원은 이와 같이 ‘한 사람’을 내게 선물로 주심입니다. ‘또 하나의 나’, ‘제2의 나’로서의 의미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영원하신 선물로서 명실상부하게 나의 영원하신 ‘짝’이 되십니다.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이신지라 육체가 필요 없이 영으로서 온전하시기 때문에 이는 바꾸어 말하면 육체로서 나와 함께 계시지 않지만 육체로서 나와 현재 함께 계심과 똑같은 의미입니다.즉 하나님으로서 사람으로 내게 계심입니다.

또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으로 나와 함께 지금 사십니다. 이는 어느 쪽으로든 앞의 설명처럼 육체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시지 않지만 육체로 계심과 똑같은 의미라는 뜻입니다. 오직 내가 다른 사람을 인지하는 것과 같이 나의 오관으로 인지하지 못한다[현재로는]는 차이뿐입니다. 그렇다고 육체 없이 영으로 계신다는 뜻이 아니니 사람은 원래 육체를 떠나서는 영 홀로 활동하거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니 하나님은 그렇게 편법을 통하시지 않고 철두철미 원리원칙주의이십니다. 고로 내게 사람으로 임하시되 완전한 사람[영혼과 육체가 불가분인]으로 계시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완전한 사람으로 계심이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하게 사람이시고 동시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만 알면 됩니다.

‘이런 사람’으로서는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그러하시니 유일하게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것이고 관습에 젖어 고집스럽게 보통 사람과 같이 인식하려 들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유일한 예외적 사항으로 인식하면 됩니다. 때문에 멀리 하늘에 계시는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 앞에 계시는 주님께 마음으로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습니다[엡 5:19-“making melodies in your hearts to the Lord”]. 이는 가장 가까운 눈앞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사랑의 일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우리의 삶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이 세상 살지 않는 것으로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위해 고난 받아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심이었음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마땅히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움으로써 그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즉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시고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하신 것처럼 다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원래부터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살기 위해서가 아닌 것인데 우리는 이제 진리를 앎으로써 그 정상 위치에 되돌아 와 있는 것뿐입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일부러 살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해서가 아닙니다. 본시부터 이 세상에서는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세계에서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 사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우리가 영생하는 자로 다시 출생했고 새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다만 여기서 일하는 것이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그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 증거는 인생들이 갓나서도 죽고 10, 20대에 죽어 나가는 것으로써 명백히 드러나 입증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면 그 죽음의 전말(顚末) , 경위를 이제는 상세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를 더욱 강조하여 "천국을 위해 고자(鼓子, eunuch)가 되는 자도 있으니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시버시 맞잡아 즐겨 산다"는 노래 가사도 있듯이 남녀 짝을 이루어 아들딸 낳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지, 혼자라면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 생활 수준으로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딤전 6:8] 그런 처지에서 무슨 산다고 할 낙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 나와 같이 혼자 지내는 것이 복이 있다고 극력 권장한 것입니다. 과거 도둑질하는 자도 다시 도둑질하지 않고 돌이켜 선한 직업을 가져 열심히 제 손으로 수고하지만 오직 그 목적은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함인데[엡 4:28] 여기에 무슨 삶의 낙이 있다기에 산다고 할 것입니까.

말 그대로 구제하기 위해 일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남을 위함으로써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여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함으로써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는"[고전 10:33] 바로 이 일을 위함인 것입니다.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려는" 목적, 이것이 내가 구원 받은 목적이요 그래서 우리 구원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4:34] 것이라 하는 것이고 이것이 "나의 먹을 양식"[:34]이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요 20:22].

사람 삶만 아니라 무릇 피조물의 최대 행복을 보장하는 삶은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하나됨에 있으니 이 하나됨이 사랑을 가리킴인지라 사랑이 삶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관계에서 몸은 머리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 생명의 생명선입니다. 따라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된 우리로서 머리의 지시에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을 가리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20:21,22].

우리가 보내심을 받은 의미가 과연 무엇이냐,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막 16:15] 것이니, 곧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행 1:8]이라 하심과 같습니다. 즉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여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함으로써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는"[고전 10:33]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런 말을 하면서 "나와 같이"라고 분명히 명시하였으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생명 아니면 죽음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아니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이요""그리스도와 함께 모으지 않으면 헤치는" 것입니다[눅 11:23].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勸戒, 타일러 훈계함)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安慰, 마음을 위로함)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며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 곧 모든 일에 감사하고 성령을 소멸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살전 5:14-22] 한 것입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모든 명령은 말하나 아니하나 하라고 하나 아니하나 반드시 하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잊지 않도록 일깨워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게 되어 있는 것을 하지 않을 때에는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처벌되는 것이라기보다 그러한 상태 즉 구원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므로 인식을 새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각 순종하는 것이 있을 따름이고 이를 지연시킬 때는 장래는 없습니다. 참으로 싹수가 노란 것입니다.

현대의 사도 바울

이러한 본을 실제 나타난 예가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북한교회가 낳은 현대의 사도 바울인 것입니다. 사람만 바울이 아니지 그 믿고 행하고 따르고 가르치는 바가 바울의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당시 79세인 이 북한의 노(老) 형제는 찬송 한번 목청껏 실컷 부르고 싶어 탈북자들 틈에 끼여 중국으로 넘어 왔었습니다. 북한 선교를 하는 어떤 이가 그 신발이 다 헤어져 발가락이 튀어나온 것을 보고 울며 남한으로 보내 드리겠다고 하니 먼저 기도해보고 답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는, “내가 능력이 없어 이 북한에서 죽을 고생을 하도록 만들겠느냐” 하는 주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며 주님의 뜻이 그러하니 그냥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합니다. 그리고는 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잡혀 순절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사도 바울이 바로 북한 땅에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아라” 한 바울입니다. 모든 세계 교회는 북한의 이 '현대 사도 바울'의 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성함을 물으니 “내 이름 알아 무엇하려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 아무 것도 없소” 하였다고 합니다.

대개 그쯤 되면 누구나 기도해볼 것도 없이 당장 결정해 버리고 북한 땅을 떠나려 할 일인데도 주님께 먼저 기도하고 결정했다는 것은 이 세상에 우리가 머물러 있는 것이 사는 데에 있지 않고 주님 뜻대로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으므로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반드시 사사건건 주님께 아뢰고 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주님께서 기뻐하심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행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목적임을 오늘날 그는 우리에게 산 표본이 되어 준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또한 끊임없이 방해하고[살전 2:18] 공격해 오기 때문에라도 이와 같은 기도는 필수입니다. 그리고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항상 능동적으로 주인 의식을 가지고 하는 일이므로 모든 일에 적극성을 띠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살전 5:17]. 바로 이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남한 자유 천지에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반길 법하나 먼저 기도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사표(師表)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교제]을 알려 하여 그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0,11] 한 그대로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여 사랑하지 않고[요 12:25],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행함에 있는 것이요 사는 데에 있지 않고 삶의 낙을 누리는 데에 있지 않음을 실제 본으로써 우리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북한 교회는 이로써 온 세상의 모든 교회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본분과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릇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망하게 된다고 소리 높여 가르치고 있습니다[요 12:25]. 이 세상은 절대로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 건지는 일을 하는 때요 장소일 뿐이라고 그래서 기도하고 말씀 전달하고 선을 행하는 것에만 유일한 의미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혹한 사지(死地)에 있는 처지에서 자유의 땅으로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어도 이를 거절하였으니 세상 사람 판단으로 하면 자기에게 굴러 온 복을 스스로 차 버린 격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 구원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 하면서 바울은 종으로 있을 때 믿었으면 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어도 차라리 종으로 남아 현재의 위치를 활용하여 동일한 처지의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이상적인 기회로 삼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밝힌 것과 똑같은 의미입니다[고전 7:21].

우리는 이 세상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는 것으로 여기면 절대로 그리스도께 올 수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제자가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66] 하고 물러가 버린 것입니다. 영생하려면 그런 정도라도 자기 삶을 물리치고 희생하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숫제 사는 장소가 아니고 사는 때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통하며 진통(陣痛)의 신음 중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롬 8:22].

죽을 고통을 느끼면서 삶의 쾌락을 맛보는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악령들도 이 세상이 사는 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오직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 그들에게 포로되어 있는 세상 사람들만 그렇게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깨우쳐 주어도 기어이 살겠다는 것이면 이는 기어이 멸망하겠다는 그 뜻 외에 달리 의미가 없습니다[요 12:25]. 내일도 이 시간 이후의 일도 죽을지 살지 기약 못하는 세상에서의 한 때 삶을 살고자 영원한 생명을 버리는 어리석다기보다 “미친 마음”[전 9:3]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다[또는 신뢰하지 않는다]”는 한 마디 이유로 낙인 찍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역시 이 이유 때문에 악령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낙을 누리지 않는다는 것일 뿐 산 자로서의 삶의 기쁨과 평안은 충만한 것입니다[롬 14:17]. 그래서 주님께서도 십자가 고난 가운데 들어가시면서도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 기쁨을 너희에게 있게 하려 한다”[요 14:27/15:11] 등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의(義)이니[롬 14:17] 곧 올바른 행실입니다. 산다는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 사는 법도대로 사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마 5:16/딤전 4:12/벧전 1:15/ 2:12/벧후 3:11/계 19:8].

산다는 것은 반드시 삶의 낙을 향유하는 것에만 있지 않은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원리원칙으로서의 뼈대를 따름입니다. 이 삶의 뼈대는 안락한 중에서가 아니라 고난 중에서 다져지는 것이니 그래서 주님께서도 고난 가운데에서 순종을 배우셨다 했습니다[히 5:8]. 순종 자체가 삶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구조의 ‘한 몸’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몸은 머리에게 순종하는 것이요 육체는 영혼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는 몸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하는 것이요 영혼 역시 몸을 위해 그러합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삶의 구조이므로 자기 부인입니다. 아무도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나 사이가 육체와 영혼의 관계라고 했거니와, 육체와 영혼이 아무리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해도 우리가 영혼을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육체의 오관(五官)으로는 인식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존재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영혼 같으신 주님[성령으로 계시니까]을 현재 내가 볼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은 볼 수 없으면서도 어찌 ‘영이신 하나님’은 보고자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도 ‘임호산(臨虎山) 인식 전환[정면에서 보면 팽이를 거꾸로 둘러엎은 모양의 밋밋한 뒷동산 정도로 나타나나 측면에서 보면 명실상부하게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 와 넢죽이 엎드려 있는 모습이 되어 있는 것처럼 만사 보기 나름이라는 뜻]’은 필수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령한 몸이 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현재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을 때에는 그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옳고 또 덕이 됩니다.

“주님과 합하여 한 영이라”[고전 6:17] 하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영혼[나의 영]과 영[주님의 성령]의 “연합”[롬 6:5]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지금은 삶의 낙을 누리는 때가 아닙니다. 사는 데에는 반드시 삶의 낙이 있으므로 그래서 사는 때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죽었다는 말이 아니니 삶의 낙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머리 친히 고난 받으시는데 몸 혹은 몸의 지체가 그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머리를 떠나 있는 것이니 머리를 떠나서 무슨 삶이 있다는 것입니까.

영혼께서 고통 중에 계시는데 몸의 지체로서 어찌 같은 고통 중에 있지 않으리요. 모든 것은 순리대로 말하는 것이요 합리적으로 말하는 것뿐입니다. 순리대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사람 삶의 무대라고 이제까지 속아 온 단 꿈에서 깨어나 이제는 “눈을 떠”[행 26:18] 현실을 똑바로 보게 되었으니, 이 인식을 그대로 굳히면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것뿐이고 아무 이상한 일도 없고 제대로 정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인식 전환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에덴낙원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인식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 한 마디로 바뀌어 죽음을 자초하게 된 비극적인 사례를 우리가 어떻게 감히 잊을 것입니까. 인식이 한번 바뀌자 그 죽음의 공포의 선악과가, 먹음 직하고 봄 직하고 지혜 있게 할 성싶게 탐스럽게까지 비쳐지는 요술을 부린 것입니다. 긍정적인 일에도 부정적인 일에도 180도 전환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인식 전환은 긍정적인 역할도 하거니와 이상과 같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떨게”[빌 2:12]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출렁대는 물결과 같습니다. 항상 반듯하게 고정시켜 놓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 즉 “굳게 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지키는[잠 4:23] 방법은 우리의 마음의 시선(視線)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마 14:29].

§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나 선한 자에게 비를 내리시고 차별하시지 않는 것과 같이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함을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므로 우리도 만일 우리에게 덕이 되는 사람만 좋아하면 죄인들과 나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 세상을 사는 터전으로 인식한다면 당연히 우리에게 선을 베푸는 자를 선대하고 악으로 대하는 자들은 물리칠 것이고 방어하고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할 것입니다마는 사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 즉 그런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함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덮어놓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설명했듯이 이웃을 위하는 사랑 일색이 되어 도무지 해를 끼치지 않는 데에 있으니 당연히 그러하고, 만일 악으로 갚아 버리면 우리 자신 생명의 도리를 저버리는 결과가 되므로 그 악에게 지는 것이 됨은 필연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이와 같이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적극성과 능동성 즉 주인 의식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악한 자들을 즉결 처분하시지 않는 것도, 가인이 아벨을 죽였어도, 그 죽음의 대가를 묻지 않으심과 같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에서도 드러나듯이 “오래 참으심으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 3:9]는 데에 핵심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순되는 말씀을 하실 리 없습니다. 지금은 구원의 때요 은혜의 날인 것입니다[고후 6: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턱대고 악인과 의인을 동등하게 취급하셔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구원의 날 , 은혜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과 같이 죄인에게 오래 참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모쪼록 구원에 이르기를 바람이 옳다는 그 말씀입니다. 따라서 악을 선으로 이기는 ‘목적’이 완연합니다. 아무 목적도 없이 덮어놓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는 덕(德)을 말씀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 이해하지 못할 아무 것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지금 이 때, 이 시대를 제대로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구원 받는 때요 구원시키는 때입니다. 이 세상 한번 지나면 때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뜻을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말씀을 무시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목적 의식이 뚜렷하지 않고 방향 설정이 되지 않고는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일관성 있게 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천국은 침입하여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 말씀에 의아해하는 것은 마치 우리 스스로 우리의 힘으로 천국에 들어가는[구원 받는] 의미처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므로 믿으면 되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즉 구원을 ‘받는’ 것이지 어찌 우리 스스로가 ‘이루는’ 것이냐 하는 것인데, 실상 성경은 명백히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라 하였고[딤전 4:16] 우리 스스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지혜의 정보를 제공한다 한 것입니다[딤후 3:15]. 우리가 이미 부르심을 받았고 택하심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전부이어야 하는데, 베드로는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실족 아니 할 수 있고[:10]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간다 한 것입니다[:11].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실족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점을 강조한다 하여 베드로후서나 히브리서나 야고보서 등을 성경에 수록하기를 망설였던 한 때가 있었음을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순수하게 성경에 대한 무지 탓입니다. 바울 역시 동일한 논조로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도 인식 못사는 무지 탓입니다.

인간의 편견과 선입관으로 성경을 읽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성경의 이같은 경고의 정당성과 필연성은 “사람마다 천국으로 침입해 들어가 빼앗아 차지한다”[마 11:12/눅 16:16]는 주님의 말씀으로 확고히 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나의 구원이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골 3:4]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요 4:34] 위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20:21,22] 것과 겹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신 것입니다[:21]. 즉 나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생명의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 있다는[내게] 증거가 됨입니다. 그렇지 않고 생명의 뜻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생명과 반대되는 것을 행하여 생명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명이 없다는 증거요, 없으니 오직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는 자는 생명이 있고 계시지 않는 자는 없다고 했습니다[요일 5:11,12].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의 생명이십니다[골 3:4]. 내가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아니하고는 나의 자유입니다. 내가 애초 그리스도를 믿고 안믿는 것이 나의 자유였던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이 자유가 어찌 되는 것도 아니고 박탈 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면 우리의 구원은 사랑이 본질이고 사랑은 자유 의지가 그 핵심인 까닭입니다.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어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즉 강제나 간섭이 전적으로 배제됩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랑할 때, 사랑의 참다운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즉 완전 자유가 보장되어 있을 때 사랑이 성립됩니다. 하나님께서 영물(靈物)들이 범죄할 때나 아담이 범죄할 때 일절 간섭 또는 강제하시지[강제로 범죄를 막으시는 등] 않은 것이 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은 침입을 당한다” 하신 것은 바로 이 ‘자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바로 이 자유로 인하여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다면 시험도 없습니다. “시험하는 자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도 무의미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이 현실이라면 우리의 자유도 현실이고 ‘침입해서 들어가지’ 않고 스스로 ‘쳐서 빼앗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도 현실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앞에서 지적했듯이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나의 사랑의 자유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강제로 시키시거나 간섭하셔서 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강제나 간섭이 되는 것은, 내가 나의 구원을 목적하여 무엇이든 할 때 그런 의미가 됩니다. 왜냐면 내가 구원 얻기 위해서는 또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싫든 좋든’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강제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멸망시킨다고 할 때 그것은 으르고 위협하는 것이요 그렇게 해야 천국에 가게 된다고 할 때는 달래고 회유하는 것이 됩니다. 이 모두가 간섭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인한 나의 구원은 나를 보내신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과 같은 뜻이므로 그리고 이렇게 행함과 이룸은 순수히 나의 의지력으로써 하는 것이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일진대 천국에 침입해 들어가고 쳐서 빼앗아 차지하는 것 역시 온전히 나의 의지력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입니다.

사랑은 자기 스스로 하는 일이고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고 따라서 사랑의 일은 하지 말라고 누가 꾀어도 자기 스스로가 끝까지 세워서 하는 것이고 그만 하라 해도 자기 스스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주인의식으로서의 일이니 사랑은 ‘주인 의식’이 그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자면 이미 구원은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아 놓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더 다시는 구원 문제로 그런 일을 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은혜’이고 ‘믿으면 되는’ 구원입니다. “선물”입니다. 아무 제약 없이 값없이 누구에게나 미리 일단 주어 놓고 보시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단 누구에게나 주셔도 누구나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다시 확언해 주셨습니다. 즉 주님을 지금까지 가까이 따르던 ‘많은’ 제자가 “말씀이 어렵다”며 따르기를 중단하고 스스로 물러갈 때 “아버지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44]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배운”[:45] 자만이 온다 하셨고 따라서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시지 않으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65]는 말씀으로 이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것을 "믿는 것"이라 오해하고, 그래서 믿으면 구원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신 사실만 알고 있으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알고 있는데 아주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입하여 들어가는 것이고 쳐서 빼앗는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 의미 그대로 확정적이고 영구불변입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줄 인정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특혜’인 줄 아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입니다. 이 “누구든지”에서는 그런 특별한 혜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 그대로 누구든지, 아무든지 차등이 없고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전체 말씀의 종합적인 윤곽이 드러나는 것이니, 곧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나를 구원해 주신 그 사랑의 보답 또는 호응으로] 주님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삼아 스스로 행하고 주님의 일을 자기의 일로 삼아 주인 의식으로써 무한정 이루려는 바로 그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그 뜻입니다. 그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래서 우러나는 열심으로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더욱 힘쓰고 노력하는데 그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문제는 사랑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게을러 터지고 아무 사랑도 없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고사하고 이 세상에서 사는 것도 세상이 정상적인 세상 같으면 용납되지 못합니다. 정신 차리라고 볼기 짝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성경이 이를 인정하고 있듯이] 워낙 의인은 고난 받고 악인이 도리어 형통하니까 비정상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죽은 자"로서의 인생의 세계라는 것이 우선 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산 자로 만드시지 죽은 자로 만드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 탓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성경에서 말하는 의와 선을 행하기가 아무 어려움도 없습니다. 항상 강조하지만 의와 선은 한 몸 체제에서의 머리와 몸 관계에서 그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에서[기계적으로 작동되는 즉 하나님께서 그렇게 운용되도록 정하신] 나타내 보이는 그대로의 이치를 우리가 우리의 자유 의지로써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주인 의식에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체제에서 끝까지 자기중심으로 나간다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구제불능으로 이미 판정되어 있는 것처럼 구제 불능인 것입니다. 구제 불능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을 영원 멸망에 처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경고는 이러한 구제 불능의 위치에 스스로를 처해 있게 하지 말고 스스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타율성이 아닌 자율성의 존재로 모든 영적 존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 한다"[잠 19:24] 했습니다. 그런 게으른 이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게으른 자를 만드시지는 않은 것입니다. 인간이든 영물이든 다 완전한 자로 만드셨는데 그 스스로 그렇게 자신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직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기회는 있으니, 삶이 전정 무엇인지를 깨닫고 자신을 건질 뿐 아니라 주변의 같은 죽음의 영원한 불행에 빠져 있는 이들을 구출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일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는 믿음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뜻을 순종하고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자기 구원 받은 것만으로 만족해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 순종이 바로 그 증거가 되어 나타나야 그것이 올바른 의미의 믿음임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무 간섭이나 강제 없이 그 스스로 움직이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천국으로 침입해 들어가 쳐서 빼앗아 차지하는 것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눅 16:16/마 11:1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약 2:20,26]이라 한 까닭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이는 세상 상식으로도 충분히 납득이 되는 일입니다. 세상 상식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무엇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보편화된 상식으로 능히 깨달을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신 것이 하나님이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라도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 구원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러 헝클어 놓고 복잡다기하게 꾸며놓고 혼란스럽게 만들어 소위 "신학"이라는 것을 만든 장본인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찌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이들의 눈에 그렇게 나타나 있다는 뜻이고, 어린 아이 같이 믿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 얻는 데에 일절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단순하기 때문이고 성령께서도 그와 같이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로만 사랑하노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있다면 그는 위선자일 터]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믿은 대로 행동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행동이 없다면 “그는 실제는 믿지 않는다”라고 누구나 서슴없이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의 주님의 말씀은 지극히 평범한 상식의 일단을 피력하신 데에 불과합니다. 오묘하고 절묘한 것도 아니고 신비한 것도 아닙니다. 표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가 그러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항상 우리로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책략을 밤낮없이 짜는 자이므로 신비하다든가, 어렵다든가 하는 말로 그릇된 인식을 주입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모든 억지 해석은 알쏭달쏭 하다는데 있고 그런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나는 각종 편견, 선입관의 포로가 되어 낳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성령을 받음으로[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내 안에 선물로 영원히 모심으로] 되는 것인데,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22] 하신 것입니다.

내 스스로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수행하는 순종을 하는 것이 바로 천국에 침입해 들어가는 하루하루의 발걸음이 되고 쳐서 빼앗는 동작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구원 받아 장차 천국 가게 되었다고 좋아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위해 살고[고후 5:15]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요 12:25] 것이 절대로 우리 구원의 실상(實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오늘날 이러한 오해 속에서 살아가고 자기를 속이고 있으니 때 늦기 전에 성경의 경고를 받을 일입니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에게는 불의함이 없습니다[요 7:18]. 자기를 위하지 않아 자기 영광을 찾지 않기 때문에 죄[불의, 불법]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고후 5:15/롬 14:7/갈 2:20/빌 1:21] 것이 성경에서 명령하는 바 “거룩함을 이룸”입니다. “거룩한 천사”라는 명칭도 천사들이 그와 같이 자기를 위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우리나 천사들이나 자기를 위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시는 까닭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즉 창조 때부터의 생명의 원리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그 죽고 사는 것을 다 챙기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자기의 머리카락을 셀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세시고 계신다 하셨으니 이와 같이 우리를 상세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심이 나은가, 아니면 나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는 내가 나 자신을 챙기는 것이 나은지는 누구나 판단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이제는 “하늘로서 내려온”[요 6:38]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39]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주님께서 성령으로 임하실 때 나도 그와 함께 하나 되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의미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20:21,22]. 또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나 역시 그와 같이 세상에 다시 임하는 의미가 됨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몸으로 오시니 나도 신령한 몸으로 오는 것과 같이 되어 나의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변화하게 됩니다[고전 15:50-54].

인간 성품은 본래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나누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애초 아담 한 사람에게서 여자가 탄생하면서[창 2:22] 남녀 성별이 생겼고 그래서 성격도 나누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남녀 성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천사들과 같이 된다 하신 그대로입니다[눅 20:35,36]. 천사는 성별이 없습니다. 성별이 없는 것이 온전한 것입니다. 인간[아담]도 처음부터 온전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애초 남녀 성별로 만드시지 않고 오직 한 사람 아담만 만드신 것입니다.

사정에 따라 여자가 생기면서 즉 남자를 소재(素材-갈빗대 하나)로 하여 여자를 만드시면서 그 첫 사람 아담은 남자로서의 신체적 구조와 성격을 비로소 띠게 된 사연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 스스로 남녀 양성을 골고루 지녔다고 할[또는, 성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온전한 육체적 구조였으므로 에덴낙원에서 여자가 없어도 그 스스로 주변 영물들의 보필을 받아 자식들 생산이 가능한 그런 신령한 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식 생산이라 하면 현재의 자연법칙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만을 인식하는 편견 때문에 그렇지, 신령한 몸으로 얼마든지 능력으로 그런 자식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담의 육체가 애초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하는 것입니다. 영물들은 영계인 에덴낙원에서 창조되었으므로 신령한 몸 자체로써 자식 생산을 하게 되어 있지 않고, 무엇보다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필요해서 하는 법이고 생기는 법인데 자식들을 낳을 필요가 없으니 그 자신[영물]이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생물체처럼 대를 이어가며 자기 종류를 유지 존속시킬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여럿이 생성되도록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것입니다. 아담 혼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생길 수 있도록 조처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선입관이 인간은 남녀로 되어 있고 여자만이 자식을 낳는다는 인식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하나, 이런 설명도 실은 아무 것도 부자연스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이제는 사람의 숫자가 다 채워졌으니 사람이 더 생길 필요도 없거니와 또한 사람마다 주님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을 구성하고 있으므로 남녀 짝으로서의 개념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시편에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대로, 하늘에서 주님 외에는 내게 아무도 없고 땅에서도 주님 외에 내가 오매불망 사모하여 사랑하는 이도 없는 것입니다[시 73:25]. 따라서 장차 신령한 몸이 되면 우리의 성품도 현재처럼 남녀로 나누어져 상호 보완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때는 모두 남성미와 여성미를 조화시켜 하나로 나타내는 온전한 아름다움으로만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그러하십니다.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우심과 남성으로서의 늠름하심을 아울러 지니십니다. “아버지”라 하고 “아들”이라 하는 호칭은 여자가 생기기 이전의 아담을 기준해서 표현하다보니 그리고 그 아담이 나중에 남자가 되었으므로 그래서 우리는 현재 남자 아니면 여자라는 선입견의 포로가 되어 있는 까닭에 사람의 예에 따라 하나님을 나타내어야 하겠으므로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 또 주님의 모습 또한 세상에 계실 때와는 전혀 다른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니실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런 ‘온전한’ 아름다움을 지금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여자 아니면 남자만 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분리해서 보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어 그 조화미는 구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성품을 말하려니까 이런 지적이 자연 나오게 됩니다. 장차 이런 모든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는 때, 영원한 고난을 앞두며 공포와 절망 중에 미래를 상상하며 대하지를 않고, 평안과 기쁨의 영원한 생명의 미래로 들어가면서 이런 아름다움을 대하고 맛보기 시작하는 이들은 실로 복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목도하고 있는 것은 성경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롬 3:23] 상태로서 저주 받은 땅[창 3:17]에다 저주 받은 인생에다[:17,18] 정상 상태가 결코 아닌 말하자면 일그러진 상태의 것입니다. 첫 사람의 범죄로 저주 받은 터에 어찌 정상적인 것을 기대할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이런 초라한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삶의 낙을 꾀하는 것은 우맹(愚氓)의 극치라 여길 일입니다.

우리 구원 받은 사람 즉 하나님의 아들[부활 때는 성별이 없어지므로 남녀 불문하고 모두 “아들”]들은 ‘사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이니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고후 6:1]. 하나님과 함께 일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필수 필연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일하는 자세이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고”[딤전 6:8]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아는”[히 13:5]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는 낙을 누리고자 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요 12:25] 것이므로 “만일 식물(食物)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한다”[고전 8:13]는 말도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녀 짝을 짓는 것도 물론 은혜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측면도 있지만[7:7] “절제할 수 없는” 경우에 결혼하고[:9] 그렇지 않으면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은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9], "더 복이 있다"고 강력히 권고한 것입니다. 항상 능동, 적극성을 띠고 주인 의식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스스로 파(破)하고 모든 불필요한 상념들을 끊임없이 깨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복종시키는 동작을 쉴 새 없이 되풀이하는 것입니다[고후 10:4-6].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니 무릇 이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의 대상이 된다고 했으므로[딤후 3:12] 주님 오실 때까지 끝까지 그러할 줄 알고 단단히 마음의 무장(武裝)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엡 6:11,13].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행 14:22]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진실과 사실 그대로이니 시종일관할 것이므로 마음의 허리를 동일 일입니다[벧전 1:13]. 이러한 모든 면에서 마음을 항상 새롭게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롬 12:2].

우리를 부르심 즉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구원하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도록 하려 하심은 물론이나 그러나 믿었다고 전부가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하려 하심"[살전 2:12]이 목적입니다. 물론 믿음 외에 딴 무엇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의 정확한 의미 그 실체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심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초대 교회 사도들이 가르친 이와 같은 교훈에서 떠나 전자만 강조하고 후자는 아주 생략해 버리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믿게 하고 그리하여 다른 영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고후 11:4].

당시 초대 교회로서의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뿌릴 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즉시 와서 저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지[막 4:14,15] 못하도록 마음에 새겨 생각하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그 "말씀이 또한 그들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살전 2:13]. 당연히 바울은 이와 같이 복음을 전할 때, 처음부터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그들도 그들의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게 될 줄 알고 미리부터 경고한 것입니다[:14].

그래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안다"[3:4] 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아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이것을 당하게 세우셨기"[:3] 때문입니다. 즉 핍박 받고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부터 이를 경고하였는데 과연 그 고난이 닥쳤고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고난을 잘 견디고 있어 바울은 "너희를 택하심을 안다"[1:4]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 가운데 견딤으로써 주님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에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일차 시험[막 4:17]을 통과했으니 앞으로도 충분히 그렇게 할 줄 알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하는 자가 시험하여 사도들이 수고한 것을 헛되게 할까 하여[살전 3:5] 그러므로 참다 못해 혹 어찌 되었나 하여 그들의 믿음을 알기 위해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을 굳게 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위로하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1:5] 되어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으니 이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다"[고전 2:3-5] 함과 같습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고전 1:17]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안심하지 못하고 혹 그 복음 전파가 헛되이 되지 않았나[살전 2:1] 하고 노심초사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죽음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이니 죽음은 생명과 그러하고, 오직 그리스도께서는 "장차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님"[살전 1:10]이시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이들은 이러한 "자기 죄를 항상 채움으로써 노하심이 끝까지 저들에게 임하는"[2:16] 경우입니다. 이것을 선명히 부각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해야 되는 것이니,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알렸음과[행 17:30,31] 같이 우리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주님"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절대적 복종이 수반되는 의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행 16:31]이라 하는 것은 이미 그 전도의 상대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앞에 있음을 본성적으로 자각하고 있을 때의 경우인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소개할 때 사랑 일변도로만 전하고 동시에 "소멸하시는 불"[히 12:29]로서의 재판장이심을 알리지 않는 것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다른 예수, 다른 복음으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양면을 다 정확하게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믿는 자에게나 아직도 믿음에 들어오지 못한 자에게나 하나님은 항상 인자(仁慈, goodness)와 엄위(嚴威, severity, sternness)라는 두 가지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롬 11:22]. 즉 구원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입니다. 양자 택일입니다. 천국에서는 물론 이러한 택일(擇一)이 없고 또한 하나님의 엄위도 없습니다. 그 때에는 양 세계로서 그렇게 양분되는 것이니 곧 천국과 영원한 고난의 불 못으로만 나타납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험하는 자의 시험 무대이기 때문에 그러한 경고로서 항상 우리에게 임하여 있는 것입니다. 항상 사람은 자기 이웃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본을 나타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다"[살전 1:5] 했고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6] 했으며 또한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7] 한 것과 같습니다.

세상 끝에 오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히 9:26]고 했으니, 따라서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救贖者)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 할 때의 “후일”도 세상 끝[“in the end”(NIV)]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도 “많은 적 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을 보니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요일 2:18]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했고, 야고보는 “말세에 재물을 쌓는”[약 5:3]  어리석음을 질책했으며,  바울 역시 광야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여러 일들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다”[고전 10:11]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신다”[욜 2:28/행 2:17]고도 하셨습니다.

주님 오시던 때가 세상의 마지막 때라면 왜 그로부터 이천 년이라는 세월이 지금까지 흘러왔느냐 하겠지만 기간 별로 나누어 본 마지막이 아니라 그리스도 오심을 전후로 하여 나누는 ‘세상 끝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지는 것이 정확한 구분법입니다. 즉 그리스도 오신 때를 “세상 끝”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그 ‘세상 끝의 이후’이고 그 마지막 부분[때-단 12:4]입니다. ‘세상 끝 이전’에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러아 세상 끝이 되어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더 이상 그 말씀은 적용되지 않으니, 왜냐면 마지막 때 즉 세상 끝이므로 세상이 끝나 가는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을 하실 리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결혼을 자손을 퍼뜨리는 의미로 더 이상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전 7:1]고 전제한 후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 7:2] 함으로써 죄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말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때문에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臨迫)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전 7:26] 한 것입니다. 주님이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고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다” 하실 때 제자들이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마 19:11] 하자,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 하시고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으라”[마 19:9-12] 하고 이미 선언하신 터입니다.

고로 억지로는 안되고 자기 스스로 원해서 할 때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 목적이 “천국을 위함”일진대 좋은 일이지 부정적일 수는 없습니다. 고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는 것은 금욕 차원이 아니니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억지로 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것이 자유의 개념입니다. 악이 좋거든 악을 행하고, 의를 행하고 선을 따라도 억지로 해서는 무의미하고, 오직 선을 행함과 의에게 복종하는 것을 '사랑하는 경우'에 한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악이 좋아서 악을 행하면 멸망이고[살후 2:7] 선이 좋아서 행하면 영생입니다[롬 2:12]. 좋아서 행하는 선이 아닐 때는 그 선은 선이 아니니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선이 좋아서 행할 때는 이미 그 사람은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초탈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니, 왜냐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을 받았음을 알고 바로 그 사실을 근거로 하여 선을 좋아해서 행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구원을 목적하고 선을 행한다면 비록 아무리 선이 좋아서 한다고 치더라도 이미 그 목적이 자기 구원에 가 있고 따라서 자기를 위함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므로 억지로 선을 행하는 것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므로 곧바로 죄인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은 자기의 목적[구원]을 달성하면 더 이상 선을 지킬 의무를 지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까닭으로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선'을 힘써 행할 리도 없습니다.

“남자/여자가 여자/남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는 것은 이제 세상 끝이 되어 세상을 접으실 충분한 조처가 마련되어 있는 터라[그리스도의 구원이 완성됨으로써], 더 이상 이 자연계에서의 인생 삶이 지속되지 않고 마침내 끝나게 되면 우리 모두가 영물들 즉 천사들처럼 되므로 성별이 없어지는[더 이상 필요가 없으므로] 까닭입니다. 바로 그런 온전한 상태, 정상적인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또 이러한 마지막 때 즉 "세상 끝"의 의미는, 복음만 세상 구석구석이 전파되면 그 때가 언제가 되든지 이 세상은 내일이라도 종막을 고하게 된다는 확실한 의미가 됩니다(마 24:14). 그래서 그리스도를 기준하여 그리스도 이후를 "세상 끝"이라 하는 것입니다].

원칙대로 하면 그러하나, 현실로는 음행의 연고로 남편과 아내를 두라 하였고 그러나 부득이한 사정도 없을 때에는 혼자 지내는 것이 더욱 좋고 복이 있다 한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이든 억지로 할 일이 아닙니다. 사람 따라 형편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으니 그래서 베푸신 은혜를 따라 적절히 대처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자식들을 가지게 되면 육체의 고난이 있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자식을 낳지 않기 위해 인위적으로 산아조절이니 하는 방법을 쓰는 것 역시 억지이니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는 죄악이 됩니다. 곧 오난의 저주가 됩니다[창 38:10]. 결혼하면 당연히 자식들을 낳아 주님 안에서 양육하여 자식들을 주님 뜻대로 기르는 모범을 마땅히 세상 앞에서 보일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냥[혼자] 지내는 것이 복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 이상,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다”[고전 7:15] 하였고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님이시다}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 7:10,11] 하였으므로, 믿지 않는 상대가 믿는 문제로 해서 갈려 나갈 때는 갈려 나가게 하되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한 것입니다.

또 기회가 닿는 대로 “다시 화합하라”는 그 이상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여기서 어느 쪽이든 간음[합법적으로 결혼한 상대가 생존해 있음에도 그 이외의 이성을 접촉하는 것]을 했을 경우 그렇게 범죄한 상대를 버리고 재혼해도 된다는 그런 기준을 설정하여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면 “믿지 아니하는 남편/아내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버리지 말라”[:13,14] 했는데 다만 “함께 살기를 원하거든”이라는 조건만 달았으므로 그 상대가 그런 범죄를 했는지 여부와는 무관함을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죄 짓지 않기 위하여 남편/아내를 둔다고 했는데 이 역시 절대적 기준은 아니니 주님의 말씀처럼 천국을 위하여 바울과 같이 얼마든지 혼자 지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장애인[성적 불구자]이 된 아내/남편이 있다고 해서 그 장애인 상대를 버려도 된다는 것은 물론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에 천국을 위하여 혼자 지내기로 작정하는 것도 좋지만 혼자 지내지 않을 수 없는 부득이한 사정에 처했을 때 혼자 지내더라도 그런 범죄를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님께 구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니, 믿음대로 될 것이라 하신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 같이 정욕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다"[:9]고 하였지만 영역으로 그냥 불 타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better to marry than to burn] 왜 정욕으로 불 타는 것으로 번역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절제하지[to control oneself] 못함으로써 범죄하여 그 결과 "영원한 불"[마 18:8]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마치 정욕을 또는 결혼을 항거할 수 없는 그 무엇처럼 묘사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 들으면 "혼자 지내는 것이 복이 있다"라는 바울 사도의 권면을 너무 실천 불가능한 것으로 말한 듯이 번역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할 정도입니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으니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마 19:12] 하신 것도, 먼저 제자들이 "음행한 연고 외에는 절대로 아내를 버리면 안된다"고 하시니까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까,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한다"[:11] 하시면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사람이 이 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아예 처음부터 결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는 바로 그 결론에 동의하시는 의미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남자가 여자를[또는 여자가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말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예를 들어 행음하지나 않는다는 것뿐이지 모든 일에 원수 같이 행동하는 아내가[남편도 마찬가지지만] 있다고 할 때 이런 아내를 둔 남편은 "정욕이 아무리 불탄다"고 해도 다른 여자를 절대로 상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육신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그런 아내가 다른 남자를 보고 자기를 떠나 사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내가 없는 자는 구하지를 말며 있다고 해서 그 아내에게서 놓이기를 구하지 말라고 했고[고전 7:27], "이 후부터는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라"[:29]고 한 것이니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는"[:31] 것이므로 세상에 대한 일절 모든 애착을 버리고 첫째 세상 살고자 하는 마음부터 버리라는 것입니다[요 12:25].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무엇을 매입하는 자들은 그 사들인 물건이 없는 것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는 것이 그 뜻입니다.


항상 이 사실을 우리는 명심하도록 힘쓸 일입니다. 절제하지 못한다는 것도 당자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절제해야 할 것이라면 절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의 바울 사도의 지적과 같이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삶의 집착은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는 무의미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인식에서는 얼마든지 절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내일도 없어 오직 오늘뿐임을 우리는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