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일요일

(11)

잡록(雜錄, miscellanea)
---------------------------------------------------------------------------------------------------------------------------


§ 원리원칙대로 일하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천 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오늘날의 내 죄 때문에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되고 그래서 내 죄가 용서되고 내가 구원되느냐 한다. 답은 간단하다. 영원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니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사람이시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따라서 육체로는 하늘에 계시나[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으므로 얼마든지 이런 일이 가능하니 다시 오실 때는 당연히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 성령으로는 현재 우리 인생들 가운데 함께 계시어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는 성령으로 임하여 그와 문자 그대로 하나가 되시는 까닭이다.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가 되니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 부활이 나의 다시 살아남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형체, 형태라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심으로써 비로소 나타나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형상이 있는 것은 피조물이고 조물주께서는 형상이 없으시기 때문에 영이시라 하는 것이다. 형상을 갖춘 피조물은 따라서 시공간의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 영이니 곧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피조물 가운데는 영으로서의 영물(靈物)이 있다. 육체인 우리 인간에 비하면 그들도 "영"[히 1:14]이기는 하나 피조물로서의 영이므로 그 형상, 형체가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영이시라 할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렇게 영이신 하나님[아들]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니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시다. 어떻게 육체를 입으셨느냐 하면 인간 여자의 태를 통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육체를 입으셨고 그리고 한번 그렇게 인간 육체를 입으셨으니 영원히 사람이 되어 계심이다.

이전부터 즉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으로서 단지 여자의 태를 빌려 세상에 태어나신 관계로 그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은 변함이 없으시다. 여전히 하나님으로 계시나 이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으므로 이후로는 영원히 또한 사람으로 계심이다. 이렇게 영원 전부터 계시던 창조자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는데, 남자의 씨를 받아 여자가 잉태하는 것처럼 되실 수 있는가. 당연히 처녀 탄생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일 처녀 탄생이 아니시라면 그럼 그 여자의 남편의 씨로서 단지 사람일 뿐이지 하나님이실 수는 없지 않은가. 처녀 탄생은 기적도 아무 것도 아니고 자연 순리대로 되어진 일일 따름이다. 단지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께서 여자의 태를 통하여 태어나시니까 이제는 영원히 사람이 되어 계신다는 사실만이 그 사랑의 결단만이 우리 눈에 기이한 것이다.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오시고 이제는 그렇게 한 사람으로서 우리 인간들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이 기이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논제로 삼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것을 논하기 앞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그냥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것부터 논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시라면 처녀 탄생 이상이라도 가능하신 일이고 사람이라면 처녀 탄생도 필요 없을 뿐 아니라 구원자도 될 수 없는 일이다. 흔히 말하기를, "덮어놓고 무조건 믿으라" 한다. 이것은 사탄의 소리다.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히 논리적이니 이성적으로 생각 않고는 절대로 믿음에 이를 수 없음을 여기서 선언한다.

처녀 탄생에 관한 것을 말했으니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사실에 대해서도 말해보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으니 당연히 다시 살아나실 것이야 뻔하지 않은가 하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시라고 마음대로 살아나신다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난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허점이 드러난다. 바로 알아야 바른 판단이 나올 수 있는데 지식이 없으니 어찌 올바른 사리 분별이 되겠는가.

무엇을 모르느냐 하면 죽으실 때는 사람으로서 죽으신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으로서는 죽으시고 하나님으로서는 죽으시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도 말이 안되니 이미 우리는 위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영이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인간 육체를 입으신 것이다. 이것이 정확한 예수 그리스도의 개념이다. 따라서 사람이시자 하나님,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그 특이한 본질을 놓고 왈가왈부할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실상 특이한 것도 신비한 것도 없다. 그냥 영이신 하나님의 아들 곧 창조자께서 인간으로서의 육체를 우리처럼 입으셨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과 함께 되신 또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임마누엘'이다. 고로 죽으신 것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서 또는 하나님으로서의 인간으로서 우리 각자 인간처럼 그렇게 죽으신 것이다. 일단 죽으신 것이니 다시 살아나시면 안된다. 그러면 사람이 아니시라는 증명만 되어 버린다.

또 다시 살아나시면 그 죽으심의 의미가 바로 사라져버리는 순간이다. 하나님이라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라고 마음대로 엿가락 주무르듯이 하실 수 없는 것은 이미 만물을 창조하실 때 원리원칙을 정하시고 그 원칙을 따라 지으셨고 또 유지하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하실 것이므로 그 원칙을 무시하시고 마음대로 하신다는 것은 그 기존 질서를 없애시는 결과가 되고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창조하신 모든 법질서가 와해되고 피조물 세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라 하면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무조건 그 마음대로 하시는 줄로 착각할 정도로 너무나 하나님께 대해 무지하다고 앞에서도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라 해서 마음대로 살아나실 수 없고 다시 살아나실 수가 없는데도 살아나신 것은[이 살아나신 것은 죽으신 것과 똑같이 우리 인생 구원의 필수 요건이 되는 것-고전 15:17] 아들께서 아버지와 삼위일체의 원리로 둘이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아들이시라고 살아나실 수도 없는 일이다. 위의 설명처럼 그 죽으심 자체가 무의미, 무효가 됨이다. 오직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심 즉 갑, 을, 병의 관계로써 3위1체로 계시기 때문에 부활하실 수 있었던 것이니 그래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신 것이다. 단순히 아들이시라고 살리심과는 큰 차이가 있다. 아들이시기 때문에 살리신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앞에서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이 3위1체의 원리로 우리 역시 구원될 수 있음이니 곧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로 계신다. 이는 성경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사실 가운데 하나다. 많은 아들이 아니고 외아들[獨子, 獨生子]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둘이시다. 아들이시니까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낳으신 것이다. 즉 창조하신 것이다[골 1:15].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서 자기와 같은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만드시니 곧 아들이시다. 즉 똑같은 하나님이시다. 형상은 단 하나 만으로 족한 것이니 그래서 하나뿐이신 아들이시다.

그 외는 더 필요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고후 4:4]이시다. 이 아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형상 혹은 형체이시니까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아들을 통해서 하시는 것이 됨은 당연하다. 그래서 아들을 "말씀"이시라고도 한다. "말씀"이나 "형상"이나 자기 표현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함이니 표현이 두 가지다.

즉 아들께서 창조하셨다 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 만물을 만드셨다는 것인데 모두 같은 뜻이니 이는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항상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는 표현을 하신 대목이 몇 군데 나온다. 그러나 "한 하나님"[One God]이라는 표현도 많이 사용된다. 우리 말로 정확히 표현하면 "한 분"이 아니라 "하나이신" 하나님이어야 옳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할 때 자식을 낳은 어버이 사랑으로 창조주로서 그 피조물을 사랑하심을 물론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 되어 계시는 구조적인 의미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둘이 하나 됨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사랑의 법칙이 생명의 법질서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 되는 이치를 따라 만물을 지으신 것이니 곧 3위1체 원리다. 다시 말해 만물은 대칭형[성]의 구조로 원인과 결과라는 철칙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둘이 하나 되어 계시는 모습의 재현(再現)이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제조 마크[make mark]라 할 것이다. 둘이 하나라는 것은 맨 처음 존재하던 하나에서 그 대칭형이 되는 다른 하나가 나와[생겨] 이 둘이 합하여 하나 됨을 말한다.

하나에서 둘이 되었으므로 개체적으로는 둘이지만 실질 즉 본질적으로는 하나이므로 그 하나로 존재하던 이전 상태로 복귀하고자 하는 성질 또는 성향이 둘을 하나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 일컬어 '사랑'이라 하는 것이다. 즉 사랑은 원래 하나로 존재하던 이전 상태로 회귀하려는 자연스러운 욕구인 것이다. 남녀 사랑도 여기서 비롯된다. 남자에게서 여자가 생겨났다[창조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원래 아담 하나뿐이었는데 그 육체에서 여자라는 육체가 새로 생겨남으로써 처음 사람은 남자가 되고 나중 사람은 여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둘이 되어 있지만 원래의 하나이던 육체로 되돌아가려는 성질이 남녀 사랑을 만드는 것이요 이를 가리켜 한 몸 됨이라 한다. 따라서 이 세상이 종료되면 본격적인 영원한 세계가 시작되는데 거기에서는 더 이상 인간이 생성되지 않으므로 남녀 구별도 없어지고 애초의 아담처럼 된다. 여자가 생기기 전의 아담은 남녀 성별이 없었던 것이다.

남녀 성별이 사라지니 성욕이나 성애(性愛)란 것도 사라지게 된다. 왜냐면 남녀 사랑이란 것이 이상 말한 그런 이치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인간 증식이 더 필요하지 않은 이상 구태여 남녀 별로 구분되어 있을 필요가 없음이다. 그러면 그 때는 무슨 낙으로 사는가 하는 어리석은 질문도 나올 법하다. 왜 어리석다 하느냐 하면,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특정 구조 아래에서 일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방편일 뿐이므로 그것 하나만이 무슨 대수로운 것일 수가 없는 까닭이다.

남녀 구조는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의 특징으로서 자연계가 아닌 영원한 영계에서는 그 구조와 환경이 완전히 바뀌므로 그러면 그런 세계에서만 통하는 이 자연계보다 더 완벽한 삶의 낙이 존재하고 더 풍성한 것으로 넘치게 된다는 사실은 상식 수준으로 마땅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 내외가 신령한 몸으로 있을 때 그런 영계 나름의 환락이 충만했기 때문에 자연계에서처럼 내외간의 어떤 육체적 욕구조차 일어날 틈이 없었다고 보면 과한 말일까. 둘 다 자신들이 벗은 줄을 알지 못했다 했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당시 상황을 묘사함에서 "벗었다느니" 하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현재 인간이 처해 있는 이 자연계의 삶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 때 기준으로 말하는 것은 최소한 우리에게는 전연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의 복음이 단지 세상 종교라면


세상 어느 종교가 그 교주를 처참하게 죽는 것으로 그것도 불명예스러운 죄인이란 명목으로 죽게 그려놓고-만일 거짓말로 지어낸 것이라면-믿으라고 하겠는가? 절대로 그렇게 할 리가 없다. 다 고상하고 거룩하게 죽도록 꾸며놓을 것이다. 왜냐면 세상 사람은 어떤 징후, 예감 같은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교주가 처참하게 죽는 것으로 그려놓으면 아무리 그 교리에다 그럴 듯한 설명과 이유를 붙여놓더라도 사람들은 외면하고 말 것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두뇌가 그 교리를 만들기 위해 그렇게 죽는 죽음-그렇게 처참한 죄인으로서의 죽음-그것도 옳은 일로서의 순사(殉死)가 아닌 세상의 법정에서 죄인으로 지목 받아 죽게 되는 그런 죽음으로 만들어놓더라도, 교주가 그렇게 죽었으니 그 신도들도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것이란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즉, 누가 그것을 믿을 것이라고 그런 거짓말을 지어내겠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정도로 이야기를 꾸미는 자라면 그 머리는 비상한 천재의 수준을 넘는다.

이런 정도의 거짓말은 사람이 아닌 신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실상 신이라 하면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억지로 굳이 꾸미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면 거짓말은 약자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사탄은 이 세상 신이라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느냐?" 할 것인가. 사탄은 인간들에 대하여서만 상대적인 강자이지 절대 강자는 아니지 않은가. 하나님 앞에서의 피조물인 것이다. 속이는 대상자로서의 인간도 배경에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을 두고 있는 까닭에 사탄은 속일 수는 있어도 강제로 밀어붙이는 일은 엄금되어 있다.

처음 복음이 들어오던 당시 우리 유학자(儒學者) 한 분은 그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것이 창세기의 롯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라고 술회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성경에 무슨 이 따위 이야기를 다 적어놓았어?"라고 하겠지만 그 노학자의 관점은 달랐다. 그의 말대로 하면, "우리 공맹(孔孟)의 도를 가르치는 책 같으면 그 글들이 조금이라도 흠될 만한 것이 있을 때에는 빼고 다듬고 손질해서 모쪼록 좋은 말씀으로만 가득하도록 할 것인데 이 책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이런 인간의 추악한 면까지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해놓고 있으니 이야말로 인간의 의사(意思)가 개입하지 않은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고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무릎을 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얘기가 전한다. 실상 성경을 보면 믿으라고 회유하거나 강압하는 것은 일절 없다. 오히려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라는 식이다. 이는 무관심이 아니라 그 반대이니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고"[딤전 2:4]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벧후 3:9], 스스로 사랑하게 됨으로써 회개하기를 원하시므로 그런 것이다.

회유하고 강제하기커녕 심지어는 믿으려고 해도 믿지 못하는 일이 있어 구원 얻는 자가 적다는 사실을 성경에 이미 선언하고 있다[눅 13:24].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이것은 그 교주를 그렇게 죽게 꾸며놓고-성경이 만일 지어낸 거짓말이라면-종교란 것을 만들어낸 자로서 취할 태도가 절대로 아니다. 그럴 듯하게 교주의 죽음을 미화(美化)했다면 모든 언사(言辭)를 다 동원해서라도 믿도록 하지 결단코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내게로 올 수 없다 하셨고 그래서 아무나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이 말씀을 듣고 이 때까지 구름 같이 따르던 많은 제자가 일제히 물러갔다고 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그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셨겠는가. 세상 종교는 한결같이 지도층들을 포섭하려 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지도층 인사들을 잘 포섭하면 나머지 백성들을 그 종교로 귀의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나가신 것이다. 오직 진리는 "어린 아이들"에게만 나타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마 11:25].

오히려 지혜 있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감추신다고 하셨으니[:25] 예로부터 아무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결코 없는 것이다. 인간 상식과 사고방식에는 초연하게 초월해서,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세로 임하시고, 감히 할 수 없는 말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 단순히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사람이신 동시에 하나님이신 때문이다. 이런 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하는 자체 증명인 것이다.

고통이야말로 인생을 순화시키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말들을 한다. 이런 고난의 죽음 그것도 순수하게 이타적인 자기 희생적인 죽음을 주제로 하는 내용이 진실 그대로 말하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 수준이다. 고난은 인간을 순화한다. 고난 받는 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이 거짓 없음은 우리의 믿음, 사랑, 순종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의 믿음이 과연 진실되냐 아니면 영생 하나만 바라는 욕심으로서 거짓된 것이냐 하는 것을 분별해주는 척도가 된다.

고난을 기피하고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함[딤전 6:10/눅 6:24,25] 즉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요 12:25]함은 영생을 얻으려고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하되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눅 13:24] 하신 말씀에 해당된다. 이 세상은 사는 데가 아니라 일하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목적이 있으니 성령을 받음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의미가 되는 까닭이다[요 20:21,22].

그리스도 친히 세례 받으시고 성령을 받으심으로 아버지의 보내심 받으신 일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되심과 같이 우리가 믿을 때 성령 받음은 아버지의 영과 더불어 아들의 영을 받는 의미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성령]을 받아 아버지의 일에 임하신 바로 그 의미를 우리 안에서 계속 유지하심과 동시에, 우리로서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이니 그리스도의 일에 본격적으로 임하게 됨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되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것이므로 계속 부지런히 주님께 여쭈면서 일일이 그 지시를 받아 일을 해야 합당한 것이다. 그래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함이다. 기도만 아니라 모든 일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것,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이기는 것[:15,16,18] 역시 절대로 빼놓아서는 안되는 ‘일 함’의 원동력이 된다. 성경은 이 기도하는 것을 "힘쓰고 애쓰는" 중에서도 "더욱 힘써야 하는 것"으로, 결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유의할 일이다.

영역으로는 “with all perseverance”다. 악착 같이 매달리고 한사코 떨어지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다. 등산가들이 산 정상에 오르고자 바득바득 기를 쓰고 올라가는 그런 형국이다. “Praying always with all prayer and supplication in the Spirit, and watching thereunto with all perseverance and supplication for all saints”[엡 6:18]. 기도할 때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이니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든[요 14:14]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든[요 15:16]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되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다는 또는 그렇게 하여 순종하리라는 고백으로 하는 것이므로, 만일 그와 같은 마음이 되어 있지 않을 때 받는 기도 응답을 하나님의 능력으로[실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에도] 오인하고 착각하는 수가 있으니 경계를 요한다.

"그리스도의 이름" 자체에 무슨 능력이 있어 응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 내외가 범죄하기 전에는 여자에게 특별한 이름이 없고 오직 "아담"이라는 이름으로 통했던 것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그 이름으로”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말에나 일에나 주님의 이름으로 한다”[골 3:17]는 것도 같은 의미다.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 즉 동식물의 기계적인 삶은 자연법칙을 따라 정해진 즉 ‘살아지는’ 삶을 사는 것이므로 소극적이고 피동적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자유를 향유하는 이성적이고 인격성을 지닌 영적 존재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원리원칙을 따라 ‘스스로 살아가는’ 삶을 사는 것이므로 크게 차이가 있다. 즉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사는 것이니 그런 원리원칙대로 사는 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대가를 만나도 이 원리원칙을 스스로 즐겨 사랑하여 지킨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이 세상에서의 고난 받음은 필수인 것이다. 세상은 그런 원리원칙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아버지]의 일을 하면서 이런 ‘아들’로서의 수업(修業)을 겸행(兼行)함이다. 자연계에 속한 삶과는 정반대다. 지금까지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의 피동적인 삶을 정상적인 삶으로 착각하여 죄와 죽음 가운 데 있었으나 이제는 정상으로 복귀하여 진정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니 의식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야 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곧 “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다[고후 5:15/롬 14:9].

자연계에 속한 삶은 자기중심이 본질이다. 우리는 자기부인이 핵심이다. 자유 의지에 의한 사랑의 삶의 기본 원리가 이 자기 부인이다.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데에 있다. 머리를 위하고 이웃을 위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위해지는[머리와 이웃 각 지체(肢體)에 의하여] 보다 고차원의 즉 모든 것을 포용하여 확대 재생산하는, 내 이웃의 숫자만큼이나 배가(倍加)시켜 누리는 확장된 삶의 낙이니 이것이 자유인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도의 삶의 지혜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이니 이런 것은 모든 "과학적인 것"의 특징이다. 자기중심에 물들여진 인생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밝혀진 모든 합리적인 이치를 따라 판단하면 어린 아이라도 얼마든지 깨칠 수 있는 진리임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구태의연하게 옛 습관에 안주하려는 타성을 버리고 더 나은 미래로 향하려는 과감한 도전을 하는 진취적 기상과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인식 전환의 최소한의 열의만 갖추면 충분히 타결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세상은 실로 가인의 세계다. 사탄의 사주를 받아 의인을 죽이는 미혹된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계다. 따라서 이 세상은 살인마(殺人魔)의 세계다. 살인마가 임금의 자리에 있어 세상을 다스리는 세계이니[고후 4:4], 이 살인마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하신 것이다. 즉 마귀(devil)에다 살인자(murderer)다[요 8:44]. 세상은 인간의 피를 보게 하는 이 살인마적인 행색으로[아벨을 죽인 가인으로써] 그 첫 장이 씌어짐으로 인하여 시작되었으므로, 이는 세상 끝까지 그러할 것임을 예시(豫示)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대로 교회 역사의 시작 그 첫 장(章)도 그렇게 씌어졌다.

피 흘리는 수난의 기록으로 시작된다. 야고보가 죽었고 스데반이 죽었다. 그 외 바울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그도 많은 형제들을 죽음에 넘겨주었으니 많은 성도들이 교회가 시작하자마자 목숨부터 잃었다. 누구든지 이상의 모든 사실을 미리부터 인정하고 직시(直視)한 채 믿음에 들어오도록 되어 있다. 눈 뜬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에 눈 뜬다는 것이요 사탄으로 인하여 눈이 감겼다는 것은 바로 이 사실에 눈이 어둡다는 얘기도 된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는 에덴낙원 당시의 아담부부에게 선악과처럼 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살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당시의 경고 말씀과 똑같다. 당시는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이 극락(極樂) 속에서 살았으나 단지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즉 자기중심의 허영심에 들떠 일을 저질렀다. 사탄이 그렇게 자기중심으로 나가도록 만든 유도에 걸려 "넘어진"[고전 10:12] 것이다.

오늘은 반대로 하나님의 아들이기는 하나 잠시 모든 것이 부족한 죽음의 상태에 처해 있기에, 무조건 살고자 하는 경박(輕薄)함에 빠져 일을 완전히 그르치게 된다. 당시 선악과는 매혹적이었다. 먹음 직하고 봄 직하고 지혜가 있게 함 직하고도 남았다. 오늘의 ‘세상이라는 선악과’ 또한 고난의 죽음에 비하면 그렇게 비쳐진다. 많은 사람이 이 유혹에 끌려 영멸(永滅) 속으로 스스로 들어간다.

영적 존재는 충분히 이지적인 존재이고도 남는다. 이 이지적인 판단만 제대로 활용하면 결코 그것이 매혹적이지를 않는데 미련함과 교만이 뒤섞여 그런 우맹(愚氓)을 저지른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서는 그것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는 심증이 가도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고 곧장 믿음에 들어가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이 믿게 되는 것도 주님의 간단 없는 기도, 곧 이 세상에서 공생애(公生涯)에 들어가시면서부터 십자가에 이르시기까지 계속하여 힘들여 이행하신 그 기도 때문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게 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머지 고난을 우리 육체를 통하여 마저 채우시며 사람 살리시는 똑같은 일을 계속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의, 성령으로 기도함”[엡 6:18/유 1:20]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의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다고 했는데 왜 내가 말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반응이 없고 열매가 없는가 할 때 그 원인은 이 기도를 소홀히 함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同役, co-workers者)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한 부분씩을 갈라 분업(分業)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공동 보조로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대로 따라 행함이다. 주님께서,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보이시고 일러주시는 그대로 행하며 말하고 스스로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다"[요 7:17,18/5:19] 하신 그대로다.

그러면 우리가 따라 하도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본은 무엇인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심"이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일이다. 세상에서 육신으로 계실 때 주님께서 하시던 것과 똑같은 양상이다. 이같이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을 내어 말로나 글로 기타 그 어떤 매체와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 든 아무 효험이 없다.

쇠귀에 경 읽기다. 왜 그러냐 하면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해주시는 역사가 없으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께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쉽고 그럴 듯하게 설명을 해도 그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다"(고전 2:4,5)고 했다.

또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19,20) 했다. 말로써 글로써 전도가 되고 그 열매를 거 둘 수 있다면 바울이 지적한 바와 같이 얼마든지 그럴싸한 어휘와 단어들을 골라 그야말로 명문이 되고 명언이 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아닌 것이다. 사탄이 인간의 마음을 속박하고 있음이 얼마나 철저하였기에 그리스도의 기적 행하심을 보고서도 아무도 믿지 않음을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셨다"[막 6:6]고 했겠는가.

이 철저한 사탄의 속박을 깨뜨리기 위한 선결작업이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거든 기도의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거든 아예 그 어떤 일이든 말이든 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 모두는 기도의 절대적인 필요 불가결성을 깊이 인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기도 없이 하는 것은 모두 바람처럼 헛되이 날아가는 것뿐이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결코 나 자신의 것이 아닌 주님의 시간과 힘과 노력을 그렇게 헛되이 날려 보낸데 대한 심문을 받게 된다.

“무슨 무익한 말이라도”[마 12:36] 그 날에 가서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기도를 하지 아니한 하루, 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내지 아니한 하루는 허송세월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고, 사실인즉 그러하다. 왜냐면 우리의 지상 삶은 주님의 지상 생활과 다름없이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기 위함" 곧 보내심 받아 일하기 위함이므로 그렇다. 우리의 불찰과 과오와 나태와 믿음 없음을 변명으로 스스로 합리화하려거나 정당시하려 하지 말고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마땅하다는 그런 상식 수준의 판단에서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다.

우리가 받은바 사명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전파다. 그런데 이 전파는 말씀만 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안되는 중환자를 두고 말한다면, 말씀은 그 환부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논하는 의학적 지식이고 그 지식을 따라 집도하는 칼(해부도/解剖刀ㅡ메스)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다. 고로 우리의 기도로 인한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마치 환자에게 당장 필요한 수술은 하지 않고 그 수술의 필요성과 방법론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과 꼭 같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 (칼/劒)"[엡 6:17]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전달에 제대로의 효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동참하는 것, 주님의 그 기도와 함께 하는 것이 필수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의 위치로서 주님께서 하시는 꼭 그대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함이다.

§ 이른바 "사회 구원"


이 세상이 진정한 인간 삶이라 착각하는 이들만이 이 세상을 개혁하고 사회를 구원하는 따위의 말을 하게 된다. 소위 사회 정의 구현이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가 이 세상 신[神-고후 4:4]인데 이 세상 신의 실존을 밝히는 성경도 믿지 않으면서 무슨 구원을 감히 입에 올릴 것인가. 그런 것은 이 세상 신의 꼭두각시로 그의 놀음놀이에 장단 맞추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이 불의하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 신 사탄이 이 세상을 완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의 악이 이와 같아 영원한 사람 사는 방법을 따르지 않고 오직 죽고 망하는 것만 따라가는 터이므로 올바르게 정상적으로 사람 사는 도리, 삶의 방법이신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알리고 그 말씀으로 사람들을 잘 양육하는 것 이상으로 달리 이 세상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런 쓸모없는 일에 귀중한 시간을 앗긴단 말인가. 세상에 이 소식을 전하는 데에는 현재의 이 시간도 모자랄 지경이 아닌가.

이 세상 신의 속임수에 말려들지 말고 이 세상 신이 사주하는 거짓된 삶의 분위기에 젖어들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따라 색깔 선명하게 구원의 말씀의 기치를 높이 드는 것 이상으로 이 세상에 할 일이 없다. 살인마 사탄이 자기 세상, 자기 관할이라고 하여 세상 사람들을 편하게 안락하게 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동물적인 욕망 그대로 따르면 잘된다는 식의 그래서 한세상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그런 막연한 사탕발림뿐인데 실은 멸망시키려는 것뿐이기에 살인마라 하는 것이다.

광야 시험 때 주님 앞에서 세상 부귀영화를 보여주면서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인데 내게 절하면 모두 주겠다" 하는 고작 그런 것이다. 사회 구원, 세상 개혁과 같은 망상에 빠질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아는 자는 그 아는 진리를 따라 참된 사람 삶을 삶으로써 그래서 바르게 영원히 사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일을 피상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는 것이다. 핵심을 꿰뚫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하라고 분부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의 삶이다. 우리는 영적인 병을 고치는 의사다. 의사는 현대에서는 “醫師”가 아니라 “醫士”가 더 친근하다. 노동자도 勤勞士라고 불러야 지난 날의 간호원을 간호사라고 불러주는 요즘 세태에 부합하니 '士'자를 두루 활용함이 요즘 "평등, 평등"하는 사조에 적합하지 않으랴. “牧師”라고도 불리지 말고 그냥 “牧者”로 자처해야 옳으니 그래야 “너희 중 아무도 아버지니 선생이니 하는 명칭으로 불리지 말라”는 주님의 경고 말씀에 부합된다.

의사가 사람 살리는 일 외에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의사는 그것만 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듯이 우리는 영적인 치료사[治療士]가 아니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아버지의 창조 작업에 아버지와 함께 일함이다. 전문가가 외곬으로 나가야지 이것저것 관심을 두다보면 누가 그의 전문성을 신뢰하겠는가. 이 세상 삶이 인간에게는 비극 자체라는 사실은 여러 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죽음에 이른 결과가, 오늘날과 같은 말하자면 당시의 아담에 비하면 하루살이 날벌레같은 비극적인 몸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상에 자연법칙을 따라 살려면 이런 왜소한 규모이어야 함은 상식이다. 자연법칙의 지배 아래 있는 현재 우리의 상태는, 자연 법칙에 구애되지 않는 영적인 몸일 때와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 몸을 자유자재로 축소 또는 확장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 또한 신령한 몸의 특성이다. 그렇다고 무한대로 확대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원래의 삶의 터전이었던 에덴낙원은 아담만이 있어보았기 때문에 현재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비참함을 아담은 그 누구보다 실감할 수 있었으리라. 아마 모르기는 하지만 이 지상에 쫓겨난 이후 얼마간은 슬피 울면서 날을 지새웠을 것이다. 왜냐면 죽을 운명임을 실감하는 나날이기 때문이다. 이제 같은 지상으로 내쫓겨도 사탄은 영물이기 때문에 그 고유의 형태를 여전히 유지하는 것이나 인간은 다른 것이다. 아담 곧 인간은 이 자연계의 흙으로 처음 지으심 받은 까닭에 자연계의 몸으로 되돌아 왔고, 그러나 영물들은 그 에덴낙원의 땅[“ground”]을 소재(素材)로 창조된 것이다.

또 하나는 현재 만물이 모두 예외 없이 고통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 정확한 정보를 얻고 있다. 고통도 보통이 아닌 가장 격렬한 고통으로 꼽히는 진통(陳痛) 즉 아이 낳는 산고(産苦)에다 성경은 비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모든 피조물이 함께 신음하며 앓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성경만이 알려주고 있지 처음부터 속이는 자 사탄인데 이런 귀중한 '지식'을 알도록 해 줄 리 만무하다. 이 때문에 거룩한 천사들이든 악령들이든 모두 알고 있는데도 오직 인간만은 모르기 때문에 웃고 즐기고 배 불러하고 부자되면 천하가 자기 것인 양 자기 도취에 빠져 지내고 또 그래서 그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천하를 얻는다 해도 자기 목숨 잃으면 무엇이 유익이냐고 주님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지금은 모두가 일하는 때, 싸우는 때다. 싸우는 때이기에 하늘에서도 전쟁이 일어나고 이 세상 신(神)이 지상(地上)으로 쫓겨 내려오는 꼴도 당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전쟁이 종료된 것은 아니니 천사들은 다니엘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쉴 새 없이 인간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바 하늘에서는 전쟁이 완료되어 사탄의 세력이 일소되었으나 지상은 여전히 충돌이 불가피하다.

세상에서는 여전히 사탄은 인간 세계를 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악령 사탄이 이 인간 세상을 분담해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아담]의 어리석은 범죄 행위 즉 사탄을 추종한 결과가 자초한 재앙이다. 따라서 이 세상이 있는 한 사탄은 합법적으로 이 세상의 주인이다. 첫 사람 아담 스스로 갖다 바친 헌물(獻物)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없어져야 사탄의 이런 불법적인 활동도 종료된다. 그러면 세상에 왜 존속되고 있느냐 하면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을 사람이 남아 있는 한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은 부득볼 그대로 지탱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존속 의미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왜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지 그 이유가 단박에 드러난다. 하나님의 미리 택하심의 의미 또한 밝혀진다. 즉 이와 같이 미리 택하여 두신 사람이 없다면 세상이 오늘까지도 존속해 있을 필요도 없을뿐더러 언제까지든 한도 없이 굴러가야 하는 판이 날 것이 아닌가.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리고 택하여 두셨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세상은 그 추한 몰골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하늘의 전쟁에서 패퇴하여 이 지상으로 추방당한 것이 20세기 초이니 이제 때는 얼마 남지 않은 것이요 따라서 적 그리스도는 곧 출현하게 되어 있으며 그 후 필연적으로 모든 세상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직접 목도하게 되고 그리 되면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된다. “내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하고 싸우는 때에 무슨 살 맛이 있다고 세상을 즐기려 하는가.

세상에서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평화는 평화, 전쟁은 전쟁 그리고 일 하는 것은 일하는 것이고 쉬는 것은 쉬는 것인 줄 알기 때문이다. 혼동해서는 안될 일이다. 하나님 친히 현재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셨고,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므로 그리스도 친히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명시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자라 한 것이다. 안식(安息)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아직도 착각하는 이가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죽으면 안식이다. 말 그대로 “자는”[행 7:60]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곧장 심판의 대상이 되어 멸망의 대기 상태에 들어간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고 하는 것처럼 이 말은 여기서도 통한다. 사람들이 전적인 무지(無知)에 있기 때문에 이렇듯이 태평이다. '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그 죽으심의 일을 마치시고 안식에 들어가셨다[히 4:10,11]. 우리도 우리 일을 마치자마자 죽음을 맞게 되므로 곧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다시 부활로 이어지시는 등 우리 위하신 일이 계속 되어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마지막 구성원이 구원되기까지 머리로서 쉴 새 없이 그 교회를 통해 일하시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쉼 없이 일하는 것이다.

§  복음과 종교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고 그 말씀을 일상생활화하지 않으면 그는 바울이 말한바 "모세의 율법행위"에 의존하 는 이른바 자력(自力) 구원 곧 세상 종교처럼 행위로 구원 얻고자 함이 된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킨다 하셨으니 그 말씀을 지 키지 않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을 말한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주신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으니, 그렇다면 믿는[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모신] 형제를 사랑하고 복음을 땅 끝까지 이르러 전달하는 일이다.

이 일에는 기도가 반드시 수반되고 또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불신자에 대한 선행은 이런 전도 차원에서다. 믿는다고 모두 형제가 아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믿는 자로 자처하는 이들을 사탄은 많이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그 진위 여부를 가리는 방법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느냐의[고후 5:15/롬 14:7-9] 여부로써 드러난다.

곧 자기중심을 버림인 자기중심이 아니니 이는 자기 부인이요 순종은 이 자기 분에서 온다. 머리와 몸 관계에서 머리든 몸이든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서로 상대[머리는 몸 위해, 몸은 머리 위해]를 위해 사는 것인데 몸이 머리를 위하는 것을 가리켜 순종이라 한다. 순종하지 않음으로 아담이 범죄에 이르렀으니 순종하는 자에 한하여[행 5:32/히 5:8] 구원이 임한다. 따라서 아담처럼 되지 않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순종하겠다는 의지 표명 그래서 약속이 회개다[행 2:38].

세례 받지 않으면 죄 용서가 없다. 죄 용서가 없으면 성령을 받을 수 없다. 순종은 사랑이 그 뿌리다. 사랑으로써 역사(役事)하는 믿음이다. 따라서 사랑의 핵심은 자기 부인에 이싸. 아담이 순종하지 않고 사탄이 범죄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 자신을 우리 각자에게 영원한 선물로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사실을[요 3:16]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받으심을 통해 확증된[롬 5:8] 것을 믿는 것이니, 이 믿음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동반하게 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 믿음을 사랑과 순종과 동의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고전 2:9/약 2:5/1:12]. 사랑하면 반드시 순종하게 되어 있음을 밝히신 그대로다[요 14:21,23]. 따라서 사랑 없으면 순종 없고 믿음도 없다. 사랑의 순종 없이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하기만 하는 것을 성경에서 구원 얻는 믿음이라 착각하는 이가 거의 전부다. 말로야 얼마든지 사랑한다 하나 사랑의 증거를 주님께 명백히 설명하신 것이다[요 14:21,23].

이들은 종교인["불교인"처럼 "기독교인"]이지, “내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내 형제[이웃]는 아닌 것이다.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으므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그래서 주님을 위해 살게 되어 있고 무슨 명령이든 수행하게 되어 있는 것이니[고후 5:15] 몸은 머리를 따르는 것이 바로 그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을 사 랑할 수가 없다. 세상 따라 넓은 길, 큰 문으로 가지 않고 좁은 길, 좁은 문을 따라 가기를 “힘씀”[눅 13:24]이다.

사랑은 자기 부인이 기본 토대인데 자기 부인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여"[요 12:25] 따라서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이다. 이 것이 복음의 생활화이다. 즉 머리되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생활화가 아니면 의식화(儀式化)로 흐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의식을 따라서만 행하려 하니[사랑이 없이] 율법 행위로 즉 행함으로 구원 얻으려 함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상 둘은 서로 융화가 되지 않는다.

물과 기름 사이다. 물론 '생활화'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의식은 필수이다. 즉 세례식 그리고 성찬식이다. 그리고 의식을 강조한다고 하여 전혀 하나님의 생명 사업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생활화는 없이 의식(儀式)을 강조할 때 문제는 아주 달라진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 삶의 규범이요 사랑이 문제의 핵심이고 관건이다. 사랑 없이 순종을 강행하려 할 때 그것이 율법 행위로 구원 얻으려 함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이들은 처음부터 순종하려고 들지를 않는다. 그 대신 순종은 인위적인 교리[또는 “교회” 체제]에 대한 순종, 교역자(敎役者)의 지시에 대한 순종으로 바꾸어 놓았다. 자기 식성(食性)에 맞게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자기 마음대로 요리하여 멸망에 이르는 인위적인 교리를 만들어 스스로 종교인이 되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다. 말씀의 순종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그들의 “믿음”은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하는 것’ 즉 지적 동의만을 의미한다] 구원은 받는다는 그런 교리(敎理)다.

이런 것은 모두 본질이 같으니 즉 ‘믿지 않는다’는 데에서 공통이다. 핵심인 사랑이 빠져 있으니 당연한 결론이다. 성경에 구원 받는 자는 항상 소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 사랑 없음을 지적함이다. 이것이 믿을 수도 없고 또 믿지 않는 이유라고 분명히 설명하셨다[요 5:42-44]. 오늘날 이다지도 가짜가 판치고 진짜처럼 행세하는 것이 “괴이함”[막 6:6] 그 자체로서, 성경의 진실성을 증명함이니 즉 이 세상은 악령 사탄이 지배하고 믿는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소수일 수밖에 없다고 미리 경고하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음이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 18:3]이라 미리 경고하심은 바로 이런 사랑을 말씀하심이니 어린 아이의 믿음은 이 사랑이 그 뿌리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사랑 속에서 자라나므로 사랑을 가장 잘 이해하는 연령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 친히 피조물과 사랑의 교제를 위하심이다. 자기중심의 인간이 무엇을 만들어놓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또는 그냥 완상용으로 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본시부터 하나님은 자기중심이 아니시니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 되어 계시므로 아버지께서도 아들께서도 자기를 위하심이 없으시다. 바로 그런 이치에서 피조물을 만드셨으므로 오로지 피조물을 위하심이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 만물을 만드셨다고 한 것은[사 43:7] 하나님은 피조물을 위하시고 피조물은 하나님을 위하게 되어 있는 이치를 밝히심이다. 즉 하나님 친히 자기를 영화롭게 하시지 않고 피조물이 그렇게 하며 피조물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이루시고 보전해 주심이다.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되는 사랑과 생명의 원리를 말씀하심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시어 피조물로부터 보충 받으시려 하겠는가. 피조물로부터 위로를 받으시려 하겠는가. 사람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자기와 같은 인격성을 지닌 것은 만들지 못한다. 제조는 하되 창조는 안된다는 그런 뜻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또 인격적으로 지, 정, 의를 갖춘 존재로 만드실 때는 사랑 안에서의 사귐을 위한 것이다.

모름지기 사랑 안에서의 교제라는 것, 둘이 하나됨이라는 것은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그 어느 편도 자기중심이 아니라 자기 부인임을 뜻한다. 고로 그 모든 말씀들이 이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따라서 단순한 구원을 위함 다시 말해 죽은 자를 산 자가 되게 하여 단지 영생만 하게 하시는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산다는 것부터가 생명과 사랑의 법칙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냥 사니까 살아지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기계적인 생명체인 동식물에만 한한다.

영적 존재는 스스로 살아가는 자유가 부여된 까닭에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사는 것이므로 반드시 원리원칙을 따라 살게 되어 있다. 곧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한다. 구원이란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과의 끊어진 교제를 다시 이어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무릇 교제는 사랑으로 둘이 하나 됨을 가리킴이요 이는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에서 출발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곧 영원히 사는 것으로 통하는 것이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사람답게 즉 애초 인간을 만드신 그 목적에 따라 거기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이는 무엇이냐.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 부인이 그 바탕이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나를 보시고 나는 하나님을 보고 이렇게 둘이 서로 보면서 상대를 위해 살도록 하심이 곧 사랑의 교제의 원리다. 엄마 품속의 아기가 바로 그 그림이 아닌가.

우리 피조물로 치면 서로 상대를 보고 자기가 자기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물론 하나님께는 자기가 자기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 순수하게 우리 피조물을 두고 하는 얘기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못보시는 것처럼 그래서 피조물이 보아드리는 것처럼 되어 있는 그런 위치에 피조물을 위해 당신 스스로 위치해 계시는 것이다. 이로써 이를 근거로 해서 모든 피조물이 이런 동일한 자세로 즉 몸과 머리 관계에서 피차간을 대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심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자유 의지만은 건드리고 간섭하실 수가 없다. 범죄가 이런 이유로 해서 생기는 것이다. 강제적으로 얼마든지 죄를 짓지 않게 하실 수야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교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그 자유 의지가 핵심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영원히 사는 사랑의 법질서, 자기 부인을 터전으로 하는 이 삶의 원리는 영원한 세계인 천국에서만 아니라 당연히 이 세상에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라고 하여 그 법질서가 무시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범죄한 이 세상 신[神-고후 4:4]을 필두로 하여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그 법질서에 반역하여 거역하는 절대 다수가 지배하는 유일한 곳이다. 그런 유일한 곳으로서 영원히 존립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런 양상은 마지막 심판 이후 천국과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분류될 때 후자의 경우다. 거기서는 자기중심이 영원히 남아 있어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는 것뿐이다.

거기서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일방적인 것은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원수다. 이런 상태가 영원히 계속된다. 생명의 낙 가운데 존재하지 않고 죽음의 고통 가운데에서만 존재함이다. 지금 이 세상이 그런 자기중심이면서도 감히 존립하고 있는 것은, 이 자기중심을 회개하고 구원 얻어 자기부인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주심이요 여기에 호응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다려 주심이니 단 하나라도 그런 사람이 있을 때 하나님의 미리 아시고 택하심을 따라 영생에 들어올 수 있도록 그 일이 완료될 때까지만 한해서 이 세상이 유지되고 있는 것뿐이다.

목적이 오직 그것뿐이다. 고로 이 작업만 완료되면 다시 말해 더 다시 구원 받을 사람이 없을 때 이 세상은 지체 없이 종막을 고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강림하시는 때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으므로 사람으로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다 아울러 나타내시는 것은 당연하다. 첫 번째 오실 때는 현재 죽은 자로서의 인간 즉 구원의 필요성이 절실한 상태에서의 육체 곧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모습으로 오심이었다.

그래서 그런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으로 오심으로써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이다. 이것이 그 ‘현재’다. 그러나 그렇게 죽으신 다음 다시 살아나실 때는 범죄로 인한 죽음의 대가를 다 치르신 다음의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모습이시므로 신령한 몸의 부활이셨다. 즉 과거의 인간[아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심이었으니 이는 당연한 것이다. 고로 이제 두 번째 오실 때는 그런 과거와 미래를 겸하신 모습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이와 같은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하시는 것이므로 그 다시 오심은 필연적이고 필수이다. 이렇게 다시 나타나실 때를 기다리는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생명의 법질서를 지켜 그대로 행한다는 것은, 세상의 미움의 대상이 되고 가증스러움이 된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즉 의인은 죄인에게 가증함이 되고 죄인은 의인에게 가증함이 된다고 솔로몬이 말한 그대로다.
전자의 경우 자기편이 아니기 때문에, 후자에서는 그 행위가 옳지 못하여 또 주위에게 해를 끼치게 되니까 가증스러운 것이다. 옳고 그름의 척도는 그것이 전체 '우리'에게 해가 되느냐 이가 되느나 하는 것으로 따져진다. 그래서 몸과 머리의 관계, 몸의 각 지체 상호간의 관계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모두 그렇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을 이루어 그 각 구성원으로서의 모든 피조물인 것이다.

이렇게 한 몸으로 사는 각 지체는 절대적으로 자기 부인이 요구된다. 자기중심은 그 중에서 오직 암적(癌的) 존재로서의 의미뿐이다. 이는 원래부터의 양심상으로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 곧 이기주의를 싫어하고 그 부당성을 이의없이 수용한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러면 자기중심을 버리고 자기 부인을 실천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는 세심한 면은 있어도 자기 눈의 들보 또는 기둥이 박혀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또는 아예 인식하려고도 않는다.

이런 것이 바로 악이요 죄, 불법, 불의이다.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한다”[롬 1:32]는 대목의 뜻이 그러하다. 양심이 있으므로 다 판단은 할 줄 알되 그러나 그 판단대로 하기를 꺼리는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데에는 무자비하나 자기를 판단하는 일에는 무감각이다. 이런 이기주의의 반대가 자기 부인이다.

그런데 이 사랑의 뿌리인 자기 부인은 인간 스스로로는 아무도 할 수 없다. 오직 조물주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시인하지 않는 모든 "사랑"의 논의는 거짓되고 헛된 것이라 하는 것이다. 본질을 빼놓고 형태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 부인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신다는 전제하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니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위하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을 위하는데 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곧 나의 이웃을 위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즉 서로간의 사랑도 우리를 위하시는 조물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그것을 토대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조물주 없이 사랑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구원 하나에만 매달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을 종교라 하고 자력(自力)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장치하신 양심은 사람마다 있어 자기 구원만을 목적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다 안다.

그래서 이웃을 위하고 자기 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변명도 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나를 전적(全的)으로 위하시는 조물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한 순수하게 나를 위하지 않는 것 즉 전적으로 나를 위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은 한마디로 불가능이다. 이것은 우리의 건전한 상식으로 판단해서도 그렇다. 우리는 누구도 상식을 벗어난 행동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정신 이상이 아닌 다음에는 반드시 그렇다.

자력으로 구원되는 것이 가능하고 실제 그런 것이 있어 하는 말은 아니다. 단지 그런 자세로 그런 형식을 취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교리적으로는 아무리 자력 구원이 아니고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해도 이상과 같이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자기의 관심이 오직 자기 구원 즉 자기중심에 있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는 이상, 그렇게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믿음 그 믿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행하는' 비록 조그만 것까지도 그런 모세 율법과 같은 율법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형태가 되어 버린다는 것은 절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구원 받기 위한 나의 공덕이라고 해서 반드시 거대한 규모의 엄청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조그만 양심상의 선행이라도 그것을 자기 구원과 결부시키면 그것이 곧 '구원 받기 위한 행위'다. 성경에서 말하는바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는 결과론적으로 구원을 이룸이 된다는 것이지 처음부터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하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니 그렇기 때문에 "항상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것이다[빌 2:12].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는 말을 하면서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4:4) 한 것이 그 증거다.

순종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결과가 되고 믿지 않으니 구원은 되지 않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 얻기 때문이다. 믿는 것도 자유고 믿지 않는 것도 자유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자유를 결단코 간섭하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자유 의지 때문에 범죄도 성립된다. 그리고 이 자유 의지로 천국에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도 우리의 이 자유는 여전히 유효하고 하나님께서 간섭하실 수 없으므로 우리가 믿어 산 자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다음에도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범죄하게 되고 범죄하면 죽음의 대가가 따른다는 것에는 아무 변동이 없다.

범죄하면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이런 나의 자유 의지로써 범죄에 이르지 말라는 것뿐이다. 그래서 “조심을 하는”[고전 10:12] 것이다. 한번 구원 얻으면 곧장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데에서 각종 오해가 생긴다. 범죄하지 않는 이것이 곧 “구원을 이룸”이다. 범죄하는 것은 불복종, 하나님 뜻에 어긋남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몸과 머리 관계에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

우리가 새 창조로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새 창조에서 당연히 그렇다. 새 창조의 질서다. 첫 창조의 생명의 질서 역시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는 데에 있었다. 거기는 이런 자연계가 아니라 신령한 세계 즉 영계 다시 말해 에덴낙원이었다. 그러나 그 생명의 질서에서는 완전히 벗어났다. 벗어났다고 그 지배를 받지 않아 자유롭게 되었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니 생명에서 벗어났으므로 죽음일 분인데 무엇이 좋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에서 한번 저질러진 것은 쏟아진 물과 같아서 다시 복귀하지 못한다. 새 창조에서의 새 질서다. 그러나 내용은 영원히 변함 없는 생명의 법질서 그대로다. 그래서 이 새로운 창조의 생명의 질서에서 역시 벗어나면 그 때는 영구적으로 끝이다[히 6:6]. 그리고 새 창조에서는 영계가 아니라 자연계다. 환경부터가 달라져 인간으로서는 산 자의 세계가 아니라 죽음이기에 새 창조, 다시 출생함이 필연적인 것이다.

죽은 자에게는 하나님도 없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시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두 살아 있음을 말씀하셨지만[마 22:32], 그리스도 안에서[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근거로] 미리 의롭다 하심을 얻고 산 자가 되어 있었을 따름이다. 따라서 현재 이 세상에서의 인생들은 죽은 자이므로 이제는 그 누구도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없고 그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롬 5:1] 가능하게 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함으로써 하나님을 위하게 되고 때문에 기도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다. 천국 가는 입장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천국 행 열차를 타기 위해 역까지 가서 거기서 차표를 사기 위해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거저 받는 것이 우리 구원이라고 할까. 나는 그 돈을 소유할 수 없는데 누군가가 내게 은혜를 베풀어 그 비용을 모두 대가 없이 건네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역에 가서 차표를 사기 전에 당장 어떤 필요가 있어, 또는 차표도 살 수 있고 여분의 돈도 좀 생길 수 있다는 야바위꾼의 속임수에 놀아나 사기를 당해 돈을 다 탕진해 버렸다 할 때 문제가 생기게 된다.

야바위를 당하지 않았다면 나는 충분히 그 돈으로 열차를 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 열차를 이미 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따놓은 당상'이다. 이 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이 나의 구원 받음이다. 그런데 이 세상 신[神-고후 4:4] 사탄이 여러 가지 소리로 또는 갖가지 꾀로 그 돈을 뺏을 심보로 유혹을 행사한다고 할 때 그래서 그 꾐에 넘어가면 그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물거품이 된다.

그러므로 내게 그 고마운 돈을 준 사람이 미리부터 경고 한바 "이 동네에는 갖가지 악한 자들이 많으므로 조심하고 그 길과 골목을 피하여 이리로 또 저리로 내가 시키는 대로만 가시오" 하고 충고하고 경고해주던 대로 충실히 따르면 즉 "항상 복종하면" 내 스스로 나의 구원을 이룸 즉 천국 열차를 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기계가 아닌 이상 그 열차를 타고 못타고 하는 운명이 내 손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룸이다.

내가 기계적인 존재라면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요 나 역시 두렵고 떪으로써 그렇게 할 아무 이유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나의 자유 의지는 변함없어 그 자유 의지로 믿음에 들어 왔으니[믿으라 할 때는 믿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을 함유하는 것이다] 역시 그 자유 의지로 믿음을 버릴 수도 있다 함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그 런 자유 의지가 부정적으로는 결코 발동되지 못하도록 조처하신다면 그것은 명백히 자유 의지에 대한 간섭 이외의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여기서 혹자는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를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게 지켜 주시니까 일 없다 한다. 일방적인 것은 없다. 쌍방 교류이다. 그래서 사랑이다. 기계적인 것은 일방적인 것이요 거기에는 "사랑"[고전 2:9/약 2:5/1:12]도 "순종"[행 5:32/히 5:8][롬 1:56:16/16:26/요 3:36/히 4:11/벧전 1:2도 강조되지 않는다. 그래서 "구원 얻으려면 믿으라"[행 16:31] 한 것이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주님 곧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로서의 그리스도이시니 나는 그의 종으로서 절대 순종만이 요구되는 관계다.

사랑 안에서 머리는 몸에게 종이요 몸은 머리에게 종이다. 이것이 "믿음"의 의미다. 그냥 호칭만의 "주님"이 아니다. 사탄은 지금까지 그렇게 가르쳤고 그래서 성공했다. 그래서 많은 "믿는" 사람을 멸망에 빠뜨린 것이다. 사랑으로 둘이 하나됨이니 사랑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것[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대로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사랑할 수 없게 되어[눅 16:13] 반드시 그리스도는 없애게 되어 있다. 남편이 딴 여자를 보거나 아내가 외간 남자를 대할 때 이미 마음 떠난 그 남편 아내 관계는 어찌 되는가.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이지, 마음은 똑같다. 그래서 성경[구약]에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음부(淫婦)에다 비유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때 그리스도를 어떻게 없애는가, 성경은 이 사실을 끔찍하게 묘사하여 그리스도를 밟고 십자가에 못박는다 한 것이다[히 6:6/10:26,29].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실제 사실이다. 성경만 아니라 모든 진실과 진리는 절대로 과장된 표현을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을 얻었다 하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계심이 그냥 기계적으로 계셔주시는 것일 수가 없다.

계시록에,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으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갈 것이다" 하신 그대로다. 모실 때는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즉 주님의 모든 뜻과 말씀에 순종하기로 하고[이것이 회개다] 영접해 모심이다. 그래서 주님이시다. 주[主]는 주인, 소유주라는 의미로서 나는 그의 종으로서 그 뜻에 오로지 순종하게 되어 있다. 이는 사랑으로 하나 되는 원리에 따라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해야 둘이 하나되어 함께 있을 수가 있음의 이치이니, 위한다는 것은 섬긴다는 뜻이요 종 노릇이라는 의미다.

사랑에서는 일방적으로 종 노릇하는 법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러하니 이 본을 먼저 주님 친히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신 것이고 향후 영원히 이 주님의 위치는 내게 변함이 없으시다[눅 22:27]. 그리스도께서 그냥 내 안에 계셔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생명의 법칙을 따라 철저한 원리원칙에 근거하여 계심이다. 즉 나는 주님을 위하고 주님은 나를 위하시는데, 따라서 내가 주님을 위하지 않으면 주님도 나를 위하실 수가 없다는 이 원칙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내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나를 부인하시고 내가 주님을 시인해야 주님도 나를 시인하시게 되어 있음이다[딤후 2:12/마 10:32,33/눅 12:8,9].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라면 나를 사랑하여 내 계명을 지켜야 나도 그를 사랑하여 나를 나타내줄 것이다"[요 14:21] 하실 리가 없다. 이는 내가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명백한 뜻이다. 이는 사랑이라는 것이 절대로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다. 주고 받음이다. 그래서 교류, 교제, "사귐'[요일 1:3]이라 하는 것이다.

심판대에서 많은 사람이 “저는 주님을 시인합니다. 주님을 너무나 잘 압니다”[마 7:21/25:45] 하고 울부짖을 때에도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마 7:23] 하실 것이라고 미리 경고하신 것이다. 불법이 무엇인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일체를 말함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고후 5:15]이라고 아주 확실히 못박은 것이다.

바로 이 목적으로 주님께서 죽으신 것이다[롬 14:9一"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따라서 자기 부인이 없는 사람 즉 아직도 여전히 이전처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있고 주님을 위해 살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고 양심적으로 판단되는 사람은 아예 천국 행 열차와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전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 “구원을 이루라”고 바울이 말했으니 바울 자신은 어떠했던가를 살피면 그 말의 진의를 알 수 있는데,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3]고 하였다.

그 형제 즉 골육의 친척 구원 받기를 자기는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단절된다 하여도 바란다고 했고 그런 갈망이 한 때뿐인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치지 않는 고통”으로서 “큰 근심”이라 했고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언하는” 것이라 했고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라”[롬 9:1,2]고 했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반드시 본 받고 닮아야 할 그리스도의 친히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고 절대로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임이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다.

§ 실족하지 않는 자 복이 있다


주님께서 "나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 하시자 많은 제자들이 실족하여 물러가고 다시는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는 데, 같은 맥락으로 세례 요한이 자기가 억울하게 또는 부당하게 옥에 갇혀 있어도 주님께서 무반응으로 대응하시는 것을 보고 마음에 의심이 생겨 사람들을 보내 "정말 그리스도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딴에는 자못 처절한 질문을 해왔다.

그 때 대답하시면서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하시는 말씀을 덧붙이신 것이다. 세례 요한으로 말하면 주님의 분신(分身) 격이다. 그리고 불의한 왕에 대하여 그 불의함을 회개하라고 말했다가 투옥되어 있는 터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서의 주님은 그를 의당히 구출하실 줄로 기대했던 것인데 전혀 그렇게 아니하시자 마음 가운데 의혹이 일어났다. "네가 말하는바 그리스도가 곧 나이다"라는 말씀을 확인시켜 주시는 뜻에서, "너희가 보고 들은 바 그대로를 요한에게 전하되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고 앉은뱅이가 다시 걷고 가난한 자 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하셨다.

그러나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 복이 있다” 하셨으니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경고다. 지금은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통하는 때다[롬 8:22]. 이 “때”로 나타나신 하나님 뜻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다. 고통 중에 “탄식”하는 것은 원 의미대로 하면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陣痛) 중의 신음을 말한다. 그만큼 고통스러운 것이다. 십자가 죽으심을 가리켜 주님 친히 “아이 낳는 수고”[요 16:21]에 비유하심 그대로다. 그리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일에 비하셨다.

그러므로 죽음, 오직 죽음 그리고 고난, 오직 고난을 각오함으로써 이에 충성할 일이다. 죽음의 고난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기 위해 이 세상에 우리가 남아 있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친히 우리 육체를 통해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자기의 일을 수행하심이다. 머리[그리스도]께서 그 몸[교회 곧 우리 다시 말해 우리 각자]을 통하여 일하시는데 누가 이를 마다하리요. 기꺼이 동참하는 자 복이 있다. 동참하지 않을 때는 그 몸에서 분리됨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므로 화와 저주가 있을 뿐이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고 바울이 거침없이 교회 앞에서 선언한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것이다. 그 몸을 헐고 그 피를 흘려 우리에게 그 살을 나누어 주시고 그 피를 분배하여 주시고자 오신 것이니 곧 "고난의 사람"[사 53:3ㅡ"a man of sorrows"]이셨음을 세례 요한은 알아야, 다시 배워야 했었다. 이 고난 즉 “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우리 몸에 채우는 것이다.

이 고난은 우리가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당당히[비록 고난이지만 그 의미가 너무나 막중하기에] 향유하는 이 세상에서의 몫이다. 곧 우리가 날마다 지고 가야 하는 우리 십자가[눅 9:23]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한 것처럼 날마다 자기에게 죽는 생활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이 세상에서는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반면, 사는 것은 죽는 것이다. 주님의 산상보훈에서, 웃는 것은 우는 것이요 우는 것이 웃는 것이다.

부유함을 자랑하는 것은 장차 오는 세계에서 가난하게 되는 지름길이다. 가난한 것이 오는 세계에서 부강하게 되는 발판이다[눅 6:21]. 살고자 하는 이는 죽을 것이요 그와 반대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요 12:25]. 그러나 "나를 먹고 마시는 자는 생명이 있다" 하신 대로 이것이 자기 부인으로서 생명과 사랑의 원리의 기본 토대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은 생명의 가장 기본 되는 동작인데다 그 자체가 생명의 낙인 것이다.

먹고 마시면 눈이 번쩍 띄고 힘이 금방 솟구치는 것처럼 바로 그런 의미가 주님께서 되신다는 의미이다. 고로 최대, 최고, 무비(無比)의 생명의 쾌락, 향락이 되심이다. 그래서 "주님 외에 땅에서 내가 사모할 이 없고 하늘에서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습니까" 하지 않는가[시 73:25]. 그래서 우리의 고난 즉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되어 기쁨으로써”[골 1:11]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고난 받음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 자체가 “먹을 양식”[요 4:34]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명의 도리가 이 세상에서는 죽음으로 비쳐지는 것은 당연하다. 웃어야 할 일은 울음으로 비쳐지고 울어야 할 일인데도 웃음으로 통하고, 실제적인 부유함은 가난한 것으로, 실상은 가난한 것임에도 부유한 것으로 오인되는 것이 이 세상이다. 거꾸로 된 구조이고 가치 전도(顚 倒)의 세상이기에 그렇다.

때문에 “나를 먹고 마셔야 영생을 얻는다”[요 6:57]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제자가 물러간 것이다. 이는 다름아니라 자기 부인을 가르치는 말씀으로서, 주님 친히 그와 같이 하심으로써 우리를 생명 가운데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함으로 인하여 자기 부인이야말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본 법질서임을 나타내신 까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 부인에 그 축(軸)이 있고 세상은 자기중심에 그 축이 있어 서로가 반대되는 까닭이다.

자기부인은 삶의 도리요 생명의 법칙 그 자체이다. 생명의 낙 그 자체이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은 주님 자신께서 이상과 같이 바로 그 생명원(生命源)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의 자기 부인은 주님에게서 그 생명력을 공급 받아 그렇고, 주님의 자기 부인은 아버지에게서 그 원동력을 공급 받으시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것이 둘이 하나 됨이다.

고로 자기 부인은 하나님이 그 배경이 되시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어느 인간도 이룰 수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자기 부인은 바꾸어 말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을 대변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자연 속에서의 물의 흐름과 같다. 물의 흐름이란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 버리는 동작이다. 자꾸만 비우고 또 비워도 그 자리에는 그냥 그대로 물이 차 있는 모습이다. 이는 비우는 즉시 그리고 그 양만큼 계속하여 다시 채워지는 까닭이다.

이를 주님의 말씀에 견주어 보면 우리가 주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신다고 그 살과 피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모습을 유지함이다. 아이가 젖을 빨지 않으면 새 젖이 생성되지를 않음과 같다. 아기는 젖을 빪으로써 계속하여 신선한 젖을 채우는 역할을 겸하여 하는 셈이다.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곧 사람이 되신 조물주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단지 한 예언자로 인정한다. 그리고 “여러 예언자 들 중 마호멧이 그 최종 예언자이므로 마호멧에 유일한 권위를 둔다”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셨다는 것 자체가 ‘창조의 역사(役事)’임을 뜻하는데, 역대 예언자들과 같은 단지 사람으로만 보고 하나님으로는 보지 않으니 성경을 인정한다면서도 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성경의 하나님과 전혀 다르니 유일신을 믿는다고는 하나 인간의 상상(想像) 속의 신일 뿐이다. 자칭 성경[구약]을 배경으로 한다는 ‘유일신 종교’가 거대한 세력이 되어 지금까지 세계를 부분적으로 지배해 왔다는 것은, 역시 성경을 배경으로 하여 천주교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과 맞물려, 성경이 밝히고 있는 대로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의 신(神, 고후 4:4)의 실재(實在)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되어 있다.

같은 구약을 배경으로 하는데도 유대교는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대적으로 더욱 그러한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 사탄은 유대교를 세계화시키는 데에 관심이 없든가 아니면 그렇게 하고자 해도 감히 손댈 수 없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후자의 경우 유대민족이 기원 70년에 온 유대인이 전 세계에 흩어져 세계의 방랑아가 된 이후 오늘날까지 심한 핍박을 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불사조처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워 성경의 역사적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볼 때 그러하다. 즉 사탄이 감히 유대교는 손대지 못한다는 이유가 된다.

전자의 경우 사탄이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여러 모의 엉뚱한 의미로 각색시켜 사람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인정해도 그 구원의 의미를 왜곡시켜 엉뚱한 방향으로 주의를 집중시키도록 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하는 것이 사탄의 유일한 관심사인데,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고로 예외가 되어 활용 가치가 없어 손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 세상과 적대 관계가 됨을 천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주재(主宰)이시지만 실제 인간 세상만은 악령 사탄이 관장하고 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사람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 사람 아담의 위치에 계시기 때문에, 아담의 아내인 여자와 사탄이 원수 관계에 있는 것처럼 교회[마지막 아담의 신부(新婦) 격-계 21:2]와 사탄은 원수이기 때문이다[창 3:15].

따라서 서로 전쟁 상태에 있어 최종 판국에 이르러 교회가 사탄의 머리를 발로 밟기 위해[:15/롬 16:20] 지금은 그 “발꿈치가 물리어 상하게 되는” 단계이므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금은 교회의 수난(受難) 시대로서 절대로 세상 위에 군림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세상에 군림하는 그 어떤 형태든[제아무리 그리스도의 복음을 표방하여도] 그것은 사탄의 모조품이요 가짜로서 세상 종교인 것이다.

이 점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내로라고 기 펴고 살 수 있는 여건이 결단코 아님을 명심할 일이다. 세상이 적지(敵地)인 것이다. 그리스도께 속함으로써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음이다[15:19]. 고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오직 이 세상에서 할 일은 사람들을 건지는 일 즉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달하는 것[행 6:4]과 선한 일을 함이니 이 선한 일도 전도(傳道) 차원에서도 필수인 것이다.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