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33)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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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 파탄

소위 가부장적 제도 하의 가정이 상호 정신에 입각해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유지 지탱해온 것이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창조 당시부터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다.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지 동시에 둘이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 되면 인과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모든 만물은 인과의 법칙으로 진행됨을 3위1체 원리는 밝히고 있다. 이제 그 가부장제가 무너지고 양성 평등으로 되어가는 오늘날 여전히 가정이 '과거처럼' 지속될 것이라는 사고에 젖어 있다면 그것은 꿈 꾸는 것이 될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라는 말씀에 따라 거의 억지로 지탱해온 것이 지금까지의 가정이다. 그래서 여자는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남자에게 복종하면서 그 덕에 가정이 유지되어 왔다. 겉으로는 평안하고 무사하게 그렇게 견지해온 것이다. 덕분에 자녀들도 가정에서부터 질서란 것을 배우고 사회가 절대로 온전하지는 못할망정 명맥이라도 유지해왔었다. 이 자체가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담의 범죄의 결과에서 온 저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의 "다스림"에서 해방되었다고 외쳐댄다. 그 결과는 어찌 되는가. 무슨 집단에서든지 둘만 모여도 그 대표가 있게 마련이다. 즉 중심이 없고 그 대표성이 없으면 어떤 집단이든 존속하지를 못한다. 이것은 머리와 몸의 원리다. 이왕 둘 이상이 모여 하나처럼 행동하자는 약속이 그런 집단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인 만큼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정은 가장 기초적인 사회 집단이다. 가장을 중심으로 뭉쳐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오늘날 여자가 남자와 동등이라고 아우성 치는 판이니 이 중심이 흐려져 있고 서로 중심이 되자 하고 나누어 하자 하니 한마디로 콩가루 집안이다. 이래서도 세상은 이미 종언의 막을 서서히 내려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양성평등 의식이 보편화되고 급기야는 국법으로 보장되게 이른 것이 요 몇 년 사이이니 그 가시적인 결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미리 내다보기는 불을 보듯 훤하다. 이런 것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나지 않았다. 성경과 그리스도를 말살하고 무기력화하자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음모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는 인생들을 조종하는 자이다.

머리가 둘 있으면 그 조직은 와해된다. 머리는 하나뿐이다. 어느 집단, 단체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정의 가장(長)은 단 하나다. 여자든 남자든 둘 중 어느 하나가 부득불 머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가 가장이어야 하는가, 남자가 가장이어야 하는가 상식대로 판단하면 될 일이다. 단 머리는 둘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니 이를 무시하면 인간 상식마저 짓밟는 것이 된다. 상식을 도외시하면 그 자리에는 광란밖에 발 붙일 것이 없게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인생 가정은 실상 병적인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다스려야 하고 여자는 틈만 있으면 남자를 넘겨다보려고 하는 판이니 그것이 어찌 병적이 아닌가. 이와 같이 아담 범죄 후 인간은 비극의 연속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다. 물론 가정은 축복이다. 저주 속에서의 축복이다. 저주 받은 죽은 자에게 무슨 축복이 있겠는가. 노아 홍수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번성하라고 축복하신 것은[창 9:1] 범죄하기 전 아담에게 내리신 전폭적인 축복과 달리 한정적인 축복이니 다시는 물로써 멸망하지 않고 계속 자녀 생산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제한된 축복인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인류의 자식 생산이 끊겨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선언하신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으니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신 것이다. 이 말씀에 의거하여 바울 사도도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독신으로] 더 복이 있다"[고전 7:1-40]고 교회에 가르친 것이다. 구원 받은 자마다 그러해야 한다는 명령은 아니고 각자 의지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gift]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다"[:7] 하였다.

여자는 원래 남자를 위해 창조된 것이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의 다스림을 받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남자가 여자를 다스려야만 되어 있는 이유는 여자가 남자를 넘보려 하는 탓에 있는 것이다.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이 때는 남자와 여자의 성별이 구분되지 않았다] 이 남자[인간]를 보조하는 짝이 될 존재를 구하시는 중에 맨 마지막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 앞서 창조된 것이 우리가 천사라고 부르는 영물들이다.

이 영물들은 자연계의 동물[성경대로 표현하면 날짐승, 들짐승, 기는 것, 가축 종류]을 인격화하여 만드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그들이 창조된 곳은 이 자연계가 아니라 이미 영적인 존재가 되어 있는[영혼이 생김으로써] 인간을 위해 별도로 지어진 에덴낙원이라는 신령한 세계였으므로 처음에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하고 있던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니 곧 신령한 몸을 지닌 신령한 즉 영적 존재로서 인간보다 나중에 창조되기는 했지만 지식과 능력 면에서 월등하였다.

이런 월등한 특성을 지니게 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돕기 위해서였다. 모든 면에서 인간이 월등하나 지식 면에서만은 이들 영물들에게 뒤쳐져 그들의 도움을 의지하게 하신 것은 양편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조화된 균형을 이루게 하심이었다. 따라서 자연계에 속한 짐승들의 대칭이라고 하지만 영계에 속한 짐승들은 모양부터 달랐으니 예컨대 자연계에 속한 뱀은 영계에서는 "용(龍)"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사실을 밝히기 위해 용이라 하지 않고 자연계에 속한 동물을 기준하여 사탄을 "뱀"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계에 속한 짐승들은 네 발로 기어가는 것인데 이 영계의 존재들은 인간처럼 직립보행이니 원래 인간을 위해 인간을 보좌하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용이 나중에 저주를 받고서야[자기의 상전 격인 인간을 죽음에 빠뜨린 대가로] 배로 기어 다니게 되는 것으로써 확인된다. 저주로서 "흙을 먹는다"는 것은 그 육체가 자연계에 속한 동물의 육체처럼 가시적인 것으로 변하게 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용의 존재만은 인간의 눈에 띄어졌으므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세계에 그 모습이 널리 알려져 있음이다.

이들 영물들처럼 비록 에덴낙원에서 나중에 창조되었지만 여자는 다르다. 여자는 직접 남자의 신체의 일부[갈빗대 하나]로써 형성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그런 영물들이지만 인간[이 때는 남자로 있기 전] 아담의 눈에는 시답잖은 모습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계의 각종 동물의 대표성을 이루어 인격화하여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할 뿐으로서 그 모습으로 치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음이다.

그래서 부득불 자연계의 암수 구별과 같은 육체 형태로 아담의 짝을 만드시니 이 때부터 인간은 남녀 구분이 생긴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남녀라 하는 것이지 자연계의 동식물로 보면 암수가 아닌가. 그러나 영물들은 그런 구별이 없고 또 같은 종류를 생식하고 번식할 필요가 없는 것은 영원히 존재하므로 홀로 그 대표성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호랑이면 호랑이, 독수리면 독수리 하나뿐이다. 이렇게 영물들은 그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특징인 암수 구별이 없고 인간만이 그런 것이 있으므로 열등 의식을 지니는 계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조화 차원이니 영물들 위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그리고 먼저 존재하게 된 연장자로서 군림해 있는 인간이라 교만해질 수 있으므로 이를 완화하는 완충 역할이 되게 하심이다. 이런 높은 지위[머리로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에도 불구하고 지식 면에서는 인간이 영물들에 비해 열등한 것을 업신여기기 시작한 사탄이 마침내 인간을 증오하기 시작하여 살인[아담 부부를 속여 스스로 죽음에 빠져들게 유도함]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인간 아담과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인간[여자]이 생겼다는 사실이 아담에게는 그럴 수 없이 좋았었다. 그래서 스스로 영물들처럼 제각기 자기 특성에 맞게 이름을 지어 부를 수는 없고[바로 아담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 그러나 구분은 지어져야 하므로 자기는 "남자"이고 상대는 "여자"라 한 것이다. 이렇게 영물들과 한 세계에 살면서 자연계의 동물들의 육체 형태를 취하니 실상 이는 그런 구별이 없는 영물들 앞에서는 창피스러운 것이다.

왜냐면 하등 생물[자연계의 동물은 인격성이 없으므로]과 같은 모습의 형태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면서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인간[아담] 자신에게는 자기와 같은 자기를 닮은 존재가 하나 더 있어 자기와 벗하고 지낸다는 것이 무한한 낙으로서, 인간과 이웃하고 있는 영물들은 누리지 못하는 일종의 특혜라고 할 수 있으므로, 앞에서 지적한 대로의 균형과 조화를 맞추시기 위해 그런 '장점'에다 '단점', 또 '단점'에다 '장점'을 곁들이게 하신 배려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인간을 보필하는 영물들로서 이간에게 이로운 것만 말하고 기분 나빠 하거나 마음이 상할 것은 건의하거나 발설하는 게 아닌 것이 영물들의 역할이므로 인간의 그런 사실을 일부러 지적해주는 영물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인간이 이 사실을 알고 숨었다고 하니까 "누가 네게 벌거벗은 것을 말해 주었느냐" 하신 것이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인간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존재이므로 현재를 기준해서 성경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인간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므로 옷을 입지 않고는 벌거벗은 상태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러면 왜 인간이 그런 특징 즉 영물에게는 없는 자연계에 속한 동물적인 몸의 형태를 그들만은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가. 현재 이 자연계에 사는 우리로서는 영계의 일을 알지 못하나, 그러나 그 영계야말로 공기 즉 분위기조차도 이 자연계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고 맛도 볼 수 없는 그런 굉장한 황홀경이라 할까 무슨 그런 종류의 것이라 단정해도 좋은 것만은 분명하다.

하여튼 그런 극락(極樂)의 환경 속에서 너무나 좋기만 하고 기쁘기만 한 중에 그런 저런 신경 쓸 이유도 필요도 없는데다, 인간 아담은 그 신령한 세계에서 나는 신령한 나무들의 열매나 과일을 먹는 고로 그 열매들이 신령한 것이라 먹기만 해도 그 육체는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찬란하고 영롱한 광채로 처음부터 둘러싸였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와 같이 진주같고 구슬 같은 뭐 그런 식의 빛으로 몸이 덮여 있는지라[자연계에 속한 짐승의 몸에 털이 덮여져 있듯이] 그런 수치가 되는 말하자면 치부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던 터다.

또 이들 남녀는 그 세계의 분위기 자체가 이루 형용할 길 없는 쾌락을 자아내므로 따로이 남녀 교접 같은 것을 해서 낙을 맛보려고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자녀 생산은 거기는 이 자연계가 아니므로 동물과 같은[육체의 형태는 동물과 같은 원리로 되어 있으나] 생식이 필요 없고 영물들의 도움을 받아 그리고 최소한의 여자의 조력 아래 아담 자신의 몸으로부터 신비한 방법으로 얼마든지 자녀 생산을 할 수 있었다고 우리는 추리할 수 있다[물론 아직 그 단계는 이르지 않고 비극적 사건이 발발하였지만].

그러므로 아담은 여자의 몸이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범죄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다시 환원되면서 신령한 몸을 상실하고 그 영롱한 광채가 벗겨지면서부터 그들의 육체가 자연계에 속한 짐승들의 암수 구별처럼 되어 있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본성적인 수치심[이는 주변의 영물들을 의식함이다]으로 무화과 나무 잎사귀를 따다가 아랫도리를 부랴부랴 가리게 된다. 아직은 거기 신령한 세계로부터 추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남자 곧 아담의 씨 곧 후손이다. 여자는 앞에서 말한 대로 이런 아담을 돕기 위한 보조 역할 또는 짝으로서 또는 친구로서의 구실이라 할까 여하튼 그런 성질의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여자가 남자를 위해 지으심 받았다 한 것이다. 또 같은 날 동시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을 격하여 여자가 나중에 창조된 그 순서상으로 본 구조도 무시할 수 없다. 창조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따르고 남자는 그 앞장을 서는 그런 관계다.

짝이란 것은 항상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다. 절대로 동등하지 않는 것이 대칭 관계다. 먼저 있던 것을 중심으로 해서 그 닮은 꼴이 생겨나는 것이 짝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씨는 남자의 씨이다. 여자 자체가 남자[아담]에게서 났으므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의 이런 구조와 사고방식을 따라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시라 하고 그 "아들"이시라 하는 것이다. 즉 "낳은" 다시 말해 갑에게서 을이 파생한[하나님의 경우 하나님께서 당신과 같으신 또 하나의 당신의 모습을 갖춘 존재를 창조하신 것이 아들이시다] 사실을 가리킴이다.

이런 부모 자식 관계에서 인간적인 어법으로 한다면 어머니의 아들이라 할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의 딸이라 할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딸이라 할 것인가, 적당한 표현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부모자식 관계라는 사실은 명시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아담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다보니 첫 사람 아담이 나중에는 남자가 되었고 아버지가 되었으므로 이 논법대로 "아버지"시라, "아들"이시라 하는 것뿐이다.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는 남자고 여자고 구별이 없는 영물과 같은 몸의 구조였다. 비록 자연계의 흙으로 만드셔서 그 육체 형태가 자연계의 동물들의 그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어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제 아래 만드셨기 때문에 그런 성별을 구분한 육체로 지으실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동시에 여자까지 만드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기록대로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여자가 창조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사탄 즉 이 세상 신[神-고후 4:4]은 양성 평등이라는 해괴한 논리로써 부정해버림으로써 성경을 파괴하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려놓아야 적(敵) 그리스도가 나서서 그리스도라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자처하기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위한 정지(整地) 작업의 일환으로 양성 평등을 조작해낸 것이다. 고로 때는 정히 마지막 때다. 과거에는 일찍이 이런 소동이 없었음을 상기할 일이다.

따라서 인간이 새로 나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에 들어가면, 주님 말씀에 천사들과 같아 결혼하는 일이 없다 하신 대로 남녀 구분이 없어진다. 생식을 위해 암수가 있고 인간의 남녀는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하나님 모습을 따라 그런 관계를 만들어 주시고자 함이었는데[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처음부터 창조된 까닭에], 그런 작용이나 필요성이 사라졌는데도 무슨 좋은 점이 있어 그런 구별이 그대로 남아 있겠는가.

필요성이 없다는 것은 이제는 각자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가장 이상적인 '둘이 하나됨'을 형성하고 있는 까닭이다. 더군다나 영물들과 비교하여 창피스럽다고 느껴야 할 신체적 구조를 가지고 무슨 덕이 된다기에 그런 형태를 그대로 지닌단 말인가. 또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어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 자가 없으므로 과거와 같은 교만[앞에서 지적한바 있는]으로 인한 그런 부조화와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그런 형태가 남아 있어야 할 당위성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먼저 그 먹지 말라 하시던 선악과를 먹고 나중에 남자에게 먹으라고 준 것이다. 원래대로 하면 남자가 먼저 먹고 여자가 이에 따라야 하는 것이 순서다. 앞에서 말한 대로 먼저 하고 나중에 '따라 하는' 것으로써 그 의미가 아주 달라져 버린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먼저 거짓말을 함으로써 거짓의 아비[元祖]가 된 것과 같은 이치다. 남자가 먼저 먹어야 한다는 것은 형이 먼저고 아우가 나중이듯이 먼저 창조되었고 그 경륜상 남자가 여자보다 단 하루동안의 시간을 계산한다 해도 남자의 견문이 여자보다 위에 있다는 상식 차원에서의 관점이다.

그러나 사태는 거꾸로 된 것이다. 여자가 먼저 먹고 남자가 그 여자 주는 것을 먹으니 여자를 따라 하는 꼴이 된 것이다. 이래서 저주를 말씀하실 때에 "여자는 남자를 엿보려 한다" 하신 것이다. 모든 서열상 남자가 위에 있고 여자가 아래에 있으나[모든 짝의 개념이 그러하다고 앞에서 말한 대로] 이렇게 여자가 남자보다 앞서게 된 선례를 따라 여자는 이를 고집하여 부단히 이상과 서열과 순서를 뒤집고자 즉 남자를 기회만 있으면 압도하려고 하게 된다.

그래서는 애초의 기본 질서[남자가 먼저 나고 남자에게서 여자가 난 순서 등]가 유린되는 것이므로 억지로라도[이제는 인간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고 순수한 것은 모조리 상실되고 억지요 무리고 강제일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날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다] 이 애초의 원리를 유지해야 그나마 제대로 형태로나마 세계가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비극이 아닌가.


이 "엿본다"는 말씀은 나중에 가인이 범죄하여 아벨에게 적개심을 품기 시작할 때 경고하신 데에서도 나타난다. 죄가 가인을 엿본다 하신 것이다. 이 엿본다는 것은 절대로 호의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여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므로, 우리말 번역 "사모한다"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는 오역이다. 그러나 성경이 오역투성이라고 불만을 품을 필요는 없다. 창세기 4장 7절의 번역[생명의 말씀사 간행 "현대인의 성경"]처럼 "도사리고 앉아 너를 다스리고 싶어한다" 정도로 3장 16절도 똑같게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어 원어 표현이 똑같기 때문이다.

흠정역역의 경우 두 군데 모두 "desire [be] for(toward)"로 되어 있다. 필자가 요즘 이따금 사용하는 20개(2016년 지금은 54개로 늘어나) 영역판 비교에서 유일하게 New Living Translation 판에서만 "you will desire to control your husband"로 구체적인 내용을 따라 번역하고 있다. 아래 주소에서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 http://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1cor.11:18;&version=72;이런 오역은 우리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므로 또 하나님께서 구원과 관련된 치명적인 오역은 어떤 것이든 허용하실 리도 없는 것이니까 안심하고 성경을 읽을 것이다.

§  무엇이 구원인지 바로 알아야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당신께서 죽어 주심으로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주시는 것으로 은혜와 구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사람 삶의 방법, 사람 살아가는 법칙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구원으로만 그치지 않고 향후 우리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삶을 영위할 것인가 그 방법을 제시하심이다. 이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 이것을 간과하기 때문에 구원의 핵심을 놓쳐 실질적으로 구원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낳는 것이다.

구원 받음은 영원히 살기 위함인데 영원히 사는 방법을 모르고서 어찌 영원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이것은 구원 얻는 방법 자체를 모른다는 말과 같다. 이 점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즉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다"(롬 8:13) 하였다.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자기중심으로 자기를 위해 산다는 것이요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은 성령이 누구이신가 할 때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더불어 하나되시어 영으로서 내 안에 오심을 가리킴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되신 그리스도의 측면이시다. 사람은 육체이지만 그래서 우리와 같은 육체이심에는 분명하여 그 육체[이제는 범죄하기 전의 첫 사람 아담처럼 신령한 몸]로는 지금 하늘에 하나님[아버지] 우편에 계시지만 동시에 영[하나님으로서의 성령]이시므로 영으로서 즉 하나님으로서는 이 우주 안에 계시고 친히 만유가 되심이다[골 3:11]. 따라서 우리가 성령으로 "몸의 행실" 즉 "육체의 소욕(所欲, desires)"[갈 5:17]을 죽일 수 있음이다.

왜냐면 "죄의 몸"[롬 6:6] 다시 말해 "육신"[7:14-8:13]이 "멸해졌음(to be destroyed)"[6:6]이다. 그것은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6]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갈 5:23]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하던 과거와는 다른 것이니 "내 몸을 쳐 복종시키는"[고전 9:27] 완전히 역전이 되어 있는 즉 정상으로 복구된 상태인 것이다.

복종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버림 받은"[:27] 상태를 말함이니 이전 육신대로 살던 때를 가리킴이다[롬 8:13]. 그래서 그렇게 복종시키는 이유를 가리켜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고전 9:27]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을 보는 것은 내가 그렇게 죽은 것을 보는 것인즉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이다.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해서 죽으신 것으로 보는 것은 구원 얻는 믿음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해서 죽으시면 그 대신 죽으신 덕분에 나는 죽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기에 그런 의미는 이상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죽음의 의미로서 멸망으로서의 죽음 그리고 이 육체의 죽음으로서 나누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영생하던 즉 죽을 수 없는 아담으로서 죽은 자가 되어 있을 때에는[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사는 자로 만드셨으나 자기 스스로를 죽은 자로 만든 것이 범죄의 결과다-롬 5:12], 비록 현재는 육체로서 죽는 자가 되어 있으나 그 영혼이 결국은 사탄과 같은 악령들처럼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고"[요 3:36]와 "심판 아래 있음"[:18]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죽음은 영원한 멸망은 아니었다. 멸망이라면 그 허리에서 나오는 인간이 모두 멸망일 것이 아닌가. 단 영생하지 못하니 죽음인 것이다. 그리고 이 죽음이 범죄의 결과로서 애초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그 영광스러운 인간의 모습이 더 이상 아니고 뿐 아니라 육신에 "사로잡힘"[롬 7:23]으로 인한 "죄와 사망의 법"[8:2]의 지배로 말미암은 "허물과 범죄"[엡 2:1]로 인해 죽은 자요 죄인으로서 진노 아래 있음은[:3]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멸망의 죽음을 대신하신 것이 아니니 멸망은 일단 당하면 돌이킬 수 없음이다. 아직 마지막 심판이 아니므로 우리의 죽음은 멸망이 아니라 아담의 죄 값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죄 값으로 인한 결말로서의 죽음인 것이다. 이 경우 애초 하나님의 창조에서 의도하신 대로 영생하지 못하니까 죽음이다. 고로 아담의 죄 값으로서의 '죽음'을 청산하는 것과 우리 자신 육신에 매여 범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한[롬 6:2-4] '죽음'이 우리 위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나와 하나되어 나와 함께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인 것이다. 그리스도 홀로 죽으심이 아니라 나와 함께 죽으신 것임을 성경은 누가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명백히 해놓고 있음이다[엡 2:5,6/골 2:12/갈 2:20]. 그러므로 아담이 벌어놓은 처음 창조의 종료로 인한 죽음[그냥 방치하면 멸망으로 직결되는]의 대가를 치르는 죽음으로서의 그리스도와 함께 한 나의 죽음이 첫째 의미다.

이 처음 창조의 종료가 완벽해야 다음 새 창조로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이다. 죄인으로서의 죽음이니 십자가에서 죄인의 명목으로 당하신 형벌의 죽음이 되신 것이니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받은 것임을 성경은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갈 3:13]. 이렇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 됨으로써 처음 창조는 종결된 것이다. 죽음으로 마쳐졌으니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어 있은즉 나는 이 저주, 죄의 대가(代價)로서의 죽음을 완전히 치러낸 것이다.

그 다음이 내가 부득불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었던 즉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었던 육신 또한 이 죽음으로써 완전히 파괴된[멸해진-롬 6:6] 것이다. 내가 죽어 버렸는데 나를 위해 살고 내 욕심을 내고 하는 것이 어디 있다던가. 그렇게 단순히 내가 죽은 것을 믿으면 되는 것이니 왜냐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이 역사적 현실이기 때문에 나의 죽음과 무덤 속에 묻힘이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세상을 사랑하려 하기 때문에 이 단순하고도 명백한 사실을 믿지 않고 외면하려는 것이다. 원인이 주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해 두셨다[요 6:44,65]. 하나님에게서 배워야 함이니 즉 그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그 가르치심이라는 것은 이 세상과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위의 설명대로 "죽은 자"[마 8:22]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은 허허벌판 빈 사막과 같은 아무 의미도 없고 죽음밖에 없는 현실임을 바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현재의 삶을 마치 산 자처럼 그래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 욕심에 눈이 가리워 그리스도께 오지 못함이다. 

그래서 단지 영생과 영원한 영광만을 욕심 내어 그리스도를 따랐던 많은 제자들이 그 때까지는 그리스도를 믿노라 하고 사랑하노라 하고 열심을 내어 따라다니다가 정작 가르침의 요점 즉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생명의 법질서임을 밝히셨을 때 미련없이 떠나 버린 것이다[요 6:66].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이다. 믿는다고 해도 성경대로 믿지 않고 사람이 가르치는 대로 그들이 믿는 바대로 믿으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법이다[눅 6:39].

이 비극은 오늘날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목 마른 자가 주님께 오고 병든 자가 의사를 찾는 법이다. 목 마르다는 것은 영생에 대한 욕구를 말함이 아닌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영생을 우리가 갈망하게 되어 있는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함을 말씀하심이다. 죄와 죽음 때문이니 왜 죄와 죽음이 왔는지를 알고 현재 세상이 바로 그런 죄와 죽음 일색임을 알기 때문에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다. 거기서 해방되면 당연히 영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원인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요구하고 탐내니 세상 종교와 하나도 다른 것이 없고 나을 것이 없다. 불교에서 왜 인간이 이와 같은 인간고에 허덕이고 있는지 그 이유는 덮어두고 결과만을 두고 해결하려 하니 횡설수설만이 남게 된다. 인과(因果) 관계를 벗어난 일체의 것이 진리도 진실도 아니고 따라서 해답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3위1체의 원리는 이 인과론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3위1체 법칙을 증명하는 것은 3운법칙이다. 3위1체의 원리가 만유의 법칙인 것이다. 이 법칙을 벗어나서 그 어떤 과학적 진리도 영원한 삶의 진리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전에 있던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니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한다"[히 7:18,19] 한 대로, 이제는 "새 계명"[요 13:34] 아래 있음이다. 즉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 아래 있음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이 없는 자가 아닌"[:21] 것이다. 영원히 그러하다. 영원하신 아들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7,18] 하심과 같다.

이를 분명히 하시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10]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 새 계명이 작동되기까지의 모든 계명 혹은 율법은 그림자로서 맛 보기로 즉 이미 설명한 대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 곧 죽은 자임을 자각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연성을 가르치시려 하심이었다. 따라서 그런 그림자로서의 의미를 모세 율법으로 체계화하여 한데 묶어 하나님의 사전(事前) 교육이 시행되어 왔던 것이다.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계명을 무엇인가. 이미 이 말씀을 하시면서 설명하신 것이니 곧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영원한 만유의 법[삼위일체의 원리]이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한 몸['병']을 이루어 사는 삶의 도리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할 것이라"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역사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데 이는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이 "네가 하면 나도 하고"의 3위1체 원리에서의 양면성과 동시성이다. 어느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다시 강조한다. 때문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시고 시인해야 우리를 시인하시는 것이다[눅 12:8,9/마 10:32/딤후 2:12]. 사랑이라면 무턱대고 일방적이든 아니든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지만,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법질서를 제정하시고 집행하여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머리이시고 우리 피조물 모두는 그 몸이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의 역할이 완연하게 다르다. 몸이 자기인 몸을 인식하는 대로 머리를 인식해서는 안될 일이다. 우리의 신체 구조가 바로 그 설명이다. 머리가 몸과 같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 차이는 가히 하늘과 땅 차이다. 그리고 더 보태서 머리와 몸의 제대로 된 구분은 인과 관계에 있다. 즉 머리가 몸을  파생시킴이 정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머리는 어버이로서의 위치에서 몸의 각 지체를 대하는 것이다.

소생은 많아도 어버이는 하나다. 여기서 머리와 몸의 관계가 비롯되는 것이다. 신체의 구조로서의 머리와 몸 관계는 이 근원적인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상징해서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모든 관계는 3위1체의 원리로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니 만유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방법은 성경에 명시한 대로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롬 14:7,8)가 그것이다.

또는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이다. 갑이 움직이니까 그 본을 따라 을이 움직이는 것이지 을 스스로 움직이는 법이 없으니 이것이 인과(因果) 관계다. 그래서 나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영원히 이제는 나를 위해 사시는 것을 확증하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나도 역시 그리스도를 위해 그렇게 살기로 작정하는 것이 회개요 그렇게 사는 것이 믿음 생활[갈 2:20]인 것이다.

이전처럼 나 위해 나 중심으로 살아도 구원 받는다는 바로 그 엄청난 착각이 항상 문제다. 이것은 위에 명시된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백한 불신이요 반역인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분명히 경고하셨음에도 이를 믿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사탄의 말을 더 신용한 바로 그와 똑같은 거역인 것이다. 이런 똑같은 죄를 반복하고 여전히 같은 죄 가운데 있을 바에야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음의 고통을 맛보실 필요 없이 그냥 그대로 모든 인류를 영생하도록 조처하시면 될 일이 아닌가.

이같이 일치하지 않고 서로 모순되는 것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자연 법칙으로 운행되는 이 우주에서 용납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구원의 정작 참 의미를 알아야 하고 구원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해야, 다시 말해 "'주님, 주님' 한다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의 생명되시고 내가 주님의 삶을 살아 서로 바꾸어 자기 생활을 향유함으로써 둘이 서로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우리 구원이다. 내 안의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내 안에 내가 아닌 주님께서 사시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의 나이기 때문에 내 생명이 주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고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어 주님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실 그 때 나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은 대로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셔서 아버지의 일을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계셔서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과 같은, 사랑으로 하나됨의 이치를 따름인데 무엇이 그렇게 어려운가. 이것이 그리스도 복음의 요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고난을 다 감당하시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남겨두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이요 영원한 삶도 그리스도와 하나됨이기에 그렇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그 남으신 고난을 교회를 통하여 받으심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고 한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 고난을 필연적으로 받게 되어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되어 있음을 주님께서는,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확증하셨다. 고난 가운데 주님과 하나되어 주님과 더불어 함께 고난 받을 수 있는 은혜는 이 세상뿐으로서 때문에 그만큼 색다르고 말할 수 없는 가치의 은총인 것이다(빌 1:29).

주님과 하나되어 있음-모든 은혜는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 사랑으로 하나된다는 것은 덮어놓고 양편이 하나가 되자고 해서 상호 약조에 의하여 되어짐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이 어떤 상호 필요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도출되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것이 자연적으로 되어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라면 이 세상은 이미 오래 전에 그런 것으로 해서 살기 좋은 곳이 되어 있을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를 않은 것이다.

사랑으로 하나됨이 가능하다는 것은 본질상 그 양편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고 따라서 원래는 하나로 존재하던 것이(그래서 본질상 같다)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분리된 것뿐이고, 따라서 이 둘 또는 여럿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도 원래는 하나였으므로 그 원래의 하나로 응집할 수 있는 성질과 그런 강렬한 욕구에 의하여 계속 그렇게 하나로 존재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그러므로 이 죽음과 죄의 세상에서 잘못된 삶을 이제까지 살아온 대로 나 혼자 사는 삶이 처음부터 아닌 것이다.

머리를 중심으로 여럿이 한 몸을 이루어 함께 하나처럼 사는 것이 원래의 정상적인 삶이다. 최대한의 행복, 아니 그 이상이라도 기약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삶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도 없고 천사들도 없고 악령들도 존재하지 않는 양으로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대칭으로 되어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공기가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그 영으로 나와 항상 함께 계시고 함께 사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 살든지 죽든지 하는 것이다. 얼마나 든든하고 넉넉하고 푸근하고 느긋한 삶인가. 엄마 품속의 아기와 같은 것이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로서의 관계인 것이다. 아기가 눈을 뜨면 의식하는 것이 엄마다. 눈을 감고 잠이 들어도 으레 엄마 품속이려니 하는 평안과 안정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서 그러하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이러한 것이다.

남녀가 하나되는 것도 애초 아담 하나로 존재하던 인간이 그 아담으로부터 또 하나의 인간으로서 여자가 파생됨으로써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개의 개체로 양립하여 존재하게 된 것이고 이 둘 사이에 생겨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욕구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다 한 인간 즉 아담으로부터 난 것인데 왜 그러면 이제까지 하나로 화합하지 못하고 전쟁 없는 때가 없이 이 모양으로 지내오는가 할 것이다. 그렇다. 모두 사랑으로 하나되어 사는 유토피아에의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갈망에도 불구하고 그 화합을 깨뜨리고 각자 자기가 우위에 올라서고 더 많은 이권을 차지하고 싶다는 "욕심"이 동시에 내재하여 작용하고 있어 이 둘 사이의 내적 갈등에서 항상 후자가 압도적으로 군림한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 되어 있음을, 율법 아래에 있는 죽은 자와 죄인으로서 위치해 있는 의미를 설명하면서 바울 사도는 적나라하게 묘사했으니 곧 로마서 7장이다. 아담이 신령한 몸을 잃고[그 스스로 버렸다 해야 옳을 것이니 스스로 범죄했기 때문]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버린 후의 결말이다.

왜 전쟁인가 하는 앞서의 질문에 대한 답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써 설명이 된다. 즉 기계적으로 타율적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유 의지에 의해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것과의 차이다. 이 자유 의지가 작용하는 곳에서는 항상 일정 기준이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 그 기준을 따르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 판가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이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선호할 때 생명과는 반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이다.

하나님을 사랑함만 아니라 이같이 사람 사랑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이 없이 피조물 상호간의 협약에 의해서만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다. 머리이신 하나님만을 위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근본 바탕이 저변에 깔려져야 그 토대 위에 비로소 사람 사랑이라는 건축물을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세상 종교에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식하지 않는 데에서 그 아무리 선과 의를 외쳐보아야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머리이신 하나님을 위하는 기본 입장에서 하나님이 나와 똑같이 위하시는 내 이웃이다보니까 그 내 이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랑한다는 그 뜻이 된다. 요한이 말한바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한다(요일 5:)"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믿음으로써 가능해 지는 것이니, 그 믿음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으로 연계되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을 믿음이라 할 수가 없음이 명백해진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가 로마서 7장과 같은 고민을 할 수가 없게 된다는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로마서 7장은 자기 사랑이 언제나 먼저 달려와서 모든 것을 장악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도무지 발붙일 수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기 사랑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나의 삶을 그리스도께서 서시고 그리스도의 삶을 내가 살아드리는 마당에서는 자기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로마서 7장이 현재의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이 설명을 하고 난 후,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롬 8:1,2) 한 것이다. 이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 이런 저런 것을 다 몰라도 아주 간단히 말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사랑 속에 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로마서 7장의 체험을 따지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라고 오해하고 착각하는 순간 그 믿음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 믿음이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 즉 본색이 드러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있다가 다시 하나님의 품 속으로 돌아옴을 뜻한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다시 말해 아버지가 없이는 내가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살 수 없다" 하신 것이 이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 사랑함이 없이 그리고 사람 사랑함이 없이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살 수 없음이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그렇게 살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환경 탓에 그렇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하여 그렇게 된다는 말인즉 사랑에는 그런 것이 숫제 존재하지를 않는다. 때문에 로마서 7장에 대해 그것이 바울의 체험이었느냐 아니냐는 헛된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

"다시는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 2:20]고 말한 바울이 그런 탄식 곧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삶에서 오는 그 같은 탄식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만일 그래도 바울 자신의 이른바 "내적 영적 갈등"이라 규정한다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성경 자체를 부인할 일이다. 명료하고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괜히 어렵게 만들어 복잡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에덴 낙원에서의 사탄의 기만술(欺瞞術)이었다.

구원 얻은 자가 믿음에 떨어져 멸망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쟁도 부질없는 짓이다.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천국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이 명약관화한 이상 항상 그리스도만을 위하는 삶이 되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바울의 탄식처럼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되는 것이지 달리 신경 쓸 것은 없다. 모든 문제가 이같이 자기를 위하여 사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느냐 하는 데에만 달렸다. 그리스도도 위하고 자기도 위하는 그런 일은 인간 세상 종교에는 있어도 하나님의 복음에는 없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없다.

상식에도 어긋난다. 예정론을 두고 왈가왈부할 것도 없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벧후 1:10) 은혜만 받았지 자기 위주로 자기를 위하여 여전히 살면서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믿을 수 있는 그런 은혜는 받지 않았다. 그런 은혜는 주신 일이 없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서야 그 말씀을 누가 믿겠는가. 여전히 자기 중심으로 살면서 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위에서 베드로가 말한 경고의 뜻이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있지 않다고 양심상 판단될 때는 언제든지 자신을 점검하여 믿음에 있는가 확실히 해둘 일이다(고후 13:5). 자신을 위한 삶이고 그리스도를 위한 매일의 삶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어디서 그 처음 사랑을 버렸는지 맹렬히 반성하고 회개할 일이다(계 2:4,5). 자신을 위한 삶을 영위하면서 백 번 자기의 택하심을 믿어보아야 헛일이다. 사랑은 사랑이고 그 이상 이하의 의미도 있을 수 없다.

성경에 경고한 대로 사랑이 식어지고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다. 아가서에 사랑하는 자를 좇아 부지런히 찾아 다닌다는 대목이 있다. 이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부지런히 찾는 것과 내가 받은 구원이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사랑은 누리면 되는 것이지 전전긍긍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랑의 기쁨과 평안은 누리는 것이지 그것을 애써 보존하려는 몸부림은 결코 아닌 것이다.

든든하고 넉넉하고 그득하고 여유만만함만이 있는 것이다. 사랑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인 것이다. 이 '느낌'에 선행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이 믿음 은 반드시 나의 의지(意志)와 맞물려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사랑 역시 감정만이 아니다. 감정과 더불어 의지이다. 고기잡이의 명수인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질을 해도 허탕을 쳤는데 주님은 그렇게 마르고 닳을 지경이 되도록 지난밤 그물질했던 바로 그 자리에 그물을 던져라 하시는 것이다.

고기가 잡히리라는 느낌은 전혀 오지 않으나 그러나 "말씀하시니 그렇게 하겠다" 하고 행동에 옮긴 것이 믿음이다. 느낌이고 뭣이고 아무 것도 없지마는 말씀하시니 그런 줄 안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 따라 베드로처럼 행동을 하니 고기가 그물이 찢겨 나갈 듯이 잡혔던 것처럼 느낌도 희열도 사랑도 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간의 교류이다. 주님의 사랑이 나의 사랑을 일깨우고 나의 사랑이 다시 주님의 사랑에 활기를 주고 이렇게 오가는 교제인 것이다. 이것아 사랑의 동시성이다.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요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터이요 내가 또한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요 14:21) 하신 뜻이다. 내가 어디 있느냐, 주님 안에 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 안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내 안에 계신다.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신다" 하신 바로 그 이치다(요 14:1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게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하신 것과 같다.

이는 "내가 하나님이다" 하시는 말씀이신 것이다. 때문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이셨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이치에서 보이시는 사람의 모습, 그리스도의 그 모습은 아버지의 보이시는 모습이신 것이다. 그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어도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묘 14:9) 하신 것이다.

또한 "지금은 그들이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다"(15:24) 하셨다. 이와 같이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각기 다른 모습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통해 아직도 남은 고난을 마저 채우시며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의 각기 다른 지체, 각 부분의 모습인 것이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대관절 무엇을 믿는다고 말할 것이며 사람 구원해내고 사람 사랑하는 일 곧 주님께서 하시던 일 이외의 다른 어떤 일이 우리의 진정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에서 일하시던 주님께서 나를 통해 다시 모습를 나타내셔서 일하시는데 그 때 하시던 일의 연속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제자가 그 스승 같으면 족하고 더 나을 수 없고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라 하셨다. 핍박을 일삼는 세상이니 누가 믿을 것인가 하고 낙심할 필요는 없다는 뜻으로 "내 말을 들었으니 너희 말도 들을 것이라" 하신 것이다. 마음 놓고 일하고 마음 놓고 충성을 다하여 한 방울 남은 기력까지 다 짜내어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가 아닌가.

이 외에 달리 딴 방향으로 나간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람 보기에 그럴 듯하게 보여도 믿음없는 세상일인 것이다. "믿음 없다"는 심판 아래 여전히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세상에 미련을 두고 세상 불신자들처럼 세상 일에 여생을 감히 허송할 것인가. 영생을 얻자니 가당찮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가 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무슨 대가란 말인가. 죽음의 세상에 잠시 안개처럼 나타난 죽음의 삶이 아까워 그렇게도 소중하여 대가라 하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믿고 안믿고의 오직 그 문제이니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지 말 것이다. 가장 간단하게 믿느냐, 아니 믿느냐 오직 이 양자택일에 있을 뿐이다. 구름 떼처럼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을 보시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리고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낙심천만이었겠는가. 영생을 얻자는 것이 그다지도 어렵고 벅찬가 했겠지만 그러나 구원은 언제나 "믿음"으로 "은혜"로 "값없이" 얻는 선물원이다.

단지 이 "믿음", "은혜", "값없이 얻는다"라는 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억지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믿는" 자에게는 그렇게도 쉽고 간단하고 그렇게도 은혜스럽고 뛸 듯이 기쁜 것으로서 모든 이치가 불을 보듯 명백한 것이다. 구원 받음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다. 그저 "보라!"는 것이다. 보는 데에 힘들 것 전혀 없다. 보아도 성경에서 말씀하시는대로 바로 보아야지 세상에서 말하는 또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따라 색안경을 끼고 보면 바로 볼 수 없고 그렇게 보아야 백날 보아도 소용이 없다.

어린 아이처럼 보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논리는 순수 그대로다. 편견도 선입견도 일절 없다. 어린 아이의 눈에 곧장 비치는 것은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어서 이는 지체없이 순종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랑의 순종만 지켜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든 믿고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셨다.

35세 때 처음 믿은 후 60여년을 거쳐 100세 문턱에 오셨지만 "예수님 날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것 생각하면 눈물만 흐르지" 하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 젖은 감사밖에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치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 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음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골 3:1-4).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한다는 것은 주님의 일에 전념함을 뜻하고 땅의 것을 생각함은 세상에 미련을 두고 연연함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새벽이나 이른 아침 기도로 새 날을 열 때마다 암송하기에 알맞은 말씀 중 하나다. "제가 주님과 함께 다시 살리심 받았으니 위의 것을 찾습니다. 거기는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치 않습니다. 이는 제가 죽었고 저의 생명이 주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생명이신 주님께서 나타나실 그 때 저도 주님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줄 믿습니다".

자기가 읽는 모든 성경을 이같이 제일인칭으로 바꾸어 읽을 수 있는 것이 성경의 의미다. 믿을까 말까 믿어도 될까 어정쩡하게 주저주저하며 머뭇거리며 읽는 자세를 버리고 화끈하게 "믿어 버리는" 일도 양단의 자세로써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에 뛰어드는 자가 항상 물 가를 맴돌며 뛰어들 생각을 아니한다면 아마 평생 가도 못하거나 아니면 귀한 시간만 낭비함이 되니 얼마나 큰 손실인가.

이 말씀과 더불어 아래 간증을 항상 기억할 일이다. 온 세계 그리스도인이 즐겨 말할 간증이니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말해도 싫증이 나지 않을 그런 증언이다. 헛슨 테일러의 중국내지 선교회 보고에 따르면 중국에 석자직 목사가 있었는데 귀신을 쫓아내기로 유명했다. 한번은 교회 안에 귀신 들린 청년이 들어와 소란을 피우니 급히 와 달라는 전갈이 와서 갔더니 석목사를 보자 청년은 조용해졌다. 때 마침 거기 와 있던 한 선교사가 석목사에게 성금을 건네며 "믿음으로 일하고 사시는 목사님이시니 잘 쓰세요" 했다.

석목사가 그 돈을 받자 갑자기 청년이 길길이 뛰며 기고만장 해져서 소리치는 말이, "너 아까까지는 하늘처럼 높더니 이젠 내 발톱의 때만도 못하다"는 것이었다. 석목사는 평소 이런 경우 반드시 기도하여 주님께 일일이 여쭙고 무엇이든 결정하는데 그 기도를 깜빡 잊고 돈을 받은 것이다. 석목사는 사태를 즉각 파악하고 돈을 선교사에게 도로 돌려준 다음 외진 곳으로 물러가 주님 앞에 통회(痛悔, 통절히 회개)하고 자백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귀신을 쫓아냈다는 그런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성령을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실상이 영적 존재인 귀신에게 어떻게 비쳐지는지 그리고 성령께서 근심하시면 어떤 결과가 되는지를 귀신의 때아닌 증언으로 알게 된 것이 그 하나요, 성령을 모신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자세를 가르침이다. 즉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됨이 그 둘째다. 귀신들을 능히 굴복시킬 만한 이런 성령충만이 바로 이같은 기도의 삶, 즉 여호수아의 경우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뜻 곧 사사건건 모든 일에 일일이 주님을 인지(認知)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게 되는 은혜가 그 셋째다.

사람의 자식이 되는 것은 부모의 육체를 물려받음으로써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됨도 같은 이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표현으로 가르치시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부모의 육체를 받아 사람의 자식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단 육체는 육체일 뿐 영은 없다. 부모의 영을 물려받지는 앟는다. 부모의 영도 물려받는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부모 자신이지 자식은 아닌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라고 했듯이 우리의 영은 하나님 친히 만드심이다. 육체와는 별개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까지 침 범했다고 교만하게 법석을 떨지만 인간복제라는 것은 육체에 그칠 따름 영은 예외다. 다시 말해 영이 없는 육체만인 인간 그런 고기덩이만 복제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영의 형체, 형상이라 할 수 있는 까닭에 그런 것마저 하나님께서 허용하실지는 미지수다.

어쨌든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데 이 영은 말할 것도 없이 성령으로서 하나님이시다(하나님은 영이시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 친히 내 안에 오셔서 나와 영원히 함께 계시니(사시니)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만유에 충만하여 계시는 존재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만유(萬有-무릇 존재하는 것) 안에 계시고 만유를 관통해(through) 계시고 만유 위에 계신다고 했다. 고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 피조물이라 한 것이다.

이 새 피조물의 구조 자체가 다르다. 첫 사람 아담의 구조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이전의 그 구조 즉 나 혼자만의 구조였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나와 함께 존재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둘이 하나됨 즉 성령과 나라는 이중구조다. 그냥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오심으로써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오심으로 나와 하나된 사실로서의 나의 구원인데, "성령"은 아들께서 아버지와 항상 하나로 존재하시고 활동하시는 모습이시므로 그래서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함께 내 안에 오시어 함께 계시고 사심이다.

때문에 이렇게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 있는 모습을 가리켜 엄마 품속의 아기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시어 나와 함께 사신다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이 나와 하나되시는 의미로 행하심이기 때문에, 이렇게 내 안에 내 영혼처럼 계시면 그 모든 일이 바로 내가 한 일 즉 나와 함께 하나되어 하신 일이 됨으로써 이 사실이 나의 구원 즉 다시 출생함, 성령으로 출생함이 되는 것으로서 이것이 나의 구원인 것이다.

참고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고 자식들을 낳았다"는 기록이 창세기에 나오는데, 여기서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 친히 만드셨다"란 뜻이니, 성경에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하여 하나님이신 아드님은 단 한 분이심을 명기하고 있다. 고로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친히 만드신 피조물들이라는 뜻이다. 지,정,의가 있는 인격을 가진 피조물을 말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바로 사탄을 위시한 영물(靈物)들이니 거룩한 천사들도 이에 포함된다.

그런 영물들은 만물 안에 충만하신 하나님과 같은 영일 수는 없고 한정적인 육체(물론 영적인)를 아울러 지닌 그런 생물인 것이다. 말하자면 반은 영(하나님과 같은 속성의 영은 아님을 언제나 명심할 필요가 있다) 반은 육체라 할 수 있는 그들과 사람의 딸들의 육체가 결합하면, 거기서 나오는 인간들은 그런 생물들의 속성을 물려받는 영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그들은 죽으면 사람들의 영(구원을 받았든 아니 받았든)이 가는 곳[눅 16:22-26]에는 가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물없는 곳을 피해 돌아다니는" 것이니 곧 "더러운 영" 즉 귀신들이다.

그러니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된다는 것은 일면으로는 사실인 것은 그런 인간 종자도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 죽어 귀신이 되는 것은 아니니 혼동하지 말 일이다. 이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 친히 확언하신 사실이다. 거지 나사로나 부자가 귀신이 되어 떠돌아다닌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같이 근본이 다르기 때문에 악령들에게서 난 인간들은 구원 받을 수 없음은 명백하다.
 

§  회개

많은 사람이 회개없이 세례 받고 그래서 성령 받은 것으로 착각한다. 믿는 자로 자처하니 이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회개에는 철저하고 않고가 없다. 회개하면 하는 것이고 회개가 없으면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아무리 세례 받고 성령 받은 줄 알아도 자기를 속이는 행위 이상으로는 더 발전하지 못한다. 그것은 혼돈과 혼탁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된다. 그리고 이런 회개를 거쳐 성령의 선물을 받은 후에라도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경고한 바 있듯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빌 3:18] 일이 발생한다.

하나님의 새 피조물되는 일이 얼마나 간단한가. 누구든지 어떤 경우에든 환경에서든 나아올 수 있는 거저 주시는 은혜, 그리고 간단하기 짝이 없는 그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회개의 대목에서 많은 사람이 주저하고 지체한다. 얼른 마음을 내켜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비극적인 일이다. 그래서 주님 말씀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커서 그리로 들어가는 이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작고 그 길도 좁아 그리로 들어가는 이가 적다고 하셨다.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다.

그리고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이가 많다고 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런 말씀을 듣고 어렵다 하며 물러가고 다시는 주님을 따르지 않았다. 이것이 현실이다. 믿고 은혜로 구원 얻는 일이건만 아무 힘도 들일 필요가 없는 일이건만 힘들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말씀에, 아버지께서 즉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으면 가르치시지 않으면 자기에게로 오게 하여 주시지 않으면[요 6:65] 아무나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독자여, 그대도 그 부자 청년처럼 근심 중에 물러가려는가. 모든 것 다 버리고 빈털터리로 계시는 주님을 따르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아무 말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하고는 자리를 떴었다. 그대도 그렇게 하려는가. 아무나 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나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신 것이다. 어떤가, 이 말씀이 그대에게는 기막힌 말씀인가. 깊이 생각하라. 억지로 강제하지는 않는다. 주님께서도 "먼저 앉아" 생각하라 하셨다[눅 14:28].

그대도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는가" 하고 물러가려는가. 주님의 기적과 능력의 말씀을 보고 듣고 하면서도 그 때 당시도 많은 사람이 물러가고 다시는 그 제자로 처신하지 않았다. 슬픈 일이다. 세상이 무엇인데, 세상 삶이 무엇인데, 영생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중하고 귀하다는 말인가! 다 듣지 않는 것은 아니다. 들을 자가 있다. 다 듣는 것도 아니다. 듣지 않고 물러가는 자들도 있다. '많다'는 것이 바른 표현이다.

주님의 말씀처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마 16:26]. 자기가 죽음의 실상 앞에 있다는 실상을 느끼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영생을 얻고 싶어한다고 얻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단지 내가 공짜로 영생 얻는 데에 필수 조건이라는 것으로만 착각하는 이 많다.

그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라는 말씀에 반발하는 것이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실감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찬송이 되지 못하고 눈물 겹도록까지 감격스러운 감사가 되지 못하니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다음 단계에까지 이어질 수가 없다. 그러니 구원도 영생도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도 다 빈 말이 되어 버린다.

믿는 이에게야 물론 굉장한 희소식이요 껑충껑충 뛰고 또 뛸 만한 엄청난 천지개벽과 같은 대창조의 변화이지만 믿지 않는 나에게는 아무 감흥도 감동도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가장 단순하고 명료하여 누구든지 언제든지 얼마든지 믿고 받을 수 있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요 '은혜로 거저 받는 선물'이지만 아무나 영생을 욕심 낸다고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그렇게 간단하게 공짜로 얻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따라서 아무나 얻을 수 있고 누구든지 나아와 받을 수 있다고 여겨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쉽게 생각해서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함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 차별을 하시는가. 그것은 아니다.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이방 나라 각 곳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 와서 천국 잔치에 앉는 반면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

회개 없이 구원 받으려 하고 하나님의 아들되고자 하니 그것이 당치도 않는 말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값비싼 것이다. 값비싼 것인데 쉽게 수월하게 헤프게 공짜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값을 내라는 것은 아니다. 얻고 나서가 문제요, 받는 자세와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생각해보라. 값비싼 선물을 받을 만한 자에게 주시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사람에게 주시겠는가. 그와 같은 이치다.

받고 잘 간수하며 귀하게 쓸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아무리 거저 얻는 것이지만 거저 얻었다고 소홀히 다루고 경우에 따라서는 내다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사람에게 주실 리 없다. 그러면 어떤 이가 그 선물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인가. 그 선물을 주시는 기본 취지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아버지께 배운 사람이 생명이시고 영원한 구원이신 그리스도께 나아온다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는 것이니 그 선물을 잘 간직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자만이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렇게 잘 간직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하여 조화 일치되어 영원 삶을 살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자기 부인이다. 끝까지 자기 부인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화합하여 하나가 될 수가 없다. 연합이 되지 않는다. 연합이 안될 것을 무엇 때문에 받으려고 한다는 말인가.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도 역시 마찬가지의 이 자기 부인된 상태로 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부인이 그 생명이요 핵심 골자다. 이 자기 부인이 없으면 아무도 주님을 따를 수 없다고 미리 선언하신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는 이 생명의 철칙을 아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이제까지 내가 나를 위하며 살았으니 꼼짝없이 죽었구나, 어찌 할꼬! 나는 속절없이 멸망밖에 없구나" 하는 것이 이 자기 부인의 상태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자의 절절한 심정인 것이다.

자기가 자기 부인을 해서가 아니라, 자기 부인을 해야 하는데 자기 부인 없이 산 과거로 인하여 진짜 자기 부인된 상태 즉 그 자기 부인을 아니한 대가로 죽음과 멸망에 직면한 현실에 직면하여 "나는 어찌 할꼬!" 하다가, 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에 접하고 그래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 이렇게 자기가 죽은 상태에 있음을 자각하고 오는 것이고 그래서 영원토록 이 자기를 위하지 않음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자기 부인인 것이다.

자기 부인이 되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는 것이요 그렇게 자기 부인이 되어 있는 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데 자기 부인을 무시할 수 있는가. 이렇게 나 자신이 죽어 있는 상태를 아는 것일 뿐 아니라 자기 부인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니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 위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니 내가 나 스스로를 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결론이 아닌가. 이런 것이 자기 부인이다. 혼동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므로 나는 오직 하나님을 위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생명인데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지 않았으니 죽음은 필지요 멸망은 피치 못할 운명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서 "나는 어찌 할꼬!" 하는 심정이었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나를 위하신 죽음을 확인하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요 은혜로 구원 얻음이다. 인간의 애초 범죄가 이 자기 부인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던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는가. 내가 나를 위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사탄이 넣어준 생각을 따라 그런 방향으로 인간 스스로도 역시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가 자기를 위하려다가 패멸에 이른 것이 오늘날 같은 파국의 연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고 영원히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는 것이 믿음의 골자요 구원 얻는 핵심 진리요 모든 문제의 해결이다.

이같이 간단 명료한 것이다. 간단 명료한 것임에도 어렵게 보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이 바로 이 자기 부인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이유는 이 하나밖에 없다. 왜 이 간단한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르치는가. 눈 앞의 이해관계에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자세이다. 당장 눈 앞에 나타난 것이 그럴 듯하게 비쳐지는 선악과의 모습이었던 것과 같다.

과연 먹음 직하고 과연 지혜있게 함 직하고 탐스럽게 이글이글 빛나 그야말로 봄 직하고 그래서 사탄의 충동에 따른 욕심이 생겨난 것이다. 오늘의 실상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탐스럽게 봄 직하고 먹으면 절로 좋아질 것처럼 먹음 직하고 그러니 안목의 정욕이요 육신의 정욕이요 그리고 당장 눈 앞에 전개되는 이생의 자랑이다. 이것을 못 버리는 것이다. 사람이란 원칙에서 살아야 하고 자기의 주의주장에 일관되게 살아야 하고 신념대로 굽힘 없이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인데 그것을 버리고 당장 눈 앞의 호, 불호(好不好)를 따져 행동하니 무사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생명은 사랑에서 시작되고 사랑은 생명에서 나는 것이고 생명의 법칙은 사랑의 법칙이기도 하다. 생명과 사랑에서 자기 부인이 필수이다.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보아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해 너는 네 자신을, 나는 또한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랑의 약속이다. 그래야 언제나 둘이 하나가 되고 '우리'가 되고 한 몸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란 것이요 이것이 생명의 철칙이 되는 것이다.

마치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데 그것은 거꾸로 해석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확실한 확인인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은 홀로 있을 때의 생존 방식이다. 그러나 둘 이상일 때는 서로 상대를 위하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 부인이 정상적인 생존 방식이 되어 있는 것이다. 공동 생존의 방법이요 법칙인 것이다. 이것을 사랑이라 하고 생명의 법칙이라 한다. 다른 의미는 아무 것도 없다.

신념대로 사는 인간이 되어보자. 이것이 새 피조물된 기본 목적이라 해도 좋다. 당장 눈 앞의 이익에 흔들리지 않고 원리원칙으로 일관되게 사는 삶을 살아보자는 것이 하나님 아들로서의 대의명분에 사는 일상생활인 것이다. 이것이 진리 사랑이요 하나님 사랑이다. 이웃 사랑이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고로 순탄한 환경과 조건에서보다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 순종을 나타내는 것이 온전하게 되는 지름길인 것이다. 이 세상이 바로 그런 시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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