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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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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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아들됨

구약성경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이들을 “하나님의 자녀”라 표현한 데가 있다[신 32:5/시 73:15/호 1:10]. 모세 율법을 통한 이스라엘의 존립 목적이 장차 오시게 될 그리스도의 그림자 역할에 있으므로 그런 구약 시대에서 경건한 이들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님의 아들” 감인 것이다. 따라서 미리부터 그런 이들을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는 데에는 흠이 없다. 다만 여기서 혼동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된”[롬 8:17]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성령으로 내 안에 모시고 뿐 아니라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함께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과거 여러 선지자들 안에 성령께서 계시던 것과는 딴판이니 하나님의 아들 친히 이제는 사람이 되어 계시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가리켜 베드로는 “신의 성품[divine nature]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벧후 1:4] 하였다.

여기서의 “신”의 개념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니[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됨을 가리킴인지 아니면 신령한 몸을 지니는 자를 말함인지] 왜냐면 영물(靈物)인 사탄이 “이 세상 신”[고후 4:4]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또 6일 창조 이전의 “그룹”이나 “스랍”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욥 38:7]이라 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 친히 만드신 피조물들에 한하여 붙이는 호칭이다. 그러므로 그들 “신”들은 창조신은 아니니,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들 “신”들을 포함한 만유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성령으로서 영원히 선물로 받아 모심으로써 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우리 각자는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개별적으로 하나님 친히 만드시는’ 새 피조물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하나가 되어 있는 우리의 새 창조의 모습이므로 오직 하나뿐이신 아버지의 “형상”[고후 4:4]으로서의 외아들 하나님[독생자 하나님]과 하나된 위치에서 볼 때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의 하나님, 너희 하나님, 나의 아버지, 너희 아버지”시라 선언하신 것과 같다.

따라서 대칭 원리에서 ‘형상’과 ‘실체’로 양분되니 이 형상과 실체가 존재하도록 한 근본 즉 애초의 실체로서 애초의 형상으로 스스로를 나타낸 혹은 나타나게 한 요인 그 첫 근원, 첫 실체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피조물이라는 결과가 있으면 조물주라는 원인이 있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고 하나님[여기서는 아들을 가리킴] 자신께서도 자기를 존재하게 하신 아버지의 "형상"[고후 4:4]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은 물론 없다. 하나님[아들께서는 이제는 영원하신 사람으로도 계시므로 이를 구분하기 위해 이제는 "하나님"이시라 하면 주로 아버지를 가리켜 쓰는 호칭이다]의 아버지가 계시는 것으로서 즉 ‘최초 근원’의 ‘근본’을 지적한 것으로써 모든 개념은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또 부모와 자식은 동종(同種), 동질(同質)이듯이 조물주와 피조물 역시 그러하여 인격성을 갖춘 이성적인 피조물이 있으니 조물주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격적 이성적인 존재시다. 그러나 사람도 무엇을 만들 때 그 만든 것은 이질적인 것이다. 자기를 소재로 하여 만드는 것은 ‘낳는’ 것인 반면[同質], 자기 아닌 다른 무엇을 소재로 하여 만들 때는 ‘제작하는’ 것이 되는데[異質] 바로 이 경우를 가리킴이다. 따라서 인간과 하나님은 이질적인 것이므로 인간이 인간을 인식하듯이 하나님을 인지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물론 우리는 현재 자연계에 위치해 있으므로 영계인 천국에서는 또 어떨지 모르겠으나 그런 데에까지 관심을 둘 것은 없다.

뿌리와 나무 둥지는 같으니, 둥지는 인정하면서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고 인정하지 않음과 같은 것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다. 땅을 직접 파보지 않아 확인은 못하지만 다른 식물에 뿌리가 있음을 아는 이상, 이 식물에도 뿌리가 있음을 아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인간을 아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셨으니 하나님을 이해하기에 더욱 확실한 증거이시다.

사람이 되신 사실을 성경이 소개하고 있는데 그 소개하고 있는 내용을 유심히 성의 있게 살펴보면 그 내용의 진실성 여부를 어렵지 않게 구별해낼 수 있는 것이 성경이다. 진실이 아니고는 그렇게 성경 기술(記述)이 되어질 수가 없고 거짓말로서 지어낸 것이라면 그런 식으로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그런 증거를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입관이나 편견으로 인해 닫혀져 있는 눈과 귀로는 그래서 열려져 있는 마음이 아니고는 그와 같이 진상을 캐내기가 불가능하다는 점만은 유념할 일이다.

영혼이 있어 영생하기를 바라는 욕망은 간절하나 육체가 자연법칙에 매여 있으므로 영혼이 육체 안에 매달려 있고 육체가 영혼과 불가분인 이상, 육체가 영생하지를 않고 필연적으로 죽으니 영혼인들 이 죽음을 어찌하지를 못하는 것이 오늘날 현재 "죽은 자"[마 8:22]로서의 인생 실태다. 영혼과 육체는 하나이면서도 별개라 영혼이 육체를 마음대로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한다면 그 욕구대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할 것이지 왜 죽음을 앞두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랴.

이렇게 육체가 자연계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어 죽는 마당에, 이 영혼의 욕구에 따라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이 세상 종교의 주장이다. 꿈 같은 허튼 소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세상 종교의 소위 “자력 구원”을 그래서도 한낱 망상이라 주저 없이 단정하는 것이다. 인간 구원은 인간 자신의 할 일이 아니라 그런 인간이나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조물주의 몫인 것이다. 조물주라도 자신이 조물주라 해서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여기에서 또한 성경은 그 진실성을 자체적으로 증명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통상 조물주라고 하면 자기 능력대로 마음대로 피조물을 지으셨으니 자기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성경은 그렇지 않고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라 공평공정하게 움직이신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사려 깊은 자의 호기심을 돋구기에 충분한 것이 아닌가. 원리원칙에 의한 철저한 공평공정성은 법 제정자로서는 질서 확립 차원에서 필수 요건인 것이다.

이는 관계된 모든 이들의 확고한 신뢰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엄정 일변도만 아니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사랑이라고 해서 무골충[無骨蟲] 식이 되면 사람도 아무 쓸모가 없다. 이용만 당하다가 말게 되고 법질서는 그런 데에서는 구경도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멸(燒滅)하시는 불”[히 12:29]이시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오늘날과 같은 각종 비리와 부정과 원통함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느냐 하는데, 인간의 죄악상을 보라. 하나님의 진노가 없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이런 죄와 악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미소만 짓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상상에서나 그려내는 인조(人造) 하나님이라 할 것이 아닌가. 아무리 상상의 하나님이라 해도 인간에게는 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이런 악을 두고도 그냥 넘기는 하나님으로 감히 상상할 수도 실제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라 못박고 있다[시 7:11]. 자식을 낳은 부모 심정 그대로 어버이로서의 성품을 지니심과 동시에 이러한 법 집행자로서의 면모가 바로 철저한 원리원칙주의로 나가시게 하는 것이다.

누구나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하다고 알고 있는데, 이는 양심의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다. 또 자기 역시 이에서 예외가 아님을 아는 것도 양심의 역할이다[롬 2:1,3]. 그런데 악이 오히려 잘되는 것을 본다. 성경에, 의인 아벨을 죽인 가인은 오히려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입었고 의인 아벨만 억울하게 죽은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이 이런 사실이 역사 시초부터 일어난 것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은 앞으로도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은 이와 같을 것이라는 확실한 예고의 성격을 띤다.

여기에는 두드러지는 의미가 있으니 악인과 의인을 걸러내는 작업이 이 세상에서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악인을 벌주고 의인을 포상하는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면 누구도 악을 저지르지 못하는 대신 진정 의와 선이 좋아서 그렇게 하는지를 구별이 잘 안된다. 하나님은 물론 모든 것을 아시지만 피조물로서 그렇다는 것이니 이 피조물 세계는 하나님 홀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함께 존재하므로 피조물 역시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을 능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하나님께 충심으로 승복하게 되고 그 뜻을 따를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이 악인은 악이 좋아서 즉 악을 행해도 형통하게 되어야 악을 계속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형통이 함정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악인을 그렇게 해서 덫을 놓아 현행범으로 잡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폭로하는 것이 됨으로써 자기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봄을 인하여 자기 죄를 뉘우칠 수 있는 계기도 된다. 의인 역시 당장 무슨 포상이 따라서 선을 행하는 것보다 의와 선 자체가 좋아서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한 인간 도리인 줄 알아 그 어떤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자기 신념대로 행하는 것을 스스로 또한 입증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세상은 이런 시험 기간으로서의 의미뿐이니 여기서 자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한도 없는 어리석음으로서 왜냐면 그 사랑하는 목숨을 도리어 잃는 짝이 나기 때문이다[요 12:25]. 본격적인 삶은 이 기간이 지나서야 전개되는 것이니, 거기서 악이면 악에 대한 정당한 대가, 선이면 그 선에 대한 당연한 포상이 실행되어 그 결과가 영속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보아도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고로 이 세상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정상대로 진척되고 그 본디의 과정을 따라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결코 불합리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이 뒤죽박죽이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각, 자신의 선입견일 뿐이다. 이상 사실에서 보듯이 인간에게는 충분한 자유가 부여되어 있다. 혹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를 들어 조물주 신을 인정하게 되면 인간의 자유가 억압된다고 하는 이유를 가장 주된 것으로 꼽고 있는데 아무 근거 없다.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악과 선을 골라잡도록 이 세상이라는 시험[testing] 기간이 있는 사실에서도 이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그런 전적인 자유가 없다면 악인이나 의인이나 그렇게 시험대에 올려 놓아질 이유가 없다.

악이 생명에서 결격 사유가 된다는 것은 가인이 아우 아벨을 시기심이 나서 죽인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를 위하여 이웃을 죽이기를 예사로 하는 마당이니 그런 데에 평안과 행복이 깃들 리 없다. 그래서 그런 악인들을 걸러내어야 하는데 그 시험대로서 이 세상만큼이나 이상적인 데가 없는 것이다. 시험하는 자 악령 사탄의 조종을 따라 하나님 없다는 무신론도 그래서 판을 치기도 하고 기타 갖가지 세상 종교가 난무한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시면 왜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세상 종교가 난무하는가 할 필요가 없다. 세상 종교만 아니라 성경을 믿는다고 표방하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은 가짜가 아주 최고 가는 세력으로 이 세상에 군림해 있는 것이 이 이유 때문이다. 물론 사탄의 짓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역으로 활용하시는 것이다[살후 2:11,12]. 그리고 악인과 선인의 구별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자이심과 동시에 재판장[심판주]이시다[행 17:30,31].

양면 역할이시다. 이유인즉 선행의 핵심 곧 의인으로서의 특징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무사(無私) 무욕(無慾)에 있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으로 이루어진 한 몸 구조에서 이는 필연적인 것이니 그래서 자기 부인을 성경에서 강조하시는 것이다. 이른바 멸사봉공(滅私奉公) 이상 가는 인격 완성이 없고 소위 ‘인간다운 노력’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세상 종교는 "인간다운 노력"을 자랑하는데 성경은 처음부터 그런 것을 가르치고 있으니, 자기 부인 이상 인간으로서 기대할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말대로 그런 '인간다운 노력'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가능한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자기 부인은 앞서 지적한 대로 반드시 한 몸의 원리[또는 3위1체의 원리]에서 자기를 위해 주는 상대가 있어야 원래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머리의 위치에 계시는데, 이 머리의 지시를 어김으로써 몸의 지체 역할을 수행 못한 결과가 죄요 악인 것이다. 그래서 이 한 몸의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상태에서 한 몸 구조로 다시 복귀한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따라서 머리로서의 조물주를 부정하고 자기 완성만 꾀하는 것이 얼마나 근거 없는 망상이고 헛구호로만 끝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따라서 행복한 삶은 영원히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는 영생 자체가 무의미가 된다. 삶의 행복은 사랑에 있고 사랑의 핵심은 자기부인에 있고 그 근거는 몸과 머리로서의 하나됨에 있는 것이다. 모두 같은 말이요 내용이다. 여러 가지로 달리 표현했을 따름이다. 사람마다 양심이 있어 이를 긍정하기에는 어렵지 않고 누구나 수긍하는 사실이다.

그러면 말하기를, "몸과 머리 관계로 이루어지는 영생이라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위해 죽으실 것도 없이 그런 사실만 알리고 사람마다 지금부터 그렇게 행하도록 하면 될 일이 아닌가?" 할 것이다. 인간[아담]이 범죄하여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는 끝장이 났다는 뜻이다. 철저히 법질서 차원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따라서 일사부재리다. 한번 일단 망쳐진 것은 망쳐진 그대로의 의미뿐이다. 이것을 고쳐 쓰고 다듬고 하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면 한번 죽은 것은 죽은 것으로서 영원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결과가 아니라면 영원한 세계에서 영원한 것으로 창조하신 목적이 무의미해지고 무효가 된다. 그래서 이 영원성을 설명한답시고[실상은 말할 수 없어 그 대신으로] 사탄은 윤회, 전생(轉生), 환생과 같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지어내어 인생들에게 심어 놓은 것이다. 즉 "끝없이 이런 것을 되풀이하므로 이것이 바로 그런 영원성이라"는 속임수이다.

아무리 끝없이 되풀이된다 가정하더라도 그 '끝없는 되풀이'의 시작과 출발점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런 가장 기본적인 논리도 사탄은 무시해 버리고 무작정 자기가 지어낸 교리 속으로만 끌려 들어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탄이 에덴낙원에서 여자를 속일 때 생각할 틈을 막고 그냥 눈으로 확인하라는 식으로 나왔음이 분명하다. 그 반응이 바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창 3:6]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말하기를, "불교의 석가처럼 많이 깊이 처절하게 생각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할 것이다. 그러면 반문(反問)으로, "사탄이 이 세상 신으로서 가히 못할 것이 없는데[물론 그 역시 일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허락하심 아래에서만 무엇이든 할 수 있으나 단지 자기 자유 의지를 따른 자유가 최대한 보장된 범위 내에서] 그러면 특정 개인을 택하여 그렇게 처절히 사색하게 하되 단지 진리에는 접근하지 못하게 철저히 막을 수는 없는 줄로 아느냐?" 하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고타마 싯달다가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렇게 질문을 하니 동격으로 그런 답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불교에서처럼 끊임없는 자기 수양과 수도(修道)에서 인간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기 최면, 자기 세뇌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 세상 한 때뿐이다. 영원 세월까지 이어진다는 아무런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없으니까 못하는 것이다. 사탄이 이런 윤회니 전생이니 내세우는 것도, 그의 특기(特技)인 '반은 진실을 말하고 그래서 99%까지는 그렇게 말하고 나머지 1% 핵심되는 부분만은 지어낸 거짓말'에 속한다.

왜냐면 현존하는 인류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할지도 모르는 "네피림"[창 6:4]에게는 그런 것이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령들의 씨[후예]들로서 그 분신이므로 구원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이 그런 짓거리를 할 때, 마치 참으로 진실인 것처럼 즉 모든 인생이 다 환생의 틀에 매인 것처럼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악역(惡役)을 담당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혼란이 아니라 오직 악인과 의인을 걸러내고 솎아내고 추려내기 위한 하나님의 한 가지 방편에 불과하니[살후 2:12] 이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만 할 일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그와 같이 사탄이 발호하고 창궐하고 기세를 드높여도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사람이라면 그가 구원을 얻는 일에는 전혀 지장이 없으니 오직 이 사실에만 착심(着心)할 일이요 그렇게 사람을 가르칠 일이다. 언뜻 보기에 헝클어진 실처럼 되어 손댈 엄두조차 못내는 지경이 나도 오직 진리와 진실을 따라 풀어가면 일도양단할 수 있으니, 그 방법 중 하나가 3운법칙으로 증명되어 있는 영원 불변의 3위1체 원리다.

완전한 자기 부인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의 한 몸' 체제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으니 그리스도로서는 나 위해 죽으셔야 하는 것 그리고 나로서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 앞에서 말한 대로 너는 나를 위해 살고[죽고] 나는 너를 위해 사는[죽는] 관계이다. 그리스도의 나 위해 죽으심은 '머리' 역할로서 전적으로 그 '몸'을 위하신다는 뜻으로서 즉 나만을 위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냄이기 때문이다.

나 위해 죽으심은 필연적으로 나 위해 다시 살아나심으로 연결됨이니 이 둘은 양면으로서의 하나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나와 하나되시기 위함이다. 나는 이제 "죽은 자"[마 8:22]로서의 굴레를 벗어나 '산 자'가 되어야 하는데 죽은 자와 하나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산 자와 하나되어야 산 자가 됨이다. 3위1체 원리의 인과론[대소, 주종 관계]에서 작은 자[죽은 자로서의 나 자신]는 큰 자[산 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마땅히 따르게 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내가 '산 자'가 된다.

이렇게 산 자가 됨으로써 비로소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장사 지내지신 역사적 사실이 나의 장사(葬事, 시체를 묻거나 화장하는 일)됨으로 현실로서 구체화하고 실질화하는 것이다. 죽으심 그대로라면 나에게 구원은 물론 아무 의미가 없다[고전 15:14-18]. "대신 죽음"이 우리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항상 하는 말이지만, 그런 언어(言語)의 유희(遊戱)에 상관 없이 다시 말해 "대신 죽으셨다"든지 "나와 함께 죽으셨다"든지 또는 기타 다른 말이 있을지라도, 어린 아이 같이[마 18:3] 믿어 그리스도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여 그 말씀대로 "복종하여"[빌 2:12] 그 뜻대로 행하는 이라면 넉넉히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마 7:21].

그리스도께서 나와 하나되시는 근거는 그와 같이 다시 살아나시어 그 성령으로 내 안에 나의 영혼처럼[나는 그 '영혼'에 대한 '육체'로 간주(看做)되어] 오심으로써 전혀 새로운[이전과는 다른]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를 이룸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도 단순한 그리스도의 나 대신 죽으심이 나의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이 설명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됨이 나의 구원 즉 새로운 창조, 다시 출생함이기 때문이다. 죽으신 상태에서는 나와 하나됨이 불가능하니 죽으시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다. 죽은 자가 어찌 무엇이든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심이 하나님의 처음 창조와 관련된 것이라 함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의 결과로서의 나의 과거 적 사람 즉 옛 사람은 죽어 없어져야 새로운 창조가 비로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어차피 나는 죽어야 하는 몸이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로써 죽은 자로서 다음 인생들을 생산했기 때문에 모든 인생이 죽은 자이며 또한 각자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죽어 마땅한 자가 되어 있기에 그러하다.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죽음인데,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현재의 인간이 속박을 당해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죽음이니, 그래서 성경은 이를 “육체의 무할레”[골 2:13]라 하고 우리 자신의 범죄 행위를 가리켜 “허물과 죄”[엡 2:1]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요인으로 해서 우리는 “죽은 자”[엡 2:1/골 2:13]이다. 그래서 죽을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하므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이다. 나와 함께 죽으신 것이다. 나와 하나되시기 위해서는 내가 마땅히 치러야 죽음을 남김없이 치러야 하시기 때문이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 우리이므로 우리와 하나 되시기 위해 또는 그 하나 되신 증거로서 먼저 일단 죽으셔야 했던 것이다. 죄인으로서의 형벌의 죽음이므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죽음의 상태 또는 그 최악의 고통으로 죽으심을 당한 것이 십자가 죽으심이다.

이런 것은 ‘자식을 생각하는 어버이’ 심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그 고뇌[막 14:34]는 십자가 죽으심에 나아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찬 밤 기운에도 불구하고 비지땀을 흘리신 간절한 기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는 아무래도 재차 결단이 필요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서는 그 죽으심이 핵심을 이루지만[순수하게 우리 위해 그 모든 고통의 죽음을 당하신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우리로서는 그 다시 살아나심이 구원의 핵심이 된다[고전 15:14,17,18].

살아나셔야 앞서의 설명처럼 우리와 실제 하나가 되시고 또 살아나셔야 영원토록 나를 위하시는 위치에 계심으로써 나의 "자기 부인"의 근거와 토대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며, 그렇게 해야 아담처럼 범죄로 죽는 변을 면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나셔야 나 역시 현재는 살았지만 한 때 죽은 것이 기정 사실화하여 역시 나의 "자기 부인"의 두번째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어떤 ‘무사(無私)’, ‘멸사(滅私)’의 상태로 나타나는가를 보려면 다음의 바울의 “성령 안에서의 양심의 증언”[롬 9:1]을 음미하면 충분하다. 즉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3] 한 것이다. 이는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리 않으시려면 원컨대 주님의 기록하신 책에서 제 이름을 지워버려 주십시오”[출 32:32] 한 모세의 심경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릴 것이다”[:33] 하시고,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갈 것이다”[:34] 하심으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되,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할 것이다” 하시고 “송아지를 만든” 죄를 물어 “백성을 치심으로”[:35] 엄중히 다스리시는 뜻은 바꾸지 아니하셨다. 아론은 이 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모세 역시 다른 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볍게 생각하여 행동한 탓으로 역시 가나안에는 발을 붙이지 못한다. “보응할 것은 반드시 그 죄를 보응하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모세라고 해서 이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신 것으로서 그대로 천명(闡明)되어 나타내어진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범죄하면 내 책에서 지워버릴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 역시 반드시 그대로 될 것이므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경고한 것이다.

바울 자신도 이 경고에 대하여 당연히 예외일 수가 없다. 따라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룸"에 앞장 서서 본을 보이기에 힘썼으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 9:26,27]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0,11] 한 것이다.

이 말을 다시 설명하여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가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감이니,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빌 3:12-14] 하였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이런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고전 9:24-27] 그는 교회에서 그리고 때마다 이런 경고를 교회 앞에서 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구원을 이룸”이 자기 구원을 의식하거나 목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3] 한 데에서 입증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기는 저주를 받더라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 구원되기를 원함”이 목적인 것이다.

“구원을 이루라”는 말의 뜻이 이것이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이다”[8:39]라는 말 다음에 바로 나온 발언인즉 그런 믿음에는 변함이 없으나 바울의 심정만은 그런 상태임을 유감없이 드러낸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그 원동력인 것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우승하기 위해 달려감도 ‘사랑의 달리기’이니 나를 보내신 뜻을 행함으로써[요 20:21] 인생들을 사랑하여 그들 중 "몇이라도 구원하기 위한"[고전 9:22] 사랑의 달리기인 것이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 저주를 받더라도 그들의 구원을 그렇게 열망한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이는 우리 구원을 위해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심령, 하나님의 심장[빌 1:8]이니 바울이나 모세나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있었던 것이므로, 우리 역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심”[롬 8:29]을 받은 자들이기에 당연히 또한 그러하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다"[고전 9:16]는 언급은 일반적인 원칙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형제들로서 서로 닮을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니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29] 한 그대로다.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을 창조하신 다음부터는 전적으로 피조물을 위하시고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므로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는 터이기에 아버지도 아들도 자기 자신을 위하심이 없으시니 처음부터 자기를 위하심이 없으시다.

하기야 아들을 만드시기[낳으시기] 전 아버지 홀로 계실 때에는 홀로 계시므로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자연 순리이지만 당시의 일은 “영원 전(前)”이므로 우리의 모든 지각을 벗어나는 일이라 그런 것은 염두에 둘 필요가 없고 오로지 우리가 명백히 아는 것은 오늘날의 모든 체제가 그 누구든[하나님이시든 우리 피조물이든]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자기 영광을 위해”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은 자기 영광을 위해 그 어떤 일도 아니하시므로 피조물 스스로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신다는 의미가 분명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피조물의 영광을 위해서는 하나님 친히 모든 것을 하시는 것이다. 영원히 이러한 체제다. 아버지께 서는 아들의 영광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신다[요 17:1]. 이것이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하나됨을 통해 그 누구든 자기중심이 되지 않는 사람과 생명의 법질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일절 자기 부인으로 일관한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그대로다.

자신을 몽땅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셨으니[갈 2:20] 전적으로 나를 위하심밖에 없으시다. 그러니 스스로 영광을 구하실 리가 만무하다. 창조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스스로 생겨나고 나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게 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께만 최초로 통용되었고 그러나 하나님 역시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 되어 계심으로써 이런 자기중심은 영원히 종료되고 사라진 것이다.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는 ‘서로를 위함’만이 있을 뿐이니 이 ‘서로를 위함’이 곧 ‘사랑’인 것이다.

바로 이런 원리원칙을 따라서도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무조건 이 우주에서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원칙 면으로도 그렇지만, 조물주의 실수로 인간의 현재와 같은 이런 불행이 닥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과실에 의해 운명 지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생명의 법질서를 어겨서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으니 인간 스스로 이 비극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법질서를 어기면 거기 상응한 조처를 받고 보응을 받아야 하는 것이 법질서의 존속 의미이다. 만일 이렇게 법질서를 어긴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기지 않은 것처럼 되어 죽지 않고 산다면 법질서 존립의 의의가 없어진다. 따라서 법질서가 영구적으로 폐기되든지 아니면 인간이 영원히 멸절해 버리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름지기 범죄한 인간은 영원히 멸절된다는 사실을 드러냄이다.

그러므로 피조물 인간 자신도 자기를 구원할 수 없고 인간을 지으신 조물주 역시 인간을 구출해낼 평상적인 방법이 없다. 평상적인 것이 아닌 비상한 방법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 비상한 방법이란 당신 자신을 영원한 인간으로 만드시는 것 그래서 인간의 죽음의 고통에 동참하여 영원히 인간 각자와 하나가 되심에 있다. 이를 상징하여 그리스도 오실 때까지 그림자로 대대로 나타내신 것이 모세 율법 시대의 각종 희생 제물인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같은 아들을 내어주시는 것이 되고 아들께서는 자신을 송두리째 우리 각자에게 주신다는 의미이니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때문에 앞에서도 어버이 심정이라야 그런 일이 가능하다 한 것이다. 아들께서는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같으신 아들을 우리 위해 내어주신 것이니 의미는 같다. 왜냐면 아버지로 말하면 아들께서 바로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so loved that]' 사랑하시어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다"[요 3:16]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으로서 만유를 창조하신 창조주시다. 본체로서의 아버지께서는 형체로서의 아들을 통하여 만물을 지으신 것이다. 사랑으로 사랑 가운데에서 지으신 것이니 그래서 생명이란 사랑과 결부되어 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 자체 즉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래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이 짧은 생애마저 역겨워 미련 없이 자기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 생명 주시는 일이 사랑으로써 또한 시작되고 이루어짐은 당연하다. 이는 조물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 그 무한하신 사랑으로 시작하셨다는 바로 그 의미임을 다시 강조한다. 이 사랑은 항상 몸과 머리 관계에서의 둘이 하나가 되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신 자신에게서 모든 것이 나오는 것이므로 결국 자기의 분신(分身) 역할을 하는 것이 그 피조물이다.

자기에게서 난 것이니까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요, 자기라는 것은 본래 하나이지 둘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하나였던 것이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나누어질 때 그러나 그 나누어진 것으로 제각각 존재하지 않고 애초 그 하나로 존재하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적 의미요 삼위일체 원리의 영원한 근본 토대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사랑만을 이야기하면 생화(生花)를 말하지 않고 그 조화(造花)를 이야기함이 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랑을 논할 때 그와 같은 것이 된다. 남녀 사랑도 아담으로부터 여자가 생겨난 때문이다. 원래 아담 하나로 존재했으나 그에게서 여자가 남으로써 여자와 남자가 애초의 그 하나로 존재하던 상태로 회귀하려는 서로의 욕구가 바로 남녀 사랑인 것이다. 물론 이 하나 됨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것이므로 "한 몸 된다"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아담 스스로가 여자를 생산해 내었다면 남녀 사이는 부모 자식 사이가 되고 아내 남편 사이가 될 수 없다. 아담에게서 여자가 생겨났으나 아담 스스로가 여자를 만들거나 아담에게서 여자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의 관계다.

아담 스스로가 여자를 생기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여자를 지으셨으므로 남녀 관계가 형성되고 아내 남편이라는 한 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 누우면 남이라 하는 말과 같이 이 사랑이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고 마음은 자유가 그 본래의 근본이므로 유동적이다. 그래서 내 마음은 내 스스로 지켜야 하는 영역이다. 그 누구도 간섭 못한다. 때문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했다. 결국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함도 이 "네 마음을 지키라"는 경고의 또다른 표현일 뿐이다.
인간은 그 생명이 사랑에 있고 사랑이기 때문에 자유에 있다.

즉 미워하다가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다가도 싫어 버리는 수가 난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똑같은 사랑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담도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고 사탄 등 악령들도 범죄하여 영원 멸망에 자신을 빠뜨린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이 우리 구원을 고정적인 것으로 고착되어 있는 줄로 착각하나 이는 큰 착오다.

유동적인 것이다. 왜냐면 이 자유가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자유로 사랑하기도 하고 배반하여 팔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이 한번 주신 자유를 간섭하시거나 통제하시지 않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딤후 2:13]. 우리도 아담처럼 범죄하여 다시 죽을[이제는 “멸망”(빌 3:19)이고 아담처럼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니 우리 자신이 이미 자연계에 속해 있기 때문] 수도 있어 사탄처럼 될 수 있고 아니면 거룩한 천사들처럼 자기 영생을 스스로 지킬 수도 있음이다.

우리도 현재 영생을 받아 있으니 그들처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은 당연하다. 성경을 이상 지적과 같이 심각하게 오해하게 되는 것은 한 구절에만 매달려 집착하고 전체를 두루 조감(鳥瞰)하여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려는 열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지 않는다. 즉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열심히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에게 진리의 문은 영원히 열려지지 않을 것이다. 자기중심의 선입견을 가지고 접근하니 이런 경우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히 4:12]이시라 굳게 빗장을 걸어 잠그고 도무지 열어주지를 않으려 하는 법이다.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에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라 한 대로, 처음 창조에서 첫 사람 아담이 남녀 “둘이 한 몸을 이루어 연합하는”[창 2:24] 것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우리 각자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 됨”[고전 6:17]에 있는 것이다. 즉 짝의 개념이고 둘이 하나 되는 원리이며 따라서 사랑이 그 기본 토대다. 따라서 사랑의 복종이 절대적이다. 둘이 하나됨으로 인한 자기 부인이 필연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면서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위치가 되신다. 첫 사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심으로써 여자가 탄생하는데 이 깊이 잠 듦에 해당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가 아담에게는 여자이니 그리스도로서는 교회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아담 스스로 여자를 생기게 한[낳은] 것도 아니고 여자 스스로 아담에게서 생겨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담으로부터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친히 아들 안에 계셔서 모든 일을 주재(主宰)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께서는 아들 친히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일을 주관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결단코 당신 자신을 위하지 않으시고 스스로로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으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 모든 일을 하심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 역할만을 하시는 것이다. 형체는 본체의 뜻과 어긋나게 절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동시에 아버지께서는 형상으로서의 아들의 본체이시므로 아들의 실질적인 내용 그 본질이 되신다. 따라서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아들의 모습이시다. 또한 아들의 모습은 아버지의 모습이시다. 이것이 둘이 사랑으로 하나됨의 이치요 영원한 원리인 것이다. 몸과 머리로 되어 있으면 한꺼번에 한 생명체 즉 하나로 보는 것이니, 머리 따로 몸 따로 인식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바로 그런 모습으로 계시고 바로 이 모습의 원리를 따라 우리 또한 구원하신 것이다. 

이는 만유의 창조 원리다. 창조도 그런 형태다. 아들께서 만유를 창조하셨으나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만유를 지으신 것과 같다. 고로 성경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고 했고, 아들 친히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고 친히 말씀하셨다. 이는 상충되는 표현이 아니고 이상의 이치를 설명하심이다. 항상 이런 원리에서 사물을 볼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의 이치도 제대로 바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첫 사람의 경우 아담에게서 여자가 난 것처럼 그래서 여자의 머리가 남자[아담]인 것처럼[왜냐면 먼저 창조되었고 남자를 소재(素材)로 하여 여자가 창조되었으므로-고전 11:3],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이다. 또한 첫 사람 아담의 남녀 둘이 하나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 됨은 완전한 짝의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나’가 여럿이 전체를 이루어 “여자”[첫 사람 아담의 경우로 말하면]가 되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를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랑과 신부의 한 몸됨이다. 천국에서도 남녀 구별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결혼하는 일이 없으니 남녀 구별을 지을 필요가 없다-눅 20:35,36] 어디까지나 첫 사람 아담을 기준하여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 모두가 서로 간에 각 지체(肢體)가 됨으로써 공동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을 이룸이다. 우리의 구원을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이신 사실로써 설명함에 이르면, 그 첫 사람 아담의 선례(先例)에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교훈 또는 경고가 있다.

이 또한 중요하다. 여자가 남자[이제는 여자가 존재하니 아담은 남자이다]와 무엇이든 상의하여 하지 않고 마치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즉 아담에게서 자기가 나오지 않은[아담이 먼저 세상에 나왔으니 모든 면에서 선배인 것이다] 양으로 행동하여 사탄의 거짓말을 듣고는 자기 혼자 판단하여 덥석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남자에게 자기를 따르라는 식으로 먹으라고 선악과를 내민 것이다[창 3:6].

바꾸어 말해서 이는 무엇이냐 하면 의도적인 것은 아니나 아담을 자기 스스로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 의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아담 스스로도 얼마든 그런 권유나 제의를 단호히 거절할 수 있음에도 여자가 먹으라고 한다 해서 먹었으니 이는 여자가 사탄이 꾄다고 해서 그 말을 곧이 듣고 행동한 것과 하나도 차이가 없기는 하다. 그러나 여자 자신으로 보아서는 그런 결과가 되어 있음을 역시 부인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결국 여자는 자기도 남자도 함께 죽음에 함몰하게 만든다. 이 ‘여자’가 우리 각자라는 것이다. 즉 자기중심이 되면[처음에는 자기 부인으로 나갔으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결과론적으로 죽인 바로 그 행위의 답습이다. 그리스도의 원수 짓을 하니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빌 3:18]로 행세함이라 했다. 선악과 나무 자체가 아담으로 하여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항구적으로 고착시키는 그런 신령한 나무였던 것이다. 곧 우리로 말하면 세상이요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본능 그대로를 상징하는 것이니 곧 자기중심인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우주 천하 그 누구도 멸망하게 되어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터에 자기중심이 되니, 그런 불상사 이상의 일이라도 얼마든지 벌어지게 되어 있는 바탕을 스스로 만든 터이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소홀히[“등한히”-히 2:3] 함으로써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그리스도께서 내 영혼처럼 자리잡아 계시는데 어찌 그리스도 의식 없이 살 수 있으며 따라서 기도를 쉬지 않고 아니할 수 있는가-대화 없이 그런 경우 둘이 함께 지낼 수 있는가] 경고를 무시한 채 마치 나 홀로 지내는 듯이 행동하면 이와 같은 결과를 빚게 된다는 그런 강력한 경고가 된다.

우리가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되면 ‘나의 세계’에 관한 한 그리스도도 나도 함께 망하는 것이다. 여자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도 남자도 함께 망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내게 관한 한 ‘그리스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를 않게 된다.
우리가 성령으로 나는 것은 성령을 받아 모심을 말하고 이는 그리스도의 영 곧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이 됨을 의미함이다. 그리고 이것은 새 창조라는 말 그대로 아담이 애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먼저 창조되고 연후에 영혼이 조성된 과정을 그대로 답습함이니 즉 항구적으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우리 각자를 산 자로서 신령한 몸이 되게 하는 즉 "몸의 구속"[롬 8:23]을 받게 되는 필요한 순서를 거침이다.
즉 새 창조의 경우 그리스도의 영 또한 아버지의 영 즉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내게 ‘영혼’으로서 성령으로 임하심이다. 성령을 ‘영혼’으로서 받아 모시는 나 자신은 첫 사람 아담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먼저 창조되었던 바로 그 ‘육체’에 해당되는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아담이 그 육체로 창조된 다음에 하나님의 생기(生氣, the breath of life)를 받아 영혼이 조성되었던 그대로 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아담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한계를 벗어나 영원히 사는 존재로 탈바꿈한 것이다.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는 불멸(不滅)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왜냐면 영혼은 육체처럼 낳고 낳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되는 것으로서 그렇게 한번 창조되어 존재하게 되면 그대로 영속(永續)하는 것이다. 죽음은 오직 인간 육체에게만 해당된다. 자연계의 동물의 육체에 죽음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인간이 범죄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함으로써 인간을 기준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현재 인간의 육체나 동물들의 육체나 본질은 "흙"으로 된 것으로서 같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니 비록 애초에 자연계에 속한 육체였으나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신령한 육체로 변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물 역시 “죽음”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지, 실제는 그 종(種)을 이어가는 신진대사[신체의 기능으로서의]의 의미인 것이다. 왜냐면 각 개체의 육체는 썩어 없어져도 그 종은 계속 이어져 가기 때문이다.

‘영혼이 있는 육체’인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죽음의 의미이다. 영물로 창조된 사탄 및 악령들이 범죄의 대가로 받는 것은 ‘죽음’이 아닌 ‘영원한 고난’[계 14:11]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든 인간이 다 “생명의 부활 아니면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하셨다[요 5:29]. 부활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요 불생불멸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 “불생불멸”이란 말을 다시는 인간으로 환생하지 않으니 죽는 일도 없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성경의 의미는 한번 인간으로 나고 그리고 죽었으니[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이제는 죽었다가 부활했으므로 영원히 존재하게 되어 있는 것을 말함이다. 영원히 존재하되 생명 가운데서다.

그러므로 자력 구원이란 것 자체가 비과학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망상으로 끝날 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과학은 모든 원리원칙 또는 자연법칙에 충실할 때 이루어지는 것에 한해 그것을 대상으로만 하는 학문이다.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이런 원리원칙을 무시한 말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눈에 현저히 보이고 우리와 가장 친근히 되어 있는 자연법칙까지 무시하고 드는 마당에 어찌 원리원칙 운운할 것인가.

눈에 보이는 원리원칙 하나에도 충실하지 못하고 어긋나는 말을 하면서 어찌 다른 법칙을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세상 종교의 맹점이다. 먼저 손 가까이 있는 자연법칙부터 준수하고 인정하고 들어가는 자세부터 가져야 그 주장에 비로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비해 성경은 철저히 이 자연법칙을 벗어나지 않고 이에 따르는 설명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친히 지으신 모든 원리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혈(血)과 육(肉) 즉 육체 곧 자연계에 속한 것은 영계에 속한 영생 곧 영원한 것을 절대로 승계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고전 15:50].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과학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이유는 모든 법칙이 하나님 창조의 산물(産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 할 것인가. 어느 쪽이 진리이며 어느 것이 진리가 아닌가 하는 것이 단번에 드러나는 것이다. 더 이상 불필요한 말이나 언쟁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 이 한가지만으로도 단번에 결판 나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조물주 친히 개입하셔야 되는 것이다.

이미 법질서를 어겨 그 응분의 조처로 죽게 되어 있고 다시 살게 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므로 이 죽음을 면제해줄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인생인지라 이지ㅔ 죽는다는 것은 영원히 죽는 것이니, 다시 살 길이 생긴다는 것은 그 죽음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므로 영원한 죽음일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죽지 않고 몇 천만년 후에나 죽는다고 해도 그 역시 죽음이요, 몇 천만년 후에는 다시 살아난다 해도 그것은 죽음 자체를 무력화하는 것이므로 법질서가 엄연한 이상은 영원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셔서 혹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어 아들 친히 또 하나의 나 자신이 되게 하시는 길이다. 그리자면 세상에 태어나시고 사람이 되셔야 하고 그것도 영원히 사람으로 존재하셔야 한다. 이런 것이 사랑이다. 친히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되실[그것도 영원히] 정도로 그 만드신 피조물들을 사랑하심이다. 그래서 나는 죽으면 다시 살아날 길이 없으니 친히 내가 되어주셔서 내가 죽는 죽음을 나와 함께 죽으심으로 함께 다시 살아나시는 방법이다.

그렇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대로 내 안에 오셔서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심으로 ‘나’라는 존재의 구성 인자(因子)를 이루시게 되면 바로 내가 그와 같이 죽은 것이 되고 다시 살아난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두 가지 의미이니, 하나는 죄로써 죽은 자가 되어 있으니 당연히 죽은 의미 그래서 죄의 청산이요, 또 하나는 내 자신에 대하여 죽었으니 다시는 죄 곧 자기중심일 수가 없어 죄를 영원히 짓지 않게 되는 완벽한 장치요 구조를 이룸이다. 오늘날의 "배도(背道)"[살후 2:3] 현상을 전반적으로 나타내는 기독교라 표방한 대개의 세상 종교는 이상 두 측면에서 전자만 자기 멋대로 취하고 후자는 전혀 염두에 두는 일이 없음을 누차 역설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구원은 어린 자식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어버이의 마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 위해 죽으신 후 살아나신다는 것도 역시 있을 수 없다. 일단 나를 위해 사람이 되신 이상 죽으셨으면 영원히 죽으시는 것이지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은 그 죽음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결과가 된다. 일시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대로 영원히 죽는 죽음이신 관계로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실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다시 살아나신 것은, 아버지께서 단순히 아들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께서 하나 되어 계심을 근거로 하여 아들을 살리실 수 있었기에 그러하다. 하나 되어 계심은 그 영으로 그러하시다는 것이니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으로서의 육체로만 죽으시고 영으로서의 하나님으로서는 죽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냐" 할 필요도 없는 것은 비록 하나님이시나 동시에 사람이시므로 사람으로서 죽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으로서도 죽으심을 의미함이다.

왜냐면 지금부터 영원히 육체를 입으신 존재가 되셨기 때문이다. 고로 '육체'가 죽으시면 '영혼'으로서의 아들의 영은 사시지 못한다. 산 자의 세계에서 일체의 활동을 할 수가 없는 죽은 자인 것이다. 그와 같이 영으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심이므로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으로 계심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하나 되어 계시는 영이시나 아들께서 한 여자의 몸을 통해 태어나실 때 아버지와 비로소 분리되심이니 그래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우리 위해 "내어 주심[to deliver]"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 또한 사람이 되시는 격이 되니 나중에 아들을 다시 살리실 수가 없게 된다. 아버지와 영적으로 분리되신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30세쯤에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의 어린양[희생 제물]으로서 고난 받으시고 죽게 되시는 그 활동의 시작실 때, 우리와 함께 하나로 되시는 의미를 확증하는 뜻으로 우리가 받을 세례를 받으시면서 성령이 임하시는데 이 성령은 곧 아버지의 영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원래의 모습대로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 되심으로 환원 또는 복귀되심이다. 따라서 그 때부터 가르치신 모든 말씀, 하시는 모든 일의 모습이 곧 아버지의 말씀 그리고 아버지의 일하시는 모습이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하셨다. 때문에 이렇게 세례 받으시기 전에는 일절 아무 가르침도 아무 활동도 아니하셨다. 이는 당연하니 왜냐면 인간 세상 앞에서 행하실 모든 일, 모든 말씀은 아버지 친히 하시는 것으로서 나타나질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당시에는 아버지와 하나되시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30여년간 아버지와 분리되어[하나되심의 의미에서] 계셨다는 뜻이다.

이렇게 성령을 받아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회복하신 때부터 일을 시작하신 것은, 우리가 세례 받고 성령 받는 것의 표본이 되심이다. 곧 나는 이 경우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받아 모심[영접함]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를 모심이다[요이 1:9]. 보내심을 받아[요 20:21] 이제는 영원히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삶의 시작인 것이다.[4:34]. 이것이 새 피조물되고 다시 출생한 자로서의 생명 자체이니 왜냐면 이것이 내가 먹을 "양식"[:34]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내가 이렇게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고후 5:15] 않는 한 나는 영원히 죽은 자이다. 천국은커녕 현재 그대로 나는 여전히 죽은 자 그대로다. 영생만 넙적 받아 챙기는 것이 구원이라는 그 어떤 교리에도 현혹되지 말 일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나는 더 다시 나 홀로가 아니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를 이룬 복합체다. 이중(二 重) 체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세례 받으신 후 성령이 임하시고 그리하여 그 이후의 모든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이 되시고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일이 되심과 같이 나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가 된다. 고난 받음도 “그리스도를 위함”이 되고[:29]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 2:20]이 된다.

완전히 삶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세상에서 핍박의 대상이 된다. 핍박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가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지 않으셨을 것이요 "내가 핍박을 받았으니 너희도 핍박을 받을 것"[요 15:20]이라는 말씀도 하실 리 없고, 그 말씀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할 리도 없게 된다. 핍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사탄의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요 이는 하나님의 눈밖에 현재 벗어나 있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으니 각자의 처지를 살필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여자의 태를 통해 육체를 입으신 것이므로 육체를 입어 태어나신 이상 그 사람되심은 영구 불변이다. 사람이시기 때문에 나와 하나 되심이 가능한 것이다. 이 방법 외에는 달리 인간을 구원하실 길이 없으셨기 때문에 친히 사람이 되시고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즉 죄인으로서의 형벌의 죽음 곧 그 쓰라린 무참함과 비참함을 극한 십자가 형으로 죽으신 것이다. 죄인이 아니시면서도 죄인으로서의 죽음을 당하셨으니 곧 나의 죽음이 역사적 현실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죽은 것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갈 2:20] 것이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 되어 있다. 그래서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20] 것이다. 나와 함께 죽으심이니 곧 내가 죽음이다. 옛 사람에 대하여 육신에 대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정과 욕심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5:24]. '롬 7:24'가 바울 사도의 믿음 안에서의 개인적 체험이요 그 영적 상태를 서술한 것이라는 미신에 빠지지 말 일이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한다”[롬 9:3] 하고 그래서 이 원함을 가리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니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언한다”[:1] 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이 사 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할 수는 없다.

후자는 육신으로 살고자 하는 자기중심으로서의 고뇌인 반면 전자는 자기 자신을 내던져 방기(放棄)하는 자기부인이다. 후자는 완전히 육신에 사로잡힌 몸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전 9:27]는 자가당착의 말을 한다는 말인가! 어찌하여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을 “자랑”[고전 15:31]으로 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려는가! 그렇게 탄식하는 사람이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 게 머물게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다”라는 간증을 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가[고후 12:9,10].

처음 창조와 새 창조의 유사점은 다음 사실에서도 살필 수 있다. 첫 사람 아담의 경우 남녀로서 먼저 짝을 지어주시고 난 다음 생산[자녀들 낳는 일]은 그 후에 오는 단계였다. 그리고 범죄하지 않았다면 아담 부부는 영생하는 존재이므로 오늘까지도 계속하여 자식들을 낳았을 것이다. 남녀 구분은 첫째 목적이 짝이라고 했고 그 다음이 생산이라 한 대로, 아담의 육체는 신령한 육체요 따라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본질은 지니고 있으나 신령한 요소의 능력을 아울러 구비한 까닭에, 능력이 있는 몸으로서 주변 영물(靈物, 우리가 말하는 천사)들 의 도움으로 그 스스로 얼마든지 자식들을 낳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단짝을 영물들 가운데에서는 찾지 못하므로 부득불 자연계에 속한 동물의 육체에서 암수 구별을 하신 것처럼 남녀 양성으로 만드시게 된다. 고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같은 형태로[지금 에덴낙원에서 영적인 몸으로 있으나] 여자가 생긴 이상, 다시 말해 애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된 아담의 특성상 아담의 여성적인 요소가 여자에게로 완전 이양되었으므로, 이제는 남자[여자가 창조된 이후의 아담]가 아닌 여자의 몫으로서 자녀 생산의 역할이 확정된 것이다.

그래서 영계인 에덴낙원에서도 천사들의 도움 대신 남자의 도움으로 그 구실을 이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암수 결합으로 인한 방법과 같은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이 되어 있는 까닭에 보다 고차원의 방법[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지는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일이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범죄로 저주를 받을 때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해산(解産)의 고통이 가중된다고 하셨는데, 이는 신령한 몸으로 있을 때도 해산의 고통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는 범죄 결과 죽은 자로서 항구적으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있으므로, 애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되던 때를 기준하여 말씀하심이 된다. 그럴 경우 오늘날의 동물들의 생식 행위처럼 약간의 수고가 있을 것이 아닌가.

따라서 처음부터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면 해산의 고통이 일반 동물들 수준으로서 과도한 고통이 없었을 터이지만 처음부터 신령한 세계에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었는데 스스로 범죄하여 무리하게[부적절하게, 비정상으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정착하게 되다보니 이 무리함이 작용하여 이제는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방식대로 해산을 하더라도 그 고통은 그 무리한 일을 하는 만큼 배가(倍加) 또는 가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말씀하심이다.

이제 그리스도 친히 그러한 아담의 역할을 자담하셔서 “마지막 아담”이신 새 창조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가장 먼저 짝의 개념으로는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 됨”[고전 6:17]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한 바와 같다. 다음이 생산인데 앞에서 처음 창조의 예를 들어 설명한 바와 같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아담 자신이 자식들을 생산하게 되어 있다고 했거니와 이 경우 아담은 자신의 육체를 아들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육의 차원이 아니라 영의 차원이시므로 그 성령 곧 자기 영을 "물려주시게" 되고 이 성령의 특성상 아버지의 영 친히 함께 하시는 일이 된다. 이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친히 아담의 육체를 소재로 하여 여자를 만드시는 바로 그 과정의 반복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영을 그리스도 친히 우리 각자에게 "물려주시는"[선물로 주시는] 그런 의미도 되기는 하지만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심을 의미하므로 시종일관 아버지께서 주관하심이다.

말하자면 마지막 아담을 소재로 하여 하나님[아버지]께서 여자[성령으로 나는 모든 구원 받은 사람 전부]를 만드시는 형국이시다. 그래서 개개인으로는 “짝”의 개념이요 전체로 보면 남자에게서 여자를 창조하시는 일이 되신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진행 중이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면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다”[엡 5:31,32] 하였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니” 이제 “우리는 그 몸의 지체”[:29,30]인 것이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비교할 때, 아담은 육체이므로 아담에게서 아담과 같은 육체를 창조하실 때는 아담과 같은 사람이어야 하나 아담과 똑같을 수는 없으므로 여자와 남자의 구별이 이루어진 것이지만, 마지막 아담의 닮은꼴로서는 마지막 아담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함은 당연하다.

마지막 아담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마지막 아담과 똑같을 수는 없으니 하나님의 아들의 영 즉 “양자의 영”[“the Spirit of adoption”-롬 8:15]을 각자가 받되 ‘나’와 ‘네’가 서로 다른 개인이므로 그 개인에 따르는 하나님의 아들로 구별되어지게 된다. 즉 홍길동이면 “홍길동 하나님의 아들”, 김정희(金貞姬)이면 “김정희 하나님의 아들”, 이렇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영원을 통해 불변의 고유 명칭은 아니고 천국에 가는 이들은 모두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계 2:17].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는 새 창조는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는 여러 사람의 창조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기는 하되, 여러 ‘사람[남녀]’이 아니라 여러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요 3:6] 하신 말씀의 뜻이니, 성령으로 남 곧 성령으로 출생함을 풀이할 때, 성령은 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모습이시므로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아들[독생(獨生)하신 하나님]을 소재(素材)로 하여 아버지 친히 “많은 아들들”[히 2:10/]을 만드시는 모습을 띠는 것으로서 아들께서도 성령이시요 아버지께서도 성령이시므로 그런 의미를 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명목상의 아들이 아니라 실제로 창조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단 오직 하나뿐이신 아들 외에 새로 얻으시는 아들들이므로 양자(養子)다[롬 8:15/23]. 돌감람나무로서 참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음으로 난 아들들인 것이다[11:17]. 그러나 일단 그렇게 접붙여져 동일한 열매를 맺게 되면 전혀 그런 차별이 없음과 같이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영원한 아들들임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믿어 성령을 받아 모시는 이들은 곧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는 것이니 오늘날 이 세상은 바로 그 작업이 진행 중인 장소요 때로서의 의미이다.

아들의 본질은 아버지께 대한 순종에 있다. 그리고 온전한 순종은 고난을 통해 배움이니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 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히 5:8,9] 함과 같다.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다시 말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모든 자를 말함이다. 고난은 죽음의 영역이다. 생명에는 고난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로 나는 것은 세상[사탄이 그 배경을 이루는]의 미움을 받는 것이요 세상과 적대 관계가 됨을 의미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요 15:18] 하신 그대로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다”[요 15:20]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할 것이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을 알라"[:21/15:18] 하셨다. 세상이 미워하여 핍박하여 죽이기까지 하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이를 두려워하라" 하신 것이다.

§ 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고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이시므로 아들께서는 비록 육체를 입으셔서 인간이 되셨으나 성령으로 아버지와 하나 되심 즉 하나님이시라는 위치는 변함이 없으시므로, 아들께서는 그렇게 영원히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죽음을 죽으셨으나[우리와 함께]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므로 즉 아버지는 사람이 아니시고 또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아들께서 죽으신 것이므로,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아들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만일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지 않고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면 그렇게 죽으실 수도 없거니와 죽으셔도 다시 살아나심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다시 사심이 불가능하므로 죽으실 수도 없는 일이요 따라서 인간은 영원히 죽는 수밖에 없게 된다. 그 하나 되심은 그리스도의 나와의 하나 되심으로 인한 구원의 영원하신 근거가 됨은 물론이다. 나와 하나되심은 나란 인간을 '육체'로 보시고 그 '영혼' 격으로 내 안에 오심이다.

그리하여 한 육체 안에 내 영혼과 그리스도의 영[성령]께서 함께 하나 되어 계심이다[롬 8:16]. 그리스도의 영만 아니라 아버지 친히 그 영으로 함께 계시니[요이 1:9],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때 그 안에 계신 아버지의 영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신 것과 같이[롬 8:11], 이와 같이 내 안에 계시는 아버지의 영으로 말미암아 나는 장차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영이신데 어째서 "하나님의 영"[2:11]이라는 용어를 다시 쓰느냐 한다면, 피조물 인간을 기준해서 우리가 말하다보니 그렇게 나타낼 수도도 있다 함이다. 

즉 영물들은 "영"[히 1:14]으로서 그들에게는 영이 없고 신령한 육체만 있으니 우리를 기존해서 말하자면 형상화한 영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신령한 몸을 입더라도 영혼은 그대로 있어 여전히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가 된다. 아담 역시 그러했기 때문에 범죄해도 사탄 등 약령들처럼 범죄의 대가로 영원 멸망에 처해지지 않고 그 육체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났던 것이다. 원래 선악과를 먹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더라도 아담처럼 그렇게 지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계의 속성과 영계의 속성을 영원히 겸비하는 차원이라 할 것이다. 영물들은 오직 영계에만 속하는 존재들인데 반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처음부터" 창조되었다는 의미 그대로 양 세계를 아울러 통할하는 특수한 모양새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친히 그런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중 구조로 되어 계시는 이상, 하나님[아버지]께서 그런 모습으로 즉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에 하자는 없는 것이다. 뿐 아니라 성경에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위해 기도하신다"[롬 8:26]고 했는데, 이는 아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의미로 "하나님의 영"이시라는 표현을 했을 수도 있다.

이같이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나는 죽은 후에도 영영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시는 그 영을 인하여 아버지께서는 나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롬 8:11]. 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까닭에 내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으면 아버지도 함께 내 안에 모심이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께서 함께 계시는 모습을 가리켜 아버지시라 할 수도 없고 아들이시라 할 수도 없으므로 통상 "성령"으로 호칭되신다.

그러나 성령의 의미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앞의 지적처럼 그리스도의 영도 성령, 아버지의 영도 성령이시다. 믿는 우리가 “성령을 선물로서 받는”[행 2:38] 의미가 이것이다. 아들께서 내게 영원히 주신 선물이신데 내 안에 오셔서 계시기는 성령으로 계시므로 성령을 또한 "선물"이시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일을 철저히 원리원칙에 의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 해서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직 법질서대로 원리원칙에 맞고 절대로 어긋나지 않게 모든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하시지 않고, 그 때 그 당시의 기분에 따라 이렇게 하시기도 하고 저렇게도 하신다면 어느 피조물이 감히 그런 조물주를 신뢰하고 안심할 수 있겠는가. 무릇 세계가 존재하는 이상 그 세계를 유지 존속시키는 법질서가 있게 마련이니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시기를 일회성으로 짓지 않으시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서 창조하신 이상 이 법질서는 영구한 것이다.

법질서가 영구한 이상 이 원리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실 수 없고 피조물 역시 그렇게 어긋나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사람 아담은 어긋나는 일을 감행했고 그 결과 용서 없는 죽음의 결과를 빚어내어 오늘날과 같은 비극을 잉태한 것이니, 비록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나 역시 아담의 그런 행동을 따를 때 아담이 당한 범죄의 대가 그대로를 받을 것은 명약관화다. 법질서를 따라 철저히 움직이는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담처럼 불순종하는 일이 없이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빌 2:12].

§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결과


우리가 정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 있으면 몸과 머리 관계에 있어 이는 곧 3위1체 원리로 움직임을 뜻한다. 따라서 양면성을 이루고 동시성을 이루는 것이니 다시 말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로서 몸은 머리를, 머리는 항상 몸을 위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함이므로 우리의 순종의 의지는 우리의 것이나 그렇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하나님의 몫이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이 사실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자기중심이 되어 단 마음으로 순종함이 없을 때는 이 하나된 관계에서 떠나 있으므로 이 경우에는 하나님이 강제력이 동원되어 하나님 정하신 한도 내에서 행동하되 그 스스로 행동함이 되어 자기 파멸로 치닫는 결과를 이룬다. 그러므로 이 경우 "하나님의 능력이 이루게 하신다"는 식의 말은 통하지 않는다. 능력은 좋은[선한] 일에만 적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 때는 그래서 능력이 아니라 "강권력(强權力)", 강권 발동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즉 창조 당시부터 그런 것이니 한 몸 관계에서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머리의 역할을 하고 계시는 까닭이다. 그리고 피조물은 그 몸의 각 지체 역할을 함이다. 천사[영물]들이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 것은 천사들을 통해서 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치를 따름이다. 천사만 아니라 그 모든 피조물이 이렇게 하나님을 섬겨 하나님을 대행함이니 이는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하는 생명과 사랑의 원리원칙 그대로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하나님 친히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의미로 모든 것이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또한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시는 몫을 충실하게 수행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나 그 전 창조 당시부터나 피조물의 의지는 항상 순종함에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지가 작용되는 것이요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의지로서 이 둘이 양면으로 동시에 작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이룬다"[빌 2:12]는 것도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생명[우리로서는 구원] 자체이므로 이 생명의 일을 한다는 그 의미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것이 정상으로서 바로 생명이요 그것이 구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 받는다 또는 받았다 하는 것은 이런 생명 상태 즉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하는 상태에 복귀하였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중심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을 달리 말하여 "구원을 스스로 이룸"[빌 2:12]이라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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