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29)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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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례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인한 것이다[골 2:13]. "육체의 무할례"는 첫 사람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일을 먹음으로써 신령한 몸이었던 그의 육체가 다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옴으로 인한 본능 위주의 삶의 형태 즉 자기중심으로 정착되어 버린 상태를 말함이다. 흔히 말하는 바 "죄성(罪性)"이 이에 해당된다 하겠다. 곧 성경이 말하는 "육신"[롬 7:14-8:13]이다.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소위 "원죄(原罪)"라 하면서 인간이 죽을 때까지는 아무리 해도 범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무지 탓이다.

성경에 명시한 이 "육체의 무할례"와 "그리스도의 할례"를 마땅히 제대로 음미할 일이다. 죄의 온상(溫床)이 바로 육신(육체)으로서 이를 "육체의 무할례"(골 2:13)라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을 단죄하셨다"는 것은 그 죽으심을 의미함이다. 육체가 죽었으니 죄도 함께 죽은 것이다. 그 죽으심을 다시 말해 "죄에 대한 죽으심"이라 하는 이유다. 왜냐면 죄의 온상이 육신이므로 육체가 죽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삼으니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니 이를 육신의 몸을 벗는 것 곧 그리스도의 할례라 함이다(골 2:11). 난지 8일만의 사내 아이의 포피(包皮)를 벗기는 일을 할례라 하는데 "육신의 몸을 벗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내 아이의 포피를 벗기는 이 할례가 상징하는 바가 바로 이 '그리스도의 할례'이다. 포피를 벗기면 당연히 출혈(出血)하게 된다. 모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낸 모세의 아내가 자기 남편을 "피 남편"이라 했던 것과 같다(출 4:25).

남편의 이 피 흘리게 하는 할례가 그 여인에게는 기이하게 느껴진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피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내 아이의 포피를 베는 이 할례에서 "사내 아이"가 상징하는 바가 또 있다. 그것은 첫 유월절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 곧 맏아들이 "구속(救贖)된" 때문에 이를 미리 상징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구속되는 이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오직 하나님을 위하고 섬기는 의미를 상징함이다.

이 때 구속된 이스라엘의 "기력(氣力)의 시작(始作)"이 되는 장자(長子)를 상징하는 것이 곧 레위 족속으로서 이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전 일 즉 하나님 섬기는 일에만 평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제사장들이 이들에게서 나온 것은 물론이다. 이 모두 우리 구속 받은 사람들의 삶의 특징을 미리 상징해서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니 곧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말함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 들이기 때문이니 죄란 것이 원래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자기중심에 있는 까닭이다(고후 5:15). 자기가 죽어 장사되고 없어졌는데 또 무슨 자기를 위함이 가능하다는 말인가(:14)! 그래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구원 받은 모든 이들의 영원불변의 삶의 특성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친히 나와 함께 둘이 하나되어 사시므로 나의 새 삶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원동력이 되시어 있는 것이다.

참고로, 맏아들이 "기력의 시작"이 되는 것은 첫 사람 아담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 아담에게서 여자가 나왔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의 분신이니 즉 육체 면으로는 아담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구별은 처음부터 우열을 정해서가 아니라 창조의 순서를 따름이다. 첫 사람 아담 다음에 천사들 곧 에덴낙원의 영물들 다시 말해 그 곳의 각종 짐승들이 창조된 것인데 그 중 하나인 사탄이 영물들의 지식면에서의 우월성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먼저 창조된 아담의 우위(優位)를 질시하고 마침내 살인행위를 벌인 것이다.

남녀의 이런 차이를 그런 우열 개념으로 착각하여 평등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이상과 같은 만물 생성의 내력과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는 성경을 박멸하기 위한 사탄의 획책이라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이 명백한 것이다. 사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인류 수천 년 래 내려오는 전통과 관습을 이같이 하루 아침에 뒤집듯이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발달했다고 해서 정신 문화가 덩달아 개화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퇴보 일로로 황폐화하고 있으니 그 단적 증거가 개인주의의 팽창이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용서가 없고 육신의 몸을 벗어 버리는 등의 이런 중대한 상징성을 띤 인류 구속의 그림자가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바울의 설명처럼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의미가 무겁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선포하시고 "아브람"이라는 이전 이름을 버리는 대신으로 새 이름["아브라함"]을 주시면서 할례를 행하라 하신 때문이다. 즉 새 삶의 출발을 상징하는 것이 새 이름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할례를 가리켜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라"[창 17:11] 하셨다.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는"[13] 것이라 하셨다. "포피[우리말 번역은 "양피"]를 베라"고 명령하신 후 하신 말씀이다. 포피를 베면 피가 난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날 밤 제자들과 저녁을 잡수신 후 잔을 나누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하신 사실과 통해 있으니 한 뜻이요 의미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할례 의식을 명하신 후 그 할례가 "나와 너희 사이의 약속의 표징[표, 증거, 상징]"이라 하신 것이니. 이 옛 언약 즉 구약이 '그림자'로서 상징하는 그 실체가 주님 말씀하신 바 "새 언약" 곧 신약인 것이다. 옛 언약에서나 새 언약에서나 즉 그림자로서 상징하던 것이나 실체가 나타남으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나 내용은 같으니, 곧 "너희가 내 말대로 하면 나의 약속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나의 약속은 무효가 된다" 하심이다.

남자의 포피가 무슨 이유로 이 거룩한 인간 구속 사업의 상징이 되었을까 할 때, 신체의 그 부분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힘 곧 생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속한 모든 동식물은 그 '번식력'이 힘의 원천이 되어 있음이다. 물론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 인간이 이와 같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린 것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 행각 때문이니 실은 무한히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짐승은 아니지만 불가피하게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렸으니 이러한 육체의 힘의 원천은 거기에 있기 때문에 하는 수 없는 일이다.

힘의 원천 혹은 그 상징이 다름아닌 인간의 부끄러운 데에 있다는 것은 인간의 수치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을 그렇게 수치의 표적이 되도록 만드셨을까? 그럴 리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자 모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범죄의 결과가 이런 수치와 수모, 부끄러움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내 보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요 그 영광스러운 영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발산되는 광채의 옷을 입고 있을 것이 아닌가!

사람[아담]이 자기의 벗은 것을 알자마자[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가 버린 사실을 직감함과 동시에] 처음 시도한 것이 넓적한 무화과 잎으로 그 아랫도리를 가리는 것이었다. 이는 그 벗은 것을 부끄러워함이다. 이 부끄럽다는 것은 자연계의 동물들 사이에서라면 그런 감정이 일어날 리 없다. 벗었든 말았든 인간 자신의 생각이지 주변의 동물들이야 그런 것을 인식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고로 이 부끄럽다는 것은 상대적인 감정으로서, 그 상대 앞에서 수치를 느낀다는 그 뜻이니 인간 스스로가 그 상대일 수는 없다. 그 상대는 다름아닌 주변의 영물들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차원이 다른 영물들이라면 다시 말해 인간 위에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영물들이라면 그들이 인간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어른 들 앞에서 아이들이 벌거벗은 것과 같음이니 어른 앞에서 아이들이 그 벗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과 같은 우스운 얘기가 된다. 아이들이 만약 부끄러워한다면 또래들 앞에서 느끼는 감정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담 부부는 자기 또래들 앞에서 그런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그 또래들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영물들이다. 아담에게는 그들 영물들이 자기보다 나중에 창조된 자기의 아랫것들이다. 그러니 당연히 수치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영물들은 비록 에덴낙원의 "각종 짐승"들이기는 하나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동물들과는 달라 그 대칭을 이루고 있는 영적 존재이므로 즉 영원히 존재하는 까닭에 영원하지 않는 자연계의 육체들처럼 번식의 필요성이 없다. 즉 번식함으로써 그 영원성을 이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적 구조가 그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달랐는데 인간만은 그런 구조를 지니게 되니, 이는 하등(下等) 세계인 자연계에 속해 있다는 증표인 것처럼 되어, 그래서 "벗었다", "부끄럽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범죄하기 전에는 "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니[창 2:25], 이미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어 버린 현재의 인간을 표준하여 서술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음이다.

인간[아담]을 위해 그렇게 영적인 존재로서의 각종 동물들을 지으셨으나 아담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담의 마음에 들 아담과 똑같은 형상으로 창조하여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는 부득불 여자가 생겨나야 하고, 여자가 생기기 위해서는 자연계의 각종 동물들을 창조하시던 방법밖에 없는 까닭이다. 즉 남자를 기본형으로 하여 그 대칭형으로서의 여자를 지으심이다. 다시 말해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는 형식이니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갑과 을의 관계로서 인과(因果) 관계다.

하나님 친히 그렇게 여자를 만드시지 않고 아담 스스로 만들 수 있었다면 남녀 관계가 아니라 부자 관계인 것이다. 그래도 남자에게서 여자가 난 것이 분명하므로[남자의 갈빗대 하나로써 여자를 지으시니] 머리와 몸 관계이다. 인간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그 목적으로 즉 인간과 짝을 이룰 적당한 영적 존재[아담이 이미 영혼이 조성되어 영적 존재가 되어 있으므로]를 골라 가지도록 영물들을 만드셨는데도 아담의 마음에 차는 것은 아무도 없었으니 아담의 대칭형을 만드시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들 영물들과의 관계는, 피조물들 상호간의 조화를 위해 다시 말해 높아도 자기 높은 것으로 인해 교만함으로써 마찰이나 불찰이 생기지 않도록 배려하심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은 영물들보다 먼저 났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우월성을 지니는 반면 영물들은 그 지식면에서 즉 선[좋은 것]과 악[그 대칭으로서의 나쁜 것]을 분별하는 능력에서 우월성을 견지하게 하심이다. 그래서 서로 내 잘났느니 네 잘났느니 하는 다툼이 없이 화기애애한 가운데 조화통일을 이루어 지내게 하신 것이다.

게다가 인간에게는 이런 신체적 구조상의 "자연계에 속한 특징"을 지닌데다가 그 분신인 여자가 이들 영물들보다 나중에 창조되었으므로 여자만은 그 영물들 아래에 있는 위치를[고전 11:10] 유지하도록 하심이었다. 아담의 위상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너무 엄청나 교만해질 위험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의 남녀 구분은 처음부터 자연계의 동물들처럼 생식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만일 범죄하지 않고 여전히 에덴낙원에 있었다면 영계에서의 독특한 번식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임은 불문가지라 하겠다.

영계는 모든 면에서 이 자연계와는 비록 대칭을 이루면서도 더 완벽하고 더 나은 특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각종 짐승들"만 해도 예를 들어 사탄은 처음부터 배로 기어 다니는 존재가 아님이 드러난다. 그리고 용으로서 그 형상이 이미 인간의 눈에 드러난 것처럼 네 발이 있는 등 생김새가 자연계의 뱀과는 전혀 다르다. 기어 다니는 존재가 아닌 이상 그 네 발도 기어 다니게 되었기에 네 발이지 서 있을 때는 인간처럼 당당한 두 손에 두 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벗었으나 그 벗은 것을 알지 못했다고 창세기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니라 그 몸에서 광채가 나 몸을 덮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미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처해 있는 인간의 현재 기준으로 볼 때는 옷이란 것을 입지 않았으므로 분명 벌거벗은 것이다. 그래서 "벌거벗었다"고 기록한 것뿐이다. 몸에서 광채가 나는데 옷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간 순간 더 이상 그런 채색 영롱한 빛은 날 까닭이 없으므로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 한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계에 속한 동물은 그 몸에서 털이 나서 몸을 덮고 있지만 사람은 처음부터 이 같이 신령한 세계에서 영생하는 존재로 만드신 까닭에 그 몸에서 광채가 나서 그 몸을 덮게 되어 있어 처음부터 털로 입히실 필요가 없으므로 털북숭이로 되어 있는 피부 구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털이 아닌 광채로 뒤덮인 몸이 갑자기 비정상적으로 다시 자연계로 돌아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고 보니 맨송맨송한 피부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 달팽이 집을 벗겨 버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집을 벗겨 버린 달팽이가 맨 몸뚱이로 허둥대는 꼴과 같다.

이 모두 인간이 처음부터 신령한 육체 즉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어 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눅 12:27] 하신 백합화를 예로 들어도 그 옷은 하나님께서 입히신 것이고 인간의 옷은 하나님이 입히신 옷이 아니라는 그 차이를 말씀하심이다. 하나님의 형상이고 모양으로 만드신 인간인데 이렇게 한낱 들의 풀로서의 꽃보다 못하게 창조하실 리 없다.

인간의 원래의 몸 즉 광채 나는 신령한 몸을 상실한 몰골로서 아무리 인위적으로 옷을 해 입어도 애초의 그 채색 영롱한 광채[옷]가 아니니 즉 하나님 친히 입히시는 옷이 아니므로 들의 꽃보다 못함은 당연하다. 이 모두 첫 사람 아담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에덴낙원은 다시 말해 영계인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복음 전도의 첫 말문이 "천국"이라는 사실 역시 인간의 정작 보금자리는 이 자연계가 아니라 영계임을 알리는 증거 중 하나다.

고로 이 사실을 제대로 알림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일깨움 못지 않게 중요한 전도 내용이어야 하는 것이다. 과거를 모르고서 현재를 제대로 파악하기란 어렵다. 또 정확한 현재의 지식을 바탕으로 해야 확실한 미래의 희망이 가능해진다. 이와 같이 인간 구속의 필요성이 이같은 부끄러운 범죄 행위에서 비롯되었음을 이 할례는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힘의 상징,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의 그 힘의 의미와 원천이 이 번식력에 있는 까닭이다.

동물계의 적자생존의 법칙 또한 이를 따른다. 가장 우수한 수컷이 가장 우수한 암컷을 차지함도 이 때문이다. 어차피 인간 역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도로 돌아왔으니 그 힘의 원천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자연계에 속한 힘의 원천이 영계[인간으로서는 생명 세계]에서 보면 모든 부끄러움의 원천인 것이다. 이런 세밀한 사연을 이 할례는 죄다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 그 육체로 아무리 자랑하고 육체의 삶을 아무리 사랑해도 그 뿌리는 오직 부끄러움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최고 최상 최선의 힘을 과시해도 오직 수치스러움 이 한마디로 요약되는 것뿐이다. 이것이 현재 인간 생명과 그 삶의 실상이다. 따라서 이 육체의 부끄러움과 나약함과 한계성을 극복하고 다시 영광의 영계에 속한 몸으로 복구되면 그 모든 비 인간적이고 반 인간적인 것이 사라지게 됨은 물론이다. 남녀 구분도 없다. 더 이상 인간이 탄생할 필요가 없는데 그런 암수 구별이 무엇 때문에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남녀 구분은 물론 범죄의 결과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미리 보시고 아시고 그래서 미리 정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이러한 아담의 범죄를 미리 보시고 이런 남녀 체제를 그 영계에서부터 설정하신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범죄의 결과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다시 돌아감에 따라 이 남녀 구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정착되어 있게 된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완결된 마당에 이르러서는 그런 성별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 새 창조의 역사가 완료된 시점에 이르면 모든 인간 즉 하나님의 아들들은 남성과 여성의 모든 장점들을 골고루 취한 그야말로 가장 완벽한 이상적인 사람, 그 이상 가는 것이 없는 아름다운 그리고 늠름한 모습으로 일제히 변모할 것이다. 바로 남녀 성별을 나타내지 않는 영물들처럼 완전한 육체로 처음 아담이 창조되었던 바로 그 모습으로 모든 부활의 아들들은 복귀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아담을 남자로 만드셨다면 아담의 육체를 만드신 후 반드시 여자도 그 즉시로 만드셨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에덴낙원에다 아담을 두신 후에야 사람이 홀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도 여자를 창조하시지 않고 에덴낙원의 각종 짐승들을 만드신 것이다. 이들이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천사"들인 것이다. 덧붙여 말해 둘 것은, 애초의 인간 아담도 그렇게 남녀로 구분되었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벗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는 사실이다. 벗은 줄을 몰라도 부끄러워 했다"는 말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창 2:25]. 단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였다" 한 것이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어디까지나 현재의 인간을 기준한 것이다.

나중에 선악과를 먹은 후로는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았다"[3:7]고 했다. 신령한 몸으로서의 광채가 사라졌으니 벗은 줄 알 수밖에 없다. "눈이 밝아져서" 알았다 했는데, 그동안 시력이 좋지 않다가 시력을 되찾아 그래서 밝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영역으로는 눈이 열려졌다, 눈을 떴다는 의미의 "to be opened"이다. 이는 지금까지는 신령한 몸으로서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등 신령한 육체 감관(感官)으로 지내 오다가 자연계의 몸에 속한 눈으로 비로소 보게 되었다는 의미로 알아들으면 너무 비약한 해석일까.

즉 신령한 몸과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의 현격한 경계 또는 구분 또는 그 차이를 묘사한 것이라 보면 타당하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신령한 몸의 눈을 활용했으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눈은 감겨져 있는 즉 활용되지 않는 상태에 있었다고 할까. 왜냐면 아담의 육체는 처음부터 영계[에덴낙원]의 땅을 소재로 하여 창조된 영물들의 육체와는 달리, 자연계에 속한 육체[즉 에덴낙원에 들어오기 전의 육체]와 신령한 육체[낙원에 들어온 이후의 육체]가 양립 또는 병존해 있는 그런 구조상의 특징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는 것이다.

사탄도 바로 그런 의미로 아담 부부를 비하한 것이다. 즉 "너희는 원래 자연계에 속한 하등(下等) 육체였으니 우리처럼 이 영계에서 직접 창조된 상등 육체와는 현격하게 다르다. 그런데도 무엇이 잘났다고 이 영계에 와서 으스대느냐. 너희 본디 터전인 자연계로 도로 돌아가 버려라"는 비아냥대는 내용이었다고 해도 틀림없다. 사탄의 특징이 그런 교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지 않는다"라고 한 것도, "너희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냐.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시건방지게 영생은 무슨 영생이냐. 너희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수명(壽命)만 채우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런 후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정상이다. 너희 수명만 다 채우면 되는 것인데 죽긴 왜 죽어? 안죽는다" 하는 식으로 시종 빈정거리며 여자에게 접근한 것이 역력하다.

물론 그런 속 마음을 얼굴 표면에 드러낼 리는 없다. 사탄의 말대로 하면 진실을 말함이다. 아담 부부가 이중 구조 즉 한 면은 자연계에 속해 있고 다른 한 면은 영계에 속해 있음을 제외하고 자연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 전제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틀림없는 진실 그대로의 사실을 밝혀주는 듯한 아주 진지한 태도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여자도 그런 사탄의 자세에 아무 의심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런 비하하는 투로 나간 것은 워낙 아담 부부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자기네 영물들의 형상과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는 워낙 출중한 모습이었으므로 이ㅔ 대한 질시가 짙게 깔려 있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아벨을 죽인 가인이 사탄에게 속했다고 요한이 말한 대로[요일 3:12] 가인이 아벨을 시기한 나머지 증오하여 그 결과 죽인 것처럼 사탄 또한 아담 부부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아 온 것이야 불문가지다.

그렇다면 아담이 그렇게 자연계에 속한 몸이었다가 영계에 들어온 것은 다른 영물들에 비해 특혜 비슷한 것이었던가? 그래서 사탄과 같은 일부 영물들에게 실족 거리가 되었다는 말인가? 아담이 영계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영계가 아담을 위해 창설된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오히려 그런 남녀 구분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영계와 더불어 자연계 양면에 걸쳐 군림해 있는 존귀의 상징이 되어 있어 영광스러운 징표가 되는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판단은 아닐 것이다.

때문에 성경은 "벌거벗은 것", "벗은 것" 등의 색다른 표현을 등장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오직 그런 생각으로 시기하고 미워한 사탄은 자기 분수를 넘어선 것이다. 실족할 이유가 없다. 무슨 일이든 먼저 하고 나중에 하는 등의 절차와 단계가 있어 그 순서를 따르고 그 과정을 밟게 되어 있음이다. 그리고 그런 다음 모두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든 피조물은 그 '머리'의 '몸'을 이루어 각 '지체'로서의 구실을 하는 것이니, 모두가 '주인'이요 동시에 '종'으로서 한 몸의 이치에서는 우열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고전 12:23].

§ 하나님의 경고


사람이 짬도 없이 죽어 나가는데 어떤 이는 갓나서 죽고 10대에 죽어 나가고 20대, 30대 등 여러 연령층에 걸쳐 사정 없이 죽어 나간다. 그렇게 죽는 인생 그 한 개인의 불행으로만 치부하는 것이 과연 공평공정한 판단일까. 일테면 모든 사람이 10대에 죽는다고 하면 어떨까. 혹은 30을 못넘겨 일제히 죽어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죽는 이들도 자기가 그런 나이에 죽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죽는 것은 아니다. 남들처럼 오래 살 줄 믿고 전혀 그렇게 일찍 죽을 줄은 꿈도 구지 않다가 갑자기 그렇게 죽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죽어 나가는 이들을 통해 인생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는 그와 같이 일제히 갓나서 혹은 10대에 혹은 20대에 죽을 수 있는 인생임을 밝히심이다. 사실상 이런 몇 년 혹은 몇 십 년 간격 정도를 두고 불공평하다고 불평할 정도로 인간 삶이 일반적으로 장구하지 못하다. 지금은 장수하는 이들이 많으나 과거에는 평균 쳐서 30대의 나이에 죽는 것이 일반적이던 때도 있었다 한다. 20 안쪽으로 모든 인생이 죽는다 한다면 사람들이 오늘날처럼 이다지도 죽음 앞에서 태평일까.

비록 7,80을 살더라도 그 세월은 꿈결같이 어제처럼 지나가 버리고 만다. 지내고 나면 예외없이 그러하다. 이런 죽음 앞에서 밤새도록 고민하고 번뇌하며 그 이유를 알고 그 의미를 알고자 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인데도 너무나 사람들이 이 죽음이라는 비극 앞에서 무감각하다. 죽은 후에 어찌 되나 하는 여기에 대해서 각종 미신으로 그 생각들이 가득하여 전혀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근심하는 것이 없다. 마치 죽지 않고 영원히나 사는 것처럼 있다가 홀연히 혹은 무덤덤하게 이 지상으로부터 사라져 버린다.

모든 인류가 그 절반이라도 갓나서 죽어 나간다 해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리라. 즉 죽음에 대해 거의 무반응으로 대응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무신경한 상태는 심각한 병적이라는 상태라는 것이다. 성경이 밝히는 대로 "미친 마음"[전 9:3]이라고 진단해야 제대로 된 인식이라는 것이다. 이 미친 마음들을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다. 눈을 뜨도록[행 26:18] 해야 함이니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단 이 죽음에 대해서만 아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위엄의 기적 앞에서도 심정의 마비 상태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집트에서 탈출하기 전 이집트에서 목도한 갖가지 기적과 홍해가 갈라진 것과 시내산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엄을 보고서도 이방나라들의 그 어느 백성보다 초자연적 기적들을 다 접하고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한 때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모세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경배하는 만행을 벌였던 것이다.

구약시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오셔서 행한 모든 기적 앞에서도 사정은 같았다. 그런 많은 기기적을 직접 대하고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그리스도 친히 이를 이상하게 여기실[to marvel at] 정도였다[막 6:6]. 주님을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 모든 행하신 일과 하신 말씀들을 들었던 12 제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물고기 두 마리 떡 덩이 다섯 개로 남자만 5000명이나 되는 숫자를 먹이시고도 12광주리에 그 찌꺼기를 담은 기적 역시 제자들이 마음에 두지 않고 까맣게 잊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 때 다시 그런 기회가 와서 주님께서 같은 기적을 베푸시려 할 때도 주님께서 같은 기적을 베푸시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 먹일 수 있는가 걱정부터 먼저 한 것이다[요 6:8,9]. 기 막힌 일이다. 인간의 심령이 마비될 수 있는 정도가 이와 같다.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성경이 이런 인생의 마음을 가리켜 "미쳤다"[전 9:3]고 하지 않으리요. 바로 이런 마비 상태에서 범죄하는 것이므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떪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에 "깨어 있으라"[마 24:42/25:13/막 13:37/눅 21:36] 경고하셨으니 이 깨어 있는 일은 우리가 할 몫이지 이를 누가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다. 주님도 대신해 주시지 않고 천사도 이런 일은 대신해 주지 않는다. 내가 깨어 있지 못함으로써 범죄하면 범죄하는 것으로서 그에 대한 상응한 것을 받게 되어 있다. 아담의 깨어 있지 못함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 행위가 되어 마침내 죽음으로 치닫지 않았던가.

영적인 존재 즉 악령들이 이 세상의 신들로 군림해 있어 공중의 각종 권세를 잡은 자로 인간을 둘러싸고 있다고 믿을 때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그야 말할 것도 없이 난리가 날 것이다. 아우성이고 공포에 질리고 이 세상에서의 모든 기대와 희망을 헌신짝처럼 집어 던지고 오직 이 악령들로부터의 자유해방만을 절규할 것이다. 실상 성경은 그런 실상을 밝혀 주고 있다. 그러나 이에 귀 담아 들으려고 아니할 때 그 모든 경고가 무용지물이다.

노아가 장차 임할 하나님의 대홍수의 진노를 알리고 그 자신 직접 그 홍수에 대비하여 방주[arch]를 짓고 있을 때도 노아를 미친 놈이라 하여 놀리고 따돌리고 욕하기만 했지 그 경고에 마음을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악령들의 흔적 또는 자취는 그들이 남긴 발자국 등으로 해서 대낮처럼 밝혀져 있다. 1815년 영국 한 마을에서 발견되어 처음 세상에 알려진 뒤로 세계 각 곳에서 그리고 한국 내 곳곳에서 유사한 것들이 발견되고 있으나 숫제 이에 대해서는 외면과 무시로 일관한다. 보도 매체에 알리려 하나 한 마디로 퇴짜다.

이런 것이 이 세상 실상이다. 진실을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것이다. 알아도 곧 잊어버린다. 그 생각을 털어버린다.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는다. 3운법칙이 발견되어 세상에 발표되어도 그리고 그 진실성이 증명되어도 이에 관심을 두려 하지 않는다. 완전히 악령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가 한번 눈을 감겨놓으면 그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감긴 눈을 열어 진실을 보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 중에 말씀 전달이다. 기도 없이 말씀 전달 자체만으로는 아무 효험이 없는 것이다.

성경을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하는 모든 부질없는 비평의 허구성

성경을 거짓말이라고 하는 오직 유일한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각종 기적이 상식 밖의 것이므로 믿지 못한다는 것인데 이상 사실은 이런 모든 비평이 일종의 인간 망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그런 각종 기적이 거짓말이요 지어낸 속임수이라면 그런 기적을 기록하고 나서 반드시 덧붙이기를 "이런 기적 앞에서 아니 믿는 사람이 없더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정반대가 아닌가. 성경을 사람이 지어낸 것이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을 두고 그런 "거짓 운운"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두고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 내용 자체가 어느 누가 변명해주고 변호해주지 않아도 훌륭하게 그 모든 내용이 진실된 기록임을 확증해 주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 시성이 이토록 마비되었다고 말하기 위해서 성경에 그런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니 왜냐면 성경 곳곳에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을 나타내어 주셨다고 칭송하는 대목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고로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확신하게 되는 이는 그렇게 확신하게 되어 있고[요 20:31] 그런 능력이 나타나도 믿지 않는 이들은 여전히 믿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아무 여과없이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터에 그런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 많은 사람을 믿도록 하기 위해 꾸며대고 지어내고 만들어내고 할 리도 없고 그럴 여지조차 없지 않은가. 믿건 안믿건 상관 없이 사실 그대로만 피력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오히려 그런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으면 어찌 보면 그 기적의 가치와 효율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역시 그런 부정적 의미는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이기에 성경은 오직 일어난 일 그대로를 아무 가감없이 후대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그대들이 믿지 않는 핑계를 삼고 있는 그 모든 기적들은 세상 사람들로 믿도록 하기 위해 수록된 것이 아님을 지금부터라도 바로 직시하는 것이 그대들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비판을 해도 어설프게 알고서 다 아는 것처럼 으스댄다는 비난만큼은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적을 부정하려고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부지런히 찾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하나님이실진대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만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나타내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미 성경만이 가장 과학적인 선언을 하고 있는 터이다. 즉 혈과 육[flesh and blood] 다시 말해 자연법칙에 속한 인간 육체로는 절대로 인간이 영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밝히고 있는 터이다[고전 15:50]. 하나님의 말씀은 과학 아닌 것이 없으니 우리가 우선 알기로도 자연법칙이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말씀이 있으실 까닭이 없다. 육체는 자연법칙의 관장 아래 움직이는데 이런 육체로 처음 인간은 창조되었으나 후에 이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원리원칙 아래 그 지배를 받는 영계의 법칙을 따르는 영적인 것에 속한 영혼을 인간 안에 조성하신 것이다[창 2:7]. 그래서 이 영적 요소로 인해 다시 영계로서의 에덴낙원을 지으시고 거기서 아담[첫 사람]의 육체가 신령한 육체로 변환되게 하심으로써 영생하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이제 우리의 부활 즉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이치도 바로 이 과정과 순리를 따름이니 즉 영생을 완전히 잃어 버린 우리 각자를 아담의 그 애초 창조된 육체로 간주하시고 그래서 그 영혼 없는 육체에 비로소 영적인 영혼을 지으신 것처럼 우리의 새 창조의 경우 나라는 '육체'에다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영원히 오심으로써 그 '육체'에 그 '영혼'이 조성되는 아담과 같은 과정을 따르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는 '나'라는 육체의 영혼 격이시다. 영혼과 육체가 불가분의 하나를 이루고 있음과 같이 그래서 나와 그리스도는 하나로서 불가분인 것이다. 이는 기계적으로 되는 관계[첫 사람 아담의 경우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중 구조처럼]가 아니라 오직 사랑 관계이니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해야 한다는 단서[요건]가 붙는다. 즉 머리와 몸으로 구성된 한 몸 관계이니 몸은 머리를, 머리는 몸을 위함은 우리의 신체 구조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런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사랑하는 이마다 그리스도께 올 것이요 그렇지 않은 이들은 영구히 제외될 것이다. 왜냐면 그런 사람이 이 한 몸 구조에 들어와보아야 암 세포 구실밖에 하는 것이 없이 자기도 망치고 전체를 망칠 것이기에 그러하다. 암적 존재이니 우리 신체 내에서 암 세포가 끼치는 영향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몸의 특징은 모든 것을 함께 함이 있어 몸의 지체 하나라도 고통을 당하면 그 고통은 전체에 골고루 구석구석이 파급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바로 이 한 몸의 이치로써 우리를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니 곧 우리 각자와 하나되심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 죽으심과 더불어 또한 부활하신 것이다. 왜냐면 애초부터의 창조자 하나님과 그 피조물과의 머리와 몸 관계를 형성하실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으로서 하나되는 관계 이상으로 이상적인 삶의 방법은 없다. 머리와 몸의 위계 질서가 분명하면서도 머리도 몸도 진정으로 모두가 자유 평등을 누리기 때문이며 동시에 몸 가운데의 아무리 작은 지체라도 머리와 같이 사랑으로 떠받들어지기에 그러한 것이다.

즉 머리더러 "그가 바로 나 자신이라" 말할 수 있게 되고 몸의 모든 지체 각 개체를 향해서도 "당신은 나 자신이라" 할 수 있으니 왜냐면 모두가 아울러 한 몸 곧 하나가 되어 있는 까닭에 그런 표현이 진실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친히 "나는 섬기는 자로서 너희 중에 있다"[눅 22:27]고 선언하시지 않았던가. 그 증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받으심이니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자신을 영원하신 선물로 주신" 것이다[갈 2:20].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이 그 육체 안에 영계에 속한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그 육체 역시 영계에 속하는 신령한 육체로 변환되는 근거, 뿌리가 된 것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 친히 나의 구원이라는 새 창조에서의 영원한 영혼 역할을 하시게 되니 그래서 그 결과로 나는 이 자연계에 속한 죽음의 육체를 벗어 버리고 애초의 아담처럼 신령한 몸으로 장차 변환되는 것이니 곧 "몸의 구속"[롬 8:23]이다. 구속이라는 말은 원래 상태대로 복구된다는 뜻이다. 왜냐면 현재의 상태는 처음 상태와 달라 비정상적인 것이어서 정상으로 회복됨이다.

다시 말해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상태로 되돌아감이다. 범죄 전의 아담은 신령한 몸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 사람 아담을 대표한다 할 수 있으므로 만약 아담이 자기의 범죄로 죽었다가 그 죽음을 다 치르고 난 다음에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물론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난다면 그 죽음이 진정한 죽음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죄과를 다 벗어나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반드시 이전의 그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도 그러하시니, 아담은 원래 영원히 살고 죽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아담이시면 반드시 죽지 않는 몸이어야 하고 죽지 않는 몸이라는 것은 반드시 신령한 몸이 되어 있어 이 자연법칙에 저촉되지 않는 몸임을 말하는 것이다. 혈과 육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는 어느 인간도 영생할 수 없다 한 성경의 선언에 부합되는 것이다[고전 15:50]. 즉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 받지 못하는"[:50] 것이다. 남녀가 유별하듯이 자연계와 영계는 유별하여 같은 종류가 아인 것이니 3위1체 원래에서 갑과 을의 대칭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할 때 세상 종교의 무턱대고 영생하여 영원히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산다는 주장이 얼마나 조잡하고 허황된 망상이며 황당한 미신이어서 비(非)과학, 반(反)과학적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자연법칙을 무시하는 그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든지 우리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영역이 180도로 달라 갑이 을이 될 수 없고 을이 갑이 될 수 없는 영원한 벽으로 개체화되어 있는 것이나 그러나 갑에서 을이 나왔기 때문에 둘이 하나로 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밝히는 것이 3위1체의 원리다.

§  "믿으라, 천국이 가까웠다"가 아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이니, 그러므로 회개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어 그 법질서대로 살지 않고 각자 자기 마음대로 살아 불법, 불의한 자가 되어 있음을 뉘우침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됨을 스스로 알고 다시는 그 생명의 법을 어기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라는 것이 "회개하라" 함이다. 그리고 "믿으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신 그리스도를 알았으니 그 구원 받는 절차를 따르라는 메시지다.

"회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하여 죄 용서하심을 얻고 난 다음에는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행 2:38]이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 알고 그리고 각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됨을 알고 "어찌 할꼬!"[행 2:37] 하는 이들에게 준 베드로의 지침이므로, 따라서 회개하는 것과 믿는 것은 따로 분리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이고 회개함이 곧 믿는 것이요 믿는 것이 회개함이나, 믿기 전에 반드시 회개가 따름은 명백하다.

빌립보 간수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초주검이 되어 사도들이 어떤 명령을 해도 수행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16:31]. "형제들! 우리가 어찌 할꼬!"[2:37] 한 것이라든가,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했다든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실 때 사울이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22:10] 한 것을 보면, 회개와 믿음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함 곧 순종을 수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세례 요한이나 주님이나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동일한 메시지였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활동 중이셨지만 하나님의 구원이신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행동을 요구할 때는 "믿으라"는 것보다 "회개하라"는 말이 무게가 더 실리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듣기만 하고 그래서 믿는다고는 하지만 행함이 없음을 경고하셔서 모래 위에 지은 집으로 비유 말씀을 하신 것이다[마 7:24-27]. 이 말씀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습니까?" 하고 항변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시게 될 것을 경고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니 더욱 더 그 의미가 명확히 드러난다 할 것이다.

그러면 "천국"의 의미는 무엇이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명도 생활도 없다.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천국을 새삼스럽게 따로 말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증거이고 이는 곧 생명의 나라가 아니라는 의미다. 즉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이 죽음이라는 것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삶이 인간의 정상적인 생활일 수도 없고 생명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런 식으로는 만드시지 않았음을 말함이다.

즉 영생하는 몸 다시 말해 신령한 몸으로 아담이 존재했음을 의미함이다. 영생이란 것은 신령한 몸을 입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령한 몸을 입는다는 것은 신령한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에덴낙원이 바로 그런 세계였는데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거기서 추방되어 오늘날처럼 이 자연계에 예속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연계에 예속된 인간 삶은 죽음 그 자체이지 생명이라 할 수 없다. 어차피 죽을 몸이므로 죽는다는 이름밖에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죽음이 범죄로 인하여 야기된 까닭에 '죽음'과 더불어 '죄'의 세상이다. 또 이 결과가, 사탄에게 속아 그 말을 들음으로써 된 것이므로 현재 이 세상이 마귀의 지배 아래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마귀를 죽음의 권세를 쥐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여 죄에게 종 노릇한다는 사실과도 맞물린다[히 2:15]. 이렇게 죄에 매여 있는 우리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이기도 함을 이 대목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15].

즉 죄에서의 해방이다[계 1:5/롬 6:18,22/8:2/마 1:21]. 죄에서의 해방은 곧 사탄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고 이는 동시에 사탄의 시험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가 된다. 사탄은 자기 장악 아래 있는 자들은 시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시험은 다시 자기 장악 아래 몰아넣기 위함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 얻은 자를 상대로 하는 시험이므로 한번 구원 받으면 결단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다. 시험해도 실효가 없는 것을 사탄이 시험 대상으로 삼을 리 없다.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사탄을 활용하시지도 않는다.

무릇 인격성이 있어 자기 자유 의지를 지닌 피조물은 모두 예외없이 자기 자유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다. 아무리 조물주와 피조물 관계라 해도 인격성을 지닌 피조물은 기계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게 움직이도록 하신다면 처음부터 자연계의 생물들처럼 기계적인 것으로 만드셨을 것이다. 인격성이 있어 자유 의지로 만드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인격적인 피조물[예컨대 사탄]을 부리시지 않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도 구원 받은 많은 사람이 자기 시험을 통해 그 믿음을 스스로 버리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할 줄을 알고 딴에는 자신 만만하게 임하고 있는 것이다. 천년 왕국 마지막 무렵에 사탄이 다시 한번 더 세상 만국을 미혹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고 이미 밝히시고 있으나 사탄은 물론 그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이다.

믿지 않는다는 것보다, 자기 계획이 하나님의 원리원칙으로 일하시는 것을 능히 제지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교만이라 봄이 옳을 것이다. 자기 계획을 더 믿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라서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사탄을 이기는 것은 각자의 자기 부인에 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니 자기 생각, 주장, 견해, 호불호(好不好)를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 말씀만을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중심으로 사탄을 따르지 않는 것이 그를 이기는 것이다.

사탄이 동으로 향하면 나는 서쪽을 향하고 남으로 가면 나는 북으로 가는 것이다. 사탄이 자기중심이므로 나는 철저히 자기 부인으로 일관함이다. 사탄이 이 세상 지배자일진대, 나는 주님 말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하신 대로 이 세상에서의 내 생명을 미워함이다.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경우 사탄에게 절하는 것이어야[눅 4:7] 가능한 까닭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자기 부인은 단순히 사탄을 이기기 위한 방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원한 삶의 법질서를 말함이다. 사랑이 그 생명의 원리원칙인데 자기 부인이 그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지금까지 자기 위주로 살아오고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께 대해서는 오불관언의 태도로 임한 과거 행적과 완전히 결별함이다.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사는 삶을 살기로 결의함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어 주신 의미이기 때문이다[고후 5:15/롬 14:8]. 고로 회개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어 주신 이 구원의 역사(役事)를 토대로 하여 가능해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인생들이 각기 자기 가는 대로 묵인하셨다고 하는 것이 여기 기인한다[행 17:30]. 그러나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셔서 회개하라 하신 것이다. 회개가 가능해졌으니 천하를 심판하시는 것도 가능하게 됨은 물론이다[:31].

그런즉 모든 것은 간명하기가 이를 데 없다. 먼저 우리가 조물주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각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바울이 "나를 사랑하신 것"으로 명확하게 개념 정리를 한 것처럼-갈 2:20],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의 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그리고 그 피조물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뜻을 따라 그리스도를 주(主, 머리)로 삼아 한 몸을 이룬 이웃간의 사랑이 마땅한 줄 알아 그대로 행하고 살며 충성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전부다.

한 몸에 붙은 지체들이니 바로 나 자신이 아니면 무엇인가. "인생아, 주님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주 하나님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to walk with] 것이 아니냐"[미 6:8] 하신 그대로다. 사탄도 아담도 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비극을 맞은 것이다. 주님께서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가리라"[마 7:21] 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를 구원하심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라고 구원하시는 것인데 구원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 붙들고 앉아 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을 때 그 구원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아무 효력이 없음은 자명하다. 바로 그런 것이 말로만 "주님, 주님"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음"[마 25:45]으로써 멸망에 들어가는 충분한 사유가 된다. 사탄은 이와 같이 간결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을 괜히 복잡다단한 것처럼 성경을 억지로 해석해주어 인생들로 하여금 방황하게 만들어온 것이다.

성경을 사탄은 횡설수설하는 책으로 여기도록 만들려고

그래서 무슨 지극히 높고 고상하여 인간이 겨우 알아들을 그런 무엇으로 성경 진리를 꾸며 놓으려고 전력을 다해 왔었다. 육신대로 살아도 구원은 된다는 둥 한번 구원 얻으면 결단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둥 우리의 자유 의지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절대 의지인 택하심으로써 우리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둥 하여 성경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꾸며댔으니 그래서 혼란스러웠을 따름이다. 가장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해놓은 성경을 사탄은 우스꽝스러운 전혀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횡설수설로 만들어 세상에 퍼뜨려 온 것이다.

일체의 행함을 배제하고 단지 특정 사실을 긍정적으로 수긍하여 수용하기만 하면 구원된다고 하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구원 외의 모종(某種) 상급을 얻기 위함이라는 해석으로써 미혹해 온 것이다. 사탄이 이렇게 해놓은 것을 보면 실로 기가 막힐 지경이다. 말 그대로 경이[marvel] 그 자체다. 어쩌면 이다지도 인간이 속아 넘어갈 수 있을까 오히려 감탄할 지경이다. 성경이 처음부터 어렵게 씌어져 있었다면 이렇지를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라도 믿으면 구원 얻고 12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같이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라도[행 4:13]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말씀이시므로 절대로 어렵고 복잡하게 설명하실 까닭이 없다. 그런 말씀인데도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이 이 지경이므로 이런 현상은 사탄의 실존과 활동을 그 무엇보다 웅변으로 증명하는 증거도 되기에 더욱 놀라운 것이다. "육신으로 살면 죽는다"[롬 8:13]고 명백히 경고해도 "육신으로 살아도 구원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고 둘러댄다.

육신대로 사는 것은 자기 부인을 외면하는 것이므로 반(反)성경적이다. 자기 부인 없이도 천국 들어가겠다는 고집이나, 천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만의 세계요[마 7:21] 내가 가고 싶다고 또는 고집한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서도 그런 고집이 엿보인다. 즉 "저희들이 언제 주님을 대접하지 않았습디까?" 또는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지 않았습디까?" 등등의 이유가 만발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 구원을 당당히 믿고 온 것이나 결과는 너무나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구원 자체를 확신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니 또다른 오해를 하지 말 것이다. 이 모든 자기 부인과 죽도록 충성함과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원동력이 다름아닌 바로 구원의 확신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원동력을 제공하시기 위해 우리를 미리 먼저 구원하신 것이다. 일단 구원을 해놓고 그 구원 얻은 능력으로 그렇게 자기 부인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심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 얻은 것'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동일시하시지 않는가[요 20:21].

구원 받은 즉시 우리는 보내심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하여 살든가 내 일을 한다든가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 된다.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과는 영원히 결별이다. 이 영원한 결별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는 구원 받은 상태가 아닌 것이다. 비록 그렇게 보내심을 받은 사실을 자각하여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함을 자기 양식으로 삼다가[요 4:34] 어느 시점에 이르러 다시 과거와 같은 삶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벧후 2:22] 꼴이 된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도로무공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단"이니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 등의 표현이 그런 상태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 스스로는 믿음에 있다고 하면서 그런 자세를 정당시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새로운 무엇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그렇고 그런 종교의 하나라고 인정하면 그뿐이나 그리스도의 교회로 자처하며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런 식으로 나가니 그것을 "이단"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점은 구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다.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한> 연후에 그 결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영생을 "약속"[약 1:12딤후 1:1/요일 2:25]으로도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했다. 왜 인내가 필요하며 무엇 때문에 영생이 약속인지 명백하지 않은가.

끝까지 믿는지 여부를 다루어보는 이 세상이기 때문에 시험하는 자가 건재하여 밤낮으로 시험하는 것이며 여기서 탈락하는 자가 부지기수로 생기는 것이다. 탈락하는 자는 그 스스로 약속을 폐기한 결과다. 회개할 때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겠다는 애초의 약속을 버린 것이다. 능히 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어 약속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어 그리 되는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이 되어 그 상응한 대가를 받음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삼음으로써 나는 충분히 자기 부인이 가능하고 따라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고 말씀 전파에 진력하여 사람 살리기에 힘을 다하고 교회 내에서는 이웃 사랑 곧 형제 사랑에 소홀함이 없도록 힘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업"[롬 14:20]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함에 있다. 그래서 이를 "새 계명"[요 13:34]이라 하셨다.

한 몸을 이룬 각 지체끼리 서로 사랑함이다. 그들이 내 이웃이다.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성경도 알지 못하고 이 한 몸됨의 생명의 구조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내 이웃일 수는 없다. 이웃은 아니나 이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전도요 그들을 위한 쉼 없는 기도 곧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다. 나 역시 그런 한 몸의 체제에서는 분리되어 있어 생명 가운데 있지 못하여 죽은 자였으나 구원의 희소식을 듣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처럼 그들 역시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런 구원의 길이 만인에게 열려 있음에도 주변 사람의 멸망에 대해 무심할 수 있는가[딤전 2:4/벧후 3:9].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우리의 거룩함이다.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않는"[살전 4:3-5] 것이다. 우리 몸이 성령께서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하는 사람이 무슨 음란이 있고 색욕이 있고 자기 탐욕이 있고 욕심이 있는가. 믿음을 따라 시종일관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이루시는 일이 완전무결하시므로 그 피조물들 역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원하신다.

기계적인 존재로 되어 있는 모든 것은 그와 같이 움직인다. 그러나 완전 자유를 주시어 그 자유 의지로써 그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시게 될 때 큰 기쁨이 되시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왜냐면 조물주와 더불어 모든 피조물이 사랑 가운데 한 뜻, 한 마음 즉 하나가 되어 있음을 보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자면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함이다.

그러면 기계는 아니지만 마치 기계로 된 것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장관이 아니겠는가. 그 숫자가 많지만 모두가 그 완전한 자유 의지대로 움직이면서도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일거수일투족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즉 자기중심이 아닌 상대방 위주로 행할 때 그렇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처지를 바꾸어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있다고 해보자. 내가 애써 정성들여 만든 것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데 반하여 그 만든 것들 중의 더러가 내 뜻을 아랑곳 않고 제 멋대로 하여 이웃들을 괴롭히고 고통을 안겨 준다면 내가 아무리 내가 만든 것을 귀엽게 보아 준다 해도 그것을 마냥 흐뭇하게만 여겨 방치해 두겠는가.

그 피조물들이 내 마음을 제대로 알아 주어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가 내 영으로 임하여 있는 자리를 깨끗이 정성들여 받들어 준다면 내 마음은 당연히 그 피조물을 귀하게 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내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내가 만든 그 피조물들 자신을 위함인 것이다. 내가 그들을 위하면 그들 역시 나를 위함으로 나의 이 뜻을 받들어 주는 것으로 나타내 보여야 내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신뢰하고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원리를 따라 그들도 이 원리에 맞추어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내가 그들을 위하듯이 나를 위한다면 이는 내 뜻을 따라 그들 자신을 위하는 것이므로 그들 자신에게 좋은 것임을 그들이 제대로 알아 주기를 내가 얼마나 열망하랴.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피차 사랑하자면 필수 불가결한 것이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기 때문이다.

머리를 위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각 지체를 위해야 그것이 편벽됨이 없이 공정 공평한 위함이 될 수 있음이다. 그래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한다"[요일 5:1] 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끼리끼리 서로 좋아하는 대로 위하게 버려둔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두가 행복해질 수가 없게 된다. 왜냐면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집단이기주의 같은 것이 생긴다. 하나님은 그 만드신 모두를 똑 같이 사랑하시는데 피조물들은 그렇게 전부를 똑 같이 사랑하지 않게 됨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면 이런 쏠림 사랑이 불가능하게 된다. 하나님 사랑하시듯이 사랑하게 되는 까닭이다. 더구나 각 사람 안에 성령께서 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사랑함이니, 이 정도로 이상적인 '한 머리를 모신 한 몸'된 구조도 없다. 모든 이치가 이렇게 간단명료하지만 단지 이 세상에서의 고통 받는 것이 사람에 따라서는 걸림 돌이 될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고하는 것이다.

죽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일시 고통 받고 고난 중에 처해지는 것뿐이다. 하기야 아무리 일시적이라 하지만 그 받는 고통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고통을 견디고 못견디고 하는 것은 고통에 임하는 자의 신념 여하를 가름해 주는 역할을 함은 물론이다. 죽는 한이 있어도 불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지의 그 여부를 판정해 주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경우 그 사랑의 여하를 판가름해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랑의 진실 여부를 만천하에 증명해 보임이다.

그래서 "아들이시라도 그 받으신 바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다"[히 5:8] 하지 않았는가. 이런 의미로 우리의 고난을 해석할 때는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하여 맞아야 할 일이 아닌가. 왜냐면 영원을 두고도 이렇게 우리의 믿음, 사랑, 충성을 다루어 볼 기회가 아주 없는 까닭이다. 왜냐면 이같은 고난을 하나님께서는 두 번 다시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하실 이유도 없는 까닭이다. 오직 이 세상에서의 단 한번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당하는 고통이 아무리 심해도 우리가 감당 못할 시험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철석 같은 믿으이 있는 것이다[고전 10:13].

사탄이 에덴낙원에서 아담을 시험하여 무너뜨리고 죽은 자가 되게 한 것처럼 사탄은 구원 받은 자를 멸망에 빠뜨리기 위해 시험하는 것이다. 구원 받은 자가 아니라면 사탄의 시험이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냐면 구원 받지 못한 이들은 이미 그의 장중에 놀아나고 있어 시험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구원 받은 자로서 멸망하는 수가 없다면 사탄이 시험할 필요가 없으니 그가 아무 소용에도 없는 일을 할 리가 없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시험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하나님도 하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 받은 자도 시험 받아 멸망도 할 수 있게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시는 것이 목적이시다[마 13:49]. 구원은 받았으나 즉 부르심은 받았으나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지"[벧후 1:10] 못한 결과이니 자기중심으로 나간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 중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빌 3:18] 결말인 것이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적다 하셨다.

사탄의 시험은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드러났듯이 자기중심으로 끌고 가기 위함이다. 생명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롬 14:7-9] 자기 부인에 있으니 그 반대인 자기중심은 필연코 멸망이기 때문이다. 시장하다고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위함이다. 생명은 자기를 위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위함에 있으니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복종하여 그 지시대로 따르는 것이 몸으로서 머리를 위함 곧 한 몸의 구조에서 사는 것이다.

다음에는 과연 하나님께서 그 약속대로 하실 것인가 말 것인가 등의 의심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 리가 없다. 상대를 신뢰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기를 위한다는 확신이 없는데 어찌 자기를 위하지 않을 수 있는가. 결국 자기중심으로 나가게 된다. 자기중심은 필멸이다. 세 번째 시험은 세상을 사랑하도록 즉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도록"[요 12:25] 만드는데 있다. 자기주심으로 뭉쳐진 세상이니 자기중심의 화신이라 할 악령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요 왕으로서 지배하고 있으니 어련히 자기중심이겠는가.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지 않으면 반드시 자기 생명을 잃게 된다고 경고하신 것은 이 때문이다. 사탄이 말한 대로 이 세상 부귀영화를 멀리하고서 어찌 살 맛을 누리려 하겠는가. 그리 되면 자연 그런 것은 사탄에게 절하는 것 즉 자기중심으로 나가야 가능한 것이다. 자기중심으로 나가지 않는 한 이 세상에서는 살고자 하는 마음을 접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는 나를 구원하시어 나를 세상에 보내신 뜻을 행할 수 없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룰 수 없음이니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데에 시간을 거의 다 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중심일 뿐 아니라 주면 사람들은 모두가 영원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면서도 이를 외면하고 이 세상에서 남들처럼 잘 살아보기 위해 힘을 기울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안일만을 꾀하는 자기중심 일변도인가. 이런 경우 그 자신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육신"[롬 7:14-8:13] 타령을 하여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거의 모두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다.

이 세상을 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랑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으로써 가능해지는 일이니 그리스도 친히 그 몸이 되어 있는 우리를 통해 친히 연속적으로 일하시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세상 죄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그리스도 친히 이루신 일이나 우리는 그의 몸이므로 머리께서 취하신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어야 함이다.

왜냐면 사람 구원하시는 모습은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모습 곧 죄인으로서의 형벌 받으시는 모습이셨으니 이는 죄인된 우리와 함께 하심 그 고난에 동참하시는 것이므로 우리도 최소한 형태만은 그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동일하신 모습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사람 살리시는 일을 우리를 통해 하기는 것이기에 그렇다. 다른 모습 즉 삶의 낙을 즐기는 모습으로서는 절대로 사람 구원의 사업을 하실 수가 없음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절대로 그런 모습은 아니셨던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세상 살고자 하는 이는 천국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셔 일하실 때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것이다. 이 역시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다. 따라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우리 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고후 6:1].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니 우리도 일하는 것이다. 또 아들께서 일하시는 것은 아버지 친히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런즉 일하는 자로서 어찌 감히 이 세상에서 살고자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자처럼 할 것인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시험에서도 밝혀졌듯이 누구든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이는 사탄의 시험에 단단히 걸려 든 것이요 그 종국은 멸망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이룰"[빌 2:12] 일이다. 내일 일도 기약 못하는 것이 인생인데 아무 것도 알지 못해서 이 한 세상 어찌하든 잘 살고자 허둥대는 세상 사람들처럼 여기서 감히 잘 살기를 바라다니 그것이 절대로 구원 얻는 믿음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에 이와 같은 인생의 죽음의 실상을 깨닫고 그리고 또한 사탄의 지배 아래 이 세상 인생들이 노예로 속박되어 있다는 이 숨 막히는 현실을 반드시 직시해야 함이 필수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하나님의 가르치심", "아버지의 이끄심" 곧 아버지께로부터 배우는 내용인 것이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성령께서 세상을 책망하심"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하여 죽음을 맛보신 그 사랑, 그 죽음의 고난과 고통을 당하신 그 사랑에 공명(共鳴)하는 자가 구원에 이르는 것이니 왜냐면 그렇게 사랑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자가 없는 까닭이다. 다른 무엇을 바라거나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나와 함께 사신다는 그 사실에서 무한한 삶의 만족, 풍만함을 누리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만을 위하지 나를 위하고 나를 위해 살거나 무엇을 할 마음은 전혀 없는 것이므로 자기 부인은 물 흐르듯 하는 흐름으로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자기 부인이 바로 사랑의 핵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더러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연거푸 물으심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하신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고 한 바울의 심령을 우리는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하나님의 특성은 사랑이심과 동시에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의 심판주(審判主)이시라는 데에 있다. 피조물을 만드셨다는 것은 피조물에게 어버이가 되신다는 의미다. 짐승들의 어미가 새끼를 보살피는 것이나 인간의 부모 자식 사랑이 이 하나님의 어버이로서의 역할에서 기인하고 유래한 것이다. 이 어버이로서의 사랑이신 것이다. 그리고 심판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어 그 응분의 조처를 내리는 것을 의미함이다.

홀로 존재할 때에는 법과 질서라는 것이 필요 없으나 단 둘이만 있어도 그 둘 사이의 관계 형성에서 양자간의 합의라는 것이 있어 그 약속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더군다나 먼저 생기고 나중 생긴 차별이 있고 더더군다나 먼저 존재함에서부터 나중 존재함이 이루어져 파생(派生) 하고 파생된 관계라면 부모 자식 사이라는 위계 질서가 있음은 당연하고 선재(先在)하는 자는 자기의 필요에 의하여 자기가 낳은 또는 만들어낸 후재자(後在者)에 대하여 본을 보임으로써 그 '필요'로 했던 바를 둘이 함께 성취하도록 하게 되어 있고 이는 당연하다.

다시 말해 둘이 있음으로써 애초 하나로 존재하던 것보다 풍요와 풍성함을 목적하는 것이다. 여기서 3위1체의 원리가 비롯되는 것이다. 즉 둘이서 하나로 존재하는 풍요로움이다. 단 이 둘이라는 것은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함이 아니고 대칭 꼴로 된 것이니 즉 먼저 존재하던 것을 기본으로 하여 그 닮은꼴이 그 먼저 있던 것으로부터 생성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개체적으로는 둘이나 이전 홀로 있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갑과 을의 대칭성의 원리, 짝의 원리, 양면성의 원리가 만유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고 이 양자 관계는 반드시 인과(因果) 관계여야 한다는 것인 3위1체 원리의 골자다.

이렇게 둘이 하나를 이루어 존재하는 방법 그리함으로써 홀로 존재하던 때보다 풍성함과 풍요로움을 목적하는 것이 모든 삶의 법질서가 되어 있다. 고로 이렇게 하나가 되어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도록 되어 있으므로 이 하나됨을 유지하지 못할 때 죽음이 되는 것인즉 모든 피조물은 이 생명의 법을 지키도록 되어 있고 그렇지 못할 때 그 반대 개념 또는 대칭 개념으로서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생명을 따라 이 '하나'가 되는 방법을 따르고 이를 유지하는 것이 옳고 그렇지 않은 것을 그르며 전자는 따라서 좋은 것이고 후자는 악한 것이다.

이렇게 좋은 것과 나쁜 것, 올바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따져 생명과 죽음으로 판가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스스로 짊어지신 역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심판자'시라 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심과[요일 4:8] 동시에 "소멸하시는 불[a consuming fire]"이시라 하는 것이다[히 12:2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법과 질서다. 여럿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있는 사회로서 법과 질서가 없는 데가 없다. 왜냐면 법질서가 확립되어 있어야 그 사회가 유지 존속되는 까닭이다.

이 세상이 현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성경의 표현이나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분노하신다는 말씀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양면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진실과 거짓은 양립될 수 없는 것이나 진실하도록 창조하신 것이 그 자유 의지로 인해 진실을 버리니 자연적으로 거짓이 존재하게 되었으니 양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진실이 직접 거짓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진실 하나뿐이었는데도 그 진실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생김으로 인해 거짓이 생긴 결과의 원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3위1체의 원리다. 영계가 존재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3위1체의 원리다.

이는 물론 강제성을 띠는 말이기는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것이니 이 법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강제가 되나 그러나 사랑하는 자에게는 자기 스스로 그 법이 좋아서 행하는 터이므로 강제나 간섭일 수가 없다. 또 강제로 해서 될 일이 아니니 이 법과 질서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는 이는 아예 생명에서 제외됨으로 결판이 난다. 고로 생명의 법을 억지로 지키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생명을 누리는 자는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같이 그 생명의 법을 사랑하여 자진자발적으로 자기 스스로 주인 의식으로 지키기 때문이다.

이 생명의 법이라는 것은 별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를 다하고 아들은 아들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생명 그 자체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의 법이라 하는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것이므로 상식과 양식을 따라 양심에 새겨진 대로 행하면 되는 것뿐이다. 아들이니까 아들 노릇을 하는 것이고 아버지니까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둘이 하나가 되는 방법으로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그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데에 있다.

아버지는 이를 아들에게 직접 본을 보여주었고 아들은 이 본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위치다. 생명의 법이니까 거창한 무엇인 듯이 느껴지지만 이와 같이 간단명료하고 간결하고 상식적인 것이다.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이 분기점에 있다. 이렇게 둘이서 갑은 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해 삶으로 인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이므로 이 생명의 법칙을 사랑의 원리 또는 법칙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해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는"[갈 5:13]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 쪽에게 사랑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이 동시에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므로 그래서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이다. 이 뜻은 우리 모든 인간을 자주 독립성을 행사하도록 만드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절대적인 자유를 허용하셨으므로 모든 것은 각자의 행동 여하로 판단되니 스스로 생명과 죽음을 선택하는 위치다. 다시 강조하지만 사랑은 강제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 사랑의 법질서 지키기다. "사람아, 주님께서 선한[좋은]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곧 주 하나님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 올바른 것, 올바른 사람 삶의 도리)를 행하며 인자(仁慈, 한 몸의 이치에서 지체 역할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함께 지체된 이웃을 위해 사는 것)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to walk with] 것이 아니냐?"[미 6:8] 하신 그대로다.

여기서 "함께 행한다"는 것은 둘이 하나되어 있는 삶을 영위함이니 곧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고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으로서 이는 머리와 몸의 관계 바로 그것이다. 머리도 몸도 그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없으니 몸과 머리로는 한 몸으로 통해 있고 존재하는지라 머리 따로 몸 따로로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머리로서의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전적으로 위하심을 다음 말씀으로서 선언하신 것이다. 즉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다"[눅 22:27] 하신 것이다.

그 증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 그리고 위에서 설명한 대로의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되는 생명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 자기 전체를 사랑의 상대에게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전부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다[요 4:10/행 2:38]. 이는 전적으로 주님께서 나를 위해 사시고 나를 위해 일체의 일을 하신다는 의미다. 왜냐면 주님의 삶 자체가 나를 위하심이니 내게 주신 선물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서 피조물과 같이 되시고 그 피조물 인간이 받을 고통을 지신다는 것은 우리 중에 어느 누가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마는 그러나 그것이 실제 상황이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이를 확인하고 믿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니 이렇게 나를 위하시는 줄 아는 다음에야 누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겠으며[고후 5:15/롬 14:7-9] 그렇게 나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으리요.

믿지 않기 때문에 이전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다. 믿어야 구원된다는 뜻이 이것이다. 그냥 특정 사실을 진실로서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믿음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믿고" 그것을 구원 얻는 믿음으로 착각하고 자신을 속여 오고 있다. 불교 교리는 이런 법질서를 말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이런 진실을 바탕으로 말하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막연히 스스로의 수양 또는 수도에 의해 모든 번뇌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는 주장만 한다.

어떤 종교든 그것이 실상(實狀)이든 아니든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때 그 믿음 자체가 마음의 평정과 정신적 안정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을 영원한 생명과 행복과 결부시킬 때 미신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과율로 보아서도 한 분이시고 주님도 한 분이시니 따라서 진리는 하나일 수밖에 없고 여러 갈래로 나타날 리 없다. 또한 피조물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으니 진실한 자가 있으면 거짓을 말하는 속이는 자가 있는 것 역시 인과율에서 하나도 어긋남이 없다. 왜냐면 진실을 따르지 않으면 거짓일 수밖에 없음이다. 이 세상은 거짓을 말하고 속이는 이 세상의 신이 지배하는 곳이므로 생명의 법칙으로 위장하는 것이 당연하나 그 진위를 가리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 생명의 법질서는 사랑에 기초한 것이요 사랑으로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것이다. 불교는 이런 머리와 몸의 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아는 대로의 통상적인 삶의 양상마저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 사회로서 지극히 작은 집단도 엄연한 머리와 몸의 관계로 뭉쳐져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해서 모인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런 상식마저도 무시하는 것이 머리와 몸의 관계를 외면한 채 생명과 자유를 주장하는 모든 것이다.

이러한 사회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이 가정이다. 가정은 가장이 있게 마련이다. 이 가장 의식이 오늘날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이 기계문명이 정신적으로는 황폐화 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기계적인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과는 원래가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비례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현상이다. 그 양상 그대로다. 남녀가 대등하면 가정에서 가장이 둘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서 우열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상호 의존 즉 상보적(相補的)인 것이지 우열 문제와는 전연 무관하다. 남자 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도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생성 순서가 있어 이를 무시하는 것이 그런 질서 파괴인 것이다. 몸이 머리가 될 수 없고 머리가 몸이 될 수 없건만 몸이 머리가 되려는 망상인 것이다. 고로 가장 이상적인 부부 관계는 3위1체 원리에서 몸이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는 그래서 둘이 불가분의 하나로 존재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를 성경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 것이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엡 5:24,25,28] 한 것이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는 것이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29,30] 하였다.

그러므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것 그래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신 요지는 이 하나님의 사랑 곧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됨에서 을을 위한 갑의 역할이 확증되어 있음을 나 위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확인했으니, 나 역시 오직 을로서의 책무를 평안과 기쁨으로 다하여 자기 부인을 철저히 지켜 나감에 있는 것이다. 천국은 그런 생명의 법질서 안에서 영위되는 100 프로 행복의 세계인 것이다. 

때문에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엄중한 경고를 내리면서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고 거듭해서 강조한 것이다. 우리 위해 십자가 죽음으로 나아가시면서도 주님은 "내 평안을 내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요 14:27/15:11/16:33] 하시면서 오히려 제자들을 넘치게 주신 것이다. 생명과 사랑의 기쁨이요 평안이다. 이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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