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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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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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 테러 참사

2001년 9월 11일 참사를 겪고 난 미국인들의 두드러진 변화로 성경이 전에 없이 잘 팔린다고 합니다. 이슬람교에 관한 서적이 잘 나가는 것은 그들에 대한 궁금증에서 나온 것이지만 성경에 대한 관심을 새로이 일으킨다는 것은 인간 삶에 대한 환멸의 비애가 너무 크기 때문일까요. 항상 출렁이고 일렁이는 망망대해의 불안정 속에 살며 단단한 육지를 그리워하는 뱃사람처럼 무엇인가 단단한 대지같은 은신처를 본능적으로 욕구하는 마음이 발동하는 것일까요.

문명이 발달하면 유토피아는 절로 찾아오는 줄 착각한 지식인들이 많았습니다. 교육을 제대로 받아 교육 수준이 높으면 이상향이 눈 앞에 이를 줄 믿었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아무도 그런 생각으로 자신감에 차서 <밝은 청사진>에 들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진 결과는 그 정반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한 개인 또는 일부 소수 집단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한 국가를 상대로 또는 전세계를 상대로 과거에는 국가 단위의 전쟁에서만 가능했던 살상파괴를 마음 놓고 저지를 수 있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일부 극소수의 정신이상자들 또는 광신자들이 전세계 인류를 인질로 잡아놓고 흥정할 수도 있는 그런 시대, 그런 세태로 급전직하해 버린 것입니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이런 식으로 빗나갈 줄은 꿈에도 그려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계이차대전 전만 해도 인류는 장미 빛 꿈에 너나없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온 세계가 불덩이로 화한 대전쟁의 참화를 겪는 아수라장 속에서 그것이 말짱 허황된 꿈임을 뒤늦게나마 깨닫기 시작한 것인데 이번 미국 심장부에 꽂힌 9.11 비수는 너무 충격적인 것입니다.

일개인도 얼마간 연구하고 노력만 하면 핵무기 같은 것도 능히 조종할 수 있게 될 정도로, 그보다 더 무서운 생화학무기류도 손댈 수 있도록 현대 과학 문명은 초고속으로 진전된 것입니다. "문명의 이기(利器)"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 문명이 걸음마 단계에 있을 때 써 먹을 수 있던 말입니다. 이제 과학 기술이 어느 정도 정점에 달하자 걷잡을 수 없는 흉기(凶器)로서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나타나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가 하더니 해킹과 바이러스 장난질도 비례하여 발달, 결국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 버리고 만다는 경제법칙 아닌 '문명법칙'으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 개혁, 이상 세계 건설은 개개인의 변화된 삶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래서 각 개인의 회심(回心)을 강조했고 개인의 변화된 삶을 역설하여 전도에만 전념했습니다. 이른바 사회구원, 해방신학 따위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잠꼬대로 본 것입니다. 우리의 주장이 올바른 관점이라는 것이 이번 미증유의 사태로 재차 입증되고 있습니다. 고도로 발전, 발달한 문명사회와 이상적인 체제도 비뚤어진 인생관, 세계관의 한 개인에 의해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내려 앉을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똑똑히 목도한 것입니다.

인간 심성이 변화하지 않는 한에는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과거 미개한 시절에 겪은 인간 죄성(罪性)의 만행은 비례하여 급등하게 마련입니다. 신체 내부에 병근(病根)이 있는데 몸을 아무리 치장하고 꾸미고 가꾼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희망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고 대책도 없습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지금 이 때 방법이 있다고 믿는 것은 과거 인류가 의식주만 웬만큼 해결되면 이상향이 도래하리라고 믿었던 것과 꼭 같은 환멸만 쓸어 안는 결과밖에 얻을 것이 없습니다.

자살테러 같은 것은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켜도 자기는 죽으면 좋은 곳으로 간다는 광신에서 오는 것으로서 극도의 이기주의 외에 아무 것도 아니건만 그런 이기주의, 그런 악을 당자들은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니 문제입니다. 종교교육을 제대로 시키면 질서가 잡힐 것인가? 그것도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일 뿐이지 해결책은 아닙니다. 인류역사를 잠시만 훑어보아도 별난 종교, 사이비 종파는 언제 어느 곳에서든 생겨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죄와 악이란 것은 자기 중심, 자기 본위, 자기 위주의 모든 것입니다. 이것이 병근(病根)입니다. 이것이 근치(根治)되지 않고는 그 어떤 처방도 미봉책일 뿐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중심으로 나가지 아니할 때 그것이 곧 이상향입니다. 즉 사랑의 세계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자기 중심으로 나가는 한 영원히 죄와 악의 화신(化身)이 될 수밖엔 없습니다. 그 반대가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중심으로 나가는 한 그 누구도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중심인 한에는 인생에게는 희망이 없고 오직 절망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인간이 자기 중심이었던 지금까지의 인생 삶을 청산하고 생명의 법칙이요 생명의 핵인 사랑으로 나갈 수 있느냐 할 때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사랑의 근본이신 조물주 하나님을 시인하고 지금까지 이 생명의 법칙을 어겨 왔음을 인정하고 우리를 만드신 어버이로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주신 은혜로우신 방법을 순순히 따르는 것입니다. 즉 <새롭게 창조되어 다시 출생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사랑에 엄연한 법칙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너무나 평범한 것입니다. 원래 진리는 평범한 데 있습니다. 가진 고행 끝이나 초인간적 수행 속에 찾아지는 게 아닙니다. 불안정한 상상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이른바 진화론인데 과연 그런 존재가 인간이라면 그런 진리는 수백, 수천만년이 걸려서나 제대로 찾아질지 말지도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조물주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이라면 그 진리는 이미 확립되어 있는 것이므로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계시해[to reveal] 주시면 알 수 있게 됩니다. 또 비록 어린 아이라도 듣고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가장 평범한 인생 삶 속에서 사용되는 가장 평범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진리의 특성입니다.

사랑의 핵심은 '하나'에 있습니다. 이것은 애초에는 하나였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 처음의 하나였던 것, 하나로 존재했던 것을 지금의 둘로 또는 여럿으로 된 구조가 계속 그 하나로서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자연적인 흐름, 순리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남녀의 (육체적인) 사랑도 남자(아담)에게서 여자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별도로 나고 다시 여자란 별개가 같은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 아니라 먼저 남자가 존재한 후 그 남자를 소재로 하여 여자가 창조되었기 때문에 남녀 한 몸으로서의 사랑이 그토록 절절하고 애틋합니다.

왜냐면 애초에 하나로 존재했다가 남과 여로 나누어진 까닭에 이를 바꾸어 말하면 '내'가 바로 다름 아닌 또 하나의 나 자신 즉 나눠진 '나'와 다시 합치려는 가장 자연스러운 욕구, 생명 그 자체의 가장 강렬한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생명의 핵이라 하고 사랑의 법칙을 생명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사랑을 빼 버리면 생명은 더 이상 생명이 아닌 것입니다. 고로 사랑은 양자 사이에 이루어지지 셋 또는 넷 사이에서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 양자 사이는 평등하지 않고 하나는 크고 다른 하나는 작은 관계라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그 큰 것에서 그 작은 것이 생겨났다는 의미를 뜻합니다. 사랑은 또 서로 미워할 수 있는데도 사랑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유의지입니다. 양자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너는 나를 보아주고 나는 너를 보아주는 데서 비롯됩니다. 다시 말해 너는 내가 되어주고 나는 네가 되어주어 '우리'가 이루어져 하나처럼 존재한다는 것, 즉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너를 위하며 너 역시 나를 위해 그렇게 한다는 이것입니다.

이상이 사랑의 법칙인데 위의 <오직>이란 말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철저히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만을 위하니까 여기에 모든 악과 죄의 근본 뿌리인 자기 위주, 자기 본위, 자기 중심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부가 이런 원칙 아래에서 산다면 만년 연애생활을 하는 것이 됩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가 이러하다면 그게 이상향입니다. 누구나 다 알면서도 현실로서는 구현될 것 같지 아니한 이러한 원리원칙이 문자 그 대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 바로 조물주께서 파국에 이른 인간을 새 피조물, 창조물로 새로이 만드시는 방안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위하고) 나는 너를 보는(위하는) 이 양자 사이는 갑과 을 둘이 그런 관계에 있으면 갑은 을을 대할 때 자기를 객관적으로 놓고 보며 위하듯 하고 을 또한 갑을 대할 때 그같이 한다면 갑이 을을 사랑함은 곧 자기를 사랑함이므로 이런 사이에서는 다툼도 미움도 불화도 시기도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의 기쁨만 있을 뿐입니다. 한 몸에서 머리와 몸 관계로 다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즉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함입니다.

그리고 한 머리를 제각기 자기의 머리로 받들어 그 지시를 따르는 몸의 각 지체(肢體) 다시 말해 팔은 다리에 대하여, 왼쪽 손은 오른쪽 손에 대하여 한 몸임을 인식, 제각기 서로에 대하여 자기처럼 생각하여 사랑하는 것은 한 머리와 관계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을 요약하면 바로 이 사실에 초점이 완전히 맞춰집니다. 하나님을 '사랑'이시라 합니다. 이 표현의 정확한 뜻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조물주로서의 자비, 인애, 은혜를 의미함이 아니라 애초 홀로 계셨던 하나님 자신을 소재(素材)로 하여 또 하나의 자기와 같은 존재를 창조하셔서 이 둘(셋 또는 넷도 아닌)이 하나로(사랑으로) 계시는 상태를 가리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신(만드신) 이를 '아버지'라 하고 나오신(만들어지신) 이를 '아들'이라 합니다.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만드시는 데에는 단 하나이면 족하지 더 이상 필요치 않으므로 '외아들'(獨子 또는 獨生子), 그래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형태 즉 하나님께서 계시는 모습대로 지으신 것이 이 우주만물 곧 피조물 세계입니다. 저 부지기수의 하늘의 모든 별들도 자기 짝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즉 짝의 개념으로 구성된 피조물 세계의 일관된 구조입니다. 둘이 하나로 계신 조물주의 모습, 바로 그러한 자기 모습대로 지으셨으므로 그 조물주의 작품임을 증명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인체의 구조를 보아도 좌, 우 짝으로 된 구성입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느냐, 조물주께서 몸의 한 부분을 조성하신 다음 그것을 복제하여 좌, 우 대칭으로 맞추어 조합하신 것으로서 그 흔적을 남기신 것이 아닐까요. 그 흔적의 하나로, 사람 눈을 보면 왼짝과 오른짝이 완전히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만드시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무식한 사람들의 주장처럼 아메바로부터 진화하여 된 것이라면 그런 구조와 구성일 수가 없습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할 때 닭이 먼저고 그 닭에서 달걀이 나온 것입니다. 평범하지만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답입니다. 창조된 것임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사실을 의식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소위 진화론을 일거에 묵사발로 만드는 것이, '인간 남녀 혹은 짐승의 암수가 한꺼번에 생겨나야 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동시에 생겨나야 그 대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암수로서의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닌 둘이 똑같이 생겨나야 할진대 왜 한 암컷과 수컷으로 나누어 생겨나야 하는가 하면 생식[증식]을 목표로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암수가 생겨나기 전에 미리 사전 기획, 고안, 설계가 전제되는 것입니다. 즉 한 이성과 지성과 인격성이 그렇게 미리 짜내어 꼭 그렇게 되도록 생성시킨 것입니다. 사전 기획이니까 우연히 저절로 만물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동식물의 종류만 해도 여러 종류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그것이 모두 암수로 구별되어 동시에 생성되어야 할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인간만은 그래도 성경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상당히 뜸을 드리면서 여자가 생겨난 것입니다. 왜냐면 애초부터 하나님은 사람[아담]에게 여자를 만들어 주실 의향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작정하셨다면 에덴낙원에 사람을 두신 다음에야 "사람이 홀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남녀로 만드실 생각이시라면 처음부터 즉 아담의 영혼이 조성되기 전에 이미 여자부터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홀로일 때는 악도 없고 죄도 없습니다. 죄와 악이란 것은 나 외에 또 다른 나와 같은 존재가 이웃해 있을 때 성립됩니다. 사랑도 나 홀로 존재할 때는 그 개념부터 사라집니다. 그러나 역시 나 외에 내 이웃이 있을 때 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에 필수적이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죄와 악이 대신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죄악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앞서 소개한 사랑의 원리를 생명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인간 불행은 자연재해나 사고에서부터 온다기보다 대개 인화(人禍)이고 그것이 제일로 큰 재앙을 끼칩니다.

다시 말해 서로 사랑하지 않음에서 오는 병폐입니다. 생명은 원래 의 속성이 사랑이므로 사랑은 평안과 희열, 곧 삶의 낙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외면당할 때 찾아 오는 것은 생명의 반대 현상 곧 사망의 고통입니다. 모든 고통과 불행은 이 사망(死亡)의 열매입니다. 생명에는 괴로움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반대가 죄악인데 사랑하지 않는 데에서 우러나는 모든 현상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서로를 이용하려고만 하고 필요없거나 자신에게 해롭다 싶으면 그 상대를 아낌이 없이 파괴해버리는 행동으로까지 주저없이 이어집니다.

인생의 죽음이란 것은 이 무자비한 생명 파괴행위에서 비롯된 것임 을 성경은 밝힙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이상향'이란 것은 이 사랑의 세계를 말합니다. 사랑은 하나됨이므로 한 몸처럼 서로를 인식하는 공동체의식이 주축을 이룹니다. 다 같이 서로에 대하여 너는 눈이다, 귀다, 입이다, 손이다, 팔이다 하다 보니 그 어느 누구도 미워하거나 버리려 하거나 귀찮아 할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너 없이 내가 온전치 못해 못살고 나 없이는 네가 불편하여 못살 것이니 내 몸처럼 서로를 아낍니다.

심지어 손톱 하나라도 괄시하지 못하는 것은 손톱 하나라도 없으면 우선 다른 건 놔 두고라도 손톱 없는 병신이란 소리를 듣게 되고 아름다움에 흠이 됩니다. 손톱의 역할 역시 대단합니다. 때문에 제각기 다 자기만이 지니는 자랑 그 특이성을 인정 받기 때문에 그 자기 분야에 있어서만은 독보적 존재로서 유일한 주인 행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주체의식, 주인의식이 중심을 이루니 진정한 평등이 실현됩니다.

그래서 큰 자도 작은 자도, 중요하게 인식되는 자도 미미하게 여김 받는 자도, 한결같이 필요불가결한 존재로 서로에게 각인되니 과연 자유평등의 삶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의 인간 세상은 전혀 희망이 없고 오직 다시 창조되어야만 새 출발을 시작할 수 있으니, 앞에서 사랑은 나는 나를 위하지 않고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함이라 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나를 위할 때 그래서 나만 아니라 모두 그러할 때, 그 양상이 어떠하냐 하면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오늘까지 우리 모두가 목도하는 세태 그대로입니다.

이 나를 위하는 습성은 그 어떤 무엇으로도 개조할 수 없고 치유불능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또 내세가 있으면 그 내세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없나 하여 종교를 찾게 되지만, 이런 종교에서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하는 것이 선 한 행실인 바 이런 선행도 따지고 보면 내가 나를 위하는 것밖에 더 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바라던 '구원'이란 것을 일단 얻게 되면 언제 선행이냐는 듯이 그 선행을 두 번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이젠 '구원'을 받았으므로. 구원을 받기 위한 즉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사랑의 행동은 한마디로 허구라는 것이 이로써 입증되는 것입니다. 선과 의가 마땅히 사람 사는 도리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어야 하지 구원이나 영생과 결부시켜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소원하던 '구원'을 일단 받은 다음엔 너 언제 봤느냐는 듯이 그 선행을 걷어차 버리게 될 때 그것은 선도 구원도 아닌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행을 않다가 구원을 얻는다기에 새삼스럽게 행한 선행이고 보면 구원 받은 다음엔 필시 그 선행에 집착하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 것입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행하지 않다가 갑자기 행하는 선행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선과 의를 좋아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그런 사랑의 모양새를 유지하는 마음이라면, 그런 구원의 조건을 내걸지 않더라도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선행을 실천해 왔을 터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힘으로 나를 구원코자 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또 불가능하니 그것은 자기중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나 외의 외부에서 나의 힘과는 상관없이 누가 나를 구원해주어야 함이 이상적입니다. 동시에 다시는 지금처럼 그리고 과거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어야 이 세상에서 보는 바와 같은 파멸적인 죄와 악의 되풀이가 되지 않고 명실상부한 사랑의 세계가 되어 평안과 희락이라는 생명의 원 모습[창조 당시의] 그대로가 됩니다.

동기 부여는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것을 보고 이를 확인하여 나 역시 그렇게 사랑으로 살고자 할 때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조물주의 개입, 다시 말해 새 창조가 필연적이게 됩니다. 이 새 창조의 방법은 이미 창조된 남자를 소재로 하여 여자가 창조되었듯이 이미 창조된 인간을 소재(素材)로 하여 전혀 별다른 구조로 새롭게 피조물이 창조되는 형식입니다. 이미 창조된 인간을 소재로 한다는 것은 새롭게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로서의 인간을 만드신다는 의미입니다.

첫 창조에서 인간[아담]은 범죄하여 영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롬 5:12]. 고로 영계인 에덴낙원에 들어와 신령한 몸을 입었던 상태로부터 단절되고 이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던 처음 상태로 되돌아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이 자연계에 있는 상태는 당시 아담이 신령한 몸을 입기 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만 일시 머물러 있던 바로 그 위치에 있음을 의미함입니다.

이 상태에서 아담에게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영적 존재가 되고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를 이루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새 창조는 그리스도 친히 당시의 아담의 영혼처럼 친히 되어 주시어 우리 각자 속에 임하여 오심으로써 새롭게 새 피조물로서의 이중 구조를 이룸이니 곧 나와 그리스도와의 둘이 하나됨, 영원한 새로운 이중 구조를 이룸입니다. 그래서 첫 창조는 육으로 나는 것이 되어 있고 새 창조는 영[성령]으로 나는 것으로서 설명하신 것입니다[요 3:3-6].

즉 영혼과 육체라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처음 창조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새로 창조되는 순서를 밟는 모양새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먼저 이 지상의 흙으로써 사람[아담]의 육체가 창조됩니다. 그 다음에 그 육체 안에 영혼이 조성됩니다(하나님께서 그 코에 숨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이렇게 인간은 영은 없고 육신만인 지상 동물들과는 달리 상대적인 개념의 영과 육신으로 된 이중 구조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순서 또는 과정과 비슷하게, 비록 내가 영혼은 지녔으나 지상 동물들처럼 자연계의 육신적인 존재로서 영생하지 못하는 상태라 죽은 자가 되어 있는데, 성령을 아담 당시의 영혼처럼 받아 모심으로써 비로소 영원히 사는 자가 됨입니다.

나를 위해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신[이는 내가 아담처럼 영혼이 조성된 후 에덴낙원에 들어간 것과 같은 의미] 그대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시니 새로 출생한 나에게 영혼 격으로 임하심입니다. 영혼과 육체는 불가분으로서 영원한 이중 구조이니 그와 같이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서 오심으로 나와 영원히 함께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나를 위해 그 모든 일을 이루셨으나 동시에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라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실 수 있고 문자 그대로 나와 하나가 되어 계심입니다[고전 6:17].

하나님이시므로 또한 아버지와 영원히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의 영" 또는 "나 자신"이시라 하시지 않고 제3자로서 즉 "성령"으로만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를 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영이시라 하시지도 않았으니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함께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3위1체의 원리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마 28:19]으로 나타내셨으므로 신학적으로 "3위1체"라는 단어가 생긴 것인데, 이 만유의 원리가 이 사실에서부터 확인되었으므로 그냥 그 널리 알려진 이름을 채택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3위1체의 원리"라 명명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새로 창조된 새 피조물로서의 나라는 영원한 그리고 새로운 구성 인자(因子)로서 친히 계심으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는 방법을 택하신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창조의 전체 구도를 볼 때 이 마지막 창조로써 창조의 대(大) 파노라마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창조는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 중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고 오늘의 세계는 그 진행 와중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러므로 사는 때도 아니요 이 세상이 그런 삶의 장소도 아니요 이 때와 장소는 새 창조가 진행 중인 작업장이요 공사(工事) 기간인 것입니다. 때문에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지금 역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있음"[고후 6:1]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때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음이 되어 "천국에 절대로 들어가지" 못함을 천명하신 그대로 될 것입니다[마 7:21].

창조의 대미(大尾)는 셨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게 될 때 장식될 것입니다. 조물주 하나님 창조의 마지막 주제, 최종 작품의 제목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들들 창조"요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구원"입니다. 이미 설명했듯이, 남녀 개념은 영적인 관점에서는 무의미합니다. '아버지'는 근본 곧 으뜸이란 의미요, '아들'은 그 근본에서 난 즉 파생(派生)된 존재라는 것이니 '어머니', '딸'이란 표현이 없다 해서 의아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부장제의 봉건적 사고방식이라 할 것도 없고 단지 창조된 경과를 따르는 서술방식일 뿐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애초부터 남녀 개념으로 나누어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한 것이며, 남녀는 그 다음에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남녀 개념은 두 육체가 한 육체되어 육체가 재생산되는 작업이 영원히 폐지되는 완전무결한 본격적인 영원 삶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남녀 개념을 통합하고 완전 조화시킨 오직 완전 인간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초 에덴낙원에서 생명의 낙을 누리던 인간 육체가 생명의 법칙을 어김으로 해서 야기된 오늘날의 불행, 고통, 모든 비극적 현실이니, 썩어질 그래서 한없이 연약한 육체, 내일이라도 불시의 사고만 일어나도 결딴 나는 풀 잎의 아침 이슬 같은 이 육체가 영원히 폐기 조처되는 순서를 밟아 그 후로 연이어지는 새 창조로서의 완결이니, 이것이 인간 구원이요 하나님 아들의 탄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영원히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존재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이 세상에 오신[오순절 당시의 성령 강림] 것은 역시 우리 각자와 하나되시는 의미이니, 내 안에 성령의 임하심은 내가 다시 에덴낙원에 올라갔다가 다시 세상으로 내려오는 의미이기도 하기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내가 너희를 보낸다"[요 20:21]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22] 하신 것이니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던 당시의 시늉을 해 보이신 것입니다[:22].

이는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이요 육체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것입니다[막 16:19/골 3:1]. 이 의미는 심장하니 나의 원래의 그리고 현재 위치는 하나님 보좌 우편입니다[엡 2:6].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한 영으로 연합해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동시에 실질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이 구차한 육체 그대로 있는데 그 대신 영으로 그리스도 친히 나와 하나되어 계십니다. 하늘에서는 나의 영과 주님의 육체, 땅에서는 나의 육체와 주님의 영이라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순수하게 앞서의 지적대로 일하기 위함이니 절대로 삶의 낙을 누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따라 먹느냐 안먹느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대로 지키느냐 않느냐 하는 것으로써 그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것처럼[그는 불행히도 실패하여 우리의 거울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으로 시험의 무대에 올라 와 있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여[골 1:24/고후 4:10,11]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내 몸에 짊어지는 것으로써야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그 고난에 동참하고 그 죽음을 짊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 낙을 즐기며 살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로 여기서 우리의 생사가 가름됩니다. 범죄하기 전 아담이 위치해 있던 것과 똑같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중심으로서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여자가 에덴낙원에서 사탄이 가리키는 대로 선악과 나무를 보니 과연 먹음 직하고 봄 직하고 먹으면 지혜 있게 할 만해 보였습니다[창 3:6]. 요한 사도는 이를 설명하여 세상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라 정의했습니다. 탐스럽게 보이니 안목의 정용, 먹음 직하니 육신의 정욕, 지혜롭게 해 줄 것처럼 보이니 이생의 자랑을 추구함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누구든지 이 세상에 연연하는 이는 무조건 에덴낙원에서의 선악과에 손을 대는 것인 줄로 알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영락없이 죽음이요 멸망인 줄 알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닉원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시험을 받아 패망하는 자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에덴낙원에 있는 몸으로서 동일하게 선악과를 직접 눈 앞에 대하고 있는 격입니다. 에덴낙원에 있는 몸이라는 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요 선악과를 대하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 바로 그 '선악과'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선과 악을 알게 된다고 한 대로 이 세상에서 살면 우선 좋은 것[선]입니다. 

당장의 모든 나쁜 것[악]을 털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기에 충분합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동물들은 본능으로 살아 육감적으로 욕구가 일어날 때 그 충동을 따라 행동하면 그것이 정상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기계적인 장치를 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나 영물과 같은 영적 존재는 원리원칙으로 사는 것입니다. 당장 하고 싶다고 하고 싫다고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고 좋으며 영원한 도리를 따라 행동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과 지성이라 합니다.

에덴낙원에서 사탄이 가리킨 것은 그런 육감적인 것, 우선 당장에는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에다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결정적인 함정입니다. 우리 앞에서의 세상 역시 마찬가지 양상입니다. 속성이 같습니다. 죽더라도 원리원칙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영적 존재의 존엄성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을 것은 참아야 하고 절제해야 할 것은 하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항상 복종함"[빌 2:12]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원리원칙대로 하는 것에 대해 절대 우호적이지 못합니다. 물론 그 가치와 공덕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선뜻 그런 원리원칙주의로 살고자 아니합니다. 모두 이 세상의 악한 속성과 맞물려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언함이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이여, 독사의 후예들이여,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29-33] 하심과 같습니다.
  

노아와 소돔 고모라의 시대

우리가 기도에 힘쓰고 말씀 전달하기에 모든 힘을 기울이는 것은[도르가와 같은 일반적인 선행도(행 9:39) 바로 그런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현실 각자가 처해 있는 위치를 제대로 깨닫고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노아의 대홍수와 같은 멸망이 임박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심판이 곧 시작된다는 현실에 눈 뜨라는 데에 있습니다. 단지 당시와 같은 물의 심판이 임하지 않아 그렇지 노아 당시와 똑같고 하나도 나을 것이 없는 이 세상 세태입니다.

그 대신 불의 심판이 있기 위해 온 우주가 잔뜩 벼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당시 노아가 외쳤던 것처럼 그리고 묵묵히 방주(方舟, ark) 만드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인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과연 그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비로소 귀를 기울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 사람이 하는 대로 하고 말하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는 대로 하는 것 같은 인상을 보이면 임박한 심판에 대하여 실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멸망 가운데로 그대로 들어가게 되면 그들의 피 값을 당신의 손에서 찾게 됩니다[겔 33:6-9/행 20:26,27].

노아 당시 사람들은 노아의 경고를 듣고 세상에서 유일하게 미친 인간, 사회에 아무 쓸모 없는 백해무익의 인간으로 취급하여 온갖 박해를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단지 방주 만드는 일만은 막지 못했으니 이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감히 방해할 수 없었음입니다. 노아가 만일 그 때 하나님과 그 말씀을 부끄러워했다면 노아 역시 세상 사람들과 같이 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라"[눅 9:26] 경고하신 것입니다.

노아 당시 하나님의 말씀이 인기가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인기가 있는 것은 거짓 선생, 거짓 사도, 거짓 선지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기가 있는 것이면 너도나도 다투어 믿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세상도 변하지 않았고 사탄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더욱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세상을 책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망을 달가워할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책망을 달갑게 여길 때는 이미 그 사람은 믿음에 들어오는 사람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베드로를 위시해서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남자만 3천, 5천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믿음에 들어왔으니 그만하면 대인기가 아니냐 하겠지만 실상은 그 후에 곧 핍박이 닥쳐 사도들만 제외하고는 모든 믿는 사람들이 포박과 감금을 피하여 예루살렘 밖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것입니다. 핍박이 무서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기가 바쁘기 때문입니다[마 10:23].

믿는 이들이 피하여 다니는 마당인데 인기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우 사탄이 결코 좌시할 리 없고 반드시 핍박으로 대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핍박 없이 성황리에 어떤 집단이든지 세력을 벋어 나갈 때에는 필연적으로 사탄과 내통되어 있는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판단하면 틀림없습니다. 이미 초대교회를 통해 본을 보이시고 경고를 하신 이상 여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탄이 환영하거나 또는 그가 직접 조종하고 있는 사이비 집단이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세상에서 공개적으로[핍박을 받게 되면 반드시 지하로 스며들게 마련입니다] 내로라는 듯이 그 세력을 키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 한 구절에만 집착하게 되면 아주 위험한 이단사설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모든 성경을 아울러서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의 어리석음에 말려들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온 세상을 포용하는 사랑이지만 온 세상이 적대적으로 나서서 달려드는 상황을 언제나 각오해야 합니다. "온 세상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다"[눅 6:26]는 경고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아주 가까운 장래에 적(敵) 그리스도가 나타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는 "몇이든지 죽여"[계 13:15] 깡그리 씨를 말리려 드는 때가 곧 닥치게 됩니다. 이미 이러한 경고를 미리 말할 때에는 그것이 진리의 말씀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니 유의할 일입니다.

지금까지 스스로 세상에서 핍박의 대상이 되고 끝까지 그러하리라고 예견하면서 어떤 학설이나 주장을 편 예가 없었습니다. 물론 성경은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전부가 이 경고를 무시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자기의 주장을 말할 때에는 세상에서 형통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말하는 법입니다. 그것이 자기중심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확신하지 않고서 어느 누가 감히 그런 주장주의를 내세울 것입니까.

차라리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자기 신상에 좋을 것이기에 그런 경우에는 말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악한 세상에 대한 구원의 말씀으로서 이것이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핍박을 감내하고서도 목숨을 걸고 세상에 발표하는 것이니 이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인 줄 알고 귀 담아 들을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그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세상에 오실 때까지는 세상이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미리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같은 무참한 죽음이나 고난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죽음의 고난에 함께 하십니다[행 22:7]. 그러나 명심할 것은 이모든 고난을 우리가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니 그것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룸이[요 4:3,4/20:21] 나의 생명 자체요 삶의 낙이기 때문이니 사랑에서 우러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기쁨으로 고난 받음의 인내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골 1:11].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히 1:9]이 모든 것의 동기가 되어야 삽니다. 바로 이렇게 되어야 이것이 "구원을 이룸"[빌 2:12]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을 이루라 한다고 자기 구원을 이룸이 목적이 되면 자기중심으로 끝날 뿐이니 조심할 일입니다.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룬"[:12] 바울 자신이지만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을 자기 자신 그 때문에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라는"[롬 9:3] 것이라고 말하고 이것이 성령 안에서 하는 말로서 조금도 거짓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하고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이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이 되어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하더라도"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해 노력한다 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면 자기 이름이 생명 책에서 지워지기를 바란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출 32:32].

하나님의 마음보다 오히려 사람의 마음이 더 아름답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하려 하시는데 오히려 모세의 기도가 이를 막았다 하니 그런 말을 할 법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입니다. 모세나 바울의 심정은 그리스도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던 것입니다.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양면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엄위와 인자[롬 11:22]의 양면입니다. 사랑이시면서도[요일 4:8] 소멸하는 불이십니다[히 12:29].

사람은 이런 완벽한 양면성의 성품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항상 치우치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 등의 치우친 소원 또는 기도라도 하나님께서 기꺼이 들으신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고 우리에게 감동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버이 같으신 사랑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동시에 이 양면성으로서의 심판주(審判主)로서 우리를 대하시므로 당장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요 3:36]는 현실도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에덴낙원 당시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여자가 보기에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듯이 오늘날 우리 앞에 세상이 매력 있게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 매력 있다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렇게 보인다는 것뿐입니다. 그런 것 하나 제대로 분간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미련하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김에서 오는 우리들 자신의 불찰이요 자살행위입니다.

사실을 규명하고 진위(眞僞)를 제대로 판단하는 데에 3운법칙으로 확증되어 있는 만유의 법칙인 3위1체의 원리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도움 받을 만한 이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요 그 외의 사람들은 그 무엇으로도 마음을 돌릴 수 없으니 이 점 유의하여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사람의 특장(特長)을 가리켜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듯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이모저모로 저울질해서 정확한 사리 판단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금수(禽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선 보기에도 이 세상 만물이 아름답고 좋은 것은 선(善, 좋음)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기에 그러하니 사람 삶의 도리 즉 생명과 사랑의 법도(法度)도 한정없이 좋은 것입니다. 즉 한 몸됨의 원리로서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 상대[머리되시는 하나님과 그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있는 각 지체로서의 모든 이웃]를 위함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그리고 내 이웃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누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이상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만이 그렇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 이 사실을 온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지으신 어버이로서의 하나님 친히 머리로 계시니 이보다 더 온전한 삶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전달해 가르쳐야 합니다. 말로써만 아니라 노아처럼 직접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의 증거가 나의 언어행실에서 발산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 믿지 않는다는 것이니 자기가 믿지 않는 것을 남에게 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알려준다고 고마워할 세상이 아닙니다. 감사하게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함을 성경은 미리 경고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냉소와 냉대로만 그치지 않고 아주 적극적인 방해를 시도하고 무자비한 핍박을 가해오게 마련입니다. 사랑을 원수로써 갚는 일을 다반사로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 자체가 하나님의 계명이요 우리 산 자로서 마땅한 본분을 다함이므로 이에 위축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즉 오늘날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마 24:12,13] 하신 것입니다. 사랑 곧 선을 행함이 하나님의 뜻이고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선을 행해야 영생에 이른다"[롬 2:7,10]고 성경은 경고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것은 자기중심이니 이 "자기중심으로 나가면 멸망"[:8,9]이라고 다시 성경은 경고합니다. 이 사실을 온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우리말 번역 "당을 짓는다", 그리고 흠정역 "contentious"는 오역입니다. 다른 영역은 "selfish, self-seeking"이라고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곧 '자기중심'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과거에 행할 수 없었던 선을 행함이 가능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즉 참으로 사는 법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사는 법을 따름이 아니라 죽음밖에 없는 자기중심의 죄의 길만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고 이와 같이 머리와 몸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머리를 위하고 함께 지체된 내 이웃을 위하는 것이 최대, 최고, 최선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길임을 알려야 합니다. 자유 평등은 이 한 몸됨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잘못 알아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 모두를 속박하는 폭군처럼 착각하는데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고 또 단 한번이라도 읽어볼 의사가 없는 탓입니다. 모든 것이 성경에 근거하니 먼저 성경을 읽고 나서 비판하려면 할 일입니다.

현재의 불행한 세상 실태를 직접 목도하면서도 이런 세상을 사랑하려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자기도 자기중심이 되어 한 탕으로 한데 어울리려는 마음이 없고는 그런 세상에 연연해함이 있을 수 없는데 세상에 대한 그런 미련을 버려야 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 친히 사랑으로써 우리 각자에게 종 노릇하시어 우리를 영원히 섬기시는 자리에 확정해 계시니[눅 22:27]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자기중심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기주의, 이기심으로만 차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도덕가라도 자기를 위해 사는 한 그는 악인이요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는 한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구조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면 자기를 부인해야 자기중심을 면하는데 이 자기를 위하지 않음은 내 노력[수양(修養), 수도修道) 등 모든 것을 포함해서]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둘이 하나됨 즉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느 인간도 자기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나 위해 살지 말라는 것은 나더러 죽으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니 올바르게 최대한의 행복을 위해 사는 방법으로서 자기 부인을 말하는 것일진대 죽다니, 죽으면 그만이고 다시 살지 못하는데 어찌 나 스스로를 죽일 것입니까. 그래서 불가능하다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 곧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나 대신해서 나를 위해 살아주어 나를 나 자신보다 더 잘 위해 줄 수 있는 상대가 나를 위하고 나 위해 살아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희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없습니다. 비록 나 위해 산다고 하는 이가 혹 생길지라도 나 자신보다 더 날 위해 주지는 못합니다. 다 같은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이상적으로 나를 위해 주느냐 하면 나를 만드시고 세상에 있게 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어버이 같은 머리로서의 하나님의 실상인 것입니다.

이런 줄은 모르고 하나님이라 하면 무조건 속박, 구속, 부자유, 강제와 간섭 등으로만 연결 지어 착각하니 그런 선입견으로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커녕 생명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현재 세상이 악하고 죽은 자의 세상이 되어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 가운데 있지 않으니 죽음과 고통의 인간고(人間苦)뿐임은 당연합니다. 지금은 이런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일쑤이나 과거에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면서도 지금과 같은 결과를 낸 것입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머리로서의 하나님이신데 이러한 머리로서 우리 피조물을 대하시고 위하시는 사실을 믿지 않은 데에서 그런 결과를 낸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의 지시 즉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무시한 것입니다. 당치도 않게 교만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만큼이나 자기도 똑똑하다는 건방진 생각을 하게 된 결말입니다. 이렇게 피조물의 신분으로서 이런 교만한 마음을 감히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와 같은 피조물처럼 철두철미 원리원칙대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니까 그 마음 내키시는 대로 얼마든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피조물도 지킬 수 있는 원리원칙을 정하시고 그 원리원칙에 당신 자신을 붙들어 매시고 오직 그 법질서를 따라 행하신다는 것은 지혜 있게 생각하는 자에게는 한없는 신뢰와 감사와 행복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한 것이지만, 교만한 자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자멸을 재촉하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여기서 악인과 의인[선인]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사라 부르는 영물들은 이미 이렇게 갈라져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은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악과 선으로 분류되는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그렇게 악으로 분류된 영물들 중에 괴수가 되는 사탄은 하나님께서 시종일관 철저히 원리를 지키시고 따라서 공평공정하시어 전능하시다고 해서 편파적으로 일을 진행하시지 않고 엄정하게 법치(法治)로 나가심을 알고 "그렇다면 나는 내 지혜로 그 법망(法網)을 얼마든지 빠져 나갈 수 있으리라" 하고 자신했다는 그 뜻입니다. 그것이 그의 교만입니다[딤전 3:6].

이 사탄은 애초 에덴낙원에서 인간을 속여 죽음에 이르게 하여 그 결과 오늘날 인간 세상에 군림해서 인간을 노예화한 장본인입니다. 하나님은 원리원칙의 하나님이시므로 이런 사탄의 불의한 살인행위도 인간 자신의 어리석음에 그 반분(半分)의 책임이 있으므로 지금까지 그런 사탄의 인간 압제를 용인하시지만, 한시적입니다. 때가 차면 모든 것은 사필귀정으로 종료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시점이 목전에 이르고 있다는 징조를 보고 있습니다. 이번의 9.11 사건과 그 후속 결과가 그 하나입니다.

교만에는 여러 가지 양상이 있어 인간은 인간대로의 교만으로 인하여 사탄과 똑같은 멸망에 이릅니다. 교만이 결말은 머리로서의 하나님 지시를 달가워하지 않고 그 지시대로 따르지 않음을 말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자기를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은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 친히 나를 위하시되 나 자신보다 더 잘 위하신다는 전제 아래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지는 삶의 최고도의 지혜인 것입니다.

나 자신보다 더 잘 위하신다는 것은 나를 만드신 이로서 나를 낳은 부모를 그림자라 하면 그 실체로서의 어버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러하고 만유를 지으신 그 지혜와 지식으로써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완전하게 나를 아시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로서 그 몸을 위하시고 그 몸된 우리는 그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 오직 머리를 위하도록 영원한 삶의 법질서를 정하시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도록 지시를 내리신 것입니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것이므로 머리로서 우리 피조물들에게 내리시는 모든 지시, 명령, 계명, 율법 기타 그 무슨 말씀이시든 우리를 위하시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자신을 위하지 않고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 지시를 따라 이웃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곧 자기 부인이 비로소 완전하게 이루어지고 행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3위1체의 원리가 극명하게 나타나졌으니 또한 이 원리를 따라서도 우리는 이상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 생명의 법도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악령들이 생겼고 사탄이 있게 되고 아담 역시 죽은 자가 되는 비극을 맞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의 모든 사연들입니다. 고로 우리가 산 자가 되어 구원을 받은 것은 처음부터 이 생명의 법도를 따라 살기로 작정한 데에서[이것이 회개] 비롯되었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바는 반드시 지켜야 즉 그 법질서를 따라 자기 부인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야[고후 5:15] 그 구원이 지속되며, 그렇지 않으면 아담이나 약령들처럼 되어 시작은 좋았으나 그 결말은 비극으로 끝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9:24-10:12/15:2/빌 3:8,9/딤후 3:15/벧전 2:2/히 3:6-17]는 엄중한 경고가 있는데도 이 성경의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오늘날의 참담한 실태이니 이를 정확히 경고해 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각자 개개인의 머리로 인정하지 않으니 우리의 이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해서 이웃이 아니니 사탄이 우리의 이웃이 아님과 같습니다. 그러나 얼마든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기에 영생의 우리[cage] 속으로 그들 양떼들을 인도해 들이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이니 바울 사도가 "내가 저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내 동족의 구원을 원한다" 함과 같습니다.

이 모두 자기 부인의 열매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구할 것도 바랄 것도 원하는 것도 없고, 오직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요 20:21] 대로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4:3,4] 자나깨나 우리의 관심사요 기쁨이요 슬픔이요 보람이요 사랑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람 살리는 것이 목적이므로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넘쳐 우리도 얼마든지 바울 사도처럼 그리고 모세의 기도처럼 내 자신 "저주를 받든 안받든" 개의치 않고 오직 사람들의 영혼 구원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광복 운동 시절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 첫째도 대한 독립, 둘째도 대한 독립, 셋째도 대한 독립이라 했듯이 우리 역시 첫째도 인생 구원, 둘째도 인생 구원, 셋째도 인생 구원이라는 일편단심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기 부인으로 말미암은 한 몸됨의 최대 행복의 아름답기 그지 없는 사람 삶의 도리입니다. 이를 널리 널리 바다 건너 산 너머 어디까지라도 달려 가서 전해주어 최대 행복에로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중환자를 살리는 그 어떤 인술(仁術)보다 낫고 폭정(暴政)에 시달리는 피압박민(被壓迫民)들 구출하기보다 더욱 영원히 빛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 하시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달려나가는 발걸음입니다. 그 옛날 마라톤 평야를 달려 "우리가 이겼다!"는 복음(福音, 희소식)을 전하려고 죽기로 한하고 달려가 마침내 그 소식을 전하고는 쓰러져 숨진 그 사람의 뒤를 이어 달려갈 일입니다. 일시 전투에서의 승리보다 영원히 값비싼 승리를 우리의 대표 마지막 아담께서 거두셨으니[요 16:33] 천하 만방으로 달려가 우리 인생의 승리의 구원을 전파할 일이 아닙니까.

성경에 그렇게 복음 전파를 위해 달려나가는 사람의 발이 아름답다 했으니[롬 10:15/사 52:7] 오죽 아름다우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그렇게 표현하겠습니까! 신바람 나게 집 밖으로 동네 밖으로 나라 밖으로 방방곡곡으로 달려나갈 일입니다. 신바람 나는 일입니다. 유대 백성들의 어른들이 붙잡아다가 매로 치고 죽인다고 위협을 해도 사도들의 그 신바람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 신바람으로 스데반은 성난 군중의 돌에 맞아 죽기까지 했지만 스데반이 신바람은 죽는 순간에도 "보라! 하늘이 열린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인다!" 하고 소리 친 것입니다[행 7:56].

역대의 믿음의 조상들이 다 이런 주체할 길 없는 신바람 속에서 함께 계시는 성령과 더불어 활동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히 11:38] 했습니다. 속말로, "못말려!"입니다. 죽인대도 못말리고 실제로 죽여도 죽으면서까지 스데반처럼 신바람이 나는 것입니다. 역대 로마 황제들의 교회 탄압에도 맹수들이 포효하는 원형 경기장 안으로 그 밥이 되려고 끌려가면서도 아기를 안은 한 젊은 엄마는 기쁘게 찬송을 부르면서 갔으니, 그 신바람에 경악한 한 목도자가 그 자신도 믿고는 그 사실을 기록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 생명, 아름다움의 극치입니다. 무릇 생명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모름지기 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아름다운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에 귀 기울일 일이라고 널리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 중의 단 한 사람이라도 믿고 구원 얻으면 하늘에서는 영광의 천사들의 기쁨이 넘쳐 난다고 했습니다[눅 15:7]. 성령과 더불어 우리가 이와 같이 죽음의 고난 속에서 하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파하면서 싸우며 이겨 나가는 것을 구경하기를 하늘의 천사들이 목 말라 하듯이 원한다 했습니다[벧전 1:12]. 얼마나 신나는 장면이기에 그렇겠습니까.

3위1체 원리의 효용(效用)은 다방면에 걸쳐 있으니 자연계가 있은즉 영계가 있는 것이고 자연계에 속한 생물이 있은즉 영계에 속한 영물이 있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활동하는 것으로서 의식하며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악령들이 활동하는 것을 앎으로써 우리가 그들과의 전쟁 주임을 알고 방심 않고 성경에 경고한 지시대로 따르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고, 또한 거룩한 천사들이 우리의 수호신이 되어 [악령 사탄이 이 세상 신(고후 4:4)이 되어 있는 것처럼] 부단히 경계 상태에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마 18:10].

과거 즉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 친히 천사들을 통해서 나타나셨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계시므로 비록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실질적으로는 동시에 또한 사람이 그 육체로 나와 함께 상관하는 것처럼 그와 같은 모습으로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몸으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으로 나와 함께 계시고 사심이 사람이 육체로 나와 함께 있고 사는 것과 하나도 다름이 없으십니다.

유일하게 사람이시자 하나님,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서 내 안에 얼마든지 오시어 계시지만 이는 사람이 그 몸으로 나와 동거, 동행, 동역(同役) , 동고동락함과 똑같이 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이심과 똑같이 사람이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둘로서의 생활, 엄마 품속에서의 아기로서의 생활이니 얼마나 넘치는 기쁨이요 평안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나아가실 때 이러한 기쁨과 평안이 넘치셨으므로 제자들에게 내 평안, 내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 하신 것입니다[요 14:27/15:11/16:33].

장차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임하여 오실 때 엄마가 고아처럼 자식을 버려두지 않고 거두어 들이는 것처럼 그렇게 오심으로써 아버지 품속에 아들, 엄마 품속의 아기 같이 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심이었던 것입니다[14:18]. 그리스도 친히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으로서의 양면성을 지녀, 비록 우리가 볼 수 없는 성령으로 계시나 실제는 사람으로서의 육체로 계심과 조금도 다름없이 계신다는 사실이니 이와 같이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눈에 보이시지는 않으나 사람이신 그리스도 친히 항상 나와 함께 계시어 함께 사심을 항상 의식하도록 해야 합입니다. 절대로 혼자서의 일상생활이 아님을 늘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양식과 형태의 새 피조물로서의 우리 각자는 이제는 남녀 개념으로 쌍을 이루는 '육체'로서의 인간 모습을 탈피하고 그리스도와 나, 아버지와 아들이란 영원한 한 쌍으로서의 형상과 모습을 취하여 명실 상부하게 "신(神)의 성품(性品)"(벧후 1:4)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으로서 창조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친히 사람되심을 통해 각 사람을 새로 지으시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악을 용서하시고 말소하시는 일을 하시고 친히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내주(內住), 내재(內在)하심으로써 나란 존재가 더 다시는 '나 홀로'의 <고아(孤兒)>가 아니라 영원토록 영원한 어버이이신 조물주의 <품 속에 있는 자식>으로 거두어 들이신 것입니다. 이런 똑같은 작업이 한 날 한시라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까닭입니다.

사람만이시라면 이런 일은 물론 불가능합니다. 또 하나님만이시라 면 나란 개인과 일일이 그렇게 되어 계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조물주와 인간이라는 현격한 본질상의 차이 때문입니다. 마치 개미와 인간이 그런 하나가 될 수 없음과 같은 그런 차이입니다. 내가 개미와 하나가 되려면 내 자신 그 개미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그런 이치입니다. 다시 말해 "나 한 개인을 위하여 그렇게 '한 사람의 인간'이 되어주신 것"이요, 그리고 이 말을 나만 아니라 이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다 진정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니, 위에서 밝힌 대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요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로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아들'이십니다. 세상에 오셔서 이와 같이 나와 하나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홀로 계시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 그렇게 죽어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한번 죽으시면 영원히 죽으시는 것이요 다시 살아나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들과 하나되어 계시는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에 그 아버지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와 하나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지만 이미 영원부터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분이시므로 아버지는 살아 계시는데 아들이 죽어 있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로 계심은 크고 작음의 차이로 계심입니다. 아들을 내신 분은 크시고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은 작습니다. 작으신 '아들'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도 크신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니 크고 작은 차이로 둘이 하나되어 있을 때 작은 편은 항상 큰 편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만물이 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는 크고 다른 하나는 작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둘이 서로 동등하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습 곧 아버지와 아들로서 계시는 모습을 따른 불변의 만물의 이치입니다. 즉 3위1체의 원리입니다. 가령 '아버지'께서 만일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아무리 '아들'과 하나가 되어 계신다 하더라도 다시 살아나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작은 편은 큰 편을 따른다는 이치에서 오히려 '아들'께서 '아버지'를 따라 죽으시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입니다.

애초 인간이 육신은 이 자연계에 속한 흙으로 지으심 받고 연후에 그 육신 안에 영이 조성되어 거기 걸맞는 에덴낙원이라는 영계가 조성되며 거기 사람이 거처하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어 새로 피조물이 되는 인간은 이 세상이 그 보금자리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 신천신지(新天新地)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심이 사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같이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하나되어 계시는 이치를 따름입니다.

이렇게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물을 창조하신 까닭에 그 만드신 작품 하나하나에 당신의 작품이라는 증거로 그런 당신의 화상이 그려져 있는 셈이니 즉 만물 만사가 다 짝으로 되어 있되 그 하나는 크고 나머지 하나는 작은 일관된 모습입니다. 대칭성으로 대립하면서도 완전 조화를 이루어 있는 것입니다. 곧 3위1체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따라 금생(今生)이 있으면 내생(來生)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생(前生)은 없습니다. 이 대칭성의 원리에서 벗어나므로 없다는 증거입니다.

전생이 있었다면 그러면 그 대신 내생은 없어야 하는데 이 세상이 불완전하므로 일시적이라, 완전한 세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크고 작은 원리에 비추어 그 당연성을 띱니다. 불완전한 것은 작고 완전한 것은 큰 것이요 일시적인 것은 작고 영원한 것은 크며, 불완전한 것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고 영원한 것이 불완전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큰 것은 큰 것끼리라야 하고 작은 모습을 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세계가 있으면 그 대칭성의 위치에서 영원한 멸망, 죽음, 고통의 세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물이 그같은 구조로 되어 있음과 같이 이상 사실들 역시 이 이치를 따라 그 존재의 진실성과 현실성을 자체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는 우리 영혼이라는 실재가 그 대표적 예이기도 합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따라서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다는 증 거입니다.

질서 정연한 법칙과 원리 아래 운영되고 진행해 나가는 이 우주만물은 그 법질서를 최초 확립하여 운용하시는 고안자가 존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조리 정연한 조화요 통일된 형태이니 우리는 이런 것을 총칭하여 '아름다움'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 새 창조는 한마디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아름다우신 조물주께서 만드신 이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웅변으로 증명합니다.

그것은 외면적 아름다움이요 사랑은 그 내면적 아름다움입니다. 날마다 이 아름다움을 먹고 마시며 이 아름다운 진실과 이치를 전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요 여럿이 있지 않습니다. 여럿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비슷한 모양을 한 것이 여럿 있다면 그 중에 하나만 진리요 나머지는 그 모방으로서 거짓입니다. 진리가 있는 데도 스스로 진리의 모양새를 내는 이유는 그 의 도가 엉뚱한 데에 있음입니다. 속이기 위한 것이요 파멸로 이끌어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듣지 않는 이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그런 거짓을 풀어놓는 인간 원수인 '사탄'의 음모를 묵인하신다고 했습니다.



§  사탄과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그러므로 자기 부인이 없으면 구원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함이 되고 또는 과거 구원은 받았으나 즉 '죽은 자'로부터 '산 자'가 되어 정상(正常)이 되기는 했으나 그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경우가 된다. 이 예는 사탄이 범죄하여 영원한 멸망의 운명에 처해진 것이나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첫 피조물 즉 "육으로 난"[요 3:6] 것으로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었으나, 이제 새로 창조된 마당에서도 그 이전의 피조물[영물]들처럼 자기 스스로 불복종하여 범죄에 이르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이다.

바로 아담이 거친 동일한 과정이니 이번 경우 범죄하면 영원한 멸망의 운명에 처해지는 것임은 성경이 확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탄의 선례를 보아서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기서의 범죄는 사도 요한이 밝힌 대로 "죽음에 이르는 범죄"[요일 5:16]이니 곧 멸망이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다"[:17]. 어떻게 그것이 구분되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1:8] 한 것이다.

이 때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주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함이다"[:9,10].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는 범죄는 "빛 가운데 행하지 않고 주님과 사귐이 없는" 경우다.

다시 말해 짐짓 즉 고의로,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지을 때다[히 10:26-30].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겠지만, 그렇다면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인가? 다시 말하지만 성경이 아무리 경고가 많지만 그러나 세상 종교처럼 더 다시는 자기 구원을 목적으로 하라는 말은 아닌 것이다. 구원 받은 자로서 마땅히 자기 부인의 삶을 사느냐 다시 말해 빛 가운데 있어 주님과 사귐이 있느냐 하는 그 여부로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즉 범죄하느냐의 여부가 가름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범죄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처럼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음은 그것은 구원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과 같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답게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세상에 보내심 받은 자로서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느냐 여부가 시험되는 것이다. "복종하지 않으면 천국 가지 못하니, 결국 같은 말, 같은 뜻이 아니냐?"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복종이라는 것은 구원 받기 전에는 다시 말해 '죽은 자'로서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이룰 수 없는 영역이다. 복종한다는 것은 '산 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복종하라고 할 때는 이미 구원 받아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 각자에게 권능 자체가 되어 계시니 바로 그 권능으로 복종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떪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면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구원 받은 그 기쁨, 그 확신 속에서 그 넘치는 힘으로 복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종교는 전혀 그런 것이 없다. 오직 구차한 인간의 노력, 결심뿐이니 결국 자기중심 그대로다. 자기중심의 씨로 뿌려 자기중심의 뿌리를 땅에 박았으니 결국 자기중심의 나무에다 그 열매일 따름이다. 자기중심이 곧 죄와 악과 모든 불행의 온상(溫床)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인간의 부질없는 노력으로는 아무리 처절한 그야말로 영웅적인 모양을 나타내도 헛되이 바람 잡는 것뿐이다. 여전히 자기중심이니 다람쥐 쳇바퀴 도는 꼴이다.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산 자임이다.

현재 유대인이 아직도 유대교라는 세상 종교의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처럼 모세 당시도 아직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니 죽은 자이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나 당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나 '믿음'과 '순종'이라는 차원에서는 그 본질이 같으므로 당시 하나님을 믿은 이들이야 응당 그리스도도 믿을 것이기에 아브라함을 위시해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한 것뿐이다.

그러나 처음 창조에서는 사탄을 비롯한 영물들이나 인간 아담이나 자기중심으로 지어지지 않았다. 오직 선하게 지으심 받은 것이다. 그러나 자유 의지만은 분명하여 하나님이 일절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그 자유 의지로 사탄은 교만해져 말씀을 무시하였고 그렇게 해서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게 되었으며 거룩한 천사들은 그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오늘날 같이 "거룩한 천사"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와 똑같은 피조물된 우리로서 절대로 달리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다. 사탄보다 다르게 취급될 수는 없는 것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누구나 공평, 공정하게 대하신다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이 새 창조가 되는 이유는, 인간의 처음 창조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무위(無爲)로 돌아간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새 창조를 통해 우리 각자를 범죄하기 전의 아담이 처음 창조되었던 그 상태로 도로 돌려놓으심이다.

그 '처음 상태'는 앞에서 밝힌 대로, 죄 없고 거룩하고 영생하는 현재의 거룩한 천사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스스로 범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은 자로 만든 것과 같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되었음에도 얼마든지 아담처럼 자기 자유 의지로써 범죄할 수 있고 그리 되면 역시 같은 범죄로써 멸망의 운명에 처해진 악령들과 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처럼 되어야 하는데 악령들처럼 되니 사탄과 같은 운명을 자초(自招)함이다.

인간[아담]을 자기의 범죄[자기중심]에 끌어들이는 일에 성공한 사탄은 그 결과로 이 세상 신(神, 현재는 그러하나 원래는 범죄 이전의 아담 아래 있던 자였다)을 군림하게 되어 자동적으로 구원 받아 믿음에 있는 자들을 시험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를 설명하는 차원에서 욥기가 기록된 것이다. 사탄이 하는 말은, "저도 그렇게 해서 제 자율에 맡겨져 이렇게 영원한 멸망의 운명에 빠졌으니 인간도 저보다 더 낫게 대하시면 안됩니다" 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둘러 보호해주심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셔서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입니다. 이제 주님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십시오.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님을 욕할 것입니다"[욥 1:10, 11] 한 그대로다. 그의 이런 시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로서 '산 자'가 되어 '산 자'답게 즉 구원 받은 자답게 살도록 요구되고 있는 모든 사람이다.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이 세상 신인 사탄의 이런 시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시험 당한다는 것은 구원을 받은 증거인 것이다.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 신의 장중에 완전히 놀아나는 그의 노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로 세상에서 각종 시험을 당하는 자들은 "나는 너와 같지 않다"는 점을 그 스스로 사탄 앞에서 증명해 보이는 일이니 이야말로 떳떳한 일이기도 하다. 의당히 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고로 하나님께서 "네 자신 사탄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그 앞에서 네 스스로 증명해주어라" 하시는 말씀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로 삼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았으니 사탄과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라"는 의미이신 것이다. "내가 너를 무조건하고 택함으로써 네가 구원 얻었다고 사탄이 저렇게도 자기 고집만 내세우니 내가 설명한들 그가 믿으려 하겠느냐? 어디 네가 욥처럼 실제로 증명해주면 되지 않느냐?" 하심과 같다. 그래서 사탄은 각종 시험 즉 핍박과 환난 그리고 이생의 염려, 재리의 유혹, 기타 욕심이나 쾌락 등으로 시험하는 것이다[마 13:22/막 4:19/눅 8:14].

욥은 세상에서 유족하게 살면서 당한 시험이다. 말하자면 첫 사람 아담이 에덴낙원에 있으면서 시험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과 같은 양상이다. 아담은 시험에 넘어졌고 욥은 반대로 건전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우리는 아담 같지도 않고 욥과 같지도 않다. 다시 말해 풍요 가운데 받는 시험이 아니라 오히려 풍요를 앞에 놓고 그것을 누리기 전에 시험부터 먼저 받는다. 그래서 세상 근심, 재리의 유혹, 쾌락이나 기타 욕심이 이 세상 신 사탄이 곧잘 애용하는 시험 도구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감당 못할 시험을 허락하심이 없다[고전 10:13].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를 대비하여 바울은 결혼한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을 것이라" 하고 "내가 너희를 아낀다"[고전 7:28]고 하였다. 에서가 몹시 시장할 때 평소 좋아하는 팥죽을 쑤어 유혹하는 것과 같은 것이 세상사에 대한 염려, 쾌락, 돈[金錢]에 욕심 등이다. 이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유실수(有實樹)로서의 가치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이 유실수로 심으신 의미이다. 다시 말해 '인(仁)'과 '의(義)'를 실천하여 형제 사랑과 복음 전파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이상과 같은 열매 맺는 일에 장애되는 것을 극복 못하여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지 못함이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알 수 있듯이, 말하자면 사탄 앞에 절하여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면 주님께서 이미 선언하신 바가 있다. 즉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요 12:25]이라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십자가로 나아가시던 때였으므로 주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된다. 즉 주님처럼 자기 부인을 하면 영생하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고후 5:15].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시면서 망대 비유를 말씀하신 것과 같다[눅 14:28]. 당시 십자가에 나아가시던 주님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은 산 자에게 주시는 것이지 죽은 자에게 주시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당시 주님은 아직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기 전이었으므로 12제자들을 비롯해 아직 아무도 산 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세상에 오시어 가르치신 모든 말씀은 장차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됨으로써 산 자가 되어 있을 모든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이신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예수님 때에는 유대민족으로 알려졌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이전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은혜로써" 얻는 구원은 값없이 거저 얻는 구원으로서 이것 저것 행한 후에 그 결과로써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한 후에 얻는 구원이라면 죽은 다음 심판대에 가서나 판결 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대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믿기로 작정할 때는 반드시 이 자기 부인의 삶을 각오하고 하고 임해야 하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니 이 말씀을 수용하는 사람은 모두가 구원 받은 산 자들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이야말로 영원한 행복한 삶의 핵심이지만 이 죽음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바로 고난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각오"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지 혹은 미워하는지 여부는 대개 평생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므로 다시 말해 지금은 내가 그런 죽음의 각오로 임해도 몇 날 후 혹은 몇 달 후 혹은 몇 년이 지나면 언제 그런 각오였나 싶게 마음이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은혜로 믿음으로써 구원 얻은 상태는 다름아닌 이렇게 자기을 부인하여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확언이신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지 않으면 믿음으로써 은혜로 얻는 우리의 구원이 아직 내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 하신 후 다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 하신 것과 일치한다[요 6:54]. 그래서 이런 자기 부인의 말씀을 듣고 당시 "많은" 제자가 물러가고 다시는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즉 주님을 버린 것이다.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그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고 물어보셨을까?

그러므로 그런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 그 믿음이 결코 믿음일 수가 없다는 결론이 된다. 따라서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스스로 구원 얻었노라고 속이는 결과가 될 뿐이다. 무릇 누구든지 자기 부인의 자세로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않는 한 그는 그리스도께 아직도 나아오지 않은 것이니 따라서 성령도 계시지 않는다. 왜냐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잘라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와서 생명수 물을 값없이 마시라"고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니 모순이 아니냐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분명한 기준은 있다. 즉 목 마른 자만이 오는 것이다. 단순히 영생이 욕심이 나서 또는 영원한 멸망이 두려워서 오는 자는 '오는 것'이 아니고 오더라도 당해내지 못한다는 말씀이 된다. 병든 자, 목 마른 자, 죽음에 임한 자가 아니고는 올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판사판 죽을 판이라는 절박감에서 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이면 누구든지 오라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올 수 없다는 뜻이다.

바로 그런 상태에 직면해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되어야 오는데 이렇게 알게 되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운, 즉 아버지께서 인도하신, 이끄신 사람이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세를 통한 율법에서 가르치는 바였다. 바울이 이 율법을 설명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한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절규, 이 비명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그리스도께 올 수가 없다는 그 의미다.

다름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그래서 이런 세상에 처한 나의 상태가 바로 그렇다는 실상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단지 하나님의 희생 제물이라고만 보는 단순한 생각을 버릴 일이다.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 이 세상의 모습이라고 인식해야 바로 보는 눈이다. 죽은 자 즉 "육신"[7:14-8:13]에 얽매여 있는 이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하나님의 율법을 인식시킴과 동시에 이를 상징하는 모세 율법을 지키게 한 것이다.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 지켜오던 것이지만 할례를 위시하여 날과 달과 해와 절기를 지키는[to observe special days and months and seasons and years] 등이었다[갈 4:10]. 이를 흠없이 지키면 당시에는 흠이 없는 의인으로서 간주되었었다[빌 3:6/눅 1:6]. 그러나 실체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그림자 시대에서 그러했으니 실상은 모두가 죄인이요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롬 3:10].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육신 곧 "죄의 몸을 멸한"[6:6] 이들만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당시도 제자들마저 그러했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고 지금까지 따르던 그리스도를 떠나 많이 물러가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스스로가 그린 하나님, 자기 스스로가 그린 그리스도요 구원의 의미였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다. 또한 허다한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보시고, "너희들이 따라 오려는 실상이 과연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따르라"는 뜻으로 망대 비유를 하신 것이다[눅 14:25-35].







보기 나름 인식하기 나름이니 항구적인 실패로 보느냐, 악착 같은 끈기로 보느냐, 후자로 본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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