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5일 화요일

우리는 '나의 주님'을 만나 뵈었는가



성경에 아무리 해박한 지식이 있어도 그래서 모든 것을 알고 모르는 것이 없어도 그 지식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비밀을 알아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도 그것이 영생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 몸을 다 바쳐  남을 위하여 죽기까지 하여도 그것이 단지 선을 행하기 위한 것으로 그치고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면 그 모든 것이 나의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고린도전서 제13장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믿음의 형제를 사랑함이 없으면 하나님 사랑한다는 그 말은 거짓임이 드러납니다(요일 4:20).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또한 자기의 믿음의 형제를 사랑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이마다 하나님께로서 출생한 사람이니 또한 출생하신 이를 사랑하는 사람마다 그 분에게서 출생된 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그 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니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한 이마다 세상(사랑)을 이기게 되는 것으로서 세상을 이기는 것은 다름아니라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요일 4:21-5:4).

단 여기서 사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머리로 모시어 그 분의 종이 되어(나를 위해 죽어주심으로써 나를 상전으로 삼으시고 당신 자신께서 나의 종이 되시어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이로 계시는 것처럼-눅 22:27) 다시는 영원히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의 주인(소유주, 임자)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이름만 믿는 자이고 교회에나 나가고 말만 나는 구원 받았다 하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안다 하셨듯이 반드시 거기 상응하는 열매가 열려야 그가 내 "형제"인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없이 비록 예언을 하고 지식이 있어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어도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어도 그리고 남이 놀라는 선행을 해도 그는 내 형제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받아 모셨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성령의 세례를 받는(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시는) 즉시 성령의 은사는 나타나게 됩니다. 주님만 위해 살겠다는 우리 각자의 약속을 사랑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다시 말하거니와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많은 사람"이라고 했듯이(빌 3:18) 그리고 이스라엘 "광야 교회"(행 7:38)의 큰 무리가 가나안 복된 땅으로 나아갔어도 "그 중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심으로"(고전 10:5) 노중(路中)에 모두 멸망하였다고 엄중 경고한 것처럼 중간에 변절하는 것이 무척 슬픈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생명의 길은 알고 있어 좁은 길이라고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결국은 천국에 입성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눅 13:24)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후에 축복을 상속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히 12:15-17) 한 절절한 경고도 이미 믿는 교회를 상대로 한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스스로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영생하는 자가 되었지만 아담은 그 선물로서 받은 자기 생명을 간수하지 못했습니다. 이 비참한 경우는 영물(천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우리라고 차별 대우를 하실 리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보다 더 관대하게 대하실 수 없고 죄는 죄로 다스리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고전 8:3) 않는 오늘날까지의 많은 사람이 이 경고를 망각하기보다 아예 무시해 버렸습니다. 요한 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한 것입니다(요 14:15,23). "나를 사랑하면 나도 그를 사랑하여 나를 나타낼 것이다"(:21) 약속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순서가 분명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요일 4:19).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면"이라는 조건을 내거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면 나도 그를 사랑할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네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4). 이와 같이 두 손바닥이 동시에 마주쳐야 소리가 분명해집니다. 이 '동시성으로서의 양면성', '양면성으로서의 동시성'을 많은 사람이 무시하고 있습니다. 자연법칙을 무시하고서 자연 만물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법칙을 무시하고서 영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 반성해볼 일입니다.

나는 과연 주님이 약속하시고 나타내어주시는 대로 내 주님을 알고 있는지, 주님은 내게 주님 자신을 나타내어주셨는지. 아직 나타내주시지 않은 때와 나타내어주신 때의 상황이 같을 수 없습니다. 영광 가운데 계신 그대로 나타나심을 대하면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게 됩니다. 사랑의 눈물이요 무한 감동 감격의 눈물입니다. 눈물밖에 표현할 길이 없어 그런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훈계하는 엄마의 사랑 앞에서 터뜨리는 울음과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무디(D. L. Moody)가 그렇게 주님 앞에서 울었고 피니(Charles G. Finney)가 그렇게 울었습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고 요한이 적시한 것처럼 이 사랑이 세상(을) 사랑을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 나와 일대일 관계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개별적인 선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선물이십니다. 어느 인생보다 그 누구보다도 가까우십니다. 모든 인생들은 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모시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을 떠나서 어찌 우리가 가히 생명을 알고 사랑을 안다 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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