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36)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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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기 위한 행위가 아닌 하나님 아들로서의 임무 수행

초대교회에서는 아무도 "자기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다"[행 4:32]. 모두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기" 때문이다. 사랑도 없고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이 세상이므로 생명의 법칙대로 사는 삶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이 자연계에서 아무리 잘 살면 무엇하는가. 주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느냐" 하셨으니 이 세상 살아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고 죽지 않아야 진정 "목숨"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치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막 8:33] 것이 이 세상 산다는 것의 특징이다. 때문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는다"[마 16:25] 하셨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올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을 것이라"[마 16:27] 하셨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사람 삶이 시작된다.

생명의 법질서대로 진행되는 정상적인 삶이 열리게 된다. 그에 비하면 이 세상 삶은 가히 목숨[생명]이라 할 수조차도 없다.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을 것"이라 하셨고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는다" 하셨으니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 행함"은 무엇인가.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된 후로는 '이 세상에 보내심 받은' 사람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시는"[눅 5:32] 일이므로 우리 역시 그렇다.

"회개하라" 하실 때는 세상의 죄악을 말하고 "세상을 악하다"[요 7:7] 하시지 않으면 안되니 그래서 "세상의 미움을 받아"[:7] 죽으시기까지 하신 것이다. 주님 앞서 나타났던 세례 요한이 세상을 악하다 하니까 세상이 그를 미워하여 죽이지 않았던가. 바로 그와 같이 우리 역시 세상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다[막 6:18,19]. 죽을 각오를 하고 세상에 대하여 그 죄에 대하여 말하고 따라서 의와 절제가[행 24:25] 어떤 것임을 말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는 심판이 있을 것을 "성령의 책망하심"[요 16:8]을 따라 알려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 6:38] 하셨고,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요 4:33-35] 하심과 같다.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요 12:25-27] 하셨으니, 이 간단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은 보통으로 심각한 일이 아니다.

보내심 받은 것은 자기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어째서 세상에 살고자 하여 그 욕심을 끊지 못해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타령을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한 세상 살고자 오셨던가. 우리 위하여 죽기 위해 오셨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기 전에는 몰랐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한 세상 살려고 하였지 이 자연계에서의 삶은 삶이 아니라 함정이요 덫이요 올가미가 아닌가.

사탄이 조종하는 올무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신 것은 천국 곧 신령한 세계만이 인간이 살 수 있는 세계이지 이 자연계는 이 지상 동물이나 서식하는 곳이요 인간이 사는 곳은 아님이다. 사는 곳이 아니라 보내심 받아 일하는 곳, 그래서 악령들과의 전쟁에서 고난 받는 곳,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로서 우리가 죽음을 당하는 곳이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은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의 영역인 것이다[18:36].

무엇을 하든 이 기본 틀에서 우리 의식이 한시도 벗어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이신데 말씀이 곧 생명이고 생명이시니까 생명의 낙 자체이다. 사람이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법칙임과 동시에 낙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는 것이 낙이다. 비록 고난 중에 죽임을 당하더라도 죽임을 당하는 그 본인에게는 생명의 낙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게 하도록 하는 이 일을 하는 신바람 나게 휘파람 불며 어깨 춤추며 할 것이다.

항상 기뻐하고[빌 4:4/살전 5:16/벧전 1:8]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살전 5:16] 것이 그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문자 그대로 쉼 없이 기도해야 한다[:17]. 먹고 마시는 것이 이 일에 지장이 되면 그 먹고 마시는 일을 그만 두고 일해야 하는 것이 신령한 양식을 먹음이다[요 6:27]. 청중 앞에서 밤 전도 설교를 하게 되어 있는 설교자가 저녁 식사 시간이 늦어 만복 상태에서 설교를 하는 바람에 배가 불러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음에도 억지로 시간을 때움과 같은 일은 없어야 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이라도 제대로 건지는 것이 급선무요 그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머물러 있음이다. 사람들을 건지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아닌가. 주님처럼 우리도 가난하게 되고 낮은 자, 천한 자가 되어 있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정상이고 절대로 기피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고난 받음은 우리 구원의 성격을 밝히는 것이다. 그냥 조물주로서의 동정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철저한 원리원칙을 따르심이니, 생명의 법칙을 어기고 한번 죽음에 처한 인간은 도저히 구원할 길이 없는지라, 부득불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드시는 새 창조 행위로만 우리를 구원하실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런 종류의 창조 즉 새 창조에서는 옛 창조와의 구별 또는 차별화가 불가피하여 죽음을 통한 옛 창조의 완전 종결이 필수이다. 그래서 옛 창조의 "죽은 자"[마 8:22]로부터 새 창조의 "산 자"[고후 5:15]로 건너뜀에는, 반드시 그 죽은 자의 죽음의 고난과 함께 함으로써 산 자의 생명의 영광에로 이끌어 올 수 있으니 하나님의 아들의 사람되심과 더불어 그와 같은 죽은 자요 죄인된 사람으로서의 고난과 죽음이 필연인 것이다. 우리의 머리께서 그런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으니 그 몸된 우리 각 지체로서의 같은 고난 역시 필수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신분의 선포와도 같은 것으로서 성령을 받아 모시는 순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일을 우리가 그 몸으로서 계승함을 뜻한다. 새 창조로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특전과 책무 가운데 책무가 먼저 온다는 순서다. 우리의 믿음[구원 얻는]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고난이다. 우리가 믿어야 구원 얻는 것과도 상통하는 것이니,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죽음의 불행에 이르렀은즉, 이 순종치 않음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가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으로 나타나야 함은 당연하다.

이 우리의 믿음에는 고난 받음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로서의 특전은 물론 하나님 아들처럼 사는 것이다. 책무는 그와 상반되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 아들로서 죽는' 것에 있다고 할까. 다시 말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시기 위해 우리 위해 죽음의 고난 받으신 그 행보[行步]를 닮음이요 따름이다.

이는 바로 우리가 은혜로 그러므로 즉각적으로 구원 곧 하나님의 아들되는 것을 나타냄이기도 하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써 얻는 은혜의 구원인 만큼 지체되거나 시간이 요하거나 우리의 그 어떠한 반응 여하에 따라 결정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응이 있다면 오직 믿음의 유무를 묻는 것이다. 이 또한 하나님다우신 구원, 하나님의 창조다우신 특징이라 할 수 있으니,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음"과 같은 것이다.

말씀으로 창조됨이니,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으므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8-10] 함이다. "주님"으로 시인한다 함은, 나 자신이 다시는 내 자신의 것이 아니라[롬 14:7-9/고후 5:15] 주님께서 소유하시는 주님의 소유물이므로 절대적으로 그 뜻대로 살고 그의 일만 하겠다는[요 4:34] 사랑의 순종의 태세가 이 믿음에 반드시 따름이니 곧 회개에서 드러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 하신 그대로다.

영광스러운 새 창조에 의한 하나님의 아들 탄생. 하나님 아들로서의 즉각적인 행동 개시. 바로 이같은 순서와 과정이므로 조금도 어색한 구석이 없고 너무나 명백하다. 바로 이같은 하나님 아들로서의 행동이 우리가 나타내어야 하는 생동감 있는 "행함"[약 2:20,26]으로 표출된다. 이미 우리의 하나님 아들된 사실은 주님 부활하신 직후 이미 선포된 것이다. 즉 새 창조에 의한 모든 과정과 절차가 완료되었고 단지 이 사실을 "믿는" 것으로만 마무리되는 것을 선언하신 말씀이 곧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 분부[마리아에게]시다.

어찌하여 구원에서만 맴도는가. 구원에서만 맴돌고 행위로 얻는 구원이니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니 하고 입방아만 찧고 있는가. 구원은 벌써 저만치 거쳐 우리와 떨어져 멀리 뒤쳐져 있는 것이니 우리의 뒤에 있지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쳐 지나온 것이다. 지금은 그런 단계를 훨씬 지나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행동, 하나님 아들로서 일하는 것을 요구하는 단계이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행동이다.

구원받아야 할 인간으로서의 그 어떤 행위가 아니다. 이미 그런 것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휴지 쪽으로 취급된 지가 옛날이다. 이미 모세 율법 때부터 인간은 그 어떤 행위로든 행위로는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 누누이 선포되고 강조되고 역설된 것이다. 행위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새 창조, 하나님의 아들로 새롭게 지으심 받는 새 피조물로서만 가능함을 미리 말씀하신 대로 이미 이루신 그 다음 단계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순종, 행동을 바라시고 요구하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가 너무나 순간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하나님의 그 창조 행위이셨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갑작스럽게[믿으면 되는 것이므로] 생긴 일이라 혼동하는 어리석음을 계속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 창조이기 때문에 그렇게 간결하게 이루어진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으로써 이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완결되었고 내가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모심으로써 내 안에 이루어져 나는 새 피조물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요 3:2].

이제 새 창조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그 자질이 순종인데 만약 순종을 아니 한다면 첫 창조에서 아담이 순종을 하지 않은 것과 아무 차이가 없어진다. 그렇게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그 첫 창조가 폐기되고 새 창조를 불가피하게 만든 것처럼 또다시 이 새 창조를 멸해야 될 판이 난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 이후로는 멸망밖에 없고 두 번 다시 창조에 의한 해결책은 없다. 하나님의 법질서는 일사부재리를 그 근간으로 한다.

첫 창조의 결과가 한번 정하신 법칙을 어기게 되자 그 어긴 그대로 보응을 받고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처럼 새 창조 역시 그러할 뿐 달리로는 결과가 나타날 수는 없다. 고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 행함"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의 삶"[빌 1:29]이다.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음이라 했으니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됨이요 '고난 받음'은 아들되었으니 아들로서의 본분과 책임과 할 일을 다함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됨이 명목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즉 하나님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 발자취대로 행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도 부자연스러운 것도 없다. 이런 고난을 회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됨 곧 구원의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으로 맺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내 형제들에게 가서"라 하셨으니 형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을 어느 아우가 그 본을 따르려 하지 않으리요.

오직 '그가 내 형이 아니므로 내가 따르고 말고 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해야 그런 '따르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나올 것이다. 이것이 곧 "믿지 않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 아들로서의 특권과 영광을 당장 누리지 않는다고 그 다할 책임과 의무를 힘들어 한다면 누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겠는가. 그것은 아들이 아니라 종이라야 취할 수 있는 행동일 것이다. 아담이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하여 이를 물리치시고 내치시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께서 더욱 더한 하나님의 아들답게 행동하지 않는 것을 용납해두실 리 만무하다.

믿으면 그 믿은 대로 신바람이 한 행동이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런 신바람이 나지 않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다. 어떤 연유에서든지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나를 핍박하였으므로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나를 미워하였으니 너희도 미워할 것이라" 하신 말씀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만일 그런 말씀과 같이 내게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내가 억지로 나를 세뇌시키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내가 죽은 것이고 내가 부활한 것인데, 내가 첫째 죽은 것을 믿지 않고 있으니 어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가.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데 어찌 하나님의 아들인가. 내가 죽은 것을 시인하지 않고 계속 이 세상에서 살기를 좋아하고 살기를 바라는데[고후 5:1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어찌 믿을 수 있는가.

믿음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성경에 믿지 못한, 아니, 믿지 아니한 결과와 비극과 사례가 그렇게 많은데도 왜 그 경고를 받지 않는가. 이 세상 살고 싶어서인가. 한 때나마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고 싶지 않고 그것이 싫어서인가. 전쟁이 났다고 생각해보라. 전쟁은 극소수의 인간만 제외하고는 누구나 바라지 않는 터이지만 일단 난 것이 현실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가. 세상 전쟁이란 것도, 어차피 죽는 인간이니 이럴 때 사람답게 싸우다가 죽으리라는 마음이 작용을 한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 인간이니" 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죽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 아들로서의 영광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 가서 "어려울 때에 내가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는 보람과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 아들로서 구원을 받았음에도 하나님 아들로서의 구실을 못하는데 어찌 하나님의 아들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가.

그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는가. 그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면 주님 비유에서 그 "예복" 입지 않은 사람도 은혜를 베푸셔서 쫓아내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예복 입는 자리에서는 예복을 입는 것이 법질서다. 법질서 없이 무슨 일이든 되는 일이 없다. 예복을 입을 때는 예복을 입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답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생명 세계의 법질서다. 은혜는 법질서 테두리 내에서 베풀어지는 것이지 법질서를 벗어나고 초월하는 은혜란 없다. 이것은 자유의지를 구속하거나 간섭하는 은혜는 없다는 말과도 같다.

믿었으면 가진 것이요 가졌으면 누리고 활용하면 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가시적인 것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으나, 분명한 사실로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 아들됨이다. 이 아들됨은 육체로 나의 부모의 자녀됨과 다르다. 육체는 우리 부모의 육체의 씨를 물려 받음으로써 육체적으로 우리 부모의 자녀가 됨이나 하나님의 아들됨은 영으로 말미암아 '영의 씨'를 받음이니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을 받아 모심이라 그래서 "하나님의 씨"[요일 3:9]라 한다.

"하나님의 씨"는 "육체의 씨"라고 하는 말에 대한 대칭적인 표현이다. 다시 말해 이 '영의 씨'라 함은 영은 인격성을 지닌 존체이므로 그런 인격성이 없는 물질에 불과한 육체와는 완전히 다르다. 성령 자신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다.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시다. 함축적인 의미로는 아버지와 아들이시다.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감히 감당하지 못할 일이지만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시니 그래서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즉 내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내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음이다. 실제로는 사람이시지만 내용상으로는 또한 하나님이다. 사람과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이지만, "한 영" 관계이므로 하나님께서 그같이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고 사심이니 이 사실이 이 얼마나 크신 사랑이신가[요일 3:1/요이 1:9]. 그래서 우리가 받은 성령은 "양자(養子)의 영"[롬 8:15]이시다.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되는 것을 "양자"[:23/갈 4:5,6]라는 형식을 빌어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두 가지 족보

이를 보아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은 결코 명목상의 아들이 아니라 실질적인 아들이니 곧 양자이다. 양자를 아들이라 하지 않는 이 아무도 없다. 우리가 이 양자로 된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성경은 일견 필요하지도 않은 듯싶은 예수님의 계보를 두 개씩이나 싣고 있다. 하나는 마태로 말미암은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누가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둘은 서로 일치하지 않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명확하게든 희미하게든 도대체 설명한 데가 없다.

이것이 성경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자체 증명이다. 생각해보라, 이런 것이 거짓말일 수 없는 것은, 일부러 이런 거짓말로 족보를 꾸며댈 수 있겠으며 더구나 서로 맞지도 않는 것을 둘 리가 있겠으며 게다가 아무 설명까지도 없다. 두 가지 서로 다른 것을 기록해 놓았으면 최소한 반드시 설명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꾸며댄 것이요 따라서 거짓말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판단에서라도 그대로 방치해둘 리 있는가.

거짓말이 아니라 철저한 진실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니, 이 사실만 증명함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런 식으로 즉 진실이 아닌 것은 쓰지 않고 진실만을 기록했기에 그렇게 자체적으로 모순이 되어 있는 것을 아무런 설명도 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각기 다른 이 두 계보를 하나는 요셉의 것, 하나는 마리아의 것으로 상상하고 있다. 육체적으로는 마리아가 다윗의 자손이니까 다윗의 씨라는 성경이 응했다는 그 말을 설명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요셉의 아들"이라 할 것도 없이 "마리아의 아들"임을 성경이 강조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다윗의 씨라고 하면 남자의 씨이지 여자의 씨라는 표현은 없다. 다시 말해 여자의 혈통을 가리켜 누구누구의 씨라고 말하지를 않는다. 모든 "씨"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남성 위주다. 예수님은 분명 요셉의 양자이시다. 마리아의 족보까지 댈 필요가 없다. 마리아의 족보라면 "낳다"라는 표현을 쓴 마태의 기록보다 "그 이상"이라고 나타낸 누가 쪽이 더 신빙성이 있다. 그러면 왜 "마리아의 이상"이라 하지 않고 "요셉의 이상"[눅 3:23]이라 했는가.

그러므로 이 두 계보 중 하나는 요셉의 양자로서의 계보이다. "그 이상은" 하고 나타낸 쪽이 그러하다. 아담에 이르러 다시 "그 이상은 하나님"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양자로서나 육친 관계에서나 다윗의 자손이란 그 의미이고, 양자 계보까지 나타낸 의도는 그 양자된 측면도 함께 강조함이니, 예수님께서 요셉의 양자이심을 드러내고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씨라는 의미도 양자로 된 것이고,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양자"[롬 8:15,23] 형태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음을 가리키고자 함이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런 필요한 설명까지 생략하고 있으니, 이런 형태와 유형의 기록을 두고 감히 성경을 거짓된 것이라 속임수로 쓴 것이라 조작된 것이라 말하는가.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의미가 이처럼 막중한 것이다. 이같이 그리스도와 내가 한 영이 되는 조건은 나의 자기 부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나타내신 내용 그대로다. 즉 나[옛 사람]는 죽고 다시 살아난 사람[새 사람]으로서 다시 살아난 삶["새 생명"(롬 6:4)이니 새 삶 즉 자기 부인의 삶]으로서 사는 것이다. 옛 사람의 삶은 무엇이었나. 자기를 위하는 삶이다. 이제 새 사람의 삶은 무엇인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삶,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 그 순종을 낙으로 삼는 삶이다.

그러니 절대로 나 홀로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뿌리 내려 있는 것이다. 항상 이런 확실한 의식으로 영원히 사는 삶이 영생이다. 친히 나의 삶이 되어 계신다는 그 의미다. 단순히 함께 하신다는 정도가 아니라 나의 삶과 생활, 나의 생명, 나의 존재 자체가 되어 계신다는 그것이다. 내 이름이 김낙동이라 한다면 완전한 김낙동이가 되어 계시는 것이다. 이 김낙동이 외에 또 하나의 김낙동으로서 이 나라는 김낙동이와 완전 조화를 이루어 하나로 계심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미다. 이 의미를 항상 먹고 마시고 음미하고 소화시켜 "생명수 강물들[the rivers of living water]"[요 7:38]이 어떤 것인지 날마다 체험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미다. 이러한 관계를 영원히 유지 존속하게 하는 것이 이미 지적한 나의 자기 부인이다. 내가 하나가 아니라 실제 항상 둘[이 둘을 이루고 있는 즉 나와 짝을 이루고 있는바 나 외의 그가 도대체 누구인가를 떠나서라도, 분명 나를 위하는 존재임은 분명하기에]이라는 사실도 엄청나지만,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라는 사실은 형언할 수 없이 굉장한 의미인 것이다.

이 사실을 항상 명상하고 생각하고 의식하고 인식하고 사색하고 - 한마디로 마음 가운데서 떠나지 않게 하라. 그는 나의 생명이시다. 나의 '생명'이 '한 사람'으로서 나와 함께 영원히 사신다고 생각해보라. 내 생명은 내 것이지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지으신 분이시라 생각해보라. 그리고 나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한 때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그 사실을 상상해보라.

그리고 그 뿐만 아니다. 이렇게 되어 있으니 비록 내가 천만번[이를테면 아주 혹독한 죽음]을 죽는다 한들 결국은 영원히 살아나 있을 것을 생각해보라. 믿는 것뿐이다. 믿으면 되는 것뿐이다. 엄연한 사실을 사실대로 믿으면 되는 일이니 그리고 믿으면 믿은 대로 행동이 나오게 마련이다. 믿지 않으면 믿지 않은 대로의 행동이 고스란히 그대로 나오게 되어 있다. 믿는데 믿지 않는 행동이 나올 수 없으니 행동은 마음의 거울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을 어긴 결과로 죽음에 이른 인간이라 필연적으로 죽는 것이지 다시 살지 못하는 것이 결코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질서다, 이런 법질서의 위엄은 인간세계에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부득불 다니엘을 사자 굴 속에 넣지 않을 수 없었던 다리오 왕, 요한을 부득불 처형해야 했던 헤롯 왕의 경우 등이 그러하다. 그래서 조물주 친히 당신 자신을 사람으로 만드셔서[인간 여자의 태를 통해 세상에 태어나시는 형식으로] 인간 각자에게 주시는 영원한 은혜의 선물로 아버지[하나님]의 손을 빌어[죽게 되어 있는 운명의 죽음을 우리를 위해 죽어주신 아들을 아버지께서 살리심] 우리 각자에게 주심으로써 우리를 새로 창조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자기 이름으로 사람이 되셔서 자기 이름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사람되신 조물주 하나님]를 영원한 자기 '소유' 즉 자기에게 주신 영원한 '선물'로 받아 모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즉 양자가 되니, 그러므로 이제 명실 상부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사신[일하신] 것과 같이 이 세상에서 일하는[이 세상은 원천적으로 사람 사는 터전 즉 삶의 낙을 누리는 곳이 아니므로] 것이다.

우리가 하는 하나님의 일이란 곧 이상과 같은 새 인간 창조의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동참함이니 "희생 양으로서의 죽음"이 이 새 창조의 골자이므로 이 세상에서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그 일을 완수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하는 자이나 현재 이 육신 그대로 남아 있어 필연적으로 죽게 되어 있는 이유다.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하신 것처럼 우리도 "내 몫으로 맡기신바 내가 마땅히 할 일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자세로 이 세상 삶을 마쳐야 할 터이다.

"우리 강한 이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 하여야 할 것이니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여 그들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습니다' 함과 같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다"[롬 15:1-4].

순수한 이타주의를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자기 부인을 터전으로 한 이타주의이니 자기 부인이 곧 이타주의다. 이웃을 기쁘게 하되 자기 자신도 동시에 기쁘게 하는 것은, 자기 부인일 수도 없고 여기서 말하는 이타주의도 되지 않는다. 남을 기쁘게 하되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러나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이 사람 삶의 근본 뼈대이다. 이것을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37-40]이라 하셨다.

어느 세계에서나 통할 수 있는 가장 보편 타당성 있는 평범한 도덕률이다. 바로 이상세계[천국]의 기본 질서다. 한 몸 관계에서 '머리'를 첫째로 위하여 섬기고 다음으로 몸의 각 지체를 위하여 섬기는 한 몸 기능의 기본 수칙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이것이 당연하고 이상적임을 이의없이 인정하면서도 어려운 것처럼 비현실적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부터가 우리 스스로가 하는 수 없는 죄인으로서 악하다는 증명밖에 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운명에 빠져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도 충분히 입증되듯이 우리는 이미 생명의 법질서를 깨뜨린 범법자로서 그 범법 행위에 해당하는 죽음과 멸망밖에 없다. 이러한 죄인됨과 죽어 멸망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벗어나서 당당히 이 생명의 법칙대로 따를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내 것으로 '소유'함에 있다. 그 죽으심은 그런 운명을 벗어났음을 의미함이요 그 부활은 이미 그 생명과 영광을 내 것으로 소유한 것을 증명함이다.

이같이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모든 것을 소유한 사실이 확인된 것이기에 그 무엇에도 꿀릴 것 없고 전전긍긍할 것 없고 아쉬울 것 없고 완전 자유인으로서 소신대로 신념대로 살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자유를 나는 향유하는 것이다. 이 소유한 바를 누가 빼앗는 것도 아니요 간섭할 자가 도무지 없다. 다만 내 스스로가 한 때 필요에 의하여[사람들을 멸망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그것을 일시 버리고 유보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절대로 손실이 아니니,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으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이다. 고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믿으면 그 죽은 대로 행동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 행동이 나오지 않는데 어찌 믿는다고 할 수 있는가. 세상을 아직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보임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께 나아온 적도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물론 중도에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딤후 4:10].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다고 주님 친히 말씀하신 바다[요 6:44,65]. 아버지께 배우지 못했고, 아버지께서 인도하시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 세상은 새까만 죽음뿐이구나, 나는 이제 죽는 것밖에 없구나 해야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무리 교회에 나오고 목사까지 되어도 그 사람은 세상 종교로서의 기독교인이지 그리스도께 나아와 본 적은 없는 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내가 누리는 것이 아니다. 남을 위하고 남을 섬기기 위함이다. 내 것은 주님의 것이니 주님의 뜻을 따라 활용한다는 의미다. 그 대신 주님의 것은 내 것이다. 이웃의 것이 다 내 것이라는 뜻이다. 내 것이라 해서 내가 강제로 빼앗아 사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의 섬김으로 섬김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사람마다 이웃을 위하니 그 이웃 중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음이 당연하다. 이는 내가 이 자기부인의 법질서를 지키는 것처럼 내 이웃도 이 동일한 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때문에 세상에서 모든 것을 버린 이는 이 세상에서 그 백배나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 세상 끝나면 영원한 생명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동시에 이 세상에서만은 핍박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이 지어낸 거짓말이고 속임수에 불과하다면 이런 핍박 소리를 할 까닭이 없다. 세상에서 미움 받을 것을 굳이 거짓말로 꾸며 속여서까지 이야기를 만들 이유가 무엇인가. 거짓말이란 원래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하는 법이다.

핍박 받는다고 하면서 거짓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역시 이 한마디만으로도 성경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체 증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 하나만 해도 충분히 그 진실성을 입증하고 있는 대목이 성경에는 많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핍박받지 않은 시대가 없었다. 핍박을 받지 않은 때가 있었다면 그것은 대개 세속화하여 교회와 세상을 분간 못할 지경이 되었기에 마귀가 제 것과 제 것 아닌 것을 도저히 구분을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는 지금까지 피로 물들여진 수난사(受難史)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함이라"[요일 1:3 후반] 한 대로 이 시간 하나님과 사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치를 제대로 자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구원 문제는 이제는 한물간 것이다. 하나님 아들로서의 자질 여부가 지금은 대두되는 차례다. 자질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순종 않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 날 때 그는 가차없이 도태된다.

그런 상태로 하나님의 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기에 곧장 마귀와 그와 같은 일당들의 범죄행위로 연결되어, 마귀가 아무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불 못에 들어가는 운명에 처해진 것처럼 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결과를 놓고 볼 때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므로 성경의 경고는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들은 오해하여 구원 문제가 아직도 미해결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돈을 일으키고 더욱 더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방향으로만 치닫게 된다. 그러므로 초보적인 구원 문제에 매달리지 말고[히 6:1]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든 영광과 그 책무와 이 세상에서 일할 수 있는 모든 기회에 대해서만 생각하라. 그것이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다. 마귀는 엉뚱한 데에다 관심을 돌리게 하여 핵심적인 것은 간과하게 만드는 재주를 부리는 자이다. 현재를 간과하게 하고 과거에 얽매이게 한다. 현재가 중요하지 왜 과거에다 목숨을 거는가. 구원 문제는 끝나고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지 않은가.

이것이 지금의 그대 형편이 아니라면, 이 시간이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게 이미 모든 것은 끝나고 준비되어 있고 그대의 약속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믿음으로 나오라. 무슨 약속이냐 묻는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려진 그림에서 보듯이 나의 옛 사람은 죽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니 오직 새 사람으로 부활하여 다시 살아난 그 새로운 삶대로 살겠다는 결심에서 우러나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회개와 직결된다. 약속이란 것은 천하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는 것이고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 않는다. 자기 부인이 이 회개의 분수령을 이루는 것이다. 회개는 자기 부인으로 직결되고 자기 부인이 없으면 그것은 회개를 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시고"

왜 자기 부인을 못하는가. 자기라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육체적 생명, 한낱 볼품없는 시한부 삶이다. 그것을 부인해 버리면 되는 것이다. 아니,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부인되어 버린 것을 에누리 없이 수용하는 것이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억지로 스스로 부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인되어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한 것이다.

이렇게 못박혀 버린 것 즉 죽어 버린 것을 사실로서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부활한 것으로 연이어질 수 없다. 죽지 않았는데 어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믿지 않는데 어찌 다시 살아난 것을 믿을 수 있는가. 우리의 의(義), 즉 의롭다 하심은 그리스도의 이 죽으심에 있지 않고 다시 살아나심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던 것이다"[롬 4:25].

우리를 의롭다 하심 즉 우리 구원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한정해서 생각하는 데에 크나큰 낭패가 있다. 우리의 구원 곧 하나님의 아들됨은 성령, 그리스도의 영 즉 그리스도 그 분을 내 안에 선물[내게 주신]로 모셔 소유하는데 있고 그래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내 것으로 삼는 데에 있다. 죽으심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심을 함께 모두 전체로서 소유함이다. 주님의 죽으심만을 내 것으로 하고 부활하심은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한다면[실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없으니 왜냐면 한 사람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면 필연적으로 그 죽으심은 역시 나를 위한 것이 아니 될 수 없음이다], 나는 구원 받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내 죽음으로 했기 때문에 내가 과거 지은 죄에 대한 형벌로 죽어 있는데, 다시 살아나심이 역시 내 것이 되지 않으면 논리적으로도 나는 아직도 죄 가운데 여전히 그대로 죽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죄로 죽었으면 새 생명으로 살아나야 말 그대로 새 피조물로 다시 출생함이 된다. 내 이름으로 죽으셨으니 그 다시 살아나심 역시 내 이름으로 살아나심이니, 내가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내 것으로 삼아야 새 사람으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죽으심'으로써, 나 역시 죽어 장사 지내진 것을 뜻한다. 죽은 자가 죄를 지을 수 없으니[벧전 4:1,2] "육신"[롬 7:14-8:13] 즉 "죄의 몸이 파괴되어졌기"[6:6]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이 이미 이루어졌다 함이다[고후 5:14]. 자기 부인이 없으면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그 뜻이다. 또 처음에는 그렇게 믿었더라도 중도에 세상의 유혹이나 위협에 밀려 다시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 부인을 버리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고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 중에 경고한 것과 같이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믿음이란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함께 믿는 것이요 그 두 가지 사실[승천하심은 물론 영원히 사시는 그 생명과 영광도 포함해서]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가 성립이 될 수 없어 믿음이 될 수 없음과 같이, 나를 위해 즉 내 이름으로 죽으심을 믿으면 자기 부인이 필연적이 되는 것이고 고로 이 죽으심에 따른 자기 부인이 없다면 그것은 그 나 위한 죽으심을 믿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죽으심이 없으면 부활하심도 없는 것이고 내게는 일절 무의미한 것이 된다. 흔히 믿는바 "대신 죽으심"의 허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자기 부인 없이는 구원이란 "구'자도 입에 올리지 말 일이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다. "나를 따르려면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모든 것을 버려라"[눅 14:25-34]. "우리 중 누구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롬 14:7] 한 것도 자기 부인을 말한 것이다. "우리 중에 아무도 없다"-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치고 자기 부인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스스로 생각해보아 자기 부인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면, 지체말고 지금까지 믿었다 하고 구원 받았다 하고 하나님의 자녀되었다는 것이 실제가 아닌 상상뿐임을 알고, 비로소 그리스도께 나아와 회개하여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즉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셔야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단 한번도 그리스도를 모신 적이 없어 성령을 선물로 받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확한 진단이다. 의사는 정확한 진단이 없이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없다. 부정확한 서투른 진단은 생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니,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다"[고후 5:14,15] 할 때의 이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이것이 바로 자기 부인이다. 때문에 사도들의 착실한 교훈과 말씀 가르치심에 풍성했던 초대교회는 "아무도 자기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다"[행 4:32].

자기 부인이 무슨 굉장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굉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시야가 좁은 평지에 있을 때다. 그러나 산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노라면, 저런 데에서 서로 아귀다툼하며 미워하며 응얼거리며 살았던 자기 모습이 처량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좀 대범하게 살아야지 하고 산을 내려오지만 다시 그 평지에 발이 닿으면 모든 것은 다시 굉장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죽기살기로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또는 사수한답시고 물불을 가리지 않다가 육체의 기력이 빠지면, 속절없이 다시 그 높은 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안목이 되어 덧없는 인생살이임을 절감하나 이미 허무하게 눈을 감는 순간이다.

바로 이런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 그 자유, 자유인되는 것이 바로 '자기 부인'이다. 높은 곳에서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시야이다. 안목이고 식견이다. 의식 수준이다. 더 이상 낮은 평지에서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굽어보는 도량이 생긴 것이다. 만물을 상속받은 우주의 주인으로서의 금도(襟度)이다. 모든 것을 훌쩍 뛰어넘어 유유자적하는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눈길이다. 초탈한 경지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기 부인의 가치이다. "진리를 알 것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요 8:32].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게 될 것이다"[:34-36]. "주님은 영이시니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롬 8:2].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을 믿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온다. 내 스스로의 수양과 고행과 정신 수련과 태생적인 높은 도덕 수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세뇌, 일종의 자기 최면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순간으로 끝난다. 영원한 것같으나 일단 눈감고 숨 넘어 가는 순간 죄다 탄로 나게 되어 있다. 그런 것이 이 세상 종교의 실상이다. 진정한 무아(無我)는 사랑의 법칙에서 찾는 법이다. 자기 부인이 이 사랑의 법칙의 토대인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위치이니 다름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이 아닌가. 그러나 가장 낮은 위치이니 자기 부인이다. 혀를 땅의 티끌에 대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데를 함께 함유하고 포괄하고 있으니 과연 이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기상(氣像)이고 만물을 포용하는 형상 그대로다.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은 급격한 추락의 화근이 될 수도 있다. 이 때 자기 부인이 그 안전판(安全瓣)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됨으로써이다. 어찌 자기 부인이 없으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역시 "사랑"이 그 특질이고 이 사랑의 법칙에서 자기 부인이 그 구조의 골조가 되어 있다. 그 내용이 곧 아래 말씀이시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심이다"[마 5:43-48].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너희가 죄인시하는]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믿음이 모든 인식을 바꾼다. 우리의 믿음은 엄연한 사실에 근거한다. 사실도 아닌 것을 아무리 믿어 보아야 그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고 망상 또는 공상이라고만 한다.

자기 부인은 억지로 되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여기서 오해를 하고 진정 믿음에 들어가지를 못한다. 자기 부인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치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이루라는 명령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말씀하신 것처럼 오해를 하는 것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니 뒤죽박죽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가 아닌, 엉뚱하게도 인간 노력에 의한 것으로 자기 부인을 이루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으니, 이것은 인간 노력에 의해 이룰 수 없는 것이므로,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단지 상징적인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넘겨짚는다. 황당하기 짝이 없다.

잎에서 설명한 대로 자기 부인이 되어 있으니 그 사실을 믿고 그 사실대로 행하라는 의미이신 것이다. 단지 그 믿음의 실상이 자기 부인으로 나타난다는 말씀으로서, 믿음 유무를 잘 측정하여 자기 부인이 아닐 때는 믿음이 없음을 깨달으라는 경고이시기도 한 것이다. 믿음의 길과 아닌 것이 동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나뉘어 있어 헷갈릴 수 있는데 정작 믿음의 길은 자기 부인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그런 주의를 주시는 의미이실 수도 있다. 동서로 나뉜 길의 길목에 그 정확한 지표물[指標物]이 서 있으니 이를 확인하여 올바른 길을 택하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부인이라는 것을 버티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 공로로 얻는 구원이 된다. 내가 나를 부인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그리고 그 부활하심이 내게 그대로 적용되어 내가 얼마든지 자기 부인할 수 있도록 그 버팀목이 되어 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버텨주시기 때문에 내 스스로 버텨갈 수 있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나도 함께 죽었으니 내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요 나와 함께 살아나시어 나의 소유가 되심으로 전적으로 나를 위하여 사시니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 이유도 필요도 없음이다.

예를 들어 내가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물 없는 곳을 적셔준다 하자. 그러면 결국 내게 남아 있는 물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부인을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으로 아는 것은 무엇인가. 다함이 없는 생명수 강물들[rivers of living water]이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로서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주고 또 주어도 물은 그대로 남아 있어 언제 물을 퍼 갔느냐는 듯이 유유히 여상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물을 호스로 빨아들여 가도 한 점 흠도 흔적도 나타나 있지 않고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넘쳐 흐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부인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미 죽은 내가 영원히 죽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서[그러므로 내 스스로 선택하여 범죄하지 않는 한, 죄를 지을 수가 없음을 요한일서에 강조되고 있다], 내가 현재 삶을 유지하고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생명이다. 고난 받으시기 전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시던 그 생명이요 삶이라 할 것이다. 신기하고 놀라운 능력과 그 하시는 말씀 외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때문에 세상은 그리스도를 영광의 주님으로 인식하지 아니하였다. 우리도 마찬가지다[요일 3:1 후반]. 주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신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그런 자기 부인의 삶을 마친 다음에야 영광으로 나타날 것인즉 그러므로 시종일관 믿음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믿음'-모든 것을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무리하게 억지로 믿음을 요구하시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믿을 만한 많은 증거를 주신 것이다. '충분한' 증거들이다. 그 증거들이 부족하다면 더 얼마든지 주실 것이다.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이에게는 열어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대로 그 약속은 언제나 유효하다. 인생 비극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 믿지 않음은 보이고 보이지 않고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임을 성경은 증명하고 있다. 인간 상식과 논리로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므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한다든가 하는 일은 성경은 일체 시도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혼자가 아닌 것이니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육체로서의 하나요 한 개체이나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인간은 영적인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그러니 홀로가 아니라 사탄 이하 악령들의 포로가 되어 있는 모양새다. 이런 내막을 알아야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니 항상 주님과 내가 둘이 되어 있는 상황을 제대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과의 둘, 이것은 영원한 나의 생명과 삶의 구조이다. 하나님 아들로서의 모습인 것이다.

내가 내 영혼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이 육체를 움직이고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나의 영이 아닌가. 내가 주님을 인식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내 영혼을 나의 오감을 통해 인지할 수 없는 것처럼 주님 역시 그런 방식으로는 인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내 영혼의 존재를 아는 것처럼 주님의 계심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지으신 이 세계에서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이 지식은 이미 나의 영혼이라는 사실에서 시작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단순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영혼의 존재마저 부인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들의 '믿지 않음'이, 나의 '믿음'이 허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 증거와 증인의 증언이 긴요하다.

하나님은 그 만드신 만물을 통해 충분히 보여져 알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성경은 못박고 따라서 이를 부인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어리석기 때문이라는 한마디로 결론 짓고 있다. 그리고 이 '어리석다'는 것은 '악하다'는 것과도 무관치 않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악하기 때문에 일부러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음을 여기서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이 증언하고 있는 성경의 진실성 여부를 따지게 된다.

다시 말해 성경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냐,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것 등이다. 이미 여러 차례 말했듯이 성경은 자체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자체 증명이란 것은, 거짓말이요 지어낸 이야기라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시각을 통해서 내리는 판단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애써 증명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성경대로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믿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믿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그 당시에도 믿지 않았으니 오늘날도 믿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믿지 않을 것이요 그 당시에도 믿는 사람은 그래도 있었던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단 한 사람이라도 믿으면 그 단 한 사람을 위하여 평생의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임무이다. 많은 사람이 믿으면 성공한 전도 사업이고 적으면 실패한 것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어떤 장애[바울이 이같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던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이 세상에 위치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본무이다. 이 세상은 복음에 대해 적대세력이 되어 있다. 사람을 건져내는 일이 선한 사업으로 갈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조롱과 비웃음을 사고 박해의 대상이 되어 있어 아주 인기없는 일이 되어 있음은[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부끄러워할 정도가 되어 있는 것은 고사하고] 이 세상 지배자가 사탄이라는 사실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만약 부활이 없다고 하면 세상에서 우리가 제일 불쌍한 자일 것"이라고 바울이 말한 대로, 세상 삶이 고난의 연속인데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더 겹쳐진 고난의 삶인 것은 단 몇 사람이라도 건지기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내가 중요 역할을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하였고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니,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다"(:38) 함과 같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이 세상 수고(受苦) 일색(一色)으로서 삶의 낙이 없다고 하나, 주님과 함께 살고 함께 행동하고 함께 일하면서 얻어지는 생명의 희락, 평안을 말한다면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고로 항상 주님과의 교제, 이 사귐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핵심 영역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항상 이 측면에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것인가에 대하여 골몰해야 하는 것이다[고전 7:1-40].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이 다 떠나고 혼자 남게 되실 때를 예고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16:32/5:16,29] 하신 것처럼, 바울이 다들 자기를 "버렸으나 주님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신다[to strengthen]"[딤후 4:16,17] 한 것처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힘과 위로가 이 온 세상의 모든 힘과 능력과 위세를 합친 것보다도 더 월등하시다. 말씀으로 위로 받고 그 모든 약속을 신뢰하므로, "내가 적군에 달리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는"[시 18:29] 것이다. 원기 왕성하고 결코 지침이 없으며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어떤 극한 상황에 이른다 해도 그것이 극한 상황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니 온 천하를 뚤뚤 뭉쳐서 도전해와도 감히 적수가 될 수 없다. 주님께서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그 시간에도 낙심하는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나의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 하셨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같이 넉넉히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장차 대통령이 되는 확실한 지름길에 들어섰을 그런 순간의 경쾌한 발걸음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아들되어 있는 신바람에는 감히 비할 수가 없다.

우리의 자랑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 이상 가는 것이 없다. 사람은 다 버려도 아버지께서 계신다고 한 주님의 말씀, 바울의 간증은 우리 역시 그런 상황에 언제나 놓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영광스러운 일이며 자랑스러운 일인지! 온 세상이 나를 대적하여도 나는 행복하기만 하다. 영구한 세월을 두고도 이런 체험은 두 번 다시 체험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음

아담을 지으신 후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결국 아담의 몸에서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새 창조는 조물주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당신 자신을 마지막 아담으로 만드심 곧 사람되심으로써 각 사람에게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심이니 이는 마치 아담[남자]에게 여자를 만들어주심 같이 그래서 남자와 여자로 짝을 이루어 살게 하심과 같이 만들어 주심이다. 이제 각 사람은 그리스도를 옷 입음으로 사람 대 사람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와 짝을 이루어 둘이 하나되는 모양새로 새 창조가 완결되는 것이다.

육체로서의 사람이라면 남자 여자 개념을 떠나서는 사람이란 존재가 성립이 될 수 없음 같이, 이제 새 창조에서는 사람이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으면 사람으로 존재할 수 없는 모양새를 이루게 된 것이다. 여자가 첫 사람 아담의 육체로 옷 입게 되었던 것과 같다. 그 후 아담의 허리에서 나는 모든 인간이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음"으로 세상에 태어난다. 이것은 "육으로 나는"[요 3:6] 것이다. 영으로 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물려받음"이다.

이미 남자와 여자 관계는, 여자가 먼저 범죄함으로 인하여 그 범죄를 남자에게 끼치는 통로가 스스로 됨으로 인해[남자를 돕는 역할로 여자가 창조되었으나 도움이 되기커녕 파멸에 이르게 되는 통로가 되어주는 결과가 됨으로써] 둘 사이의 이상적인 조화 즉 창조에 부합하는 본래의 의미는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다. 새 창조에 의한 복구만을 기다리는 실상이었다. 육체적으로는 남자와 여자지만, 이제 영으로는 그리스도와 나이다. 즉 성령 곧 그리스도의 영과 나의 영이니 이 둘이 "한 영"을 이룸이다[고전 6:17].

그리스도와 나, 즉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하나된 관계이다. 그러나 영으로 하나됨이니 그래서 "한 영"이라 한다. 이 "한 영"이라는 뜻은 우리처럼 사람의 육체를 지니신 그리스도 안의 성령이나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나 같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 역시 다를 수 없고 같은 것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움이[골 1:24] 필수이다. 이렇게 고난에 참예해야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리스도와 같은 몸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빌 3:10,11/롬 8:17].


이미 신령한 몸을 잃어버린 인간은 이같이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는 한 다시 신령한 몸으로 복구될 수가 없다. 새 창조에 의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은 다음에야 신령한 몸에의 복귀가 가능하게 됨이다. 이로써도 선악과를 먹은 다음 아담 부부의 몸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변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이전에는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어 영광의 빛으로 감싸져 있었으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남녀 형태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은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았다"고 하고 있다. 이 "눈 밝음"이 무엇인가. 영역으로는 눈이 밝음을 "눈이 열려진다"[be opened]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눈을 뜬다 즉 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 눈을 감았던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여자는 선악과를 보고 충분히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빛으로 온 몸이 가려져 볼 수 없다가 이제 그 빛이 벗겨지자 다시 말해 신령한 몸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되돌아와버리자 광채로 가려져 볼 수 없던 것이 이제는 볼 수 있게 된 바로 그 변화를 나타냄이다.

"뱀[사탄, 용]"은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된다"고 여자에게 말했다. "선악"이란 자기에게 좋고 나쁨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사람이 완전히 동물적 본능으로 돌아옴을 말한다. 애초 아담이 자연계의 몸으로 있다가 신령한 세계로 옮겨져 신령한 몸으로 변해 있게 되자, 신령한 세계인 에덴낙원의 땅["ground"]으로 지으심 받은 신령한 동물 즉 영물들의 도움을 받아 그 신령한 세계의 삶에 적응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빛으로 둘러 싸여진 몸의 남녀 구조이므로 남녀 특징을 알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신령한 세계는 자연계에서와 같은 생식 방법이 아닌 별개의 고차원적인 신령한 방법으로써의 자녀 생산이 가능한 터라 성적인 욕구가 필요 없었으니, 아담 부부는 당시의 신령한 몸으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성을 향유하고 있었기에 몸이 맞닿을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부끄럽다"는 것을 나타내고, 부끄럽다는 것은 남녀 구조로 되어 있지 않은 영물들의 몸의 구조에 비해 자연계 즉 차원이 월등 낮은 자연계의 동물들처럼 암, 수 구별로 남자와 여자 몸으로 구분되어 있음에 대한 상대적[영물들은 그런 것이 없으므로] 수치감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신체상의 구조가 여자가 창조됨으로써 구별 지어져 있게 되었고, 그렇게 구별되었어도 여전히 몸은 신령한 몸이라 빛으로 감추어져 있으므로 알 리가 없다. 그러나 범죄 후 자연계의 몸으로 환원되면서 자연적으로 그런 몸이 드러나진 것뿐이다. 그 이전에는 형태는 신령한 몸이었으나 사리판단은 영물들의 도움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그 빛으로 둘러싸인 몸의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지식도 없고 그것을 보려고 할 이유도 없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볼 수 있었던 것이니, 이는 눈이 밝아져 신령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그 속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의 몸으로 돌아오니 신령한 몸으로서의 특징이 사라짐과 동시에 연하여 사리판단을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니, 앞에서 설명한 그런 상대적인 수치심을 알고 벗은 것이 좋지 않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등 그 보고 판단하는 안목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눈이 밝아졌다,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다"는 표현은 실상 그대로이다.

그러나 "뱀[사탄]"은 진실을 말함이 아니라, 신령한 세계에서 영생하게 되어 있는 인간을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게 하여 자연계의 몸으로서의 안목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을 두고 말한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자기 거짓말로 사람을 죽여놓은 결과로서의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의 위치에서 "눈이 밝아진다, 선악을 알 수 있다" 등의 말로 인간을 농락한 것이다. 성경의 기술(記述) 역시 이미 자연계에 돌아온 몸으로서의 눈으로 기준을 삼게 되니 "눈이 밝아졌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성경은 일절 여기서 신령하다느니 자연계에 속한 몸이라느니 하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일일이 구별해서 말하지 않고 있다. 담담한 서술 자체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고 그대로가 충분히 설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계와 자연계가 별도의 것이 아니고 밀접한 관계에 있어 일부러 구별해서 설명하거나 표현할 필요가 없어서다. 그런 사실대로의 기술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생명나무" 등 식물이 능력을 나타내고 "뱀"이 이성과 지성이 있어 사람과 의사 소통을 하는 등, 그런 동식물은 이 자연계에는 없는 것이다.

인간을 추방하시고 에덴낙원 동쪽에 그룹들을 두시고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로 통하는 길을 막으셨다고 했다. 생명나무는 자연계의 몸으로 되돌아온 인간이 다시 신령한 몸으로 변환될 수 있게 하는 나무다. 그룹들은 영적 존재인데 이런 그룹들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셨다는 것은 과거에는 신령한 세계와 자연계가 밀접하게 연이어져 있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차단된 것을 말함일까. 또한 에덴낙원이 처음부터 신령한 세계였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런 영적 존재에 의하여 차단되었다는 것은 에덴낙원이 신령한 세계로서 게다가 이제는 감추어져 있음을 뜻하는 것일까. 이제 비소로 신령한 세계로 변하여 인간이 도무지 찾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면 만일 그렇게 변환시키신다면 그 변환 역시 창조에 속하는 하나님의 작업이 되는데 이미 모든 첫 창조는 끝나고 이제는 인간 구원의 새 창조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에덴낙원이 신령한 세계로 창조되었다고 해야 사리에 맞다.

인간이 애초의 신령한 몸이 박탈당했다는 것은 전에 없던 사실이 생긴 것이 아니라 처음 그렇게 되어 있던 것에로 도로 돌아와 버린 것이므로 창조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환원되어 버렸다는 것은 그 창조가 무효화하여 다시 그런 상태로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고 오직 새 창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자연계와 영계가 현격한데 인간은 이미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므로 영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데 굳이 그룹과 같은 영물들로 하여금 그 출입구를 막게 하실 이유는 없다.

사탄과 같은 악령들이 인간[아담]을 그들의 능력으로써 무리하게 데려다가 생명과 나무 열매를 먹게 하거나 아니면 그들 자신이 그 열매를 따다가 아담에게 먹일 가능성을 차단시키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아담이 그 열매를 먹게 되면 인간 구원은 영영 틀려 먹은 것이 되니 왜냐면 아담은 신령한 몸이 되되 거룩한 천사처럼은 될 리 없고 사탄과 같은 악령처럼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법질서 차원에서 범죄한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그 생명나무 과일을 먹고 신령한 몸이 된다면 그것은 질서 유린이 되는 까닭이다.

첫 창조의 첫 사람 아담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한 몸됨이다. 사람은 남자 아니면 여자이므로 둘은 불가분의 관계다. 새 창조에서의 마지막 아담의 경우 그리스도와 각 사람과의 관계 역시 불가분이니 처음 창조 때에는 육으로서의 한 몸됨이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으로서의 한 영됨이다[고전 6:17]. 무릇 사람이면 이제는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됨이다. 자연계로 되돌아감으로써 야기된 인간의 벌거벗은 몸이 그리스도로 옷 입음을 통해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다-얼마나 아름다운가. 흐뭇한 이야기인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 이루신 일 즉 그 공로만으로 옷 입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그 분'으로 옷 입는다는 의미다. 사랑으로 하나됨이다. 고로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이상스러울 것도 어색할 것도 없다. 하나님이라고 위축되는 것도 없으니 나와 같은 사람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계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나와 함께 있으면 그 육체로 나와 항상 함께 함이므로 다른 사람과는 함께 할 수가 없다.

왜냐면 서로 바라보고 대화하는 것이지 한 사람을 보고 이야기하면 다른 한 사람과는 눈이 마주치지 못한다. 바로 그런 의미이다. 그래서 둘이 하나됨이 정상이지 셋이 또는 넷이 하나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나만 사랑하시고 나와만 함께 사시는 것으로 함께 하심이다. 이것이 하나님으로서의 사람되심이다. 그리고 사람이시면서도 여전히 변함없는 하나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이같이 사람으로 계시는 사실을 나뿐만 아니라 각 사람 즉 모든 인간과 더불어 한가지로 나타내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나는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이라면 그들 중의 누구와도 차별을 두지 않고 똑같이 대할 수 있게 된다. 내 자신의 선호를 따라 어떤 이는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것이 없으니 왜냐 하면 각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처럼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그리스도 한 분의 다양한 모습이라 문자 그대로 한 몸 관계가 되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한 머리를 모신 한 몸에서 각 지체의 각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 조물주를 모시고 온 세상이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고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가장 이상적인 삶이 아닌가. 그리스도로 옷 입은 나, 이것이 새 피조물들의 새 생명의 세계에서 사는 각 인간의 모습이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시해서 모든 사람사람이 그리스도 일색[一色]이다. 마지막 아담 일색이다. 하나님의 아들 일색이다. 아버지 안에 아들 계시고 아들 안에 아버지 계시니 성령 일색이다. 진실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 눈을 밝히셔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상속 받음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여러분으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셔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셔서 모든 다스리는 것과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것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다. 여러분 자신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여러분이었다. 그 때에 여러분이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살리신 것이다"[엡 1:17-2:5].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이시다. 형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이다. 그래서 "말씀"이시라고도 한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하셨고 "아들도 모르고 천사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하신 것이다. 아들께서는 우리의 조물주시다. 이 조물주되심도 역시 아버지의 형상으로서의 모습이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그 아들로 말미암아 만유(萬有-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를 창조하셨다.

고로 아들 하시는 일이 아버지 하시는 일이다. 따라서 아버지 하시는 일을 아들께서 나타내시니 아버지 하시는 일이 곧 아들 하시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런 하나 관계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에서 역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는 모습을 따라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를 영접하는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 하셨다.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형제 하나를 대접하는 것 즉 그에게 하는 모든 것은 주님께 하는 것이 된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마 10:40]이라 하신 그대로다. 이는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 안에 아버지 계시며, 아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아들 계신다는 말씀으로 다시 확인된다. 이것을 주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다" 하시는 말씀으로 요약되기도 한다[요 14:20].

하늘로서 내려온 사람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 6:38] 하셨고,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4:33-35] 하셨으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12:25-27] 하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 태어나시면서 "하늘로서 내려오셨고" 우리는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즉 "성령으로 출생함"[3:6-8]으로써 "하늘로서 내려온" 사람들이다. 왜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이니 이는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심으로써 이루어진 사실로서 사람이 되신 이후로 그리스도의 하신 모든 일들은 나와 함께 존재하시고 움직이시는 것 일색(一色)이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오시는 것 역시 내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20:21,22] 세상에 임함 바로 그 의미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위해 죽으시려고 오신 그리스도이심과 같이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받기 위함이니 곧 사람들을 건져 구원해내기 위함이다. 바울 사도는 이 세상에서 사람 건져내는 일이 어떤 성격임을 그가 당한 많은 환난을 통해 증명해 보인 것이다[행 9:16].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과 같이 너희를 나를 본받으라"[고전 11:1] 하였다. 




보기 나름 인식하기 나름이니 항구적인 실패로 보느냐, 악착 같은 끈기로 보느냐, 후자로 본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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