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일요일

(13)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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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를 두려워함과 성령의 위로


초대교회가 진행한 양 날개를 보면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행 9:31]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심과 동시에 "소멸하시는 불"이심을 항상 병행하여 명심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물에 양면성이 있는 것처럼 이 두 가지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위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타난 것이다. 동시에 엄정한 법질서 집행자로서의 하나님을 같은 십자가에서 확인하게 된다.

죄는 용서될 수 없고 반드시 처벌되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용서가 된다면 반드시 저렇게 처벌 받는 바탕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증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함과 <동시에> 두려워하는 일이 필수이다. 성경이 이를 명백히 하고 있다. 어느 한 쪽으로든 치우치면 안된다. 그것은 높음 없이 낮음만 강조하는 것과 같고 큰 것 없이 작은 것만 보는 것처럼 불완전하다. 한 쪽만 보기 때문에 믿음생활을 그르치는 이 많다.

전자만 강조하여 인식하다보니 믿음으로 구원 얻는 삶의 낙을 맛보지 못한다. 후자만 강조하다보니 이 세상에서 균형 잡힌 믿음 생활이 불가능하여 나약하기만 하고 그러다가 열매 없는 자가 된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영원토록 보존할 것이요 사랑하면 잃어버린다 하셨다. 이 세상에서는 '산 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너희가 죽었다”[골 3:3] 함과 같다.

주님께서 하신 대로 즉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위한 희생 제물로 죽으시려고 오신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이 우리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우리의 대표이시고 본이시다. 아담이 어떠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러한 것처럼, 이제 우리는 마지막 아담 아래에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러하신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삶을 즐기셨으면 마땅히 그러할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았으면 우리 역시 반드시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일임을 확실히 보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말씀 가르치시고 기도하시고 선한 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다가 마침내 십자가 고난에 임하신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 역시 사람 살리기 위한 일편단심으로 이 세상에서의 시간과 날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역시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모든 인간이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줄 안다면 절대로 저렇게 저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지 아니할 것이다. 못할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저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와 진상을 안다고 하면서 그들을 따른다는 언어도단이다.

주님처럼 즉 한 영혼이라도 건지기 위해 말씀 전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종교를 믿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모르고 세상 종교의 소위 "구원" 즉 영원히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음을 스스로 드러냄이다. 성경을 읽지 않으니 자연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이 만든 교리뿐이기에 그렇다. 또한 그런 교리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써 값없이 구원 얻는다는 것 역시 그들에게는 하나의 세상 종교의 교리의 일종인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구원”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을 따른 것으로 전혀 엉뚱한 의미로만 알아 이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영생이라는 약속’[요일 2:25/약 1:12/2:5]을 받을”[히 10:36] 생각은 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영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한번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한번 주신 것이므로 다시 회수해 가시는 일이 없다고 나름대로만 여겨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착각하는 것이다.

즉 구원을 피동적인 것으로만 생각함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은 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도대체 누구 마음대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인가, 그래 서 “구원을 이루라”[빌 2:12]든가, 사람마다 천국으로 “침입해 들어간다”[눅 16:16]든가 천국은 “침노하여 강탈하는”[마 11:12] 것이라든가 하는 등의 말씀에는 어리둥절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잘못 알고 있다는 증거다.

성령을 받아 모신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모든 것을 행하는 사람이기에 성령께서는 반드시 성경을 읽도록 지시하시는 까닭이다. 만일 문맹자라면 성경에 대한 가르침을 부지런히 들어야 하는 것이다. 문맹자가 아니더라도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해 성경이 널리 보급되지 못했던 때에는 그와 같이 부지런히 모여 말씀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살전 5:27/히 3:13-"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또 이 사실은 다음 결론으로도 이어진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어린 아이가 들어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지극히 간결한 것이기에 '올바르게만 말씀이 전달되면' 성경 곳곳을 세세히 살피지 않아도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어 천국에 들어가기에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을 나타냄이다.

다시 말해 초대 교회는 그렇게 가르쳤고 또 그렇게 알았으므로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초대교회가 시작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인쇄술부터 먼저 발달하게 하셔서 성경을 누구나 읽도록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전혀 딴판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소개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또 그런 사이비를 가르치는 자들이 권위자로 자칭하며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 벌어지자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성경을 접할 수 있도록 인쇄술을 통해 성경이 널리 보급되게 하신 것이다.

이렇듯이 구원의 말씀은 인간 상식을 제대로 활용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에 아무 부족함이 없다. 주님께서 항상 강조하신 "어린 아이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이면 그러하다. 왜냐면 구원 받음의 골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으로 나타난 뜻을 행하는 순종에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 성령으로 모든 일을 친히 이루시고 깨우치시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에 의한 순종이니 이 곧 '믿음의 전부'인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말씀 중요한 것 몇 마디만 들어도 인간 이성과 지성으로 [그가 무식하든 문맹이든 상관없이] 능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하는 것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그런 사이비 때문이다. 아주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사이비를 나타내기 때문에 모든 성경 지식으로 무장(武裝)해 있지 않으면 안되기에 그러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니 이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그러므로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인지 아니면 기독교라는 세상 종교에 심취해 있는 사람인지 알려면 그가 성경을 애독하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된다. 왜냐면 위의 설명처럼 지금은 성경이 어디서나 입수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항목이 되어 있음이니 이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데에 있음을 입증해 보이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니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 얻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지의 여부가 그 다음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로 성경을 읽으면 반드시 그 가르치심대로 행하기를 힘쓰는 자라야 구원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으니 이로써 우리가 그 안에 있는 줄을 안다"(요일 2:3-5) 한 그대로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일시 분명하므로 그 말씀에 어떤 뜻과 내용이 있는지 부지런히 살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소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사람의 교리를 믿는 종교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행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냥 그저 부지런히 ‘교역자’ 시키는 대로만 하고 ‘교회’ 일만 충실히 하면 되는 줄 아는 고로 성경 보는 일에는 흥미가 없다는 그 뜻이다.

§ 천하를 꾀는 자


이 세상을 지배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는 사탄의 특징을 가리켜 "천하를 속이는 자[who deceives the whole world-계 12:9]"라 했다. 그는 영물로서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힘, 능력, 지식이 있다. 그런 속임수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성경에 밝혀진 진리와 어긋나게 말하고 그에 따라 나타내는 모든 신비한 것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요즘 그런 것들이 소위 정신과학, 정신의학, 정신분석학, 심령과학 따위의 이름을 달고 부쩍 성행되고 있다. 옛날에는 미신이란 이름으로 배격했었다.

이렇게 미신이니 어쩌니 하는 것 역시 사탄의 계략이다. 왜냐면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 진리를 미신으로 치부하고자 함이 그의 감추어진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반 (反)하는 모든 것이 다 이 사탄의 속임수의 범주라는 결론에서 벗어남이 없다. 소위 최면술, 세상 종교, 신과 교접하여 소위 “악신을 달래고 쫓아내는” 등의 일들이 물론 여기에 속한다. 사탄은 그런 인간 심령에 관한 것, 정신적인 것을 식은 죽 먹기로 해낸다.

그는 영물이므로 이런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도통한 터이다. 그래서 환생, 전생에 관한 일치한 진술을 하게 한다든지[사탄이 이 세상 신인데 그것을 하나로 통일시키지 못하겠는가], 또는 죽은 후에 이른바 살아 돌아온 다음의 술회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래서 죽은 다음에 저승을 갔다 오니 그야말로 평화와 환희의 노래만 들리고 너무나 자유스러웠다는 등의 소위 증언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원천적인 공포와 불안을 불식시켜 주고 구원에 대한 갈망을 희석시켜 주는 데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더 감안해야 하는 것은 귀신의 존재다. 이 귀신들은 “네피림”이 죽은 다음의 영들이므로 사탄과 한 패를 이루어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것으로 속이는 역할에서 대단한 몫을 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실제 환생이나 전생 따위가 해당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피림에 관한 지식이 없는 일반인에게는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사탄의 이러한 계략으로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가? 그렇지는 않다.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안다 하신 대로 믿을 자 또는 믿지 않을 자를 처음부터 아심이다. 우리는 물론 알도록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 할 일만을 충실히 다하고 성경의 지침을 따라 전력을 다하는 것으로써 충분하며 나머지는 주님께서 처리하시는 것이다. 귀신은 사람의 영혼과 다르다. 귀신 들린 자들을 통해 나타내어진 귀신의 생태 일단을 보면 “무저갱[無底坑-bottomless pit]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분명코 사람이 죽어 들어가는 곳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때 나타나는 “멸망의 아들” 즉 우리가 보통 지칭하는 적 그리스도는 무저갱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고 사탄이 천년간 무저갱에 갇히게 된다고 했고 범죄 타락한 그룹이 무저갱에 들어간다고 한 사실이 구약 예언서에 기록된 것 등으로 해서 이들 모두가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귀신들은 네피림의 죽은 영이라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귀와 귀신들이 일치하여 난동을 피워 세상 사람들을 혼돈케 하여 극도의 혼란을 야기하는 판에 사람들은 어떤 기준으로 그 옳음과 거짓을 가름할 수 있는지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성경이다. 성경에 반하는 내용을 말하는 것은 그 어떤 소위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것으로 치장을 해도 무조건 사탄의 놀음놀이 즉 속임수다. 마귀는 영물이므로 인간과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다루고 속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이니 얼마든지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것들로써 인간을 아주 그럴 듯하게 또는 완벽하게 속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육체이므로 그런 영물들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수 없으므로 일방적으로 당하는 위치에 있을 뿐이지 그 어떤 것으로도 그런 거짓과 속임수를 반박하거나 그 정체를 증명해낼 수가 없다.

그러면 자연히 문제는 성경의 진실성을 어떻게 보장하느냐는 것으로 모아진다. 이 역시 동일하게 간단명료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아벨"의 기준 외에는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 삶의 기준도 성경이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이 희구하는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 삶도 보장하지 않고 도리어 고난과 죽음만을 성경이 강조한다는 그 점이다. 이 세상의 존립 목적이 멸망당할 운명의 모든 인생을 오직 살리는 데에 있고 이같이 인간을 구원하는 데에는 그리스도의 속죄 원리 즉 구원자 자신이 구원 대상자의 죽음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만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사형장에 임하는 사형수가 자기의 형구(刑具)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세를 역설하는 것이 그 골자인데 이런 데에서는 거짓말이나 속임수라는 것이 전혀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발붙일 틈조차도 없다. 마치 돌 자갈 밭에 수목이 무성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그렇다. 거짓과 속임수라는 것이 예외 없이 남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는 이기적인 심리에서 시작하고 끝 나는 것인데, 자기를 부인하는 데에서는 그런 것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는 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누구나 할 수 있기에 그러하다.

사탄은 바로 이러한 성경의 막강한 자체 증명[그 진실성에 대한]을 좌시하고만 있을 리 없다. 그리하여 자기 부인 자체를 성경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의미로 해석하도록 조종하여 통용되게 한 것이니 오늘의 개신교에서 일반화한 교리다. 그래서 이런 세상 종교를 믿는 이들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주님의 경고에 아랑곳 않고 여전히 “육신대로 살면서”[롬 8:13] 천국 가기를 꿈꾸고 있다. 이런 것이 “배도(背道-살후 2:3)"다.

성경과 어긋나는 그 어느 세상 종교 그리고 "귀신의 가르침"[딤전 4:1]도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잘 사는 소위 복을 약속하는 투로 말하지 절대로 성경에서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죽음의 형장(刑場)으로 나아가는 자세로 일상 임하라고는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 어떤 종교나 사상이라도 그런 식으로 해서는 그 누구도 그런 것을 따를 마음이 생기는 법이 없기 때문에 그런 가르침은 일찌감치 지상(地上)에서 사라지고 말 운명인 줄을 그런 것으로 가령 거짓말이나 속임수를 베푸는 자가 있다면 그 거짓말하는 자 또는 속이려는 자 자신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역시 같은 이치에서,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그와 같은 소위 ”축복 운운“하며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마귀에게서 난 것으로 단정하면 틀림이 없다. 그런 이들이 그 어떤 기적과 감언이설을 내세워도 그 정체는 절대로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뿐 아니라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국가 권력에 기대어 무엇을 어찌해 보려는 모든 시도 역시 진리에서 떠난 사이비에 불과함을 스스로 천명해 보이는 것이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장악해왔고 지금도 정치 권력화하려는 거대한 종교 집단이 그러하다. 이는 성경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것으로서 성경에 위배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있음을 증명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는 그 어떠한 구원의 진리도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은 알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서 나지만[이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을 통해서도 성경은 밝히고 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름 잡는 일은 사탄에게 넘겨진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니[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그리스도께도 해당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을 역시 짊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이므로] 여기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 이 세상은 죽음과 멸망에 처한 인간 죄인들이 오직 구원 얻는 장소이므로 멸망의 운명에 처 한 곳이라 정상적인 세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요한 계시록의 "음녀"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실이요 그리고 성경이 진실의 기록임이 입증되고 있다는 것은, 거기 기록된 바 사탄이 이 세상 지배자가 되어 세상 인간을 주름 잡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됨으로써도 그러하다고 했거니와, 로마 카톨릭과 같은 가짜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장한 세상 종교가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그런 증거 중 하나다. 사탄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면 이렇게 가짜가 판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처하는 이런 가짜가 세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증명이 되지 아니하나[세상에는 가짜가 없을 수 없으므로] 이 가짜가 오히려 진짜를 압도할 만큼 위세를 떨친다는 이 점이 바로 그런 증거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로마 카톨릭이 그런 가짜라는 증거로서 간단히 지적해낼 수 있는 것이 마리아 숭배다. 그들은 마리아를 신격화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나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런 신격화다.

마리아 외에도 그들은 소위 많은 성인들에게도 기도한다. 죽은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니 기도이고, 기도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신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는 것인데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여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시고 나와 하나 되셔서 내 안에 계시는 것 이상으로 세상에서 또는 천국에서라도 어느 누가 나와 가까울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이제는 내게 중재자, 중보자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 가되신다는 것은 이렇게 나와 하나 되심을 말하는 것인데, 마리아를 다시 나와 그리스도 사이의 중개(仲介)로 내세운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무지, 성경에 대한 철저한 무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그들의 교리대로 판단하면 가짜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섬긴다고 하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음이다.

바울이 당시 에베소 교회를 돌보다가 떠나면서,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행 20:26,27]이라 했듯이 여기 이 글에서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런 증언을 함으로써 반대파로부터 핍박을 받아 피를 흘리고 죽을지언정 밝히지 않음으로 인한 영원한 멸망의 피는 피해야 하겠기에 그런 것이다.

§ 종교는 아편


종교는 갖가지로 여럿일 수 있으나 진리는 하나다.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와 세상 종교의 차이는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이다. 무식한 사람들은 사랑과 자비를 공통으로 주장하는 것을 가리켜 모든 종교는 유사하고 차이가 없다고 하나, 그리스도의 진리는 상식적 이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반면 세상 종교가 강조하는 것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그 겉모양, 겉핥기인 것이다. 논리도 짜임새도 없는 궤변으로 일관한다.

그런데도 그런 것에 심취하고 목숨까지 거는 사람들이 상당수에 달하니 진리의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아편이다. 아편과 같은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탄의 속임수인 것이다. 사탄이 인간을 증오하여 그 구원의 길을 막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도 우리와 같은 지, 정, 의를 지닌 인격성을 구비한 피조물인즉 정신적이고 이지적인 측면에서는 그나 우리나 아무 차이가 없다.

단지 그는 영물이므로 육체에 속한 우리 인간에 비해 고도의 지식이 있고 이 지식이 능력으로 통한다는 그 사실을 차이라 하면 차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인간을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그는 능력이 있어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육체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것으로 해서 구원의 진리를 믿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하나, 이것은 유치한 방법이라 할 것이니 이지적인 인간이 그 한 때뿐인 죽음이나 고통이 무서워 영원한 구원의 진리를 배반하거나 포기한다는 것은 어설픈 결론으로서, 그런 짓을 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이지적인 존재이다.

물론 개중에는 그런 어리석은 인생들도 없지는 않으나 보다 강도 높은 즉 교묘한 수단 방법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방법이 무엇일까. 진리와 비슷한 가짜를 많이 만들어놓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그런 종교[가짜] 중 하나로 인식하게 하여 모든 종교는 한 가지 내용이라는 선전을 하게 하고 그런 인식이 뿌리 박히게 하는 그런 방법이다. 그리고 자기의 초자연적인 존재로서의 능력을 그런 종교에 적절히 가미시켜 주면 신의 능력처럼 비쳐지므로 금상첨화 격이다.

그 직접적이고도 단적인 증거가 로마 카톨릭 그리고 소위 프로테스탄트이니 즉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독교이다. “프로테스탄트[우리 말 번역으로는 개신교]”란 말은 자기네 종교 집단을 정통적인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믿는 로마 카톨릭 신도들의 관점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이들은 덩달아 그런 이름을 쓰지만, 이런 이름은 로마 카톨릭이라는 종교 집단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수용하는 자세가 된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어본 역사나 전례가 없으니, 마리아를 두고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명칭을 쓰는 이상, 이는 신성모독 죄에 해당된다. 이미 로마 카톨릭이 그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치(對峙)되는 반 진리 행위로 그 정체를 나타내면서 이에 동조하지 않고 처음 믿음을 그대로 지켜나가고자 했던 집단이 있었으니 세상이 그들을 인정하지도 인지하지도 않으므로 그 이름이 미약하여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나 대체적으로 그들이 경멸하여 부른 이른바 "왈도[Waldo]"파와 같은 그런 사람들이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로마 카톨릭의 핍박의 대상이 되어 소위 종교 개혁[종교 개혁이란 이름도 개신교니 하는 이름과 같이 앞에 설명한 바로 그런 수준이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은 그렇고 소위 개신교는 왜 또 세상의 종교 집단으로 보는가. 물론 개중에는 그리스도의 복음 순수성 그대로 지켜 그 아름다운 믿음을 계승하고 전달하는 몫을 제대로 수행한 사람들이 없잖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즉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세상 종교의 형태와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은 그들의 마리아 숭배로써 대표적으로 그 정체를 밝혔거니와 그러면 이들 개신교의 그런 대표적 종교 특성은 무엇인가. 다름아닌, 성경에서 강조하는 "자기 부인"을 부정하는 그들의 교리다.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자기를 부인함”[믿음의 당연한 열매로서]이 없이 특정 사실을 지적(知的)으로 시인하여 수용하는 정도를 소위 "믿음"이라 하고 이로써 능히 구원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을 헛것 또는 죽은 것이라 단언한 성경에 대한 전면 부정이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그 믿음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로마 카톨릭이나 대체적인 프로테스탄트나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이질적(異質的)인 내용의 그런 가짜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그 큰 세력으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 그것으로서 이는 절대로 사람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는 확고한 증명이 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신(神) 사탄의 작품이요 그 지배를 받고 있다는 증거다. 세상 종교들 자체가 사탄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단일 종교로서 예컨대 불교나 힌두교가 이렇게까지 그들의 교주나 원래의 가르침에서 크게 이탈하거나 변질된 것을 구경할 수 있던가. 결코 이런 현상이 나타난 사례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에 관해서만은 이렇게 모조품이 거대한 종교 세력으로 형성되어 진리를 전하는 교회의 힘보다 외관상으로는 더 크고 방대한 것으로 군림하고 있으니 이것만 해도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진실 그대로이며 하나님의 말씀이심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밝히는 대로 악령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이와 같이 보이므로, 성경이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허위가 아닌 진실 그대로임을 증명하여 가름해 보이는 것이라 단정하게 된다. 이런 사탄의 속임수 작전만 없다면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종교라 부르든 아니 부르든 전혀 상관이 없고 개의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경을 부정하는 세상 종교는 차치하고라도 성경을 옹호한다는 소위 그리스도의 교회로 자처하면서도 복음 진리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것을 가르치는 집단이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여 행세하고 있으니 부득불 진리와 종교를 구별해서 인식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휴거'라는 것

소위 '휴거(rapture)'라는 교리에 대해서는 우리는 관심 밖이다. 장차 올 환난을 대비하여 피한다는 것인데 악한 자가 출현하면 그를 따르지 않는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연후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 환난을 당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바울의 편지에 기록한 것을 보면 살아서 주님의 재림을 보는 것으로 알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건재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실 정도이므로 극소수를 형성하고 있을 것 또한 분명하다. 또 주님 오심에 대하여 쉽게 동심하거나 동요하지 말 것을 부탁하면서 주님의 재림은 악한 자의 출현 다음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우리말 "배도(背道)"[살후 2:3-"falling away"(KJV), "rebellion"(NIV)]라고 되어 있는 이 "departure"라는 의미를 그런 휴거를 나타내는 것으로 믿는 이들이 다른 성경 구절[사 26:20 등]과 더불어 그런 교리를 만들어냈는데 이 소위 “휴거”는 논리상 부합하지 않다.

즉 주님 오신다고 동요하지 말라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요지이다. 그러면 소위 ‘휴거’가 주님 오시기 전 또 그 전에 악한 자가 임하기 전에 일어난다면 성도들은 휴거되어 버리면 아무 걱정할 일이 없을 터인데 “동요 운운”할 필요가 무엇인가. 여기서 바울은 순서 곧 차례대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말하면서 동요하지 말라고 한 것이지 이른바 '휴거'가 있기 때문에 동요하지 말라는 것은 아닌 것이다. 자기 편견이나 선입관으로 성경을 읽는 일이 없도록 극력 조심할 일이다.

만일 그런 '휴거'가 사실이라면, 그 '휴거'가 앞서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나 또 그에 관한 동요(動搖)에 대해서나 일절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 '휴거'가 되면 그만인데 '휴거'에만 잘 대비하라는 것으로 충분하지 주님의 재림이 동요 대상이라든가 악한 자의 출현 다음에 있을 것이라는 등의 언급이 필요 없는 것이다. 소위 '휴거'라는 것을 믿든 안믿든 자유이나 오직 우리는 주님의 이름과 그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만 되어 있으면 이 이상 관심 둘 일은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받는 것은 허락하시지 않으나 그 외의 모든 고난은 주님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으로서 주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 주님의 뜻을 감히 막으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주님의 남은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몸이 이렇게 죽음의 몸으로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벌써 영광의 신령한 몸으로 변화해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람되심으로 고난 받으시던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 그대로 그냥 남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던 그 똑같은 이치이다. 우리 역시 고난 받기 위한 목적으로 이런 육신 가운데 아직 거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육신의 효용성은 고난 받음에 있다. 이런 슬픈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절대로 삶의 낙을 누림과 연계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밝힘이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에 있으니 이는 사람 살리는 구원의 역사에 필 수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의 역할은 희생 제물로서의 죽음의 고난 속에서 그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또한 온전하게 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순종을 고난을 통해 배우기 때문이다[히 5:8]. 과연 휴거가 있느냐 없느냐 따위를 두고 서로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다.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고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우리의 기다림, 바람, 희망이다. 우리의 이 썩어질 육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마당이니, 마치 신부가 그 혼인잔치가 시작되는 날을 기다림과 같은 설레는 마음인 것이다.

우리는 휴거도 아무 것도 모르고 알 필요도 없고 다만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우리의 소망으로 품고 있을 뿐이다. 단 한가지, 임박한 환난을 피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신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말 일이다. 비록 그렇게 하시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바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런 구차한 생명 유지하고 살고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과 같이 우리를 친히 보내심을 분명히 하셨기 때문이다[요 20:21].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이 세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이란 것은 사람 살리고 하나님의 새 창조의 일에 동참하는 것인즉 우리가 아는바 이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희생 양으로서의 죽으심을 기조로 하는 것이므로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고 있음이 아닌가[골 1:24].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한 자로 인한 우리의 고난 또는 죄인 인간으로서 세상이 다 함께 당하는 고난을 면하기 위함이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은 모순되는 것이 없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런 악한 자로 말미암는 모든 악에서 건지시는 것이라면 "할 수 있으면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 하리라"는 말씀을 왜 하셨겠는가. 그 말씀으로 말하면 그 택하신 자들은 그 당시 자기 믿음을 건전하게 지키고 있음을 의미하심이니, "휴거"로 말한다면 가장 1순위에 놓인 사람들이 아닌가. 계시록의 "짐승" 곧 "악한 자" 즉 적 그리스도는 바울이 예언한 대로 자칭 조물주라고 하며 잠시 행세하다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곧장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 악한 자가 임할 무렵 그리스도의 교회는 공중으로 들려 올라간다는 것이 소위 "공중 휴거(Rapture)"인데, 이런 불필요한 교리는 중요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칫 잘못하면 불필요한 혼돈에 빠질 수 있으니 경계를 요한다. 공중에 올려 가고 않고가 우리에게 무슨 덕이 있다던가. 전무후무한 고난에서 벗어난다고 그것이 대수인가. 벗어나지 않더라도 세상 중에 거하면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복음을 전함으로써 단 몇 사람이라도 건지도록 하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므로 눈동자 같이 지켜 모든 고난에서 건지심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동참함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도 명백하다. 고로 어느 것을 취할지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우리는 오직 앞에서 강조한 대로 그 어떤 환경에서든 목숨을 바쳐놓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단 몇 사람이라도 건져내는 일에 전념하고 기타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도리다.

우리의 안위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우리의 소관사는 아니다. 만의 일이라도 그렇게 '공중 휴거'에만 안주하고 있다가 갑자기 어떤 종류든 환난 속으로 곤두박질해 들어갈 때 그 때는 얼마나 당황하겠는가. 어쩌면 사람에 따라 그 믿음까지 흔들릴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 데에 신경을 씀으로써 그런 부작용을 야기할 것인가. 불필요한 일이다. 설혹 '공중 휴거'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런 것을 믿은 사람만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고 안믿었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주님께서 떨어뜨려두실 리도 없지 않은가.

믿으나 안믿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공중으로 다 들려 올라가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그런 것에 집착할 일이 아니다. 오직 우리 할 일에 전념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우리가 할 일은 고난 받음으로써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다. 주님께서 오시는 "주님의 날"은 적 그리스도를 멸하시려고 오시는 때와 마지막 심판 때에 임하시는 날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환난 이후냐 이전이냐를 놓고 논쟁할 필요는 없다.

환난 이전이라 하면 소위 "휴거론"이 되겠고 환난 그 이후라면 적 그리스도를 멸하고 천년 왕국을 세우는 데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오신다는 것은 이미 주님 부활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였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다.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갖은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주님의 재림 때에도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 당한 이들에 한정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심판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부활이란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죽음과 같은 고난을 거친 그 결과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심판 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로 나누어 지는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휴거든 무엇이든 주님의 날이 밤의 도둑 같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오신다는 사실만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모든 논란의 끝이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고 그런 모든 환난에 기쁨으로 자진 참여하는 것으로 결론 지으면 휴거를 주장하든 않든 그 것을 믿든 안믿든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믿어도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고 안믿는다고 이상하게 볼 필요도 없다.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에서만 믿음의 일치를 보면 그만인 것이다. 혹 휴거를 주장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기 때문에 즉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린다고[요 12:25] 주님 친히 경고하신 것을 무시하는 경우이기에 그렇지 않은지 스스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휴거 이전에라도 주님 불러 가신다면 그 영혼의 상태가 어찌 될는지 심히 우려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슨 엄한 것을 따라 말하는 줄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사실대로 성경은 말하고 있고 우리는 이 성경을 따라 말함이지 성경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자기 부인하고 사형수가 사형장에 나아가는[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우 스스로 자진해서 나아가는 발걸음인 것이니 이것이 중요하다] 것처럼 하라고 한다 해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 도무지 “살고자 하지 말라”고 한다 해서 결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 일이다.

사탄과 악령들이 철통 같이 이 세상 인간을 에워싸고 지배하고 있는 실상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슨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스스로 살고자 한다는 것인가.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땀 흘려 수고하며 일하라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이다[요 20:21,22]. 성경을 크게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주님께 속한 자가 되어 사탄의 증오의 대상 제1호이다[요 15:19]. 그런데도 무슨 재주로 이 세상에서 내로라고 살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재주’가 아니라 성경에 대한 불신 곧 아예 구원 얻는 믿음이 없는 ‘믿지 않음’이다. 권세와 영화 없이 무슨 맛으로 이 세상 살겠다는 것인가. 그 권세와 영화는 사탄의 장중에 있으므로 무릇 누구든지 이 세상 살고자 하는 자는 사탄 앞에 절하는 것임을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데도[눅 4:7] 이를 믿지 않으니 구원의 말씀인들 믿겠는가. 성경을 믿지 않는데 무슨 구원이 있다던가. 사탄 앞에 절하면 사탄과 한 통속이 된다는 것이요 그것이 멸망인 줄 누가 모르랴.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부터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신령한 몸으로 모든 권세와 영광 가운데 나타나 삶을 즐겨야 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구차한 몸 자연계에 속한 연약한 육체로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삶을 누리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그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됨을 욕되게 하면서 감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사하여 천국 갈 생각을 품는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이런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여전히 남아 있게 하시는 것 자체가 오로지 일하라고, 살고자 함이 아니라 일하라고 보내셨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 모든 영광 버리시고 우리와 같은 육체가 되신 바로 그 의미를 우리는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무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명확히 선을 그으셨다[요 6:65].

다시 말해 이 세상을 죽음으로 보지 않는 한 절대로 그리스도께 올 수가 없다는 뜻으로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 배우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이다[6:45]. 하나님께서 이끄심이다. 그냥 이 세상에 살면서도 덤으로 영생까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절대로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올 수 없다는 의미다. ‘죽음’에서 시작하는 ‘생명’이요 ‘죽은 자’가 받는 은혜로서의 ‘산 자’ 됨이다. 순서를 혼동하지 말 것이다.

스스로, 죽은 자임을 확인하라. 당장 죽게 되어 있는 것을 자각한 사람만이 모세가 세운 놋 뱀[민 21:9]을 보고 구원 받은 것이다. 그와 같이 스스로의 죽음을 자각하고 이 세상의 죽음의 실상을 철저히 인식하는 사람만이 공중에 매달리신[요 8:28/12:32,34/19:18] 그리스도를 모세가 공중에 매단 놋 뱀처럼 비로소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3:14]. 그런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는 말씀이 해당되는 것이다.

왜냐면 이 말씀을 그 말씀에 뒤이어 하셨기 때문이다. 자기가 죽은 자이고 그런 죽은 자가 모인 이 세상이 당연히 죽음의 세계인 줄을 알아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있으면서 그 죽음의 세계에서 살고자 한다면 그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거듭 되풀이 말이지만 ‘믿지 않음’이다. 성경도 그리스도도 아무 것도 숫제 믿지 않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아무리 믿어도,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아무리 믿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무리 나를 위한 죽으심이라 믿어도, 정작 이런 안목으로 그리스도를 보지 않는 한 그 ‘믿음’이 ‘구원’으로 작용해주지를 않는다.

여기서 비로소 회개가 우러나는 것이다. 회개해야 세례 받음이 죄 용서가 되고 죄 용서된 바탕 위에서만 성령의 선물을 받음 즉 그리스도를 영접함이 되는 것이다[행 2:38]. 그래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즉 순종함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구원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만”[행 5:32/히 5:8] 주시고 베푸시는 선물이다. 내가 처음 믿을 때에는 아직 순종도 하기 전인데 어찌 그런 표현이 가능하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은, 순종하겠다는 우리의 약속을 액면 그대로 수용해주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말씀하셨다[요 16:8], 바울은 로마 총독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할 때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하여 강론했다고 하였다[행 24:25]. 그래서 벨릭스가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믿지는 않았다. 동시에 돈을 바란 때문이다[:26]. 동시에 ‘무엇’을 바라는 한 구원은 없다. 왜냐면 절박한 죽음의 상태에 있는 안목으로 그리스도 를 쳐다볼 기회를 조성하지 못하는 탓이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천국에 발을 들여놓는 문지방에서 걸려 넘어져 들어가지 못하는 꼴 이다. 그 한 발짝이 생과 사를 가름해 놓는 것이다. 물을 찾는 자는 당장 죽음에 직면해 있으므로 물 외에 다른 것을 찾을 겨를도 여유도 없다. 오직 물이다. 그래서 목말라 사경(死境)에 있는 자가 그리스도께 온다 하신 것이다. 병든 자가 다른 무엇을 바라지 않는다. 오직 병 낫기만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병든 자가 의사를 찾는다고 하셨다. 고된 노동에 압박을 당하고 있는 이는 오직 쉬는 것 외에는 다른 것 생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가 그리스도께 온다고 하셨다.

모두 죽음에 처한 절박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는 비결이다. 이 외에는 그 어떤 수로도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못한다. 자기를 속이지 말 것이다. 당신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돈[재물]도 사랑하고 영생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고 하는 이런 일은 존재할 수조차도 없다.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 한꺼번에 둘 다 갖지 못한다. 그래서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하나 못하는 자가 "많다"고 경고하셨다. 그래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신 것이다[눅 13:24].

이렇게 죽음을 맛본 사람이 죽음의 세상을 사랑할 리 없고 이 죽음의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않는 법이다. 이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맛을 잃은 사람이 된다. 거들떠볼 흥미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기도 함께 죽은 마당에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 마음이 싹 가시고 없으니, 오직 사랑하는 주님 위해 헌신하는 마음만이 앞설 뿐이다. 하나님께서 단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만을 주시는 의도이시라면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성령께서 세상을 책망하실 리가 없다.

이 말씀은 명백히 죄와 의를 따져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밝히심이다. 바울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함과 같다. 때문에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은 의와 절제와 심판을 주제로 전도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담의 자유 선택에 의해 의를 선호하지 않음으로써 죄가 왔고[롬 5:12] 인간에게는 죽음 그리고 영물에게는 멸망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새 창조에서도 같은 기준이 적용됨은 물론이니 하나님의 창조는 같은 것이고 일관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선례(先例)와 전례가 확립되어 있기에 이는 당연하다. 믿어야 구원되는 것도 처음부터 순종 여부를 묻기 때문이다. 순종하지 않아 죄가 왔고 죽음이 왔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결과가 왔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런 명백한 의미를 희석시키고 순종 여부와는 관계없이 단지 특정 사실[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다는 것 등]을 시인하는 것이 “믿음”이라 설정하고 그래서 무조건 구원이 된다는 교리 또는 종교를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만들어 퍼뜨린 것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사이비에 현혹되어 있으니 이는 성경을 떠나 “사람의 가르침”[마 15:9]에 더 비중을 둔 자업자득이다. 성경을 무리로 해석하여[벧후 3:16] 사실을 왜곡한 결과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분명히 알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간이 범죄로 말미암아 죽었기 때문에 그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지, 처음부터 죽게 되어 있는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평범한 사실로서 모두가 익히 아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후자 쪽으로 기울고 있어 자멸에 이르고 있는 실정에서 이를 재삼 재사 역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애초 아담에게 의를 요구하시고 선을 행하기를 기대하신 것이나 의와 선을 버리고 죄와 악을 스스로 택한 결과가 죽음이므로 이 죽음을 벗어나는 조건으로 의와 선을 행함 곧 순종이 전제되어야 함이 당연하다. 이는 의와 선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행하겠다는 약속으로 그 의지 표명이 요구되는 것으로서 이것이 회개다. 때문에 “믿으라, 천국이 가까웠다”가 아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셨고 세례 요한도 그렇게 외친 것이다.

여기서 ‘의[올바른 것]’와 ‘선[좋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순종’을 가리킴이니 이 순종을 아니함으로써[롬 5:19] 죄와 사망의 열매를 거둔 아담이 아닌가[:12]. 혹자는 앞에서 말한 대로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시인하는 것을 믿음이라 하여 그런 것을 의라 여기고 있을지 모르나 그렇다면 죄는 왜 함께 언급되고 있는가. 믿지 않는 것을 죄 짓는 것이라고 말하려는가?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도 그런 말은 통하지 않는다.

믿는 것은 믿는 것이요 의를 행하는 것은 의를 행함이요 죄 짓는 것은 죄 짓는 것이다. 인간을 어찌하든지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장기(長技)는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하는 것이 그 하나다. 믿음이 순종을 의미함이요 순종이 바로 선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바울은 믿음이라는 말은 생략하고 “참고 선을 행하는”[롬 2:7] 자에게 영생으로 보답하신다고 한 것이다. 선을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헛것이라 또는 죽은 것이라 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개별적으로 첫 사람 아담의 위치에 있음과 같다.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처럼 우리 각 사람은 그 죽음에 처해 있어 죽은 자인 것이다. 그 죽은 자들의 세계가 이 세상이니 당연히 이 세상은 죽음이지 삶의 처소일 수가 없다. 바로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달아야 그리스도를 제대로 영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 첫 사람 아담으로 야기된 죽음의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 막 아담”[고전 15:45]이시다. 그러면 이와 같이 죽음의 세상에서 죽은 자가 되어 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다고 해서 이 죽음의 세상에서 살고자 한다는 말인가. 언어도단이다. 더군다나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된 신분으로 그 앞에 절하면서까지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고자 하는가[요 12:25].

이는 하나님의 아들됨을 모욕하는 것이니 이렇게 모욕하는 자가 어찌 그런 신성한[하나님의 아들되는] 구원을 감히 생각하고 받으려는 엄두를 내는가. 신령한 몸으로 살아야 제대로 사는 삶의 낙이다. 신령한 몸으로 살 날을 한도 없이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당분간 일시적으로 고난 받는 것을 못참아 세상과 타협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주님은 이 세상에서 위로를 미리 앞당겨 받는 자는 영원히 다시는 위로가 없다 하신 것이다[눅 6:24,25/16:25]. 곧 멸망을 가리키심이다.

혼동하지 말 것은 성경 어디에도 구원을 단정적으로 “영구히 받았다”고 말한 데가 없다는 사실이다.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구원을 이루라”는 말만 있을 뿐이니 왜냐면 영생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고 언제나 현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의 속성과 같은 것이다. 사랑은 영원한 현재, 오늘이다. 과거의 것도 미래의 것도 아니다. 현재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 과거도 미래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

구원의 믿음은 정확히 정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사랑의 반응이다. 사랑에는 말만 무성하고 입만 살아 움직이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언행일치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마음과 마음의 교류이므로 그 마음은 반드시 행동화하여 나타나게 마련이다. 모든 행동은 마음의 산물(産 物)이요 표출이다. 그래서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는 것이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눅 6:45] 하셨다.

그리고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 나무는 각각 그 열 매로 아는 것이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43] 하셨다. 뒤이어 “너희는 나를 불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44] 하고 책망하셨다. 이런 책망이라도 들을 때가 복 있는 때다. 이런 말씀도 없이 곧바로 행동으로 나타내실 심판 때까지 미련스럽게 끌고 가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의인의 특징은 고난이 많다는 데에 있다(시 34:19).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다. 의인이 이 세상에서 고난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이미 인간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의 핍박은 교회가 시작되면서부터다. 그리스도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이 다 그렇고 인간만이 그렇다는 것도 아니니 모든 피조물이 다 고난 중에 있다고 한 것이다(롬 8:22).

의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은 그 피조물을 만드심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사랑이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은 조물주께서 그 피조물과 함께 하시는 데에서 기인한다. 인간이 어리석게도 범죄하여 죽음의 고난에 빠져 헤어날 길이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이 '함께 하심'은 인간의 이 죽음의 고난과 함께 함에까지 미쳐진 것이다. 바로 이 뜻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모든 의인’에게 전달됨은 당연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의인은 이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것이니 이는 물론 의로운 행위에 대하여 이 세상에서 받는 대가(代價)이다. 그러나 이 보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뿌리 둔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한없고 영원한 위로가 넘치도록 부어진 채 그 의인을 기다리고 있음은 더 말할 여지가 없다.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이라야 들어갈 것이다" 하신 그 "뜻"이 바로 이 뜻을 가리키심이라는 것은 성경을 읽는 자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일이다.

§ 1800년 전의 "유다 복음서"라는 것


듣건대 파피루스로 된 1800년 전의 기록이 나왔는데 사람들이 "유다 복음서"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등의 황당 한 내용이라는데, "고대 기록"이면 무조건 신뢰할 수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 두고 하는 말인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사탄의 사주로 그런 소설 같은 글을 써 놓고 미래에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 상상하면서 그 재미로 보관해둔 것이 마침내 세상에 나타난 것일 뿐이다. 마귀는 사람을 조종하여 얼마든지 그런 짓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런 기록을 터무니없는 악의에 가득한 것이라고 하여 없애실 리도 없다. 오히려 그보다 더한 것이 바울이 말한 "악한 자"의 출현이다. 이것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려고"[살후 2:3-12] 그런 거짓과 속임수를 “역사하시게 한다"고 성경이 명백히 밝히고 있지 않는가. 하물며 이런 따위의 일이겠는가. 앞으로 이보다 더 얄궂은 무엇이 나타나게 될지도 모른다. 나타나면 나타나지, 그것이 대수인가.

이미 진리는 성경을 통해 나타났으므로 확고부동하다. 믿지 않으면 그것은 바울의 말과 같이 사탄이 그 눈을 가리운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뿐이다. 사탄이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한 대로 악한 자가 임하여 신[창조주]으로 자처하며 마지막으로 인간을 최대 규모로 속이고자 함이다. 그 일환이다. 소위 양성평등을 사주하여 퍼뜨리는 것도 오직 성경의 권위를 말살코자 함에 있다.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 하여, 우주 어느 곳[별]을 그런 외계라, 외계 문명이라 속이고 거기서 나온 신이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식으로 들고 나올 수도 있고 이 신은 결국 인간 같은 것이 오랜 진화를 거쳐 그런 신으로 발전해왔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자연계이지만 그 곳[외계]은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친 것이기에 그러하다는 궤변으로 강변할 것 같다. 인간 생애의 법칙 곧 3운법칙[trini homo]도 그런 식으로 억지 설명을 가할 수도 있다.

즉 그런 외계 문명의 신이 그런 법칙에 의해 인간을 조종하고 있다는 등의 거짓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 거짓말이란 원래 한계가 없는 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진화에 진화를 천만번 되풀이해도 자연계는 자연계다. 즉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그것이 무슨 소위 '투명인간'이 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다. 오관에 의해 인식되는 그런 물체로 변화하면 하였지 그 이상으로 그렇게 색다르게 변화하지는 않는 법이다. 이것이 과학이다.

그리고 자연법칙에 따라 일정 수명을 다한 다음에는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법칙이다. 아무리 인간이 장수해도 성경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천년 정도가 한계다. 그 후로는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과학이다. 자연법칙은 자연법칙이고 신령한 세계를 관장하는 반(反) 자연계의 법칙은 완전히 별도다. 이 둘은 대칭성을 이루어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되어 있는 것이지 진화해서 되었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황당한 비과학적 미신이다.

이런 미신으로써 사탄은 인간을 한껏 얕잡아보고 속이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먼 곳이고 인간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 하더라도 비록 우주 끝 간 데까지 간다 하더라도 자연계는 자연계이지 자연계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거기가 영계는 아닌 것이다. 가시적인 것은 무조건 자연계이다. 가시적인 것이라 함은 가시적인 것으로 항구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상태를 말함이다. 영계에 속한 것은 가시적이기도 하고[우리 육체의 오관에서 비추어 볼 때] 불가시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계는 자연계와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자연계는 불가시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변환시키지 못한다. 영물들은 스스로를 가시적인 것으로 또 동시에 불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연계의 상위 세계에 속하는 존재들이므로 얼마든지 가시적인 이 자연계의 물체 또는 생물체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조화를 부린다. 자연계에 한정되어 있는 인간의 눈에는 명백히 기적으로 나타날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그들의 영역에 속하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으로써 어리숭한 인간들을 속이는 것이다. 자연계의 존재로서는 영계의 존재로 변환될 수 없다.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못박고 있다[고전 15:50]. 그렇게 썩지 않는 존재로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과 이 우주의 대칭성 원리를 잊지 않는다면, 전술한 바와 같은 것으로 아무리 사탄이 속임수를 베풀어도, 그것이 한낱 속임수이지 과학도 아니고 오직 황당무계인 것을 누구나 짐작하기에 충분 하리라 믿는 바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소위 근거를 내세워 창조신임을 주장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아름다우신 조물주 하나님 안에서의 삶의 구도를 살펴보았으므로 더 이상의 그 어떠한 것도 필요치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완벽한 인생 삶의 구도 이상으로 그 어떤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사 랑의 원리에서 조물주께서 반드시 계셔야 하고 그리고 우리가 조물주를 충분히 사랑하게 된 마당에서 아무 아쉬움이 없는 까닭이다. 몸과 머리로서의 체제 이상으로 이상적인 삶의 구도는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이와 똑같은 아름다운 조화의 삶의 구도를 새삼스럽게 똑같은 것으로 모방하여 선전하더라도 처음부터 있는 것이 진실이지 그 나중에 와서 똑같은 내용으로 요란스럽게 떠드는 것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 먼저 있는 것이 있는데 나중에 와서 아무리 같은 내용을 떠들어보아야 그것은 누가 보아도 가짜인 것이다. 왜냐면 이미 있는데 다시 같은 내용을 가지고 요란하게 "내가 진실이라" 하니 그렇게 하는 그 자체가 이미 자기의 거짓임을 증명함이다.

그리고 성경으로 나타난 이 이상의 아름다운 삶의 합리적인 구도는 없음을 재차 강조한다.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조물주께서는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는 조물주를 위하는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사랑의 원리 이상 가는 삶의 도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뿐이다. 앞으로 어떤 속임수의 형태로 온 세계를 미혹할지 모르지만, 항상 가짜는 요란스럽게 나타나는 법이다. 그래서 기적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그리스도는 이에 비해 기적 행하심이 적다는 식의 차별화를 둘 공산이 크다. 그러나 똑같은 것일 경우 둘 중 항상 먼저 있는 것이 진리고 나중 오는 것이 속임수다.

§  사후(死後) 세계가 있다는 증거 아닌 "증거"


빈사 상태에 있다가 또는 초주검되어 죽음과 삶 사이를 들락날락 하다가 깨어나 사후의 세계를 다녀왔다고 하는 이들이 많다. 요즘은 웬만하면 무슨 소식이든 잘 알려지는 세상이라 그런지는 모르나 불교에서는 극락을 갔다 왔다, 기독교는 천국을 갔다 왔다, 불신자는 아주 아름다운 곳을 가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다, 종교 없이 죽은 사람들도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 있더라, 이런 종류의 말들을 퍼뜨리는 것이다.

이 모두 소위 전생이니, 윤회니 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사탄의 속임수다. 세상의 구조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세상은 다만 듣는 대로 보는 대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므로 사탄이 조종하는 대로 따라간다고 하는 것이다. 사탄이 인간을 속이고 있는데,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이 속임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천국을 갔다 왔다고 하고 불교 신자는 극락을 갔다 왔다 하고 천주교 신자는 마리아를 보았다, 불교 신자는 부처를 만났다, 무종교인은 죽은 친지들을 만나고 왔다, 그리고 사후 세계는 이생과는 비교도 안되리만치 너무 좋았다 하는 식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세상 종교란 것, 또는 종교를 믿든 안믿는 모두 개개인의 마음 탓이라는 결론이 도출되게 마련이고 사탄은 바로 이런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사탄의 의도는 분명하다. 세상 종교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 종교들을 끄나풀로 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중의 하나로 오인 또는 착각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쇠귀에 경 읽기”가 되게 하려는 획책이다.

사탄의 속셈은 이렇게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이 이런 천국 갔다 왔다는 말을 테이프에 담고 책으로 내고 하는 등 그것을 무슨 전도의 수단처럼 여기는 철부지 짓을 하고 있다. 하기야 설교자나 목회자 자신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데 그들에게 세상 사람들처럼 되지 말라는 요구는 처음부터 무리다. 소위 능력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요즈음 불교 승려들이 소위 신통력을 받았다 하여 행하는 각종 기적적인 현상과 동일한 차원의 사탄의 역사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사탄의 짓거리 둘 중 하나이지 그 중간이 있을 수 없다. 기독교에서 소위 신유의 능력을 행하는 이들의 그런 능력을 불교 승려들도 요즈음 행한다. 천국 갔다 왔다는 소위 간증도 불교 신자들이 갔다 왔다면서 그들은 그들의 부처를 만나고 극락에 갔다 왔다고 말한다. 한 술 더 떠 종교가 없는 사람도 죽은 다음의 세상은 이승보다 더 좋다고 떠든다. 그런 것이 하나님의 역사인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니까 사탄의 짓거리라 하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 계통의 사람들이 보이는 그런 것을 하나님의 역사라 하자. 그렇다면 분명 사탄으로 말미암은 세상 종교의 그런 우상들도 그런 똑같은 일을 하니 그러면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과 이들 우상들이 서로 경쟁 관계에 있다는 말인가. 피조물이 감히 조물주와 경쟁한단 말인가. 사탄은 그런 소리가 아주 듣기 좋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로서는 그런 것은 조물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런 일을 하시겠는가. 물론 하나님께서 전연 능력을 행하시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는 일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런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듣게 하고 그렇게 해서 이렇게 퍼뜨리게 하는 것은 사탄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희석시키고자 함이다. 사탄은 얼마든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전생이나 환생을 믿도록 그렇게 사실과 부합되게 빈틈없이 꾸며놓는 일쯤이야 사탄으로서는 식은 죽 먹기로 해치울 수 있다. "실제와 하나도 틀림이 없더라, 그러므로 진실이 아니라면 그럴 수 있느냐" 등으로 그런 속임수를 믿게 하려는 것이다.

§  
종교는 하나이다

요즈음 불교와 기독교가 화합하는 등의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하여 모두 바람직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그들은 처음부터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니까 나누어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다. 그리고 생명의 행복이란 것은 조물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상식이다. 조물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집단과 그런 것을 깡그리 무시하는 집단이 화합한다는 이런 상식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주장은 어떻게 볼까.

이는 조물주를 믿는다고 해도 인간 상상 속의 존재로만 믿고 있었다는 증거다. 애당초 그런 신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이야 그렇게 어울리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는 당연하다. 그러나 조물주 신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그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는 상반된 사상과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종교는 하나이다. 비진리라는 한 뿌리에서 나왔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진리는 절대적으로 한 모양을 나타내지 여러 다른 더구나 상반된 모습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 같이 인간 사랑을 주장하니 한 뿌리가 아니냐 하지만 이 인간 사랑은 조물주 사랑이 그 뿌리다. 다시 말해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해서 그 위에다 비로소 세울 수 있는 것이 인간 사랑이다. 인간 상호간의 사랑을 말하면서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고 조물주의 사랑을 말하지 않는 것은 마치 주춧돌 빠진 집과 같은 것이다. 그 집은 세워질 수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오직 상상 속의 집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조물주를 부인하는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는 그런 "조물주 시인하는" 사람들은 이제까지 그들 자신 역시 조물주 하나님을 믿지 않고 막연히 사랑만을 마치 조물주인 것처럼 인식하고 살았다는 증거다. 사랑이 좋은 줄 알면서도 서로 사랑하지 않고 인류가 살아왔다는 것은 앞으로도 영구적으로 사랑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종교의 무용성과 허위가 드러난다.

이제까지 사랑을 부르짖어왔지만 이제까지 제대로 사랑을 위주로 살아왔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자기 교리에 반대한다고 무차별로 학살하는 거기에 사랑이 있을 수 없음은 어린 아이라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왜 그러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인간 사랑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 칸트는 스스로 조물주 신을 믿는다고는 하지 않으면서도 도덕적으로 인간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신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소위 "필요에 의한 신의 존재"를 말하는 궁색한 말을 했었다.

인간 양식(良識)으로는 조물주의 존재를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도 만유의 근본으로서 창조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 그의 이성적인 두뇌 작용의 자연적인 발로(發露)였고 그 이성적 판단의 결론이었다. 사랑은 부모 사랑이 최고요 이는 조물주로부터 사랑이 생겨난 것이라는 가장 평범한 상식에 속한다. 그리고 남녀 사랑의 소위 한 몸되는 사랑도 같은 이치다. 남자에게서 애초 여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닭이 먼저이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도 닭이 생겨나고 그 다음 거기서 암탉이 나서 그 둘 사이에서 달걀이 생긴 것이다.

물론 모두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은 하나 됨이니 이 하나 된다는 것 자체가 애초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누어진 상태이므로 그 애초의 하나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인 것이다. 이 욕구는 먼저 그렇게 홀로 존재하다가 자기와 같은 동일한 것을 파생시킨 그 먼저 있던 것의 일방적 움직임이 아니라 양쪽의 동시 움직임이기도 하지만, 주장 먼저 있던 것이 먼저 그런 욕구를 나타냄으로 인한 그 나머지 쪽의 반응으로 화답되는 작용이다.

그래서 무릇 짝을 이룬 둘은 반드시 크고 작음의 구별이 있다. 즉 남자는 크고 여자는 작다. 이것은 먼저 있었다가 나중 나온 자를 낸[派生시킨] 자가 크고 나중에 있게 되었고, 그래서 나온[派生된] 자가 작다는 이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물이 다 그렇다. 요즈음 사탄의 훼방 작용으로 여자가 남자와 평등이 되려 하여 소위 양성평등이라는 해괴한 생각이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도 조물주께 대한 사탄의 최후의 반역 행위의 하나다.

세상 종교와 그리스도 복음의 차이 중 하나

근본적인 차이도 있고 사소한 차이도 있으나 한 묶음으로 이야기하면 진실과 진실 아닌 것의 차이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선한 행위를 견지하는 측면에 관해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장치하신 양심이 다 있으므로 아무리 사탄의 속임수에 놀아난다 하여도 하나님이 지으신 이 양심이라는 표적(表迹)은 감출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이 인간 삶의 기본이라는 것쯤은 다 아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범세계적인 종교를 표방하고서 자비, 사랑, 인애를 인간 도덕의 기본 골격으로 삼지 않는 교리가 없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즉 종교 교리는 그런 사랑의 행위를 권장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엄밀한 구원의 요건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세상 자체가 악하므로 그런 실천을 요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것으로만 그런 것을 내다 걸 뿐 실제 생활 측면에서는 권장 사항으로 그치지 그것을 엄정한 잣대로 들이대어 요구하지는 않는다.

고로 겉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표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실제 그리스도의 교회인가 아니면 세상 종교에 불과한 것인가를 식별하려면, 바로 이런 점에 착안하여 눈 여겨 살펴보면 금방 드러난다. 즉 종교로 전락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것이 이름뿐이라면 일반 세상 종교와 같이 이런 실천적인 면은 권장 사항에 그치고 다만 이상적인 그래서 실천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이런 사랑의 실천 여부를 믿음의 유무로 연관시켜 거룩한 언어행실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요 생명의 말씀이 살아 있는 곳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물론 이 경우 다시 말해 도덕적인 것을 엄중하게 강조해도 그 교리 자체가 성경에 이탈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것은 세상 종교이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다. 고로 성경에 충실한 내용으로 가르치되 세상의 잣대로 보면 엄중한 도덕적 기준을 세워 이를 철저히 시행할 때 하나님의 교회라는 판정이 일차적으로 내려지는 것이다. 비로소 외모로는 그리스도의 교회라 일단 인식되는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시간이 해결할 일이다.

이런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무릇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마귀에게 절함으로써만 주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그런 지금 "웃고"[눅 6:25] "배 부르고"[:25]를 찾지만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생명에 속하고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는 관계로 세상에 살고자 아니하니 사랑의 실천에서 세상이라는 것이 쟝애 요인이 될 수가 없음이다.

이 세상을 사탄의 세계로 보는 반면 그리스도의 나라를 따로 인식하고 장차 임할 것으로 보는 까닭에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연연하거나 미련을 두는 일이 없음이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그 생명을 영원토록 보존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요 12:25]. 사탄은 성경 말살 책략(策略)으로 거대한 사이비 종교 집단을 만들어 기독교로 행세하게 하고 성경의 가르치심과 상반되게 세상에 군림하게 하여 세력화하게 만들고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기커녕 도리어 사랑하도록”[:25] 만든 것이다.

성경대로 따르려고 하면 ‘축자(逐字) 해석’이라고 비방하여 완전히 따돌려버리도록 만든 것이다. 오늘날 현상이 바로 그 계책대로 여지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사탄을 성경이 이 세상 신이라 하고 지배자[임금]라 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것이 앞에서 말한 대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다. 사탄의 존재와 활동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사탄의 판도(版圖)에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핍박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고 주님은 처음부터 그러함을 미리 알리셨고 초대교회가 바로 그런 본을 보여준 것이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이 바로 이런 사실을 대대로 모든 교회에 확인시켜 주고자 함에도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영생의 길이 좁은 문, 좁은 길임을 알아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 경고하신 것이다[눅 13:24]. 세상 어느 종교가 이 세상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악이요 악신(惡神)이라고 하였던가. 그 어느 종교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그리 되면 이 세상 신보다 더 막강한 신[創造神]을 설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상 끝까지 세상의 핍박과 탄압의 대상이 됨을 스스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 어느 종교가 그렇게 세상을 적대시하면서 살아남으리라고 감히 그런 주장을 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2천년에 걸쳐서라도 소멸하지 않고 굳건하게 명맥을 당당히 유지해오고 있는 것이다. 마치 유대인이 오랜 세월에 걸쳐 핍박을 받아 멸절 위기를 몇 번이나 만나도 오늘날 당당한 국가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과 같다. 모두 하나님이 그렇게 의도하셨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이다. 

이 이스라엘의 끈질긴 역사는 성경[구약]의 진실성을 나타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분명히 작용하고 있음 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다. 어느 민족이 이토록 줄기차게 집요한 생명력을 과시했던가. 다른 민족 같으면 이미 오래 전에 역사의 무덤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리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를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그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의 외부적 증거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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