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32)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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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어


"내게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자랑은 어떤 경우에 자랑인가.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를 부끄러워 할 것"이라 경고하신 것과 반대되는 의미다. 즉 "나와 내 말"이라 하셨으니 반드시 전도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다시 말해 자랑스럽게 전도함이니 선행을 하는 차원으로 뿌듯한 보람을 느끼면서 그리스도와 그 구원의 도리를 말해 주는 즉 남에게 소개함이다.

만일 이와 같이 전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 결과를 말씀하심이다. 즉 그런 사람을 부끄러워하실 것이라 하셨으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함 즉 멸망을 의미하심인 것이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마 7:21]이라 하심과 같은 경고이시다. 믿음에 들어 왔으나 그래서 구원받은 자로 자처하나 이에 상응한 열매가 없어 버림당하는 것이니 곧 멸망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믿어서가 아니라 믿어 교회 안에 들어 왔으나 이전처럼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빌 3:18]이다. 바울 사도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 것은 교회 중의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야 전도해서 믿게 하면 되는 것이요 구원의 길을 알려주어도 믿지 않을 때 그런 사람들의 영원한 멸망을 슬퍼할 그런 여유까지는 없는 것이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왜냐면 복음만 속속들이 전파되면 세상은 내일이라도 곧장 끝나기 때문이다[마 24:14].

이와같이 "우리 자신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 함이 분명한데도 성경을 믿지 않고 인간의 상상물(想像物)인 "신학(神學)"을 더 믿으니 "구원"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몰라 [스스로로는 안다 하고 "박사"라고 하더라도] 구원 받은 적이 없으면서도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고 심지어는 기독교 교인들을 상대로 "구원 받지 못했다"고 지적하기를 잘하는 "구원파"라는 신종 이단까지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 자신도 구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건만 그렇게 하는 것이다. 모르기는 피장파장이므로 그런 이단에 대해 명백히 답변할 오늘날의 [구원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 면에서] 권위 부재(不在)를 지적하는 것이다.

성경을 성경 그대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말하는 그대로] 믿으면 아주 간단한 일이요 그르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이와 같이 성경을 전연 모르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난 것이라기보다 이 세상의 신(神)으로서 이 세상을 지배하여 인생들을 조종하고 있는 악령 사탄의 조화(造化)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의 실존과 활동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되어 있다. 인간만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그 구원의 말씀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하는 우리의 책무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 받음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의미로서[요 20:21]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으므로[4:34]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양식인지라 사람이 먹지 못하면 죽는 것과 같이 이는 영적 죽음 즉 멸망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역시 위의 모든 경고와 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을 어찌 되겠는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다"[고전 9:16] 함과 같다.

바울이 항상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한 대로 그리고 그리스도 친히 경고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선생이라, 지도자라 부름을 받지 말라"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형제들이요 평등하니 특별한 계층이 있어 그들에게만 부과되는 책무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명령하시는 바로서 차별이 없다[막 13:37]. 단지 "목자"가 되는 이들은 앞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양 무리의 본이 되는 이들에 한한다[벧전 5:3]. 학식도 사회적 경력도 고려의 대상이 아니고 자격은 그것밖에 없다[딤전 3:5].

"화가 있다"는 말 뜻은 문둥병 환자 네 사람과 같은 것이다[왕하 7:3]. 인육(人肉)을 먹을 정도의 아사 지경에 있던[6:29] 사마리아 성민(城民)들에게 구원의 복음[아람 군대가 남김없이 도망간 사실]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임을 자각하고, "우리의 행사가 선하지 못하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다'[왕하 7:9] 함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경고에 따르면, 우리가 구원된 것이 그 뜻을 행하기 위함인즉 그 뜻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데에 있으므로[눅 9:60] 전도하지 않으면 멸망의 대상이요 그것도 자랑스럽게 기쁨으로 보람차게 하지 않으면 역시 같은 결말이 된다는 것을 앞서 지적한 경고로 알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따를 수조차도 없다[마 8:22].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해당된다.

사람은 하다못해 남이 잘 모르는 좋은 음식점 하나를 소개해주어도 보람을 느낀다. 하물며 사람이 현재의 인간고를 벗어버리고 영생에 들어가는 길을 알려주는 일이랴.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어찌 아니 자랑하리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한"[갈 6:14] 사실이 자랑거리인 것이다. 이러한 죽음은 생명 즉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출생하는 것을 의미함이기 때문이다.

만일에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 하여 항상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경을 쓰면서 전도를 한다고 가정할 때 그 사람은 자기의 행위로써 구원 얻고자 함이다. 비록 믿음으로 은혜로써 선물로 얻는 구원이라고 믿어도 그런 마음 자세일 때 그는 은혜의 시대에 살지 않고 자기의 독자적인 행위로써 구원 얻고자 하는 일반 세상 종교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이 그 뜻이고 그 말이 결국 그 뜻이 아니냐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면서도 동시에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거듭하여 강조한 대로[4:4] 항상 기뻐하고 않고 하는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산 자로서의 기쁨을 여기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금 당장이라도 죽어 넘어지면 틀림없는 천국 행인 것을 알고 있는 지식에서 오는 주체할 길없는 기쁨이기에 그러하다[벧전 1:8,9].

그러므로 그런 사람의 구원은 자기가 무엇을 행했기 때문에 그 덕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 받아 있어 현재 영생하는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것을 알고 있는 데에 그 특징이 있음이다. 단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산 자가 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산 자가 되어 있는 증거이기에 그러하다. 이미 되어 있다는 증거와 되기 위한 수단이나 목적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이다. 단지 사람[구원 받은]은 어느 때나 자기중심으로 전환될 수 있어 하시라도 범죄할 수 있다는 그 경각심에서 두렵고 떠는 것이다.

그런 결과와 전례를 이미 아담의 비극에서 그리고 사탄과 같은 악령들의 현재 처한 운명에서 그리고 타락한 그룹을 통해서도 충분히 보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와 같은 자기중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결말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몸과 머리가 한 몸을 이루어 하나되어 있는 것이 생명의 체제이므로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삶의 요체이므로 그와 반대되는 자기중심 곧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은 일절 용납되지 않는다.

주변의 멸망에 처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알려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최소한의 자기 부인의 한 표현인 것이다. 이런 최소한의 증거, 살아 있고 영생하는 자라는 기본 증거가 나타나져 있지 않을 때 즉 주님께서 경고하신 열매 맺음이 없을 때 그는 당연히 제외되고 제거되는 것이다[요 15:2,6]. 아껴보지 않으시고 꺾어버리시고 찍어버리시는 것이다[롬 11:21,22/눅 13:7]. 산 자로 만들어주셨으나[다시 나게 하시고 새로 창조해 주셨으나] 산 자로서의 증거 즉 자기를 위하지 않고 머리를 위하고 머리의 지시를 따름이 없기 때문이다.

무화과나무로 성장시켜 주었으나 무화과가 열지 않으니 그 나무는 버린 나무다. 버림 받은 가지로서 불에 살라진다[요 15:6]. 그래서 "어찌 땅만 버리느냐, 찍어버리자" 하시는 것이다[눅 13:7]. 무화과로 심으셨다는 것은 산 자로 만드셨다는 의미다. 왜냐면 "제가 무화과 나무 열매를 맺겠습니다" 하고 약속하는 것이 우리의 회개다. 다시 말해 "돌이켜 악함을 버리겠다"[행 3:26] 한 것이다. 악함이 무엇이냐, 자기 부인이 없는 것이 악함이다. 즉 자기중심인 것이다. 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그 스스로 머리인 양 행세함이다.

열매 맺는 비결을 말씀하셨으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요 15:4]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됨이다. 갑과 을의 하나되는 이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갑이든 을이든 똑같이 함께 움직이는 동시성과 양면성의 원리를 따름이다. 물론 시작은 갑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심으로써 본을 보이셨으니 즉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써 이 사실을 확증하셨다[롬 5:8]. 따라서 우리는 이 본을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으니 몸은 항상 머리의 지시를 따름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3:16] 한 것이다. 우리의 전도는 바로 이와 같이 한 몸의 지체로서의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환으로서 하는 마땅한 일인 것이다. 왜냐면 형제들을 우리가 죽음의 물 속에서 낚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막 1:17]. 물론 우리가 낚아 올리려고 시도하는 모든 이들이 다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마 13:48] 최소한 그런 노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명령으로 주신 것이다[요 15:4]. 우리의 회개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로 작정하는 우리의 첫 걸음이기도 하거니와 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자 함에는 지속적으로 있기 위한 우리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긴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명령을 하신 다음에 무엇이라 하셨는가,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을 것"이라 하심이다[:4]. 완전한 조건부다. "네가 내 안에 있으면 나도 네 안에 있겠다" 하시는 말씀이시다. 이것이 사랑의 동시성이고 양면성이다.

어느 일방적으로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의 사랑은 당연히 그러하다.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쌍방의 의지에 좌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 구조에서 머리와 몸의 관계는 기계적인 것이나 자유 의지가 핵심인 사랑으로 둘이 하나되는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는 나의 의지가 주축을 이룬다. 그래서 이미 모든 사람을 위해 기본적인 구원을 이루셨으나 각자의 믿음 그리고 회개 여부에 우리 구원이 달린 것이다.

이 관계가 이 세상에서 시종일관해야 하는 것은 사탄이 시험하는 시험 무대가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하나됨 즉 그리스도 안에 계속 머물러 있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표현하여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라는 경고로 나타낸 것이다. 나의 의지는 내가 사랑하는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니 곧 갑은 을을 위해 사는 것이요 을은 갑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미 갑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심은 그 십자가 고난 받으심의 사랑으로써 확증된 바다[롬 5:8]. 그러므로 어째서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그리고 이 일을 자랑스럽게 기쁨으로 보람 뿌듯이 하지 않으면 멸망의 징조가 되는지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게 됨이 아닌가. 그래서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못박히심이 나의 자랑이라 하는 것이다[갈 6:14].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세상과 결별한 사이다. 믿음과 동시에 이 결별이 선언되는 것이다[:14].

세상 삶과는 완전히 등졌으니 이 세상에서 남 부럽지 않게 살고자 하고 형통하고자 하고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것과는 이제는 백 촌도 넘었다.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 12:39]다. 그러기 때문에 죽은 자들의 세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죽은 자가 절대 다수인 세계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들은 극소수에 속한다.

"음란하다"는 것은 성경[구약]에 이스라엘을 가리켜 "나는 네 남편이요 너는 내 아내"라 하신 것처럼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하나됨을 말하는 것이다. 남편 아내로서의 한 몸 상태에서 아내가 부정하여 다른 남자를 따라 남편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 자신을 섬기든 다른 피조물을 섬기든[롬 :25]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에 불응하고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모든 것을 말함이다. 악령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떠났고 거룩한 천사들은 끝까지 충실하고 충성한 경우다. 아담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선악과를 먹었으니 "음란하게"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따라서 이는 악함과도 통한다. 자기중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자기 목적인 사탄이 이 세상 신으로서 우리의 하나님 나라 전파를 그냥 좌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수단 방법을 다하여 저지하고 방해하려 들 것은 명약관화다, 가장 손쉬운 보편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수단방법이 죽음에 따르는 고통 고난이다. 그래서 미리 경고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그를 두려워하라"[마 10:28/눅 12:4] 하신 것이다.

이러한 세상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자랑스럽게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반드시 부끄러워하게 되어 있으니, 둘 중 하나다. 만일 당시 사마리아 성내의 사람들이 극심한 기근 속에 휩싸여 있지 않았다면 그 네 문둥병 환자의 소식이 복음(福音, 희소식, 좋은 소식)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구원이 희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래서 기꺼이 믿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죽음의 상태를 절감해야 하는 것이니 이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요 6:45] 것이다.

이 세상의 죽음의 상태를 상대적으로 실감하고 더 느낄 수 있는 계층이 이른바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고전 1:27,28]인 것이다. 따라서 그렇지 못한 계층보다 "믿음에 더 부유하게"[약 2:5]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런 진실을 아는 이로서 이 세상을 사랑할 사람은 없다. 영원 세상에서의 신령한 몸으로 사는 영광을 아는 이치고 이 세상에 연연해할 이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론적으로 말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믿는 자가 구원 얻는 것이다. 멸망하는 자는 믿음이 없다는 결론밖에 얻을 것이 없다. 다른 핑계나 이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살 수도 없고 살게 되어 있지도 않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여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밖에 없다는 증거가 된다. 

모두 자기 선택을 따라 되는 일이다. 멸망도 영생도 모두 그러하다. 이것이 인생들에게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자유 의지'를 주신 의미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 진로(進路)는 철저히 타율적이다. 왜냐면 이 세상에서의 인생 삶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의도하셨던 영원하고도 행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생의 행복한 삶은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사랑의 세계인지라 사랑에는 자유 의지가 핵심인 것이다.

고로 3운법칙은 이런 세상 삶에 일절 연연해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이시기도 하다. 인간 본연의 본격적인 삶이 따로 있다는 증거를 나타내 보이심이다. 그 영원한 삶은 오로지 사랑으로 운영된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핵심은 사랑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롬 5:8] 것을 보고 나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우리 구원의 골자다. 그래서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 곧 그리스도를 대신하여[고후 5:20] 이 구원 사업에 종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신한다고 우리 홀로 일하는 것이 아니니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로서 "한 영"[고전 6:17]이기 때문이다. 영혼과 육체로서의 이중 구조를 이루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고후 6:1].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시어 계신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요 말씀이심을 명백히 하셨으니 아버지와 함께 일하심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신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이 우리가 일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지 못함을 스스로 입증하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우리의 구원인데 하나되어 있지 않으니 멸망 그대로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데에 전념하지 않고 즉 쟁기를 손에 잡았으면 응당 그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자꾸만 뒤로 돌아봄으로써 세상 삶에 연연해하는 자는 "일하지 못한다"는 말씀보다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 경고하신 것이다. 곧 멸망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아내가 그러하였으므로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눅 17:32] 경계하신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범죄하는 모든 자들을 처벌하신다. 그러나 양면성의 원리대로 하신다. 다시 말해 우리 각자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그와 같이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결과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 동시성과 양면성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집행하시는 인간사에서의 철칙이니 말할 것도 없이 3위1체 원리를 따름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가는 것이니 "자기 피로써 우리들을 거룩케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는" 것이니[히 13:12,13], 이것이 "그에게 나아가는" 즉 우리의 구원이시요 생명이신[골 3:4]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바로 그 방법 그리고 그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과 방법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이다. 그 이유를 밝혀 성경은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안식처["city" 즉 우리말 번역은 "도성(都城)"]가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는다"[:14] 하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방법 또는 모습을 성경은 더 말하고 있으니 곧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15]라 한 것이다.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고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벧전 1:8,9]이라 했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making melodies in your heart to the Lord] 찬송하라"[엡 5:19] 함과 같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을 찬송, 찬미, 찬양하는 노래는 실로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의 머리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육체이실 수가 없다. 육체이시라면 공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이 크나큰 우주를 만드실 수도 관할하실 수도 없을 것이 아닌가. 또는 이 우주를 감쌀 정도의 육체로 계신다면 이 너른 우주에 비하면 먼지만도 못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육체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특징인 육체를 지니실 리가 없다.


성령이 임하실 때 그리스도의 경우 비둘기 형상이셨고 오순절 날 당시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 가량의 제자들에게 내리신 경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모양으로 임하셨다. 이는 고유의 형상이 아니시고 성령의 임하심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 나타내 보이신 것뿐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각자 즉 피조물 개체에게마다 함께 계실 수 있고 피조물 전체를 상대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을 대하실 때 개인과 전체의 차별이나 제한 없이 충분히 1대1로 상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영이신 하나님의 특징이시다. 만일 육체로 계시는 것이라면 이런 일이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신체 구조에서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도 명백하니 머리는 몸 전체와 상대하되 각 지체 각 부분과도 한 신경 계통으로써 직접적인 연계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개별적으로 상대하되 동시에 전체를 상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임과 동시에 우리 각자는 얼마든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바치시고 선물로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갈 2:20].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시라 하시지 않고 또는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라고도 않으시고 아들 손자 3대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그 이름을 말씀하시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하신 것이다. 이는 상징적으로 의미가 깊은 것이니 곧 전체의 하나님만 아니시라 각 개인의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내심이다. 각 개인에게는 그 어느 인간과의 개인적인 관계보다 근본적으로 가까우심을 밝히심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주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이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더욱 확실히 하셨다고 하겠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하신 것이라기보다 [왜냐면 평소 당신 자신을 가리켜 "인자(사람의 아들)"로서 강조하셨으므로] 마지막 아담으로서 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범죄하기 전의 아담이 지녔던 것과 동일한 신령한 몸으로서 부활하신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제 사람이 되어 계시는 이상 굳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런 사실이나 말씀으로써 새삼스럽게 강조하실 이유는 없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부활하실 수 있었던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롬 1:4]. 그러나 또한 '사람'으로서 부활하신 것이다. 왜냐면 사람으로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으신 것은 아니니 '하나님'께서는 죽으시는 법이 없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사람으로서의 사이는 영혼과 육체의 사이다. 우리 영혼과 육체가 불가분인 것처럼 바로 그와 같은 의미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아담의 육체를 먼저 지으시고 그 영혼을 조성하실 때 그 코에 숨을 불어넣으셨던 형용을 해 보이셨던 것이다[요 20:22]. 따라서 우리의 육체의 감각으로 내 영혼을 인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래서 과학자들은 직접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없다 하여 영혼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있지만] 나와 이렇게 불가분의 하나로 계시지만 주님을 우리 육체가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다는 그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육체를 가진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함께 있을 때처럼 그렇게 가까이 있는 의미와 하나도 다름이 없고 아무 차이가 없다. 때문에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16:7] 하신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을 통해서야 성령으로 우리 각자에게 임하여 오시어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현재 내게 오시기로는 성령으로 오시되 사람으로서 오심이니 사람은 육체가 있는지라 그래서 육체로서 오신 것과 아무 다름이 없다 한 것이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오시되 사람으로 오신 것과 똑같은 것이다. 또한 성령으로 오시니 아버지 친히 내 안에 그대로 임하여 오심이니 그리스도[아들]와 아버지께서는 항상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 바로 "성령"으로 계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와 같이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인즉 그리스도 친히 그 영으로 내게 임하심은 내[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영원히 존재하게 되어 있는]가 내 육체에 임한 것과 같이 된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20:21]는 말씀을 하시고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엄연한 사람으로서 계시되 내 영혼처럼 계심이다. '사람'이시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내 영혼처럼 계심이 가능한 일임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둘이 하나가 되어 영원히 존재하게 되니 영원히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빌 1:21]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은 바로 '나'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고후 5:15/롬 14:7-9]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삶으로써 비로소 우리[그리스도와 나]는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 구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중심 곧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고 발붙이지 못한다.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가 된다면 그것은 내가 자의적 선택에 의해 자기중심으로 변환됨이니 이 상태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밟고 또 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가 된다[히 6:6/10:26,29]. 이것은 항구적인 파탄이요 멸망이다.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함이니 이는 영원히 용서가 없는 까닭이다[히 10:29/마 12:31,32].

그러므로 상황은 명백해진다. 자기중심으로 처음부터 나감으로써 회개하지를 않거나 처음에는 회개했으나 중도에 자기중심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세를 취하게 될 때 내 안에 그리스도의 계심은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부담이 된다. 왜냐면 내 자신이 생각해도 언제 어느 때에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성령을 욕되게 할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만일 그런 자기중심에서 성령을 모셨다고 가정할 때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이니 실질적으로 그런 상태에서는 그 누구도 성령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구원될 수 없음이다] 항상 불안 속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되"[빌 2:12]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함"[4:4]으로써 이루는 것이지, 만일에 이런 사랑의 기쁨 또는 장차 누리게 될 천국에서의 생명과 "좋은 날을 보게"[벧전 3:10] 될 평안과 즐거움이 없다면 절대로 이룰 수 없음이니, 이를 명심할 일이다. 다시 말해 구원 얻은 자가 "이룰" 수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지 못한 이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경고인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마땅히 두렵고 떨어야 했었다. 이는 그가 죽은 자가 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산 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지 않기 위함이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게 되어 있는 것을 잘 알므로 어떤 경우에도 그 선악과를 먹지 않도록 대비함에서 두렵고 떨어야 했었다는 그 뜻이다. 왜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먹게 되는 실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르랴, 그는 선악과를 먹었고 죽은 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항상 복종해야 하고 두려워하고 떨어야 하며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함은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킴이다. 이 세상에서만은 그렇다. 천국에서는 그런 일은 영구적으로 없다. 이 세상만은 시험하는 자 사탄이 수시로 시험하고 있는[눅 4:13] 때이기에 그러하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나와 함께 계신다고 해서 사탄이 나를 범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시험하도록 하나님 친히 허락하신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탄이 이 시험하는 일을 하되 그렇다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딴에는 인생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악의적으로 하는 시험이다[욥 1:11]. 이런 악역을 하므로 아직도 악령들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지 않고 유보되어 있다. 이러한 유보는 현재의 악인들도 마찬가지다. 악을 행함에도 형통하는 것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심이다[롬 2:4]. 시험하는 것도 회개하는 것도 때가 있으니 바로 이 때뿐이고 이 때 한번 지나면 다시는 그런 시험의 일도 회개의 기회도 베풀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성령을 통해 기타 다른 것을 통해 알려주신 이상 오직 나 자신이 이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 하는 그것만이 문제고 이는 전적으로 나의 자유 선택에 달린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그와 같은 악역(惡役) 을 해도 천사가 아무리 막강한 능력으로 나를 보호해주어도 이 선택만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 달려 있고 그 누구도 무엇도 손대거나 간섭하지 못한다. 마치 우주 천하 나 혼자 덩그렇게 홀로 남아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만 일절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심이 없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그와 같이 발로 짓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망령된 짓을 하더라도 그대로 당하시기만 하는 것뿐이다. 나에게 관한 한 영원히 그렇게 내 손에 못박혀 영원히 죽으시는 것이다. 내게 관한 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영원히 그리스도와는 원수지간이 된다. 내 스스로 만든 결말이다. 그러니 어찌 두렵고 떨 일이 아니며, 내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는 말이 실감 나지 않으리요. 왜냐면 내게 주신 은혜의 구원이 내 스스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느냐 않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지 아니한가!

말하자면 거룩한 천사들은 그런 일 곧 하나님을 망령되게 떠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그와 같은 위치를 유지하고 있음이요 악령들은 그 반대로 나갔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을 앞두고 있는 그런 차이다. 이런 엄정한 사실 앞에서 그러한 절박한 성경의 경고를 엉뚱한 것으로 해석해 치워 전적으로 무시하는 데에서 무슨 복음이 제대로 전달되랴. 이 자체가 얼마나 무서운 현실인가. 사탄의 완전한 조종 아래 있어 "눈을 뜨지"[고후 4:4/행 26:18] 못하는 엄청난 참상의 비극이다.

이런 소름 끼치는 현실 앞에서 두렵고 떨라는 것이다. 우리가 직면해 있는 현실이 바로 이런 것이다. 사탄이 눈 뜨지 못하게 함으로써 거의 모든 인생들이 이 세상을 장미 빛으로 착각하고 있다. 사탄이 강제로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에덴낙원에서의 비극처럼 어디까지나 인간[아담]의 동조 아래에서 자행되는 일이므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사탄 탓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으니 오직 자기 탓만 할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두고 자기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이를 갈고 슬피 우는 것이다. 영원한 불 가운데에서의 고통도 고통이지만[눅 16:24] 자기 자신에 대한 후회막급의 통한(痛恨)이 더 괴로운 것이 아니랴.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캄캄한 "어두움"에 비하셨고 "사탄의 권세"로서 설명하셨다[행 26:18]. 앞에서도 아람 군대의 포위 아래 사마리아 성민들이 죽음의 고통에서 헤맸음을 소개했거니와 이 세상이 바로 그러하니 바로 이런 사실에 눈 뜨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는"[요 6:45] 것이다.

이런 처참한 당면 위험에 직면해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이들은 "말씀이 어렵다"는 둥 하고 핑계와 변명을 할 여유가 없다. 그 무슨 말씀을 하시든 모두 수용하여 오직 베드로처럼 "생명의 말씀이 계신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68] 하게 되어 있다. 때문에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65/44] 하셨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폴레옹은 부하들에게 "진실된 정보를 알리라"고 노호(怒號)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진실된 정보다. 사탄은 온갖 가짜 정보를 흘려놓았다. 이 세상 자체를 그런 배경으로 깔아놓고 가려놓았다.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을 수는 있다. 구원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믿음"과 "구원"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자에게 해당된다. 모르면, 비록 왔다 치더라도 떠나게 마련이다. 당시의 많은 제자들도 그래서 미련없이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자기 발로 떠나가 버린 것이다. 이것이 엄연한 무서운 현실이다. 현실을 직시하라. 그래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우는 자가 복이 있어 장차 웃게 될 수 있다고 하셨다. 그 대신 웃는 자는 울게 될 확률이 크다고 경고하신 것이다[눅 6:25,21].

이런 점에서도 양면성의 원리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 어두운 것으로만 일면만을 보지 말라는 것이니 이러한 참담한 인간 세상의 현실이지만 누구나 믿고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찬연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음이다. 분명 전혀 다른 의미의 또다른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자기 형편을 탄탄대로를 걷는 형통 일변도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영원한 그리고 참담한 비극적 미래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음이다.

당신이 이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 그 어두움의 미래는 당신을 한 입에 삼키고 말 것이다. 죽은 뒤의 상태가 어떻다는 둥 소위 "임사(臨死) 체험"을 한 이들의 말은 사탄이 농락하는 거짓이요 속임수이다. 악령들은 넉넉히 그런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상식대로 판단하라, 양식을 따르라. 소위 지식은 거짓된 것으로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 부여하신 인간 이지(理智)는 정직한 대로 활용하면 절대로 속이지 않는다. 한 곬으로 치우쳐 흐르는 자신의 욕심이 그 총명함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다[롬 1:28].

극과 극의 대립이니 곧 죽음과 생명의 양자 선택이다. 지금 이 때 그리고 이 세상이라는 위치는 바로 그런 선택의 장소이다. 그 외의 의미는 일절 없다. 3위1체의 원리로 판단하라. 양면성의 원리다. 그래서 이 세상이 죽음인지 생명인지를 스스로 결론 내려 보라. 생명에는 이런 인간고가 있을 까닭이 없다. 고로 필시 이 세상은 죽음인 것이다. 죽음이 갑일 리가 없다. 생명[갑]이었는데 거기서 죽음[을]이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의 도리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벌어들인 결과가 현재의 이 죽음이다.

고아(孤兒)가 된 자식을 찾으시려는[요 14:18] 어버이의 몸부림이 현재의 하나님의 모습이시다. 한 마리의 양 새끼라도 끝까지 찾겠다는 선한 목자의 애씀과 힘씀과 수고의 때이다. 바로 이 일을 하라고 우리 각자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요 20:21]. 이 힘씀과 애씀과 수고는 바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이룸"[빌 2:12]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성경에 그 숱한 경고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이 경고를 무시하고서 어찌 무사하기를 바라리요.

그러므로 성경에서 천국을 위해 자진해서 독신으로 평생을 마치는 이도 있으니 이를 받을 만한 이들은 받으라 하신 것이다[마 19:12]. 바울 사도는 자기처럼 모두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는 것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충성된 마음으로 교회에 경고했다[고전 7:1-40]. 따라서 먹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현재 가진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했고[히 13:5/딤전 6:8], 도둑질하던 이들은 이제는 선한 직업을 가져 생활을 하되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함"[엡 4:28]이 그 목적임을 분명히 하여 가르쳤다.

다시 말해 스스로 벌어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의 구원의 복음이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사는 것을 가르치고 단지 영생하는 것이나 목적하는 종교가 아니므로 매일 모이는 것이 정상이다[히 3:13/행 2:46]. 일상생활로서의 필요에 의해서 모일 뿐이지 그것이 어떤 종교적 계명이기 때문에 모이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일상생활이지 하루 걸러 또는 일주간에 한번씩 생활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피차간의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다[히 10:24].

남의 종으로 있으면서 구원 받은 이들은 이후에 자유인이 될 수 있어도 차라리 종으로 평생 지내면서 복음 전도의 일을 하라고 바울 사도는 가르친 것이다[고전 7:20-22]. 종이라는 같은 형편에 있는 이들을 상대로 전도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종으로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살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형제를 혹 실족하게 하면 고기를 평생 입에 대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사는 것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세상 삶과는 결별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 설명과 같은 사실에서 오는 상식이요 인간 양식(良識)에 의한 판단인 것이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기 때문에 영원하고도 행복한 삶의 핵심이 되어 있는 자기 부인을 부정하고 기피하는 것이다. 살려면 철저히 사는 것같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사는 것 자체를 철저히 외면하고 오직 일하는 데에만 전력을 기울여도 이 세상에서는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 아닌가.

어찌하여 어정쩡하게 있다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채 멸망으로 들어가려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면 하나님의 아들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 신령한 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 내일도 기약 못하는 이런 한시적인 구차한 생명의 육체를 끌고 살고자 허겁지겁 나댈 일이 아닌 것이다. 내일도 장담 못하는 인생 살이에서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자 하기만 한다면 어느 여가에 전도하고 "보내신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룰"[요 4:34] 수 있다는 말인가. 성경 지식이 있는 자로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를 의도적으로 비틀어 억지 해석으로써 스스로를 멸망시키려 하지 않을진대 성경을 이와 달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 하셨다. "들어가려 해도 못들어가는 자가 많을 것"[:24]이라고 미리 엄중한 경고를 하신 것이다. 뿐 아니라 핍박을 항상 각오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들의 행동을 보고 이 세상 임금이요 신(神)인 사탄이 절대로 좌시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핍박을 받아 집도 헐리고 가산(家産)도 몰수되는 판에 어찌 이 세상과 벗하고 더불어 잘 살겠다고 마음이나 먹겠는가. 성경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경우에만 그런 헛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핍박의 대상이 되시어 죽음을 당하셨으니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시 반드시 그러한 일을 당할 것임을 누차 경고하신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도 밝혔지만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각오를 하고 믿어야 함을 명백히 하시어 믿음에 들어서기 전에 자기 부인을 해야 하고 사형수가 자기의 사형당할 십자가를 지고 가듯이 날마다 그렇게 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아예 주님을 따를 마음을 접으라 하신 것이 망대 비유의 경고다[눅 14:25-35].

그러니 앞에서도 밝힌 대로 생명이냐 죽음이냐 하는 양자 택일이다. 이 세상을 죽음으로 인식하지 않는 한 절대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 세상의 안목에서 세상 기준으로 따져 말하면 죽음의 고난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겉으로는 생명인 것같아도 죽음인 줄 분명히 인식한다면 비록 겉으로는 죽음과 같아도 진정한 생명인 십자가의 도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이 교회에 그대로 머물러 여전히 구원 받았다고 하고 천국에 들어갈 줄로 아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고 경고한 것이다[빌 3:18]. 천국 가는 길이 험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생명으로 착각한 까닭이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가르치는 성경의 교훈을 무시하는 결과다. 지금은 그 어디로 가나 무엇을 보나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다. 그래서 "구원"을 말함이 아닌가.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령으로써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의 세계는 장차 오게 되어 있다. 지금은 아니다. 때가 아닌 것이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즉 자기를 위해 사는 것으로[고후 5:15/롬 14:7-9] 이 한 때를 착각하는 이들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에게 멸망의 심판으로써 적 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성경에서 명백히 하고 있는 대로[살후 2:3-12],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다름아닌 이 세상 삶을 사랑하여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을 이름이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자가 어찌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한다는 말인가[눅 14:33]. 이러한 경고를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어긋나게 행동하면서 어찌 그 말씀으로 인한 구원을 감히 바라보려 하는가. 그것은 황당한 모순이 된다. 3위1체 원리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은 항상 양자 구조다. 죽음 아니면 생명이요 생명이 아니라면 죽음이지 그 중간은 없다. 오늘날 세계가 생명이 아니라면 [인간에 관한 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반드시 죽음이지 그 중간일 수도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생명이시지만 현재 성령으로만 우리와 함께 계시고 육체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 명백히 '사람'으로서 계시지만 육체의 측면으로는 계시지 않으니 육체[신령한 것이고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닌]의 측면으로 나타나시면  그것은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때문에 생명의 때가 되기까지는 하늘이 육체로 계시는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행 3:21]. 이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인"[:14]이시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실 때에는 죽음의 육체를 입으시고 세상에 계시다가 말 그대로 죽임을 당하신 것과 상통한다.

현재의 이 세상은 철저히 죽음의 질서요 영역이다. 생명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생명의 때가 와야 생명은 생명으로서의 제 빛을 발하는 것이다. 물론 생명의 역사(役事)는 연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역사다. 따라서 생명의 때가 오기 전에는 생명의 낙을 누리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생명의 체제는 한 몸의 구조이므로 다 함께 고통을 받고 있는 지금 이 때이기에 그러하다[롬 8:22]. 하나님 친히 우리와 더불어 고통 중에 계신다고 했으면 말 다 한 것 아닌가[골 1:24/행 26:14]. 우리와 영원히 몸과 머리 관계로서 한 몸 체제에 계시기 때문이다.

한 몸 구조로서 둘이 하나됨이 사랑이다. 둘이 하나됨에는 그 하나됨의 구조를 이루는 영원한 방법이 있다. 엄연한 자주 독립성을 띤 개체끼리의 하나됨이나 그 어느 것도 따로 독립되어 존재하거나 활동하지 않고 즉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반드시 상호 교차하여 오직 상대를 위하여 사는 것이다. 남녀가 육체로 한 몸이 됨도 이러한 법칙을 따름이니 즉  남자의 몸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고 여자의 것으로서 여자가 좌우하고 여자의 몸 역시 남자가 주인이다[고전 7:4].

자유 평등이라는 것은 이런 하나됨에서만 이뤄지는 귀한 권리다.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에게 종 노릇함으로써 얻는 것이니 이는 역설적이 아니라 지극히 사리에 맞는 이치다. 예속되고 종속됨으로써만 비로소 완전한 자유가 탄생하는 것이다. 단 하나됨에서 그러하니 곧 사랑 가운데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그들의 소위 "해탈, 열반"이라는 것을 설명하여 "완전 자유"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도 말하지 않고 하나됨도 말하지 않는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더더욱 말하지 못한다. 왜냐면 그리 되면 머리로서의 창조자 하나님을 부득불 시인해야 하는 까닭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들의 소위 "자유"를 자기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결과라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모든 악의 근본인데 자기를 위해 스스로 이룬 자유라고 하니 전부가 모순일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일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하나됨의 사랑은 죽을 정도로 노력을 하되 단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를 이룬 자기 상대를 위함이라는 데에 유일한 특징이 있다. 죽을 정도의 노력이라 하는 것은 죽기까지 사랑함을 말함이다.

죽든 살든 자기 상대를 위하여 그렇게 한다는 뜻이니 그 가장 좋은 본보기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시고 남김없이 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다[갈 2:20].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롬 5:8/요 15:13]. 이것이 "자유"의 개념이요 그 올바른 정의(定義)다. 즉 하나됨을 이루기 위한 다시 말해 사랑의 상대를 위한 자주 독립성인 것이다. 일체의 개인적인 노력이 바로 이 공동체 의식, '하나' 의식, 한 몸 의식에서 오는 것이다.

이를 떠나서는 일체의 자유가 허공에 뜬 무의미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이나 영물 등 인격성을 갖춘 피조물에게 이런 절대적인 자유 의지를 행사하게 하신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얼마만큼 절대적이냐 하면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자기 스스로 결정할 정도다. 이만하면 더 이상 가는 자유는 없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자유 때문에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자기 스스로가 망치는 경우가 있으니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의 말로가 그러하다.

첫 사람 아담도 멸망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현재와 같은 인간고를 잉태시킨 죽음에는 이른 것이다. 그가 멸망에 이르지 않았던 것은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로서 그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신령한 몸을 잃고 이 찰나적인 자연계에 속한 한시적인 생명체로 되돌아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계에만 속할 뿐 아니라 자연계에도 속한 그 속성상 [애초 그 육체는 자연계에 속한 몸이었으므로] 영물들보다도 지식이 열등하여 그들의 자문(諮問)을 받아 행동하게 되어 있었기에 그 정도로만 그친 것이다.

다른 모든 일에서는 영물[천사]들의 지식에 의존하는 인간이었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만은 독보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양"으로서 그들보다 먼저 창조되었고 그들은 인간[아담]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영리한 사탄은 이 하나님의 말씀의 영역에서 인간을 아주 못쓰게 요절을 내어버린 것이다. 사탄의 꾐에 넘어가 인간이 그 고유의 권위를 상실해 버렸으니 자동적으로 악령 사탄의 발 아래 무릎 꿇리게 된 것이 오늘날 사탄이 인간 세상의 신(神)이 되어 있는 연고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필요한 알 만한 지식이 알려진 다음이므로 차후 범죄하면 영물들과 같은 운명인 멸망이다.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그렇고 처음에는 믿었으나 중도에 그 믿음을 저버려도 마찬가지 결과가 된다. 기회는 한번뿐이요 연속해서 베풀어질 필요가 없는 것이니 이미 각자는 그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으로써 자기 갈 길을 정한 다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세상이 바로 그 한번만의 기회에 속한다.

그러므로 기회를 잡아 생과 사를 스스로 택하여 자기 운명을 가름하는 때이지 철부지 아이처럼 우선 살고 보자는 그런 장소와 때가 아닌 것이다. 인생 삶을 내일도 기약 못한다는 이 단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인생은 갓나서도 죽고 10, 20, 30 대 등 짬도 없이 죽어 나가지 않는가] 인간 이성과 지성으로써 능히 이 사태를 짐작할 수 있고 실상을 꿰뚫을 만한 것이요 이런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미친 마음"[전 9:3]을 자제할 수도 있는데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불교도 자비를 말하지 않는가. 종교치고 사랑과 자비와 인애를 멀리하는 교리가 있던가?" 할 것이다. 사랑과 자비, 인애가 진정 무엇인지 이미 앞에서 정의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상대를 위해 살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에 있다고 설명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시라 하는 것은 만유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가리켜 하는 말이므로, "하나님도 사랑이시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랑의 근본"이시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랑 자체가 불가능하고 존재할 수 없다는 근원적 사실을 말함이다.

바로 3위1체의 원리가 사랑의 원리 또는 법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위하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위할 수 있게 되고 나를 위하지 않게 되는 것이요 이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을 사랑의 핵심이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은 이기적인, 이름만의 "사랑"이라 할까. 장차 나타날 악의 화신(化身)이라 할 적 그리스도가 바로 이런 "사랑의 화신"으로 자처하고 나설 것에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의 근본 또는 법칙과 원리를 가르침으로써 자기 부인을 가르치는 성경에 거짓이 있고 속임수가 있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면 모든 거짓은 욕심 곧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남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는 자기 목적 달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양면성의 원리에서 진리 아니면 나머지는 일체가 다 거짓인데 과연 불교의 자비무적(慈悲無敵)이라 가르치는 것도 거짓인가 할 것이다.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든 무엇을 신앙하는 이들이든 자기 믿는 것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믿고 그래서 남을 속이려는 마음을 그네들의 종교를 선전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들 자신들도 속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교조(敎祖)도 한 인간일진대 그 역시 속은 결과다. 그와 같은 당치도 않은 것을 논리적으로 그럴 듯하게 꾸며 만들어낸 악령 사탄이 모든 인간을 그런 것으로써 속이는 자이다. 신[사탄-고후 4:4]과 육체[인생]의 차이인데 인간이 신의 속임수에 아니 넘어갈 재주가 없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내용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왜 거짓이고 속임수인지 그 이유는 지금까지 이 글을 통해 반복적으로 설명해온 그대로다. 모든 진위(眞僞) 여부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및 영물들에게 이성과 지성을 주신 것이다. 상식도 여기에 속한다. 에덴낙원에서의 아담 부부도 이성적으로 제대로 판단하면 사탄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안넘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명백한 일이 아닌가. 피조물의 말과 조물주 하나님의 말 어느 것을 믿어야 하는가. 피조물 사탄은 인간을 만들지[만드는 것은 낳는 것과 같은 의미다] 않았으니 사랑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보다 피조물의 사랑이 더 클 리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또 만일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꺼려하신다면 그런 선악과는 만들지 않으시면 될 일이다. 사랑은 피차간의 신뢰에서 시작한다.

고로 하나님께서 만유의 근본이시고 하나님 이상으로는 아무도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비록 거짓말을 하신다 치더라도 그 거짓말을 말씀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죽어라 하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성적 판단이다. 같은 피조물의 말을 믿고 따르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라고 판단했어야 이성적이다. 우리가 불교의 교조 싯달다를 두고 말할 때도, 당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었으므로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고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시어 회개하라 하셨다"[행 17:30] 한 대로,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그 무엇을 가르쳤든 그래서 어떤 거짓말을 진실인 줄로 속아 넘어가 믿었든 그것을 허물하지 않으시고 오직 지금은 그리스도의 시대이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석가도 만일 그리스도의 시대에 태어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리스도를 달갑게 받아들였을지 뉘 알겠는가. 고로 석가가 어떻게 믿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느냐 아니 믿느냐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석가도 일개 인간이었고 나도 인간이다. 인간은 연약하여 오류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의 나의 태도 여하가 만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유(萬有)를 지으신 창조자이시다. 당시 아담을 만드셨던 하나님이시다. 아버지께서 이 아들과 하나로 계셨으므로 이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만유를 지으셨다는 그 차이뿐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과의 엄청난 차이가 아닌가.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생명 아니면 죽음으로서 그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묻거니와, 불교도들이 열반, 해탈에 들어갔다 하면 그것이 죽음의 상태인가 아니면 생명인가.

죽음이라 할 것이 아니면 생명이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생명의 상태라면 왜 열반, 해탈에 이르고도 해탈하지 못한 일반 세상 사람들처럼 죽어버리는가. 죽음과 생명과의 차이가 있어야 그 둘을 구분할 것이 아닌가. 그냥 말만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말이야 누구인들 못하겠는가.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생명 가운데 있어 현재 산자가 되어 있으므로 믿으면 당장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의 사람들도 죽는가?" 하고 묻지 않겠는가.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따라서 합리적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죽으실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와 하나되심을 통해 산 자로 만드시고자 일부러 사람이 되셨고 영원히 사람이 되신 것이다. 영원히 사람이 되신 것은 내가 아무리 영생해도 사람이지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에 나와 영원히 하나가 되시려는 목적인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와 나는 몸과 머리 관계에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닮은꼴이 됨은 당연하다. 그리스도와 달라서는 안된다. 본질이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일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맡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 친히 우리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이 사람 살리시는 일을 계속하심이니 이 죽음의 세상에서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죽은 자의 죽음의 고통을 함께 하지 않고는 그를 나와 같은 산 자로 만들 수가 없는 까닭이다.

생명은 하나됨 즉 한 몸이 되는 체제만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한다"[고전 12:26]고 한 꼭 그대로다. 그래서 나 위하여 사람이 되셨고 나 위해 죽어주신 것이다. 바로 이 이치를 따라 나를 살리려 하심이다. 고로 나도 머리의 지시를 받들어 사람들을 구원해내려면 바로 이 방법 외에는 없는 고로 우리가 마치 죄인처럼 고난 받고 때로는 참혹하기까지 한 죽음을 핍박당함의 결과로써 뒤집어쓰기도 하는 것이다.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의 구조이냐-한 몸의 체제가 아닌가. 고로 하나님의 명령은 회개하라는 것이니[행 17:30] 다시 말해 돌이켜 즉 180도 전향하여 악함을 버리라는 것이다[3:26]. 악함은 자기중심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한 몸 체제를 유린하고 파괴함이기 때문이니 생명의 구조를 망가뜨리는 것이므로 죽음이요 자멸행위다. 이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악하다' 하는 것이다. '선한 것'은 '좋은 것'이다. 사리에 맞고 틀리지 않고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고전 12:27]이라 여기에 진정 자유가 있고 평등하며 자주 독립성을 구가하는 것이다. 머리와 몸의 구별이 엄연한데 어째서 평등하느냐 하면 사랑 가운데에서 하나이므로 평등한 것이다. 머리를 위시해서 모두가 나를 위하고 섬기니 내가 마치 머리라도 된 양으로 상전 받들 듯이 떠받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만 아니라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 모두가 이러하니 이 어찌 평등이 아니리요. 이보다 더 이상적인 평등 개념이 있는가.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원하지 않는 일을 아니하며 내가 주인 격으로 사랑 가운데 움직이고 있으니 그야말로 완전한 자유다. 나를 제지할 이 아무도 없다. 나를 강제할 이 또한 아무도 없다. 이 이상으로 자유의 개념을 설정할 수 있는가. 한 몸의 구성으로 나는 전적으로 이웃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함이 없으니까 그런 것이다. 만일 내가 자기중심이라면 그 반대일 것이다. 내가 자기중심이면 모두가 자기중심일 것이니 서로가 서로를 제약하고 강제하고 간섭하고 강압하니 내가 비록 최고 정상의 위치에 올랐다 한들 내 지위를 탐하는 이웃들이 음으로 양으로 나를 이용하려 들므로 그것이 내게 대한 견제다.

편안한 날이 있을 수 없으니[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나는 끊임없이 내 주변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 편안히 눕고 싶은 때라도 주위에 대한 감시의 눈을 번뜩이기 위해 눕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이 부자유다. 이러한 한 몸됨의 자유를 말하지 않는 한 불교가 아니라 그 어떤 종교일지라도 자유와 평안과 기쁨, 한 마디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인간 망상, 망념(妄念)이 지어낸 허구로 가득 찬 인위적인 교리일 뿐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우리의 구원일진대 마리아의 중보[mediator] 역할이 무슨 의미인가.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성령으로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처럼 계시는데["고아(孤兒)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요 14:18]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니 이 무슨 군더더기인가. 그리고 개신교인들이여, 그대들은 여전히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악을 행하고도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을 인해 천국에는 넉넉히 들어가는 것이 은혜요 선물이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 선전하고 자신을 속이고 있다.

악을 행하면 다시 말해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명심할 일이다[마 7:21]. 그리스도와 하나됨은 그냥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기만 하면 되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갑을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이 절대적으로 변할 수 없는 상호 관계로써 영원히 살기로 작정하는 것이 회개다. 다시 말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머리가 되어 계시는]를 위해 살기로[고후 5:15] 하나님 앞에서 약속함으로써 이 약속대로 이행하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시험의 목적이다.

이 시험에 대처하라는 성경의 무수한 빗발같은 경고를 무시하고서 무슨 근거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장담하고 그렇게 태평인가. 그리스도께서는 "힘쓰라"[눅 13:24]고 경고하셨다. 천국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이 아니라 산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람 구원하는 일에 힘쓰라는 뜻이다. 단 이렇게 힘쓰고 않고 하는 것이 나 자신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기에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는 것이다. 왜냐면 앞서도 지적했듯이 이것 아니면 저것일 뿐 그 중간은 없는 것이 만유의 원리 즉 3위1체의 법칙임이다. 산 자로서의 행함이 없으면 죽은 자라는 증거인 것이다[약 2:20,26].

영계의 존재도 3위1체 원리에 의해 증명된다. 하나님 친히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되어 계심이다. 바로 이와 같이 하나되어 계심에서 만유의 원리[3위1체 법칙]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그 계시는 모습대로 만물을 창조하신 까닭이다. 그 증거가 3운법칙의 구조인 것이다. 3운법칙도 그 만유(萬有) 가운데 하나일진대 3위 1체의 원리대로 그 구조가 되어 있을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3운법칙이 3위1체의 원리를 증명한다 함이다.

이 영계(초자연계)와 자연계를 구분하여 모든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성경뿐이다. 여기서도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사람의 영생이 이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 육체 자체로는 절대로 불가능함을 가르치는 것도 성경이다[고전 15:50]. 3운법칙의 구조를 보면, 3위1체의 원리를 마치 구도화(構圖化)하여 설명이나 하듯이 아주 교묘하고 세일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구성 자체가 이러한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까닭에 3운법칙 자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 인류 개개인 한 사람씩의 생애를 일일이 분석함으로써 예외가 혹 있지 않을까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 구조 자체가 일정한 메시지를 구성하고 있는 이상에는 그런 구조에 의한 3운법칙이 무오(無誤) 정확함을 자체적으로 천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내용이라는 것이 3위1체 원리의 구조식(構造式)이라는 데에서 그렇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도저히 죄를 지을 수 없다 함이 이 때문이다[요일 2:1,29/3:6-10/5:18/고전 15:33,34/벧전 4:1/히 2:14,15/요삼 1:11/롬 2:7,10]. 다시 말해 다시는 자기중심 즉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롬 14:7-9]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머리의 지시만을 충심으로 따르는 복종만이 있어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유지하는 것이 생명의 낙이요 즐거움이요 평안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 다시는 나 혼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와의 동거(同居), 동행(同行), 동역(同役), 동고동락(同苦同樂)이다. 영원히 불가분의 사랑 관계로 하나됨이다. 그래서 남녀 부부됨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것이요[고전 7:32,34] 부모자식간의 관계보다 첫째로 삼는 것이다[마 10:37]. 모든 인간 관계보다 최 우선으로 위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이것이 정상 위치이므로 나 자신 먼저 이 정상적인 자리에 발을 굳게 딛고 나서 그들을 역시 이 정상적인 위치로 끌어들이기 위해 진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글로써 그리스도 복음의 윤곽만을 그려놓았으니 여기에 살을 붙이고 그래서 온전한 보기 좋은 모양으로 꾸미고 단장하는 것은 독자 자신에게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담당할 일이다. 뼈대만 제대로 얽어두었으므로 그런 것이다. 열매를 맺되 30배, 60배, 100배의 격차는 순수하게 독자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이는 지혜도 지식도 소위 역량도 아니고 오직 사랑 하나로써 달라지는 차이다. 때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당부라도 하시듯이 베드로더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말씀하신 것이다.

좋은 것[善]을 말했다. 나쁜 것[惡]은 말하지 않았다. "사람아, 주님께서 선한[good]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 올바름)를 행하며[to do justly]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to walk humbly with your God"이 아니냐"[미 6:8] 하심과 같다. 이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인 것이다[롬 8:4]. 사람을 올바르게 행하도록 그리고 인자를 사랑하도록 선하게 살도록 지으셨으니 그와 같은 뜻을 따라 겸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 이상으로 행복이 어디 있으리요.
 

§ '종교 생활'과 '일상 생활'

세상 종교는 단순히 영생하자는 그 생각뿐이다. 물론 산다면 행복하게 살아야 하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 방법을 말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람의 처지에서 하는 말이고 이런 모든 종교 생각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의 조종 아닌 것이 없는 것이기에 사탄은 알면서도 그 진리를 감추고 거짓으로 말하는 것이어서 이를 속임수라 하는 것이다.

반면 성경의 진리가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은 영생은 일단 시켜놓고 즉 영생하는 자로 우선 만들어놓고 다시 말해 구원해놓은 다음에, 그와 같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 다시 말해 그 영생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방법대로 이 세상에서 제대로 처신하는지 여부를 다루어보는 것을 말함이다. 이 다루어보신다는 것은 아담을 죽은 자로 만드시지 않았건만 스스로 죽은 자로 자신을 만들만큼 처음부터 죽음의 삶의 기로에서 양자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을 말함이다. 또한 많은 영물들을 똑같은 생명[영생]의 상태로 만드셨으나 즉 영원히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셨으나 그들 스스로 자기 선택에 의해 일부는 거룩한 천사들로 나머지는 악령들로 스스로 운명 짓게 하심과 같은 의미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남느냐 아니면 악령들처럼 혹은 아담의 죽음처럼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취하느냐 하는 그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각자 위치한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 종교는 그것이 아니다. 세상 종교와 성경의 진리는 그 내용이 같을 리가 없다. 같은 것이라면 처음부터 각종 종교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요 성경의 진리 역시 세상 종교와 다르게 전파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다르고 제각각이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되어 있고 따라서 성경 진리와 각종 세상 종교 중 오직 하나가 진리일 뿐이요 나머지는 가짜임을 그 자체가 증명하는 바다.

그리고 세상 종교도 하나만 아니고 내용이 다른 것이 여럿이므로 이는 성경의 진리를 교란시키기 위해 속이는 자가 만든 것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결론은 성경대로 말하지 않는 그 무엇이든 속임수라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진리일 수밖에 없다. 그 진리라는 증거는 앞서 지적한 대로 사람 삶의 올바르게 사는 방도를 가르치지 않고 그저 막연히 영생하는 것만 찾고 행복하게 산다는 식의 추상적인 말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리는 종교를 말하지 않는다. 삶을 말하고 일상생활을 말한다. 살되 현재 이 세상처럼 각자 혼자 사는 것을 말하지 않고 남녀 둘이 하나되는 것과 같은 양상으로 둘이 짝을 이루어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 짝을 성경에서 "친구"[요 15:15]라는 말씀으로 설명하시고 있다. 친구가 무엇이냐 할 때 상대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 마음만 먹으면 상대 스스로가 하듯이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을 때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3위1체 원리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와 같은 것으로서 여기서도 갑과 을의 차이는 명백하여 갑은 을에 대해 모든 것을 알되 을이 자동적으로 갑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갑이 자기를 을에게 알려주는 것에 한해서 갑을 안다는 그 차이다. 갑이 알려주지 않는 한 아무리 갑에 대하여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다. 갑과 을의 차이이니 이는 머리와 몸의 차이이기도 하다. 즉 파생(派生)시킨 자와 파생되어 나온 자와의 엄격한 구별이다.

그래서 몸의 각 지체는 많아도 머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지체는 많아도 머리는 하나라야 한다. 다시 말해 각 지체로 구성된 몸을 자기 자신처럼 모든 것을 아는 머리라야 머리가 되는 것이지 몸의 각 지체가 서로 상호 협의하여 순번으로 머리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더 분명히 말하면 머리 자신이 현재 몸을 구성하고 몸의 각 지체를 파생시켰으므로 즉 자기가 낳은 자식들이기 때문에 그 자식들에 관한 한 머리 곧 그들을 낳은 어버이 격이 되어 있는 머리가 알지 여러 지체 중에 아무리 출중하게 뛰어난 자가 있더라도 같은 지체가 되어 있는 자기 이웃을 제대로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머리가 되려면 몸의 각 지체를 다 잘 알고 있어야 함이다. 따라서 각 지체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머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 각 지체에 관한 한은 머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왜냐면 자기에게서 났기[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요 머리 역할을 할 수 있음이요 따라서 머리가 있으니 이제 비로소 여럿 곧 그 머리에게서 난 각자는 그 몸의 지체 역할을 할 수 있어 한 몸으로서의 체제가 될 수 있고 훌륭히 그 기능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세상 종교는 가르치지 않는다. 왜냐면 알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 설명과 같이 머리가 되시는 창조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데 그런 이치를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세상 종교는 아무 내용 없는 빈 깡통과 같다 하는 것이다. 빈 깡통일수록 요란한 것은 사실이다. 이 '요란한 소리'에 비유되는 것이 이른바 각종 종교 의식이다. 그들이 위하는 대상의 종교 전당이 있고 특정 의식을 집행하는 특정 계층[사제직]이 있고 거기에 따르는 각종 제도가 있게 마련이다.

속 내용이 없으니 이런 것으로써 그 속임수의 특성을 가리고 숨기고 그 반면에 두드러지게 강조할 것은 강조함으로써 넋을 빼놓아야 다시 말해 실질적인 내용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도록 교인들의 정신 상태를 잡아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여려 세상 종교 중 그래도 형식상으로는 성경 진리에 가깝다고 하는 개신도 알고 보면 마찬가지다. 그들이 언필칭 "성전"이라고 하는 특정 건물이 그것이다. 그런 건물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이상 당연히 거기 따르는 각종 종교 의식과 그 의식을 특정일[그들은 이 날을 예배일이라 한다] 집전하게 특수 계층이 있게 마련이다.

"기독교 등 세상 종교는 여럿이니 그것을 다양성으로 보아야지 특정[그들이 "특정"이라 말할 때는 성경을 지칭한다]의 것을 기준하여 그와 상치될 때는 무조건 미신이라, 거짓이라, 속임수라 한다면 타 종교도 그와 같은 배타적으로 나올 것이니 진리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와 비(非)진리 또는 반(反)진리의 특징은 앞에서 그 윤곽을 말했다. 이는 합리성 또는 논리성과도 통하는 것이다. 즉 진리의 특징은 그 정연한 논리성에 있는데 반해[이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진실이요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아닌 것은 지어낸 것이기 때문에 횡설수설에 가까워 요령부득(要領不得)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반면에 성경에 가르치고 있는 내용은 그냥 삶 곧 일상 생활이다. 일상 삶에서 하나님을 어버이보다 더 가까우시고 자상하신 분으로 제대로 바로 알아 "아버지"라 하는 것이며[마땅히 아버지 또는 어머니라 불러야 하나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피조물이 아니시기 때문에 성별이 있으실 까닭이 없으므로 그냥 대표적으로 "아버지"라 하는 것뿐이다], 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을 친구라 하여 남녀간의 둘이 하나됨[한 몸됨]보다 더 근본적으로 가까운 한 영으로서의 짝으로서의 둘이 하나되어 함께 사는 삶이니 아무리 정겨운 인간 삶의 그 어떠한 친밀한 관계라도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러한 인간 관계보다 더 친밀한 관계일 뿐 아니라 엄연한 법질서 차원에서도 그러한 것이니 곧 머리와 몸의 관계다. 이 법질서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자기 부인"[마 16:24]인 것이다. 다시 말해 머리가 몸을 위해주니까 몸은 자기를 위하지 않는다. 다음에는 머리는 갑으로서 을에게 그와 같이 본을 보여주는 것이니 즉 몸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말고 오직 머리를 위하라는 것이다. 머리가 몸으로부터 무슨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머리는 몸의 각 지체를 내었으므로[파생시켰으므로] 몸이 자기의 분신이라 몸이 어떻게 해야 몸이 그대로 유지되는 지를 잘 아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머리가 몸에게 지시하는 것은 몸의 각 지체를 위함이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몸 자체가 머리의 분신으로서 머리에게서 나왔으니 몸에게 좋은 것은 머리에게도 좋은 것이니 머리와 몸은 원래 하나로서 지금 머리와 몸으로 분화(分化)되어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원래 갑 홀로 있을 때를 기준하여 따진다면 머리가 곧 몸이고 몸이 곧 머리다. 몸이 잘 되는 것은 머리가 잘 되는 것이요 머리가 잘 되는 것은 몸이 잘 되는 것이다.

따라서 머리가 몸에게 지시하는 것은 몸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자기를 위해 명령하고 지시하는 머리의 뜻에 몸이 순응하지 아니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몸 자체가 머리에서 나와 갑과 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듯이 을 자체가 갑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을이 현재 따로 개체가 되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은 근원을  따지고 보면 갑의 것이지 을 자신의 것은 아니다. 고로 을은 원래 갑이었던 자신을 갑에게 도로 반환해주는 의미다. 단지 형식이 을이 갑을 위하는 것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갑과 을의 관계 및 머리와 몸의 관계로 비추어보아도 만물이 창조자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았다면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질 리가 없다. 이상 설명과 같은 아름다운 관계가 오직 하나님 친히 만물을 지으시고 그 모든 피조물의 머리로 계시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일이다. 을의 개체 수가 많아 각기 자주 독립성을 구가하여 남남이 되어 있어도 이와 같이 실질적으로는 한 근원으로부터 나왔으므로 한 몸의 각 지체로서의 위치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이기 때문에 이 하나로서 피차간 위하게 되는 것을 사랑이라 하는 것이다. 고로 창조주 하나님 없이 사랑이라는 것을 거론할 수조차 없건마는 어리석은 인생들은 악령 사탄의 부추김에 따라 창조주를 부정하고 만물이 저절로 생겨났다는 둥 우연의 산물이라는 둥의 당치도 않은 상식적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기상천외의 각종 사상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도 그러하고 남녀간의 사랑도 그러하고 동기간의 사랑도 그러하다.

이렇게 둘이 하나되는 관계를 사랑이라 하는 것이다. 처음 시작이 없었다면 즉 원인 그리고 제1원인이 없었다면 만물이라는 것 그리고 사랑이라는 결과물이 생성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에 첫 단추부터 잘못 채운 것이 되어 모든 논리가 뒤엉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논리가 아니라 횡설수설이 된다. 자기 부인은 '네'가 있고 '내'가 있어 '갑'과 '을'의 관계처럼 분명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와 '너'는 의식상의 갑과 을 관계다. 모든 것은 내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있음으로써 모든 인식의 세계가 있음이다. 내가 인식하기 때문에 인식할 만한 사물이 있는 것이니 내가 만일 없다면 인식 자체도 최소한 내게는 내게 관한 한 존재할 수가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만물을 내 마음대로 못하니, 내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으로써 인간고(人間苦)가 있으니 내 것이 없다는 것이요. 내 것이 없다는 것은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 결론을 내린다면 이 얼마나 허망한 논리인가.

말이면 다 말이고 논리를 억지로라도 엮어 나가면 그것이 논리가 아니다. 상식과 양식에 기초하여 그것이 현실일 때 한해서만 논맂거인 말이 된다. 비로소 두루 통할 수 있는 의사 표시가 된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공중에 떠 있는 가상적인 것으로써 제 아무리 달변을 토하고 웅변으로 사자후라 한들 한낱 '소리'만으로 그칠 따름이다.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아무 뜻이 담겨져 있지 않은 소리일 뿐이다.

성경의 모든 경고를 무시하는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구원만 받으면 제일이라는 미신이다. 아담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이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어 있으니 이후 어떤 일도 일어자지 않는다고 태평으로 지내라 하셨던가? 오히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스스로 서 있음을 환기시켜 주신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으면 죽음이요 먹지 않아야 현재의 생명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즉 머리로서의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지시에 순응하는 것이 생명의 제일보요 근본이요 기본이라는 의미이셨다.

이것을 처음부터 가르쳐 주신 것은 당연하다. 왜냐면 산다는 것 자체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듯이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의 훌륭한 체제에 있고 따라서 이 한 몸 구조에서 각 지체가 된 이는 자기 할 일을 다해야 바로 그것이 자기 생명을 유지 존속시키는 비결이 되는 까닭이다. 이런 뻔한 일을 일부 영물[천사]들은 지키지 않아 현재 악령들로서 영원한 생명 아닌 반대 현상의 모든 것이 바로 멸망이요 죽음인데 바로 그런 상황 속에 스스로를 끌어들여 가 참담한 미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몸과 머리 관계로서의 한 몸 구조는 참으로 이상적인 삶의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몸으로서의 한 지체 역할을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 나가 되면[바로 이 지켜 나가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을 이루라"이다-빌 2:12] 자기와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 되고 그들의 소유가 바로 나의 소유가 되니 머리이신 그리스도 친히 "나는 너희를 섬기는 자"[눅 22:27]라 하신 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 자신께서 내게 선물로 주셨으니 즉 내 것이니 말 다 한 것 아닌가. 그래서 만물이 내 것이라 성경은 가르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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