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9일 수요일

잡록(雜錄, miscellanea)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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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범사에 잘 되기를 바란다" 한 것은 요한 사도가 그 편지에서 한 말이다. 이 구절 하나를 달랑 인용하여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는 아주 빗나간 생각을 하여 많은 사람을 멸망으로 몰고 가는 이들이 많다. 왜 멸망인가. “주님, 주님” 하고 부르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하셨으니 우리가 이 세상 머물러 있는 것은, 이전에 살아오던 이 세상 삶을 마저 채우라 하심도 아니고, 잘 삶으로써 즉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백성보다 차별 있게 잘 되게 하신다는 것으로써 영광 돌리라 하심도 아니고, 그와는 정반대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며 주님 하신 일을 계속 이어가게 하시려고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실에 있는 까닭이다.


이 “아버지의 뜻”을 현저히 행치 않으니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바울이 도둑질하던 사람은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선한 직업을 가져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하라고 가르친 사실을 동시에 기억하고 이행해야 할 것이다. 요한 사도가 말한 그 “잘 된다”[요삼 1:2]는 것이 하던 사업이 잘되어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을 의미함이라 굳이 생각한다면 그 돈 버는 목적이 바로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은 없는 사람 구제하기 위함인 줄 어찌하여 생각하지 못하는가.

두 사도 모두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고 그 편지들을 썼기 때문에 그 편지들이 오늘날 성경이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한 주님, 한 성령이시다. 의미가 상반되는 말씀을 하실 리가 없다. 미국의 어떤 사람은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한번 잘 사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잘 살아 보는 것이 소원이라 이 일을 위해 기도하다가 요한삼서의 그 구절을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잘못 알고 그 길로 그는 소위 병 고치는 은사라고 자신은 여겨지는 것을 받아 나름대로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병 고치는 덕에 많은 헌금을 받아 자가용을 보란 듯이 몇 대씩을 굴리고 자기의 그런 비뚠 사상을 전수시키는 오랄 로버츠 대학까지 오늘날 세워놓고 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길을 잘못 잡은 것이다. 처음부터 잘못 배운 것이다. 그가 다니던 교회 목사가 그를 잘못 인도한 것이다. 성경 어디에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잘 살라고 하셨던가. 오히려 주님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 미워해야 영생하기까지 보존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초능력이라고 해서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라고 철부지 생각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은 초능력의 시대다[살후 2:3-12].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심이 아니라 반대로 이 세상 신 (神)이 온갖 거짓 능력까지 동원해서 한껏 자기 수단과 수완을 발휘하여 세상을 마지막으로 미혹하려는 그런 때임을 바울은 “악한 자”, “멸망의 아들”의 출현을 예고함으로써 경고하고 있는 시대다.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다 기도가 아니다. 올바르지 못한 동기에서 기도하면 그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이 될 따름이다. 그래서 오는 응답은 당연히 마귀의 짓인데도 그것을 하나님 주신 것으로 착각한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야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 이렇게 사람 건져 올리는 어부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지식도 필요하지 않고 재력도 필요하지 않고 사회 경력이나 학력도 필요치 않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 전달하고 가르치는 일이요 기도하는 일이요 그리고 빛의 아들들로서 삶의 모범 곧 사랑으로 행하는 구제 등 이웃을 위하는 삶의 본을 보이는 일이다. 구제라고 하여 돈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님을 바울의 교훈에서 알 수 있다[엡 4:28].

도둑질하던 사람이 배운 것은 훔치는 기술밖에 없는데 생소하게 선한 직업을 가지려 하니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는가. 자기와 자기 식구 겨우 입에 풀칠하는 것으로도 빠듯할 터이지만 그러나 항상 목표는 어디까지나 가난한 사람 구제다. 자기 중심이란 것은 아예 땅에 묻어두고[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장사 지낸 바가 되었으므로] 오직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으로 영위되는 새 피조물로서의 삶인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서 아무리 천한 자라도 약한 자라도 없는 자라도 이같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그리고 그 평가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고 내리시는 것이므로 세상적인 안목으로 많이 배워 능력과 자질이 월등하다고 인정되는 형제보다 무식한 형제가 더 많은 결실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하나님의 일의 특징이다. 즉 가난한 형제가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면 그런 유능한 형제는 겨우 30배의 결실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열매란 것은 나로 인하여 회개에 이른 사람 머리 숫자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이다. 그 가치 측정은 우리 각자에게 일을 맡기신 주인께 있는 것이지 주님을 섬기는 종 자신에게 있지 않고 스스로가 평가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유식 유능하여 수십만 군중을 모아놓고 대중 전도를 하여 수십, 수백 명의 인원을 "회개시켰다"고 해도 잘못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 없는 일일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일이다.

세상에는 그런 ‘종교인’들이 많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종교인’이다. 겉으로는 아주 위대한 교회 지도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종교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이 세상의 현실이다. 누구나 할 수 있도록 하신 사람 구원시키는 이런 일을 게을리 하게 하고 멀리 하게 하고 마침내는 믿음을 버리게 하는 것이 이 세상 신(神) 사탄의 모든 시험의 핵심이다. 그래서 바울이 눈물로 그 편지에 기록한 대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구원에 이르렀다고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빌 3:18]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시험에 들지 않도록 다시는 이 세상 신 사탄에게 붙잡혀 포로되지 않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 한 것이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우리 주님[요일 1:3/요이 1:9]을 내 안에 모시고 있으므로 항상 매일 매시간이 성령과의 사귐이 되어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가 이 세상 머무는 매일 매시가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유로운 의지로써 ‘살아가는’ 것이고 그 살아가는 내용이 오로지 주님을 위한 것으로서 나를 보내신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시어 나와 함께 일하시니 모든 일에 주님께 아뢰어 그 인도하심을 앙망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며 그리고 안 전한 것이다. 이 세상 신은 얼마든지 우리로 하여금 헛된 방법을 쓰게 하고 그래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게 할 수 있음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신다"[잠 3:16]를 금과옥조로 삼을 일이다. 사탄은 현재 지구상에 쫓겨 내려와 있다. 사탄이 이 지상에 쫓겨 내려오면서 지상은 화가 있으리라 했다[계 12:12].

그가 아무리 세상에서 기승을 부리고 최후 발악적인 행동을 취해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원리원칙은 초대 교회 때부터 한 치도 변함이 없다. 믿는 자가 구원 받고 세상을 이김에는 본질적으로 아무 변화가 없다. 이 세상 신의 최후 발악적인 전략은 소위 ‘외계인’으로서의 위장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지식을 계발시켜[인간이 구원 얻어 신령한 몸이 되어버리면 이런 과학적인 모든 지식이나 응용이 무용지물, 무가치가 되어버린다] 세계를 하나로 손쉽게 통치하는 수단을 삼으려 하여 차질없이 진행시키고 있다.

그는 인간의 무지를 악용하여[에덴낙원에서 자신의 소위 지식을 내세워 여자를 속여 범죄에 빠뜨린 것처럼] 우주에 고도의 문명이 발달해 있고 인간과 같은 존재가 있는 것으로 속여[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식하여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여 이 세상 신의 속임수를 이기기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만이 여기에서 예외가 될 것이다] 바울이 예고한 바 "악한 자"[살후 2:3-12]를 출현시키려는 것이다.

사탄 및 악령들이 오늘날 그 자신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 소위 말하는 외계인이니 UFO니 하는 것들이다. 악령들을 보려면 그들의 그런 수작을 보면 그것이 바로 그들의 모습이다. 여러분은 지금 악령들을 가시적인 존재로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영물이기 때문에 영으로서의 실체는 우리 육체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육체로 또는 특정 물질로 변형시키거나 해야 보게 된다. 그렇게 가장하고 있는 것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악령들은 바로 그렇게 해서 스스로를 변형시켜 우리 시야에 들어오게 하고 그래서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영은 볼 수 없다고 해서, 과학을 만능 신처럼 여기는 이들은 영혼의 존재마저 부정하여 지극히 반(反)과학적인 자세를 취하는 현실이다. 과학인으로 자처하면서도 비과학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과학이라는 것은 이 자연계에만 한한다. 영계는 전적으로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영역 밖이다.


그러나 상위일체 원리를 적용하면 보이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우리가 보지 않아도 확인하는 것으로써 충분한 것이다. 우리의 자연계에 속한 시야에는 그 영물들 스스로 자기를 일부러 나타내지 않는 한 영원히 볼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은 이들을 인지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인간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는데 그 동물들의 시야에는 들어오는 까닭이다. 목적이 있을 때에만 인간의 시야에도 들어오게 한다.

소위 UFO가 나타나면 말이나 개나 그런 심상치 않은 거동을 보여 미친 듯이 뛰거나 자지러질 듯이 짖는다. 조선실록에 보면 왕궁에 그런 악령들이 자주 출몰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람들의 눈에도 가끔 띄기도 하는데 여기서 "도깨비"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런 종류는 성경에도 나오는 "귀신"들과는 다르니 전자는 악령들이 변신하여 인간에게 나타나는 경우이고 후자는 "네피림"[창 6:4]이 죽은 넋들이어서 구별이 지어진다.

과학은 단지 이 보이는 세계의 분야 즉 자연계에 한하는 학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서 그 존재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주 과학적이지 못한 것이다. 이런 오만이 패망의 앞잡이라고 성경은 이미 선언해두고 있다. 이 세상 신 사탄이 영이기 때문에[그는 에덴낙원에서 인간[아담]을 위해 인간을 보좌할 목적으로 창조된 여러 영물들 즉 우리가 천사라고 이름 붙이는 존재들 중의 하나였었다] 우리 보잘것없는 자연계의 육체인 인간에 비해 월등한 지식과 능력[지식이 곧 능력이다]으로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이방인들이 예로부터 신으로 또는 신들로 대접한 것들이 모두 이런 악령들을 일컬음이다. 사탄은 이렇게 이 인간 세상에서 신 노릇을 하면서 조물주 하나님처럼 행세한 것이다. 무신론자들이 아는 대로의 소위 “신”의 개념 속에는 이 세상 신도 포함되고 성경의 하나님도 포함되는 등 잡탕으로 되어 있다. 성경에서 밝히는 조물주 하나님의 개념은 그들이 성경을 믿지 않고 읽지도 않으려 하므로 그들에게는 없다. 그래서 독재하는 즉 인간과 같은 이기적인 신을 연상하므로 그 압제 아래 있기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니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본성적인 것이다.

인간은 자주 독립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조물주의 피조물인데 어찌 자주니 독립이니 하고 말할 수 있는가 한다면 당신은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시라면 그 피조물 역시 사랑이라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존재하게 되도록 만드셨다는 사실을 말함이다. 사랑의 핵심이 무엇인가. 바로 자주성, 주체의식이 아닌가. 자유 의지라는 말이 바로 그 뜻이다.

자유라는 것이 바로 자기 스스로 주인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함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자유라는 말 자체를 쓸 까닭이 없다. 다시 말하면 갑과 을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일 때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것이 생명의 원리 곧 사랑의 질서인데 여기서 주인 의식이 필연적이게 된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그 자기가 자유를 누려 주인의식으로 일관되게 나가는 경우, 자기 혼자만 존재하면 그런 것이 통용되나, 자기 외에 여럿이 함께 존재하는 경우 서로 충돌이 일어난다. 각자가 서로 주인 노릇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할 때 다시 말해 아무도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을 때[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영원한 평화, 영원한 화목, 영원히 하나 됨이 유지된다. 이것을 일컬어 사랑이라 그리고 사랑의 원칙이라 하고 사랑의 질서라 한다. 이렇게 살아야 행복이 유지되므로 생명의 법질서라고도 한다. 그러면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는데 주인의식이란 개념은 무엇인가.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으니 자기가 상대하는 그 상대를 위하게 되는데, 그 상대를 위하기를 마치 자기를 위하는 것처럼 하니 이것을 주인의식이라 하는 것이다.

그 상대를 자기처럼 서로 위하니 여기에는 아무런 충돌이 생겨날 틈이 없다. 다시 말해 상대의 원대로 내가 해주는 것이므로 그 어느 상대도 내게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상대를 위함에서 나 자신을 위하는 것처럼 하니 나로서는 자유롭게 아무 구박도 받지 않고 최선, 최고, 최상의 것을 추구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최고, 최상, 최선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것이 바로 자유요 주인의식이 아니면 무엇인가.

이렇게 해서 서로 상대에게 종 노릇을 하면서도 자유인으로 주인의식을 구가하며 행사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에게 종 노릇하면 상대는 나를 또한 주인처럼 섬김이다. 종 노릇해주는 것이다. 고로 서로 상대의 삶을 살아주는 것이 자기 부인의 기반이다. 이 얼마나 완벽한 삶, 공동체 삶의 복된 구조인가. 이것이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 그저 막연히 좋다는 감정이나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정이 아니라 이렇게 엄연한 원칙 아래 움직이고 또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하나의 법질서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질서다. 이를 어기는 것이 죄요 악이다. 생명의 법질서이니 이를 어기는 것은 생명과 대칭되는 사망을 불러들이는 것이 필지의 결과다. 이 세상은 이렇게 자기 부인과는 정반대인 자기중심, 자기 위주, 자기 본위로만 일관하니 멸망에 처해 있고 죽음의 운명이니 나 또한 그 일원으로 똑 같은 인생관, 생활양식을 따르므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요 죽음이요 멸망이다. 자기의 이러한 불행한 처지를 절감하고 무슨 뾰족한 수나 없는가 하여 두리번거리고 찾는 것 자체가 그 동기는 자기가 자기를 위함이므로 여전히 자기중심에서 한 발짝도 옮길 수 없는 터라 죽음에서 죽음으로 나가는 것뿐이지 생명과는 더욱 더 멀어질 수밖에 없는 모순 속의 진탕 일색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 나 자신을 구원할 수는 영원히 없기 때문에 행위로써 구원 얻을 육체가 없다 함이다[롬 3:20/갈 2:16].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것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혼동하지 말 것은 산 자는 마땅히 하나님의 계명 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나, 우리가 현재 그 계명 지킴이 덕이 되지 못한다는 뜻은 내가 현재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먼저 산 자가 되고 나서 볼 일이다.

마귀는 이를 혼동시켜 그리스도를 믿어 산 자가 되고 나서도 하나님의 계명[모세의 율법이 아닌]을 여전히 지킬 수 없는 것으로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줄로 곡해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가 이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딤전 4:1].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를 죄인으로 자각시킨다 함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함을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는 것을 실감하게 됨을 가리키는 것이다[롬 3:20].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계명을 지킬 수가 없는 것은, 첫째 내가 죽은 자로서 먼저 죽어야 하고 그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수가 있어야 비로소 산 자로서 지킬 수 있는 것이므로, 내가 현재 그렇게 죽게 되어 있는 자로서 죽어야 하는 마당에 죽지도 않은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계명을 지켜 보아야 헛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범죄한 후 신령한 몸을 잃어 버린 아담이 생명과 나무 열매에 손대지 못하도록 차단시키신 것과 같은 뜻이다.

둘째는 앞에서의 설명대로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목표하는 것이므로 내가 나를 위해 사는 자기중심인지라 종착역은 결국 죄와 죽음일 것이기에 그렇다. 생명과는 정반대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아무리 선을 행해도 무용지물이다. 믿기만 하면 되는 은혜로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하나님의 구원의 요지는 일절 나 자신을 위해서는 영원히 그 무엇도 할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원천 봉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 스스로 이를 마다하고 자기중심으로 나갈 때는 원인 무효 곧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지 못함 곧 아담이나 사탄의 전철을 밟는 것뿐이다.

셋째로는, 산 자에게 내리시는 생명의 계명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어 한 몸이 된 상황에서 즉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까닭에 자기 부인이 가능한 마당에서 지켜질 수 있는 것인데, 죽은 자가 되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하나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는 자기 부인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되어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어 있음으로써[고후 5:14] 비로소 이상 세 가지 요건을 다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소위 자력(自力) 구원은 그 자신을 속이는 속임수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진리일 수가 없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완전한 자주 독립적인 존재로 창조하시어 그렇게 철저히 다루시는데 사람들은 이 세상 신 사탄과 같은 자기중심의 존재로서 조물주 하나님을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오해하도록 사탄이 부추김은 당연하다. 하나님을 한사코 기피하게 만든 것이다. 성경만이 진실을 밝히고 있건만 성경을 믿지도 읽으려고 하지도 않으니 죽을 때까지 그 편견 속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어쨌든 오늘날은 악령 사탄이 그리고 그와 함께 한 악령들이 대거 그들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현실이다. 이로써 영물들이 존재함을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악령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위장하여 즉 앞에서 지적한 대로 소위 외계인 또는 외계의 존재로 속임수로 나타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무조건 부정하던 버릇으로 조물주 하나님도 부정하더니, 이제는 그 피조물 중의 일종인 영들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으나 그래서 이들을 확인하면 이는 곧 그들을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됨이나, 이런 무지한 사람들은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갈 따름이지 제대로 진상을 알 리도 없다. 그러나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는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진리의 문이다.

긍정적으로 악령들이 자신들을 우리 눈앞에 드러낼 리가 없다. 이 세상 신 사탄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함이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구원이므로 말씀을 어찌 하든 차단코자 함이다. 이렇게 외계인 등이니 해서 자신들을 가장시켜 나타내는 목적이 여기에 있다. 소위 UFO라 하여 우주선이니 하는데 이는 이 악령들 스스로가 변신하여 그렇게 보이게 할 수도 있고 그들의 능력으로 그런 것을 제조하여 인간 앞에 나타낼 수도 있다.

영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우리로서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어지느냐 하는 것은 논외다. 단지 그 정체가 무엇이냐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즉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과 그 악령들인 것이다. 지금은 이들 악령들이 온갖 기교와 재주를 다 부려 총동원해서 인간들을 멸망으로 몰아가려는 최후 수단으로서의 거짓 기적의 시대이다. 단순히 구경거리가 아니라 사활이 달린 심각한 사태이니 이를 직시할 일이다.

§ 컴퓨터로 "재현해냈다"는 그리스도 초상화


과학기술 잡지에 법인류학자들과 컴퓨터프로그래머들이 공동 작업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라고 해서 농부로서의 투박한 모습을 그려놓고 있다. 그래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이제까지 그림을 그려놓고 이것이 예수님이다 한 것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컴퓨터를 도입했기 때문에 더 사실적(寫實的)이라는 소리인데 인간의 교만이 이런 어이없는 짓도 하게 된다. 교만이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체하는 것이요 실상이 아닌데도 사실인 것처럼 우쭐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자기의 어리석음을 아는 그것이 ‘지혜’다. 공자의 말차럼 자기의 무식을 아는 그것이 '식'(識) 곧 아는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육신의 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로 현재 계신다. 이사야에서 예언하기를 그는 "아무 모양도 없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다" 했는데 그것은 우리와 똑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셨다는 의미 곧 과거의 영상이다.

지금은 영광 중에 계시니 영광 중에 계시는 그 모습은 세상의 그 어느 인간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성경에 명시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창조해내신 분이신데 어련하시겠는가. 우리가 나중에 주님의 모습과 같은 영광스러운 몸이 되는 “몸의 구속”을 입을 때 서로를 알아보게 될 때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알아보던 그 모습으로써가 아니다.

이미 신령한 몸이 지닌 능력으로써 모두를 알아보는 것이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완전히 모습이 뒤바뀌어도 그가 원래 누구인지를 직감해서 알아보는 것이지 세상에서의 모습을 기억하여 그 기억으로 서로를 인지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자화자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부활하여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는 믿지도 않고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기적


지금 처처에서 "기적"이란 것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원래 영(靈)이라고 자칭하고 나올 때는 기적을 나타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내가 신이다, 나밖에 없다, 나를 믿으라 이렇게 됩니다. 이미 성경이 이런 현상을 예견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한다" 했고(계시록) "택한 자라도 할 수 있으면 미혹하려고 할" 정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기적이 따르고 그것이 성행할 것을 예시(豫示)한 것입니다.

자연계의 한정된 시간과 공간의 철저한 제약 속에 묶여 있는 인생은 그런 시공간의 개념을 초월하여 나타내는 "힘" 앞에 맥을 못춥니다. 기적이라 하고 초자연적 현상이라 할 때는 인간의 지식과 지능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므로, 자연법칙에만 매달리고 그 현상 구명(究明)에만 한정되어 있는 이른바 지식인들이나 과학자들의 한계를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한계를 초월해서 작동하는 힘 앞에서는 무조건 굴복하는 것입니다.

자연 현상에서는 그들의 말 한마디 판단 하나하나가 절대 권위를 행사할 수도 있지만 자연현상을 초월할 때는 일반적인 무식꾼과 똑같이 무식꾼으로서 저자세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합니다. 사탄은 이를 노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할 일이요 지식에 의지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하나님은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절대로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고[마 18:3] 진리는 "어린 아이"들에게만 나타내주시는 것이 변함없는 뜻이라고 하셨습니다[11:26].

장차 사탄이 대대적으로 그런 "기적"을 행하는 일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히 "거짓 기적"[살후 2:9]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짓"이란 것은 그 속성상 현장에서는 그 진위가 가려내질 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렇잖다면야 처음부터 거짓을 꾸밀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러면 이제 모든 종교가 기적을 나타내고 그래서 이른바 "능력"을 과시한다고 볼 때 그런 거짓인지의 여부를 어떻게 가름해 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그 종교에서 예배의 대상이 되는 주체가 "너희들을 위해 고난 받고 있으니 너희도 이 고난에 동참하게 되어 있다"라는 말을 아니할뿐더러 할 수도 없습니다. 불가항력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져 고난을 받게 되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적극적으로 고난 받는 것이 "은혜"다, 또는 "뜻"이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은혜"라 했고[빌 1:29]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심을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셨다" 즉 “원하셨다”[사 53:10]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하신다[원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몸이므로 역시 동일한 말씀을 듣게 되어 있음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만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편지에도 누차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그렇게 고난 받게 하시는 아버지께서는 홀로 편안히 계셨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께서는 사람되신 아들의 육체를 통해 똑같은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왜냐면 살아있는 존재로서 죽음의 고난에 들어가는 것을 누구든 원치 않고 다만 불가피한 필요에 따라 그 의지력으로써 결행하게 되어 있는데 성경은 그 필요성과 불가피성을 밝히고 그 의지 작용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신 주님께서는 그 필요성과 불가피함을 보셨고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에 찬 기도 후 죽음의 세례, 고난의 쓴 잔을 마시게 되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가리켜, 즉 십자가 형장이 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모습을 성경 기록은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런 결단에 따르는 '한 사람'으로서의 확고한 의지를 나타냄입니다. 이상 모든 것은 그 동인(動因)이 한 마디로 간단히 말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따라 매일 매시간 결연(決然)히 "그리스도 의 능욕을 지고 영문(營門, outside the camp] 밖으로 그에게 나아갈"(히 13:13) 것이니 "여기는 영구한 삶의 터전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음"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고 누차 경고하는 것이 그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문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영문 밖에 즉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곳 또는 광야에 또는 죽음의 형장(刑 場)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그와 하나 되어 있고 그와 불가분이 되어 있으므로 “그에게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보내심을 받음으로써 구원된 것입니다[Saved by being sent or saved by being delivered.]. 구원됨이 곧 세상에 보내심을 받음입니다[Saved to be sent or to be delivered.]. 아버지께서 아들을 우리 위해 내어주심으로써 우리 위해 죽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니 왜냐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구원된 까닭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명백히 하기를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 했습니다[골 1:24]. 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내게 속해 있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요 15:18].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20]이라 하셨습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營門)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시려고 성문(城門)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히 13:11,12]고 한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결코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말씀의 올바르고 정확한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난 받음은 <사랑>이 그 바탕이고 뿌리입니다. 성경에 우리 고난 받음이 하나님 뜻이라 하니(렘 3:33) 마지못해 하는 그런 소극적인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됨으로 인하여 주님과 하나 되어 있는 우주의 주인으로서의 이웃에 대한 사랑ㅡ이것이 원동력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우리 또한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마땅하다"고 한 그대로입니다[요일 3:16].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외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요한복음 3:16과 똑같은 3:16입니다. 고의적으로 그렇게 숫자를 맞춘 것이 아니지만 둘의 의미는 가히 불가분이라 하겠습니다. 이게 말하자면 우리의 믿음 또는 성경의 총강령이라 할 것입니다.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해서 지금 믿는 형제만 지칭함이 아닙니다. 앞으로 믿게 되어 형제들이 될 수 있는 "미래(未來) 형제"도 포함됩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는[롬 8:27] 그 '성도'의 개념과도 같다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의 노하신 매로 인함이니(애 3:1)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는 것이므로 어찌 원망하랴"고 성경은 우리 처지를 대변합니다(애 3:39).

그러므로 이런 고난 받음을 강조하는 것으로써도 적 그리스도의 거짓됨을 간파할 수 있으니 악령 사탄은 이런 것은 절대 모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세상 천지에 "고난 받으라"는 경고를 할 명분이든 필요성이든 전혀 느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기피할 지경이니 왜냐면 그런 말을 하고는 절대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속여 넘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으라고 하면 모두 질겁을 하고 도망치듯 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연극 정도는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스스로 어떤 거의 죽음을 당하거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어떤 변을 당하는 일을 조작해낼 수 있을 듯합니다[계 13:14].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로서 어디까지나 그 자신에 한하는 것이고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고난 받을 것을 종용하지는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대신 죽음 또는 고난 받음 운운" 하면서 오늘날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대신 죽으심, 고난 받으심"과 비슷한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그러므로 이제 그렇게 대신하였으니까 여러분은 일절 죄의 형벌로 인한 고난 받음 같은 것은 완전히 잊어 버려도 된다"는 식으로 나갈 듯합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으로 살아도 영생할 수 있다"는 의미로 적 그리스도의 교리가 진행될 듯싶은 것은, 성경에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심판 받게 하심이라"는 대목이 있기 때문입니다[살후 2:10,12]. 결국 오늘날 만연된 그러한 "배도"[:3] 현상이 이러한 적 그리스도의 속임수 교훈을 위한 터 닦음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므로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할 것이라"[요 5:43] 하셨기 때문입니다.

§ '우리'와 '나'와의 차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니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to give Himself for me]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신 사실을 명백히 하는 대목이다. 사람은 일개인이므로 개인과만 상대된다. 전체를 상대할 수 없는 것이다. 수학적으로도 그것은 성립이 안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후 5:15] 함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앞의 구절은 한 사람으로서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심 즉 나와 똑같은 사람이심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와 내가 이같이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엄연한 사실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와만 상대하시는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시는 한 개인으로서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와 동일한 의미로 모든 사람에게 또한 적응되시는 것이다. 갑이라는 사람은 갑대로 "나만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할 수 있게 되고 을이라는 사람 역시 "나만을 사랑하시어 나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을 능히 할 수 있게 됨이다. 이것은 거짓말도 아니고 당치도 않게 무리하게 자기에게 끌어들여 적용시키는 것도 아니고 진실,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특성인 것이다.

그저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으므로 '나'도 그 덕에 영생하게 되었다'는 정도로는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울 사도는 위의 구절로써 명확히 한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짝의 개념이다. 둘이 하나되는 영원한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말하는 것이요 모든 일들은 이 원리에서 되어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우리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수준에만 머문다. 이렇게 되면 종교 생활로만 그치게 된다. 확실하게 "나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내가 죽은 것이다"는 확신이 서야 제대로 된 것이다.

앞의 설명대로 '우리'와 '나'의 차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희생 양"이라는 사실을 모세 율법 아래에서의 희생 양[동물] 정도로만 인식하여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해 즉 우리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으로만 그치면 세상 종교의 하나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반드시 다시 살아나심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고전 15:14-18] 성경이 명백히 하고 있음에도 이를 성경을 부지런히 읽지 않고 성령의 계시로 인하여 말씀[진리] 배우기를 갈망하지 않은 탓에 간과한 결과다.

단지 우리 인간을 위해 죄를 짊어지셨다 게 되면 오늘날 세상 종교로서의 기독교 교리처럼 "대신 죽으심"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 구원이 되는 것이니 이는 다름아니라 나와 하나되심으로써 우리 각자가 구원됨이다. 완전히 의미가 다른 것이다. 우리 개개인과 친히 하나되시기 위해서는 다시 살아나심으로써만 하나가 되실 수 있음이니 그래야 성령을 내 안에 임하여 오실 것이 아닌가.

그래서 비로소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 부활이 나의 다시 살아남이 되어 현재 내가 다시 출생한 것이요 또한 새로 창조된 것이 아닌가. 죽은 자로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산 자로서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됨이다. 이 나의 산 자됨이 바로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을 전제로 하고 근거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다시 살아났을 때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진 것을 또한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로써 나의 자기 부인은 이미 이루어져 잇는 상태로서 그렇기 때문에 "죄의 몸이 멸함"[롬 6:6]으로 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고 과거 "육신"[7:14-8:13]에 있어 거기 사로잡혀 있던 때처럼 죄를 짓지 않게 됨이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고후 5:15/갈 2:20]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할 바에야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와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 오히려 천주교가 개신교의 그런 교리보다 낫다고 할 것이니 왜냐면 그런 식으로 믿다 보니 "육신"에게 여전히 사로잡힌 속 사람의 고뇌와 번민 즉 양심의 가책을 어찌할 수 없어 '마리아를 의뢰하는' 정도라도 만들어야 저으기 위로라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반해, 개신교는 그런 것도 없이 아주 양심이 소리까지 말살해 버리는 종교가 되어 버려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어 죄인으로 있으면서도 구원된다는 더욱 해괴한 교리를 만든 까닭이다.

실상이 그렇다. 마틴 루터가 기존 천주교에 대해 항의[to protest]하고 거기서 뛰쳐나왔을 때 그리고 그 무렵 소위 종교 개혁자들로서의 칼벵 등이 천주교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 그 정도의 수준에만 머문 것이다. 천주교인들이 자기네를 모교회라 하고 개신교를 자교회(子敎會)라 하는데 이런 의미에서는 그 말이 맞다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나도 나은 것이 없고 어찌 보면 오히려 더 빗나간 모양새를 띠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천주교나 개신교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가도 여차하면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여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함으로써"[히 6:6/10:26,29]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되지 못하는[막 3:29/마 12:32]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의지하므로 그런 일은 없다고 철저히 미신 가운데 있는 것이요, 개신교는 그리스도께서 인간들 위해 대신 죽으심이 확실하다는 미신 속에 빠져 있으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나와 하나 관계를 이루어 그리스도 친히 나의 생명이시고 그리고 이 둘이 하나됨의 구조는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하나됨인데 을로서의 내가 일방적으로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육신으로써 이 하나 관계를 스스로 무너뜨리기 때문에 이는 곧바로 갑으로서의 그리스도로부터의 항구적인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성경이 그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성경은 절대로 모순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개신교 가운데에는[그러나 천주교 중에는 없는 것은 천주교는 성경 내용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니 마리아가 자녀 여럿을 두었다는 성경 기록을 무시하고 동정녀라고 우기는 판에 다른 성경 대목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는 까닭이다] 일부 소수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여 올바르게 가르치는 경우도 있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을 교리화하여] 그 중에는 "어린 아이" 같이 믿는 경우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절대 복종하는 데에서는 구원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 있는"[마 18:3] 이들은 그런 교리를 추종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대개 이런 이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슬기롭고 지혜 있는"[마 11:25] 부류에는 속하지 않는다. 또 주위에서 알아주지도 않는다. 왜냐면 없고 천하고 약한 자들이기 때문이다[고전 1;26].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시고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눅 13:24] 하신 것이다.

'나'와의 관계에서 비로소 '우리'와의 관계로 진전하고 진행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모두의 한 머리, 공동의 머리가 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순서와 차례가 분명한 것이다. 즉 세상에서도 말하는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하나' 의식이다. 우리의 신체 구조에서도 머리의 지시는 개별적인 지체에 내려지면서 몸 전체에 파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우리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시종일관해서 '우리'다.

또한 그러면서도 '나'입니다. 하나님 친히 '나'를 상대하시고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신[갈 2:20] 이 사실은 영원히 나를 사랑하시어 내게 주신 선물로 친히 나와 함께 사시는 것으로서 영원합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나의 영원한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영원히 그러합니다. 이 사실을 성경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말로서만 "아들"이 아니라 실제 아들이 됨을 성경은 강조하여 만유 곧 하나님 지으신 모든 것의 상속자[heir]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미 구약 성경에서부터 이러한 사실을 밝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자가 모두 내게 태인 몫, 혹은 할당량[portion]이 이것 저것 또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심을 줄곧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아름다운 말씀이요 최대 행복의 언질(言質)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보아도 우리 각자가 미물 중의 미물(微物)들로서 벌레와도 같은 인생들이요 게다가 다중(多衆)이기까지 한데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영원 무궁한 세상인 천국에서 영원토록 주목을 받으랴[관심의 대상이 되랴]" 하는 것은 아주 부질없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자기중심이라기보다 누구나 삶의 질과 가치를 느끼고 안다는 점에서 행복이 첫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잡한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단도직입(單刀直入,  혼자서 칼을 휘두르며 거침없이 적진으로 쳐들어간다는 뜻이니 곧 요점을 바로 풀이하여 들어가는 것)으로 이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즉 '둘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 사랑과 생명의 원리인데 이 하나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라 달리 더 풀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내가 그 중의 하나라는 뜻이 됨과 동시에 그 전체가 나이요 나의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즉 머리와 몸 또는 머리와 꼬리가 분명 나누어져 자기 역할이 있어 분담하는 체제이나 한 몸으로 되어 있으므로 내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설명하여,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해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다. 눈이 손더러 '네가 내게 쓸 데 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내게 네가 쓸 데 없다' 못한다"[고전 12:14-21] 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말을 했으니,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시어 몸 가운데서 분쟁[다툼]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22-26]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덜 여김 받고 너는 더 여김 받는다"는 등의 불평 불만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앞에서 지적했듯이 역할 분담이요 구실이 다르다는 것뿐이나 똑같이 머리와 직결, 직통이 되어 있어 머리 앞에서 평등이요, 그리고 머리 자신부터 전적으로 몸을 위하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영원한 체제요 구조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든 피조물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 친히 나의 상속분[portion]이시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소유이십니다. 천국에서 아무리 내가 낮은 위치에 있어도 하나님 친히 내 것으로 되어 계시니 이야말로 완전한 평등이요 자주(自主)입니다. '하나'라는 의미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주 평등이라는 말을 인생들은 좋아하는데 하나님께서 자주 독립성의 개체로 우리 인생들[영물들도 포함해서] 각자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하나됨입니다. 사랑에서는 모두가 하나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입니다. 그래서 '하나' 의식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자주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행동하되 단 우리가 이 세상에서와 같이 그것이 정상인 줄 알고 살아온 것과 같이 나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애오라지 상대를 위함 즉 자기 부인이 그런 엄청난 자기의 확대 재생산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줌으로써 받고 버림으로써 도로 얻는 조화(調和), 조화(造化)가 여기 이런 이치에서 비로소 가능해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다는 식의 언어 유희 또는 희롱이 아닙니다. 진실 그대로의 표현입니다.

성경은 말을 어렵게 하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어린 아이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신다고 하셨고[마 11:25] 우리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다시 강조합니다-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신 터에[18:3], "어린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실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통하는 말은, '곧이 곧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간다고 하면 반드시 가는 것이지 그 외에 달리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어린 아이의 언어로 성경을 읽지 않는 한 절대로 구원의 지식에 이를 수 없음을 명심할 일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갈 2:20]는 그 믿음의 의미입니다. 성령께서 그와 같이 표현하도록 바울을 감동시키신 것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사탄은 엉뚱하게도 이를 고쳐 바꾸어 그저 막연하게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희생 당하심으로 그 덕에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한다'는 아주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영생 자체에만 관심을 두게 만들어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의롭게 즉 올바르게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사는 것으로 제대로는 알아듣지 못하게 했으니 영생도 얻고 세상도 사랑하고 그래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덤벙거리게 만들었으니 자기중심도 그런 자기중심이 없습니다. 자기 이욕(利慾)만 차리는 오히려 죄인들로만 기막히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는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를 죽게 만들어놓은 그 수법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배도(背道)"[살후 2:3]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도 나타나듯이 이런 이단 사상은 이 시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 당시부터 뿌리를 내리게 있었던 사탄의 마수(魔手)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극성스럽게 전체를 물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육신"[7:14-8:13]에 여전히 사로잡혀 지내다가 죽어서야 이 육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영생을 누린다는 교리이니 오히려 불교의 주장보다 더 반이성적이고 비논리적입니다.

불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이런 소위 기독교 교리만을 보고 성경을 피상적으로만 관찰하여 이것이 마치 성경의 의미인 양 착각하고 반이성적이라 비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들이야 성경을 읽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지만, 성경을 안다 하고 읽는다고 하면서 그런 이단 사상에 젖어 있으니 이는 완전히 이 세상 신(神)의 손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를 완전히 차단시켜 놓는 것입니다[고후 4:4].

필자는 매양 이런 설명을 할 때마다 사탄의 실존실존(實存)과 활동을 손에 잡듯이 잡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이다지도 사탄이 미혹할 수 있는가. 이다지도 인생들의 이성을 흐려놓을 수도 있는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말도 되지 않는 것으로 혼란시키고 흐려놓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임에도 이런 사탄의 거짓말에 현혹되어 넘어가고 있는 인생들 자체가 더 놀라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한 것입니다.

사탄이 불가항력으로 막강해서도 아니고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는 영물 그대로이고 우리 인간은 범죄로 인하여 신령한 몸을 박탈당한 채입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피조물로서는 전혀 우열의 차이가 없이 대등합니다. 한 때 그는 인간[아담]의 손아래에 있던 자입니다. 그가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군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의를 당하도록 만든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인간 아담 자신입니다. 그러니 어디다 호소할 데도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완전 회복되었습니다. 아담처럼 그 스스로를 어리석게 만들지 않는 한 얼마든지 영광에의 길은 모든 이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만인 평등의 기회입니다. 고로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천국은 스스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주인 의식에서 사랑과 생명의 법도를 지킴으로써 천국으로 침입하여 들어가 빼앗아 차지하는 것입니다[눅 16:16/마 11:12].

나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자기중심으로만 절어 있고 찌들어 있었기 때문에 항상 그런 식으로 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나 지금은 다르니 더 이상 그런 착각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살아 움직인다는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고후 5:15].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당연히 확실히 그러합니다. 몸과 머리 관계에서 철저히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합니다. 이것이 살아 움직이는 모든 산 자의 영원한 철칙입니다. 비로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본디의 제 자리로 돌아온 것뿐입니다.

몸과 머리로서의 둘이 하나됨, 이렇게 '나'와 그리스도의 하나됨을 이루고 다시 이것이 내 이웃에게로 연장되어 '우리'를 이루어 있는 영원히 아름다운 삶의 구조입니다. 우리라는 것은 말하자면 확장, 확충, 확대된 더 큰 나일 뿐입니다. 예로부터 "대아(大我)"라고 지칭되어 있는 이치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런 말을 쓰는 것은 안에는 들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피상적인 냄새 맡기요 흉내 내기일 뿐입니다. 인간의 범죄 타락으로 인해 외양만 붙들고 있을 뿐 정작 속 알갱이는 비워 있는 모양새에 그친 상태입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삶의 이치를 깨우쳐 주어 영생에 들어가게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하는 자의 발걸음은 실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아 적대적인 세상에게 채이고 으깨지고 마구 짓밟혀져 비록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어도, 십자가 죽음으로 피투성이가 될지언정, "실로 아름답구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롬 10:15] 함에는 고금없이 차이가 없습니다. 단순히 영생하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영생하게 못하면서도 소위 영생한다, 구원이다 하는 거짓된 종교 교리를 전하는 것에 비하면 정녕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름답다는 것은 그 영원한 생명의 구조, 체제가 이상 밝힌 바와 같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완전 평등, 완전 자유, 완전 사랑, 완전한 의[올바른 것]와 선[좋은 것]입니다. 머리되시는 하나님 친히 영원히 우리를 섬기는 위치에 계시니 이는 엄마가 아기에게 종처럼 위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미련스럽게도 사탄에게 꼬드겨져 자기중심을 고집함으로써 자멸하여 영원한 고생, 고통,고난을 자취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영원토록 바깥 어두움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뿐입니다. 스스로의 선택이니 원망할 데도 없습니다. 자기 혼자 이를 가는 것뿐입니다. 영원히 말 그대로 혼자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도 사람은 발에 밟힐 정도로 허다하지만 자기중심은 절해고도에서의 독거, 독처(獨處)인 것입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사람 삶이 겨우 제살붙이만 자기에게 가깝고 그리고 촌수를 따져 일가 친척을 헤아리고 친지(親知)를 찾고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니 외로운 존재의 삶이나 원래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심으로써 모두가 나의 살붙이 정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삶의 소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소유로 하니 모두가 내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하나됨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고전 16:14]는 것입니다. 사랑이 유일한 인간 삶의 법칙이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허수하게 들을 말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현재만 아니라 미래를 통틀어 이와 같이 삶의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종교는 일절 그런 것이 없습니다. 있을 리가 없습니다. 원래 진리가 아니기에 그런 것을 말할 근거가 전연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원인'을 제쳐놓고 '결과'로서의 현상만을 두고 이야기할[그것이 거짓말이든 아니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바람 잡는 것이요 허공에다 대고 손질 발질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해탈만 하면 된다, 열반에 이르기만 하면 된다. 도를 깨치기만 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런 말들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인이 된다는 그 뜻인데 왜 그렇게 자유 해방을 받아야 하는 현재의 속박에 얽매여 있는지 그 원인을 규명해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인류가 그렇게 하지를 못해 오늘날까지 얼마나 억만 세월인지도 모르게[창조를 인정하지 않아 일정한 시점을 설정해 두지 않으니 그런 것] 지내 내려 왔으면 앞으로도 의당히 그럴 것이라는 자체 증명이 됩니다.

설혹 그렇게 해서 각자(覺者, 깨달은 사람)가 된다고 가정한들 그 영원 세월을 통해서도 이 모양이니 그런 사람은 극소수 중의 극소수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확률상으로 보아도 일반 범인으로서는 아주 기대(期待) 난망(難望)입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것에 매달려 있다는 것은 너무 어이 없는 일입니다. 이런 성격에서도 이미 완전히 드러나듯이 그것은 진리일 수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인간의 상상에서 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과학적인 원리[3운법칙으로 증명되어 있는 삼위일체의 원리]로 입증되어 있는 성경은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밝히고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한 치의 오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 원인을 설명하고 있는 바 여기서 그 결과로서의 현재의 모든 현상이 하나도 남김없이 설명되어집니다. 당연한 결론입니다. 불교에서 말하고 기타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완벽한 자유인으로서의 경지에서 인류는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아담]이 이탈한 것입니다. 즉 머리와 몸으로 이루어져 있는 한 몸으로서의 삶의 원리에서 벗어나 자기중심이 되어 현재의 불행이 초래된 것입니다. 자기중심에는 오직 강제에 의한 통제만이 있을 뿐입니다. 영원한 불 못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 생애를 철저히 세 가지 형태로만 관리하는 3운법칙이 그것입니다.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자유를 주심은 이런 통제가 아닌 어디까지나 자율성에 의한 사랑으로 하나되는 삶을 목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거부할 때 그래서 스스로 자기중심으로 선택해서 나가는 경우 거기에는 철저한 통제 외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자 선택이니 그 중간은 존재하지 않음이 3위1체의 원리를 통해 확증되는 사실입니다. 양자 관계 즉 이분법(二分法)밖에 더 달리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사, 인간사를 항상 이렇게 양면으로 가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혼돈과 혼란을 어느 정도 정리하여 해소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천주교나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영생하는 것에만 매달립니다. 똑같이 아주 비과학적입니다. 말로는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습니다. 이는 성경대로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결고 그렇게 가르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 사는 법을 가르치고 이 법을 어겨 원리원칙대로 하지 않을 때 죄가 되며 그 결과로 현재의 죽음이 온 것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죽음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올바르게 살아 다시는 죽음에 이르지 않는 비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실은 비결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상식과 이성에 터전하여 누구나 내릴 수 있는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즉 머리와 몸 관계로 이루어진 하나 됨 곧 한 몸을 이룸에서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거나 하지 않고 오직 머리를 위해 살거나 죽는 것이니, 머리 또한 몸을 위해 그렇게 살거나 죽는 것을 영원히 나타내신 것 즉 "확증한"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교나 개신교나 불교나 모두 맹목적인 영원히 사는 것 하나만을 강조하니 인과율에서 모조리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 인생이 현재의 죽음의 굴레에 속박되어 있는 것을 가르치는 소위 기독교마저 그래서 현재의 결과에 대한 원인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결론에 이르러서는 그 원인을 똑같이 아예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영생 얻는 것에만 급급해하는 것입니다. 즉 또다시 범죄하면 다시금 죽음에 이를 것인즉 영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올바르게 사람 사는 이치대로 사는 것이어야 그 결론이 영생인데도[롬 6:22], 현재 육신대로 살아도 그래서 죄는 지어도 [때문에 로마서 7장 24절이 믿는 바울 자신의 체험을 토로한 것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면서] 여전히 구원은 받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니 어떤 면으로는 불교보다 못하여 그런 비기독교인들의 빈축마저 사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들의 비방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인간 고유의 자율성[자기 선택에 의해 악이든 선이든 결정 짓는 바로서 애초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신 대로의]마저 무시하고는 덮어놓고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것이기에, 이는 완전히 짐승과 같은 타율성의 인간으로 스스로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라고 할 만하다는 그 뜻입니다.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자율성으로 행동하도록 되어 있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임에도 그런 상식적인 판단마저 흐리게 하는 것이니 우스꽝스럽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고 우스꽝스럽지도 않고 모순되는 말도 할 리 없건마는 사탄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그대로 여과없이 받아 들이는 인생들의 현실적 비극입니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천주교는 그래도 이에 비하면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식으로는 양심의 가책마저 스스로 마비시키는 망상, 망동이 될 것이기에 하다 못해 인위적인 '마리아'라도 앉혀놓아야 하겠다는 발상으로서 마리아를 마치 그리스도와 같은 위치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심에도 제2의 그리스도를 다시 만들어 우상화한 격입니다. 피조물을 위하여 섬기는 것이 우상화입니다[롬 1:25].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도 사실은 우상화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한 욕심 즉 탐욕을 우상(偶像, idol) 숭배라 하는 것입니다[골 3:5]. 이 우상 숭배는 살인, 간음 등과 똑같은 죄로서 멸망에의 지름길입니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이는 하나님께 대한 적대행위요, 간음은 삶의 영원한 법질서로서의 둘이 하나됨을 파괴하는 것이기에 당연한 처벌 대상입니다. 우상을 만들어 위하는 것은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에 자신을 생명으로부터 단절시키는 행위이므로 그렇습니다.

이미 이 뜻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 것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3-5]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질투하기까지 갈망하신다는 말씀을 근거 없이 하신 줄로 생각하느냐"[약 4:5] 한 것입니다.

이는 다시 강조하지만 갑은 전적으로 을만을 생각하고 위하며[자기를 위하지 않고] 을 역시 갑에게 그렇게 하는 까닭에 상대가 이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기중심에서 오는 "질투"가 아니라 엄정한 생명의 법질서 차원에서 하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죄가 성립되는 것이요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함"이기 때문이니 하나님과 재물[돈]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눅 16:13]. 이는 어디까지나 사람으로 치면 앞서 설명한 대로의 개인과 개인 관계 즉 한 몸을 이루어 있는 남녀 관계와 같은 것임을 강조하신 것이요, 인간의 자기중심과 같은 '전체를 다 차지하려는' 그런 사악한 의미 또는 만유를 창조하셨다고 해서 그 피조물의 위함을 홀로 받으시겠다는 그런 말씀이실 리가 없습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서 철저히 양분(兩分)됩니다. 죽지 않으려면 삶의 법대로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은 자"[마 8:22]이기에 우리의 "생명"[골 3:4/요 14:6]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 곧 생명의 법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생명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출생해야 하고[요 3:3] 새로 창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고후 5:17]. 그래서 "새 생명"[롬 6:4] 가운데 "새 사람"[골 3:10/엡 2:15/4:24]으로서 삶을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원인과 결과를 확연히 구별하는 것이기에 그래서도 "과학적"이라 하는 것입니다. 3위1체의 원리는 이 인과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증명한다기보다 그 자체가 인과율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현재 우리가 위치해 있어도 장래가 어떤 상태로 전개될지 확연히 꿰뚫어 볼 수 있게 됩니다. 즉 한 몸 구조에서 영원히 머리와 몸 관계로 완전히 '하나'로서 최대의 행복을 누리게 되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와 같이 살지 않는 경우 멸망밖에 없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하나'에서는 머리도 꼬리도 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참으로 진실된 조화(調和), 조화(造花)를 부리게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있어도 없다, 없어도 있다"는 그런 식의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진실된 바탕의 근거 위에서 말하는 사실 그대로의 표현이요 후자는 그 표현의 모방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방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종교 교리가 인생 삶의 구조를 몸과 머리 관계에서 풀어 나가는 것으로써 출발하지 않는 것으로도 확인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머리로 하고 그 모든 피조물을 그렇게 머리를 모신 몸[의 각 지체]으로서의 구조로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아주 단순 명료합니다. 때문에 평범한 곳에서 진리가 찾아진다 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 구조가 바로 삶의 원리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즉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철저히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면 됩니다. 어려울 것도 복잡한 것도 혼돈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요 8:32]. 자유! 진정 소중한 귀한 말입니다. 이 자유는 사랑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대명사라고 해야 정당할 것입니다. 자유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는 것 즉 '주인이면서도 종, 종이면서도 주인'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의 영원하고도 영광스러운 이치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의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요 14:6/마 11:27].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십니다. 이 세상 어두움 가운데에서의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공자나 소크라테스 등 이런 이들은 사람 사는 법을 가르쳤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와 함께 영생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나 공자가 실제 사람 사는 법을 밝힌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 윤곽만을 말한 것이니 그 구체적인 방법이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 관계에 있었으므로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계심을 인정하지 않고 그 뜻을 알 수가 없는 관계로 실질적인 방법론을 말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밝혀져 있으나, 지금까지 오직 "어린 아이들"[눅 10:21/마 18:3]에게만 사랑[사랑만이 천하 만민의 공통 언어이기에]의 언어로 밝혀졌으므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절대 다수의 세상 종교가 이 진리에는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사탄이 조종으로 그런 세상 종교가 발생했다는 일면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교만한 이들이 구원 얻지 못하게 하시고 "심판하시는"[살후 2:12] 하나님의 경륜도 함께 포함되는 양면성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요 개별적으로 세세한 부분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처리하실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 하시는 모든 일은 공평공정하시고 사람을 차별하시는 일이 없으므로 우리가 절대 신뢰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 동시에 죽음 즉 영생 복락(福樂)과 더불어 영원한 고난의 멸망을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일방적인 것만 말하면 진리가 아닙니다. 이는 3위1체의 원리 측면에서 보아도 그 정당성이 인정됩니다. 빛을 말하려면 보어의 법칙대로 그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설명하지 않으면 완전한 설명이 되지 못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영생의 구원과 함께 역설하고 강조하여 빠뜨림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에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마 22:37-39] 것이 바로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됨에서 서로가 그렇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위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성경의 진실성

거짓말로 지어낸 그 무엇이든지 그래서 그것으로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합리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그럴 듯하게 설명을 가하려 하는 법이다. 거짓이 탄로 날까 하여 절대로 엉성한 구석을 그냥 방치해 두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꿰어 맞추고 뜯어 고치고 하여 완벽한 것처럼 위장하려는 것이 모든 거짓말의 예외 없는 특징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은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한다고 하는 것이다.


즉 성경은 생략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성경 첫 머리에서부터 나타난다. "6일 창조"라고 하면서 다른 것은 있으라 하시니 있었다 즉 존재하게 되었다 하면서도 느닷없이 물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물은 창조된 것이 아니었던가. 물론 그럴 리 없다. 그러나 "'물이 있으라' 하시니 물이 있었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바입니다"[시 102:25] 했지만, 창세기에서는 생략된 것이다. 왜 이렇게 생략하셨는가 하면 성경은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을 듣고 구원 받게 하시려는 것이 목적이지 지식을 제공하려는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더군다나 오늘날 우리는 자연계가 있으면 영계가 반드시 있어 짝의 개념으로 대칭[상칭, 대립] 관계로 존재하고 있음을 3위1체의 원리로 알고 있다. 그리고 자연계에 동식물이 있어 영계에도 그런 생명체가 있고 그 능력[지식] 수준이 월등하게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아담]이 원래 그 영계에 있다가 범죄함으로써 이 자연계에 있게 되어 지능적으로 영물들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계를 망라한 전체적인 온전한 사실 또는 이치를 이해하여 알기에는 한계가 있고 역부족(力不足)임을 우리 스스로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니 성경이 가령 모든 사실을 남김없이[생략함이 없이] 말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까지 제대로 이해할 것이면 또 그런 것을 성경이 설명한다면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충분히 설명하자면 아마 만권 서적으로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생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생략한다고 해서 진리를 밝히는 데에 부족함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생략해도 그 나머지 사실로도 얼마든지 성경이 진실되고 하나님의 말씀인 줄 넉넉히 알아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게 생략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사실은 영원히 몰라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은 명백히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 것이다"[고전 13:12] 한 것이다.

단지 지금은 환경 여건이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는 것을 잠시 유보해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하여 대만족인 것이다. 성경 첫머리에서부터 그런 생략한 부분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여러 곳곳에 그런 '생략한' 부분이 있음을 미리 알리는 격이다. 즉 여러 가지로 궁금해 할 수 있는 것이 있지만 지금 당장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모른다고 해서 우리 구원과 관련된 모든 사실이 진실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구원과 관련된 것은 그대로 충분한 확증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생략 부분이 있다고 하여 나머지 정작 중요한 구원에 관한 것도 믿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바로 교만으로 규정되어 버림을 받기에 합당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몰라도 좋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며 생명에 관한 한 제외되어 마땅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분한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이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성경은 동시에 그 핵심을 말하고 있음을 본다. 즉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아니 하며 하나님께 감사한다"[롬 14:6] 하였다. 바울 사도 정도가 되면 먹는 것이 옳다, 나쁘다 또는 날을 중히 여기는 것이 나쁘다, 혹은 그르다 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지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오직 일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교회 앞에 밝힌 것이다.

즉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으니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으로서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니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으로써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셨다" 한 것이다[롬 14:7-9]. 그런즉 오직 이 핵심되는 것만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5] 한 것이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인 것이다.

성경에 그와 같이 설명이 생략된 부분이 더러 있음을 본다. 예를 들자면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 예수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마 27:51-53] 했는데 이들은 마지막 심판 전에도 "생명의 부활"[요 5:29]로 나온 것이다. 그러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가 "음부(陰府, hell, Hades)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말하기를 '아버지[father] 아브라함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합니다"[눅 16:23] 하였는데, 그러면 거지 나사로 역시 "생명의 부활"로 나오고 부자도 "심판의 부활"로 이미 나온 것인가, 이에 대해 아무도 현재로서는 명확한 설명을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위하여 한 때 죄로 인한 죽음을 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며 그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으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때 방주 예비할 동안에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벧전 3:18-20] 했으나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우리는 듣고 싶어 하자 현재로는 알 도리가 없다.

이런 여러 가지 설명이 생략된 부분은 현재로서는 그대로 덮어두는 것이 합당하다. 멸망당하는 이들이 절대 다수인데 영원토록 그렇게 불 못 속에서 지내야 하는가 등 알고 싶어하는 것이 있어도 성경이 그 멸망이 영원하다 했고 그 이상은 설명을 생략하고 있으니, 이 역시 우리로서는 그에 대한 지식을 현재로서는 유보해두는 것이 옳은 것이요 이렇게 한다고 해서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구원의 지식에 지장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성경 첫 머리 창세기 1장 1절로부터 그런 생략된 부분이 나오는 것이니 분명 그러하고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진실성이 훌륭히 자체 증명되고 있는 것에 감사할 일이다. 6일 창조 이전에 이미 첫 창조의 세계가 별도로 있다가 그것이 다시 와해되고 오늘날의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고 또 그런 주장을 억지로 고집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구원 얻는 믿음에는 직접 관련이 없는 까닭이다.

단지 오늘날 소위 외계인이니 외계 문명이니 하는 거짓말에는 미혹될 필요가 없으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 외에 더 고귀한 피조물이 없고 또 그 이전 창조의 영물들은 현재의 그룹[cherub]과 스랍[seraph]들이며, 현재 외계인 등으로 위장하는 자들은 에덴낙원에서 창조된 영물들[마귀 사탄을 포함해서 ]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에 나오는 기록 그대로이므로 생략될 부분도 아니고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필수 지식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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