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9일 수요일

(17)

잡록(雜錄, miscellanea)-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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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으로 오심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 Comforter, Helper)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니 그는 진리의 영으로서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는 것은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알고 있으니 그가 너희와 함께 지내심[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되 너희는 나를 볼 것이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 것이다"[요 14:16-20].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시니 이는 바로 삶의 짝의 개념이다. 아담이 "홀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창 2:18] 하시고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자[Helper]를 지을 것이다"[:18] 하셨을 때의 그 "돕는 자"와 같은 개념으로 "또 다른 돕는 자"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 "또 다른" 돕는 자라 하신 것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당시의 제자들에게 그런 "돕는 자" 즉 짝으로서의 개념으로 계셨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는 "짝"의 개념은 둘이 하나를 구성하고 있을 경우에 한정하는 것이나, 이 경우 12 제자와의 관계이니 어찌 짝이 되느냐 할 것이다.

물론 그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만이 아니시고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시라 할 때는 전체를 상대하시면서도 개별적으로 상대하시는 일을 동시에 넉넉히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 둘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시는 특성을 지니신다는 사실을 상기(想起)할 일이다. 고로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하게 그러하신 '오직 한 사람'이시다. 따라서 이런 사실도 아울러 가리키심이라 할 수도 있을진대 그리스도의 이런 '짝'으로서의 개념에 아무 하자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든 영물[천사]이든 지, 정, 의를 갖춘 인격적 존재를 만드실 때는 하나님 친히 그 모든 존재들의 머리가 되시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렇게 여럿을 만드신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왜냐면 사람의 영 외에는 그 속 사정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고전 2:11]. 각자 자기 사정은 본인 외의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또한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내가 나를 소상히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나를 지으신 분만이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아실 것이 아닌가.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임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왕 노릇을 하며 남을 다스리거나 앞장 서서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면 상대를 환하게 꿰뚫어 알고 있어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는데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 위에 올라서고 다스리고 하는 모든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생들이 생명 체제에서 떠나 죄인되고 죽은 자가 되어 있음으로 인해 생긴 결과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정하신 것이 아닌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심이다.

물론 아담은 당시 자연계와 초 자연계 즉 영계를 통틀어 모든 세계의 우두머리로서 다스리는 자였으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다스릴 수 있는 데에 필요한 모든 지식은 자기 아래의 영물[천사]들이 대표하는 것이어서 일일이 그들의 자문을 받는 것이었고 아담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그 말씀으로써 만물을 통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됨을 인하여 전적으로 그의 존재는 무의미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말하자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 당시의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가 있는 상태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아버지이시고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지도자시요 스승이신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통치권[군주제든 민주제이든]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왕을 공경하고 마땅히 존경할[그 직분이나 신분을 말함] 자를 존경하라 하였으니[벧전 2:17/롬 13:7]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롬 13:1]. 그러나 이 세상이 종료되면서 그런 세상 권력 역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권력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그 권력을 빙자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일 경우, 이는 당연히 배격의 대상이 됨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 함과 같다. 이 외에는 비록 세상에 속한 것이라도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에는 모든 권세와 권위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왕만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뭇 사람을 공경함이다[벧전 2:17].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심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하여 그렇게 함이다[약 3:9].

불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말한다. 이는 인간의 자율성을 말한다. 그러나 자기를 스스로 다스리지 못할 때는 타율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중심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으니 이를 제재할 필요성에서 3운법칙과 같은 강권에 의한 통제가 불가피하듯이 인간사회에도 마땅히 그런 제도가 있어 죄인을 구금하고 일정 기간 투옥한다. 그런 죄인에게는 인권이 없다. 남의 인권을 짓밟았으므로 그 보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율성 또는 존엄성은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완전히 자유를 보장해주심 이상 가는 것은 없다. 존엄성은 이러한 자결권(自決權)을 말한다. 남의 간섭 받지 않고 스스로 자기 일을 결정하는 자유다. 인간의 죽음도 그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만든 결과다. 악령들이 영원한 멸망의 운명에 처해 있음도 같은 결과로 인함이다.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몸이 머리의 지시를 받는다고 해서 머리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머리 자신이 몸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둘 하나됨의 이치다. 머리가 몸에 종속되어 오직 몸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그런 마당에 몸이 머리에 종속되어 있다고 절대로 말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둘은 주인이요 동시에 종이다. 3위1체의 원리에서 대소, 주종, 인과 관계를 이루고 있으나 일방적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나간다. 대가 소이기도 하고 주가 종이기도 하며 인이 과일 때도 있다. 이것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다.

갑만 을을 위하지 않는다. 을도 당당히 갑을 위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와 같이 함으로써 둘은 비로소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분명하지만 어느 쪽도 상대에게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 비결이 자기 부인인 것이다. 상대가 나를 위하고 있으니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할 수 있음이다. 왜냐면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의 상대를 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

이런 최고도의 이상적인 완벽한 방법이 있는데도 다른 것[방법]을 모색한다는 것은 참 것을 대치(代置)하자는 거짓 것의 수작만으로 남게 된다. 불교가 이런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고 "공존 운운"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해야 머리와 몸의 관계가 완성되는데도 조물주 하나님은 부정하면서 그런 것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도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최고도의 존엄성을 지닌 인간이 공존하는 방법은 머리와 몸의 관계를 철저히 유지하는 데에 있는데도 무조건 영생 얻자는 데에만 관심을 집중시키게 만들고 있으니 거짓이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머리와 몸의 관계에 따른 마땅한 도리 즉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을 버리고 도리어 그 반대되는 자기중심으로 나간 결과가 사탄 등 악령들의 범죄요 인간의 불복종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인생들에게 죽음이 왔으면 당연히 그 법질서로 다시 돌아와 이를 지키는 것이 죽음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를 살려 주심 즉 영생하게 하심은 이 법질서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베푸심이다. 그런데도 원인["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것-롬 6:22] 없이 결과["이 마지막은 영생"-:22]만을 탐하니 여전히 자기 중심의 바탕 위에서 무슨 영생을 논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인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은 없이 무조건 영생 얻는답시고 마리아를 우상으로 삼아 그 앞에 절하는[롬 1:25] 가증스러움을 범하게 하는 사탄이다. 한편 개신교는 무조건 은혜로 거저 주시는 선물로 산 자가 되어 있으니 영생은 따놓은 당상이라 믿기만 하면 된다고 성경이 말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천사 태평으로 지내고 있으니 그래서 성경에 엄격하게 생명의 법도를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으니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런 모든 것이 소위 "신학(神學)"의 산물(産物)임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다. 수백, 수천 년 동안 거기서 얻고 있는 결과물이다. 수만 년을 가더라도 그런 결과밖에 나올 것이 없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 오직 진리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심으로써"[고전 2:9,10]알 수 있는 까닭이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1,12] 함과 같다.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함"[:13]이다. "육에 속한 사람" 즉 자기중심의 인생들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니 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다[:14]. 자기중심의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그렇게 미련스러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를 "또 깨닫지도 못하니 이런 일은 영적(靈的)으로라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14]. 그래서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알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요 6:44,45,65/ 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1:25-27/16:17]. 물론 이런 개신교 교단에 몸을 두고 있어도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행 17:11,12]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전(傳)하고 자기 부인을 강조하였다. 한국 교회에도 그런 목사가 있어 신학생들이 장기판을 두고 있으면 눈물을 글썽이며 성경을 읽으라고 간곡하게 권하였다. 그들의 참담한 미래가 내다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찰즈 피니도 조나단 고포스도 원래는 장로교인이었다.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의 시발점과 원동력이 된 하루 4,5시간씩 4개월 여의 정오 기도회[매일 정오에 시간을 맞추어 기도하기 시작했으므로] 주역들도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었다. 누구든지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자에게 진리의 문은 열리고 성령의 능력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이 나타났다는 그 자체가 그들의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마 7:21-23].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바로 그러한 능력을 낳게 한 자세를 끝까지 견고하게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빌 2:12/딤전 4:16/고전 9:24-10:12/15:2/빌 3:8,9/딤후 3:15/벧전 2:2/히 3:6-17].

앞에서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게 임하여 오심으로써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심은[요 14:16-20]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 그대로 오심이니[요이 1:9], 그러나 만일 성령으로 계심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둘로서 계시는 둘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한 모습이시니 곧 사람의 모습이실 것이다. 왜냐면 둘이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하나로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께서 영원히 이제는 사람이 되어 계시니 내가 뵙는 주님의 모습도 사람의 모습 곧 완전한 사람이시다.

그런데 그 모습이 또한 아버지의 모습이 되심이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마 6:9] 하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온 우주에 충만해 계심이 하나님의 특성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도 세상에서 육체로 계실 때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성령으로 주님 안에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계심도 사실이요 하늘에 계심도 실상 그대로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내 안에 계실 때 사람의 모습, 사람으로 계심, 보이시지 않는 유일무이의 사람으로 계심이다.

나는 그러므로 내 앞에 계시는 아버지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막연하게 하늘에만 위치해 계시는 하나님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항상 나와 함께 사시는 바로 내 앞에 계시는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나와 함께 계시고 따라서 1년 365일 24시간 60분 내내 내 앞에 계시어 나만을 보시고[행 2:25/시 16:9] 나를 위해서만 생각하시는 것이다[시 40:5/139:17,18]. 나를 위해 모든 일을 이루시므로 그래서 모든 일에 감사 드림이다[살전 5:18].

"또 다른 보혜사"[요 14:16]가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심인데도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는 것은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하신 대목에서 "본다"는 언급을 하신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은 원래 우리가 볼 수 없는 대상으로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는데[요 4:24] 어째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이는 그 다음에 하신 말씀 "너희는 그를 알고 있으니 그가 너희와 함께 지내심[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다"이라 한 데에서 밝혀진다.

즉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사실을 "또 다른 보혜사"라 하신 것이다. 둘이 하나되어 계시므로 이를 가리켜 주님 친히 나라고도 하실 수 없고 아버지시라고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이라 하신 것이다. 그러면 세상도 육체로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데 왜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하셨는가, 본다는 것은 인지한다는 뜻인데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그냥 보통 사람으로 보고 있으니 그것은 여기서 의미하시는 "보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아버지의 영도 성령, 그리스도의 영도 성령,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모습으로서도 성령이라 부르는 것이나, 이 대목에서 말씀하신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그대로 각자에게 성령으로 임하여 계심을 가리키는 것이니 그래서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다" 하신 것이다. 그러니 당시 제자들과 함께 숙식하시면서 함께 사시던 바로 그대로 각자 개인과 더불어 그렇게 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도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 그대로이다. 때문에 "너희는 그를 알고 있으니 그가 너희와 함께 거(居)하심[사심, 同居]이라"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똑같은 그리스도이시나 단지 다른 것은 이제는 "육체로서"[히 5:7]가 아니라 성령으로 계시는 차이가 분명하므로 또 다른 보혜사라 하셨을 뿐이다. 즉 당시 제자들과 더불어 육체에 계실 때 "보혜사(保惠師, Comforter, Counselor[NIV], Helper)"로 계신 것이다. 이미 지적했지만 아담에게 여자라는 존재는 "짝[helper]"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의미로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이제는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계심이다. 그렇지 않고는 "또 다른"[another]이라 표현하실 리가 없다.

그러므로 당시 열두 제자들[ 및 기타 제자들-행 1:23]에게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함께 계시는 분이었으므로 늘 그를 인식하고 있었으니 이를 가리켜 우리는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이라 하는 것이다. 일부러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우리 개개인이 이렇게 영원한 자기 짝으로서의 그리스도[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를 또한 모셔-요 14:20/요이 1:9]를 모시고 있는 것이 현재의 우리의 삶이므로 이를 반드시 의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제 우리는 당시 제자들과도 또 다른 것이니 우리는 완벽한 지식 안에서 철저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 있음이다. 당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와는 달리, 친히 나의 영혼으로 계시고 나는 그 영혼에 해당되는 육체로 존재하므로 영혼과 육체라는 관계에서 완전히 머리와 몸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즉 철저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완전히 정상적인 관계이다.

바로 이러한 관계이기 때문에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복종시키게" 되며[고후 10:5]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골 3:17],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고전 10:31]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매인 생활이 아니냐 할 것인가, 그렇다면 남녀 부부 관계는 왜 서로의 육체가 서로에게 매임으로써 한 몸이 되는가[고전 7:4]. 바로 이런 것이 둘의 하나됨이다. 즉 사랑인 것이다.


남녀는 육체로 "한 몸"[창 2:24]으로서의 하나됨이요 나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한 영으로 연합함이다[고전 6:17]. 그러므로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셨으므로 내가 이런 관계 즉 말에나 일에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하지 않는다면[골 3:17/고전 10:31/벧전 4:10,11][요 14:10/5:19] 나는 구원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음이 분명하므로 나 자신 참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여부부터 살필 일이다[고후 13:5].

오늘날 "배도(背道)"[살후 2:3]의 시대에서는 전술한 바 있듯이 영생 하나만 달랑 챙기는 것으로써 전부인 줄 착각하는 세상 종교가 되어 있어 인과율을 완전히 무시하므로 여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평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씀하신 마당에-히 1:2]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멸망을] 피하리요[히 2:2,3]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마음에 새겨 둘 것이니 혹 [금이 간 항아리(단지)나 혹은 구멍이 난 가죽 부대에서와 같이] 새어 버릴까["흘러 떠내려 갈까"의 우리말 번역은 잘못된 것] 염려한다"[히 2:1] 한 그대로다. 자기중심에서 오는 범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는데 그런 자기 부인은 없이 영생만 주시는 것으로 만들어놓은 교리이니 이런 사람이 만든 교리[그러나 실제는 사탄이 조종으로 된 "귀신의 가르침"-딤전 4:1]를 따르면 멸망밖에 없음을 사탄은 잘 알고 있기에 지금까지 끔찍이 위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회개할 때이다. 성경으로 돌아가 성령의 가르치심[계시-요 6:44,45,65/ 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1:25-27/16:17]을 앙망할 때이다. 지금은 마지막 때를 당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충분히 그 모든 영광으로 인생 중에 나타날 때인즉 이제부터는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고 핑계 댈 수 없으며 과거 예를 들면서 현재를 정당화시키는 일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오직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내침을 당할 것밖에 없다. 지금은 적 그리스도가 나타남으로써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이 심판당하는 심판의 때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위적인 종교 교리에서 정히 벗어날 때이다. 불교도 천주교도 개신교도 이슬람교도 모두 그렇다.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믿음으로써 일단 구원을 받았으니[그들은 "믿음"이라는 성경적 개념 자체부터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에서 명령하는 그런 것이 모두 무슨 소용이냐 ,필요 없다"는 식이다.

그래서 성경적 관점에서 믿는 것도 아니거니와 믿으려고 할 마음도 없다. 다만 양심의 가책은 있는지라 양심의 책망을 받으면 회개하면 된다 하고 회개합니다 말만 하고는 그것으로 그만이다. 육신에 속하여 있다고 바울 자신이 번민하였다고[롬 7:14-8:13을 복음을 믿은 뒤의 사도 바울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라고 인위적으로 해석하여] 사탄이 가르치고 있어 그 교리를 믿는 관계로 회개가 실상 불가능하다.

한없는 저주 받은 세대다. 이러고도 어찌 성령의 역사(役事)를 기대하리요. 받는 것은 마신(魔神) 곧 악마의 영일 뿐이다. 그래서 능력을 행한다 하나 사탄이 하나님으로 가장하여 저지르는 행위를 보고 감지덕지해 한다. 자기중심에는 하나님의 그 어떤 진리도 깃들 틈이 없다. 주님은 진리와 비(非)진리 또는 반(反)진리와의 차이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므로 너희가 영접하지[믿지 않으나]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할[믿을] 것"[요 5:43]이라는 말씀으로 명백히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중심과 맞서는 자기 부인 또는 사랑으로 둘이 하나되는 생명과 사랑의 법질서의 차이다. 3위1체의 원리에 따른 둘이 하나됨에는 자기 부인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야 갑의 것은 을의 것이 되고 을은 갑의 것이 되는데 자기중심이라 일방적인 것만 요구하니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의 생명일 수가 없다. 바로 이 관계가 성립되기 위하여 즉 친히 나와 하나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인 것이다[고후 5:15/롬 14:7-9]. 그런데 이 목적을 따르지 않으니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고 오지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고후 5:15], 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이 구원의 목적을 무시하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마 7:21].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21].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 줄 믿어야 자기를 위하지 않게 되니 곧 자기 부인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믿지 않으니 줄곧 내처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함이라"[요 5:38] 하신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니,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한다"[:39,40] 하신 그대로다.

사람이 믿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중심을 끝까지 버리지 않음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적 그리스도의 출현도 "진리를 사랑하지 않음으로 인해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로 심판 받게 하시려는" 차원이라 한 것이다[살후 2:10-12]. 이 차이를 또한 지적하시어,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한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1,42,44] 하신 것이다.

주님 스스로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니 오직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이는 아버지시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는 이는 아들이신지라 곧 삼위일체 원리를 따르는 생명과 사랑의 원리대로 행하심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기중심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한 마디로 불가능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중심이 되어 있는 자들끼리 서로 영광을 취하고,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은 거절한다.

갑은 을의 영광을 위하고 을은 갑의 영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되는 생명의 법질서를 버리고 갑은 갑대로 을은 을대로 각각 자기 영광을 구함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오직 이 생명과 사랑의 원리원칙대로 하심으로써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시는"[히 1:9] 그리스도와 상합(相合)이 되지 않고 상극(相剋)이 되는 것이다. 좋아 아니하니 믿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 의(義), 선(善) 등이 모두 이 이치를 말함이요 죄, 악, 불의, 불법이 모두 이 자기중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항상 인과(因果) 관계다. 아들께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하심에만[요 4:34] 전심전력을 기울이시는 것을 가리켜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 것이다"[요 8:28] 하셨고, 그래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29] 하신 것이요,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다"[:29]고 다시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하시니 아들께서도 아버지를 본받아 아버지를 위하심이요 또 아들께서 항상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심에 전력을 다하심으로써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니 아버지 또한 아들과 함께 하시어 아들을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는 것이니 벌써 왔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16:32] 하심과 같다.

바울 또한 같은 말을 했으니,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믿음을 세상에 알릴 때]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로 원하니, 주님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라"[딤후 4:16,17] 한 것이다.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될 것인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라" 하셨다[요 8:32].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냐 하면 죄로부터의 자유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기 때문이다[:34].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할 것이다"[:36]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자유케 하시느냐,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나와 현재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에 나를 자유하게 하시는 것이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고후 5:14]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니[:15] 그 어떠한 죄를 지을 근거도 이유도 이제는 일체의 변명도 통하지 않게 되어 있다.

죄의 종으로부터 즉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마 1:21] 해방되었으니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함과 같다. 죄가 무엇이냐, 이를 가름하여 주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마귀 사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요 8:38] 하셨다. 아버지와의 하나되심을 인한 갑과 을의 관계에서 아버지를 본받아 모든 것을 행하시고 말씀하신다는 말씀이시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갑은 을을 위하여 살고 을은 갑을 위해 사는 관계이다. 그러나 죄는 처음 범죄한 사탄을 따름이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요일 3:8] 아담 내외가 사탄을 따라 범죄한 것과 같이 범죄하는 자는 마귀를 따라 행하는 마귀의 자식들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는 것이니 이는 그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하심과 같다.

이에 반하여 의(義)와 선(善)은 둘이 하나되는 또는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한 몸이 되는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를 따라 행하는 것이므로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라"[:42]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것이 자기중심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영합(迎合)되지 못하는 것이다. 빛을 싫어하고, 싫어하니 미워하기 때문이다[요 3:18-20]. 상합되지 않으면 상극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다'[8:43] 하신 것이다.

그리고 거듭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한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요 8:45,46]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이 사람들은 구원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들을 줄을 알지 못하므로 흥미를 느낄 수도 없다. 오직 욕심스럽게 영생하는 데에만 눈과 귀가 열려 있을 따름이다. 아담이 그런 영생하는 자로서 죽음에 이른 줄을[롬 5:12]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영생 얻으려면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회개가 아닌가. 그래서 그 회개 즉 순종하겠다는 약속을 믿어주시고 죄 용서하시고 그 죄 용서된 바탕에서 성령을 주심인데 즉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시는 모습으로 내 안에 영원하신 선물로 임하여 계심으로써 내가 영원히 사는 자가 되어 있는 현시점에서 왜 또 죄를 짓겠다는 것인가. 그러면 그 죄 용서가 어떻게 되는가. 무의미가 된다.

그래서 "옛 죄 깨끗하게 하심을 잊어 버렸다"[벧후 1:9] 하는 것이다. "옛 죄"다. "전에 지은 죄", 새 언약이 아닌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贖)하려고 죽으신 것이다[롬 3:25/히 9:15/벧후 1:9]. 단 앞으로 지을 죄라도 그것은 형제 사랑의 결여와 같이 의식하지 않고 즉 모르고 지은 죄에 한하고[요일 1:6-2:2] 죄인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짓는 죄는 고의적으로 짐짓 범하는 것이 되어 영원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히 6:6/10:26,29].

단 이 경우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과 있은 다음의 일로 명확히 경계를 이룬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육신에게 사로잡혀 있으므로 죄인 줄 알고도 지을 수밖에 없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 한 것이다[롬 7:24,25]. 그 때는 선인 줄 알면서도 선을 행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 생명"[6:4]의 "권능"[행 1:8]을 받았으므로 [그 권능이 어떤 것인지는 앞서 설명한 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는 것이요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 있는 체제요 구조에서 오는 것]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것이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다"[요일 3:6]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는 것이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7-9]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요일 2:1/3:10/5:18/고전 15:33,34/벧전 4:1/히 2:14,15/요일 2:29/요삼 1:11/롬 2:7,10].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한 것은, 초대교회 당시도 가당찮게 "육신"을 핑계로 하여 "죄를 지어도 구원은 받는다"는 사탄의 교리가 침투해 들어왔음은 당연하다 하겠는데 바로 그런 감언이설을 경계한 것이다. 죄를 지으면 무조건 마귀 사탄을 "아버지"라 섬기는 것이 된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아들됨으로써 구원된 우리로서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듣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을 스스로 증명함이다"[요 8: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할 것이다"[:51]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3:16]는 말씀과 같은 뜻이다. 다시 말해 그 "믿음"의 뜻 풀이를 하신 셈이니, 곧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킴이다[요 14:21,23]. 곧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음"[고전 9:21]을 명심할 일이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갈 5:18/4:21] 한 것은 모세 율법으로 나타난 대로의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율법 아래 있는 상태를 말함이다.


그 때는 죄를 깨닫게 해 주는 역할뿐이었으니[롬 3:20/5:13/4:15/7:7]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당시 교회 중에 있으면서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이들"[갈 4:21]을 책망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모세 율법인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려"[갈 4:10/11]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 함과 같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음"[2:13]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그러면 차이가 무엇이냐 할 때, 말이야 똑같이 "율법"이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께는 영원히 율법 없는 자가 아니니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라 함과 같다[고전 9:21]. 율법의 양면성이라 할 것이니 상대적이라 할 것이다.

즉 대전에 있는 사람이 서울 사람에게는 남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고 부산 사람에게는 북쪽에 위치해 있음과 같다. 같은 장소이지만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방향이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이럴 수도 있는가 하지만 현실이 그러하다. 내가 죽은 자로 있을 때에는 나의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었으나"[롬 7:13],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산 자가 되어 있는 현재에서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음"[2:13]이라는 말씀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 하는 것이요 때문에 "그리스도의 법[율법, 계명, 말씀]을 성취하라"[갈 6:2] 하는 것이다. 이것은 후자에 속함이다. 전자의 경우를 대표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이었다. 즉 할례[할례 자체는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것이나]를 받고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 등이었다. 이제는 모세 율법으로 상징되던 전자의 의미를 버려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정해서 그것을 지키고 하는 등의 것은 완전히 폐기된 것이다.

근본적인 내용을 상징하는 것으로서의 외양을 갖추어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나타낸 것이었으므로 그래서 그림자라 하는 것이다. 이제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셨으므로 그런 겉모양으로서의 모든 것은 버리고 오직 그 실질적인 내용으로서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율법 곧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성경은 "율법의 요구"[롬 8:4-"the righteous requirement(s) of the law"]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율법[하나님의 율법-"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다"-고전 9:21]은 영원한 것이고 [3위1체 원리에 따른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 차원에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롬 7:10]이라는 점에서는 영원 불변의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이랴 했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2:8]이라 했고, "자유의 율법"[:12]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원래부터 하나님의 율법[계명]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12] 것이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시켜서는 "새 계명"[요 13:34] 되어 있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이 되어 있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는 것이다[:2]. 다시 말해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롬 7:14]는 그 상대성에 있는 것이다. 즉 같은 율법[모세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율법 즉 그리스도의 율법]이라도 육신에 속한 죽음의 위치에서는 죽음으로만 내게 나타나지고 구원과는 전연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어 신령한 것 곧 생명의 위치에서 보면 이야말로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롬 7:10]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고 죽은 자였기 때문에 "능히 살게 하는 율법"[갈 3:21] 되지 못한 것이요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육체가 없다[3:20]. 그러나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으로서의 율법의 특성[여기서는 항상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등의 모세의 율법과는 별개임을 명심할 일이다]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그 여러 편지에서 율법과 믿음의 차이를 계속하여 설명한 것은 초대 교회 당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된다는 무식한 말을 퍼뜨리는 자들이 있어 교회를 어지럽게 한 때문이다[행 15:5].

마귀 사탄은 오늘날은 이를 뒤집어 그리스도의 율법을 폐기하는 쪽으로 즉 무시하고 등한히 여겨 사도 요한의 경고 그대로 많은 사람들을 "살인자"[요일 3:15]로 만드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37-40]은 영원히 유효한 것이다. 이를 풀이하여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이 내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대로 역시 너희는 남에게 해 주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다"[7:12]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다"[갈 5:14] 했고,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롬 13:8] 한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다"[:9]고 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10] 했다. 때문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마 5:17,18]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경고는 몸과 머리로서의 관계를 힘써 유지하라는 것이니 그 외 달리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친히 내게 성령으로[아버지와 함께 하나되신 모습으로] 임하여 계심으로써 가장 가까운 한 사람으로서 내게 짝이 되어 계시는 것도 이런 이치와 원리를 따르심이다. 이렇게 오심을 가리켜 "내가 너희를 고아[orphan]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너희에게로 오마"[요 14:18] 하셨으니 엄마 품속의 아기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각자의 기본 모습인 것이다.

율법의 행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으로서,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니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갈 2:16] 한 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버리고 율법 행위로 얻으려 함도 아니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기도 하고 동시에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아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모세의 율법 즉 "의문(儀文, written code)에 속한 계명의 율법"[엡 2:15]이 아니니 지금은 모세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누차 지적한 하나님의 율법을 말함이다. 즉 한 몸 의식에서 하나님을 머리로 모심으로써 된 한 몸의 지체됨을 인하여 함께 지체된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계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계명 지키는 것을 말하느냐 하면[요일 2:3,4/3:22-24/5:2,3/15:10/요 14:15,21,23/15:10,12/13:34/계 12:17/고전 7:19/롬 13:9],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인이니까 계명을 지키는 것이지 죄인이 지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죄인이 지킨다면 혹은 지킬 수 있다면 벌써 그는 의인이지 죄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키지 못하고, 또한 지키지 아니함으로써 죄인이 되고 죽은 자가 된 것이다[롬 5:12].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육신에게 매여 "죄와 사망의 법"[롬 8:2]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육신에게 매여 있지 않아도 그 스스로 선택하여 자기중심으로 나간 경우로서 아담이 이에 해당되고 사탄 등 악령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 육신에 매여 있었으므로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니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여기에 기인한다. 즉 율법 행위로는 절대로 의롭게 되지 못함이다. 육신에 매여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어 계명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또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어 먼저 죽어야 하므로 아무리 계명을 지킨다고 해도 그 율법 행위가 나를 죽지 않게 못한다. 죄인으로서 죽은 자가 되어 있는데 어찌 의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또 뿐만 아니라 내가 죄인으로서 의인이 되려는 또는 영생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행위니까 그 자체가 이미 자기중심으로서 죄다. 고로 죄만 더 짓는 꼴이지 별 뾰족한 수가 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도 율법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함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 하는 것은 영생하는 자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영생하는 자가 되었으니 이 경우 지키지 않을 때는 지키지 못해서 못지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기를 원치 않는 고로 일부러 지키지 않는 것이 된다.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 여전히 죄인이고 죽은 자가 되어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능히 지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않을 경우 죄인이 되고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이요 죽은 자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로서 그리고 죄인으로서 의인이 될 수 없다는 데에 주안점이 있다. 즉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였다는 그 뜻이다. 그러다가 즉 내 스스로는 나를 구원하지 못했으나 그리스도 친히 나 위해 죽으심으로 그 덕에 내가 값없이 의인이 되어 있는 지금 이 마당에서는 문제가 다르니 의인으로서 당연히 계명을 지키기를 요구하게 됨이다.

그 계명이 도대체 어떤 내용이고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냐, 한 몸 체제에서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어 있는 위치에서 오직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것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를 위하고 함께 지체(肢體)된 내 이웃을 위해서만 사는 것,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니 왜냐면 실제 그 내 이웃이 나와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내 이웃을 바로 '나 자신'으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그 한 몸의 구조에서 가령 눈이라는 지체라면 나는 눈일 뿐이지 코나 입이 될 수 없다. 코와 입을 역할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내 이웃들이니 그 이웃이 나라는 존재의 한 부분이 아니면 무엇인가. 나는 이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하나를 이룬 거대한 나[大我]인 것이다. 나 혼자라면 소아(小我)이다. '소아'와 '대아'의 개념이 여기서는 이와 같이 나타난다. 이 우주 전체가 바로 나 자신이다. 동시에 그 전체의 지극히 작은 부분 하나가 또한 나이다. 3위1체의 원리에서 이러한 완벽한 조화(調和), 조화(造化)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공 같이 둥글다. 둥글다보니 어느 것이 처음이고 나중인지, 머리이고 꼬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 '처음'이 있고 '나중 마무리 손질에 해당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원을 작도해서 그려놓고 보면 어느 점이 처음 시작점인지 종결점인지를 알 수 없으나 원래 작도할 때 처음 시작점이 있었고 끝 마무리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한 몸의 구조로 이와 같이 머리와 몸으로 이루어진 것이 생명 체제다.

그러므로 머리이든 몸의 각 지체를 이룬 구성원이든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을 가리켜 성경에서 "자기를 부인함"이라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법에서 핵심이 되는 자기 부인은 몸과 머리의 체제에서 반드시 머리가 존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 머리는 머리 자질이 충분해야 머리로서 위치할 수 있다. 머리는 그 몸을 이룬 각 지체 각 부분을 자기 자신을 아는 듯이 너무나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니 그래야 머리될 자격이 있다.

그러므로 그 머리는 반드시 그 모든 몸의 각 지체를 형성하고 있는 구성원을 스스로 만들어 낸 당사자 본인이라야 한다. 즉 조물주시다. 조물주 하나님만이 머리가 되는 구조다. 또 이렇게 되어지도록 만물을 처음부터 창조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 창조의 뜻 그리고 그 창조된 모든 것이 이와 같은 이치로 원활하게 유지 보전되게 하려는 뜻이다. 그러니 이 뜻을 따르고 행하는 자라야 그런 가장 이상적인 생명의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하심은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이 된다[마 7:21].

하나님의 계명이 바로 이것이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자기를 위하지 말고, 자기를 위해 살지 말고] 오직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대하고 위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머리를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나 스스로를 위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저절로 내가 위해지되 앞서 말한 그런 거대한 나로서의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위해지는 것이니 이 얼마나 벅찬 감격과 감동의 삶이냐. 한정도 없는 행복인가!

그래서 산 자만이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서의 의인만이 지킬 수 있는 계명이라 하는 것이다. 만일 이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지 아니하면[나의 완전한 자유 선택으로] 어찌 되는가. 처음 그러했듯이[아담이나 사탄이나 기타 악령들이나] 생명의 체제에서 스스로 이탈했으므로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것이라 그 선택대로 되어질 수밖에 없다. 아담 역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같은 설명이지만 자기중심 즉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한다는 것은 일절 배격된다. 이 하나님의 생명 세계에서는 절대로 용납되지를 못한다. 왜냐면 그것은 이 가장 아름다운 조화의 세계에서 부조화, 불협화음을 내는 장본이 되는 까닭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자기 고집대로 하여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경우 이는 영원을 통해서도 그러할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터이므로 영원히 격리될 수밖에 없다.

생명으로부터 분리되면 그것은 그 반대되는 현상만이 드러나는 수밖에 없다. 즉 세세토록 올라가는 '고난'의 연기다[계 14:11]. 양면성의 이치에서 그렇다. 중간에 해당되는 것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기중심이라는 것이 일절 허용되지 않는 암적 존재와 같으므로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한 것이다. 자랑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이다.

고로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다"[고전 1:31]. 다시 말해 그리스도로만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갈 6:14] 함과 같다. 몸은 머리를 자랑하고 머리는 몸을 자랑함이니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은 영원히 용인되지 않는다.

자기중심이 용납되지 않고 오직 '하나' 의식, '우리' 의식, 공동체 의식이라 해서 '나'라는 것이 무시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둥글기만 한 공의 비유를 말했지만, '나'의 가치는 전제만큼이나 전체와 다름없이 무한대다. 그 모든 숱한 '나'[나만 아니라 나 외의 남들]라는 것이 뭉쳐 하나를 이룬 조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진정 민주주의의 뿌리, 개인의 존엄성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이라고 한 이 대목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성령을 각 사람 앞앞이 부어 주시는 의미다.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친히 각 사람에게 똑같은 비중으로 임하여 오시고 영원히 함께 사시는 것이다. 아들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과 똑같이 임하시어[요이 1:9] '엄마 품속의 아기'의 그림으로 묘사되듯이 나와 함께 영원히 사심이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신뢰, confidence, 우리말 번역은 "담대함"]과 기쁨[rejoicing, 우리말 번역은 "자랑"]["our courage and the hope of which we boast"-NIV, 앞의 것은 KJV]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조상들이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40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말하기를 '저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했으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惡心)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勸勉, 알아듣도록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하는 것)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6-13].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confidence]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될 것이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14-17].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시어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다. 저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들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3:18-4:3].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하늘에 오르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할 것이다"[히 4:6,7,11-14].

말 그대로 심각한 경고로 일관하고 있다. 결국은 믿음은 우리 스스로 굳게 지키지 않으면 흔들릴 수 있고 급기야는 우리 스스로 버리기까지 하게 되므로 이런 경고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거울이 되는 옛 이스라엘 "광야 교회"[행 7:38]의 다수는 믿지 않고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니 "믿지 않았다"는 낙인이 영원히 찍히게 된 것이다. 다음의 성경 대목도 같은 내용의 논조다. 그래서도 히브리서 저자가 바울 사도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경기장에서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우승하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그러하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이니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달리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다"[고전 9:24,25].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던 바 이는 저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저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은 것이다"[9:26-10:5].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들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다. 저들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죽었으니 우리는 저들과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들 중에 어떤 이들이 주님을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으니 우리는 저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들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으니 너희는 저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들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6-12].

처음 믿을 때 그 회개하던 때의 "처음 사랑", "처음 행위"[계 2:4,5]를 일관되게 유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믿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단죄되는 것이다. 왜냐면 그 믿음 없음은 불복종이라는 행위로써 드러나게 마련이니 곧 자기중심으로 나가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나가지 않음이다. 중도에 그런 자세로 변경됨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항상 마음이 미혹되었다"고 하신 것이다. "마음을 스스로 지키지"[잠 4:23] 않으면 수시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갈 5:6]. 사랑하는 상대에 대하여 스스로 충실치 않는 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이다. 멸망의 운명을 자초한 사탄과 악령들을 보라, 어찌 아니 두려워하고 떨지 않겠는가. 사탄도 처음에는 거룩한 천사들과 똑같은 거룩한 영물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영원히 그렇게 망칠 수 있다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어찌 떨지 않으리요.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스스로를 죽은 자로 만든 현실은 우리가 직접 오늘날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는 바가 아닌가.


그러나 그런 선례(先例)와 전례(前例)로서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천사들이라는 긍정적인 것도 엄연한 실재(實在)다. 그러므로 우리도 얼마든지 거룩한 천사들처럼 끝까지 복종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동시에 또 악령들처럼 또는 아담처럼 범죄함으로써 자멸에 이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서 성경은 이와 같이 심각한 경고를 되풀이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항상 양면성으로 말하고 있으니 이를 역시 잘 대변해 주는 것이 다음 대목이다.

즉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다. "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나,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0-22] 함과 같다.

각자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므로 그래서 우리에게 처음부터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신 것이다. 위의 말씀대로 해도 하나님께서는 간섭도 강제도 않으신다. 그 결과를 아담의 죽음에서 그리고 사탄의 영원 멸망에 처해진 운명에서 확인하게 된다.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아담이나 사탄 등 악령들을 구제해 주실 수 없었다. 즉 스스로 멸망이나 죽음에 이르게 되면 이를 억제해 주시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냥 그대로 자기 택한 대로 가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법이다. 그리고 질서다. 그래서 법질서는 아름답고도[사랑스럽고도] 무서운[무자비, 냉혹한] 것이다. 즉 인자와 엄위가 하나로 조화하여 공존(共存)함이다. 이것이 3위1체의 원리다. 오직 '사랑'과 '두렵고 떠는 것'만이 유일한 비결이다. 사랑에는 평안과 넘치는 기쁨이 있다. 이런 공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두렵고 떨라"[빌 2:12]는 경고를 한 다음에 같은 편지에서 정반대되는 의미의 격려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이니, 곧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 할 수 있는 것이다.

"두려워하여 떠는" 것과 "항상 기뻐하는" 것은 아주 반대다. 빛이 파동성과 입자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은 의외라 할 것이다. 이 둘은 외양으로는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이다. 죽음과 생명이 어찌 한 울타리에 있다고 하리요. 그러나 이 둘은 평행선을 유지하며 영속하는 것이다. 극과 극의 대립이지만 또한 조화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심과 동시에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신 것이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아무리 백독(百讀) 천독(千讀)을 해서 읽어도 성령의 계시를 받지 않고서야 어찌 안다고 하리요-요 6:44,45,65/ 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1:25-27/16:17] 구약의 하나님의 이미지[image]와 신약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이 너무나 상이하고 정반대인 것에 의아해하나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하나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당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다"[수 24:15] 한 것처럼, 오늘날도 모든 인생 각자 앞에 놓인 것은 '양자택일'이다. 진실로 철저한 고독(孤獨) 속의 독단(獨斷)이다. 의논하지 않고 혼자서 결단하는 것을 독단이라 하거니와, 이 경우 하나님과도 의논할 수 없다. "네 스스로 결정하라" 하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때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결단코 하지 아니할 것이라" 해도, 여호수아는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19] 함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다. 바꾸어 말하면 능력만 빼고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되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영물들을 창조하심도 마찬가지 의미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였다"[요 10:34,35] 하심과 같다. 능력만 제외시키셨다는 것은 능력이 있는 분은 하나님만으로 충분하고 그 이상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왜냐면 머리는 하나로서 충분하고 여럿이 있을 필요도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즉 이렇게 서로를 격려하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곧 매일 모일 필요성에서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인 것이다[행 2:46/5:42/6:1]. 단지 종교 의식이라면 날마다 모일 것이 없고 특정한 날에 모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나 생활상의 필요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해야 할 긴박함에서 그렇게 날마다 모였고 히브리서는 매일 그렇게 하라고 지침까지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한국 교회 전통의 새벽기도회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참으로 바람직한 것이다. 교회는 이것이 형식화하는 것을 막고 좀 더 활성화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상징성으로' 읽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후 5:14]고 전제한 후 "우리가 결론 내리건대[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15] 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으로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주신-"go give Himself for me"]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함과 똑같은 의미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닌 것이다. 말 그대로의 뜻이다. 직접 우리의 일상 생활 곧 우리의 실질적인 삶이 자기중심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가운데에서의 그리스도 중심임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다시 말해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한 그대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한 그대로인 것이다.

"말에나 일에나 주님의 이름으로 하고"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상징적인 의미가 될 수 있는가? 실제 생활에 그렇게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베드로 역시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즉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으시기를. 아멘"[벧전 4:10,11] 한 것이다.

바울이 말한 말에나 일에나 주님 이름으로 하여 영광 돌리라는 위의 경고와 아무 차이가 없다. 그러면 당신은 이 말씀대로 실천한다고 축자(逐語, 逐字) 해석이라 하여 우리를 미쳤다고 할 것인가. 그러면 그 경우 마땅히 바울 사도의 이 말을 들을 일이다. 즉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후 5:13] 한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은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위하고 같은 한 몸을 이루어 각 지체가 되어 있는 내 이웃[믿는 형제들]을 위함이다.

이 곧 처음부터 성경이 강조해 온 "온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마 22:40]이니 즉 아담의 범죄 후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말씀하여 오시고 강조해 오신 사람 삶의 기본 틀 곧 영원한 삶의 법질서인 것이다. 다시 말해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하고 함께 지체된 내 이웃을 나 자신으로 여기고 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이니 이는 상식 차원에서 넉넉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요 미친 것이 아니며 만일 이를 고집할 경우 도리어 당신이 "미친 마음"[전 9:3]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알 것이 아닌가. 우리의 신체 구조를 보아도 서로가 서로를 위함으로써 거대한 자기 자신을 이루어 한 신체로서의 구실을 아름답게 해내는 것이니 만일 머리는 머리대로 살고 몸을 몸대로 살아 눈은 눈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하고 입은 입대로 팔은 팔대로 그렇게 제각기 움직인다면 어떻게 한 몸으로서의 통일된 일관성 있는 움직임이 가능하겠는가. 바로 그런 뜻으로 성경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롬 14:7-9/고후 5:15] 즉 자기 부인을 설명하고 강조하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인생들이 너무나 진리에서 벗어난 채로 죽은 자 그리고 죄인으로서만 살아 그것이 마치 정상인 양 여기며 살았기 때문에 인습(因習)에서 헤어나지 못해 그런 것이지 이제 진리를 깨달았으면 그 진리대로 따르는 것이 정상이고 아름다운 삶의 실천이 아닌가. 한 몸으로서의 머리와 몸의 관계로 유지 존속되는 삶의 이치이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확실한 이상적인 것인가. 이상향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함이다.

이상과 같은 대목 전후에 율법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고 해서 헷갈린다고 말할 것인가.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갈 2:16] 한 것이라든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으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갈 2:19-21] 한 것인데, 다시 되풀이 설명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 얻고자 하는' 일체의 헛된 망상을 가리키는 것이니 이 "율법"이라는 단어 자체를 당신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게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한 것과 같이,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일절 염두에 두지 않고 단지 자기이 율법 지킴으로써만 구원이 된다고 맹신하는 일부 유대인들이 당시 교회를 그런 당치도 않는 말로 교란시키므로 이를 논박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우리에게는 실제는 해당이 되지 않는 책망이요 경고인 것이다. 왜냐면 지금은 그 누구도 모세가 명한 대로의 날과 달과 해와 절기를 지키고 그리고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오는 할례 받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의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그런 것을 그리스도를 믿음과 동시에 지켜야 구원된다고 교회를 혼란시켰기 때문이다. 고로 이러한 망상들을 바로잡으면서 그런 모든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롬 7:4]고 한 것이다. 이런 율법을 가리켜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儀文)에 쓴 증서[the certificate of debt with its handwriting of requirements-NKJV]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시어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고 한 것이다[골 2:14].

다시 말해 의문[written code]에 적은 대로의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면서 제물 드리는 법, 그 시기 등등 번잡한 모세 율법이 상징하고 있던 실질적인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의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되는 그 두 계명에 있는 것이고 실제 그 두 계명은 자기 부인이 아니면 지킬 수 없는 것이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그런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형식적인 것으로만 지키게 하여 구원 얻는 믿음의 표상이 되어 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키면 율법에 흠이 없는 의인으로[빌 3:6/눅 1:6] 여겨져 왔던 것은 사실이니 왜냐면 우리 구원의 골자가 되는 믿음의 특성은 그대로 살렸기 때문이다. 즉 우리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 믿음이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 친히 사시는 것으로 나타나 실제 생활에 나타나는 것을 가리킴인 것이다. 바울이나 베드로나 그 사실을 확실히 한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형식만 지켰지 그 실질적인 내용은 지키지 못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빚진 자이니 이 빚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갚아지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단지 형식적으로 그 갚는 시늉만 해 보인 격이었으나 이제는 그 빚이 완전히 청산되고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그리스도께서는 나 위해 사시는 몸과 머리의 관계가 완전히 정립되어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 내리듯이 이 하나님의 뜻 곧 섭리와 경륜(經綸, 일정한 목적을 두어 이를 이루기 위해 체계적으로 움직임)을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즉 다시는 의식과 예식을 차리는 종교가 아니라 단순한 삶, 일상생활을 역설함이다.

그러므로 몸과 머리로서 또는 육체와 영혼 관계로서 나와 그리스도와의 둘이 하나되어 있는 삶이니 곧 나와 똑같은 한 사람으로서의 주님의 모습이시요 이는 또한 아들을 통해 자기를 나타내신 아버지의 모습이시다[요 14:9]. 그래서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아기와 같은 것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인 것이다. 어버이의 손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모습이지만 엄연히 갑은 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해 사는 영원한 법질서 차원에서의 삶인 것이다. 자기 부인이 절대적인 것이다.

바로 이 자기부인을 가리켜 5:14]고 전제할 수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15] 했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 2:20]이라 함이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골 3:17]이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함"[고전 10:31]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의도하시고 정하신 정상적인 인간 삶이니, 이대로 사는 것이 구원이요 믿음이면 "구원을 이루는" "항상 복종함"[빌 2:12]인 것이다. "죽은 자"[마 8:22]가 아닌 "산 자"[고후 5:15]로서의 당연한 생활 자세인 것이다. 이렇게 산 자가 되어 있는 것이 우리 구원이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이 산 자였던 것과 같은 의미다. 그러나 그 '산 자'가 '죽은 자'가 되는 비극에 함몰했으니 우리 역시 그와 같은 지경으로 빠질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고한 것인데 그것이 그리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인가.

당시 열두 제자들[혹은 그들과 더불어 그 외 몇몇]이 항상 예수님과 함께 기거하면서 일하던 것과 같은 양상으로 우리 각 사람이 오늘날도 예수님과 함께 살고[산다기보다 일하고] 있는 모습과 위치가 바로 우리의 성령 받아 모심이요[요 14:16-18] 이는 곧 아버지와 아들을 모심인 것이다[요이 1:9]. 몸과 머리의 관계요 육체와 영혼의 관계로서 영원히 '둘로서의 하나'의 삶이요 불가분의 아름다운 사랑의 삶이다.

사랑이 없으면 이는 영락없는 속박이 된다. 인간이든 영물이든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존재로 처음부터 창조된 까닭에 이 자유의 본성은 사랑이 아닌 경우 반드시 자유롭기 위해 즉 자기 선택대로 하기 위해 과거의 사랑의 상대를 귀찮은 원수 같은 존재로 취급하여 발로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망동을 부리게 되어 있는 무서운 현실이다[히 6:6/10:26,29].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9:24-10:12/15:2/빌 3:8,9/딤후 3:15/벧전 2:2/히 3:6-17]는 경고가 아닌가.


영원한 3위1체 원리에서 생명 아니면 죽음이요, 사랑 아니면 미워함이요 자유 아니면 속박이니 이상 사실에 대하여 더 이상 의구심이나 의혹을 불러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심과 동시에 소멸하는 불이시요 '인자'이심과 동시에 '엄위'이시다. 고로 우리는 성경이 경고하는 대로 항상 기뻐하면서도 두렵고 떪으로써 "더욱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벧후 1:5,10] 것으로 시종일관함이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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