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2일 토요일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한다




"어떤 귀인(貴人)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였다. 그런데 그 나라 사람이 그를 미워하여 사람을 뒤로 보내어 '우리는 이 사람이 왕됨을 원치 아니한다' 하였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 은을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말한다. '주님, 주님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주인이 말했다. '잘했다. 착한 종아,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했으니 열 도시의 권세를 차지 하라.'

"둘째가 와서 말한다. '주님, 주님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도 말했다. '너도 다섯 도시를 차지하라'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 "주님 보십시오. 주님의 한 므나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수건으로 싸서 두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엄한 분이신 것을 제가 무서워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십니다.'


"주인이 말했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는데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않았느냐. 그리했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까지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사람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님,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습니다' 하자 주인이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무릇 있는 사람은 받겠고  없는 사람은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나의 왕됨을 원치 않는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다."(눅 19:12-27).


이 비유 말씀에서 "그 나라 사람이 그를 미워하여 사람을 뒤로 보내어 말하기를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합니다' 하였다" 하셨고, 말미에 "'그리고 나의 왕됨을 원치 않는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다" 하셨습니다. 종들을 주인이 상벌 주는 것을 말씀하심과 동시에, 그 주인이 자기를 미워하여 왕이 되는 것을 막은 "원수(enemy, 적)"들을 무자비하게 처치하는 것을 왜 일관되게 강조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당신 자신을 이 주인의 위치에 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다"(약 4:4) 했습니다. 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롬 8:7)이라고도 했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눅 11:23)라 하신 대로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바로 미워하는 것으로 통하고 그 중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자이신데 어찌 사람처럼 원수가 있느냐 하겠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것이라고 이분법으로 가리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것이요(골 1:21,22/롬 5:10),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하나님을)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것이니(:21), 사실상 원수라고 하면 미워하고 나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나를 방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원수되는 일도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어깃장 놓는 것이 바로 그러합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이(교회 중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을 보고 거침 없는 눈물이 나온 것입니다. 원수는 무자비한 척결 대상이 됨이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됨을 원치 않는다는 것은 다른 왕을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시라면 다른 왕은 현재 이 세상에서 사탄밖에 없습니다.


위의 말씀을 마지막 아담으로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사탄의 계교로 죽은 아담을 대변하시는 아니, 아담의 위치에서 말씀하시는 것으로서, 첫 사람 아담의 원수는 자기 부부를 꾀어 죽음에 함몰시킨 사탄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원수인 사탄 편에서 서서 자아중심을 고집하는 경우 그와 함께 원수 노릇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여 자아중심으로 흘러가면 이것이 곧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와 반대 방향으로 나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를 헛되게 하고 무색하게 만드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상에 대하여 죽었는데(갈 2:20/6:14) 다시 세상을 사랑하니까 하나님께 원수입니다. 므나가 맡겨진 열 사람의 종은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개중에는 자아중심을 이기려는 확고한 결의 없이 안일주의로 나가는 것이 문제가 되었고, 후자에(왕됨을 원치 않는) 속하는 사람은 아예 세상 사랑으로 일관하는 이들로 보면 타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 백성들이라 해서 세상을 원수의 나라로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는 것, 세상 즐기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지(이 모두 자아중심이 그 뼈대가 되어 있으므로) 법질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는" 것이 각 사람의 의무라고 가르칩니다. 이유인즉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으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롬 13:1)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사람들처럼 선량한 국민이 없고 준법정신이 투철한 이들도 없습니다. 최우수 시민으로 표창 받아 마땅합니다. 사탄에게 예속된 문물은 미워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여 살려내려고 불철주야 노력하는 것이기에 그 일환으로 원수까지 위하여 기도해주고 사랑하는 마당인데 달리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그 선행으로 말미암아 이웃의 칭송을 받았지 지금처럼 "기됵교인은 지독한 이기주의자"라는 지탄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핍박의 태풍이 불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안면을 바꾸게 됩니다. 자아중심의 속성이 그러합니다. 자아중심이 아니면 자기 부인인데 이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를 토대로 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 모두가 믿기 전에는 다 야차(夜叉)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아중심인  동시에 누구나 양심이 작동되는 까닭입니다. 단지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찾는 발걸음에 차이가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 인한 대가를 무서워서라기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을 인하여 모든 법과 질서에 순복한다고 바울 사도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금을 받을 자에게 충실히 세금을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5-7)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7) 했습니다. 그러하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막는 법이든 권위이든 그것은 예외입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12사도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할 때 베드로와 요한이 응대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8-20) 함과 같습니다. 법 적용에도 상위법이 있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최고 법을 따라 그 기초 위에서 국법도 지키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과 법을 금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법이니 불법, 탈법, 무법을 추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죄악들을 대하시며 "매일" 진노하십니다(시 7:11). 그러나 지금은 은혜의 때 구원의 때이므로 오래 참고  계실 따름으로 이 때가 종료되면서 사랑이신 하나님의 또다른 측면이신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심을 모든 악인들은 너무 뒤늦게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섬김과 동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 마땅하다"(:28)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향상 "양면성의 동시성"에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든 이지러진 관점으로는 바른 길을 제대로 걷기 어렵고 좌로든 우로든 치우쳐 빗나가기 십상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심과 동시에 "어린양의 진노"(계 6:16)도 동시에 말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가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인 고로 이러한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함과 같습니다.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질 때...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게 된다"(계 6:13-17)고 했습니다. 적 그리스도와 그 우상에게 경배하여 이마에나 손에 그 표를 받으면 하나님의 "섞인 것 없는" 순수한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된다 하였고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다"(계 14:9,10)고 했으니, 더 이상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심판자 재판장의 면모로 나타나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냥 그대로 "어린 양"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양면성과 동시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가 본을 보이고 사도들이 그토록 역점을 두어 가르친 것인데도 오늘날 이 "두려워함으로 하나님 섬김"(행 9:31/히 12:28)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자비, 은혜의 일방적인 것으로만 잘못 가르쳤고 잘못 배운 탓입니다. 초대 교회가 시작되자마자 일벌백계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교훈으로써 영원한 본보기를 나타내셨건만 너무나 잘도 무시하고 잘도 망각합니다. 오냐 오냐 해주었더니 손주 녀석이 할아버지  수명 잡아 당기며 늘어지는 꼴이 난 것입니다.


소동 고모라의 멸망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앞으로 오는 여러 세대에게 주시는 엄중한 경고라고 명시되어 있건만(벧후 2:6/유 1:7) 세계가 온통 소돔 고모라 짓
(동성 성행위ㅡ롬 1:26,27)으로 난리를 쳐, 소위 투표로 먹고 산다는 국가들이 "합법"이라는 방망이를 연방 두들겨대어도 이른바 "교회"는 "짓지 못하는 벙어리개"(사 56:10), 아니, 죽어 있습니다. 이런 소위 "그리스도의 교회" 집단에서는 아무 들을 것도 볼 것도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회개하라고 호통 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자세히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를 않습니다. 각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부터 앞다투어 이 광야의 소리를 내기 시작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렇게 미련을 못버려 좌불안석이냐, 왜 훌훌 털어 버리지 못하느냐, 그래서 3위1체 원리에서 논리적으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DPA pix를 통하여 악령들이 이 세상을 철저히 장악하고 있다는 현실을 똑바로 세상이 직시하게 되기를 바라서 이런 사실을 우리는 강조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곧 우리 인간의 나라, "임금" 곧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아담, "칙령" 절대 권위로서의 성경의 말씀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적이 된다"는 것은 "왕됨을 원치 않는 자는 다 도륙된다"는 위의 말씀을 빌어 세상 사랑이 어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우리는 거리낌 없이 표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는구나"(사 56:11,12).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하여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치 않으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치 아니함은 내가 오래 동안 잠잠함을 인함이 아니냐"(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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