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일요일

(8)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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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와 야곱

<에서>와 같은 활동 위주의 현대생활일수록 역으로 <야곱> 같은 명상의 사람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한 계시 같은 것을 받는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가운데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열릴 때까지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는 적극적 자세가 필수입니다. 세상 종교와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은 본질적으로 다르니, "사랑"을 다 같이 표방하는 듯해도 조물주 하나님을 인식 않고는 사랑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자기 부인을 해야 사랑이 되는데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자기 부인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질서 정연한 우주만물에서 한 치 오차 없이 운행되는 자연법칙처럼 그리고 인간 세계에서 법 없이 나라 없고 질서 없이 사회가 운영되지 못하듯 사람 삶이 일정한 법칙이나 원리 없이 영위될 수 없음은 상식에 속합니다. 그 원리가 무엇이냐 할 때 이른바 황금율이라고 세상에 알려져 있는 성경의 다음 구절 즉 "남이 네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내가 배고픈 것은 나의 상대의 배 고픔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먹을 것을 주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배고플 때 나는 남에게만 주고 나에게 주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 그리고 내가 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니 가만히 앉아 죽으란 말이냐” 하겠지만, 그 이웃과 사랑의 관계에 있기 이전에 나는 주님과 하나 관계에 있습니다.

이웃 사랑은 이 하나님 사랑을 그 뿌리로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피조물은 조물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말은 조물주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삶의 원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선하시고[좋으시고] 의로우시고[올바르시고] 사랑이시라는 사실은 우리 인간이 선과 의와 사랑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만일 그렇지 않으시다면 이런 판단을 하는 인간으로 만드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 자신을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리 판단의 기준이 되시고 근본이 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양심의 가책을 받은 그 만큼 하나님께서는 양심 이상의 분이심이 증명되는 것입니다[요일 3:20]. 그러므로 내가 나를 신뢰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조물주와 피조물과의 정상 관계가 범죄로 인하여 깨어지는 것입니다.

와해되어 못쓰게 된 것을 새로이 창조하실 때에는 첫 창조 때와 같이 우리들 피조물[새 피조물]은 우내가 주님의 것이므로 당연히 먹을 것을 먹어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 일차적인 책임이 따릅니다. 물론 이 역시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 속에 주님 뜻대로 행함이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것이라 핑계 대고 자기 욕심껏 배터지게 많이 먹어 배탈이 나는 일이 있다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 생활 기준은 먹고 마시는 등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함이 아니라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여 사람 살리는 일에만 있으니 사람 살리기 위해 나 자신 고난 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는 것까지도 불사하게 됩니다. 왜냐면 이 세상 생존 목적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있지 ‘사는 것’에 있지 않는 까닭입니다. 고로 항상 성경에 명시한 대로, "먹을 것이 있으니 만족하고 입을 것이 있으니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 여분의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 즉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을 돕는 데에(믿음의 식구들을 우선해서-갈 6:10) 있습니다.

이 세상은 <살고자> 하여 존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식물의 서식처이지 인간에게는 죽음의 사지(死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살 만한 삶의 낙을 누리는 곳이 아님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일하는 데요 새 생명 해산(解産)하고 출산(出産)하는 곳이요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이렇게 인식을 바꿔버리면 제대로 적응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이 인식 전환이 곧 믿음이라 말해도 좋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한 몸의 원리에서 내 몸처럼[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이니 서로 한 몸을 이룬 관계에서 눈이 입, 입이 눈, 팔이 손에 대하여, 다리가 팔에 대하여 서로 가지는 한 몸 의식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관계입니다. 그런 의식만 마음에 자리잡고 있으면 그 "사랑하는" 방법은 절로 풀려지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요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요 14:21). 몸의 지체된 우리로서 머리의 지시를 따름은 당연합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음이요 이는 믿지 않음입니다. 그렇게 역으로 풀어집니다. 진리는 엄정하게 법 질서를 따라 존재하는 것이므로 “진리에 속한 자”[요 18:37/요일 3:19]라야 그리스도께 옵니다. 다시 말해 생명의 법질서를 지킬 의지가 있어야 생명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그냥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요 영생을 얻었다고 영생을 향유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차별되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인류가 다 자동적 기계적으로 구원부터 받도록 조처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선별적으로 구원의 대상을 고르신다는[롬 1:56:16/16:26/요 3:36/히 4:11/벧전 1:2/고전 2:9/약 2:5/1:12] 하나님의 의지가 여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라 구원을 받는 자 자신의 의지가 동시에 함께 중요시되므로 오직 믿는 자만이 구원이 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런 목적 아래 시작된 복음의 일이므로 처음은 믿었더라도 중도에 가다가 성경의 경고처럼 그 믿음을 “버리거나, 배반하거나, 믿음에서 파선하게” 되면 그 역시 선별 작업에서 탈락되는 결과가 됨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종교와 그리스도 구원의 말씀이 완전히 다른 차이 하나는, 세상 종교는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이 다 구원을 얻는다고 약속하며 주장하는 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될 수 있는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나-성경은 정직하게 말합니다-실제로 구원에 들어가는 이는 적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말하자면 구원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거저 받는 즉 은혜로 얻는 구원이므로 가장 <쉬운>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종교가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세상에서 외면당하지 않고 신봉자가 많이 생기고, 신봉자가 없다는 것은 그 종교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의당히 그런 주장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을 차단시키고자 함이 사탄의 계략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있는 사실 그대로 진실만을 전달함이어서, 사람의 비위에 영합할 필요가 없어 모든 사람이 다 구원 받기를 열망하면서도 억지로 강제 수단은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왜 어려우냐 하면, 사탄이 방해해서도 그렇다는 말도 아니고 죄가 불가항력이라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오직 이 세상과의 결별이 어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으로 통하는 구원의 길이 좁고 문은 비좁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신 것입니다. 들어가려고 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만큼 어렵다 하셨습니다[눅 13:24]. 그러면 이런 어려운 난관을 돌파하고 기어이 해내는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느냐, 믿음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담력이나 용기인가?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많은 설명을 했으므로 되풀이하지 않습니다마는, 모든 문제의 핵심이요 관건입니다. 사람끼리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진실과 "진리에 대한 사랑"[살후 2:10]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를 따라오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미리 경고하신 말씀이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눅 14:26-33].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내게 올 사람이 없다[요 6:45,65]고 미리 선을 그어 선언하신 말씀과도 같은 뜻입니다.

왔더라도 이내 떠나게 마련입니다. 아니면 심판대에 가서야 마른 하늘의 날벼락 맞듯이 심판의 선고를 받게 됩니다[마 7:21,25:45]. 이와 같이 결코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뜻에서 "어렵다" 한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간단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모든 것을 망치게 됩니다. 그래서 에서와 야곱의 예를 든 것입니다. 야곱은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에서는 이 세상 즐기고 유쾌하게 지내는 데에만 온통 관심을 쏟은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인생은 이렇게 두 가지 유형의 인물로 나누어집니다.

야곱의 유형은 에서의 유형처럼 인기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자기가 잡은 사냥감으로 아버지를 대접하여 그 환심을 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눈에 측은하게 비쳐졌을 것입니다. 영원한 가치를 위해 자진해서 야곱의 길을 걷고 에서의 호탕함을 버릴 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데에 비극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 세상은 삶의 낙을 즐기는 데가 아니고 죽음과 저주와 고난의 세상이기에 옛사람들도 고해(苦海)라 했으니 이 사실에 유념하면 야곱 유형의 인간이 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사바세계와 단절하고 심산유곡에 들어가 일심으로 수도에 정진하는 이들은 왜 그리스도의 복음에 들어오지 않고 세상 종교에 심취하느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말하기를 좁은 길과 관문을 통과하게 되는 비결은 사랑이라 한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올바름을 추구하는 심정에 따른 의지가 요구됩니다. 이 세상이 뒤죽박죽이라는 것은 인간 양심으로 가늠해보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마음 한 편에 그런 문제 제기가 가끔 일어나도 여기에 충분히 유념하지 않고 금방 털어 버리는 데에 있습니다. 왜 뒤죽박죽이고 정의가 실천되지 못하고 제대로 포상되지 않고 악만이 대체적으로 성행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제대로 된 사색(思索)이 되어지도록 마음을 다잡아가는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속세를 표표히 등지고 진리를 찾는 일념으로 입산수도하는 이들은 그러면 그런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이냐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는 것은 본인 당사자만이 알고 그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아시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물을 판별할 때 겉모양만을 두고 자를 갖댜 대나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갖가지 별별 사연이 있고 동기(動機)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위의 설명은 일반적인 현상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본인과 하나님이 하실 몫입니다. 정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바가 없어서 그런 세상 종교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 사후(死後)에 들을 수가 있도록 모든 조처는 되어 있는 것입니다[벧전 3:19]. 그러므로 그런 이들에 대한 관심보다 우리의 문제가 시급하고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위에 지적한 그런 야곱 유형이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것에는 외부적인 것과 내부적인 것이 있는데 후자는 성경이 그 진실성을 자체의 내용으로 입증하는 것을 말합니다. 외부라는 것은 무슨 과학적 증명과 같은 세상의 지식의 잣대를 들이대어 증명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연법칙에 한정된 지식으로는 영계에까지 걸쳐 있는 광범위한 성경의 언급을 제대로 검증해낼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모든 지식에 통달해 있는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인 사탄에 의해 그런 "증거"들은 하루아침에 헛것으로 돌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증거라 할 때에는 다음 사실로도 충분히 드러나고 있듯이 그런 소소한 지식이 미치지 못하는 결정적이고도 근원적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 친히 미리 경고하여 말씀하신 대로[눅 9:26] 이 세상에서 외면당하여 부끄러워할 정도로까지 되는 그런 속성을 가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세상에서 군림해 있는 모양새를 띠고 지금까지 행세해 온 이른바 "기독교"의 위세(威勢)에 있는 것입니다.

이 "부끄러워하게 된다"고 하신 말씀 자체가 바로 그런 자체 증명의 하나인 것입니다. 사람으로 난 종교라면 이런 자살(自殺), 자해(自害) 행위와 같은 발언이 있을 까닭이 천하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위축된 말을 가지고 절대로 해당 종교의 세계화를 꿈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로 이런 말씀을 하실 때에는 그 주체가 되는 그리스도와 그 복음의 말씀이 진리로서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증명하는 것이 되고도 남는 것입니다.

어떤 난관에 봉착해도 영원히 건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음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는 그렇게 부끄러워하게 되어 있는 중대한 사연이 있음을 드러내심입니다. 그 중대함이란 것은 말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 어떠한 결함이든 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 중대한 사연이란 이 세상에 있음이니 곧 이 세상의 지배자["임금"-요 12:31/14:30]가 반드시 "부끄러워하도록" 만듦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복음을 믿지 못하게 하는[눅 4:4] 사탄이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어떤 수단이든 방법이든 그는 다 동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는 사탄의 그런 시도(試圖) 또는 의지를 밝히신 것이니 그 말씀대로 사탄은 반드시 그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하신 말씀은 어떤 말씀이든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입니다[삼상 3:19].

그런데 그 외부 증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이 말씀을 비웃듯이 이 세상에서 "기독교"가 가장 강력하고 유수한 종교가 되어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입니다. 이 "기독교"가 세상에서 핍박 받은 것은 20세기에 들어 무신론의 공산주의가 팽창하면서 종교가 아편이라 하여 청소하듯이 했기 때문에 당한 것 외에는 거의 박해라고는 받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의 말이어서 아무 권위가 없는 것이든가 아니면 세상에서 지금까지 세도를 부려 온 기독교가 거짓이든가, 그 중 하나가 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 되는가 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의 사탄이 그런 가짜를 만들어 세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가짜의 손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갖가지 고난과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기독교를 가장한 그런 가짜 외에 성경대로 믿는다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는다고 표방하다가는 사람 행세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세상은 오늘날까지 흘러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그 어느 종교에서도 말하지 않는 이 세상 지배자로서의 사탄의 활동이 이와 같은 그의 활동으로 역력히 입증되어 있는 바로 이것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외부적 증명인 것입니다. 사탄의 기만 전술은 당연히 이런 틈을 또한 노림은 당연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탄이 이 세상 지배자라는 것을 그 어느 누구 못지 않게 강조하는 이단사상을 퍼뜨리는 집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 모든 종교가 이 사탄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 이단은 진실을 말함이 아닌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데에 급급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로 보아서도 사탄은 인생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부리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핵심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냥 어렴풋이 알아도 안되고 그 핵심, 요체가 되는 부분을 알아야 사탄이 쳐놓은 갖가지 함정과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계시로 인한 성경 전문가가 누구든 되어야 합니다. 황금 같은 시간을 가지고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허비하거나 노닥거릴 때가 아닙니다. 그와 같이 헤프게 뿌린 씨앗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니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 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런 성경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온 천하에 전파되어야 하므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왕성한 보급 역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외부적 증거의 두번째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그런 내용이라면 인생들 가운데 결코 환영 받지 못하고 제물에 스러져 버릴 것 같아도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시기 때문에 성경 곳곳마다에 성경이 있고 공산권 국가나 이슬람 국가 등 특별한 지역이 아니고는 서점에 성경을 비치해 두지 않는 데가 거의 없습니다. 이런 성경 배포는 반드시 진리에 바로 선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단을 믿어 성경을 임의로 해석함으로써 교회의 적대적인 위치에 있는 이들도 그들의 주장을 성경을 근거하는 것으로 표방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성경 보급은 전세계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사탄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종교화하여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모조품을 많이 만들어 퍼뜨리는 것 자체도(종교로 만드는 것은 인간으로 구원 얻지 못하게 방해함이 유일한 목적) 그런 증명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소한 이단 집단으로부터 시작하여 거대한 종교 체제로 세상에 군림한(중세기 유럽이 암흑시대로 불려질 정도로까지) 것에 이르기까지 사탄의 기만 전술은 실로 현란할 정도입니다. 무신론 외에도 사탄이 이같이 종교라는 이름의 모조품들을 많이 만들어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당시 박해 때문에 사멸되어 가던 '기독교'를 로마 황제 콘스탄틴이 살렸다고 하지마는 그것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소리입니다. 교회가 고난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움”이 되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일진대 그리스도의 교회의 흥망은 절대로 사람의 손에 의존될 리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고 또 당시까지 그렇게 훌륭히 지탱해 왔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왕성했을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창공에 십자가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 박해가 극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왕성하니까 사탄이 전략을 바꾼 것입니다. 즉 세속화시키기로 작심한 것이 바로 그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천사가 나타났다는 둥 여러 설이 있으나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고] 사건입니다. 그런 신비한 현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으로 사탄이 가장한 것입니다. 그것이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이후 신속히 전개되는 교회의 이른바 세속화는 당연히 하나님의 실패작으로 돌려질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국교로 정해봐야 신통한 꼴 못보았으니 그런 웅장한 일대 전기(轉機)가 무슨 소용이냐 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와 경륜을 폄하는 결과가 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요 불경이 되는 것이니, “하나님도 별 수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여러 모로 교회 말살 책략을 강구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애당초 그런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오히려 뜻에 위배되는 것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 역할을 이 세상에서 수행하는 것이라고 명시한 성경에 전면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국교로 정해지면 다시는 핍박을 받지 않음은 물론이요 또 세상 권력을 등에 지는 꼴이니, 그렇다면 처음 초대교회 당시부터 그렇게 국가 권력을 등에 업을 일이지 왜 이제 와서 300년이 지나서야 겨우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도 능력의 한계가 있어 인간처럼 때를 기다려야 했던가요? 그러므로 이 역시 하나님께 대한 불경스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명시하는 대로 사탄의 책략이라고 판단하면 틀림없는 것이 됩니다.

이 종교집단은 그 내용을 보아도 이같이 하나님을 폄훼하고 모독하는 대목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음녀”가 바로 이런 거대한 종교 집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음녀는 처음에 적 그리스도로 나타나는 짐승 위에 올라타 있다가 때가 되면 바로 이 짐승의 의해 멸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교회로 사칭해오다가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 본격화됨으로써 구세주[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말살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의미를 일찍부터 나타내어 예고하는 내용이기에 사탄은 이 계시록을 성경에서 제외시키고자 무던히도 애썼던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즉 성경 중에 넣을 것이냐 말 것이냐 하고 논의가 분분하던 서신들[베드로 후서, 야고보서, 히브리서 등] 중 마지막까지 결정을 짓지 못하다가 겨우 주후 500년에 성경으로 채택되었으나 일부에서는 13세기까지도 계시록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증거입니다. 물론 그런 내용 때문만 아니라 다른 이유를 들었겠지만 어쨌든 이 배후에 사탄이 개입해 있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감히 인간이 거역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종교는 결코 부자가 구원 받음에 부적격자라고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사에 돈 없이 창성하는 일이 없으므로 부자를 외면하고서 그 종교가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화 있을 것이다, 너희 부유한 자들이여,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으므로 오는 세계에서는 위로를 받을 것이 없다”는 등의 사형선고의 말씀을 하셨으니 말하자면 부자의 구원은 인간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현재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만 아니라 장차 부자가 될 사람 또는 되려고 소망하는 사람, 모두가 해당되는 말씀이므로 이를 듣고 모든 제자가 너무나 놀라, "그럼,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마 19:25] 할 정도였습니다. 부자 또는 부자가 되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경고이십니다. 이런 구원의 조건은 세상의 안목에서 보면 아주 냉엄한, 아주 비현실 적인 것으로서 이런 방법을 통해 구원 얻는다는 것은 세상사람들의 안목으로 볼 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당시 제자들만 놀란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는 이들로서 놀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주시는 하나님의 대답도 여전히 동일한 말씀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앞에서 지적한 대로 <쉬우면서 어려운>, 바로 그 <어려운> 대목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것인데 자기 생명을 그렇게 미워한다면 그 미워하는 만큼 <자기 생명만큼이나 값진 무엇>을 사랑하는 그런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그런 대상이 있느냐-“물론 있다. 있고도 남는다”-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것은 영생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열심을 재어보기 위해 성경에서 이상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실을 진실 그대로 밝히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밝음을 밝다, 어두움을 어둡다 하고 제대로 밝히시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던 대로 즉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리실 것”[요 4:25]이라 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이제 모든 실상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 밝히신 실상 중의 하나가 이 세상이 결단코 사람 사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에덴낙원과 같은 영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사는 것이 인간 삶이지 동물의 서식처에 불과한 이 자연계에서 동물과 같은 육체로 한시적 생명을 사는 것이 영원한 영혼이 있는 인간으로서는 삶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범죄한 결과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의 인간을 정확히 지적하셔서 “죽은 자”[마 8:22]라 하셨습니다.

‘죽은 자’로서 이런 실상을 모르고 이 죽음의 세계에서 부유함을 즐기며 사는 것이야말로 분명 자살 행위이지 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실상을 모르고 사는 모든 세상 사람들과 같이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놀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죽은 자라 하시고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면 그런 여전히 죽은 자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되므로 부자로 살든 어찌 살든 이 세상에서 일절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경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이 세상이 죽음이라는 실상을 알지 못하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죽은 자처럼 처신하라는 의미로["날마다 십자가를 지라",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 등의 말씀-눅 14:26-33] 제대로 알아들은 터라 대경실색하는 당연한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부인에 대한 명확한 말씀을 듣고는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아주 떠나버리기도 한 것입니다[요 6:66].

사정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대 결단이 요구됩니다. 반드시 이 동일한 기로에서 좌, 우 간에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모든 소유를 버린다는 것은 다시는 자기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행 4:32].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어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다"[딤전 6:17-19] 했습니다.

'사랑'이 모든 힘의 원동력입니다. 사랑 앞에서는 그 어떤 '어려움'도 어려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생명과 동의어이므로 무한대의 위력 곧 생명력을 발휘하기에 그렇습니다. 생명의 핵심이 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그 힘이 죽음에 비할 정도입니다(아가서 8:6). 단단한 바위 위에 떨어진 솔씨가 자라 뿌리를 내려 마침내 그 바위를 갈라놓고 그 한 복판에 우뚝 서는 소나무가 되는 것처럼 사랑에서 우러나는 힘은 아무 것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라"[요 8:32] 하신 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배워"[6:45] 모든 실상과 진리를 알고 난 다음에야 이 진실 앞에서 천하없는 세상이든 사탄이든 힘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어려운' 것이 '쉬운' 것으로 그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이 됩니다. 물론 사랑이나 진리나 진실이나 같은 뿌리의 한 가지 의미가 되는 것이니 여기서 왜 사람들이 생명의 그리스도께 오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지 이유를 알게 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7:3]입니다. 이것이 '믿는 것'이고 '구원'입니다. "안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을 하는 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킨다"[8:55] 하심과 같습니다. 여기서 '믿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알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14:15,23,24].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할 것"[8:51]이라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그를 믿는 이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3:16]는 말씀을 해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십니다. 때문에 유대인들 앞에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나를 믿으면"이라는 말씀 대신에 "나를 알고 내 말을 지키면"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믿는 것과 같이 믿는 것이 아니냐?" 하고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과 "말씀 지키는" 것을 위와 같이 나누어 풀이해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믿는" 것은 "아는" 것에 속합니다.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그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연이어져야 그것이 "아는" 것이니 즉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을 가리켜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같다 하신 것입니다[8:55].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 그 계명[하나님의 율법-고전 9:21]을 지키는 것이 영생이라 하신 것입니다[요 12:20]. 그러므로 심판은 이 하나님의 말씀, 계명, 율법[모세의 율법이 아닌]을 지켰느냐 여부로써 결정되기 때문에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48]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 친히 지키라고 주신 "명령"이심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49]. 곧 이 "명령이 영생"[:50]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전달하라고 명령하신 그대로 너희에게 전달한다"고 명백히 하셨습니다[:50]. 그러므로 영생, 구원, 생명 얻는 믿음은 통틀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니 곧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곧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이러한 결과를 낳지 못할 때 이 경우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니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이면서도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되는 원리 곧 생명과 사랑의 법칙을 따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이 원리를 따라서 우리가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몸과 머리 관계에서 몸은 머리를, 머리는 몸을 위함이니 그래서 하나인지라 이 하나됨에서는 몸도 머리도 자기를 위함이 없으므로 그래서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자기 부인이 없이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눅 9:23/14:26-33]. 이 자기 부인이 없는 것이 죄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므로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 8:34,35].

이러한 자기 부인을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것이니 여기서 우리는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36]. 왜냐면 아버지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말씀[12:50]을 우리 마음에 새겨 그 말씀대로 지키기 때문에 이는 당연 결과입니다. 이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앞의 설명대로 사랑으로 둘이 하나됨 즉 몸과 머리의 관계에서 한 몸 체제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3위1체 원리에서 작은 자가 큰 자를 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는 작은 자가 큰 자의 절대적인 위함을 받는 것을 동시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당히 있을 일이요 결단코 무리나 억지가 아닙니다. 나를 지으시고 나보다 크시고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데 내가 나 자신을 위하려고 애쓸 까닭이 없고 그런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연 순리대로 말씀하심입니다. 이것을 무리라, 억지로, 마지못해 듣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아직 믿음에 들어오지 못했음을 내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부터 점검해볼 일입니다[고후 13:5].

그러므로 모든 것의 요체는 사랑이라 했듯이 바로 이 생명과 사랑의 법질서 안에 들어와 우리의 머리이신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생명이요 구원이요 구원 얻는 믿음의 총결산입니다. 죄와 사탄, 세상은 이 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나는 절대로 화합하거나 조화될 수 없는 것이니 이런 세상을 사랑하여 여기에 묻혀 지낸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분명히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원리, 이런 이치에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원리를 떠나서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계시는 모습대로 처음부터 확립되어 있는 3위1체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성경이 시종일관으로 해설하고 있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무시하니 그리스도의 말씀이 깨달아질 리가 없습니다[요 8:43]. 제대로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어정거리다가 속절없이 영원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3위1체의 원리"라고 해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성경에 말씀해 오신 그대로의 내용을 정리하고 요약해서 말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간추리면 그리스도의 한결 간결하게 "들을 줄 알게"[:43]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마귀 사탄의 행사(行事, deeds), 욕심, 살인 행위, 그 속에 진리가 없음, 진리에 서지 못함,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할 줄만 아는 자기중심[:44] 등등이 모두 이러한 생명과 사랑의 원리에서 벗어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일치 조화가 되어야 상대방의 의사와 표현을 알아듣게 되는데 상극(相剋)의 자리에 위치해 있으니, 다시 말해 '자기중심'과 '자기 부인'으로 서로 현격한 거리를 두고 상대의 말을 들으려 하니 도무지 요령 부득이 되고 그래서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60] 하게 됩니다. 어렵다고 느끼면 알기 위해 더욱 열심을 내야 하건만 겸손하지 않고 교만이 들어 아주 진리를 떠나 버리는 망동에 이르게 됩니다[:66]. 반면에 영생 얻을 겸손한 이들은 "영생의 말씀이 계신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어디로 가겠습니까"[:68] 하고 끝까지 "찾고 구하고 두드림"[눅 11:10]으로 인하여 마침내 진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미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 속한 자라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요 8:47] 입증함이라 하셨습니다. 이는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내가 왕이니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으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는다"[18:37] 하심과 같고,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 진리를 좇는[to do the truth] 자는 빛으로 온다"[3:19-21] 하심과 같습니다.

진리에 서 있게 되면 자기 말을 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일이 없습니다[8:50,5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5:44] 하심과 같습니다. 내가 내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부인으로 일관할 수 있는 것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8:54]이시고 나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갑은 을만을 위하고 을은 갑만을 위하는 '머리와 몸'의 체제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18:38] 하고 물은 빌라도에게 주는 대답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18:2,3] 하신 그대로, 어른으로서 어린 아이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엄마 품속의 아기, 그런 엄마 품속을 항상 기억하고 있는 어린 아이에게는 얼마든지 알아들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니 그들에게는 너무나 '쉬운' 하나님의 계명이요 말씀입니다.

시쳇말로 코드가 맞기 때문입니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것은 그런 아이들에게는 낯설지 않고 너무나 마음의 귀에 익은 사랑의 말이기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patient], 사랑은 온유하며[kind], 투기하는[envy]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to parade itself/boast] 아니하며 교만하지[puffed up/arrogant/proud]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to behave rudely]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not to be provoked/angered]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to bear]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to endure]"[고전 13:4-7] 함과 같습니다.

이상 여러 조목으로 나누어 나열했으나 하나하나씩 살필 필요도 없이[필요는 없으나 참고 정도로는 할 수 있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으로서 자기중심이냐,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삶으로써 자기 부인이냐 하는 이 기로에서 자기 성찰을 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경고한 바 내 자신 믿음에 있는가 스스로를 시험하고 확증하는 일입니다[고후 13:5]. 이것은 나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는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상대가 믿음의 형제이냐, 아니냐 하고 살피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즉 교회 중에 예를 들어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것과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것과 견해가 상반될 때, 또는 어떤 것을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을 두고 차이가 있을 때[롬 14:2,5-9] 그런 의견 충돌로 교회가 나누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바울 사도는 그와 같이 기준을 정해 준 것입니다. 즉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니"[:6] 그 기준만으로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6]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를 "업신여기게" 되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3]. 그렇게 되면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음이니 (그가 여차하여 세움을 받을 필요가 있으면) 그를 세우시는 권능은 주님께 있다"[:4]는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이 기준을 확인하는 것이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7-9] 함과 같습니다.

법질서로서의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은 이 진리 안에서 사랑의 토대만 닦여지면 넉넉히 지켜집니다. 모든 문제는 사랑하지 않아서, 즉 "믿지 않는"데 있으니 사랑을 행할 토대가 닦여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사랑하게 되어 있는데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현관문을 들어서면 집 안으로 들어가듯이 믿음은 현관이요 사랑은 그 집 안입니다. 현관 문을 따고 집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현관 밖으로만 배회하며 서성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현관 밖의 그 집 외곽만을 거닐면서 그 집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고 착각하는 격입니다. 필자도 처음 성경을 읽을 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에 그야말로 초인적인 희생정신으로 초인적인 일을 해야 구원 받을 자격이 있거나 아니면 인간이 감히 따를 수 없는 이상적인 표준만 내걸고 인생이 자기 공로로 절대 구원 얻을 수 없음을 강조하는 그런 뜻으로만 오해했으나, 이제 진리를 알고 보니 믿음 유무가 그 관건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인간이 감히 따를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임을 깨달았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참으로 믿는다면 얼마든지 기쁨으로 자기 부인하고 십자가 지는 삶이 가능한데, 성경을 믿지 않아 여전히 세상 사랑으로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못버림이 문제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젊은 부자가 다른 것은 다 좋았으나 단 하나 자기의 모든 재물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라는 말씀에 영생에 대한 열망을 안고 주님께 왔던 걸음을 근심만 도리어 한 아름 안고 되돌린 사실을 다시 상기하게 됩니다.

"사람은 불가능하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씀은 부자 그대로 있어도 살길이 열린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재물을 아낌없이 다 버릴 수 있는 믿음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자기의 재물을 다시는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음이니[행 4:32],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맡아 있는 "재물에 소망을 둘"[딤전 6:17] 이유가 없고 "마음을 높일"[:17] 이유도 없으며, 따라서 그 하나님의 것 혹은 여러 형제들과 함께 나누게 되어 있는 재물로써 오직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유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는"[:18] 것입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19]이라 함과 같습니다.

그런 '믿음'을 얻고 그 믿음에 풍성하게 되는 길은, 이 세상의 실상에 대해 확실히 눈뜨는 일입니다. 이 세상의 겉모양이 아닌 그 내막을 벗겨, 생명이 아닌 송장뿐인 죽음이다, 빛이 아니라 암흑이다, 하나님의 나래 아래가 아니라 악마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요일 5:19) 등의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일입니다. 바로 이 것이 그리스도께 달려오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지, 이외에는 전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끔찍스러운 세상을 누가 사랑하겠습니까.

몰라서, 믿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그 껍질을 벗겨내고 속 내막을 깡그리 드러내 보이건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 믿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믿을 수가 없으면 혹시 그럴 수도 있을까 하고 알려고 해야 하는데 그나마도 하지 않으니 여전히 그 실상을 모를 수밖에 없고 사탄에게 속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 길, 생명 문으로 들어서는 자는 적다 하셨고 들어가려 애써도 못하는 자가 많다 하신 것입니다[눅 13:24].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여기 걸려 넘어지고 결국 구원 얻지 못한다 하셨으니, '믿어도 구원 얻지 못한다'가 아니라 믿지 못해서, 믿지 않아서 구원 얻지 못합니다. 여기서 "애씀"은 믿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영생에 들어가려고 애씀입니다. 영생은 애쓴다고 욕심 낸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법질서를 따르고, 그 순서를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는 세상에서는 통하는 뇌물도 안면도 정실도 통하지 않고 오직 원리원칙만 적용되고 통용됩니다.

세상에서 엄청난 좋은 일을 하고 심지어 “내 몸을 불살라 이웃을 살려내어도”[고전 13:3] 그것으로 절대로, 절대로 구원 얻지 못합니다. 그런 선행 여러 백 갑절을 해도 어림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 선행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엄정한 사랑의 삶의 법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이 법질서를 따라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그 참혹한 죽음을 나를 위해 죽으시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미물만도 못한 내가 무엇이라고 하나님의 이 법질서를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감히 하려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나의 <오만>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것도 모두 이 오만함 때문입니다. 가당찮은 이 오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탄도 이 교만(자기중심이 그 뿌리) 때문에 악마가 되었고 에덴낙원에서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것도 이 교만 때문이니, 인간이 무엇인데, 피조물이 무엇인데 감히 조물주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겠다는 것입니까. 교만의 악폐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도 바울이건만 이 교만에 대해서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어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대비로 "육체의 가시"[고후 12:7]를 주신 사실을 우리는 마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4] 하셨습니다. "애쓰는 것"과 "힘쓰는 것"과의 차이는 무엇이냐, 차이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같은 뜻입니다. 다만 어떤 상태에서 어떤 동기로 그렇게 하느냐 하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바로 이해하는 데에서 모든 혼동은 걷혀집니다. 우리는 믿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복종하는 것이고, 그래서 진리를 알아 자유인이 되는 것이 우리 구원임을 앞에서 살펴보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아 오히려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 매여 속박되어 있는 한 믿음에 있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믿고 성경도 믿고 나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다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랑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지 못하니 믿음도 사랑도 없이 오직 영생만 염두에 두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경이 지시하는 대로 자기 부인을 하려고 하나 여의치 못합니다. 그래서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무신론자로 자처하고 또는 세상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상황에는 표면적으로 다 들어맞습니다. "믿는 자"로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믿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가 앞에서 진단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애를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믿어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신 것입니다.

똑같이 힘쓰고 애씀이지만[눅 13:24/행 1:14/2:42,46/23:1/24:16/고전 5:9/15:58/고전 16:10/15:58/롬 14:19/12:12,13/고후 5:9/8:3/살전 4:1,11/골 1:29/4:2/빌 4:3/엡 4:3/6:18/갈 2:10/히 4:11/딛 3:8,14/딤후 2:15/4:2/유 1:3/벧후 1:5,10,15/3:14], 그렇게 힘쓰게 되어 있는 상황과 애씀의 목표가 다른 것입니다. 왜냐면 목적을 설정하여 그것을 이루려고 할 때 힘쓰고 애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애씀은 자기 구원입니다. 물론 믿기는 다 믿는다고 앞에서 지적한 대로 스스로 믿는 자로 자처하고 그래서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지만, 성경에서 강조하는 자기 부인이 여의치 못하고 따라서 세상에 대한 미련 즉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함"[요 12:25]은 여전하여 항상 여기에서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답보 상태입니다. 그러니 종국적으로 자기 구원 영생이 목표인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 세상의 속박, 자기중심의 굴레를 시원스럽게 벗어 버리고 오로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으므로 그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20:21,22/4:34] 그 순수한 목적 성취에 전적으로 매달려 힘쓰고 애쓰는 이 일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려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갑이 을을 위하고 을이 갑을 위한다는 것은 피차간 상대방의 심정과 위치가 되어 상대방의 삶을 살아 주는 의미이기에 이는 당연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본이 되는[고전 11:1] 바울이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준 것은 무엇인가[벧전 5:3], "그리스도의 마음"[고전 2:16]과 "그리스도의 심장"[빌 1:8]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의 보내심 받은 즉 성령을 받아 모시고 있는 의미이므로[요 20:2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니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언하는 바로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다"[롬 9:1-3] 하는 이 한 마디로 그것은 요약됩니다.

그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으로 인하여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20] 했으니 얼마나 애쓰고 힘씀입니까.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21]이라 했으니, 바로 이것이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한다"[:24,25]는 의미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떤 특정 목적이나 뜻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오직 차이를 두어 말하기를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한다"는 것으로만 결론 지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을 안다고 하고 구원도 받았다 하고 믿음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에 우리 자신을 조명해볼 때 얼마나 헛되이 바람 움켜쥐듯이 했는지 모든 것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성경의 사실을 피상적인 것으로만 해석하여 그 본질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의미로 헛되니 붙들고 태평으로 지내 온 허송세월입니다. 바울만이 그렇게 하게 되어 있고 사도들만이 당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사탄은 속삭이며 속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11:1]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리기 경기를 하는 자가 우승을 목적으로 그와 같이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과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9:24] 한 것입니다.

바울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고 바울에게만 그런 일을 위임하신 것이라면 자기의 그와 같은 애씀과 힘씀을 두고 말하면서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할 리가 없습니다. 만일 방금 설명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면 그러면 구원을 위해 그렇게 힘쓰고 애쓰라는 말이 될 터이니 이렇게 되면 바울은 더 이상 바울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임을 역설하던 바울이 하루 아침에 '행함으로 얻는 구원'으로 둔갑시키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본으로서의 바울, 다시 말해 앞장 서 가면서 "나를 따르라" 하는 바울은 시종일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가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빌 3:12] 하였고 그 중요성에 비추어 재차 강조하기를, "형제들이여,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13,14] 한 것입니다.

이렇게 달리지 않고 애쓰고 힘쓰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려는 자세가 아닌 것이며 그렇다면 그것은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므로 성령 받은 것도 아닌 것이며[요 20:21,22/행 1:8] 따라서 죄 용서도 없는 것이므로[행 2:38], 결과론적으로 이렇게 해야 "구원을 이룸"[빌 2:12]이 되므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고전 9:27]이라 했고,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23]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히 이룬 자들"[빌 3:15]의 자세임을 명백히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여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면 절대로 이와 같이 바울의 본을 따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눅 13:24] 하셨고, 동시에 "들어가기를 힘쓰라"[:24] 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항상 진리를 찾아 구하고 두드리는 자세로 일관해야 하는 것이니 이렇게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게 되어 있음을 약속으로 정하셨으므로[11:9],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실 것이라"[빌 3:14] 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해석만을 고집하여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알려는 마음이 없을 때에는 이런 약속이 응하지를 않습니다.
 

§ 선입견, 편견의 노예

‘그리스도의 복음’과 ‘세상 종교’와의 차이를 말하면 세상 모든 종교는 이 세상을 죽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단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보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논리상 모순이 있습니다. 논리상 모순이 있는 것은 절대로 진리가 될 수 없다고 단정하면 틀림없습니다. 영원에 대한 갈망이 있으면서도 영원하지 못하고 죽게 되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좌우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는 방책이 있다고 스스로를 속인단 말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죽고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이라면, 역시 언제 가도 마찬가지지 결단코 인간의 힘으로 이 문제를 풀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 또는 신들의 힘을 빌릴 것인가, 신들의 힘을 빌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왜 벌써 해결하고 말았지 오늘까지 인간 삶이 이 모양인가 하는 것입니다. 해결이 났으면 또한 그 결말을 누구나 보고 확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어디에 그런 증거가 있는가, 그러니 그것도 거짓말이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떠한가, 이 세상에서의 인간 삶을 죽음으로 보지 생명으로 보지 않습니다. 죽음을 죽음으로 제대로 정확히 보는 데에 복음을 믿는 첫걸음이 있습니다. 이런 제대로 보는 것이 없으면 복음을 또한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고 헛일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세상 종교는 이런 근본부터 아주 딴판으로 차이가 납니다. 세상 종교가 이 세상을 죽음으로 만일 본다면 반드시 그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종교를 만든 것이 인간들로 구원 얻지 못하도록 하려는 사탄의 계략의 일환이므로, 사탄은 그런 설명을 할 수도 또는 억지로 설명을 꾸며댈 의사도 없는 것입니다. 설명을 하다보면 창세기에 적힌 대로의 설명 외에는 달리 합리적인 설명을 지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대신할 그 어떤 속임수도 무모하다는 것을 사탄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창세기의 설명'이란 것이 다름아니라 머리로서의 하나님의 지시를 몸으로서의 피조물이 듣지 않고 따르지 아니함을 인하여 생명에서 이탈했으므로 생명 아닌 죽음의 고난 곧 인간고에 현재 모든 인생이 갇혀 있다는 데에 있는 까닭입니다.
현재는 그 결과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과 관계가 명백합니다. 삼위일체의 원리는 인과 관계를 말합니다. 삼위일체의 법칙이 이 우주 만유의 근본 원리일진대 인과 관계를 이루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원인과 결과를 말하지 않는 그 무엇이든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하고 손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현재의 결과는 과거라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니 과거를 설명하지 못하는데 미래가 있을 리 없습니다. 세상 종교는 과거 즉 원인은 말하지 않고 미래만 논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현재가 그 미래의 원인이 된다는 소리인데, 이는 3위1체 원리의 대칭[상칭] 관계에 비추어보아도 어긋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주종(主從), 대소(大小) 관계는 원인[因]과 결과[果]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현재가 인간고(人間苦)임을 세상 종교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고난과 희락, 죽음과 생명 중 어느 것이 인, 대. 주에 속하고 그 나머지가 과, 소, 종이 되느냐 할 때 당장 모순투성이가 되어버립니다. 모순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인과론을 무시됨으로써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왜 모순이고 인과 개념에서 벗어나느냐 하면, 죽음에서 생명이 나올 리 없고 일시적이고 무상(無常)인 데에서 영원하고 상주(常住)함이 파생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생명이 죽었다는 뜻이기에 그렇습니다. 고난, 고통은 죽음의 범주에 속합니다. 죽음은 영원히 살지 못하여 한 때만 살다가 종결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성이 나온다는 것은 거꾸로 흘러가는 물처럼 되어 뒤죽박죽이 되기 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과거 원인이 있었고 희락의 원인, 영원성이라는 원인이 있었으나 어떤 연유로 해서 현재와 같은 죽음, 인간고의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 정상 사유(思惟)의 논리입니다. 세상 종교는 연기론(緣起論)을 앞세우는데 이 바로 인과론인 줄이야 누가 모를까마는 이와 같이 완전히 원인도 결과도 없는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원인의 최고 원인, 제1원인, 최초 원인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는 그 어떤 인과론도 말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그 최초의 원인을 부정하는 것이 세상 종교입니다. 그들은 양면성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상(無常)만을 주장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반드시 양면성의 세계로 되어 있어 상주(常住)의 세계가 현존하고 있음을 3위1체의 원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만유의 근본 원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 3운법칙입니다]. 다시 상주의 세계 곧 생명의 세계를 이탈함으로써 현재의 이 무상의 세계에 인생들이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반 듯하게 자리잡아 있는 모습입니다.

이 세상을 죽음의 세계로, 인간을 죽음에 사로잡힌 죽은 자로 바로 보는 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가 제대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에 이른 장본이 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한데서 나온 것이므로, 원상태인 생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같은 길을 되밟아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즉 <믿지 않음으로> 이런 죽음에 들어왔으니 이제는 <믿음으로>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을 거슬러 밟아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인과 관계에서 오는 현실이요 밟아가는 과정입니다. 믿음은 눈앞에 보이는 아무 증거가 없어도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믿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으로 나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증거를 요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굳이 증거를 말하라 한다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그 증거이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 그런 믿음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논리적으로 구명(究明)할 수 없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선입견입니다.

현재는 ‘볼 수 없다’, 현재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뿐이지[히 11:1] 논리니 합리적이니 하는 것과는 전연 관계가 없습니다.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 이상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성을 갖춘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 얻는 '믿음'에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그 증언만으로 충분하다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죽음의 경고를 받고서도[첫 사람 아담이] 경고를 무시해서 이 지경으로 죽음에 이르렀으니,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가망이 없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만을 바라야 하는 처지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믿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실존을 믿는다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 자체를 믿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가 마땅히 당할 죽음을 나와 하나가 된 위치에서 나와 함께 당하심으로써 내가 생명 가운데 다시 들어오고 이제 이 생명 가운데서 나와 [그리고 우리와] 하나가 되어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셨으니 그 한 몸 구조에서 각 지체가 되어 있는 나[또는 우리]는 머리께서 받으신 고난을 함께 나눔 곧 이에 동참함이 머리와 몸이 같은 하나라는 증거가 되므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세상을 끝낸 후의 영원한 천국에서는 그런 고난 받을 장소와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셨고 우리 역시 이 세상에 남아 있어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위한 고난이 아닙니다. 천하 우주의 모든 일이 목적 없이 움직이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면 인과의 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남은 분량을 채움에 있습니다[골 1:24]. 즉 "남은"[롬 9:27/11:5] 사람들의 구원이 목적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 위함이 목적인즉[마 5:16/16:27/요 5:29/행 9:36/롬 2:7,10/9:29/11:4/12:17/고후 5:9-11/살후 2:17/3:13/골 1:10/엡 2:10/6:8/갈 6:9/히 10:24/13:16,21/딛 1:16/2:14/3:1,8/딤전 2:10/5:10,25/딤후 2:21/3:17/벧전 2:12,20/3:1,6,11,13,16,17/4:19/약 3:13/4:17/요삼 1:11/] 고난도 선한 일을 함으로써 받는 것이라야 하는데 이 세상 외에는 그런 선행을 함으로써 도리어 고난을 받게 되는 이상적인 곳이 없습니다.

우리의 선행이란 무엇인가, 사람 살리는 것 외에 더 큰 선행이 없습니다. 사람 건져 올리는 어부(漁夫)의 일 외에 더 큰 선한 일이 없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 돕고 구제해도 항상 이 영혼 구원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선행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 “내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진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 한 것이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役事)하고 죽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고 그것이 “자랑”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만가(輓歌)가 아니라 생명의 찬가(讚歌)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었으니"(딤후 2:11) 이 세상에 있다가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는 "함께 죽음에 있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이유로 세상 일에 신경 쓰는 것, 세상 쾌락에 빠지는 것, 돈을 사랑하여 돈벌이에 몰두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핍박을 만나면 믿음을 저버리는 것과 같이 ‘세상 사랑’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서의 삶을 즐기지 않으면, 이런 것에 구애당할 필요가 없고 열매 맺는 삶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열매 맺는 삶도 순수하게 자기 자유 의지에 의한 열심과 열정에 달린 것이지 주님께서 관장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관장하신다면 어떤 이는 30배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어떤 이는 60배, 어떤 이는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모두 100배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그런 차별을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때 순수하게 주님께 대한 나의 사랑 즉 나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그런 열매 맺는 일이 진행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베푸심인데 따라서 내가 30을 목표하면 그 30대로만 능력이 제한되실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됩니다. 100이 목표이어야 100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한정도 없이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내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고 이 역시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순수하게 주님의 능력 베푸시는 바탕 위에서 되어지는 일이요, 오로지 나의 사랑이 그 능력의 바탕 위에서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과거를 해결하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 세상 종교는 과거는 말하지 않고 미래만 논하는 맹목적인 것이다. 과거를 설명한다는 것이 기껏해야 윤회, 또는 전생(前生, 轉生)설인데 사탄의 조작극이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세상 종교를 신봉하고 윤회, 전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탄의 앞잡이요 그 패거리들이란 말로 오해하지 말 것입니다. 모두 몰라서 그런 결과를 빚어낸 것일 뿐입니다. 모든 면에서 모든 믿는 사람의 본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대사도 바울도 유대교란 종교에 빠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증오하고 모든 수단으로 박멸하려 한 주인 공입니다.

"몰라서 그러했다"라고 훗날 그 자신 술회한 적이 있듯이, 다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평소 이승만 전대통령을 그리 주목하지 않던 한 신문기자가 이박사의 모든 자료를 검토한 후로는 몇 백년만에 태어날까 말까 한 위인이라고 침이 마르게 극찬한 것과 같습니다. 이박사가 그런 인물인지 아닌지는 필자 역시 그런 자료를 접해보지 않은 터라 알 수는 없지마는, "과거에는 그를 알지 못하면서 평가했으나 자금은 충분한 자료를 통해 그를 제대로 평가한다"고 한 그 기자의 인식 변화가 우리 모두에게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충분한 자료가 있음에도 그런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알려고도 않고 무조건 자기 선입견에 따라 평가해 버리고 판단해 버리는 어설픈 일에 버릇 들여진 우리 모두에게 무언의 경고가 됩니다. 성경이 바로 그런 판단의 대상이 됨을 유의하라는 뜻입니다. 세상 종교에 심취해 있는 이들도 이 경고에 경청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폄훼하는 것인데,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즉 지피지기(知彼知己)가 있어야 승패를 비로소 논할 수 있게 됨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편견, 선입견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함을 다시 강조합니다.
 

§ 기도는 왜 하느냐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해서 무엇을 얻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주셨으므로 그저 누리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 이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인간의 첫 기도라 할까 하는 것이 죄인 가인의 기도였다. 그것도 가인의 죄가 원인이 되어 죽은 아벨의 피 흘림이 있은 후였다. 이미 이런 피 흘림은 인간을 위해 자연계에 속한 짐승[양 또는 어린 양이라 생각된다]의 피 흘림의 자국이 선명하고 완연한 가죽 옷을 입히심으로써 상징되었던 것이었다.

즉 아담의 죄를 원인으로 한 결과였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필요 없는 것이었다. 몸을 가릴 이유가 없는 것이니 광채가 그 몸을 가리어 옷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옷 입음", "벌거벗음"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가 아닐까. 현재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입었던 빛의 옷에 비하면 벌거벗은 것과 같고 옷을 입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창세기에 아담 부부가 범죄하기 전 벌거벗었으나 벗은 줄을 알지 못했다 한 것도 현재의 인간의 벌거벗은 상태를 기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광채를 잃어 버렸으니 아무리 우리가 현재 옷을 걸쳤다고 하나 당시에 비하면 여전히 벌거벗은 것이다. 우리가 현재 이 걸쳐진 옷만 벗으면 벌거벗은 것이기에 그렇다. 범죄 전 아담의 몸은 그런 벗고 말고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몸에서 광채가 나 온 전신을 가리고 즉 옷이 되어 있었기에 그에 비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따라서 성경은 이와 같은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한 채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은 표현법을 씀으로써 우리의 벌거벗은 실상을 나타내기에 주안점을 두고 그 차이를 지적한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야 눈이 밝아져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어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잎사귀를 뜯어 옷을 해 있었다고 한 것이다. 그 무화과 나무는 신령한 나무가 아니라 자연계에 속한 무화과 나무의 잎사귀였다. 이미 아담 부부의 몸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신령한 몸을 상실함으로 인하여 광채가 사라진 채 벌거벗은 모양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짐승의 가죽 옷 역시 자연계에 속한 동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성경에서 아담의 눈이 밝아졌으므로 비로소 벌거벗은 것을 알았다 했으므로 이는 사탄[영계에 속한 들짐승 중의 하나인 "뱀"-계 12:9/20:2/2:7]의 말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나 앞서 지적한 대로 현재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기준을 따라 성경이 설명함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고 나니 모든 것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기준하여 말하게 됨을 인하여 이제 비로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자신의 몸을 자연계에 속한 눈으로 보니까 벌거벗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그 뜻이다.

눈이 갑자기 밝아져서 "밝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영역(英譯)대로 하면 눈이 띄어졌다, 눈이 열려졌다["to be opened"]는 의미일 뿐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오관(五官) 중의 하나인 눈이 이제부터는 항구적으로 사용하게 되어졌다는 의미다. 사탄 역시 딴에는 그런 의미로 "눈이 밝아질" 것이라 했으니 그 속내로 말하면 흉측하기가 이를 데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빈정거리는 속 뜻이 있으니 즉 "너희가 아무리 지금은 신령한 몸을 입고 있어도 근본은 자연계에 속한 흙으로서의 육체이니 그냥 그 육체대로 돌아가심이 어떠하실지?" 하는 뜻으로 "눈이 밝아진다". "죽지 않는다" 한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는 사실 그대로 있고 죽지 않음이다. 아담이 그러하고도 천년 가까이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죽을 것"이라 하신 것은 당시의 신령한 몸 즉 영생하게 되어 있는 상태를 잃고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돌아감을 의미하심이었고 아담 역시 그렇게 알아들은 것이다. 죽음의 의미도 모르는데 "죽는" 것을 경고하실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실로 엉뚱한 쪽으로 방향을 돌려 같은 표현을 전혀 다른 의미로 말한 것이다. 오늘날 사탄의 이러한 능글맞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의 하는 행사가 모두 그러함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무신론이니 진화론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그런 예에 속한다.

이래서 아벨의 피 흘림이 있은 이후 죄인 가인의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부모로서의 아담 부부가 자식인 가인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고 가인 스스로가 자기의 죄로 인한 결과를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용서가 없고[히 9:22] 그리고 이 피[자기의 피가 아닌 자기의 죄로 인하여 흘려진 의인의 피] 흘림의 토대 위에 죄인의 호소를 들으시는 기도가 정착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죄인의 기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는 죄인이 직접 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 죄인의 죄로 인하여 피 흘려 아벨처럼 죽임을 당한 자가 기도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아벨이 그런 죽음을 당했으니 가인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만 아벨은 죽어 없어졌으므로 가인이 그런 호소를 했지만, 기도의 본질[특질]이 나타나기 위해 그 때 한번만은 하나님께서 그 죄인 가인의 호소를 들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기도는 죄인이 자기 자신을 위해 마땅히 부르짖어야 할 것을 아벨처럼 죄인의 죄로 인해 죽음[자기의 죄의 대가가 아니므로 억울한 죽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의 고난을 당하는 의인들의 고난을 토대로 한 그들 의인의 기도로 정착된 것이다. 이는 물론 그리스도의 제물과 제사장적인 기도를 애초부터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그 상징이었고 오신 후로는 그리스도[머리]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 각 지체들로서의 역할인 것이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제물, 제사장, 성전[하나님 계시는]의 3대 요소가 갖추어지게 됨이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고[요이 1:9], 살아 있는 제물이며[롬 12:1], 제사장들인 것이다[계 1:6/벧전 2:9]. 천국에는 물론 이런 기도도 없고 죄인도 없으며 제사장과 제물도 없음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기도는 원천적으로 죄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사람 살리는 일을 함에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인도와 지시를 구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우리의 이 세상 삶 자체가 구원 받아 산 자가 됨 즉 세상에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이러한 뜻을 행하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일을 함에 있으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차원에서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함에 있음은 당연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어 형통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그런 것은 천국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땀 흘려 일하는[사람 살리기 위한] 작업장이요 피 흘리며 싸우는[사람 구원하는 일은 한사코 저지하려는 사탄을 상대로 하는] 전장(戰場)일 뿐이다.

싸움터에서는 낭만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사를 가름하는 처절한 곳일 뿐이다. 패퇴와 승리의 교차 속에서 긴장이 연속이다. 상대적으로 물리적인 힘에서 열세인[육체로서 영인 사탄을 상대하니까] 우리는 그 대신 최후 승리를 얼마든지 기약할 수 있는 현재의 승리자로서의 기백은 든든하고 단단하다[요 16:33]. 이 한 몸 다 바쳐 보람 있는 신바람 나는 일을 하는 것이니 곧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변 사람들을 생명 가운데 인도하기 위함이니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니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멸시 받아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췰 것이다"[단 12:1-3] 함과 같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나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41-43] 하심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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