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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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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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창조에서의 '영혼과 육체' 구조

사람을 처음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셨으므로 이는 곧 영생하는 존재로 만들고자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피부도 자연계에 적응하여 살게 되어 있는 자연계의 동물처럼 털북숭이가 아니라 아주 매끈한 것이니 이는 나중에 신령(神靈)한 몸으로 변환될 것이어서 신령한 몸은 광채가 자연스럽게 발산되므로 그런 털이 필요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과 관계되어 성경에서 “생명”이라 할 때는 대체적으로 영생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성령 즉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육체’에 임하게 되는 ‘영혼’과 같은 의미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는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 6:63] 하심과 같습니다. 처음 아담을 지으실 때 육체를 먼저 지으셨고 나중에 그 속에 즉 아담의 코에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심으로 영혼을 조성하신 선례(先例)를 따름이니 곧 '새 창조의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 조성입니다.

그래서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으니, 여기서 “살린다”는 것은 영생하게 한다는 뜻이요 “무익하다”는 것은 영생과 관련되어서는 아무 유익도 없고 연관성도 없다는 뜻이고, “영이요 생명”이라 하심은 영생은 영혼과만 관련되어 있음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할 수 없는 현재의 인간 생명을 성경은 죽음으로 인식하고 생명으로 보지 않습니다[마 8:22].

그래서 처음부터 에덴낙원에서 아담에게 선악과(善惡果)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실 때 “죽는다”는 의미는 다름아닌 영생하지 못한다는 뜻이었고[롬 5:12] 그리하여 그 범죄의 결과는 영생하지 못하는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생명으로 전락함이었습니다. 때문에 아담 이후 노아 홍수 때까지 모든 인생들이 모두 천년 가까이 살았어도 한결같이 죽음이라는 데에서는 공통입니다. 일 만년을 산다 한들 결국 죽게 되는 목숨일진대 죽음이지 생명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는 과거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처럼 영생할 수가 없게 된 현재의 처지에 놓인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육체”로 보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 “영혼”처럼[아담의 육체에 영혼이 다시 조성되던 것처럼] 우리에게 임하시게 되는 것을, 우리의 구원 즉 “영혼의 구원” 또는 “영혼이 구원 받음”[히 10:39/약 1:21/벧전 1:9]이라 하는 것입니다. 즉 영생하지 못하는 죽음에 이른 영혼이 그리스도의 영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 하나 됨을 인해 아담 때와 같은 “산 영(生靈-창 2:7)” 곧 영생하는 영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영혼이 아니라 산 영 곧 영생하는 영이 되어 있으므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자연적으로 신령한 몸으로 변환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갖추게 된 그 뜻입니다. 아담이 영계인 에덴낙원에 들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것과 같은 과정으로 지금 그리스도[마지막 아담] 안에서 다시금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새 창조입니다. 이전의 과정을 부득불 제2차로 반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롭다”는 수식어가 붙게 되고, ‘새롭다’와 ‘옛 것이라’는 것과는 완전한 대칭을 이루므로 제3의 창조는 다시는 존재할 수 없고,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마지막 아담"이 되시는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 탈락되고 낙오되면 더 이상의 이런 창조는 없게 됩니다. 다시는 속죄하는 제물[히 10:26]이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나와 그리스도로써 이룩된 육체와 영혼이 이중 구조가 우리의 새 창조 그리고 다시 출생함 곧 우리의 구원이 되어 있으니 우리 구원의 성경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집니다.

즉 육체는 영혼을 절대적으로 따르게[추종하게] 됩니다. 아담의 처음 창조된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영혼을 따름이 되어 영계로 들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됨과 같은 이치입니다. 영혼의 주도(主導)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육체가 영혼을 주도하여 영혼은 완전히 육체[육신-롬 7:14-8:13]에 끌려 다녔던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제 비로소 이와 같이 영혼[새 창조에서는 성령께서 처음 창조 때의 그 영혼 역할]의 주도로 전환, 복귀, 회복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定罪, 斷罪)함이 없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롬 8:1,2]이라 함이 그 뜻입니다. 같은 내용으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4] 하였고,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갈 5:16] 했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므로 우리가 성령으로 살진대 또한 성령으로 행함이 마땅하다"[갈 5:24,25] 한 것도 이와 같은 '새 창조에서의 영혼과 육체'라는 새로운 이중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뜻을 깨닫기 전에는 "성령의 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성령을 따라 행함", "성령으로 행함", "성령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으나, 바로 이상과 같은 새 창조의 구조를 말함이라 할 때에는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극히 간단한 것도 성령께서 친히 짚어 주시고 깨치게 해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평생을 거쳐서도 알 도리가 없게 됩니다.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시지 않으면 이와 같이 지극히 단순한 것도 우리 머리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역 자 형태의 낫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기역 자가 어떤 형태의 문자인지를 모른다는 것을 표현할 때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고 하는데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마 7:7]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마음으로 항상 성경을 손 가까이 하기를 힘쓸 일입니다.

우리의 처음 창조에서 육체가 영혼을 따르는 것은 기계적이나, 새 창조에서는 우리 육체가 바로 나 자신을 가리키므로 영혼되시는 성령의 인도를 한사코 따르겠다는 나 자신의 의지가 관건임은 물론입니다. 즉 복종하겠다고 확고한 결심으로 그리스도를 "주님[내가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되어 있는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 주님"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진 자발적인 순종 곧 종 노릇이니 곧 사랑에 의한 순종입니다 .

따라서 나의 '영혼'이신 주님께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시는데"[히 1:9] 그 '육체'로서의 내가 무엇이라고 "의를 사랑하지 않고 불법을 미워하지 않음"으로써 육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며 "육신" 타령만 하고 앉아 있을 것입니까. 이 자체만 해도 이런 사람은 구원을 전혀 모르는 것이며, 자신은 구원 받았다고 하지만 자신을 속이고 있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내 안에 새로 '조성된 영혼' 다시 말해 내 안에 성령으로 임하여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당히 신령한 몸으로 변환될 수 있는 모든 필요한 요건을 완벽하게 갖춤이 되는 것입니다. 즉 "양자된 곧 몸의 구속(救贖)"[롬 8:23]으로 나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설명처럼 복종 즉 '영혼을 따르는 육체'로서의 자세가 필수입니다. 나 역시 그리스도처럼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이 당연히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스스로 판단해서 즉 "믿음에 있는가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우리 자신을 확증해야"[고후 13:5]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줄을 우리 스스로 알지 못하면 버림 받은"[:5] 상태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다시 말해 스스로 판단해도 내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이 없을 때 나와 그리스도는 하나 곧 "한 영으로 연합되어"[고전 6:17] 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음을 자가 진단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경우 회개하여 속히 그리스도께 돌아올 일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리스도께 아직 오지 않고서도 온 줄로 자신을 속여 왔을 따름입니다.

영혼과 육체 관계는 달리 표현하면 몸과 머리 관계입니다. 고로 이런 한 몸 체제에서의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에서 벗어나는 심사(心思) 언행(言行) 일체가 죄, 악, 불법, 불의입니다. 이는 당연하니 선(善)과 의(義)에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한 몸의 구조와 체제로 살지 않고는 이상적으로 행복하게 살 방법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한 대로의 자기 부인이 아닌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이기주의, 개인주의는 생명과 원수가 되고 물과 기름 사이며 결코 상호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한 쪽이 생명이면 다른 한 쪽은 필연적으로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순신과 '나'원균

공동체 의식과 그렇지 않은 개인주의의 실상과 그 결과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임란 당시의 이공(李公) 순신(舜臣)과 '나'원균(元均)의 행적에서 역력히 드러나고 있어 아주 귀중한 교훈이 됨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공은 이런 공익정신이 유달리 철저했기 때문이요 반면 '나'원균은 그렇지 못한 우리 평범한 대다수 일반인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경우 원균을 가리켜 말할 때 “나”원균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합니다. 원균이 따로 있지 않고 내가 바로 원균이요 우리 모두가 대개 원균이라는 뜻에서입니다.

원균만을 특별한 인물로 지목함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일본 천하를 통일한 풍신수길이 그 남아도는 무력을 분출시켜 중국까지 넘보겠다는 야심으로 일으킨 전란에서 일본은 한반도를 보급 기지로 삼아 산동 또는 요동 반도를 침략하려고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이동 중이었는데 이공(李公)이 두 번씩이나 이를 완전 차단 격퇴시켜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구원해 낸 것입니다. 시의적절하게 무장(武將)으로 입신(立身)하였기에 그렇지, 그런 공익정신이야말로 정치에 뜻을 두었으면 주공(周公) 단(旦)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상가로 나섰으면 오늘날 중국이 그네들의 상징적 인물로 갑작스레 부각시키려 하고 있는 공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공익정신, 공동체의식을 부양시켰던 인물들입니다. 이렇게 단언하게 되는 것은 이공의 힘의 원천이 그 철저한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장으로서의 실력과 용맹도 물론 비범했지만 그보다 핵심 요인이 바로 그런 철저한 공동체 의식에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나'원균은 이공에게 일마다 방해가 되었고 '나'원균이 들어 기울어지게 되었던 국운을 이공의 그 공익정신이 번번이 2차례에 걸쳐 바로 세운 것입니다. 첫 번째는 '나'원균이 들어 활짝 열려 젖혀졌던 중국 침탈의 관문을 한산도 해전에서 굳건히 닫아 걸어 차단시켰고, 두 번째로는 역시 '나'원균으로 인한 우리 수군 전멸로 다시 열려 젖혀진 문을 명량 해전에서 다시금 차단시켜 일본군으로 하여금 최종적으로 그 야욕을 포기하고 부득불 회군(回軍)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든 계기를 이룬 것입니다.

일본의 대륙 침공을 2차례에 걸쳐 무산시킨 것입니다. 이공의 해전(海戰) 덕에 권율 등의 관군이 힘을 얻었고 의병이 기세를 돋우었고 명나라 군대도 원군(援軍)이라는 이름으로 으스대고 들어오게 [명군(明軍)으로 인한 폐해가 왜군으로 인한 것보다 오히려 더 심했다고 하니] 된 것입니다. 이공이 아니었다면 한반도는 완전히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 관군도 의병도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중국 대륙도 전화(戰禍) 속에 만신창이가 되어 원군커녕 제 밥 차려 먹기도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가정(假定)해서 '나'원균과 이공의 개전(開戰) 초(初) 위치를 맞바꾸어본다고 칩시다. 이공은 전쟁 발발 불과 2개월 전에 부임하고 '나'원균은 1년 시차를 두고 전라좌수영에 자리잡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2개월의 여유밖에 없다 해도 그래서 거북선 제조는 시간이 부족해 불가능했다 치더라도 병선(兵船)과 군비와 “즉사생(卽死生) 생즉사(生卽死)”에 입각한 훈련만은 철저하여 죽기를 한하고 적과 맞붙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중과부적이라 그래서 전군 전멸의 위기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원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대 앞에서는 적의 예봉도 꺾일 수밖에 없어 멈칫하는 사이 '나'원균의 전라수군이 가세해 왔을 것이니 일단 적은 격퇴되었을 것이요 범과 같은 우리 수군이 건재하는 동안은 감히 일본이 또다시 바다를 건널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학습 효과가 있는 터라 우리도 전력(戰力)을 가다듬어 대비했을 것이기에 구한말 일제의 한반도 침략도 이야기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나'원균 한 사람의 자세 그리고 이공 한 사람의 정신이 한반도와 중원 천지를 가름해 놓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책임이 그만큼 크고 ‘한 사람’의 힘이 그토록 위대하다는 것이고 반면에 한 사람의 자기중심으로 인한 무책임이 또한 전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논하게 되는 것은 ‘한 사람’의 가치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한 사람’ 이공의 힘으로 중국 대륙의 민생들도 전화(戰禍)로부터 구출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가치라기보다 그 한 사람의 정신의 값어치입니다. 철두철미한 공동체 의식의 결과물이 이처럼 위대하고 괄목하고 가히 '생명적'입니다. 만면 자기중심의 폐해는 죽음과 파멸 그것임을 여기서 우리는 정확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공동체 의식의 핵심은 그 자주 정신, 주인 의식에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스스로 자발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니 거북선 조립도 신립(申砬) 같은 유력자가 반대를 하는데도 그리고 당시 조정으로서는 일절 관심이 없음에도 이공 홀로 자기 신념대로 밀고 나갔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나'원균으로 인한 우리 수군의 전멸로 실질적으로 아무 가망도 없는 우리 패잔 병력을 이끌고 10배 또는 그 이상이 되는 적을 상대하여 맞선 것도 이공의 그런 정신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적(敵)은 우리 수군의 전멸로 상대적으로 의기충천해 있고 우리 군사들은 아무리 "이순신"이라 한들 군사도 배도 없는 마당에 질 것이 뻔하다 하여 기세가 완전히 꺾여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기(意氣) 하나로 나섰던 것입니다.

통제사직을 복구시켜 주면서도 조정은 해전(海戰)은 이제 글렀으니 바다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 싸우라 하였지만 이공은 스스로 바다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조정(朝廷)을 설득시키고 그대로 전투를 준비시켰습니다. 대단한 주인 의식입니다. 단지 적과 싸우면서 죽을 따름이라는 무모(無謀)한 기개(氣槪) 하나만으로 임한 것이 아니라, 단 12척으로도 기죽지 않고 주눅들지 않고 마치 적과 대등한 전력을 갖춘 것처럼 세심한 준비를 다했습니다.

명량해협의 지형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살펴둠으로써 최대한 활용하고, 바다 밑에 쇠갈고리를 만들어 적선으로 하여금 걸려 들게 만들고, 섬(島) 여기저기에는 볏짚 단을 쌓아두어 멀리서 볼 때 마치 노적가리[군량미]를 쌓아 둔 것처럼 하여 적을 속이고, 피난민선들을 배후에 정렬시켜 마치 전투에 투입할 배가 아직도 얼마든지 있는 양으로 위장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거북선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거북선이 승리의 요인이 아니라 이공의 자주 정신, 주인 의식이 승리의 관건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대목입니다.

이 명량해전을 거론할 때마다 한국인의 기개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대목이기에 누구나 신바람이 나는 것입니다. 가당찮은 기개, 한국인의 기개입니다. 이런 위대한 교훈을 유례 없는 큰 축복으로 타고 났으면서도 일개 구국 무장(武將)으로만 인식한다는 것은 민족적 수치입니다. 한국인의 끈질긴 결코 꺾일 수 없는 불굴의 감투 정신을 유감없이 대변한 것이니 이런 것이 공동체 의식의 대표 정신입니다. 공동체 의식은 전체 곧 ‘우리’에 그 중심을 둡니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자기 자신이 그 중심입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입니다. 이 경우 '나'원균 같으면 승산 없는 전투라 하여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입니다. 이공처럼 치밀하게 전투를 준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하여 아예 꿈도 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개전 초 '나'원균의 태도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우리 군의 실력이 적과 대등하다 싶었으면 용맹을 발휘할 만하다 판단하여 싸우려고 했겠지만 바다를 까맣게 뒤덮고 오는 적의 위세 앞에서는 승산이 없다 미리 판단하고 이런 전투는 무의미하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 '나'원균입니다.

승리 다시 말해 자기 개인의 공덕 쌓기에만 중심을 두는 것이 자기중심의 모든 폐해입니다. 당시 조정에 올린 '나'원균의 보고에 “적선 10척 정도를 깨뜨렸다” 한 것은 그의 평소의 행위를 두고 판단할 때 소위 대장이 되어 보고를 올리면서 싸우지도 않았다는 말을 감히 하고 싶지 않아 허위 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 정도의 막강한 적의 세력을 맞아 10척이나 손상을 입힐진대 반드시 우리 측 손실도 있게 마련인데 그런 언급은 전혀 없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아니라면, 적의 그런 대군 앞에서 그 정도라면 혁혁한 전과입니다. 따라서 그 기세를 몰아 내처 전투에 임했을 것입니다. 전투를 중단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잇달아 쌍방 주고 받은 손실과 이득의 전투 결과에 대한 보고가 반드시 뒤를 잇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의 감독 장관들은 '나'원균이 배를 모두 자침(自沈)시켰고 군사를 모두 흩어 치웠다고 보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자신 육지로 상륙하려다 부하의 권유로 인해 겨우 전라 수군에 합류한 것으로 일치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나'원균 휘하에 수군 일만이 있었다고 유성룡이 술회하고 있는데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일본군의 침략 길목인 이곳에 그 정도의 병력은 [실제 숫자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치더라도] 어떻게든 배치하려 했을 것임은 명백합니다. 이는 당시 조정이 전란이 일어날 것을 부인할 수도 시인할 수도 없는 반신반의하는 처지에서 이공과 같은 한낱 현감에 불과한[이 역시 이공의 강직한 평소의 공익(公益) 정신이 스스로 불러들인 "불우한" 결과이지만] 인물을 일약 수군절도사라는 중책에 앉힌 것으로도 입증됩니다.

본격적으로 육군은 증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선 바닷길이나 막아놓고 보자는 뜻에서 경상도 수군만은 증강시켰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일본 사신으로 갔다가 거짓 보고를 했던 김성일은 마땅히 극형 감이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당시 전란에서 정성을 다했다 하나 나폴레옹이 그 부하들에게 “정확한 정보가 생명이다” 하고 거짓 없는 보고를 명했다는 사실을 인용하지 않아도, 민심이 동요될까 하여 진실을 숨겼다는 구차한 변명이 통할 수 있는 당시 사람들의 한심한 의식 수준이 화근을 자초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나'원균은 당시 세도가인 윤씨[윤두수] 일가와 인척 관계에 있고 윤씨 일가는 임금과 또한 연줄을 맺고 있어 이를 기화로 '나'원균은 부지런히 뇌물을 만들어 갖다 바쳤습니다. 그래서 김성일 못지 않게 극형 감이지만 끈질기게 명줄을 이어갔고 나중에는 이공을 밀어내고 통제사직까지 차지하여 소원을 이루기도 했고 죽어서는 감히 이공과 더불어 나란히 소위 "선무(宣武) 일등공신"으로까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런 것이 세상입니다.

이공의 공동체 정신은 그의 평소의 언동에서 일찍부터 드러납니다. 정정당당하게 자기 실력으로 모든 일을 이루기를 원하여 권문세가에 빌붙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무과 급제 후 무관으로 첫 발을 내딛을 시절 그의 인품을 알고 직속 장관인 당시 병조판서가 자기의 서출(庶出) 딸을 소실(小室)로 주려 해도 거절했고, 먼 친척뻘인 이 율곡이 당시 관계(官界)를 주름 잡던 이조판서 자리에 있어 그를 한번 보고자 해도 모두 사절했습니다.

실력 없이 배경과 연줄로 권세를 잡는 당시 세태를 보고 이는 도저히 용납되지 못할 일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평소 그 신념대로만 살아 융통성 없다는 소리를 귓전에 들어도 그의 소신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당시의 국방부[병조]에 들어가 인사 담당 업무를 볼 때 상사가 청탁을 해 와도 순서대로 진급을 해야 함을 당당히 주장하여 그 압력에 굴하지 않았고, 관사(官舍) 앞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달라고 상관이 요구를 해도 공물(公物)을 사사롭게 쓰는 것은 부당하다 하여 그 압력을 배제한 기백(氣魄)이었습니다.

그런 일들로 하여 상관들에게 밉보여 앙심을 품은 그들의 사사건건 방해에 진로가 막힘으로 인해 임란 이전에는 현감(縣監) 정도로 겨우 전전하면서 불우하게 대접 받아 온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공익, 공공정신이건만 국가적 대 전란(戰亂)을 맞는 위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제 빛을 발휘하여 구국 위업을 성취한 것이니 이런 것이 세상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공 역시 이름 없이 그냥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공이 우리에게 끼치는 역사적 교훈은 아주 절묘한 배합의 결과이기에 그 희소 가치야말로 온 인류사를 통틀어도 유일한 것이라 감히 말하게 됩니다. 이렇듯이 공동체 의식과 그렇지 않은 자기중심의 삶의 자세가 일조유사시 얼마나 현격한 생사의 갈림길로 갈라놓는지 이공과 '나'원균의 대비된 삶으로써 충분히 증명되어 역사적 교훈으로 세계 만방에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역사적 사례는 실로 찾기 어렵고 유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은 아직 그런 의미로 지금까지 세상에 공개된 실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극적으로 두 인생관이 극명하게 대비(對比)되어 그림이 그려지고 그리고 그 가시적인 결과가 전쟁 중의 승패로 그 명암(明暗)이 실로 선명하게 가려져 나타난 사례(史例)는 인류 역사상 우리의 이공과 '나'원균 외에는 없습니다. 있었다면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역사의 선물은 흔치 않은 것으로서 우리는 이 점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적 소명을 느끼게 됩니다.

즉 이러한 공동체 정신이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처방이라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전달하는 의무와 책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예로부터 사대주의에 물들어 괜찮은 이웃 것은 추종[모방과는 다른]하려 들고 나보다 못한 이웃은 멸시하려 들고 내 스스로의 것은 발전시키고자 아니하는 이런 자주 독립성의 결여는 실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이공과 같은 인물이 있는 반면, 이런 실상은 일반적으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삼국통일을 못했으면 못했지 당나라의 힘을 빌려 통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이공 순신이 중국 대륙을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출해 준 사실은 완전히 무시하고 이공 덕분에 명줄이 붙어 있게 되자 원군으로 와서 행세한 중국은 은인의 나라라고 감지덕지하는 도무지 귀감이 될 수 없는 부끄러운 역사를 지닌 우리네 선조들입니다. 자기의 가치는 개발할 줄 모르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민족에게는 모름지기 압박의 쇠사슬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구한말의 비극이 그 증거 중 하나입니다. 공동체 의식의 이상적(理想的) 화신(化身)으로서의 세계적 귀감으로 우뚝 선 이공의 진정한 가치는 알지 못하고, 단지 일개 무장(武將)으로만 해석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게 됩니다. 역사를 멸시하면 그 민족은 필멸입니다. 얼마 전만 해도 각종 고시에서 역사 과목을 빼 버렸습니다. 의식 수준이 현재 이 정도로 되어 있음에 경각심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 된 한 몸으로서의 형태는 군대에서 잘 드러납니다. 지휘관을 잘 만났든 못만났든 어쨌든 그 부대는 지휘관을 머리로 하여 수족 같이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덩치가 되어 한 몸 같이 움직이는 것이 군대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여럿이 한 몸 체제에서 머리를 갖추어 일사불란하게 법질서 아래 움직이는 것만이 진정으로 자기를 확대시켜 사는 사람 삶의 도리요 지혜입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만은 모두가 자기중심이므로 "이상"으로만 통하고 그것이 "현실"적일 수가 없다는 데에 모두가 인식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독재가 아니면 이런 자기중심의 대중을 제어할 수가 없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러나 세상 독재는 거꾸로 더욱더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일개인의 탐욕의 도구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고로 이 죽음의 세상에서는 방법도 대안도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우리 각자 즉 '몸의 각 지체'를 위해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시고 다 바치신 머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대로 '나'원균과 전공을 다투는 사사로운 마음이 이공을 지배했다면, 당시 풍조에 휩쓸려 당연히 원균처럼 뇌물부터 썼을 것입니다. 그가 잡혀 매질을 당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뇌물만 쓰면 풀려 난다고 귀띔했지만 “명(壽命)은 하늘에 달린 것이다.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것이다” 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그의 이런 생활 신조는 그의 난중일기에서부터 입증되고 있습니다. "뇌물만 쓰면 죽는 사람도 살리는 세상"이라고 이를 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모두 명에 있다는 사고 방식대로 하면 전공(戰功)은 싸우기 나름이므로 죽고 사는 것처럼 인력으로 억지로 만들어 낸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인생관이기에, '나'원균 따위와 전공을 다툴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임은 당연합니다. 이와 같이 이공은 모든 사람은 자기 실력대로 자기 앞길을 닦아 나갈 일로서 원리원칙대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신념이었고 이것이 공동체 생활에서의 핵심임을 믿은 것입니다.

이공이 젊었을 때 먼 친척뻘인 당시 이조판서[관리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주무부서 장관]이었던 율곡이 이공의 인물됨을 듣고 이공의 죽마고우 유성룡을 넣어 스스로 한번 만나자고 청을 했어도 자기 실력으로 출세할 일이지 배경과 연줄에 의탁하지 않겠다고 하여 만나기를 거절하자 친구의 호의를 그토록 매정스럽게 물리칠 수 있느냐 하며 유성룡 자신 이순신을 탓한 적이 있을 정도였던 것은 앞에서도 소개했습니다.

일찍이 상관의 부당한 청탁을 두 번이나[하나는 병조 인사 담당관이었을 때 승진에 대한 직속 상관의 청탁을 거절했고, 다른 하나는 관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사적인 목적에 쓰려고 상관이 베어 달라 했을 때 이를 공물(公物)이라 하여 감연히 거절하는 등] 물리침으로써 그들의 미움과 방해로 인해 임란 직전까지도 한직(閒職)으로 좌천되어 맴돌았던 그가 갑자기 공명심에 들떠 그런 전공을 다툴 리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공사(公私) 구별이 철두철미하여 출장을 나갈 경우 출장 비용으로 양곡을 배정 받아 가면 업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혹 그간 사용하다 남은 것이 있으면 다소에 구애됨이 없이 반드시 이를 국고에 귀납시켜 상사들도 탄복해 마지않았다고 합니다. 현직 대법관 한 분은 이러한 이공의 정신에 감명 받아 자기도 공직생활에서 그렇게 했더니 탄복하기는커녕 되레 담당자로부터 핀잔만 받았다는 술회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올곧은 공동체 의식이 세계 전사(戰史)에 유례없는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것입니다. 당시 조정으로서는 병력이나 무기 등은 물론 쌀 한 톨의 군량미도 보조해 줄 능력이 없는 형편에[이런 사정은 개전(開戰) 초에도 마찬가지여서 그 때는 오히려 이순신으로부터 병력을 포함하여 일체를 긁어 가는 판이었음] 순수히 무원고립(無援孤立) 혈혈단신으로 패잔병력 12척[그나마 완전히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는]을 이끌고 나아가 우리보다 10배 이상의 병력에다 사기까지 충천해 있는 적을 맞아 대파하고 제해권을 되찾은 것입니다.

도저히 승산이 없으니 해전을 버리고 육전(陸戰)에 임하라는 조정의 명령에도 해전의 중대성을 적극 내세워 설득시키고 그리고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라는 천하의 명언으로 종결지은 뒤, 마치 적과의 대등한 처지에서 싸움을 준비하는 것처럼 주도면밀하게 대처한 결과였으니, 이 명량해전에서는 거북선[애초 3척 가량으로 처음부터 혁혁한 무공을 세웠던]도 '나'원균으로 인한 우리 수군의 전멸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순신은 주인의식으로 일관하여 그런 위업을 이룬 것입니다. 이 주인 의식이라는 것은 스스로 주인이 되겠다는 개인적인 야심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승전으로 인한 국민적 인기를 빌미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과 같은 이성계의 야심은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공동체 의식에서 잘났든 못났든 한 임금을 중심으로 한 몸의 원리에 충실하여 뭉쳐 지체(肢體)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하겠다는 것이 주인 의식입니다. 바로 그 정신이 국가를 살리고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한 것이고 이웃 중원 대륙을 도탄에서 구한 것입니다.

때문에 임금의 제일(祭日)이 오면 반드시 북향(北向) 재배(再拜)하였습니다. 임금과 조정은 이성계라는 전례(前例)가 있으므로 그런 난리 통에도 이순신을 견제하려는 마음부터 작동했지만, 이성계와 같은 야심은 개인주의이지 공동체 정신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을 기려 ‘이순신 정신’이라 합니다. 이공만 그런 정신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정신의 결과가 일구어낸 역사적 교훈이 세계를 통틀어도 구경할 수 없이 혁혁했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기에 대표성을 부여하는 것뿐입니다.

공동체 의식의 결과와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자기중심의 결과가 이렇게 선명하게 서로 대조되어 그것도 괄목할 만하게 대규모의 전쟁이라는 무대에서 역력히 나타나 있는 역사적 실례가 없기에 우리는 이를 부각시키고 선양하는 것입니다. 영국은 셰익스피어를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면 우리는 이공 순신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라고 해야 마땅한, 그런 역사적 교훈의 세계적 자산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는 모든 세계인들이 액자로 만들어 걸어둘 만한 천하의 금언입니다. “아직 12척이 남아 있고 그리고 내가 죽지 않았다”-실로 인간정신의 고금(古今) 없는 사자후(獅子吼)입니다. 인생 삶의 패배자임을 자인(自認)하고 자살하려는 이들은, “내가 가진 건강이 있다, 그리고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 하고 소리 높여 외친다면 하나님 주신 삶의 유종의 미(有終之美)를 거둘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상 '나'원균과 이공 순신의 예는, 죄(罪)가 무엇이며 의(義)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보여 주는 실례(實例)입니다. 죄가 어떤 결과를 낳고 의가 어떤 결과를 내는지 그 적확(的確)한 사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공동체 의식이요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자기중심의 이기주의, 개인주의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죄의 결말이 죽음이고 그래서 의에 대하여 순종하라 하시는지 그 명백한 전말(顚末)을 이 역사적 교훈으로써 보이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는지”[히 1:9], 따라서 우리가 왜 의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하나쯤이야 어떠랴” 또는 “나 하나가 무엇을 하랴”는 고질적인 안일한 자세를 확 뜯어 고쳐 줄 수 있는 실증(實證)입니다. '나'원균의 위치에 이순신을 두어 이순신이라면 그 경우 어떻게 했을까 가정해 보면 명백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뜻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을 목표하고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안개 잡듯 구름 잡듯이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애매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어정쩡한 인식으로는 아무 일도 다잡아 할 수 없습니다. 적을 모르고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죄의 정체를 모르는데 어찌 죄를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가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이기는 자”로서 “이기는 자”만이 가능함을 성경이 명시합니다[계 2:7,11,17,26/3:5,12,21/21:7].

올바르고 선하고 당당히 살아 모두가 예외없이 행복해지는 묘법을 가르치는 삶의 지혜가 그리스도 구원의 요체라고 해서 세상이 이를 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제외시키면 그것이 현실성이 없어 이상주의에 그치므로 외면당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것으로 현실화했을 때는 영원한 구원과 직결되어 있으므로 이 세상 지배자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를 절대로 좌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올곧은 사람 삶의 가치와 법질서를 가르치는 것은 죽음의 고난과 맞바꾸는 일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례를 이미 이공 순신의 생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음지에서의 [임란 전까지] 온갖 장애와 그에 따른 불우함에 시달려야 했던 것은 앞에서 소개했습니다. 인류의 원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직접 개입이 없어도 자기중심 일색인 세상의 생리만으로도 그러한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적극 관여하는 경우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공은 왜적이 퇴각하는 마당의 노량해전에서는 전쟁과 함께 사라져 버릴 각오로 갑옷을 입지 않고 진두 지휘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향리로 돌아가 일개 평볌한 농사꾼으로 밭 갈며 평화롭게 세월을 보내며 살리라는 소박한 대장부의 소원 하나도[이공이 그렇게 자기의 시에 읊었으므로] 당시 사회는 수용해 줄 아량도 배포도 이상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색깔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앞서의 지적대로 이공의 하늘을 찌를 듯하는 공덕을 시샘하고 그리고 요주의인물로 지목하여 무슨 트집을 잡든지 해서 전쟁이 끝나자마자[왜냐면 전쟁이 끝났으므로 이용 가치가 없기에] 불명예스럽게 그 목숨을 노릴 조정이나 선조의 뱃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미련 없이 그렇게 스스로 전쟁과 함께 사라져 버리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3운법칙에서 보듯이 강제로 통할하지 않으면 안되고 따라서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결론밖에 얻을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사랑하고 삶의 낙을 꾸려가려고 시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온갖 중상모략을 하고 속임수를 베풀고 물 타기 작전을 하는 등 그야말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인 그리스도의 복음(福音, 복된 구원의 소식)과 맞서 온 것이 이 세상 임금이요 신(神)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행티입니다. 이제 마지막 때에 이르러는 더욱 기승을 부려 [절정에 이를 정도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와 그 복음 사업을 방해하여 참혹한 살육을 감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에도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 다 죽이게 한다"[계 13:15]고 했습니다.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요 15:20]이라 하신 대로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이런 사정은 결코 변함이 없을 것이니 그리스도 친히 그와 같이 핍박을 받아 무참한 십자가 고난의 죽음을 당하셨으므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로서의 오늘날 우리 역시[:20] 그런 참혹한 죽음을 항상 각오하고 있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진실이요 진리요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올바른 가르침이 이 세상에서 환영 받지 못해서 항상 그 제자들의 수효가 소수에 그치고, 세상이 또한 자기중심 일색으로서 완악하다는 사실은 일반인도 대개 다 인식하는 처지이다보면 이런 악한 세상에서 가증스럽게 여김을 당한다는 것을 미리 예언하고 세상 끝까지 그렇다고 단정해서 확언할 때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아니고는 한마디로 말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아는 대로 세상의 그 어느 종교도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고 말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세상의 핍박과 탄압을 강조하여 예견하면서도 오늘날까지 창성한 예가 [그것이 가짜로서의 사이비든 아니든 간에]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성경대로 하면 진짜는 항상 소수일 수밖에 없는데도 이처럼 도리어 가짜가 거대 세력을 이루어 세상에 군림한 것 자체가 그 제2의 증명이 되는 것이니, 왜냐면 성경만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으로서 설명하고 있는데 바로 그 신적(神的)인 권능(權能)으로 그런 가짜[似而非]를 만들어놓고 있음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진짜보다 가짜기 이와 같이 흥왕(興旺) 창성하는 법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정신문화의 꽃으로 자타 공인되는 종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종교라는 뜻이 아니라 이를 모방한 가짜이기 때문에 종교가 되어 있고 종교로서 행세하고 있다는 뜻]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은 절대로 인간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인간 외적인 타력에 의한 조종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미리 말씀하신 경고[세상에서 핍박의 대상이 되어 약하고 소수라는]와는 달리, 세상 권력[정치 세력]을 등에 업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서반구(西半球) 유럽 세상을 주름 잡으며 군림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사람마다 침입해서 들어가는 것이고 침노, 침범(侵犯)하여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마 11:12/눅 16:16]. 세상의 갖가지 박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자기의 소신대로 나가야 이런 진리의 삶으로 시종일관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에서의 주인 의식에서 오는 적극성 능동성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함입니다.

이와 같이 함께 일함의 좋은 표본은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정복 길에 들어섰던 여호수아의 교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여리고에서 처음 전쟁을 수행하기 전 문득 눈을 들어 보니 칼을 빼어 든 한 장수가 자기를 마주 대하고 있기에 누구냐고 수하(誰何)를 하자 대답이 “나는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라” 했습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즉각 그 앞에 엎드려 분부를 내려 주기를 바라자,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수 5:15] 하기에 여호수아가 그대로 하였다고 그 사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하나님의 뜻과 말씀은 충분히 전달되었으니, 왜냐면 그 “군대장관”이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 하고 “네 한 쪽 발[a foot]의 신을 벗으라”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세가 불은 붙으나 타지는 않는 가시덤불 앞에서 똑같이 주님[천사를 통해 나타나신]을 뵈었으나 모세에게는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하셨지만 양쪽 발[feet]의 신을 모두 벗으라 하신 것과 차이가 있어 그렇습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를 구분하지 않았으나 한 쪽 발과 양발과의 차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의 경우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침내 강림하셨다는 의미이나, 여호수아의 경우 이스라엘과 함께 싸우시는 즉 우리로 말하면 함께 일하시는 모습을 취하심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그와 같이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한 쪽 발이 딛고 선 땅은 하나님께서 계시므로 거룩하고 나머지 발이 디딘 땅은 그렇지 않으니 이스라엘[여호수아로 대표되는]이 딛고 선 땅으로서, 즉 이스라엘이 가는 어디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그 싸움을 같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양 발이 한 발은 하나님의 것이고 한 발은 이스라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위치가 바로 그와 같은 한 쪽은 하나님, 다른 한 쪽은 우리 각 사람 자신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교훈을 주셨고 가르치셨으나 여호수아는 이를 명심하여 매사 하나님 친히 함께 하심을 알고 그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하는데, 정작 중요한 대목에서 깜빡 그 사실을 잊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기브온 거민(居民)들이 속이고 나왔을 때 ‘함께 계시는 주님’께 이를 마땅히 상의(相議)했어야 하는데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를 성경은 책망하고 있습니다[수 9:14]. 기브온 사람들이 속여 거짓말을 할 때 일단 하나님께 여쭈었어야 하는데[그것이 거짓말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이 중요한 일을 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일방적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심이라는 동시성과 양면성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싸움은 전투를 해서 이기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고 이 경우 마땅히 주님 앞에 여쭙고 그럼으로써 진상을 간파하는 데에 주님 친히 함께 싸우시는 의미가 있는데, 이런 중요한 대목에 임하여 그 현장에서 즉시 아뢰어야 할 것을 아뢰지 않고 마치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처럼 자기네들끼리만 의논하고 판단하여 결정을 내려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그 잘못을 깨닫게 하셔서 강제로라도 아뢰도록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점을 우리는 항상 크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유 의지의 영역이므로 이를 간섭 또는 강제하실 수 없다는 것이니 이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떨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항상 주동적으로 움직이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왜냐면 그렇게 되도록 완전한 자유 의지의 선택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어 스스로 걸어 다니기를 바라지 언제까지나 걸음마를 배우고 손 잡아 걷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그렇게 창조를 하셨기 때문에 이는 영원히 변경될 수 없습니다. 다윗이 범죄할 때[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고 이로 인하여 우리아를 죽게 만들 당시] 그 현장에서 이를 억지로라도 막아 범죄하지 못하도록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일이 다 될 때까지 지켜만 보시다가 일이 끝난 다음에야 준열한 책망이 임했습니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범죄할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것이 진정 자주 독립성입니다. 자유 또는 자유인의 의미입니다.

야곱도 아들 요셉이 죽었다고 그 아들들이 거짓말을 할 때 당연히 하나님 앞에 기도로[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하리라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으면 요셉이 특별한 죄를 짓지 않은 이상 그렇게 허무하게 죽게 버려두실 리 없다고 판단하여] 여쭈어야 하는데도, 그렇게는 하지 않고 아들들의 못된 말만 더 믿을 때, 이를 강제하여 기도하게 하시거나 또는 진실을 말씀해 주시거나 하지 않은 것이 모두 인간의 이 자유 의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고 일깨워 주신 것으로써 충분히 그런 판단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할 만한 일인데도 그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도 말하자면 속수무책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강제하거나 간섭하실 수 없는 까닭입니다. 여호수아 역시 위의 야곱과 같은 예이고 다윗도 역시 그렇습니다. 광야 길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그토록 오래 참으시고 교육하시고 경고하셨고 그렇게 열 번이나 하셨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 이상으로 해 주신다 해도 이미 한계를 넘어선 터라 더는 어찌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 순간 즉 갈렙과 여호수아 등 열 두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정탐꾼으로 보낸 결과 여호수아와 갈렙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믿지 않고 원망하기 시작했을 때 더 이상 용납하지 않으시고 광야에서 60만명[20세 이상의 장정들]이 모두 탈락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시험하시는“[창 22:1]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말 번역은 ”시험하다“로서 동일한 말이지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하는[to tempt] 것과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to test]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시험을 하시지도 않는다[약 1:13] 했는데 이는 당연히 전자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서 이상과 같은 경우와는 달리 여하한 조건에서도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개 그 시험에서 넘어진 경우이므로 우리에게 경고와 거울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것은 바울이 지적한 대로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딤후 3:15]가 됩니다. 우리를 시험해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는지 하나님이 모르시기 때문이 아니라[만일 그렇다면 어찌 “미리 아시고” “미리 택하셨다” 하리요], 이 세계는 하나님 홀로 존재하시지 않고 피조물들과 불가분이라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에 공감하고 그래서 모든 사연을 공동으로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모세의 인도를 받던 이스라엘을 스데반이 “광야 교회”라 성령으로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은 오늘날 우리[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탈락된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 역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아도 택하심을 받은 자는 적습니다. 그런 만큼 그들이 그와 같이 걸러지고 솎아진 것처럼 우리도 솎아지고 추려질 것인즉 "조심하는"[고전 10:12]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먼저 시작된다[벧전 4:17]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선악 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기” 때문이라 하였고,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한다 하였습니다[고후 5:11]. 솎아지고 걸러질 수밖에 없는 것은, 천국이 한 몸의 원리에 의한 삶의 체제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으로 고집스럽게 나가는 이들은 제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이 없는 이들은 암적(癌的) 존재로 남아 주변을 망가뜨리게 될 것이므로 이런 일을 사전(事前) 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영물들 중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이 걸러진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 존재들이 걸러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을 비롯한 이런 영적 존재들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유가 생명이고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행위를 결정하므로 그렇게 악으로 나올 경우 하나님도 그 누구도 이를 강제로 제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의 한 발은 내가 딛고 선 땅이고 다른 발 쪽은 하나님이 딛고 서 계신 이 모습은, 비단 여호수아 당시와 같은 싸움에서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그러함을 성경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정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동시성과 양면성의 이치입니다. 왜냐면 사랑은 상호 교류로서 일방적이 결코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함께 움직임이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되고 하나되어 있음이 우리의 구원의 골자임과 같습니다.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나 죽고 사는 것은, 오직 구원 얻을 자를 구출하기 위한 목적뿐인 이 세상에서 일시적인 임시 방편의 현상들이기 때문에, 기계적인 강제력[통제]이 트리니 호모에서 입증된 것처럼 필수적이나[왜냐면 인간의 악행을 강제로 저지해서라도 정작 구원 받을 사람들은 그 미리 아시고 택하심에 따라 보호될 필요가 있어], 항구적인 생명의 세계는 그런 간섭이나 강제가 절대로 용납되지 않으므로 그 때 가서 이러쿵저러쿵 할 것 없이 아예 이 세상에서부터 각자의 정체를 가려내어 선별(選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영원한 운명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의미이므로 이미 설명한 대로 강제가 아닌 어디까지나 자기 선택에 나타나는 결과를 따름입니다. 즉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게 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이나 그리고 악인들이나 자기의 자유 선택의 결과입니다. 양심의 가책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좋아하고 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는 응보입니다. 의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경우처럼[빌 2:8/히 1:9] 불법을 미워하되 죽도록까지 철저히 미워함으로도 나타납니다[히 12:4].

이공 순신(舜臣)은 항상 공(公)을 앞세우고 사(私)를 나중에 돌렸습니다. 즉 나 자신보다 '우리'를 우선시하여 거기서부터 갈래를 잡아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공익 정신 즉 공동체 의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사'를 생각하지 말고 '공'만을 위하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정도가 다르고 수준이 높다는 것이 아니라 실상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자기 부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사람 생활은 이공이나 주공주공(周公) 단(旦)이 나타낸 공동체 의식 이상 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 세상의 보단 나은 삶을 위해 당연한 것이나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본격적인 삶은 이 세상을 원인으로 하는 결과로서의 오는 세상이므로 그렇게 피상적인 것으로는 불충분한 것입니다. 완전한 삶은 완전한 삶의 자세가 필요한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자기 부인의 필요성이 절대적입니다. 이는 우리가 '행함'으로써 즉 하나님의 율법[계명]을 지킴으로써 구원되지 못함 즉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못받고 의인이 되지 못한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첫째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도 있듯이 또는 현재의 결과를 해결하려면 그 원인을 찾아 근치(根治)를 해야 하는 것처럼, 이미 만들어놓은 죄와 그 대가인 죽음의 해결부터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죽게 되어 있는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일단 죽지 않고는 영원히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죽는 것은 죽는 것이지 다시 살아나는 법이 없고 다시 살아나면 그 자체가 죄인은 죽는다는 법질서의 유린이 되어 버립니다.

둘째는 현재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말미암은 "육신"[롬 7:14-8:13]의 작용이 영원히 종식되어야 합니다. 파괴되고 폐기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내 육체는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죽었다고 해도 다시금 살아나야 하는데 이렇게 합법적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하나되어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켜 순종을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입니다. 의는 자기 부인에서 나오고 불법은 자기중심에서 납니다. 천국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의 구조이므로 따라서 몸의 각 지체는 머리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어 이는 필연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구성원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고 천국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에서나 이 세상에서나 사람 사는 법은 마찬가지로서 한결같으니 곧 한 몸 체제로서의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입니다. 앞에서 이공 순신의 행적이 바로 이런 삶이 올바른 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것과 동의어(同義語)입니다[요 20:21,22]. 머리의 지시를 받아 즉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데에는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것이 필수인 것입니다. 모두 같은 의미요 같은 말입니다. 몸과 머리의 관계이니, 몸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머리의 지시를 받아 몸의 각 지체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머리와 다른 모든 지체들을 위하여 하나 같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공동체 의식의 삶인데 천국(天國)이 바로 이 공동체 의식을 근간으로 하는 이상(理想) 세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의 복음은 이와 같은 공동체 의식의 결정(結晶)이니, 왜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는 바로 '몸과 머리'의 구조를 말함이니, 공동체 의식은 한 몸 체제 또는 구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 의식에 철저하지 못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서는 '나'원균처럼 사주팔개자 한번 잘 타고 나면 죽을 죄를 아무리 지었어도 살아서는 삼도수군통제사도 되고 죽어서도 선무일등공신에까지 추대되어 [세인들을 속이면서도] 부귀공명을 누릴지 모르지만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세상처럼 두루뭉수리로 얼버무려지지 않습니다. 물은 곬으로 흐르듯 죄는 지은 대로 갑니다. 마지막 심판대에서 반드시 걸러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생명과 죽음, 고와 낙, 의와 불의, 선과 악, 존귀와 비천 등으로 영원한 대칭을 이루어 병존하게 됩니다. 이생 곧 이 세상은 그런 영원한 운명을 각자 스스로 정하는 때로서의 의미만이 있습니다. 정상적인[하나님의 애초 창조의 원 의도대로 되어진] 생명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는 따라서 그 영원한 것에 비할 때 전혀 무의미한 오로지 함정, 덫, 올가미 구실만 하는 것뿐입니다. 무슨 목적의 올무 구실이냐 하면 악한 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 사는 재미에 빠져 내처 악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말합니다.

이는 그만큼 사람이 구원 얻는 방법이 간단하다는 뜻입니다. 간단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구원 얻도록 되어 있지만 단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악인만은 불가하니 왜냐면 에덴낙원에서와 같은 짓을 하도록 버려 둘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낙원이 이런 세상과 같은 불완전한 곳이 아니라 완전한 삶의 세계였음을 기억할 일입니다. 말하자면 당시로서는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천국에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났으니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에서도 그런 일이 똑같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아예 그런 일이 없도록 바로 이 세상에서부터 걸러낼 자는 걸러내는 사전(事前) 정비 조처입니다.

그래서 부유한 자는 이 세상에서 자기 받을 위로를 다 받아 버렸으므로 장차 임할 본격적인 영원 세상에서는 아무 위로도, 차지할 몫도 없게 되므로 화가 있다 하신 것입니다[눅 6:24]. 그러므로 지금은 장차 올 고통과 고난을 생각하고 울 때라고 하였고[약 4:9/5:3] 그렇게 우는 사람이 복이 있다 하셨으니 왜냐면 이 세상에서 그에 대한 준비를 할 정신적 여유를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웃는 자는 화가 있다 하셨습니다[눅 6:24,25]. 세상 사는 재미에 빠져 그런 준비를 할 심적 공간이나 여백이 도무지 없는 까닭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사람 구원해내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이들은 그와는 반대로 세상 재미에 빠질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일체의 여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 삶을 즐기며 웃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빌 4:4/살전 5:16] 것은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은 전천후(全天候)로서 최악의 고난 중에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세상 삶의 낙에서 오는 것은 상대적이어서 고난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 살려내는 당연한 소임을 다하려면 이 세상 신(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충돌 마찰은 필연이고 필수입니다. 그래서 세상 낙을 누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한 편이 되어 있는 악한 자일수록 세상 낙을 누리기에 여념이 없고 그렇지 않으면 고난투성이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서 이 세상 신이요 임금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보여 주며, "이 모든 것은 내게 맡겨진 것인데 내게 절하면 주겠다"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를 따라 자기중심으로 나가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겠다는 회유입니다. 이공(李公)과 같이 공동체 의식의 생활 신념을 고수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불우합니다. 왜냐면 세상은 전반적으로 자기중심이어서 악하므로 그런 정신을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물이 없어 쩔쩔 매던 당시 전란(戰亂)에서도 왕을 비롯해 범인(凡人)들은 그를 죽이려는 생각도 불사(不辭)했습니다. 이공의 죽마고우라 하여 처음 그를 천거해서 전라좌수영 수군절제사의 요직에 나가도록 해 주었던 유성룡마저 그 때에 가서는 자기 보신책에 급급하여 감히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했습니다.

유성룡이 천거하지 않았더라도 이공은 제 때가 되면 일어서게 되어 있는 인물이므로[왜냐면 무장이 필요한 때 내세울 만한 장수가 귀하던 때였으므로]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그 때의 흉흉한 시국은 그가 등용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의 유성룡과 위치가 바뀌었더라면 이공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함을 무릅써서라도 자기가 신뢰하는 인물의 인품을 옹호했을 것입니다. 과거 정여립이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될 때 여립을 아는 이들은 모두 꼬리를 감추는데[잘못하면 연루자로 얽힐까 두려워하여] 그만은 당당히 여립이 갇혀 있는 곳을 찾아 문안했습니다.

그 자신 임금의 명령을 어겼다 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갇혀 있을 때도 뇌물만 쓰면 풀려 날 수 있다고 주변 사람이 귀띔해 주었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있다.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것이다” 하고 태연했었다는 것은 이미 소개했습니다. 그의 일기에 "뇌물은 죽는 사람도 살린다"고 한탄했으니 당시의 뇌물의 ‘위력’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임금의 명을 어겼다는 것도 일본 측이 계략을 써서 이공을 모함하도록 획책한 것인데 이런 것을 눈치 챈 이공이 그런 무분별한 명령에 응할 리 없었던 것입니다.

사막의 여우라는 롬멜도 히틀러의 시답잖은 명령은 무시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히틀러는 롬멜을 명령 불복종으로 잡아다 족치려고 할 정도의 몰지각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조정은 그런 지각도 없었습니다. 이공이 적과의 전투에서 홀로 혁혁한 공을 세움에 따라 남도(南道) 백성들이 이공을 가리켜 해상왕(海上王)이라고까지 우러러 보는 터라, 못난 선조(宣祖)는 과거 이성계가 무공으로 얻은 인기를 빌미로 고려 왕조를 둘러엎은 사실을 기억 못할 리 없습니다.

그러나 이공은 그런 개인적인 야심이 있을 리 없습니다. 공동체 의식에 사는 사람은 머리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잘 났든 못났든 머리는 어디까지나 머리입니다. 자기가 머리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는 자는 이미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기중심의 야심, 개인적인 욕망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공은 그런 야심이 있을 리 없으니, 항상 임금의 제일(祭日)이 되면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하여 빠뜨리는 날 없이 북향(北向) 재배(再拜)했습니다. 이런 충의의 사람이 모반의 마음을 품을 리 없는 것입니다.

겨우 정탁이라는 사람이 “이 난국에 인물이 없어 쩔쩔 매는 판인데 장수 하나 죽여 덕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백 번도 더 옳은 말에 겨우 목숨만 살려 백의종군하게 된 다음에야 풀려 났습니다. 이와 같이 공동체 의식에 철저한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환영 받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생리적 구조입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 한 몸 사리는 보신주의에 철저해야 가족이라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인 세상 사회의 흐름입니다.

이공의 이런 언동을 보고 사람들은 “사람 아깝다” 하고 또는 “늘품 없다” 하고 “고생 길, 고생 문이 훤하다” 했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공과 같은 생활 신조로 사는 이가 드물다는 뜻입니다. 드물기 때문에 이런 역사적 실례도 실상 찾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유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그렇게 고고(孤高)하게 처신하면 가족 먹여 살리기도 어렵게 됩니다. 그래도 이공은 조상 전래의 가산(家産)이 좀 남아 있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관상가가 말하기를 “이공은 복장(福將)은 되지 못한다” 했습니다. '나'원균처럼 좋은 팔자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공동체 의식으로 사는 이가 세상 복이 있을 리 없습니다. 왜냐면 이공처럼 원수만 만들고[상관의 부당한 청탁을 듣지 않음으로써], 들어오는 “복”[친척뻘인 이조판서의 부름도 외면하고 병조판서의 호의도 거절하는 등]도 스스로 차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공의 인물됨을 바로 이런 점에서 찾아야 하는데 세인들은 피상적으로 무인(武人)으로서의 출중함만 들추고 있습니다.
임란과 같은 큰 국난이 있지 않았더라면 이공의 이름은 자취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을 것임은 앞에서도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희귀성(稀貴性) 때문에라도 이공의 교훈을 좀처럼 만날 수 없는 크나큰 보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애꾸눈 원숭이’ 우화가 나오겠습니까. 원숭이 한 마리가 숲 속을 헤매다 요행히 원숭이 동네 한 군데를 만나 무척 반가웠으나 거기는 웬걸 외 눈깔 원숭이만 사는 장애인 촌이었습니다.

별 수 없어 거기 몸을 의탁하고 사는데 모두들 자기를 보고 도리어 병신이라 놀리고 따돌려대는 통에 견딜 수 없어 자기 스스로 한 쪽 눈을 찔러 스스로를 외 눈 장애자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현실을 적절하게 풍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이러한 공동체 의식에 입각한 올바른[의로운] 삶, 선한 삶을 요구하는 것이니 죄 짓지 말라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것이니[눅 14:26] 이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살려면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처럼 핍박과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몸의 각 지체는 머리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으므로 머리의 닮은꼴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잃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요 12:25]. 천국은 그런 올바른 사람들만의 나라입니다. 올바른 것[義], 착하고 선한 것[善], 사랑[仁慈, 慈悲]하는 것, 모두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올바르다는 것은 이치에 합한 것을 말함이니 생명의 법칙대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산다고 그냥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삶의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몸과 머리의 구조에서 한 몸 체제에서 자기 부인으로 일관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영원한 법칙입니다. 자연계의 생명체가 자연법칙을 따름과 같습니다. 한 몸의 원리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한 몸을 구성하는 모든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한 몸이 되어 있으므로 모두가 자기 자신과 같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면 함께 행복하고,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는 것입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습니다[롬 12:15]. 고통을 당하면 똑같이 함께 그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한 몸입니다[고전 12:26/롬 8:22]. 바로 이런 것이 삶의 법질서입니다. “법칙이라 하기에 대단한 것인가 했더니 별 것 아니군” 하겠지만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면 이렇게 한 몸의 원리에서는 그 특징 곧 핵심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데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 합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이 점을 모두 의아하게 여기겠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이상한 것이 없습니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얘기입니다. 보편타당성이 있는 아주 상식적인 것이지만, 많은 사람이 삶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산다고 하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고 가장 먼저 자기를 위하고 다음에 이웃을 생각하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데, 실상대로 말하면 절대로 자기를 위해서는 안되는 것이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 신체의 한 몸으로서의 구조를 보아도 명백합니다. 눈이면 눈, 입이면 입, 팔 또는 다리가 자기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반드시 머리의 지시를 따르며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몸의 다른 지체(肢體)들을 위해서 자기 역할을 오로지 수행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지체들입니다. 다리가 다리 구실을 하는 것은 눈을 위해서 하고 눈 구실은 다리를 위해서 해 주는 것이니, 눈으로 보아 주니까 다리로서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고 다리가 걸어가 주니까 눈은 그 다른 장소에서 자기가 원하는 무엇이든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것이지 그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면 머리는 모든 것을 총괄 통할하기 때문에 종합적 판단을 내림으로써 지체 스스로의 지엽적인 판단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함이니 몸도 머리도 각각 자기를 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한 몸의 원리로서의 삶의 법칙입니다. 고로 자기를 위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성경은 “자기 부인[self-denial]"이라 합니다.

물론 이 역시 상식에 속한 것이고 새삼스럽거나 무슨 엄청난 의미도 아닙니다. 단지 오늘날 인생들이 이러한 삶의 법칙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100프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어쨌든 상호 불신이 작용하기 때문에 부득불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최선의 방도라 믿기에 그렇습니다. 이상향이라는 것은 바로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여기는 데에서만 가능한데, 그렇게 하지를 못하니 ‘유[not]토피아[place]’ 다시 말해 이상 속에서만 존재하고 현실로는 존재할 수 없는 세계라는 말이 생겨납니다.

세상 종교는 그런 이상 세계가 미래에서는 가능하다고 여겨 생겨난 것입니다. 거기에다 영생(永生)까지 덧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론에서 갈라집니다. 불교는 부처의 깨달음을 통해서라 하고 이슬람교는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자는 창조주를 부정하고 후자는 인정합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서로 사랑 가운데 행복하게 살기를 누구나 원하며 그것이 역사 오랜 인류의 숙원(宿願)임은 공통입니다.

이는 인간이 창조될 때부터 그러한 존재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결과이니 그 증명이고 그 증거입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다시 말해 위의 설명대로 삶의 법칙을 어김으로 해서 영생과 행복한 삶을 모두 잃어 버린 결과가 오늘날의 인간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설명과 같은 삶의 법질서를 어김으로써 오늘날의 불행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 생명의 법칙대로 행하고 어기지 않아야 영생하게 된다는 것은 자연 순리이고 당연 귀결입니다.

그런데 이들 종교는 그런 이치를 말하지 못합니다.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탓입니다. 피조물이 만들어낸 것을 가지고 진리인 양 행세하려니 그런 무리가 나옵니다. 이 세상 자체부터가 원래 있는 세상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아닙니다. 이 인간 세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곳에서 살도록 처음부터 되어 있지 않았다는 그 뜻입니다. 인간[아담]의 범죄로 현재 이런 상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이니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입니다[롬 5:12].

그러면 지금부터 그런 사람 삶의 원리를 따르기만 하면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전락해 버렸으니 현재의 상태는 애초 아담 당시의 상태와는 전연 다릅니다. 그런 삶의 원리 혹은 법은 살았을 때 이야기이고 산 자로서 지키는 것입니다. 즉 한 몸의 구성원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부인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는 다른 지체 곧 나의 이웃들이 나를 위하기 때문인데, 이제는 죽음에 처해져서 한 몸의 체제에 더 이상 있지 않으므로 자기 부인도 불가능하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고로 먼저 ①이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난 다음 '산 자'부터 되고 ②이 생명의 법칙을 지킴으로써야 '산 자'로서의 유지가 됩니다. 즉 영생이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① 없이 ②만 있어도 안되며 ①만 있고 ②가 없어도 안됩니다. 오늘날 기독교라 표방하는 많은 종교 단체들이 ①만 주장하고 ②는 무시하는 데에서 그들의 사이비성(似而非性)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세상 종교는 ① 없는 ②를 주장하는 형국입니다.

②가 있기 위해서는 인과(因果) 관계를 분명히 밝혀야 하는데 그들은 그런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는데도 그들은 결과만 내세우는 비과학적 자세를 고집합니다. 이 인과 관계를 규명하려면 성경에서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이를 거부하니 그런 결론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어떤 ‘인과’냐 하면 앞에서 설명한 대로 죽었으니[死] 즉 현재 "죽은 자"[마 8:22]이니 먼저 '산[生] 자'가 되어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이 산 자가 되는 일에는 두 가지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①현재 죽어 있어 영생하지 못하니 다시 말해 자연법칙대로 하면 이 육체는 한번 썩어 버리면 그만이라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이고, ②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즉 삶의 원리를 지키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인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기독교라 자칭하는 많은 종교 집단이 이 ②를 무시해 버린다고 위에서 지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지어도 구원은 받는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움으로써 오늘날 많은 [종교] 위선자들이 양산되고 사회에서 지탄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올바른 행실은 구원에 필수 요건이 아니라 [이 경우 오직 믿음이 그 필수 요건이므로] "구원을 이룸"[빌 2:12]에는 필수 요건입니다. 당연히 구별해야 합니다. "항상 복종하는"[:12] 것이 올바른 행실 곧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갚으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영원한 형벌임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습니다[롬 2:7-10].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가리켜 “산 자의 땅에서 끊어졌다”[사 53:8] 합니다. “산 자의 땅”이라는 말씀은 이 세상 곧 자연계의 생명이든 영계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든 무릇 '산 자의 영역'이라는 뜻이니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53:12] 함과 같습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로서 내가 전에 죽었었다. 보라,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다”[계 1:18]는 것이 주님께 따라다니는 영광스러운 수식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으실 수 없는, 죽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 우리 위해 죽으심을 두고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셨다" 하는 것입니다. 이 자연계에서의 육체의 생명 역시 산 자의 영역입니다. 단 시한부로서 한시적 생명이기 때문에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인간에게는 죽음이므로 그래서 인생들을 "죽은 자"라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만으로 따진다면 이 한시적 생명도 생명이고 따라서 "살아 있음"입니다.

그래서 일정 기간 살게 되어 있는 생명에서 중도 단절된 즉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진 유일한 예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인생들은 단 10년, 20년을 살다가 죽었다 해도 자기 명[壽命]대로 살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수명도 못다 채우시고 세상을 떠나신 유일하신 분이시기에 3운법칙[트리니 호모, trini homo]의 그 어떤 유형에도 속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마지막 아담이시므로 아담은 영원히 사는 존재입니다.

첫 사람 아담 역시 그렇게 영원히 살아 죽음을 모르는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범죄로 죽은 자가 되었을 뿐입니다[롬 5:12].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이시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일시 죽음을 맛보셨으나 범죄하기 전의 아담처럼 신령한 몸으로 복구되신 것입니다. 고로 죽지 않으신 살아 계시는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아담이신데 인생의 생사를 가름하는 3운법칙에 해당되실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도 3운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는 유일하신 '사람'이십니다.

“올바른 행실”이란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한 몸의 구조로 하나처럼 되어 함께 행복하게 사는 삶의 이치를 따르는 모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 의식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공동체 의식[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이공 순신으로 대표되는]과 성경에서 의미하는 공동체[한 몸으로서의 머리와 지체 관계로 구성된] 의식의 차이는, 전자는 자기 부인이 강조되지 않는데 반해 후자는 전자의 실체(實體)로서 철두철미하게 본질을 말하는 것이므로 자기 부인을 강조함에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자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까. 다만 그것이 현실 즉 실생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왜 맞지 않느냐, 그 이유로서 “양심대로 사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고 되묻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그 답이라는 소리입니다.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양심의 소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이를 또 달리 표현하면 앞에서 설명한 ‘공동체 의식’이 됩니다. 이 공동체 의식을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는 당연지사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마땅히 지켜야 할 사람 삶의 규범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대로 살기를 꺼려하는 것은 이공 순신의 생애에서도 증명되듯이 그렇게 나가면 세상에서 활개를 펴지 못합니다. 응달 신세를 항상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니 살려면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바라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 한평생을 보내려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공 순신은 그런 계산을 할 줄 몰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래도 좋다는 배짱이 있었기에 그런 고토를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올바르게 살지 못할 바에야 평생 한직(閑職)으로 돌아도 그것을 마땅하다 하여 거기 개의치 않고 유념하지 않는 신념으로 사는 사람,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참 사는 길이라고 스스로 믿었기에 그렇게 실천하는 것으로써만 삶의 의의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일 부귀공명을 추구하는 이였다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살지 않았을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공동체 의식의 핵심이 자기 부인이라고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자기 부인을 제외시키고 단지 겉모양으로서의 공동체 의식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세상인데, 하물며 자기 부인이라고 하면 더욱 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완전히 문제가 다릅니다. 그래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또 죄인이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죄와 죽음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왔다고 한 그대로입니다[롬 5:12].

죽은 자는 말 그대로 죽었으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부인은커녕 세상에서 말하는 "공동체 의식"이라는 그 흉내 내는 것조차도 실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더 다시 '죽은 자'가 아니요 '산 자'입니다. 산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로서 불가능했었던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을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각종 불이익과 고난의 대상이 되지만 그런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배포가 생김이니 그 자신 산 자로서 영원히 사는 날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자신 현재 영원히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고난 받고 죽음을 맞는 등 우여곡절이 있을지라도 결국 승리는 자기에게로 돌아오고 사필귀정이 될 것을 미리 내다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산 자의 증거요 특징입니다. 미래를 불확실하게 보고 두려워하고 떠는 그런 위축됨이 추호도 없는 것입니다.

대범함이 저절로 그 모든 언행에 묻어 나는 것이니 그는 영원히 살았고 그 삶을 현재에서도 넉넉히 구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삶의 낙은 아닙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의 즐거움이 바로 이상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주님은 "내 평안과 내 기쁨"이라 하시도 제자들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요 14:27/15:11/16:33]. 이를 성경은 성령 안에서의 기쁨, 평안, 의 곧 의로운 삶이라 했습니다[롬 14:17]. 왜냐면 생명수 강들, 여러 강들[rivers]이 넘치도록 현재 흘러내리기 때문입니다[요 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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