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14)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


죄에 대하여 죽고

오늘날도 국가별로 보면 핍박 중에 있는 교회가 절대 다수이고 시대별로 보아도 그러한데 핍박 받지 않는 것이 마치 정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 한 몸에 속해 있지 않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한 몸의 머리이심이 분명하다면 "함께" 고난 받지 않는 또는 "함께" 고난 중에 있음을 의식하지 않는 그 누구든지 자기가 과연 믿음에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여 확증할 필요가 있습니다[고후 13:5,6].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지 않는다고 하여 우울하게 지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일한다'는 의미이고 '쉰다'는[안식-히 4:1] 의미가 아니라는 것뿐이니, 무슨 일을 하든지 기쁨으로 하지 못한다면 일의 능률이 오르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 수준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스스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자기 스스로 일하지 남의 종이 된 것처럼 일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산 자로서의 기쁨이니 이를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자연적으로 방출되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로 나아가시면서 그리스도 친히 이런 기쁨과 평안으로 충만하신 것입니다[요 14:27/15:11/16:33].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시는 차원의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길목에서 그와 같은 사랑의 기쁨이고 평안이셨습니다. 그래서 일을 함으로써 즉 아버지의 아들된 본분으로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 의미인데, 이런 경고를 하는 같은 편지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고 거듭거듭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지적하기를 사랑은 변할 수 있고, 사랑이 없다는 것은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고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영생을 욕심 내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입니다. 영생에 대한 즐거운 기대[벧전 3:10]와 함께 반드시 병행하게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생명의 낙(樂)이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일[사람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은 언제나 뒷전이고 영생만이 관심사일 때는 그가 짓는 것은 죄와 악뿐이게 됩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나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라 하나 그것은 영생을 지속시키기 위한 이른바 “믿음”의 수단이요 방법 정도의 의미로만 인식하고 있으니 이런 것이 다름아닌 자기 행위로 구원 얻고자 하는 것과 속성이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기중심인 것입니다.

교역자(敎役者)라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직장이라고 여기면 그가 하는 모든 교회 일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생명[영생]이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사귐]이지, 영생이라는 것 즉 영원히 사는 것 자체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없이는 영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사랑의]가 단절되어 아담은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스스로 머리 없는 몸이기를 자청한 결과입니다.

말씀을 믿지 않고 불신하는데 사랑이 있을 수 없고 사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니 사랑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의 삶의 당연한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생명도 내 스스로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살다보면 건강을 해치게 되고 장수하지 못하고 단명하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리고 내 구원의 핵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내 구원을 “이룰”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침입하는 자가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눅 16:16/마 11:12]. 이는 사실 그대로 적나라하게 밝히신 것뿐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동시에 경고도 되는 이유입니다. 한번 사랑한다고 그 사랑이 영구적으로 간다면 그것은 기계적일 것입니다. 마음 하나에 언제든지 얼마든 사랑이 변할 수 있으므로 사랑하는 것 자체가 고뇌요 번민이라고 예부터 말해오는 터입니다. 사랑하는 상대의 마음이 혹 변했을까 혹은 변하지나 않을까 하는 애태움 때문입니다.

물론 이상적인 것은 항시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야 일향(一向) 변함이 없으시나, 우리 자신의 사랑 여부, 유무가 항상 문제입니다. 아담의 마음이나 나의 마음이나 사람의 마음으로서는 다 똑같은데, 그 마음 변하여 스스로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선악과를 먹었으니 누가 이 사실 앞에서 나는 그렇지 않으리라 장담하리요. 고로 성경에 경고하는 것처럼 “조심하는”[고전 10:12] 것밖에 없으므로 조심할 때에는 두렵고 떪으로 조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 대가, 결과가 너무나 엄청난 것 즉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는 것으로 그쳤지만 우리는 멸망으로 직결됩니다. 아담은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의 근원으로서의 자연계에 속한 생명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그쳤으나. 우리는 그렇게 된 결과로서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있으면서 성경을 통해 모든 것을 배워 알면서도 범하는 고의적인 범죄 곧 고범죄[히 10:26]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회개할 기회 없이 그런 운명에 처해진 것도 “짐짓 죄를 범한” 것에 속하는 까닭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즉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능력은 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장사 지내짐으로써 ②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니 이를 믿고 그 믿음 따라 움직이는 데에 있습니다. ①과 ②를 함께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데에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례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장사 지내진 것을 믿음으로써 그 사실을 내가 수용한다고 서명 날인하는 격입니다[롬 6:3,4].

그러면 다음 차례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내게 주심으로써 그 나의 순종의 약속을 수용하셨다는 서명 날인하게 되시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믿음을 구체화, 현실화, 실제화시켜 주시는 것이니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임하시어 '나'라는 '육체'에 그 '영혼' 격으로 오심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자신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무덤에 묻힌 것을 아는 이상 자기를 위해 살 근거도 명분도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인데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므로 오직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뿐이라[고후 5:15] 따라서 그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에만 진력하므로 항상 복종이요 의를 사랑함이요 의를 행함이고 선을 행함입니다[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이는 그리스도는 나의 소유, 나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어 있는 관계가 그 뿌리가 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있음이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것은 앞의 설명대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게 친히 선물로서 주셨으므로, 항상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위하시니 즉 그 존재 자체가 나를 위하심이므로 항상 나를 보살피시는 까닭에[벧전 5:7, 여기서 권고(眷顧)라는 말은 생각하신다는 뜻] 내가 나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어서 나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내 것’으로서 항상 나를 위해서만 모든 일을 하시니 내가 나를 위할 틈도 짬도 없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 더 낫겠는가, 나를 만드신 이께서 나를 위하심이 낫겠는가, 스스로 판단하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내 자신이라 해도 나는 실상 나를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선물로서 오직 나만을 위하시는 주님은 나를 속속들이 아시는 나의 창조자 곧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므로 진정 나를 위하십니다. 따라서 나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함으로써, 나를 위하시는 주님을 방해할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하고 나를 위해 사는 것을 기꺼이 자진해서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믿음에 있는 동안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믿기 때문에 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상 두 가지[①과 ②] 사실을 믿지 않으면 나는 그 믿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죽은 것을 믿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나를 위하게 됩니다. 나는 여전히 나를 위해 살게 되니 그러면 나는 불가불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하나로서의 삶이 아닌 둘로서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님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할 것이다’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헛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다”[약 4:13-17] 했습니다.

나 혼자서의 삶이 아니고 둘로서의 삶이니 반드시 주님께 여쭙고 무엇이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찰나 같은 세상 생활에서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몸으로서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의 지상(至上) 과제일진대 반드시 주님의 뜻대로 하기 위하여 항상 주님의 인도를 여쭙는 기도 생활이 필수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 삶이 안개 같다는 것이야 세상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할 때는 세상 삶이 헛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사명 완수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독려의 경고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이 모두 “선(善)을 행하는 것”, “의(義)에 복종하는 일”에 속합니다. 왜냐면 사람 사는 도리로서 올바른 것이요 마땅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오늘 우리에게 일용(日用)할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도록 가르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 지상(地上)에서의 인간 삶은 내일이 없습니다. 이 시간 후의 일도 보장 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일하는 자’로서의 기도이지 삶의 낙을 누리는 자로서의 기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일하고 벌어서 먹는 삶이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는 그나마도 되어질 수 없는 저주 받은 삶입니다[창 3:17-19]. 에덴낙원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 가르치신 기도 역시 이런 모든 사실을 스스로에게 일깨우는 역할도 합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을 것이다.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약 5:1-3]. 주님 말씀에 “너희 부유한 자는 화가 있으니 너희가 이미 위로를 받은 것이요[장차 받을 위로가 없고 고난뿐임을 밝히신 것],  너희 웃는 자는 화가 있으니 장차 울 것”[눅 6:24,25]이라 하심과 같습니다.

내일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삶의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그 정하신 바도 아닌데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니 범죄밖에 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대로 지고 그 핍박을 그대로 지고 그 죽으심을 그대로 지고 그러나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를 참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며”[히 12:2] 그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2] 위치로 우리도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곤해 낙심치 않기 위해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주님을 생각할”[:3] 일입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해야”[:4] 합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엡 2:6]. 그러나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고 해야 합니다[빌 3:10,11]. 이 또한 사랑의 '동시성'입니다. 자동으로 기계적으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나게 하시는 일 즉 구원 받는 일에서는 나 자신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일 필요가 없었으니 새 창조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0프로 은혜이고 믿기만 하면 되는 믿음의 일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순간부터는 나의 의지의 작용입니다. 왜냐면 순종하기로 약속하고 구원을 받은 때문이니 따라서 약속한 순종의 행함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그렇다고 또 나의 힘과 능력이라 착각해서도 안되니 왜냐면 내가 다시 났고 새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까닭입니다.

죽어 장사 지내진 자로서 무슨 내 것이 있고 내 힘이 있으며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모두 하나님 주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주시는 힘입니다. 아담에게 생명력을 주시고 산 자로 만드신 것이지 아담 스스로 자기 힘으로 세상에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연적으로 우연히 생긴 존재는 이 우주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선물”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선물”이고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시라 함과 같은 의미입니다. 성령으로 그리스도 친히 내게 오시니 그래서 성령을 또한 “선물”이시라 합니다.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 비로소 존재하게 된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모두 스스로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창조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선물이라 하는 것이요 그래서 은혜라 하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새로 지으심을 받아 다시 난 다음에는 문제가 다릅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로되 그 내게 주신 선물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을 내 스스로 적극 활용하고 선용(善用)해야 하는 것의 나의 의지(意志)의 영역입니다. 절대로 하나님 친히 나를 대신해서 움직여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처럼 됩니다. 그렇게 기계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나님께서 그 안에 장치해 두신 모든 기계적 구조가 바로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대신 움직여 주시는 그런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를 선물로 받아 우리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신 것이니 곧 ‘자유 의지’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내 스스로 사랑으로 움직여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그 일을 내 일로서 인식하여[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실상 하나님의 모든 일이 나 곧 우리들 자신을 위하시지 않음이 없으니] 적극 능동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친히 그 피조물을 위하여 대신 움직이신다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범죄했다고 또는 아담이 불복종했다고 그들을 죽음에 처해지도록 또는 멸망의 운명에 들어가도록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껏 창조해 놓으시고 멸망하도록 만드실 리 없습니다. 각자 그 스스로 멸망에 들어가도록 자신을 만든 탓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도록 어떤 성향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똑같은 영물들로서 창조되었지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과는 정반대 방향 즉 생명의 길을 그대로 스스로 지켜 나간 “거룩한 천사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니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 받았지만 그들과 똑같은 하나님의 창조로써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들과 똑같은 경고를 우리가 받고 있음은 당연합니다.

다시 말해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오늘날도 여전히 거짓말로 속삭입니다. 즉 “일단 구원을 받았으니 육신으로 살아도 구원은 잃지 않는다”고 부추깁니다. 과거 에덴낙원에서 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한 꼭 그대로의 수법이건만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되풀이하여 그대로 속아 넘어갑니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거짓말에 대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럴 듯한 변명과 이유를 둘러댑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오늘날까지 쳐놓은 그와 같은 모든 거짓말의 함정, 그물, 덫, 올가미들 즉 인간의 편견들을 보노라면 참으로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주님도 당시에 그와 같이 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나 믿지 않음을 보시고는 아무 일도 행하실 수 없었고 도리어 이상하게 여기신 것입니다[막 6:6]. 사람들의 믿지 않음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거짓말로 내세운 여러 변명들이 그대로 먹혀 들어가는 실상에 놀라워[to marvel at]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경고가 되고 있습니다.

죄를 여전히 지으며 죄인으로 자처하면서 하나님 앞에 올바른 자로 인정받을[의롭다 여기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피 흘릴 정도로 죄에 대항하여 싸우는 자이지, 죄와 타협하여 거기 굴복하여 지내는 자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죄’는 언제나 영구적으로 ‘죄’로서 남습니다. 그것이 다른 이름으로 불러질 수 없으며 그리고 그 결과는 반드시 죽음으로써만 끝나지 다른 무엇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하여 싸우는 것은 우리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 자체를 미워하기"[히 1:9] 때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한 것처럼 지금까지의[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 죄의 활성화(活性化)에 대한 종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무반응을 말합니다. 죄가 와서 아무리 부추기고 “죄를 좀 지어라, 지어 다오” 하며 선동해도 일절 반응이 없는 죽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죄 가운데 산다”는 것은 죄를 먹고 마시고 죄를 호흡하고 죄 없이는 도저히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짓는 것마다 죄요, 죄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말합니다. “선행을 버려라, 죄를 지어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것이 죄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해괴한 이단사설에 대하여 경계할 일입니다. 죄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무조건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모두 죄입니다. 이를 회개하지 않는 한 죽음의 결과밖에 거두는 것이 없습니다. 회개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빛을 받은 후 즉 모든 지식이 있음에도 짐짓 일부러 고의적으로 지을 때 용서가 없습니다.

그 외에는 모두 버려야 하고 다시는 짓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말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아야 합니다. 죄는 한 몸으로서의 삶의 원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한 몸됨의 법칙대로 살지 않는데 어찌 생명 가운데 있을 수 있으리요. 죽음을 죽음이라 하지 않는다면 즉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면 생명은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합니까. 그러면 생명도 죽음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고로 생명은 생명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죽음일 수밖에 없고 죄는 죄일 수밖에 없고 결코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거나 다른 모습과 형태를 지닐 수 없습니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입니다. 죄를 죄가 아니라 한다면 그러면 생명일 수도 있다는 뜻이니 그래서 속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세뇌를 시키고 최면을 걸어옵니다. 거기 어떤 반응을 보이든 거기 끌려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벨은 가인에게 타살, 압살되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의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악인은 승승장구한다고 성경도 곳곳에서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승승장구는 이 세상 한 때뿐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라질 때는 갑자기 사라지고 영원히 볼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때가 오면 악인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눈 닦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원래 속이는 자입니다. 그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신(神)이요 지배자인 이상, 이 세상은 그런 속임수와 거짓으로 가득 차 있음은 당연합니다.

의당히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니 이를 미리 알고 거기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 세상이니 자기네 악한 세력이 득세(得勢)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발꿈치에 물려야 그의 머리를 으깰 수 있습니다[창 3:15]. 지금은 발꿈치를 물리는 때입니다. 순서를 따라야 합니다. 고로 이 세상은 악의 때와 장소이므로 오직 사람들을 그 악과 멸망에서 빼내는 일밖에 없습니다. 한사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악과 선의 대결이기는 하나 가시적인 대결이 아니라 오히려 불가시적인 것으로 결판이 나는 대결장입니다. 헤롯의 불의의 칼날 아래 죽은 야고보 사도처럼 가시적으로는 우리의 목이 달아나더라도 불가시적으로는 우리의 발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목을 짓밟는 몸짓이 됩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해내면 그만큼 악한 자의 목을 죄어드는 올가미가 됩니다. 그래서 12사도 중 교회 기둥처럼 여겨져 오던 세 사람 중 하나인 야고보가 이유 없이 목이 잘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기적적인 구출이 이 뜻을 더욱 뒷받침합니다. 왜냐면 능히 구출하실 수 있음에도[베드로처럼] 구출하시지 않은 증거가 되는 까닭입니다. 시작 때에는 적에게 밀리더라도 최종 단계에서 적을 완전히 덮쳐 버리는 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처음부터 일방적인 싸움은 싸움이 아닙니다. 적의 머리를 으깨기 위해서는 발꿈치부터 물리는[창 3:15] 인내(忍耐)가 필수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롬 6:2,11/벧전 2:24]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이같은 죽음의 무반응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반응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선[좋은 것]과 악[반대로, 나쁜 것]에 대한 일절 무대응이니 죽은 자가 무슨 반응이 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부추겼던 대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선[좋은 것]과 악[나쁜 것]을 알고자" 하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선[좋은 것]과 악[나쁜 것]을 아는 지식을 행사한다는 것 즉 자기에게 해로운 것에 대하여 그대로 나쁘게 반응하고 좋은 것에 대하여 역시 그대로 좋은 것으로 반응함은 자기중심입니다. 예컨대 자기에게 욕설을 하면 자기도 욕을 하는 등 악을 악으로 갚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악을 선으로 이기라"[롬 12:21]했고,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상속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했습니다.

"형제를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 5:15]고 했습니다. 선을 따르라 즉 좋은 것을 따르라는 것이니 자기에게 무엇이 좋고 나쁘냐 하는 것으로 따지지 말고, 악인에게든 선인에게든 일관되고 평균되게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따라 행함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고 이웃에 대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좋고[선] 나쁨[악]의 기준이 아니라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나와 같이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 중심으로만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에덴낙원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선[좋은 것]과 악[나쁜 것]을 추구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대로 따라 행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한 선악을 중심하던 행동 즉 자연계에 속한 동물적 근성 내지 본능의 작용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죽어 완전히 무덤에 장사 지내진 것입니다. 종결이 되고 끝장이 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선과 악을 가리고 찾는 것이 더 다시는 없는 것이 "죄에 대하여 죽음"입니다.

우리가 "죄에 거(居)하겠느냐"[롬 6:1] 즉 죄 가운데 살겠느냐 함이 그 뜻입니다. 대답은 확고합니다. 즉 "그럴 수 없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겠느냐"[:2]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인이 되었으나[갈 5:13] 그런 일에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즉 육신을 따라 행하여 죄 짓지 말고-:13]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는 자유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지못해 선을 행함이 아니라 내 스스로 원해서 자유롭게 자유인으로서 선[이웃에게 대하여 선]을 행하고 악[이웃에게 악이 되는 것]을 버림입니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5,16/3:11] 함과 같습니다.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심을 가지며[to have compassion]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tenderhearted] 겸손하라"[3:8] 함도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속임수를 쓰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따라 행하라"[:10,11] 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나와 함께 죽으심이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롬 6:10]이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나 역시 당연히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11]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公義)로[사필귀정으로] 심판하시는 이께 부탁하심"[벧전 2:23]과 같이 우리도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24]인 것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24]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죽음으로 "죄에게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된"[롬 6:18]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보살피시는 이, overseer]에게 돌아왔다"[벧전 2:25] 한 것입니다. 즉 제 궤도를 찾아 정상으로 운행되도록 회복된 것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선악을 알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만 선악을 알고 행사한다는 그 뜻입니다. 에덴낙원에서의 불상사로 인한 폐해가 완전히 시정되고 사라지고 원상 복구된 것입니다.

징계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도 우리 스스로 원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먼저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바울이 교만할까 하여 바울의 육체에 “가시 곧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사자”[고후 12:7]를 주신 것도 바울 스스로 평소 자기를 끊임없이 살피고 있었으므로[고전 11:31] 그 부족한 것을 온전히 하시는 역할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징계는, 믿음의 생활이 나태해지거나 옛 버릇 따라 세상으로 향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이것을 즉시 회개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주저하거나 그 속도가 느릴 때 주님께서는 부득이 회초리를 드시게 됨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우리가 멸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긴급 상황의 적신호가 켜져 있는데도 이를 간과하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징계를 받고서도 끝내 뉘우치지 않을 때는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은 실제 일어날 수 있고 성경은 그래서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런 경고를 통해 우리가 실제는 그런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는 일까지는 없다고 억지 해석을 하고 있으나, 그 확실한 증거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일벌백계의 사례입니다[행 5:1-11].

여차할 때 각자는 즉각 회개하는 것이 급선무요 또 그렇게 되도록 아무쪼록 평소의 삶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상식이고 순리입니다. 바나바는 처음 믿음에 들어온 교회들을 위로하고 권유하고 경고하면서 "마음을 굳게 하여 주님께 붙어 있으라"(행 11:23) 하였거니와 자기 생활 가운데서 그렇게 주님께 붙어 있는 방법으로는 모든 일에 먼저 주님께 여쭙고 난 다음에 움직이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면 죽든지 살든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므로, 반드시 주님의 인도와 지혜를 따라 행하여 주님의 것인 나의 몸이나 시간이나 기타 무엇이든 가장 확실하게 선용하고 최대한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 표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생활에 나태가 오고 세상에 이끌리는 마음이 되어 버리면 주님께서는 징계의 회초리를 드시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병고(病苦), 경제적 파탄, 기타 생활상의 갖가지 문제가 닥칩니다.

그러나 징계도 징계를 받을 만한 이들에게 내려질 수 있는 은혜지 이미 마음이 굳어져 버린 다음이면 백약이 무효이므로, 이런 험악한 사태에 이르지 않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무리 하나님의 징계라도 강제성을 띠지는 않는 것이니 강제를 띠는 순간 모든 의미는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이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함과 같이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다는 신념에 찬 생활을 해야 합니다.

손톱만큼도 나 자신을 위해서는 살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삶을 우리에게 선물하셨으니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 역시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임할 때에 정상 가동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도 징계를 받은 직후에는 잘 달리다가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거쳐가면 유감스럽게도 또 계속하여 생활 속의 나태가 생겨 시험에 들고 유혹에 허우적거리다가 범죄에 이르게 되었고, 그 때마다 하나님은 사랑의 회초리를 들지 않으실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효험이 없이 멸망당하는 사람은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 묻히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고전 10:5].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각 개인의 삶이 모여 형성되고 있는 것이므로 개인의 양상에 따라 전체 교회의 기류도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도 핍박이 있을 때는 정신을 차려 믿음을 지키다가도 핍박이 가라앉고 어느 정도 편안해지면 교회는 목자(감독)들끼리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사랑이 식어지며 따라서 각종 이방 습속(習俗)이 스며들 위험이 닥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공인하게 되면서부터는 완전히 타락했다기보다 별개의 집단이 생겨 이방인들의 미신과 행티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칭하는 세상 종교로 활개 치며 극심하게 교회를 핍박하여 피로 물들였고 지금까지도 거대한 공룡처럼 교회의 적대 세력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그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도 될 뿐 아니라 스스로의 정화(淨化)나 성결(聖潔)을 위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의미에서 이런 핍박의 실상들은 계시록에 명시한 대로[계 3:18]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 징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로 대우하시는"[히브리서 12장] 증거가 되니 이런 점에서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알고 기뻐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는 일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움으로써 사람 구원해내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뿐 아니라[고전 3:9/고후 6:1], 그런 징계로서의 의미와 은혜 또한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단죄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1,32] 함과 같습니다.

징계는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이시니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요 15:1,2] 하실 때의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는" 바로 그 의미입니다.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회초리를 드심이니,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는 것으로서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6,7] 함과 같습니다.

"세상에 있는 우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니 믿음을 굳게 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대적할 것이요"[벧전 5:9] "우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4:12] 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13] 했으니, 하나님의 소자들(小子, children)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7,18] 함과 같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이니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15] 했고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6] 했습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신다"[히 12:8-10] 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어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우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신다"[벧전 5:10]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부모가 우리에게 회초리를 드는 것은 우리 자신 잘 되라고 함이나 결국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함이므로 그래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했다"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기적인 것이 없이 즉 당신 자신을 위하시는 목적이 없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이치를 따라 순수하게 우리를 위하심입니다. 곧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려 하심이니 이 "거룩함"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의 상대를 위해 전적으로 사는 것을 말함입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게"[눅 9:26] 될 것이라 하신 것이니, "우리가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다"[시 44:22] 했고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다"[73:14] 함과도 같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잘못하면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경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 아들들을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징계하시는 고로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우리의 모든 고난이 바로 이러한 의미도 지니므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항상 매 꾸러기라 세상 앞에서 부끄러워할 만도 합니다. 천국에서는 절대로 이런 회초리가 없으므로 이 세상에서만은 그렇고 또 이 세상 자체가 그런 무대로서는 안성맞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매를 맞는 지경에 일체의 거짓말이나 꾸미고 지어낸 내용이 성경에 있을 자리가 없게 되고 거짓말쟁이가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말을 하지도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도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에 속합니다.

§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해도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닌 것이니 이와 같이 주님 친히 역사하심이 없고는 우리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자유 의지로 결의하고 결단할 때 한해서 거기 맞추어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악을 행해도 스스로 악이 좋아서 행하니 그 악을 행함에 따른 저주가 역사되게 하시는 것뿐입니다. "심은 대로 거둠"[갈 6:7]입니다.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영물들의 경우 그들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주신 ‘힘’이 그들로 하여금 죄를 능히 짓지 않도록 역할을 한 것이나 정작 그들은 이와는 반대로 스스로 나간 것입니다

우리의 새 창조의 경우에서는 그리스도 친히 그 ‘힘’이 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친히 나의 영혼 격으로 나와 항상 함께 사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이에 반대 방향으로 나가면 즉 주님의 뜻에 스스로 거역하면 그 결과는 그대로 나타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아담처럼 비극적 마무리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가 ‘영혼’과 ‘육체’의 관계라고 함은 불가분성이라는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지, 나의 신체처럼 물질적인 육체가 아닌 것입니다.

인격성을 갖춘 '육체' 곧 나 자신을 말함이므로, 내가 나의 자유 의지를 행사하지 못하거나 주님께서 나를 강제, 간섭하신다는 뜻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나의 의지로 10 정도로 하려 하지만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은 그 '나를 아심'에 맞추어 10 정도로는 부족하다 하여 50 혹은 100으로까지 높여 주실 수 있다는 그런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10이 아니라 1 정도의 의지라도 나타내지 않는다면 주님 역시 여기서 0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이상으로 나가시면 간섭과 강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경우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와 같이 바울이 원치 않았던 것마저 주시게 되나 강제가 아니고 바울이 능히 이해할만한 일이므로, 나중에 바울 역시 이 은혜를 깨닫고 감사 감격으로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니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해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게 되었으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후 12:9-11] 한 것과 같습니다.  

§  나는 주님의 삶을 살고 주님은 나의 삶을 사는 "한 영"으로 하나 되는 삶의 이치는 원래 아버지와 아들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확립된 것입니다. 둘이 하나 되는 이치를 따름으로써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는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복된 '관계'는 주님 친히 육체로 계실 때 제자들에게 수시로 가르치신 바로서 요한 복음서에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이치를 따라 만물을 만드신 것인데 곧 '삼위일체의 원리'임을 이미 설명했습니다.

남녀의 한 몸이 되는 이치도 바로 이를 따름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한다”[고전 7:4]고 했습니다. 때문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가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어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않는다”[롬 7:2] 했습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죽으면 그 한 몸됨에서 풀려 나지만 여자가 있는데도 다른 여자를 보면 간음죄가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엄정한 법질서 아래 있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이 있어 자연계의 생명체가 그 법칙 따라 유지 존속되듯이 사람 삶에는 삶의 법칙이 있어 인간이나 영물이나 두루 적용됩니다. 이를 하나님의 율법 또는 계명이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고전 9:21] 함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37-40]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은 무엇인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신 바로 그 “새 계명”입니다.

내용은 똑같은데 왜 “새 계명”이라 하셨느냐 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라는 말씀으로써 그 의미를 확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첫째와 둘째로서의 율법의 강령] 그냥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공동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네 지체로서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개략적인 즉 맛보기로서의 의미에 그쳤지만[그래서 아무도 진정한 의미에서 순종하는 자가 없었으니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었으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곧 주님께서 자기 목숨, 자기 전부,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우리에게 내어 주심으로써 나타내신 자기 부인으로서의 사랑을 말씀하심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살지 않고 위하지 않는다는 철칙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의 “새 계명”으로서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계명은 지키라고 있는 것입니다. 지키지 않을 바에야 처음부터 계명을 말씀하실 리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라”[롬 7:4] 함과 같은 대목을 전혀 당치도 않게 해석하여 하나님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이 된다는 식으로 착각합니다.

'모세 율법'과 '하나님의 율법'을 혼동하는 결과입니다. 바울이 이 “율법”을 말할 때는, 당시 교회 안에 들어온 일부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할례 등 모세가 전해 준 옛 시대의 율법까지 지켜야 구원된다고 허위 선전함으로써 교회를 소란하게 하던 때에 바울이 이 모세 율법을 가리켜 한 말인데도 이를 제대로 바로 읽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방금 위에서 지적한 대로의 하나님의 생명의 율법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육신”[롬 7:5-8:13]을 설명하면서 가리키고 있는 "율법"은 전자의 것이 아니라 후자 곧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생명의 계명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역시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혼동 속에 빠져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설명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혼동인 줄 알면 다행이지만[결국 진리를 찾아 깨달을 것이므로] 진리인 것처럼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착각하니 문제입니다. 바울의 편지 속에서 경우에 따라 이 두 가지[예컨대 롬 7:4와 롬 7:24]의 것을 설명할 때 모세 율법과 하나님의 율법[계명]을 굳이 구별하지 않은 것은 전후 문맥을 따라 살피면 스스로 명료해지기 때문입니다.

오직 문제는 사람들이 “육신대로 살기”[롬 8:13]를 원하면서도 영생은 탐냄으로 인한 그릇된 선입견으로 성경을 읽기 때문에 빚어지는 자중지란의 혼조(混調)요 결국 함정과 덫, 올무에 걸린 결과가 됩니다.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지"[히 1:9] 않고 영생 얻기를 바라는 그 누구든지 하나님은 이와 같이 버리십니다. 왜냐면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역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하던 짓을 되풀이할 것이고 또다시 천국은 과거와 같은 죄와 저주 속에 함몰될 것이니 그런 일은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나’가 아닌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즉 전체를 위한 중보(仲保) 기도의 성격을 지니고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이 대체적인 우리 기도의 본질입니다. 전체로서의 한 몸된 구조로 풍성하게 사는 것이 원래부터의 사람 삶의 기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다니엘서]에 나타나 있는 다니엘의 기도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다니엘은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결코 죄를 짓지 않는,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그래서 죄 짓기보다는 차라리 사자 굴 속에 들어가기를 택한 믿음과 의(義)의 사람인 줄 우리는 알고 있지만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여 자기도 그 ‘우리’ 안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물론 다니엘의 의는 그렇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것으로써 한정된 것이고 본질적인 육신으로 말마암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는"(롬 8:2) 것은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모세 율법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뜻이니 바울 역시 그러했던 것입니다(빌 3:6). 세례 요한을 낳은 제사장 사가랴와 그 아내 엘리사벳 역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눅 1:6) 함이 그런 의미입니다].

이것이 중보(仲保) 즉 남을 위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죄인을 위한 의인의 기도입니다. 자기 개인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중 하나로서의 자기 위치를 명백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자기 혼자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포함되어 있는 바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전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전체 즉 ‘우리’를 떠나서는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 위하여 죽으심 곧 구원하심도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고후 5:15] 하심으로써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되돌려 주심이니, 다시는 개인주의, ‘나 홀로’ 주의, 한 몸으로서의 삶의 체제를 무시하는 오직 나만 살겠다는 그릇된 삶을 청산하고 머리가 되시는 주님을 위해 삶으로써 그 뜻과 지시를 받아 전체를 위하고 내 이웃을 위하는 삶을 살도록 하심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 구조로서만 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의 체제가 애초 인간을 창조하시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신 처음부터의 하나님 뜻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본연의 삶은 ‘우리’라는 한 몸 체제에서의 삶인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하나만 아니라 여럿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만 만드셨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가 될 수 없으니 ‘하나님’과 ‘나’ 이렇게 해서 ‘우리’가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얼마나 막가[막가는]판인지 여기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모하고 파괴적이고 모든 혼란과 혼돈의 근원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백해무익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범죄하여 그 당연한 결과로 죽음에 이르렀으므로 구원이 필요하게 되어 이제 다시 산 자가 되는 마당에서는 마땅히 죄를 짓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생각하지 않고 항상 ‘나’ 곧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므로 사실 그런 어리석음도 없습니다.

"때가 이를 것이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私慾)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헛된 이야기[꾸며내고 지어낸 것]를 따를 것"[딤후 4:3,4]이라 한 꼭 그대로입니다.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름"[딤전 4:1]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런 이단들의 주장에 미혹되어, 죄를 지으면서도 그래서 여전히 죄인으로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옳다 또는 올바르다 인정하심 받아[의롭다 여기심 받아] 구원된다고 합니다.

이는 산 자가 아니면서도 산 자가 되려 하고 죽을 짓을 하면서도 산 자가 되려는 죄인들의 생떼에 불과하여 그런 자가당착도 없습니다.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올바르다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도 거짓말하시는 분이라고 감히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런 당치도 않는 것을 믿을 정도로 인간을 절대로 그렇게 어수룩하게 만드시지 않았는데도 이 모양이니 과연 이 세상의 신(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얼마나 인생들을 장악하고 조종하고 있으면 이 모양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實存)과 활동에 대한 유력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권능이 무슨 절대적이라 그런 것이 아니고 상대적이니 즉 우리는 육체임에 반해 그는 영이라 영과 육체가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애초 인간[아담]은 영계(靈界)인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있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모든 영물(靈物)들도 이 인간을 기준해서 창조되어 인간을 위함이었는데, 범죄의 결과 아담이 그 신령한 몸을 잃어 버린 결과가 되어 오늘날의 이 육체 즉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었고 스스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라 범죄함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복속(服屬)된 것입니다.

자업자득이니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닙니다. 다시는 범죄하지 않기로 각자 각성하는 것밖에 현재로서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즉 우리로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심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이라고[고후 5:15/롬 14:9] 성경은 천명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위해 산다는 것은 전체 몸을 위해 사는 자동적인 결과를 만듦이니 이는 필연적으로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 곧 자기 부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서의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다 이루게 됩니다[마 22:37]. 곧 머리되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나의 지체된 믿음의 형제들 곧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한 머리 아래 같은 지체를 이루고 있으니 내 이웃이 모두 내 자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판단할 때 “내 이웃”은 실제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는 믿는 형제들을 말합니다.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잠재적 내 이웃입니다. 회개하여 순종하게 되면 내 형제들이 되나 지금은 아닙니다.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갈 6:10] 한 것입니다. 외부의 사람들 즉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는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와 그리스도께 복종하도록 기도하며 말씀 전달함으로써 전력을 다할 일입니다. 그들에 대한 선행도 그런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자기를 위해 사는 죄 가운데 있기에 자기를 위해 사는 자기중심이 정상이고 자기 부인은 무슨 큰 변이나 당하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에서 죄에 물들고 찌들어져 있는지 그 증거가 됩니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알고 있으니 이 세상의 속성을 이로써도 알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심도 이 한 몸의 원리를 따르심이라는 사실을 우리를 구원하신 그 목적에서[고후 5:15] 성경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영원히 우리와 하나로서의 한 몸 구조로 우리의 머리로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모든 피조물의 머리로 계셨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에 동참하여 사람 살리는 일을 함도 당연히 이 한 몸됨의 이치에서 시행됩니다. 때문에 내가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나의 힘이 미치는 한도 내의]의 모든 죄의 저주와 함께 함이니 곧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움입니다[골 1:24].

구원하시는 능력의 역사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결된 상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역할을 담당하는 그런 각자의 ‘한 모퉁이’ 각 지체 역할인 것입니다. 이런 고난 받는 것이 싫어 혹은 두려워 몸을 사리게 되면 사람들을 구원할 수도 없을뿐더러 결국 ‘우리’를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되어 나 스스로 선택한 결과를 따라 죽음[멸망]뿐입니다. 내 스스로 택한 결과이니 어찌 남을 원망하리요. 이런 한 몸의 이치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고통 당한다고 한 것입니다[롬 8:22].

우리가 인간 세상에 살면서 혼자로는 못살고 눈 뜨면서부터 잠에 곯아떨어질 때까지 사람을 대하는 삶인데 일차적으로 부모, 아내/남편, 자식이니 이는 내 살붙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살붙이보다 더 가까운 관계이신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셨으므로 내게 근본이 되신다는 그 사실 때문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의 살붙이 이상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단지 보이시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래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 친히 영원히 사람이 되어 계시므로 그리고 현재도 성령으로 계시는 까닭에 아버지와 항상 하나로 계시므로 '사람'이시고 내 살붙이 이상이시라는 사실은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곧 "임마누엘"[God with us]인 것입니다. 에덴낙원에 인간[아담]이 있을 때에는 이런 모든 일이 물론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때였으므로 더 필요한 것도 없이 완전했으나, 범죄하여 이와 같이 죽은 자로서의 인생들이므로 이제 새 창조의 대상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언약의 피”

주님은 잡히시던 날 밤 잔을 가지시고 감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용서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내 피 곧 언약의 피라” 하셨습니다[마 26:27,28/막 14:24]. 누가는 약간 달리 표현하여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해 붓는 것이라”[눅 22:20]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이를 인용하여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 하신 것으로 그 편지에 썼습니다.

내용은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는 것은 모세와 같은 “언약의 피”임을 강조하시고 그러나 “새 언약”임을 명확히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해 언약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렸다”[히 9:19]고 했습니다. 즉 모세가 피를 취하여 그 일부를 먼저 단에 뿌리고 언약 책을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려주고 백성이 듣고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자 모세는 그 나머지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렸습니다.

이 때 모세가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다” 하였던 것입니다[출 24:6,7].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히 9:20]. 그러므로 이 언약의 피는 모세 당시의 율법을 통해서나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서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지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때문에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지키는 자에 한해서 그 피로 죄 용서가 가능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언약[약속]의 피”입니다. 그러면 첫 언약 때와 같은 것이지만 “새 언약”이라고 하신 것은 “첫 언약” 때의 짐승의 피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실제로는 그것으로써 인간의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피가 상징했던 그리스도의 피만이 인간을 구원합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라 하신 것인데, 그러나 새 언약이지만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용서가 없다” 하심과 같이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가 되나 오직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는 자에 한한다는 사실에서는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이므로 계명도 당연히 “새 계명”[요 13:34]이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서도 즉 여전히 죄인으로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 받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말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주님 친히 말씀하신 대로 “언약”의 피입니다. 약속이니 거저 값없이 주신다고 해서 그런 식의 공짜로는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값없이 거저 주신다고 하는 것은 내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그 공로로 얻은 죄 용서가 아니라는 것뿐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스스로의 선행으로 용서가 되지 않는 대신, 앞으로는 죄를 짓지 않겠다 즉 하나님의 새 계명대로 준행하겠다, 그 말씀대로 지키겠다는 약속이 선행되어야 하고 전제되는 것이니 곧 회개입니다. 이런 의미가 되는 약속을 그래서 “회개”라 합니다. 때문에 회개해야 죄 용서가 됩니다. 회개해야 세례를 받는데 그래서 “회개의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죄 용서가 됩니다[행 2:38].

은혜이므로 즉 내 스스로 아무 것도 행한 것 없이 구원을 받은 것이어서 우리 구원을 그리스도의 피로써 속량(贖良)한다 하고 자기를 속전(贖錢)으로 주셨다 하는 것입니다[딤전 2:6]. 그래서 우리 구원을 달리 표현하여 그 피 값으로 우리를 사들이셨다(買入) 하게 됩니다[행 20:28/고전 7:23]. 즉 주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들여 속전으로 주셔서 우리를 사들이시게 되나 이는 자신을 내게 먼저 주신 이후의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주님의 것이 되기 전에 주님 친히 나의 소유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리켜 내게 주신 “선물”이시라 합니다. 선물이면 영원한 선물이요 영원히 내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나의 것이 되어 주심과 동시에 친히 나를 주님의 것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 되는’ 같은 이치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될 때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이 되고 여자의 몸은 남자의 것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강제로 주님께서 나를 자기 것으로 삼으실 수 없습니다. 사랑 관계이므로 사랑에는 간섭이나 강제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 스스로 내가 주님의 것이 되려고 작정해야만 주님도 내 것으로서 확정되시고 그 역할이 작동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회개가 있음으로써 나는 주님의 구원을 내 것으로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이니 곧 성령 받아 모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복종하기로 약속하는 자에 한해서 그 피로 죄 용서가 가능해졌으므로 그 약속을 따라 복종을 계속할 때 중단이 없어야 하고, 중단할 때는 상호간의 계약이므로 일방이 약속을 파기했으니 그 상대방도 자동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파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약속은 취소가 됩니다. 내 스스로가 믿고 내 스스로가 들어 이 믿음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스스로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함입니다.

나의 선물이면 전적으로 나를 위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위하지 않거나 나와 반대되는 것이라면 즉 내게 유익이 안되고 쓸모가 없는 것이니 그것을 처음부터 “선물”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그 외아들을 내게 이같이 선물로 주셨고 아들 친히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를 내게 선물로 주신 것이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그 피로 나의 죄를 씻으시고 구원하여 주신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기본 토대가 닦여짐이니 죽은 자가 죄를 지을 까닭이 없습니다. 죄는 자기를 위함인데, 그 ‘위할’ 자기가 죽어 무덤에 들어가 있는데 무슨 죄를 지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죽음]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무장(武裝)하라[”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벧전 4:1]이라 했습니다. 과거의 죄가 용서되어도, 죄 지으면 이는 죽음을 다시 새롭게 벌어들인 결과가 되므로 그 용서가 무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상 두 가지 요인을 모두 합쳐 다시 말해 지나간 죄 용서와 함께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작정하는 것으로써 우리의 실질적인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물은 항상 은혜를 의미합니다. 내가 스스로 벌어들인 것이라면 대가(代價)이므로 그것을 선물이라 하지 않습니다.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은 내 스스로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나의 “육신”이 나를 죄 짓게 만들었으나 지금은 내 스스로가 나의 자유 선택으로 죄를 지으면 짓게 되는 상황으로 급전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처음부터 그 스스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죄를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요 3:19,20]. 이런 구별은 제3자가 할 수 있지 않고, 오지 당사자 스스로가 그 나타내는 것으로써 자체 증명하게 됩니다. 고로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는 우리 자신이 섣불리 판단하여 이렇다 저렇다 해서는 안됩니다. 이와 같이 내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나를 사랑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혜요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그 죽으심으로 흘리신 피로 나를 사신 것입니다. 사셨으니 나는 당연히 주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 위해서만 존재하므로 주님의 뜻대로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내 스스로 그렇게 할 의사가 없으면 애당초 구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내가 자진해서 주님의 소유가 되기로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르는 뜻입니다] 작정하여 오직 그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나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데 나를 반(半) 강제로 그의 소유로 삼으신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착오가 없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시고 나는 주님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오직 그만을 위하고 그만을 위해 산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나만 위해 사신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는 살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오직 나만을 위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시는 것이나, 개개인에게 임하셔서 함께 계시는 바로 그 의미대로 그리고 앞에서 지적한 대로의 “선물”로서의 의미 그대로, 나만을 위하시고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습니다. 아들로서 당연히 아버지를 위하십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뜻이 우리를 위하심에 있으므로 여기서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면 내 이웃도 동시에 위해야 하는 의미로 함께 나타남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나만을 위하시되 모든 사람을 동시에 위하심은, 주님께서 사람으로서만[사람은 육체로서 한 사람을 위하면 오직 그 사람만 위하지 동시에 여러 사람을 상대할 수 없으므로]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으로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는 그 어느 사람과도 다른 유일한 차이요 특성이십니다. 그래서 사람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나의 선물이 되어 주셔서 영원히 나의 소유가 되어 계시니까 당연히 그 생명은 나의 생명, 그 영광은 나의 영광, 그 소유는 모두 나의 것이고 그가 앞으로 하시는 모든 일들이 죄다 나를 위하심이니 나를 위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이것이 '선물'의 의미임을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나의 구원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있는[아들을 소유한] 자는 그 안에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으면[아들을 소유하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한 것입니다[요일 5:12].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근거로 합니다. 그 흘리신 피는 내가 주님과 함께 흘린 죽음의 피임을 나타내고 그 증거이므로 내가 죽었다는 것을 그 피로써 인(印)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므로 나의 죽음[그리스도와 함께 한]을 그 피[그리스도의 피]가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내게 주신 선물로서의 완벽한 역할이십니다. 때문에 요한 사도는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요일 1:7]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그런 의미와 특성을 지니는 까닭에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음을 전제하므로 하나 되어 있다면 나는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한 대로의 “서로 사귐” 곧 사랑의 교제입니다. 이런 하나로서의 사귐이 있는 경우에 한해서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 함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이런 사귐이 없이는 다시 말해 여전히 죄 짓고 죄인으로 자처하는 경우에는 우리가 아무리 “우리 죄를 자백해도” “미쁘시고 의로우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9].

여전히 죄인으로 있으면서도 단지 우리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용서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종교 교리일 뿐이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니 주의를 요합니다. 따라서 혹자 어리석게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의 순종일 수가 없습니다. 그 믿음 역시 내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고로 나는 순종하지 않아도 혹은 믿음이 없어도 그 영생은 그대로 내 것이므로 나는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는 억지 소리를 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우리의 구원은 약속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약속은 일방적이 아닙니다. 사랑이 일방적이 아님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 우리 구원인데 이 하나 됨은 쌍방이 동시에 움직임으로 되는 ‘동시성’이니 곧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것으로서 작은 자[나]가 큰 자[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을 가리켜 “순종”이라 표현하는 것뿐입니다. 고로 그리스도의 순종 또는 믿음을 나의 것이라 하는 억지 주장은 갑만이 을을 위하고 을은 가만히 있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이기주의, 자기중심의 전형적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죄의 흉악입니다. 자기는 남을 위하지 않고 남이 자기를 위하도록 욕심 내는 탐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그 누구도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가면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또 하나의 억지 소리를 사람들은 지어냅니다.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이 사랑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한 대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 되어 계시는 모습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친히 이런 사랑의 법칙을 무시하고서 우리이게 일방적인 사랑을 내리실 까닭이 없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둘이 하나 되어 계셔서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는 이 원리원칙을 따라 모든 것을 이루시는 것이니 헛된 망상을 버릴 일입니다. 이렇게 둘이 하나되는 관계를 가리켜 '사랑'이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일방적으로 아들을 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 친히 아버지를 위하심으로써 이 둘로서의 하나 되어 계시는 아름다운 관계가 유지됩니다.

그래서 이 이치로 만물을 만드셨고 그것이 ‘삼위일체의 원리’임을 앞에서 설명한 바 있고 하나님과 피조물 관계가 바로 이 이치를 따름이라 하였고 한 몸의 원리로 사는 법질서가 이 원리를 근거로 한 것임을 설명했던 것입니다. 이 둘이 하나 되는 이치를 따라 우리의 구원도 이루어졌음을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가 새 언약으로 세워진 피일진대 나는 반드시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 반드시 순종한다는 뜻이 바로 이와 같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되어 있는 즉 ‘둘이 하나 되는’ 이치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쌍방 간의 약속을 가리켜 '사랑'이라는 말로 간단히 요약하기도 합니다. 고로 우리의 믿음을 사랑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믿으면 구원된다는 말을 성경은 달리 표현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준비하신 모든 것”[고전 2:9]이라 하기도 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약 1:12].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 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세상 불신자에게 주는 경고가 아니라 교회 앞에 주는 경고입니다. 왜냐면 사랑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고 마음의 영역이므로 그 마음이 변하면 사랑도 변하고 “처음 사랑”[계 2:4,5]도 떨어지게 되고 회개 않으면 멸망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는 까닭입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함도 그 때문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구원이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속입니다. 어느 한 쪽이라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나머지 한 쪽도 일방적으로는 지킬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할 것이요 나를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할 것이라” 하신 것이 그 때문입니다[마 10:33/딤후 2:12].

무릇 사랑은 자기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고 그래서 자기의 자유 의지가 핵심입니다. 말 그대로 자유입니다. 싫으면 싫은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하는 것이지 강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신[갈 2:20] 것은 나를 사랑하셨기[:20]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당연히 내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 사랑의 반응, 화답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계명을 지키기로 약속하는 것입니다[요 14:15,21,23].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부득불 주님도 영생의 약속을 지키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분명히 선을 그어 “영생은 약속”[요일 2:5]이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점에 대해 착오가 없도록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다”[1:9,10] 한 후,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代言者, 중간에서 변호해 주는)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다”[2:1,2] 하였으나, 다시 강조하기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으니 이로써 우리가 그 안에 있는 줄을 아는 것이다. 그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 것이다”[:3-6] 한 것입니다.

즉 이미 천명한 대로[:1]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는 경고를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로서 죄 짓는 자는 없습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없을 때 쓰는 말입니다. 요한의 이 경고대로 하면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니 그리스도를 모르는데도 믿을 수는 없으며 구원 받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하니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한 것입니다. 그렇게 계명을 지키고 말씀을 지켜야[요 14:21,23] “이로써 우리가 그 안에 있는 줄을 아는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거한다 하는 자” 즉 구원 받았노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 것이라” 한 것과 같습니다. 그의 행하신 대로 행하니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지 않으셨고 언제나 아버지께 순종하신 것처럼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다”[1:10] 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당시나 지금이나 형제 간에 사랑 없음을 죄로도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그 편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죄이고 그 미워함은 살인죄에 해당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3:15]. 따라서 형제 사랑이 없으면서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것을 가리키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죄 없다 하면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 한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엄중히 지적한 후 형제 사랑이 없음도 죄 짓는 것이니 요한은 모름지기 구원 얻은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고 지어서는 안된다고 그 편지에서 수 차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2:1/3:6-10/5:18]. 그런즉 주님께서 그 피로 우리를 사들이셔서 자기 소유로 삼으셨지만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어디까지나 내가 주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지키고 계명대로 준행하겠다는 약속을 바탕으로 하는 언약의 피를 근거로 합니다.

다시 말해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자진해서 주님께 드려야 내가 주님의 것이 되므로, 그래서 내가 회개하고 세례 받고 죄 용서 받아 성령을 받아 모신[이것이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함입니다] 것입니다. 내가 자진해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주님을 택해야 하고 순종하기로 기꺼이 나서야 합니다. 우리를 기계적으로 혹은 강제로 자기 것으로 삼지 않으셨음을 거듭 강조합니다. 기계적으로 삼으실 바에야 세례 요한이 회개를 강조하면서, 회개하려 하지 않고 단지 영생만 욕심 내어 세례만 받고자 했던 바리새인 등을 책망할 때 “속으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지 말라. 이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 말을 할 리가 없습니다.


돌들로써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시는 것이나 사랑하지도 순종하지도 않고 죄 짓는 그래서 여전히 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시는 것이나 의미가 같기 때문입니다. 전자와 같은 일을 하나님이 하시지 않는 것과 같이 후자의 일도 당연히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고 내 계명을 지키게 된다”[요 14:21,23] 하심과 같이 순종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인데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바울이 “누구든지 주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 한 것이고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는 것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