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9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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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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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세포적인 “구원”의 개념과 그 위험성

구원 또는 영생을 단세포적(單細胞的)으로 생각하면 큰 착오가 된다. 단세포로 된 특수 생물체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기의 세포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세포 하나를 들어 말해도 그 세포가 엄연한 독립체이므로 당연히 말은 되지만,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서로 연계되어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런 유기체(有機體, 많은 부분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그 각 부분 사이에 긴밀한 통일성이 있어, 부분과 전체가 필연적 관계를 갖는 조직)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의 현실이 죽음이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사는 그런 단순한 의미로서 성경이 영생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죽음만 아니라 죄 역시 현실이기 때문이다. 고로 죽음만 아니라 죄도 동시에 척결되는 것을 가리켜 구원 또는 영생이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죄를 지은 결과로 죽음이 왔고 때문에 우리는 죽음 가운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있음이다. 고로 죽음에서의 구원만 아니라 "죄에서의 구원"[마 1:21]이다.

순서대로 말하면 "죄에서의 구원"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왜냐면 죽음에서 아무리 구원되어보아야 죄에서 구원되지 않는 한 그런 죽음에서의 구원이 아무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세상 종교는 현재의 인간고가 죄에서 온 것을 말하지 않는다. 죄의 연원(淵源)을 따지면 자기중심 곧 이기주의에서 오는 "욕심"[약 1:15]에서 오는 것이므로 이는 공동체 의식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며 이 공동체 의식은 머리와 몸으로 이루어진 한 몸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헣게 되면 인간은 그런 머리가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즉 만물을 창조하신 이만이 이상적인 머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만물의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 종교가 제대로 죄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장치해 두신 양심의 소리를 따라 좋고 나쁜 것을 알아 죄를 겨우 그 존재만을 인식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죄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까닭이 없다.

그래서 세상 종교에도 선을 행해야 한다는 말은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 다니게 되어 있다. 왜냐면 양심은 인간 내부에 두신 '하나님의 기계적 장치'이기 때문에 양심상 판단할 때 선한 것이 올바른 것이고 올바르게 행동해야 영생의 은택을 누릴 수 있음을 일깨우는 본성(本性)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선을 행하고 않고 하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랑”, “인애”, “자비”는 꼭 따라 붙는 수식어처럼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양심 하나 때문에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창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자기중심 일변도로 나가는 것이 인간이므로 이 현실을 절대로 간과할 수 없기에 순자의 성악설이라는 반론도 나왔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죽음을 무서워하고 영생을 갈망하는 것은, 전혀 그런 감정이 없는 자연계의 일반 동물들과 달리 처음부터 영생하도록 되어 있는 피조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영생하게 되어 있었던 인간이 범죄로 인하여 죽음에 빠지게 됨으로써 이와 같은 엄청난 불행에 빠지게 된 것이니, 처음부터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현재 상황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인식할 리가 없다.

여럿이 많은 피조물이 함께 생존할 때에는 그런 생명체 상호간의 유기적인 관계가 필연적이고 이것이 생명의 틀이 되고 그 틀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법칙 또는 그렇게 유지될 수 있는 원리가 있게 마련이다. 행복한 삶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즉 모두가 한 몸을 구성하고 있어 각자는 그 지체(肢體) 구실을 함이며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피조물 구성체의 머리가 되심은 당연하다.

몸 즉 모든 지체가 이 머리의 지시를 받아 일사불란하게 즉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이니 이렇게 여럿이 하나로서 작동될 때에는 그 특징이 서로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대신 머리를 위함으로써 머리의 지시를 받들어 이웃 상호간 위하는 체제이므로 이렇게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그 반대 개념이 자기중심이다. 범죄 즉 죄와 악, 불의는 이런 삶의 법질서의 핵심이 되는 자기 부인을 버리고 도리어 자기중심을 따르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 되면 자연스럽게 한 몸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고 한 몸 구조가 생명체의 체제일진대 그런 자기중심은 생명에서 분리되는 자멸행위가 됨은 당연하다. 생명과 반대 개념인 죽음이다. 즉 영원하지 않고 한시적인 이 자연계의 생명체의 목숨들인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이 왔고[롬 5:12] 죽은 자가 죽은 자들을 생산하니 죽은 자들일 수밖에 없는데다, 각자 스스로 범죄하게 됨으로써 또한 죽은 자일 수밖에 없다[:12].
그래서 인간이 부득불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 자연계의 존재가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애초에는 영적인 영원한 세계인 에덴낙원에서 인간은 신령한 몸으로 영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영생을 제대로 누리기도 전에 시초에버부터 범죄하여 이와 같이 죽음에 이른 것이다. 이 생명의 법질서, 원리, 법칙에서 벗어나 자기 중심으로 나간 결말이 오늘의 인간고(人間苦)요 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무상(無常)" 곧 덧없음이다.

이런 관점은 양면성에서 일면만 보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에서 한 쪽만 다루어진다면 동전의 가치는 없는 것이니, 진리는 3위1체의 원리에서 양면성을 지니는데 그 한 면만 보고 강조를 하니 진리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있음은 불문가지다. 불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도 안다 하고 하나님도 믿는다 하는 소위 "기독교"가 이 죄 문제를 무시하고 영생만 챙기려 하니 그런 '세상 종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함이다.

살되 올바르게[義] 살고 모두에게 좋도록[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어느 하나에게라도 나쁜[惡] 것이 되어 해(害)가 돌아가는 것이면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不義] 것이다. 생명의 기본 틀이 ‘한 몸’ 구조라고 했는데 한 몸의 유기체로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이 엄연한 생명의 법질서일진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불법[不法, 脫法, 違法, 無法, 犯法]이요 곧 범죄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자기 부인을 하면 영생하는 것인가.

불교와 같은 세상 종교[기독교가 여기서는 제외됨]가 그와 비슷한 것을 교리로 내세운다. 자기 부인은 아니고 자기 부인과 비슷한 것 즉 무아(無我, 일체의 존재는 무상한 것으로서 ‘나’라는 존재도 없다고 하여), 멸아(滅我) 같은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왜 자기 부인이 아닌가 하면 자기 부인은 하나님을 인지하는 데에서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으로서 머리와 몸의 한 몸 관계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물주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는데 자기 부인이 이해될 리 없다.

말하자면 모든 불행이 자기 자신에게서 발단되는 것이라 하여 그들은 그 해결책으로서 이런 "무아'를 설정하는 터이다. 자기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없다'는 것이다. '없다'는 것으로써 문제를 풀려는 것인데, 억지이고 무리이지, 해결이 날 수가 없다. '있는데' 어찌 '없다' 생각한다고 그것이 없는 것이 된다는 말인가. '나'도 '너'도 있고 '우리'가 있지마는, 단 너는 네 자신을 위하고 나도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는 데에서 무아, 멸아, 망아(忘我)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상대만을 생각하니 자기 자신을 잊어버림이다. 나와 너 사이의 이런 개인[개별] 관계가 한 머리 곧 그리스도[마지막 아담]를 공통으로 공동으로 모시면 전체와 나 사이에 이런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다시 말해 머리를 위시해서 전체가 나를 위하는 존재들이므로, '나를 위해 주니' 그들 즉 머리를 위시해서 모두가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무아(無我)의 경지는 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무아는 불교에서 말하는 그런 의미의 무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무아[내가 존재하지 않음]이면서도 전체가 바로 나 자신이 되어 버리는[전체가 바로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조화(造化)요 오묘(奧妙)다.

이것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된다고 성경이 가르치느냐?" 하는데 대한 답인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아무리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셔도 자기의 능력으로 일방적으로 즉 기분 내키시는 대로 일을 하심이 아니라 반드시 원리원칙대로 움직이신다는 데에 있다. 마땅히 그러하셔야 하는 것은 만일 그렇지 못할 때 어느 피조물이 그 장래에 대하여 불안해하지 않겠는가. 왜냐면 마음에 내키시는 대로 무엇이든 하신다면 갑자기 변경하시기도 하고 당장이라도 그 만드신 피조물을 없애시고 다른 무엇을 대신 만드심으로써 다른 판을 벌이실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불안하기만 한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지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고 철저히 원리원칙대로 나가시면 비로소 그 때 피조물들은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은 하나님의 이런 시종일관하시는 특성을 친히 증명하심이 된다. 우리 인간에 대한 무한하신 사랑을 확증하심과[롬 5:8] 동시에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하심이다. 다시 말해 한번 죽게 되어 있는 것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원칙에 의한 일사부재리다.

따라서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으므로 죽은 자의 몸에서 나는 모든 인생이 다 죽은 자이다. 하나님은 이런 죽은 자를 만드시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하나님 눈 밖에 벗어났으나 처음부터 한량 없으신 애정으로 만드신 피조물인지라 죽게 버려두실 수 없으니 육체만 아니라 영혼이 있어 영원토록 죽음의 고난 속에 지낼 것이므로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이시라도 앞에서 지적한 대로 원리원칙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신지라 그냥 무턱대고 살리실 수는 없는 일이다.

원리원칙을 따르자니 부득불 조물주 하나님 친히 일개 피조물인 사람이 되셔야 그것도 영구적으로 사람이 되셔야 하는데[왜냐면 나 자신의 영원한 구조를 나와 하나되심으로써 이루어야 하므로] 이런 일까지 감히 행하신다는 것은 보통 마음으로는 안되고 한량 없는 사랑이라야 가능한 것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신 것은 나와 하나 되시기 위함이니 나와 하나가 되셔야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어 한번 죽게 되어 있는 것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원리원칙 준수를 충족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게 되시는 것은 산 자가 되셔야 나와 하나가 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앞서의 설명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시기 위함이다.
죽었다가 다시 말해 삶을 종결하였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그래서 이를 가리켜 “다시 나는”[요 3:3] 것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나는 것이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심으로 되는 것이므로 “성령으로 난다”[:5,6]고 하는 것이다. 다시 나고 성령으로 나는 것이므로 새로운 창조다[고후 5:17]. 또한 덧붙여 말하게 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은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시고[이미 이 사실은 나 위해 죽으심으로 확증된 바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관계를 말함이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 되어 계심과 같은 원리다. 그래서 이 원리를 따라 그리스도 친히 당신 자신을 내게 주시되 영원하신 선물로 주셨으니 나 역시 주님께 나 자신을 바침을 가리켜 그 피[생명] 값으로 나를 사셨다 하는 것이다. 내 스스로 나를 드리지 않는데도 나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지 않는다는 데에 핵심이 있다. 즉 주님은 주님 친히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나의 소유가 되셨고 바로 그렇게 하심으로써 나를 사셨으므로[買入] 내가 주님의 소유가 되어 있으니 나 역시 기꺼이 주님께 나 자신을 드림으로써 즉 "다시는 나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으로써 주님은 나의 소유가 되심이다.

그래서 나는 주님을 위하고 주님은 나를 위하시는 관계에 들어선 것이다. 다시 말해 처음 창조 당시부터 확립되어 있던 생명의 질서 속으로 나는 환원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당연히 기계적인 것이 될 수가 없다. 사랑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둘이 하나 됨이므로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주님께 바쳐 드려야 하는 것이다. 나를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이신 주님 친히 당신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셔서 사람이 되셨고 또한 내 이름으로 나와 함께 죽으신 바가 되셨고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시어 이 모든 사실들이 ‘나의 사실’이 되게 하셨으며 이로써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위치에 계시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절대로 강제로 하시지 않고 반드시 내 스스로 원해서 기쁘게 나 자신을 주님께 주님의 소 유물로 드리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호칭이 주님이시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 것이 나의 ‘소유주, 주인’이시라는 뜻이다. 이는 절대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 친히 자기를 내게 선물로 주신 다음임을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그래서 주님은 내 것, 나는 주님의 것이니 이 바로 둘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서 맺어지는 당연한 약속이 아닌가.

구원은 이와 같이 현재의 엄연한 사실이면서도 미래의 기약(期約)인 것이다. 즉 약속이다. 나로서는 복종하겠다는 약속 즉 주님만을 위해 살겠노라는[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고후 5:15] 약속,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몸의 구속”[롬 8:23] 즉 "양자로 삼으심"[:23], "영생의 약속"[요일 2:25/약 1:12/2:5/히 10:36]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쉴 새 없이 한눈 팔지 않고 우승하기 위하여 달려감은 바로 이 약속 이행의 의미이다. 주님만을 위해 살겠노라 한 약속 이행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영생을 “약속”이라 했다[2:25/약 1:12/2:5]. 그리스도 친히 나의 생명이시므로 현재 내가 영생[생명-요일 5:12]을 소유하고 있지만 이는 주님께서 나 위하시는 측면이고, 나는 나로서의 주님 위하는 측면을 '함께 이루어야' 그래서 내 자신 스스로 이루어야 둘이 하나 되는 관계가 원활히 작동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이라 함은 당연하다. '함께 이루어 나감'의 구원의 양면성인 것이다. 약속을 이룸은 물론 이 세상에서만 한하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이미 약속 이행이 증명된 터라 다시 시험해보고 말고 하는 것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래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 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한 것이다. 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바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고후 5:15] 것을 말함이다. 그래서 아직 이룬 줄로 여기지 않고 얻는 줄로 여기지 않고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잡으려고 달려간다” 하였고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그 동력이 되어 그렇게 한다 한 것이다.

§  §  이 세상 무대가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또다른 증거


원리원칙대로 살면 또는 양심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이공 순신의 생애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원리원칙대로 하다가 상사의 미움을 받고 그 앙심에 주물럭거려져 볕들 날이 없었다. 이공이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는 것을 이런 소인배(小人輩) 무리는 일종의 삶의 낙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미증유의 국난이 일어나자 비로소 이공은 볕들 날이 오게 된 것이다. 왜냐면 모두가 몸을 사리는 터라 누구도 전면에 나서지 않으므로 자연스럽게 이공의 독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이러한 인간의 악한 심성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물론 사람들이 다 이공처럼 원리원칙대로 살면 그래서 공동체 의식으로 살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이상향이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대로 살 만큼의 용기 있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극소수인 것이다. 고로 이런 세상을 사랑하여 남들처럼 어깨를 겨누고 섞여 살려면 그들처럼 똑같은 행동을 해야 하는 그런 구조다.

그래서도 이런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조금도 살 생각을 하지 않고 전적으로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만 전념하며 선한 일을 하는 등의 사람 살려내는 차원에서만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세상에서 보는 바와 같은 그런 이기적인 자세로써는 절대로 사람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니 모조리 멸망뿐인데 어찌 악을 조금이라도 행하면서 살기를 바라리요. 구름을 잡는 이야기일 뿐이다. 자기중심이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이 굴러가는 것, 지금까지 굴러온 것은 하나님께서 특수 목적을 위해서 억지로 잠시 붙드시고 있는 것뿐이니 그 손만 놓으시면 세상은 급전직하 멸망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그 특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이라 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원 받을 자는 하나도 예외없이 살려내시기 위함이요 동시에 악인들을 역시 예외없이 솎아내고 걸러내고 추려내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볼 때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하나님께서 계신다고 전제할 경우 정의가 구현되어야 하는데 왜 이토록 불의가 창궐하고 왕성하느냐 하는 점에서]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이 필수 필연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의인의 고난 즉 이 세상에서 부당하게 핍박의 대상이 되어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억울하게 고난의 표적이 되는 등의 일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은, 의인은 그 행위로써 인정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라는[약 2:24] 사실을 명백히 함이다. 즉 어떠한 수난에도 끝까지 의(義)를 버리지 않고 의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여야 자기의 의가 인정되는 까닭이요, 말로만 의인이라든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순종의 행위가 없는데도 의롭다 하실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음"[롬 2:13]이다. 의[올바른 것]를 행함[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곧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을 말함이니 오직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하나 곧 한 몸을 이룬 상태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그 하나된 바 최대로 행복한 삶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주신 것이라 믿는 이들이 오늘날 거의 전부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 한 것은 그리스도가 필요 없이 오직 자기의 의로써 구원 받으려 하는 것을 말함이고, 그래서 "죽은 자"[마 8:22]임을 자각시키려 함이니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 한 것이다. 선한 것을 갖다 대어야 즉 빛이 비추어져야 어두움이 어두움이라는 것이 제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음"[롬 2:13]이므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자각함은 율법을 행할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닫게 됨이다. 죄인이기 때문이요 죄인은 죽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죄인은 죽는 것뿐이요 율법을 행한다고 그 죽음이 면해지고 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회개하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우리의 회개의 특성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토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회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없이도 회개가 가능한 것이라면 처음부터 회개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어 심판하시는 것이 이제 비로소 가능하게 되면서부터 비로소 회개하라 명령하신 것이다[행 17:30,31].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아 회개함으로써 다시는 동일한 죄를 지을 수 있는 근거를 아주 제거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누구도 회개할 수도 없고 구원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자로서의 죄인이 되어 있는 마당에서는 회개가 불가능하고 회개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아무리 율법을 지켜보아야 그 실효가 없다. 율법을 지켜도 죽음이요 안지켜도 죽음이다. 죄인으로서 가장 먼저 죽고 나서 볼 일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내가 죽어서는 죄의 응분의 조처로 죽은 것이기에 다시 살아날 근거도 자격도 없다. 그냥 그 죽음으로 영원히 끝나는 것뿐이다. 그러니 나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직 한 사람의 의인으로서[천하 만민은 다 죄인이로되] 나와 함께 죽으심으로써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나 자신의 죽음'과 '나와 함께 죽으심'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에서는 동일하나, 전자는 죄인으로서의 죽음이므로 그 죽음만으로써 영원히 종결되고 다시 살아나 구원되는 일이 없지만, 후자는 의인으로서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삼는 것이므로 그 의인의 다시 살아남을 통해[그가 죽을 필요가 없이 죽었으므로] 나도 함께 살아나기 때문에 비로소 구원이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러하고 이에 동참하여 그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골 1:24] 우리 역시 그러하다.

바울은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고난" 즉 "교회를 위해" 고난당함이라 한 것이다. 너희 곧 교회라 함은 이미 구원 받아 한 몸으로 결속되어 있어 생명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런데 또 무슨 고난이 필요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의 모든 생명의 역사(役事)는 고난이 반드시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만 그렇고 천국에서는 그렇지 아니하다. 천국의 경우 이미 심판이 지나간 것이나 이 세상의 경우 심판을 앞두고 있는 시점(時點)이기 때문이다.

심판을 앞두고 있다 함은 이 기간 중에는 어느 때라도 다시 범죄할 수가 있고 그리하여 이를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경우 회개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계속 피차간의 생명을 위한 고난의 밑바탕이 깔려져 있어야 한다는 이치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의 회개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  피 흘리심이 필수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필요불가결하며 교회로서 그 역할을 다함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친히 그 몸된 교회를 통해 그 고난 받으심을 계속하신다는 의미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구원 받은 후에도 이 세상에서 핍박의 대상이 되어 고난의 표적이 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래서 이런 고난 받음을 하나님의 뜻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뜻이므로 이 세상에서 고난도 받고 이 세상 삶도 누리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생명에는 고난이 없으니 고난은 죽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아담도 사탄도 여타 악령들도 처음에는 다 의롭고 거룩하게 창조된 것이다. 죄인으로 혹은 악령들로 창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피조물 스스로 자기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이들은, 대개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는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고, 육신에 얽매인 죄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은 여전히 받는다는 망상에 젖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참으로 성경대로 의롭게 생활하려면 이 세상과 더불어 잘 살기는 틀린 것이다. 오직 성경에 밝히는 대로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먹을 것이 있으니 족하며 현재 가진 것으로써 만족하는 것밖에 없다. 따라서 오직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일은 기도하고 구원의 말씀을 전하여 줌으로써 사람 살리는 일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일만을 한다고 세상이 좌시하는 것이 아니다. 온갖 탄압으로 방해함으로써 저지시키려는 것이니 우리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다. 바울을 위시해서 초대교회 사도들 및 모든 이들이 그와 같이 수난사(受難史)를 이루어 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 3:22]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가"[:23] 구속되어 의인된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음"[:24]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구원을 한정하고 있다. 즉 "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던"[:25] 것은 "전에 지은 죄"[:25]라고 명백히 한정하심이다.

왜냐면 앞으로의 죄는 다시는 우리가 죄를 지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산 자로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 것"[고후 5:15]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목적인 까닭이다[롬 14:7-9/고후 5:14,15]. 명백한 원인과 결과의 설정이다. 따라서 원인 무효가 되면 결과도 무효다. 목적을 달성 못하면 그 목적을 위해 설정되었던 것도 모두 덩달아 무효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의 구원 받음 즉 산 자가 됨은 아무 효용이 없으니 도로 죽은 자가 되기 때문이다.

죄를 짓고 회개하고 또 죄를 짓고 또 회개하고 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법은 없다. 부지중에 짓는 죄는 주님의 말씀대로 70배의 7번이라도 용서하시지만[사도 요한이 그 편지의 첫머리에서 "우리가 죄 없다 하면"이라 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함이다-요일 1:8], 알면서도 짓는 죄 즉 여전히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되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고후 5:15/롬 14:7-9]이 아닐 때에는 처음 회개할 때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기로 한 약속을 고의적으로 깨뜨리는 것이므로 아무리 딴에는 회개한다고 해도 회개가 되지 않고 용서가 없는 것이다[히 6:6/10:26,29].

§  죽음과 고난의 이 세상 실상


이와 같이 조금만 눈을 들어보면 이 세상의 실상은 실로 암담합니다. 성경대로 하면 모든 피조물이 지금 삶의 환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해산할 때 죽을 힘을 다하여 고통 중에 부르짖는[계 12:2] 것처럼 진통 속에 있는 것이 전체적인 현상입니다[롬 8:22]. 단 해산 후의 사람 낳은 기쁨을 위함이라는 것만 다르다 뿐입니다[요 16:21].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는 기억치 아니한다" 하심과 같습니다.

때문에 이를 다시 가리켜, "믿음의 주[author]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finisher/perfecter]인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2,3]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현실의 참담함을 한 시라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죽음과 저주의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우리로서는 너무나 부끄러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영원한 멸망의 불 못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일 분노하시는[시 7:11] 하나님 앞에서의 현실입니다. 이 세상 목숨 끝나기가 바쁘게 곧장 그런 참상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이 세상 목숨이 붙어 있는 것도 천년 만년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아니, 이 시간 후라도 숨 끊어지면 들어가는 곳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영원한 고난의 연기가 올라가는 데입니다[계 14:11].

누구나 숨진 후 당장 깨닫게 되는 것, 그리고 첫 마디는 "내가 속았구나!" 하는 것입니다[계 12:9]. 이 세상 신(神)이요 지배자인 사탄에게 속아 지내 온 것을 이제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바깥 어두움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기"[마 25:30/눅 13:28]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는 물론 시간적으로는 마지막 심판 이후에 되는 일들이지만, 이렇게 단단히 속았다는 의식만은 세상을 떠나자마자 분명하게 됩니다. 왜냐면 인간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속지만 않았다면 하나님 계시는 줄 알았을 것이요 또는 성경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것이요 읽기 시작했을 것이요 이런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다는 현실에 눈을 떴을 것이라고 누구나 판단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자주 독립성을 구사하는 존재로 세상에 난 것이므로 "남 때문에, 누구누구 때문에"라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숨 지면서부터 이런 모든 것은 스스로 다 알아집니다. 바로 내 탓임을 알기 때문에 이를 갈며 슬피 우는 것입니다. 에덴낙원에서 여자가 범죄한 것도 사탄 때문에 즉 사탄이 속여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마음이었기에 그리 되었고 남자 역시 여자 때문이 아니라 그 스스로 역시 같은 마음이었기에 그리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과 똑같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상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 경고를 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죽으면 다 알아진다고 혹은 사람마다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경고해 주는 일을 게을리 하게 되면 경고하지 않는 자에게 반드시 책임이 돌아옵니다[겔 33:6-9/행 20:26,27]. 그래서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 한 것입니다[고전 9:16].

속이는 자가 있으면 그것이 속임수라고 일깨워주는 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명정대하신 하나님께서 "감찰(監察)해"[출 4:31/창 16:13] 보시는 세상에서 의당히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속이는 자가 있음을 아시고 있을 때에는 이 속임수를 경고해주는 자가 반드시 있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속임수 자체를 막지는 아니하시니 왜냐면 절대 자주성을 지닌 피조물로 만드셔서 자유를 보장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솝은 지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을 속이는 자도 아니고 오히려 어리석은 인생들을 책망하는 현자(賢者)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그 미련함을 일깨워 준데 대한 대가[보답]로 사람들은 그를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였습니다. 이렇게 좋은 말이나 경고를 잘 듣지 않는 이들이 대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인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지혜로운 사람이었지 사회에 해를 끼친 일이 없었지만 당시의 위정자들은 그를 싫어하여 제거해버린 것입니다.

하물며 이 세상 신이 되고 지배자가 되어 인생들의 구원됨을 한사코 방지하고자 하는 믿음의 사람들 곧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의 증언[witness]들을 방치할 리가 없습니다. 사탄에게 속지 말고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는 증언자들의 입을 어찌하든지 틀어막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하여 유혹하여 넘어뜨리고 위협하여 고난과 죽음에 처하기도 합니다. 인생 구원과는 전연 관련이 없는 이솝이나 소크라테스에게 세상이 그러하였거든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야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세상의 암담함과 처참한 실상을 알려야 합니다. 죄와 죽음의 실상, 심판의 현실을 알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심으로써 그래서 모두가 그 한 몸이 지체 역할을 해야 최대의 행복이 보장되는 사람 삶의 가장 첫째 가는 기본 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 중의 단 한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서라도 여러 수백만 사람들을 상대로 말씀을 전파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주님께서 우리 위해 간구하신 것처럼 기도가 필수입니다.

죄인은 부르짖어도 그 기도를 물리치시고 듣지 아니하시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위해 무엇이든 하려 하여 구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필연적으로 이 경우에는 누군가가 대신 기도를 드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함으로써 내 스스로 나를 위하여 살지 않아 자기 부인을 이루는 생명의 법도를 따름이 됩니다. 하나님도 믿지 않고 자기 스스로 생겨났다고 한다면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이야 부득이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냐 한다면, 그러나 자기중심으로 나간다고 해서 결코 그것이 이상적인 삶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인생의 현실 삶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면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평화가 없고 행복이 없으며 사랑 없는 삶만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니 인류 역사가 수천 년을 헤아려 왔어도 여전히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증거는 인간이 스스로 생겨났다면 절대로 미래가 없다는 것을 입증함이기도 합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로 하나가 되어야 가장 이상적인 삶이 되는데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칸트의 "요청적(要請的) 유신론"을 상기(想起)해야 함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칸트나 보어[보어는, 3위1체의 원리를 가리키는 상보성 원리를 설명하면서 인간 사회의 삶의 원리라고 단정했기에]나 이런 사람들이 말이 경청할 만하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런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객관성을 지니는 판단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머리로서의 하나님 없이 극락, 이상 세계를 꿈꾼다는 것은 가정(假定), 가상 (假想)에 불과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상(理想)적인 세계는 없다는 뜻으로 ‘유토피아[理想鄕, 그리스어로 유 (ou)는 nowhere 또는 not, 토포스(topos)는 place]’라는 말을 토마스 모어[T. More, 1478-1535]가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그가 그려낸 공상 세계로서의 섬 이름을 그렇게 부른 것이니, 말 그대로 ‘이상’으로서만 그치고 꿈만 꿀 수 있을 뿐이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에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지상(地上)에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실 때는 당연히 그런 이상 세계가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치로 살도록 처음부터 인간을 비롯한 지적이고 이성적인 피조물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현실 세계의 비리(非理)는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저버리고 벗어나고 어긋남에서 온 자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 세계가 끝나고 천국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유는 이상 세계는 모든 인생이 한 몸임을 의식하여 서로 사랑하는 세계이므로 이 사랑은 결코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기의 자유 의지로 진행해 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는 이들을 억지로 사랑 있게 못만드는 법입니다. 만들려면 인간 로봇으로 밖에는 방법이 없지요. 일단 자유를 보장해주셔서 자유 선택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자유를 주시어 심지어는 각자의 영원한 운명을 각자 스스로 결정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영원한 미래를 저울질하신다는 선입관은 당치도 않은 것입니다. 각자의 영원한 미래를 정하는 곳이 이 세상이니까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정한데 따라 그렇게 되도록 조처하시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몫이요 그렇게 의지대로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능력입니다. 양면성입니다. 우리 스스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진실된 말씀이요[눅 16:16/마 11:12], 우리가 선악간에 우리 몸을 행한데 따라 우리를 심판하여[고후 5:10] 어떤 이는 영생으로 어떤 이는 영벌로 보응하시는[롬 2:7-10] 것도 가감 없는 사실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니까 부득불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행위로 구원 얻고자 함입니다. 비록 자기 스스로는 믿음으로 은혜로써 구원 얻는다고 말하지만 실질상으로는 그렇게 행위로 구원 얻고자 합입니다. 그 차이가 여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똑같이 행함[다른 말로, 순종]으로써 자기 믿음을 나타내되, 앞에서 말한 대로 스스로 이를 사랑해서 즉 시키지 않아도 하느냐 아니면 마지못해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내가 좋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그 지시를 받아 하는 것이니 이것이 "계명을 지킴"[요일 2:3,4/3:22-24/5:2,3/15:10/요 14:15,21,23/15:10,12/13:34/계 12:17/고전 7:19/롬 13:9]입니다. 그 말씀이 과연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도,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주시면서까지[갈 2:20]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완전하게 나타내셨으니 내가 이제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요일 3:16] 나도 나 자신을 기꺼이 버리고 바쳐 주님께 드려 전적으로 순종하여 따르는 것이 올바른 것이기에 나는 여기에 목숨도 걸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말하는 “순종”이고, 이것이 “구원 얻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똑같이 “행함”으로 나타나므로 아무 차이가 없고 종이 한 장 차이처럼 보일지라도 실질상으로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땅에서 하늘에까지 닿기가 불가능인 것과 같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고 죽은 것이라 함도 이런 사랑 가운데에서 스스로 행하는 자발적인 순종을 가리킴입니다. 이런 이치를 따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혹자에게는 마치 행위로 구원 얻으려 하는 것처럼 보여 혼동을 일으키는 것이나 실상 혼란을 일으킬 아무 이유도 없는 것이니 상식대로 판단하면 복잡할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안다”[요일 3:16]고 한 대로 사랑을 사랑으로 대응하고 화답하는, 이런 어린 아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함뿐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욕(私慾)의 포로가 되어 해방되지 못하고 있음을 자체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이런 사욕에서 자유롭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 배워야”[요 6:45]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처음부터 아무도 그리스도께 올 수가 없습니다[:44,45,65].

즉 이 세상이 죽은 자들로서의 죽음의 세상이니 고로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는 살기 위해서 즉 내 욕심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를 받아 죽은 자로부터 산 자가 되기 위함이고 산 자가 되고 나서는 오직 주님의 일하기 위해 즉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며 사람 살리기 위함"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주님처럼 죄인들을 위해 그들이 받을 죄의 보응[고난과 죽음]을 함께 지며 고난 받는 중에 기도하며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여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처럼 "세상에 보내심 받는" 사람들이니 그 보내심 받은 성격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신 말씀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로 위에서 설명한 ‘사람 구원’의 작업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 위하여 고난 받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그 죄인들의(우리 죄는 용서 받고 구원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닌 그들의) 저주를 함께 지고 가는 이 세상 삶이어야 함입니다.

결코 이전 믿지 않을 때 아무 것도 몰라서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이 삶의 터전인 양 생의 낙을 즐기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래거리가 되었다"[애 3:14] 한 그대로가 됩니다. "나를 쓴 것으로 배 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15], "조약돌로 내 이를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다"[:16] 하게 됩니다. 이를 가리켜 바울은 “우리가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롬 8:36] 함과 같다 했습니다.

복음 전도자로서의 바울 사도는 그 고난 받음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후 1:9] 한 것입니다. 이는 예러미야의 다음과 같은 말을 역시 연상하게 합니다. 즉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다"[애 3:18] 하였고,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19]이라 한 것입니다.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된다"[:20] 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괴로움을 토로한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면서 전도의 일을 한 결과입니다. 여기 인용하는 예레미야 애가에 있는 구절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 된 인간의 저주를 대변함이었으나, 그러나 바울이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한 것처럼,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음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한다" 함과 같이, 죄인에 대한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그렇게 죄인들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제사장들로서 복음의 일을 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풍성한 위로로도 통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 "찬송할 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役事)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한다"(고후 1:3-6) 함과 같습니다.

사람 살리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것이 고난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스승의 방법을 떠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을 통해 고난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인생 구원 사업이 제대로 원활하게 이루어집니다. 때문에 이 모든 위로의 은혜가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님의 성실이 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물려받는 나의 몫(portion)이 되시니 그러므로 제가 하나님을 바랄 것입니다" 했고,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주 하나님께서 선을 베푸시니 사람이 주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다"(애 3:21-27) 한 것입니다.

이 모두 죄인된 인간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함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며 일하는 ‘사람 구원하는 일’의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의인이나 죄인이 받는 전반적인 고난을 평하여 성경에 아래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다. 입을 티끌에 대어라, 혹시 소망이 있을 것이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욕을 듣는 것으로 배 불릴 일이다. 주님께서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27-32).

결론으로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고난의 의미를 결론 짓고 있습니다.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37-41). 즉 불신자는 한시 바삐 하나님께로 돌아감이 급선무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위한 기도를 게을리 않고 부지런히 하나님께 상달시키는 것이 최 우선 순서이어야 합니다.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에서 주린 맹수들에게 찢긴다는 걸 알면서도 수백 수천의 그리스도인들이 떼를 지어 그 곳으로 끌려갑니다. 가면 서 그들은 한결같이 한 사람 같이 "노래"(찬송)를 부릅니다. 그 중에는 이제 막 세례문답을 끝낸 젊은 임산부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끌려 가며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며 가는 것입니다. 이 광경, 일견 참혹하게도 보이는 이 모습을 보고 비로소 정신 차리고 세상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믿는 사람이 생겼고 그가 그런 기록을 남겼기에 우리가 그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단 몇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숫자에 구애되시지 않고 인내하시면서 그런 모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시는 사랑이십니다. 북한 성도들이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반주검이 되어 가지고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을 보고 나도 저런 믿음을 지녀야겠다고 기도하기 시작하여 탈북한 후 그 곳의 참상을 폭로한 이순옥씨가 또한 그런 예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글로 남기고 말로 전하기에 그래서 우리가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같은 심령과 감동으로 믿었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비록 그로 인하여 단 한 사람이 믿고 구원을 받더라도 그 수백 수천의 그리스도인의 귀한 목숨들이 바쳐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단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ㅡ. 이같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인 행동이요 목적 의식이 분명한 의지 작용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함이니, 그리스도의 고난이야말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 위해 자신을 바치시는 거룩한 사랑의 행위이셨던 것입니다.사랑은 하나 의식, 한 몸 의식이므로 한쪽이 고통 중에 있는데 그와 하나 된 나머지 다른 한 쪽이 결코 안일 속에 있을 수 없다는 이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닌 육체로써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몸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고장이 나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 그 나머지 성한 부분도 똑같이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것을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바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또는 절대자이신 조물주를 시인하지도 않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초 만물을 창조하실 때, 아니, 홀로 계시다가 자기 이외의 어떤 존재를 만드실 때는 그것이 자기 분신(分身)임을 아시고 만드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만드신 피조물로서의 자기 자신을 공간 중에 뚝 떼어놓고 객관적으로 관찰해보는 그런 의미라고나 할까요. 다시 말해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을 만드신 것이 창조의 원래 의도이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독생자 하나님을 가장 최초로 만드셨습니다. 당신의 “형상”[고후 4:4]으로서 만드신 것입니다. 연후에는 그 아드님을 통해 많은 피조물들을 만드시게 되는데 역시 그 의미는 "자기 분신"을 만든다는 그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가 심심풀이로 장난감을 만들어서는 부수고 다시 만들고 하는 따위의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기 이외의 또 하나의 자기를 만드셔서 그렇게 만드신 "자기"와의 관계를 설정하실 때 원래 한 분으로만 계시던 때의 모습 그대로 계속 하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지속적인 관계 설정을 모색하신 결과가 바로 머리와 몸의 한 몸 관계, ‘불가분의 하나’ 관계입니다.

'머리 따로 몸 따로'이지만 그것이 하나로 붙어 있어 하나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하나로 있는 이치이니까 하나가 불행히도 고통 중에 빠지면 다른 하나도 똑같이 그런 고통에 들어가는 것임을 이미 강조했습니다. 바로 이 이치로써 우리가 죄 중에 받을 고통을 함께 나누어 지시고 우리 위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우리 죄 를 용서하시는 근거를 만드시고 또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사시는 영원한 삶의 토대를 이루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만일 우리 위해 죽으시기만 하고 다시 살아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의 상대가 없으니까 여전히 나 혼자만 사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전히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 살 수밖에 없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 위해 죽어주신 의미가 없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계시지만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이시요 나는 인간이므로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전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이 하나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범죄로 인하여 인간 스스로 이 하나 됨을 깨뜨린 것이요 이렇게 한번 일단 깨어진 것은 그것을 다시 봉합하여 원상 복구하기는 하나님의 일사부재리에서 불가능합니다.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고로 새로 관계 설정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 됨을 형성해야 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만[내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굳어져 있으므로] 나와 하나 되심이 가능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심도 나 같은 인간이셨기에 가능했었고 또한 이제 내가 나의 사랑의 상대 즉 또 하나의 나로서의 주님과 하나 되어 생명의 원리원칙대로 살 수 있음도 주님께서 나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그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위함으로써 나를 위함이 아니라 나와 하나 관계, 한 영 관계를 이루어 계신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곧 나를 사랑함이 됩니다. 이 사랑의 법칙이야말로 애초 조물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신, 아니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신 바로 그 의도에서도 나타나듯이, 애초 한 분으로 홀로 계셨던 때를 영속시키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고통을 나누어 지신다 했는데 그 나누어 지심이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한 영”[고전 6:17]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한 몸을 이루어 있기 때문에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귀가 아프면 온 몸이 그 고통을 함께 느끼게 됩니다. 다 한 신경과 한 피로써 하나로 통해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매를 맞으심으로 내가 받을 형벌을 그 한 몸에 담당하심으로써 나는 이제 아무 고통 없이 이 세상 사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성경의 한 쪽만 보고 나머지 쪽은 간과하는 큰 잘못입니다.

나와 함께 당하신 채찍이요 함께 죽으신 죽음이니 나는 그 함께 한 죽음과 채찍의 의미를 이제 구원 받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움으로써 드러냄입니다. 무엇이든 '함께'입니다. 영광도 '함께'요, 고난도 '함께'입니다. 한 몸의 이치에서 이는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세계의 모든 믿는 형제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의 지체일진대,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기타 회교권 국가에서 그리고 북한에서 고통을 받고 핍박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내가 그 고통스러움에서 하나로 통해 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런 공간적인 의미만 아니라 사도시대나 또는 지금까지 오면서 각 시대 갖가지 형태로 고난 받으며 고통을 견딘 모든 성도들과 오늘날의 나 역시 시간을 초월하여 그 고통과 하나로 연(連)해져 있고 그 아픔이 내게 미친다는 것 역시 나무나 명백한 일이 됩니다. 이런 관점으로 대하면 인간 구원의 진리라든가 믿음 생활에서 우리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성들이 무엇하나 이해 못할 것이 없고 순수하게 인간 상식 그대로이고 아주 간단 명료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너무 상식적이고 간단하고 단순하여 어리둥절할 정도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직 철도 채 들지 않은 어린 아이라도 믿고 구원 얻는 것이 되어야 가히 <만인>이 구원을 얻는, 만가지 계층과 연령의 인간이 다 공평하게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이기에 그러합니다. 이런 단순한 상식 선에 머무는 간단명료한 것을 세상의 종교는 모방하지를 못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진리가 아니므로 원래 거짓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래서 잡다하고 어렵게 만들어 헝클어놓고 진리에 접근 못하게 차단하는 것이 사탄의 수법이요 교활한 간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뜻을 벗어난 악령들이나 인간들을 "미워하셔서" 영원한 형벌에 처하시는 것을 어떤 이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고 의문을 나타내는 이가 있으나, 이 역시 우리는 사람이요 하나님은 우리처럼 피조물이 아니라 조물주이심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그래서 우리와 같은 사람 즉 피조물처럼 여기는, 우리가 늘 범하기 쉬운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같은 피조물이라면, "그럴 수 있느냐"는 등으로 같은 처지에서 비판도 가하고 칭찬도 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하나, 인간과 그 인간을 친히 만드신 조물주 사이에서는 그런 판단의 척도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나와 같은 사람, 나와 같은 형상을 만들고 그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그런 창조의 일을 할 수 없는 이상, 인간으로서 그 누구도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능히 헤아릴 수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직접 조물주의 처지가 되어보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왕과 백성의 차이와 같습니다. 법질서의 제정자이면서 집행자요 그 판결자(判決者)로서의 하나님의 위치입니다. 이는 마치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이 그 사랑을 놓고 고민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눈물 흘릴 때 직접 그 사람이 되어 동일한 체험을 해보지 않고는 말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지 진정으로 그를 위로하여 도움이 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픈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도 똑같은 아픔을 느껴보지 않고는 그를 진정 위로해줄 자격부터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내가 아니고 내가 그 사람이 아니므로 그렇습니다.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이 고통스러워 할 때 자기가 그 어린 것을 대신해서 그 아픔을 당했으면 하는 그 심정이, 바로 그런 한 몸으로 있다가, 즉 하나로 있어 오다가 자식을 낳아 둘로 존재하게 되었을 때의 그 하나로서의 느낌이요 당하는 괴로움인데, 이것은 그 아이의 친부모만이 아는 감정입니다. 솔로몬의 명(名)재판에서도 이는 확인됩니다[왕상 3:26].

복제인간을 만들면 신의 영역을 침범하느니 않느니 하는 것도 실상을 알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육체란 물체는, 사람이 그 구성 인자를 알면 그 설계를 따라 얼마든지 만들 수는 있어도 (그것은 창조 행위가 아니요. 다만 이미 창조해내신 그 과정을 밟아가서 똑같은 것을 모방해 만든다는 것일 뿐이므로) 그 주체가 되는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신체로서의 사람 모습을 지닌 생물(인간이 아닌)은 될 수 있어도, 부모의 몸에서 태어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면 영혼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을 그런 영혼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은 그 때의 에덴낙원에서나 지금 현대에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불행의 씨앗들입니다. 때때로 종교인들은 "우주가 바로 나요 내가 바로 우주이므로 나와 우주는 별개가 아니고 하나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말인즉 틀린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옴으로써 한 분 하나님의 분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물주를 인정해야 그 말이 뿌리가 있는 것인데, 조물주는 부인하면서 그런 말만 하니, 그럴 듯 하면서도 아주 180도로 틀린 거짓이 되어 뿌리 없는 나무가 됩니다. 그것은 실제가 아니고 한낱 그림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우주가 바로 나요 "나"란 이름으로 통할 수 있는 개체들이니 한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만유(萬有) 곧 무릇 존재하는 것이 다 '우리의 것' 곧 '나의 것'이라 한 것입니다. 만유의 상속자 됨이요 이는 곧 하나님의 아들 됨입니다.

한 몸으로서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 됨을 유지하는 방법이 다름아닌,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는 다시 말해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시는, 조물주께서는 피조물을 위하시고 피조물은 오직 조물주만을 위하는 그런 관계를 통해서만 "나를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전처럼 본능적으로 나를 위하는 그런 자기중심으로써 나를 위함에 있지는 아니한 것입니다.

억지로 이름 붙인다면 위의 설명과 같이 ‘이성적으로 나를 위함’이 바로 이 "사랑으로 하나 됨의 원리"를 따라 나를 위함이라 하겠습니다. 곧 자기 부인으로써 그렇게 됩니다. 고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 방법을 거꾸로 해서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나를 위함인 줄 착각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본궤도, 정상궤도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내가 홀로 있을 때는 내가 나를 위할 수밖에 없으나 내가 만일 둘로 나누어 존재하게 되었다 할 때 이 두 가지의 내가 이전처럼 하나로 존재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는 바로 이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이 하나 됨의 이치를 따라 육체로 남녀가 한 몸되는 것도 여자의 육체는 남자가 그 주인이고, 남자의 육체는 그와 하나 되고 한 몸된 여자가 그 주인입니다. 남자가 자기에게 딸린 몸이라고 자기가 마음대로 못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이 여자 저 여자 상대하지 못합니다. 만일 그렇게 마음대로 하면 자기와 한 몸으로 선포된 여자와는 남남이지 한 몸이 아닌 것입니다. 일단 한 몸이 된 이상은 그런 방법으로 한 몸 됨을 유지하는 것이요 이에서 벗어날 때 범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릇 인간된 자는 모름지기 하나님만을 위하라 하시니 부득불 위하여야 되겠구나"가 아니라, 실상이 그러한즉 이 이치를 따라 진리대로 행하는 것을 기뻐하고 이 진리를 사랑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이치대로 살겠다는 스스로의 결심 곧 자기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행하는 바로 그것이 자유입니다. 우주 만물이 다 진리를 따라 운행하듯이. 하나님이 나 자신과는 별개인 남이라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과 하나님이 곧 나 자신이라 여기고 즉 내 뿌리라 하고 위하는 마음과는 이미 그 인식부터 다른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을 모심으로 즉 나의 '영원하신 선물로 받게 됨'으로써 우리는 문자 그대로 "신(神)의 성품(性品)을 얻게"(벧후 1:4) 된 것입니다. 이상 여러 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수불가결한 어떤 법칙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아니므로 "이 런 것을 다 터득해야 하는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천국은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명백히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 친히 나를 사랑하시어 내 죄를 인하여 나를 위해 피 흘려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로 자신을 영원히 내게 주신 사실을[갈 2:20]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자연적으로 필연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그 사랑이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 말씀을 자연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요 14:21,23]. 사람 삶에서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구든지 그 말을 들어주는 것이 상식임을 체험으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런 사랑>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모두 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런 이들에게는 로마서 7장이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냐 아니냐, 구원 받았다고 되어 있는 이가 나중에 멸망할 수도 있느냐 없느냐, 등등의 말은 듣기는 들어도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를 않습니다. 담아 둘 필요가 없어서입니다.

단지 아는 것은 자기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하는 분을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것, 그 분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것은 그 분의 요구 즉 말씀을 듣고 그 뜻대로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는 이 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특별한 것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랑에 따라 자연스러운 <상식적인> 열매가 맺어지고 있음을 타인이 인지할 수 있다는 것, 그저 그것뿐입니다. 항상 기쁘고, 범사에 감사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기를 쉬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의 법을 준수하고 국가 원수를 공경하고..등등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것이 다 인간 상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어린 아이 같은 믿음에서 나는 사랑이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런 저런 인간의 논리에 호소하여 갖가지 설명이 필요할 뿐입니다. 믿음 아닌 것을 믿음이라 여기고 사랑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어린 아이"답지 못한 비논리적 사고방식 때문에 헝클어진 것을 정리하는 차원에서입니다. 어린 아이의 논리가 가장 순수한 인간 논리인 것입니다.

구원의 핵심이 바로 이러하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당연히 구원 받은 즉시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처럼 되고 다신 죽음이나 고통을 맛보아서는 안되는데, 현실은 그렇지를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지금도 일하시므로 우리도 주님 안에서 함께 일하는 위치가 되어, 주님께서 세상에 처음 보내심 입은 것과 같이 우리 또한 꼭 그와 같이 보내심을 받은 터이므로, 세상에서 마치 구원 받지 않은 사람처럼, 심지어는 그 받는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사람처럼[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듯이] 세상에 비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한 일반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삶을 외형적으로 영위해 가되 다만 특이한 것은 세상 사람은 다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인데 비해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리는데 심혈을 기울이며 이타주의로 일관한다는 것입니다. '외형적'이라 함은 실제로는 지극히 높으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이요 그리고 그 아버지께서 항상 함께 계시는 넘치는 은혜 속에 매일 매시간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세상 계실 때 외형적으로는 죄인의 모습으로 지내심으로써 이 세상을 구제하는 구원자처럼 보이지 않고, 부귀영화로써 인간을 저울질하는 세상의 안목과 기준으로는 "별 것도 아닌 존재"이셨던 관계로 단지 그 겉모양만 보고 세상이 업신여기고, 그러나 그 행하신 일을 보고는 시기심이 가득하여 앞뒤 돌보지 않고 무자비하게 십자가에 처형해 버린 것과 같은 상태에 우리도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어 계셨으나 실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조물주이셨고 따라서 다른 사람은 다 버리고 떠나도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고 하신 바로 그대로가 우리의 현재 형상이요 신분이요 위치인 것입니다. 동일한 위치라고 내가 주님과 동등하다는 것은 아니니, 주님은 머리시고 나는 그 몸의 한 지체로서 오직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몸의 각 지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지만 나는 단지 그와 하나 됨으로 인하여 그의 일에 동참하는 차원입니다.

때문에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난[다시 출생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처럼, 바람이 제멋대로 불 때 바람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그 인생관과 신념과 생활태도가 180도 전환을 한 것은 분명한데도 그 모습으로 말하면 이전의 그 초라한 육신의 모양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 주님께서 하나님의 이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신 것처럼 우리가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과 함께 일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처럼 똑같이 목마르시고 시장기를 느끼시고 결국에는 그것도 비참한 ‘죄인의 죽음’의 형태를 따라 세상의 안목에는 버림 받은 자로서의 비참한 죽음을 당하신 것이니 우리 역시 세상에서 바로 그러합니다. 그래서 “나를 인하여 실족(失足)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당장 하나님의 아들로서 위세 좋게 세상에서 당당히 행세하실 줄 알았는데 그와는 전혀 반대로 약한 자로서 임하심을 보고 의아해하는데 대한 답변이셨던 것입니다.

자기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데도 겉으로는 전혀 무관심하신 것처럼 구출해주실 기미라고는 보이시지 않았기 때문에 딴에는 하도 답답하고 심지어는 처음 성령[아버지 하나님의 영]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알리기는 했지만 그것마저도 의심이 들었던 요한입니다. 말하자면 그 믿음이 크게 흔들린 것입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선입관, 편견에 의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성경을 대할 때 "실족하게[넘어지게]" 됩니다.

즉 성경을 엉뚱하게 다른 의미로 억지 해석을 하게 되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벧후 3:16]. 이 모든 것은 우리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확고히 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만일에 우리가 구원 얻은 즉시로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하고 다시는 죽음 같은 것을 맛보지 않는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겨 일반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이 드러난다면 세상 사람치고 누가 믿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이 되어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니 세상 인간 치고 믿지 않는 이 없을 것입니다. 내 편에서는 아무 노력이나 힘 한 푼 들이지 않고 선물로 얻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장에는 그런 표면적인 엄청난 구원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자기의 악한 길과 방법을 따라 여전히 자기 욕심을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믿지 않는 행보를 계속하고 세상 끝까지 이를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믿음을 따라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우선 눈앞에 나타나는 이익을 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하는 그런 사람들을 구분해내는 역할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런 옳고 그름을 떠나 오직 자기 욕심을 따라 행동하여 짐승들처럼 그런 본능대로 금수의 삶을 살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그런 사람들은 그들대로 걸러내고 솎아내는 작용도 겸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친히 그런 것을 처음부터 모르셔서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런 솎는 일을 하신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충분히 납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피조물들과 불가분이시고 머리와 몸의 관계로 영원히 위치해 계시므로 그리고 하시는 모든 일이 피조물들을 위하심에 있는 까닭에 그렇게 하시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의인이라는 것은 사람 살리는 가장 고상하고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은 이와 같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옴, 자기 고향을 되찾아 감이요 자기 집을 되찾아 옴입니다. 원래의 본 모습으로 돌이키고 복귀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어놓고 자기의 능력과 사랑을 과시하기 위해 그런 극적 장면을 일부러 꾸며 연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물론 사전에 그런 일을 예상하시고 만반의 대비를 하신 것은 사실이니. 무엇을 만들거나 작품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대비 없이 하는 이 누가 있습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진행되도록 하실 리 없는 것은, 아무리 친히 지으신 피조물이라도 일단 지으신 다음에는 그 의지를 꺾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만사를 이와 같이 원리원칙을 따라 공평공정하게 운영하시기 때문에 이를 잘 아는 사탄은 지금까지 자기의 욕심에서 우러나는 모든 계획을 감히 진행시킬 마음을 품을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원리원칙대로만 나가실 것이니 어쩌면 자기의 구상이 계획대로 맞아떨어질 수도 있다는 망상 속에 여러 가지 성경에 예언해놓은 일들을 감행해볼 것이지만, 아무리 하나님께서 약하시더라도 피조물보다는 강하시고 아무리 어리석은 면이 있으시더라도 피조물보다는 지혜로우시니, 교만한 자는 이렇듯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고로 악령에게나 악인에게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감이 얼마나 두려운가!"[히 10:31]가 됩니다.
 

§ 마음을 지키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은 '일방적으로 계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영접해 모시면 좌우지간에 어떤 경우에서나 자동적으로[기계적으로] 계시는 줄 착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뜻이니, 반드시 내 편에서의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드리는"[계 3:20] 적극적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양면성이요 동시성의 의미인 것이다. 말하자면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고 하는 동작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양상이 다름아닌 둘이 하나됨의 영원한 생명력인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에 해당되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말씀을 일반 불신자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이심을 명념(銘念, 銘心)할 필요가 있다.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 동시에 양면성으로 이루어져야 둘이 하나됨이 유지되는 것이지 어느 일방적으로 흐름으로써 되어지는 일이 아닌 것이다. 즉 3위1체의 원리에서 흐르는 방향은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듯한 모습을 띠고 있으나 3자간(者間)의 전체 양상을 보면 갑에서 을로 다시 을에서 [병을 통하여] 갑으로 동시에 흐르고 있는 모습을 띠고 있음이다.

때문에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 한 것이다. 즉 을이 갑을 위하면 갑이 을을 위한다는 의미다. 왜냐면 함께 움직여주어야 그 하나됨이 유지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내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의인이 죄인을 위해 죽으시는[롬 5:8] 첫 시동(始動)은 걸어주셨으나 그래서 내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확증되었으므로[:8] 이 사랑을 알고 나 자신 하나님을 사랑해야 그래서 향후 절대적으로 순종하기로 약조함으로써 회개해야 비로소 그 구원이 내게 실효(實效)를 나타내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믿어야 구원이고, 믿지 않으면 즉 순종할 의사가 없어 회개가 없을 때는 그 크신 구원도 오직 그림의 떡으로만 영원히 남게 됨이다. 따라서 이렇게 차후로는 절대로 순종하겠다는 의사가 없을 때는 회개가 없는 것이고, 회개 없이는 아무리 세례 받아 보아야 절대로 죄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다[행 2:38]. 그런데 성경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은 그냥 그것으로써 구원이 된 줄로 착각하는 것이니 오늘날의 거의 전부의 세상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교리가 그런 위치에만 머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하셨고,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21] 하신 것이다. "나를 사랑하면 나도 사랑할 것이다" 하는 말씀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나를 사랑하여 내 계명을 지키면[말을 지키면] 나도 그를 위하여 움직일 것이라"는 말씀이시니, 경고요 약속[요일 2:25/약 1:12/2:5/히 10:36]이시다. 이는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하고 나를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할 것이라"[눅 12:8,9/마 10:32/딤후 2:12] 하심과 똑같은 의미다. 오늘날 "배도(背道)"[살후 2:3] 상태에 있는 "기독교"는 이러한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난데없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움직이심만 강조하는 것이다. 동전의 일면만 찍혀 있으면 화폐 가치가 없듯이 여기에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도 같은 맥락에서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빌 2:12] 있는 전제 아래 그리스도의 구원은 계속 유효한 것이다. 어떻게 이루느냐, 그 이루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에 명백히 한 대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롬 14:7-9] 것이니, 이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 그대로여서, 갑이 계속 을을 위하는 전제 조건으로 을이 갑을 위해야 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으나 그래서 이를 전제로 하여 나의 구원이 이루어졌으나, 그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의 공효(功效)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빌 2:12/딤전 4:16/고전 9:24-10:13/15:2/빌 3:8,9/딤후 3:15/벧전 2:2/히 3:6-17] 필수로서 마땅히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이치 그대로다. 명백히 인과 관계다. 갑이 인(因)이 되어 을은 그 과(果)이지만 또한 을이 인이 되고 갑이 과가 되어 이렇게 하여 서로 양방[쌍방]이 교류함으로써 둘이 하나됨이 유지 존속되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했고,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도 그러하다"[23:7] 한 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이니,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것이다[고후 10:6]. 여기에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필수이다[살전 5:17]. 그러나 동시에 "모든 지각(知覺, understanding)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빌 4:7] 것도 사실이다.

역시 이 경우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4]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7]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 항상 교차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우리의 사귐[교제, 교류]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한 바로 그 의미가 되는 것이다. 즉 상보성(相補性, complementarity)이다.

구원이 무엇이냐, 영생하는 것이다. 영생 혹은 생명이 무엇이냐, '소리 내는 두 손바닥'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머리와 몸, 둘이 하나되는 것이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를 이루는 관계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똑같이 평등하게 최대의 행복을 함께 누리는 것을 말한다. 이런 관계로 전부가 하나되는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그 역(逆) 현상이 일어난다. 즉 생명과 대립되는 개념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 중간은 없다. 말하자면 극과 극의 대립 양상이다. 이것이 3위1체의 원리다.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이다. 생명 아니면 곧바로 죽음이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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