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24)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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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이 무엇인가


전체적으로 사람들은 구원을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무슨 입국사증[비자]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첫째, 구원은 구속(救贖)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구속이란 것은 원상태로의 회복이다. 대가를 치르고 해방시킬 때 그 대가를 속전(贖錢)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자유인이었으나 어쩌다 노예가 되어 속박되어 있을 때 그 속박으로부터 방면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는데 그 죽음으로부터 건져 주는 의미다.

그러므로 그렇게 건져 준 상태는 이전 범죄하기 전의 상태로 복귀됨을 뜻한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즉 이전에 자유인으로 있던 즉 죽음에 이르지 않았던 그 당시보다 더 낫거나 격상된 위치가 아니라 그냥 그대로의 상태로 되돌려지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렇게 되돌려진 상태의 아담이 그런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경우 과거 전철을 밟아 다시 또 범죄할 수 있음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만일 재범(再犯)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강제로 조처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은 원상태로 되돌리는 구속이 될 수가 없다. 다른 이름으로 불려져야 마땅하다. 말하자면 아담의 자유 의지 때문에 그렇게 범죄했으니 자유 의지 박탈이라든가 하는 그런 의미로 나타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격성을 지닌 피조물은 그 생명이 자유 의지인데 그럼 자연계의 동식물처럼 기계적 생물체로 퇴화 또는 격하시키지 않고는 될 일이 아니다.

둘째, 우리의 구원을 상징하여 가르치는 것이 이스라엘 광야 교회다. 이집트의 종 살이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개입을 뜻함이므로 각종 기적이 나타났다. 그러나 처음 지녔던 믿음을 이스라엘은 중도에서 버린 것이다. 그 믿음을 버린 결과가 광야에서의 40년 방황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버린 60만 장정들은 모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성경은 이를 해석하여 그들의 불순종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였다[히 3:12/4:1]. 여기서 믿음을 순종으로, 믿음 없음을 불순종으로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으니 중도에서 멸망 당할 일이 없다는 주장은 첫째 이유에서 아담이 그렇게 복구된 다음에는 다시는 범죄할 수 없는 인간 로봇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통할 수가 없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도 않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 받아 구원 얻는 것은 죄를 다시는 짓지 않기 위함이지, 그 후로 또 짓고 또 지어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씻어 주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말은 통할 수가 없다.

죄는 불순종이다. 인간의 의지 작용으로 말미암는 의도적인 하나님께 대한 반역행위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자동적으로 없어진다는 것은 아담 또는 같은 피조물인 사탄과의 형평성을 논한다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우리는 그들보다 더 잘 봐 주신다는 의미이니 이는 하나님의 불공평, 불공정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그렇다면 아담이 범죄한 것은 그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더 나은 조건을 입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아담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셨다는 말밖에 더 되지 않는다. 그러면 그에게 저주를 내리신 것은 일종의 쇼 즉 들러리란 말인가.

하나님께는 그런 거짓된 일이 있으실 수 없다. 그러므로 죄 짓고 불순종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록 구원을 받았다 해도 탈락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구원이란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구원은 구속이다. "구원을 받은 자가 어찌 멸망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은 "산 자로서 창조된 아담인데 어찌 산 자로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죽음에 이를 수가 있느냐?"과 하는 말과 같다.

그러나 현실은 아담은 죽은 것이다. 사탄 등 악령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악령으로 만드시지 않았다. 현재의 거룩한 천사들과 똑같이 창조하셨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들은 장차 영원 멸망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말 그대로의 새 창조이므로 죽은 자가 산 자로 창조된 것이다. 아담과의 차이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산 자로 창조된 경우가 아담이고, 우리는 전에 죽은 자로 존재하다가 산 자로 창조되었다는 그것뿐이다.

아담의 경우 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산 자로 창조되었어도 죽을 짓을 했을 때 어김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의 경우 과거 죽은 자로서, 죽은 자가 된 이유가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충분히 받고 있으면서도, 이전과 같이 자기중심으로 나아가 교만하여 범죄할 때는 다시는 용서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구원 받은 자로서 멸망할 수 있다"는 뜻이 여기에 있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천국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으로서 구원을 착각할 이이 아니라 단지 아담과 같은 창조에 새롭게 들어간 것이 우리 구원인 줄로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새 창조나 처음 창조나 창조의 성격은 같은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창조"가 아닌 다른 말로 표현했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아담의 창조와 똑같고 사탄 등 영물들의 창조와 하나도 다름없는 것이기에 "창조"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처음 창조는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창조물로서의 인간이 특별히 부여하신 자유로 인해 자기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선용하지 못하고 악용하여 범죄함으로써 죽었으나, 우리는 [아담처럼] 스스로 범죄하든 않든 양단간에 결정할 수 있는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덩달아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결과를 낳았으므로, 공평공정의 차원에서 우리에게도 아담과 같은 선악간에 스스로의 운명을 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시는 의미의 창조이기에 "새로운" 창조라 하는 것뿐이다.

아담과 같이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도록 하는 데에는 아담처럼 우리도 산 자가 됨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죽은 상태로는 그런 생사간의 선택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니 이미 죽어 있는 죽은 자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아담이나 영물들과 같은 선택의 기회를 아담과 동등한 수준에서 베풀어주시는 것이 우리의 산 자 됨이니 곧 '구원'의 의미인 것이다. 때문에 성경은 우리 구원을 과거의 일로도 표현하고 현재 진행 중인 것으로도 나타내고 미래의 일로도 나타내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취소하시지 않는데 우리 스스로가 우리 구원을 취소하고 유아무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을 산 자로 만드신 하나님은 아담이 영원히 살도록 하시는 것이 원래의 창조의 뜻이었으나 아담 스스로 이 뜻을 어기고 자신을 죽은 자로 만들어버렸으니 하나님도 아담에게 처음부터 완전한 자유를 주신 이상 아담의 죽음에 일절 관여하실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도 구원 받아 산 자가 되고 영원히 살게 되어 있으나, 이 세상에 있는 중 어느 때라도 아담처럼 범죄할 경우 가차없는 죽음[이제는 악령들처럼 멸망에 해당]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work out your own salvation"]는 것이 성경의 준엄한 경고이다[빌 2:12]. 구원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 경고를 엉뚱한 뜻으로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 것의 핵심은 사랑에 있다. 다시 말해 "처음 사랑이 식어지는"[계 2:4] 것을 경고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잘못된 사람의 교훈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 자신 스스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따르는 경우 어느 시대에서나 넉넉히 구원되어 천국에 들어가기에 아무 하자가 없었다는 사실에 유념할 일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이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다"[고전 8:1-3] 함과 같다. 우리 구원의 의미가 죄 짓지 않는데 있다고 해서 혹 부지중에[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짓는 경우가 아닌 모르고서 지을 때] 지은 죄까지 용서가 안되고 그리스도의 피가 효력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요일 1:9].

요한이 그 서신에서 말하는 죄는 형제 사랑이 없음을 가리킨 것임에 주목할 일이다. 우리는 형제 사랑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 이를 지적한 것이다. 명백히 죄, 사망에 이르는 것임을 밝힘이니 곧 형제 사랑이 문제의 핵심이요 요한의 편지의 주제(主題)였던 것이다. 그것이 죄가 되고 죽음에 이를 수 있다 함은 형제 사랑은 하나님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까닭이다[4:20]. 그리고 하나님 사랑은 바로 형제 사랑을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사랑을 친히 받으시려고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실 리 없다.

피조물이 없어도 홀로 계셨고 얼마든지 홀로 계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외로움을 느끼실 리도 없다. 피조물은 다시 말해 당신 자신과 같은 의미일 뿐이기에 그러하시다. 오직 피조물끼리의 사랑을 위하심이다. 그래서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이 강조된다. 죄 짓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골 3:17] 하나님을 대리하여 피차간 대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보내심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영원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내심 받음'이 우리 삶의 속성이고 특징인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자기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고전 10:31] 자 즉 보내신 이를 위하는 것으로 삶의 본분을 삼는 자는 그 속에 불의가 없다. 다시 말해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없고[고후 5:15] 오직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요 20:21/4:34] 것으로써 삶의 낙을 삼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는 일체의 추악함, 야비함, 불결한 것이 없이 오직 거룩할 따름이다.

이와 같이 죄를 안짓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산 자로서 구원을 받았으므로 영원한 삶의 기본 질서를 따름에 있음이다. 이 생명의 질서대로 아니했기 때문에 아담이 범죄하고 오늘날 우리가 이 지경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생명의 질서를 지키지 않을 때 우리 역시 아담처럼 죽음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지 않은가. 그래서 성경은 죄를 짓지 말라고 거듭해서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요일 2:1,29/3:6-10/5:18/고전 15:33,34/벧전 4:1/히 2:14,15/요일 2:29/요삼 1:11/롬 2:7,10].

우리가 죄를 지을 경우 아담이 죽음에 이를 순간 즉 범죄에 이르러도 하나님께서 그냥 보고만 계신 것처럼, 우리의 범죄 행위 역시 하나님께서 일절 간섭하시거나 통제하시거나 강압적으로 제재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할 일이다. 이는 우리에 대한 무관심 또는 사랑이 없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시고 싶어도 하실 수가 없는 까닭이다. 이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두렵고 떨게 만드는 데에 충분한 것이다.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는 능력은 우리가 복종할 때에 한해서만 이루어지는 은혜다.

"우리가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라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지 어찌 은혜가 될 것이냐" 하려는가. 그런 질문은 '행위로 얻으려는 구원', '은혜로 얻는 구원'부터 잘못 이해하여 엉뚱하게 해석한 결과다. 행위로 구원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성경의 뜻은 그것은 죽은 자가 산 자 되지는 않고 죽은 자로 있는 채 무엇이든 의를 행하고자 하니 죽은 자의 일은 죽음의 결과밖에 낳는 것이 없고 그것이 생명이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죽은 자의 위치이기 때문에 그가 행하는 모든 의와 선은 부득불 자기 구원이 목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가 자기 구원을 위함으로써 자기 일을 구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되니 그 자체가 이미 완연한 허물이요 죄인데 그래서 그럴수록 더 죄만 짓는 꼴이 되니 구원이 될 리가 없다. 이상 두 가지 사실만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닌 자기의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 줄 알 수 있다.

반면에 왜 은혜로 즉 믿음으로써만 구원 얻는 것이 되어야 하는가 하면, 위의 설명 그대로 내가 현재 죽은 자가 되어 있으니 가장 먼저 산 자부터 되어야 하는데 죽은 자로서의 내가 스스로 산 자가 될 수 없음이다. 그리고 내가 구원 얻기 위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하는 자기중심에 그칠 따름이므로 아무 의미도 있을 수가 없다. 고로 산 자가 되는 일만큼은 하나님 친히 하실 몫이다.


내 스스로로 보아서는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그 죽음의 쓰라린 고통을 맛보시면서까지 수고를 하심으로써 이룩한 공로로 인해 내가 구원 받았으니 즉 나로서는 그런 큰 일을 바라고 아무 대가도 치르는 것 없어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구원을 받으니 은혜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처음부터 은혜로써 시작된 우리의 구원인즉 시종일관 이 은혜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리가 없다. 뿌리가 은혜이니 그 뿌리를 통하여 자라난 둥치, 가지, 잎, 꽃, 열매 등이 모두 뿌리와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히 은혜 일색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 사랑이 없는 것을 죄로 인정해야 마땅함을 요한은 그 편지에서 역설하여 가르친 것이고, 그렇게 죄로 인정한 다음에는 그 죄는 주님의 보혈로 온전히 씻음을 받아야 하고 또 그렇게 씻겨질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요한의 논조로 하면 믿는 사람이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고 죄를 지으면 또 얼마든지 용서될 수 있다는 인상을 줄까 하여 미리 경고해 둘 필요가 있어 요한이 동시에 가르친 것은 "믿는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요일 2:1,29/3:6-10/5:18].

그러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요한의 경우, 형제 사랑이 없음을 지적함으로써] 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조화되느냐 하면, "죄로서 인정해야 한다"[요일 1:7-9]고 강조한 점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게 된다. 즉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행하는"[:6]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이 죄인 줄 모르고 죄를 지을 때 그것을 '죄로서 인정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6,7] 한 것이다.

죄라고 인정해야 주님의 피가 우리를 정결하게 하신다는 것은, 그것이 죄라고 비로소 알고 주님의 피로 죄 용서를 받은 이후에는 결코 두 번 다시 같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강력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처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것이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했고 그를 알지도 못한다"[요일 3:6]는 뜻이다. 이 말은 또 무엇이냐 하면 무릇 죄라고 아는 것은 절대로 다시 말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짓지 않아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죄인 줄 알고도 짓게 되면 일부러 짓는 고범죄(故犯罪)가 됨이니 성경은 이를 "짐짓 죄를 범하는"[히 10:26] 것으로 표현한다. 이 경우 다시 속죄하는 제물이 없고 심판뿐이다[:27]. 이는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6:6] 것이 되고 발 아래 짓밟는[10:29] 무서운 결과가 된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 즉 나의 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 죄를 짓는 것을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던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 때는 말 그대로 천지를 분간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는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죄를 짓는 것은 자살하는 것과 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 사실이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십계명에 나오는 것과 같은 살인, 간음 등 이러저러하게 조목별로 나열할 수 있는 것만 죄인 줄 알지, 형제를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냥 보통 일로 간과하기 쉬운데 바로 이런 점을 요한은 그 편지를 통해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도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 선언하시고, 그 날 심판대에 이르러 버려짐을 당할 것을 비유로써 경고하시지 않았는가. 인간의 범죄행위는 사람에 따라 그 특징이 있는 듯이 보인다. 어떤 사람은 이렇다 하게 남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 없이 오직 주색 잡기 등 방탕 생활에서 그 특징이 드러난다. 어떤 삶은 돈을 사랑함에서 그 특징이 나타난다. 또 어떤 이는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등의 살인적 행동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방금 지적한 부류와는 달리 도덕적인 생활을 좋아하여 그 인품이 고상한 듯이 보이기도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겉모양으로만 판단하여 죄의 경중이 있다 하고 또 도덕적인 사람은 죄가 전혀 없는 말하자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 하기도 하나, 그런 것은 사람의 관점일 뿐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다. 그 판단 기준은 다른데 있지 않다. 첫째 하나님을 인지하지 않는 것, 둘째는 따라서 자기를 위주하고 자기 본위이고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 자기중심에서 모든 죄의 갈래가 나오게 된다. 때문에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고상하게 보이고 도덕군자라 하더라도 속으로는 자기 중심이다. 하나님을 인지하지 않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증명이 되어 있다. 그래서 타고 나는 체질과 환경과 본성 같은 것이 달라서 그렇지 만일 똑같게 나타나도록 되어진다면 한결같이 똑같은 양상의 죄를 범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대로, 만인 중에 의인은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근본은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조물주 하나님을 인지하여 그를 사랑하고 위하고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스스로 교만해져 하나님 없이도 능히 살 수 있고 자주 독립할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즉 교만이다. 이 교만에서 모든 죄가 파생된다. 따라서 아무리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고결하고 도덕 군자로 보이더라도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그 교만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체질과 환경 등만 바꾸고 똑같이 한다면 그 역시 얼마든지 살인자가 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가 되고도 남고 사람 행실을 제대로 못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은 머리와 몸으로 그 역할을 분담하는 한 몸 체제에 있고 이 생명에서 벗어나는 모든 행위가 죄다. 한 몸 구조에서는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게 되어 있다. 결단코 자기가 자신을 위하여 사는 틀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무릇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 모두가 죄다.

셋째, 구원은 우리를 자기의 피 값으로 사시는 것[행 20:28] 즉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심이다. 하나님께도 피가 있고 육체가 있느냐 하겠지만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어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다는 것은 자기의 뜻대로 행하고 따르고 순종하는 자를 원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무엇을 만드시든지 그리고 우리 피조물 인간 가운데 누구든 그 무엇을 제작하든지 그 만든 것은 만든 자의 소유이다.

고로 이런 애당초의 창조 또는 제작의 목적대로 순응하지 못할 때 그것은 그것을 만든 이의 마음에 만족을 줄 수가 없고 따라서 그것을 버리게 되는 마당에서는 더 다시는 그 소유가 아니다. 제작자와는 완전히 남남이 된다. 버림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이실진대 생명 아닌 죽음만이 그 몫이다. 하나님은 그 피조물을 머리와 몸으로 구성된 한 몸 체제로서 만드신 것이다. 머리는 물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만유를 지으시든 사람이 무엇을 제작하든 작품을 창작하든 그것에 대한 애착은 보통이 아니다. 왜냐면 자기의 힘과 노력과 정성이 다 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직접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작 또는 제작할 당시의 분명히 기획과 의도가 있다. 따라서 그 의도대로 움직여 주고 작품이 되어져야지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 만든 의미가 없어져 결국은 그것을 아낌없이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애착은 조건부다. 덮어놓고 무작정 애착을 쏟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제품을 아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도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사람을 지성껏 사랑하셔서 지으심은 첫 창조에서나 새 창조에서나 한결 같으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그 사랑은 그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잘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가 새로 창조하심을 입어 구원이 되었다면, 그 사랑의 뜻을 따라 그 말씀을 순종하여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 왜냐면 모든 사람에게 대한 사랑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똑 같이 극진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도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은 다름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집약된다. "새 계명"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심과 같다. 복음 전도도 이웃 사랑이요 형제 사랑도 이웃 사랑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믿음의 형제는 한 몸으로서의 사랑이니 하나님을 공동의 머리로 받듦이라 내 자신처럼 사랑하되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은 이 한 몸에 들지 않은 상태이므로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아낌 없이 바치셨으니 그 사랑을 닮아 나 자신 아낌없이 내놓아 그들로 하여금 구원 얻도록 함이다. 형제 사랑도 그렇게 최종적으로 구원을 이루어[빌 2:12] 천국 가도록 최선을 다해 줌에 있지만, 그리스도라는 한 머리를 모신 한 몸을 구성하고 있으므로 더 적극적으로 임하여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함"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않아 순종하지 않을 때 어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겠는가.

넷째, 사탄은 구원 받지 않은 자를 시험하는 법이 없다. 사탄은 세상 사람들을 시험하는 자가 아니다. 그들 위에는 거의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여 그들을 좌지우지하므로 그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 있는 까닭이다. 오직 구원 받아 자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는 자들 곧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상대하여 시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험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들로 하여금 믿음에서 벗어나게 하여 멸망하도록 하려 함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그들을 시험할 까닭이 없다. 구약 시대에서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었으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데에서 모든 것이 비롯되므로 아무쪼록 믿지 않도록 그리고 순종하지 않도록 함에 있는 것은 물론이다. 바로 욥이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의 그림자에 속한 일이었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자기를 부인하는지의 여부가 정작 관건이다.

왜냐면 모든 사람은 제각기 그리스도와의 하나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 까닭이다. 처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러했다. 즉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으로서의 생명 체제였다. 그러나 범죄로 인해 그 처음 체제가 와해된 것이다. 따라서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해서는 하나님 친히 인간들처럼 한 인간이 되셔야 했고 그들의 죽음에 동참하심으로써 다시 살아나야 하심이 필수 필연이었다. 그래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을 갑을 위함에서 병으로 하나로 조화 통일되는 새 창조의 삶을 살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던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는 자에 한하여 베푸시는 구원이다. 바로 그 때문에 누구든지 믿어야만 구원이니 믿지 않으면 구원이 되지 않는 제일 첫째 가는 이유다. 하나님이 믿게 하셔서 인간이 믿게 된다는 주장은 인간이 만든 교리로서 사이비 교리다. 믿게 한다면 모든 인류를 다 믿게 하시지 왜 차별하시는 불공평불공정한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겠는가. 그런 주장은 하나님을 실제로 모독하는 사탄의 교리인 것이다.

따라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말로 바꾸면 아담처럼 또는 사탄 등 악령들처럼 처음부터 불복종의 길을 선택한 결과이다. 이에 반하여 거룩한 천사들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뜻에 스스로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사랑한 이들이다. 선이냐 악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이들 천사들[또는 영물들]은 이미 자기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결과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우리 인간들의 차례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아담처럼 불복종하려는 이들은 처음부터 믿지 않게 된다. 그래서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즉시 사탄에게 속해져서[고후 4:4] 그의 장중(掌中)에 놓여져 있게 된다. 스스로 선택한 결과다. 우리는 이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알게 된다. 즉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게 하려 하심이다[롬 14:7-9/고후 5:15]. 몸의 각 지체로서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생명의 올바른 도리요 질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들어와도 도중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되돌아가 이탈할 때에는 처음부터 믿지 않는 자와 같은 운명에 들어갈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성경에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의 의미가 여기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런 경고와 더불어 성경의 기타 모든 삼엄한 경계 경고들이 있는 것이다. 생명의 위로의 말씀 못지 않게 죽음에 대한 경고가 만만치 않게 무성하게 성경에 뿌리 내려 있음이 그 때문이다. 고로 처음부터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어 불복종을 선호하기 때문이요, 믿다가도 중간에 들어 역시 "처음 사랑을 버리고"[계 2:4] 자기중심으로 나갈 때 회개하지 않는 경우 가차없이 멸망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도 복종하지 않은 결과임을, 교회의 그림자인 이스라엘 "광야교회"[행 7:38]를 통해 하나님은 벌써 명백하게 경고하시고 있는 것이다[고전 10:1-12].

그래서 우리의 현재 구원을 천국에 들어가는 입국사증쯤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뜻이 여기에 있다. 얼마든지 우리 손으로 그 입국사증을 버릴 수가 있고 또한 그것이 취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이 그런 면에서, 종착역이 아니라 시발역(始發驛)인 것이다. 얼마든지 중도 하차할 수가 있는 터이다. 앞서의 설명대로 우리를 당장 산 자로만 만들어[창조해] 주시는 것으로서 일단 종료되는 것이 우리 '구원'이다. 나머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우리 스스로 이룸"[빌 2:12]이다. 이는 세상 종교에서 개인의 노력과 경건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격차가 있다. 그들은 죽은 자로서 죽은 자의 부질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 이제는 산 자가 되었으므로 더 다시 스스로 죽은 자가 되지 않도록 하는 당연한 반응이다. 과거 죽은 자가 되었다가 산 자가 되었으니 과거처럼 다시 죽은 자가 되지 않기 위해 산 자로서의 본분을 다함은 당연하다. 이전에는 죽은 자였으므로 이런 산 자로서의 일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산 자로서의 본분은 무엇인가. 머리와 몸 체제로 다시 돌아왔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떠한 시험과 역경에서라도 머리의 지시를 따르도록 하는 것이지 아담처럼 또는 사탄 등 악령들처럼 곁길로 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여하한 경우에도 곁길로 들어서지 않은 좋은 본보기다. 이미 우리 앞에서는 이와 같은 선과 악의 선례(先例)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보기가 없이 처음부터 스스로 알아서 자기 운명을 결정하게 되어 있었던 영물[천사]들과는 훨씬 나은 환경에 있다 할까.

인격성이 있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각자 자기 자유 의지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아무리 사탄이 영원한 멸망의 대상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지상에서의 활동을 허용하신 마당에는, 그 자유 의지대로 그 스스로의 목적이 있어 움직이게 하심이다. 만일 사탄이 원치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시키시기 때문에 부득불 행하는 일이라면, 욥의 일로 해서 "욥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감싸주시지 않는데도 저렇게 잘 믿을 수가 있답니까? 감싸고 계시는 것을 풀어 보십시오, 그러면 당장 하나님을 떠날 것이니까요" 하고 큰 소리를 칠 수가 없는 것이다.

큰 소리를 치는 것은 당연히 그 근거가 있다는 증거이니 하나님 앞에서 감히 허튼 소리를 할 수 없다는 것쯤은 사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러면 그 근거가 무엇인가.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믿음에서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이 중대 사실에 있는 것이다. 사탄 자신이나 인간들이나 모두 자기 자유 의지에 의해 자기 운명이 걸려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기는 그런 멸망에 이미 처해져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나 자기스스로의 지략으로 그런 멸망을 모면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에 그 스스로 이런 인간 시험의 일을 맡고 있음이다.

즉 일정 숫자대로 구원 얻는 자가 채워지지 못하면 이 세상 혹은 현재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것과 같은 망상을 품고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셨는데 사탄이 시험함으로써 그 믿음이 무너지게 된다면 감히 하나님의 일을 훼방 놓는 것이 아니냐 할 수 있지만, 역시 답은 마찬가지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되 욥의 경우처럼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를 근거로 구원하시는 것이므로 나중에 우리 자유 의지에 의해 그 믿음과 사랑을 변절시키면 사탄이 손대기 전에 나 스스로 나 자신을 망치는 꼴이 될 것이 아닌가.

단지 사탄은 그런 일에 간접 원인을 제공하는 그 구실을 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시험하는 것뿐이지 믿는 자의 믿음에 관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일 관여하셔서 다시 말해 우리의 자유 의지와는 무관하게 믿도록 하셨다면 그 어느 피조물도 감히 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할 수가 없다. 시험하는 일도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시험이 가능한 것이다.

시험이라는 것은 그 믿음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데 필요한 것이다. 강한 믿음이 시험을 인하여 약하게 됨은 아닌 것이다. 약한 믿음을 없게 하는 일도 할 수 없다. 약한 믿음이 만일 시험을 받아 넘어진다면, 그것은 그 약함이 처음부터 시종일관하지 못할 것인데, 마침 시험이 옴으로써, 이왕 곧 무너질 것이지만 그 무너지는 날을 단지 앞당겼다는 그런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약해도 그 믿음이 결국 강한 믿음으로 성장할 여지가 있을 때는 그 믿음이 성장하기에 필요한 모든 은혜는 부족함이 없도록 공급하시는 것이다.

그런 경우만 아니라 누구든지 믿으면 그 믿음대로 약하든 강하든 모든 필요한 여건을 차별없이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役事)이다. 단지 영생이든 멸망이든 하나님께서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심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간섭이 아니니 원천적으로 그런 가르치심은 누구에게나 베풀어져 있으나 구원을 받아야 할 본인 스스로가 그 가르치심을 거절하기 때문에 가르치심을 제대로 받지 못함이다.

주님께서 아무나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은 그냥 영생만 욕심이 나서 오는 경우를 두고 경고하신 것이다. 영생만을 욕심 내는 것이므로 그런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외면하고 기적 등 눈 앞의 이익만이 먼저 들어오는 것이었고 겸하여 영생까지 얻어볼까 하여 지금까지 제자로서 따랐던 것이나, 자기 부인을 강조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결국 그 본색이 드러나 주님을 버리고 다시는 주님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요 6:67].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고 그 이끄심을 따라 그리스도께 온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설명하면서 결론으로 맺은 바 나의 죄, 내 속에 있는 죄가 하나님의 계명의 칼로 나를 쳐서 죽이고 있는 사실을 깨달음인 것이다[롬 7:11]. 즉 죄인인 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 앞에 죽은 자이지 산 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함에 있음이다. 그와 같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이지 산 자가 아니라는 자의식이 그 무엇보다 앞서 가장 우선적으로 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을 바로 보는 "눈 뜸"[행 26:18]이다. 이 소경됨[blindness]은 사탄이 마음 눈을 어둡게 함[to blind the minds-고후 4:4]에서 빚어진 것인데, 이렇게 현실을 현실대로 아직도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사탄에게 여전히 속고 있음을 말함이니 사탄에게 여전히 속아 사탄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그리스도께 나온다는 것은 넌센스다.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먼저 눈을 떠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선결문제다.

이에 반하여 베드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고기를 많이 잡아서 기뻐하기보다 도리어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시기를 구했을 정도였으니,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영혼 깊이 자기의 죽은 실상을 자각했던 것이다. "저는 죄입니다. 저를 떠나 주십시오" 하고 엉겁결에 그런 말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눅 5:8]. 이에 반하여 그 많은 대중들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심과 같이 하나님의 기적 앞에서 진리를 찾고자 함이 아니라 자기 위주의 생각 그대로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요 6:26]이었던 것이다.

이런 베드로와 같은 사례는 빌립보 간수에게서도 볼 수 있으니 당장 그는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되겠습니까?" 하고 바울 일행이 도주하지 않았다는 안도감보다 하나님의 영과 앞에 드러난 자기 살상을 먼저 깨닫고 구원부터 찾은 것이다. 이것이 정상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 인생 구원의 행로[行路]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 접근하는 방법이 보통 사람과는 사뭇 다르게 마련이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생명! 오직 구원! 이러한 영혼의 갈구 곧 "오호라, 이 비참한 자여!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리요!"[롬 7:24] 하는 영혼의 절규가 없으면 구원은 멀고도 멀고 어렵고도 어렵다.

이런 막다른 골목에 이른 비명으로는 해석하지 않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으로 난데없이 '믿음 생활에 들어온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탄식'으로 이 구절을 이해하려 드는 소위 신학박사, 석사, 학사들이니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해내기커녕 점점 진창수렁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뿐이다. 또 이렇게 그리스도께 왔다고 해서 전부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에 관한 한 그렇다. 다시 말해 앞서 지적한 대로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

구원은 완전무결하게 해결되었으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 자체는 내 자신이 열매를 맺는지의 여부에 달린 것이다[눅 13:7]. 물론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시종일관됨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반드시 내 스스로 움직여야 할 몫이 있기에 내게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스스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단계인데[빌 2:12],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했으면 겸손하게 액면 그대로 '아'는 '아'로 알아 듣고 '어'는 '어'로 알아듣는 것이 안전책이다.

무리하게 '아'를 '어'로 말한 것이라 하고 '어'를 '아'로 발음한 것이 틀림없다고 교만하게 자세를 취하지 말 것이다.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이고 '떠는' 것은 떠는 것이다. '구원'은 구원이고 '이룬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이루는 것이지 달리 해석할 것이 아니다. 성경은 문학 작품이 아니므로 시적인 표현도 없고 죽어 가는 자가 역시 죽어 가는 자[세상 육체치고 죽지 않는 자가 누구이며 영원한 생사의 기로에 처해 있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에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나누는 대화이다. 허튼 소리, 과장된 표현이 단 한 마디도 끼어 있을 틈이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 우리의 구원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양면성을 지닌다고 할까. 하나는 죽음과 죄에서의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몸의 구속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왜 양면성이라 하는가 하면 전자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고 후자는 순수하게 각자의 자유 의지에 달린 것 즉 사랑과 그 사랑으로 말미암는 복종으로 좌우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우리의 구원은 항상 이 두 가지 면으로 나타나는 조화로 이루어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써 내가 새로 창조함을 입어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갖춘지라 그 힘을 제대로 쓰는지의 여부는 순전히 나의 믿음 유무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을 '이룸'이다. 전자는 이에 비해 구원을 '받음'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의 영역이기 때문에 철저히 피동적이다. 고로 믿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 창조된 이후에는 첫 사람 아담처럼 자기 자유 의지에 의한 순종 여하가 그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능동적이고 적극성을 띠게 마련이다. 때문에 천국은 침입하는 자가 들어간다 하셨다[눅 16:16]. 침노하는 자가 쳐서 빼앗아 차지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마 11:12]. 그러므로 각자가 믿을 때는 하나님께서 믿도록 하셔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자유 의지로써 믿음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자유 의지를 따라서 믿음에 들어 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자유 의지를 따라서 그 믿음을 버릴 수도 있다는 데에서, 사탄은 그렇게 기를 쓰고 시험을 하기 위해 덤비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인 측면을 형성하는 것은 사랑은 사랑으로 화답하는 법인데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이므로 이에 화답하는 우리의 반응 역시 사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사랑하는 상대의 뜻을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랑은 주인 의식으로서 누가 간섭하거나 강제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 의지가 늘 강조됨이다. 항상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을 말함이요 구원을 목적하고 하는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사랑함으로써 우러나는 복종은 기쁨이 따르고 자진 자발적으로 함이 그 특성이다.

그런데 "왜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는 것인가?" 할 것이다. "억지로 복종함과 같은 냄새가 나지 않느냐?" 할 수 있다. 구원을 목표로 하면 일회성[一回性]의 복종처럼 되어 그런 의미가 통할 수 있다. "일회성"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영속적이지 않고 구원만 받으면 그 복종은 해도 안해도 무방하게 된다는 그런 의미이다. 구원이 목표이니까 자연 그럴 수밖에 없다. 구원 얻기 위한 복종이니까 목표만 달성되면 즉 몸의 구속만 이루어지고 천국에만 들어가면 그 수단 역시 사라지는 것은 정한 이치다.

그런 순종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순종은 구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항속적인 영구한 순종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면 왜 두렵고 떪으로써 구원을 이루라는 것인가 하면, '두렵고 떤다'는 것은 '복종한다'는 부분에 걸린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룬다'는 부분에 걸리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우리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 복종을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시했다.

그렇다면 의미는, 기쁨으로 사랑 가운데에서 이루는 복종을 멈추도록 그래서 중단시키도록 시도하는 일체의 유혹이나 어리석음에 대해 대비함으로써의 두렵고 떨림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유혹과 시험에 걸리지 않도록 정신 차리고 모쪼록 항상 기쁨과 사랑 가운데에서의 순종을 계속함으로써 그 결과로 천국에 들어가도록 함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고를 내리는 같은 편지에서 바울 사도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 한 것이다[빌 4:4].

그런즉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이다. 주님께서 육체로[히 5:7-지금은 우리와 더불어서는 육체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에 계실 때 각종 질병이나 고통 받는 것을 고치실 때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신 말씀의 중요성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 11:6]고 한 그대로다. 따라서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는 그 '받은 바 구원으로써' 천국에 들어가라는 의미이다.

구원의 뿌리는 믿음에서 오는 사랑의 복종이다.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절대 복종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확고한 사랑이다. 다시 말해 "시작할 때에 확신[우리말 번역 "확실"은 "확신"으로 바로잡아야]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들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될 것이러"[히 3:14]는 바로 그 의미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함"이다. 또다시 말하면 처음 믿음을 끝까지 확실하게 붙들지 않고 있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자기의 구원 받았음을 믿는 믿음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기 때문에, 믿다가도 중도에 믿지 않으면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그 얘기다. 여기서 "믿음"이 무엇인가? 자기 부인으로 나타나야 그것이 믿음이다. 그냥 특정 사실을 진실로서 시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목적을 가리켜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고후 5:15]이라 하지 않았던가.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 친히 나의 생명이 되어 주셔서 나를 위해 살아주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수단이 '행위'라고 가정할 때는 즉 행위로 구원 얻는다면, 선행을 하다가 중도에 그 선행을 그만 둘 때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그 차이뿐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행위'와 '믿음'을 구분할 때 기상천외(奇想天外)하게도 움직이는 것을 '행위', 움직이지 않고 마음으로만 "사실이 그렇다, 사실이 그렇다" 하고 외는 것을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 같이 행동하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움직일 때[죽으면 움직일 수 없다] 그 움직임은 선과 악 반드시 두 갈래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성경대로 하면 선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므로 자기를 위해 움직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움직이는 것을 가리킨다[골 3:17/고전 10:31/벧전 4:10,11/요 14:10/5:19]. 그리스도 밖에서는 선도 의도 없고 악과 죄 일색이다[롬 3:10,12]. 왜냐면 자기중심으로 일관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살아 움직여도 죽은 자이다[마 8:22]. 그리고 행하는 것은 모두 악과 죄뿐이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악이요 죄인 까닭이다. 죄와 악의 개념부터 성경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므로[고후 5:15/롬 14:7-9] 비로소 산 자이다. 그리고 의인이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냥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을 두고 하나님이 "너는 의롭다" 하신다고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 이는 멸망의 지름길이다. 왜냐면 현재의 죽은 자로서의 상태를 결단코 벗어날 수 없고 장차는 악령들이 들어가는 곳에 함께 들어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믿음'과 '구원'의 결과가 여기에 있으니, 즉 움직이되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여 움직이지 않음이다. 이것이 믿음이 있고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 사실을 가리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이라 했다[약 2:20,26].

'구원을 얻는 방법'으로서의 '믿음'과 '행함'의 차이와 혼동하지 말 것이다. 물론 방법이라 해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 앞에서 구원은 믿음으로 얻기 때문이다. 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느냐 하는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다. 방법론을 두고 말할 때 '믿음'과 '행함'의 차이이지, 구원 받아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경우로서 그 생명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법질서를 따라 생활하는 측면을 이야기하므로 오직 '행함'의 여부만을 묻게 된다.

믿음은 원인이요 행함은 그 결과로서 인과 관계인만큼 둘은 불가분이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 할 때 결과 없는 원인과 원인 없는 결과를 두고 한 말인 것이다. 그런 것은 이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것"이라 했고 "헛것"이라 한 것이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나올 수 없고 결과가 없다면 원인 역시 없다는 증거다. 행함과 믿음은 이와 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이 행함에서 실격한 것이다. 즉 당연히 피조물답게 행해야 하는데 피조물답지 않게 행한 것이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과 동격인 듯이 행동한 것이 바로 범죄로 직결된 것이다. 모든 범죄의 특성이 여기에 있다. 즉 교만이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즉 자기 스스로 생겨난 것처럼 행동함이니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무시함이다. 몸과 머리로서의 관계에서만 영생[인간에게 원래부터 부여하신 것]이 있는데 이를 무시하니 생명 자체를 무시하는 꼴이 되므로 죽음밖에 있을 것이 없다.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네가 순종하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구원되지 못한다 하지 않으셨다. 왜냐면 아담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이 아닌 것이니 그가 구원을 필요로 한 적이 없는 까닭이다. 단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경고뿐이셨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오해하여 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은 단지 아담의 마음을 떠보시려고 시험하시는 의미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성경을 잘못 읽는 것이다.

선악과 나무와 더불어 중앙에 있는 또다른 나무는 생명과 나무다. 생명과 나무 과일을 먹으면 "영생하게" 되어 있다. 고로 먹으면 모종의 결과를 반드시 나타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먹지 말라 하심이 분명하게 된다. 어떤 결과일까. 성경의 표현대로 "눈이 밝아져 자기의 벗은 것을 알고 부끄러워 했다" 했으므로 그것이 그 결과다. 그렇다면 사탄이 말한 것은 진실을 이야기한 것인데 왜 사탄이 저주를 받는 것인가.

사탄이 옳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즉 아무쪼록 먹도록 꾀이고 속였기 때문에 그 대가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닌가. 그러면 눈이 밝아지기 때문에 눈이 밝아지지 말라고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셨으니 그러나 먹고 실지로 눈이 밝아졌는데 무엇을 어떻게 속였다는 말인가? 여기서 얻는 결론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눈이 밝아지기는 했으나 그리고 사탄이 한 말은 진실이 아니고 거짓이므로 그 눈이 밝아진 그 "밝아짐"의 실체 그 진상을 똑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일단 먹지 말라 하셨기 때문에 실제 먹나 안먹나 보시려 했고 그래서 먹었기 때문에 범죄가 형성되는 것이었다면,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에서 그 "죽는다"는 말씀이 거짓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 점을 사탄은 교묘히 악용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시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일단 그렇게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이제는 선악과를 먹었으니 그 "죽으리라"는 말씀의 그 당연한 결과를 나타내셔야 하는데 그런 결과를 나타내는 표현이 어디 있는가? '저주 받은 것'이 그 "죽음"이 의미하는 바였던가?

저주는 아담만 아니라 사탄도 받았고 이 땅도 인간 때문에 저주 받은 것이니 죽음과는 상관 없는 별개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거짓말도 하실 수 없고[하실 필요가 없다 해야 바른 표현이다] 황당한 엄포 격의 말씀도 아니 하신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있다, 없다, 그렇다, 그렇지 않다' 하심으로써 그 말씀 그대로가 법이요 원리이고 원칙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니 하시면 그 말씀이 그렇게 법칙으로서의 성격을 지닐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 상식이다.

그러면 그 "죽음"의 의미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창 3:19]는 선언 바로 여기에 귀착된다. 지금 이 장면에서 하시는 모든 말씀은 범죄한 아담과 사탄에게 임해지는 저주로 일관되어 있다. 범죄의 결과로 인하여 향후 영원토록 변치 않을 불행의 서곡[序曲]을 울리는 아주 심각한 내용뿐이다. 그런데 만일 아담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하고 있어 이왕 때가 되면 죽어 썩어 흙으로 돌아갈 처지인데 느닷없이 그런 말씀을 새삼스럽게 꺼내시겠는가?

하나님을 그렇게 할 일 없고 실없는 분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당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영적으로 몽매한지를 밝혀 주는 것이다. 불필요한 말씀 즉 안해도 좋을 말씀이나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이 의미는 다름아니라 범죄하기 전에는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있어, 애초에는 비록 흙으로 지으심 받았으나 흙으로 돌아가는 그런 육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먹으면 죽는" 그 "죽음"의 의미가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면 모든 것은 제대로 맞추어지게 된다. 이것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 법이다. 즉 그 일견 모순되게 나타나는 것 같은 표현들을, 자기의 단견(短見)에 비추어 합리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제 마음대로 해석해버리려는 교만한 생각부터 없애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것이 겸손이요 경계하시는 것이 교만이다. 특별 나게 잘 나서 교만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태어나 자유 의지를 지니면 무조건 큰 자나 작은 자나 교만에 빠지는 것이 인간 아니, 인격성을 지닌 피조물의 약점이라 할까.

그리고 자기의 선입관이나 편견 등으로 처음부터 성경을 대하지 않기로 작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죽음"의 경고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 하시는 것이다. 아담이나 우리나 똑 같은 피조물이다. 피조물인 사실이야 누가 모를까마는 새 창조 차원에서 우리가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과 동격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범죄하면 죽음이다. 피조물답게 행하지 않으면 탈락인 것이다.

아담의 범죄 후 죽음은 에덴낙원에 들어오기 이전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도로 돌아감이고, 우리[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의]의 범죄 후 죽음은 이전 그리스도 안에 있기 이전의 상태로 도로 돌아감이다. 전자의 경우 구원의 기회가 있는 것이나 후자의 경우 그럴 기회가 이제 다시는 없다는 그 차이만 있다[히 10:26]. 그래서 "두렵고 떨림"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이미 되어진 선례가 수두룩하고 확증된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어 핑계 댈 여지가 없는 까닭이다.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사람 사는 도리나,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법질서 지키는 것 즉 하나님의 아들답게 행동하는 것이나 그 형태는 같으니 즉 공동체 의식에서 오는 '우리' 의식 곧 사랑이라는 점에서 공통이다. 공맹(孔孟)이 강조한 인(仁)과 의(義)도 마찬가지다. 왜냐면 모두 인간의 양심의 소리에서 벗어남이 없는 다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그 차이가 엄청나다.

이런 본질을 접어 두고 형태만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세상 종교나 다 같은 한 진리요 따라서 모두가 다 이 정신대로 살면 구원을 받는다는 무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본질이 같지 않으니 구원이 될 수 없음이다. 아무리 양심적으로 행동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은 까닭에 자기 중심의 성격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삶 곧 자기 중심을 심판하심이요, 이런 삶은 천사들을 제외한 인간들만은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야 즉 그 안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자기 부인이 이루어져야 가능한 것이다. 

그 본질적 차이는 자기 부인에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행해도 세상 종교는 자기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기 영혼의 구원이 없으니 죽은 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행한다는 것은 물론 올바르게 행함을 의미한다. 올바르다는 것은 양심읭 소리에 귀 기울임이니 양심은 생명과 사랑의 법칙을 말하기 때문이다. 올바르지 않다는 것은 그 반대 방향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고 해서 그런 행함이 생략됨은 절대로 아닌 것이 명백해진다.

양심을 따라 행동한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다. 자기 부인과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은 자기 부정을 말함이 아니다. 머리와 몸으로 된 한 몸 관계에서 머리도 몸[의 각 지체]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철저하게 몸은 머리를, 머리는 몸을 위하는 것을 가리킴이다. 머리께서 나를 위하시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위하지 않음이니 이런 경우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행함을 강조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만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는 헛된 부질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소리다. 창조주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주를 인정하는 경우에는 믿음을 먼저 두는 것이니 이는 새 창조로써만 구원이 되기 때문이다. 즉 같은 행함이라도 인간 자신이 자기를 구원해내겠다는 것은 막무가내로 자기 힘으로 한번 자기를 구원해 보겠다는 만용(蠻勇) 또는 교만에 그칠 따름이기에 그러하다.

하나님의 새 창조로써만 행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까닭이다. 같은 행함이라도 새 창조에서는 새로이 피조물된 새 생명으로 정상적이고 본격적인 행함을 드러내 보이는 반면, 세상 종교는 그런 것 없이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그 행함을 나타내 보여 그것으로 영생에 들어가려는 망상인 것이다. 앞에서 같은 행함이라도 그 목적이 다르다고 했다. 새 창조를 인정하는 경우는 영원한 삶의 기본 법질서로서 행함이다. 세상 종교는 자기 구원이 우선 목표다. 그뿐이고 그 다음 단계는 생각할 여유조차도 없다. 얼마나 허망한가.

세상 종교의 경우남을 위하기도 하고 자기를 위함이라 해도 의미는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자기가 있고 나야, 자기가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고로 자기 구원이 우선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 고로 타인을 위한다고 내세움은 핑계에 불과할 뿐이니, 이기주의라는 지탄을 면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관점이 다르다. 새 창조는 자기가 죽었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반면 세상 종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지만 현재의 죽음과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현재보다 나은 삶을 미래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다. 이것을 그들은 "구원" 또는 "영생"이라 하는 것이다.

즉 천국이나 극락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따라서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그런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먼저 새로 지으심 받아 그 새 삶을 사는 자로서 올바르게 살았는지의 여부를 따져 천국에 들어감을 말하니 차이가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세상 종교는 새로 지으심을 받는다는 과정을 생략해 버리는 것이다. 창조주를 부정하니 새 창조도 자연히 부인할 수밖에 없다. 이 차이다. 근본적으로 그리고 처음부터 길이 다르다. 같은 출발점일 리가 없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참으로 사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외견상 같다.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이는 누구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식적이고 양심적인 것이기에 그러하다. 피조물로서 피조물답게 사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사람답게 사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뿐이다. 이 피조물로서 피조물답게 살지 못한 것으로서의 예가 사탄이다. 그리고 영물들로서 피조물답게 삶으로써 아무 흠을 나타내지 않은 예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거룩한 천사"들이다.

당연히 사람답게 살면 영생하고 행복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세상 종교의 주장에 하자가 없다. 양식(良識) 그대로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단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그 스스로의 어리석음 때문에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 모든 것이 다 잘못 되는 것뿐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했음이 첫 사람 아담의 범죄였고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조물주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종교는 인간들이 단죄하는 그런 개별적인 죄를 지어야 죄인이고 그 외는 다 의인이라 자처한다.

세상 종교는 만물의 으뜸이고 근본이시고 머리되시는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으니 거기에는 제대로 된 조리나 논리가 있을 수 없다. 모든 논리와 상식의 바탕이 되는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는 마당에 무슨 다른 이치를 따질 여지가 있으랴. 그러므로 조물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한은 인생 철학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은 처음부터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즉 행동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양심에 비추어 그리고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아무 하자가 없고 똑 같다.

단지 세상 종교와는 달리 상식에 의거해서 이치에 맞게 그 순서를 밟아 따른다는 것이니 곧 새 창조이다. 하나님 하시는 일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새로 창조되었으니 그는 분명 완전한 피조물로서 죽음에 해당되지 않는다. 피조물로서는 아무 하자가 없다. 그리스도를 믿고 이대로 죽으면 곧바로 천국 행이다. 아무 결격 사유가 없다. 그렇다면 누구나 그렇게 곧바로 죽게 되기를 바라지만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더 잘 아신다.

따라서 세상에서 각종 연단을 통해야 함을 아시고 세상에 더 머물 필요를 느끼실 때 이야말로 내게 은혜가 아니고 또 무엇이랴. 왜 믿자마자 죽고 싶어 하겠는가. 천국 가기 위해 죽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천국 들어갈 수 없는 이유 제1호가 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왜냐면 자기를 위하고 자기 구원[천국 가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자기중심인 것이다. 새 피조물로서의 삶의 법칙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음이다[롬 14:7-9/고후 5:15].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이는 원래 처음 창조 때부터의 삶의 법도이다. 이 법질서를 어긴 탓에 사탄이 된 것이고 악령들이 생겨난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여 인류의 현재 상태가 이 모양이 된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새 피조물된 의미가 다시는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함임을 다시 강조한다. 그렇게 생명의 구조 자체가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무슨 구조냐 하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는 구조이다.

처음 창조된 인간의 삶은 남자와 여자가 그 부모를 떠나 한 몸되어 사는 삶의 구조였다. 그러나 새 창조에서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이니 곧 한 영됨의 구조이다[고전 6:17]. 둘이 한 영되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한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는 삶의 구조다. 이 원리 즉 삶의 기본 법질서는 처음 창조 때부터 이미 확립되어 있는 것이라고 앞에서도 말했다. 피조물은 조물주를 위하고 조물주는 피조물을 위하는 바로 그 구조이다. 이 법질서를 어긴 것이 사탄의 범죄요 또 역시 그의 꾀임으로 첫 사람 아담 역시 어긴 것이다. 곧 자기를 위한 것이다.

이렇게 피조물이 피조물 자기를 위하지 않음은 조물주 친히 개개의 피조물을 개별적으로 위하시기 때문이다. 피조물이 아무리 많아도 조물주께서는 일일이 그 모두를 개별적으로 위하신다. 이것이 조물주의 특징이다. 피조물은 그렇게 못한다. 왜냐면 개체로서 창조된 까닭이다. 그러나 조물주께서는 그렇게 개체로 계시는 것 이상으로 만유 안에, 만유 위에, 만유를 꿰뚫어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시라"[요 4:24] 한다. 이 개별적으로 위하심을 가리켜 성경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를 [선물로] 주신 그리스도라 하는 것이다[갈 2:20].

그러므로 피조물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왜냐면 조물주께서 자기를 위하시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함보다 더 잘 위하시고 더 세밀하게 위하심이다[마 6:32]. 우리는 우리 자신의 머리카락을 세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다 하신다[눅 12:7]. 그래서 자기를 위할 필요가 없음이다. 자기가 아닌 조물주 친히 자기를 위해 주심이 더 완벽하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지 않는데, 자기를 위하지 않으면 그러면 자연스럽게 조물주를 위하는 것이 됨은 당연하다. 물론 이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성경은 이미 선언해놓고 있다[히 11:6].

바로 이런 이치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자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만을 위하여 산다고 한 것이다[고후 5:15/롬 14:7]. 단지 범죄로 인하여 이 생명의 법질서를 어겨 그 결과로 생명 아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제 죽음을 벗어나 새 창조를 받게 되니 이전 그 본디의 생명의 법질서로 회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같이 구원된 것 즉 새 피조물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므로 그 이치를 따라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하나되어 계신지라 그리스도를 위함은 곧 아버지를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위한다고 이전과 달리 특별한 그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특별한 것이 없을 수 없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어 계시고 이 사람되어 계신 이유가 나와 친히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이니 이전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다르지 않다면 새 창조라, 새 피조물이라 할 턱이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 되었으니 당연히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상에 남아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고 그의 일을 마저 이루겠다는[요 20:21/4:34] 그런 마음이 없다면 어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자라 하리요! 따라서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고난이나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의 심장"[빌 1:8]이 되어 이 세상 사람들 건지겠다는 마음이 없으리요. 그리스도와 이렇게 둘이 하나됨은, 자연계의 동식물의 생태로서는 암수, 인간으로서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됨으로써 그림자로 상징적으로 또는 형태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즉 한 몸을 이룬 남녀는 남자의 몸이 여자의 것으로서 남자 자신이 마음대로 못한다. 여자 역시 그러하므로 여자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다. 서로 또는 어느 한 쪽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그 둘의 하나됨 즉 한 몸됨은 깨어지는 것이다[고전 7:4]. 이 그림자가 나타내어 주는 바와 같이 실질적인 우리의 하나됨 역시 마찬가지다. 육체로 하나됨도 그러하거든[이 한 몸됨의 이치도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조물주와 피조물의 하나된 그 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물며 온전히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둘이 하나됨인데 더더욱 그렇지 않으랴.

즉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심은 친히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선물로 몽땅 주신 사실에서 이미 입증되어 나타난 것이다. 고로 내가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고후 5:15/롬 14:7] 당연한 새 피조물로서의 생활 철칙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는 믿음이 관건이다. 이를 믿지 못하는데 어찌 자기 부인이 가능하겠는가. 자기를 부인해야 제대로 된 순종이 가능한 것이다.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이 자연계를 우리 몸의 신체 조직과 같은 것으로 볼 때 그 신체가 원활히 작동되도록 작용하는 제반 원리 원칙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신체를 다시 우주 천체에 비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은 일관되게 전체가 한 몸 체제로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의 삶 자체도 당연히 이 한 몸 체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즉 철두철미한 머리와 몸의 구조다. 그러므로 목숨이 붙어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자연법칙에 해당하는 삶의 법칙[인간 삶의 도리]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법칙을 어기는 것이 죄요 악이다. 이 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성경에 말하는 선(善)이요 의(義)이다. 따라서 인간 삶은 항상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의식함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왜냐면 몸의 모든 지체는 머리와 직결 직통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한 몸 구조로 사는 삶이다. 톱니 같이 서로 맞물려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돌아가는 삶이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제 위치를 지키지 않을 때 모든 부분 즉 전체가 가동을 멈추는 것이므로 그 불량한 부품은 당연히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불량 부품에 해당되는 것이 인간을 말하면 죄인, 악인이요 영물로 말하면 사탄과 같은 악령인 것이다. 고로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전체가 파탄이 난다. 부득불 이들을 분리 수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생명 체제에서 분리된 것이므로 생명 아닌 죽음만이 그들의 몫에 태이는 것이다. 각자에게 부여된 자유 의지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것 역시 엄연히 법칙에 따른 것이다. 모든 일은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이루어지므로 그 결과는 영원한 것이고 불변일 수밖에 없으므로 당연히 우리는 이에 대하여 "두렵고 떨리지"[빌 2:12]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은 그 피조물인 인간을 위하시니 곧 머리의 역할이요 그 피조물된 우리 각자는 머리이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니 곧 그 모든 말씀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다. 한 몸에서는 머리가 주동(主動)이니 절대적인 위치다. 몸과의 관계에서는 상대적이나 그 역할과 위치에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여기서 필요불가결하게 절대자가 인정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 그런 절대자가 필요치 않고 인간 스스로가 그런 신의 경지 또는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불교의 교의는 도대체 무엇에 근거하여 인생 삶을 논하고 있다는 말인가.

조물주를 위한다면 그 위하는 방법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시키시는 말씀대로 따르는 것 즉 순종이다. 그런데 그 시키시는 것이 다름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식은 죽 먹기요 '"하나마나"라 할지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키시는 말씀대로 하지 않는 자가 나타났으니 곧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이요 사탄의 꾀임에 넘어간 첫 사람 아담이다. 그러니 그렇게 식은 죽 먹기가 아님이 드러나는 셈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도 "내가 너희들을 모두 만들었으니 너희 각자에게 나가는 나의 사랑은 말할 필요도 없이 똑 같고 그만큼 크다. 고로 이 사랑을 따라 즉 나 조물주 하나님이 너희 각자를 사랑하는 모양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그 뜻이다. 물론 아담으로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음에서 온 범죄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리이신 하나님의 지시[아담의 경우 경고의 말씀]를 듣지 않고 어겼다는 것은 기타 모든 지시와 계명도 어길 수 있다는 증몀이 되는 것이다.

고로 내가 이 새 피조물로서의 생활 원칙을 따라 살지 않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새 피조물로서의 영광스러운 관계 즉 둘이 하나되어 있음을 지속하겠는가? 지속 못한다면 그것은 새 피조물로서의 구조가 와해됨을 뜻함은 당연하다. 즉 위에서 설명한 한 몸된 구조로서의 남녀 한 몸됨이 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얻는 구원인데 그렇게 되면 구원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음으로써 이 복된 하나됨의 관계를 유지 존속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넉넉히 천국에 들어가게 되므로, 이렇게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시험하는 자의 모든 시도에 대비하되 피조물 인간은 어느 때에든지 아담처럼 어리석을 수가 있으므로 첫 사람 아담처럼 될 수 있고 영물들 중의 하나인 사탄처럼 될 수도 있으니, 그 사실 앞에서 두렵고 떪으로써 그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평소 깨어 있어 대처하라는 것이 아닌가. 이 모두 나의 자유 의지로써 되는 일이니까 그리고 자유 의지가 사랑의 핵심 요소이므로 이는 변경될 수 없다.

이렇게 두렵고 떪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사탄이라는 시험하는 자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시험자가 없어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니, 시험하는 자가 없어도 사탄이 범죄한 것처럼 어느 겨를에 나도 그 같이 어리석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심과 동시에 만유를 지으신 조물주이시기 때문에 원리원칙에 철저하셔야 하는 특성상 우리의 자유 의지를 꺾으시고 부당하게 간섭하실 수 없으시므로, 다시 말해 우리가 어리석게 범죄의 길로 들어서더라도 억지로 무리하게는 붙드시지 못하므로 이 원리원칙 앞에서 실상 두렵고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아담이 그 선악과를 먹을 찰나에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래서 그가 죽는 순간에 처한 것을 아시면서도 당장이라도 불호령 같은 것을 내리셔서 강제로 멈추게 하실 수가 없었던 바로 그 사실이 두려운 것이다. 철저한 나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영원한 운명의 선택, 이 사실이 너무 두렵고 떨리는 것이다. 나만은 사탄보다 아담보다 낫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들이 범죄하였으니 나도 범죄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례를 남겼으니 그것을 거울로 삼고 경계를 삼는 그런 두려움과 떨림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설혹 그렇게 강제로라도 한 때는 그 미친 짓을 억지로 금하셨다 하더라도 그런 인간의 어리석은 마음으로는 즉 자기 스스로 사탄에 속아 넘어가는 그 짓은 미구(未久)에 반드시 다시 나타날 것이요 그 때마다 또 그렇게 호령을 내리신다면 이는 자연계의 동물들이 그 몸 속의 기계적 작용을 통하여 육체적인 무리한 작용은 못하도록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인간 로봇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계의 짐승과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런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수가 없다는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원리원칙 앞에서 떨 수밖에 없음을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한 것이다. 사도 시대의 초대(初代) 교회도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해 갔다" 한 것이 그 때문이다[행 9:31]. 이 하나님의 원리원칙은 의당히 철저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 실상은 무자비와 같아 "소멸하시는 불"이라 한 것이다[히 12:29].

초대 교회가 그러했다는 것은 향후 모든 시대 그 어느 곳의 교회든 같은 걸음걸이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력한 경고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감사한 것은 이런 어리석은 길로 접어들 수 있는 것은 이 세상밖에는 없다고 성경이 분명히 해두고 있음이다. 오직 이 세상뿐이다. 이 세상뿐인 만큼 그 의미도 자못 심각하고, 심각하기 때문에 두렵고 떨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을 그러므로 온전히 잘 이겨 나가야 하는 것이다.

겸손하게 그래서 절대로 잘난 척하여 그 어떤 경고든 무시하지 말고 마음에 새겨두어 어린 아이 같은 심령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말씀대로 이행하여 나갈 일이다. 그것이 지혜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하여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 둘 일이다. 기억한다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말씀을 쉬지 않는 기도로써 복창하여 말씀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짐하고 또 다짐해 두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우리가 보내심을 받은 자이니[요 20:21] 그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할 일이란 사람들을 건져 살려내는 일인즉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고 증언하는 증인이 되어야 하고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의 올바른 삶의 보기를 세상 앞에 보여 주는 일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되어[고후 6:1] 수고를 해야 마땅한 새 피조물 즉 구원 받은 자로서의 당연한 도리이다.

그리고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의 그 고난[죄인으로서 당연히 받는]에 동참하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들 위하여 기도하는 것으로 그 역할이 완수된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 그래서 찬미의 제물[하나님을 사랑하여 칭송하는 것이니 이 역시 피조물로서의 조물주를 위해 사는 삶의 한 표현이다]이 우리 입에서 끊이지 않는 것은 우리의 구원 받은 확실한 증거 중의 하나이니 여기서 하나도 소홀히 함이 없도록 함이 중요하다.

왜냐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 막강한 힘으로 작용함이니 우리의 믿음을 더욱 북돋우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 미련도 두지 않는다. 오직 구원 얻을 만한 사람들을 찾아내어 구원해 내는 것 외에 관심사가 없다. 그것밖에 우리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 한 것이다.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은 자 즉 그리스도를 믿게 된 자는, 종으로 있으면서 그 위치에서 이 구원해 내는 일을 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와도 오히려 종으로 있으면서 그 일하는 것을 택하라고 가르친 것이니[고전 7:21]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이야 당장 그런 기회가 오면 얼씨구나 좋아라 하고 달려들 것이나[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세상 사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이 오직 목적이므로 이는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그 뜻을 받들어 그의 일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보기 나름 인식하기 나름이니 항구적인 실패로 보느냐, 악착 같은 끈기로 보느냐, 후자로 본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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