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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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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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과 생사를 초탈한 삶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영욕(榮辱)과 생사(生死)를 초탈(超脫)해 있는 삶을 즐기는 이들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달려드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대하여 너털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낙의 보유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미 평안과 사랑과 즐거움과 의의 삶의 보람으로 배부르노라 하는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영원히 보존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12:25].

미워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① 이 세상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하에 있어 그가 주물럭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게 절하라, 그러면 이 세상의 권력과 영광을 줄 것이다” 합니다. ② 이 세상에서 생명을 사랑하여 살고자 하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사람 살리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전연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옆에서는 사람들이 멸망해 가는 아주 위급한 판에 이를 내 몰라라 하고 자기 혼자 삶의 낙을 누리려는 것 자체가 용서 못할 악입니다.

왜냐면 함께 웃고 함께 우는[롬 12:15] 즉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는"[고전 12:26] 한 몸 의식, 공동체 의식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바로 이것이 죄요 악이요 불의,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①에서는 아래 몇 가지로 다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 우리 인간에게 생명이라는 것은 영생을 말합니다. 영원히 살아야 사는 것이지 내일 일도 기약 못하는 것이 삶일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죽는 인생이 있는 것은, 인생이란 평균 쳐서 이야기하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 즉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 유일한 답이라는 뜻입니다. 영생은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는 불가능하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생명의 낙 운운”하는 것은 이성적인 사람을 비이성적인 ‘바지저고리’로 만드는 일입니다. 세상 종교가 그런 식으로 회유(懷柔)합니다.

㉡ 이렇게 죽음에 들어가도록 직접 충동 질을 한 자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악령입니다. 첫 사람 아담을 속인 자입니다. 물론 아담 자신의 어리석음도 그 첫째 원인입니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한 몸 구성에서 일개 지체(肢體)에 불과한 피조물의 말을 더 믿은 허물은 용서될 수 없습니다. 그런 악령이 오늘날도 여전히 인생을 속이는 수작을 벌여 이 세상이 생명인 것처럼 삶의 낙을 누리는 때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게 인간을 애초에 속여 그 결과로서의 이 죽음 곧 자연계에 속한 생명 자체가 가증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이런 초라한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그런 가증스러운 것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밉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처음부터 죄 짓는 자로서,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으로서 그 특징을 삼는 것이 죄입니다. 고로 그는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을 버리라고 선동합니다.

자기를 위해 살아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 부인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생명과는 정반대되는 것을 가르치고 부추기는 자입니다. 그 자신 이미 생명에서 떠나 있어 죽음[멸망]의 운명에 처해진 터이므로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야 당연합니다. 이렇게 인간을 구원 얻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자이니 그 이유는 곧 이어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은 심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사는 때와 장소가 아닌데도 마치 사는 것처럼 잘못 알고 살고자 합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장차 본격적으로 살 때가 오는데 그 때를 대비하여 즉 영원히 대칭을 이루어 있을 세계에서 어느 쪽을 택할지 그 어느 쪽을 택하든 택하게 되어 있는 자유 선택의 현장이 이 세상일 따름인데, 이런 엄청난 중요한 시기에 이 한 때의 그나마 기약도 할 수 없는 일시적인 삶으로 허송세월하다니 가히 상상도 못할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므로[고후 6:1], 일하는 때이지 사는 때가 아닙니다. 이런 명백한 부조리 즉 악이 성하여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가면서 산답시고 사는 인생들의 멋 없고 덧 없는 세상에서 무슨 살 맛이 난다고 살려고 몸부림 칠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런 모든 것을 뛰어넘고 오로지 올바르게 선하게 살기로, 죽더라도 그렇게 죽기로 작정한 사람들로서 다른 생각에 잠길 여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오늘이라도 이 복음 전파만 끝내면 내일 곧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 그런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인간[아담]을 그렇게 죽게 해놓고 스스로 그런 인생들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인생들에게 생명을 약속하는 것도 아니니 오직 멸망밖에 안겨 주는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함께 영원한 불행 속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자신 자기가 벌어놓은 멸망의 운명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말하자면 인생들을 인질(人質)로 삼고 사력(死力)을 다해 인생들의 구원을 저지하는 셈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의 숫자가 일정량대로 충분히 채워지지 않으면 이 세상은 이 모양 이대로 한도 없이 끌어갈 것이니 그만큼 자기에게는 시간을 벌어 주고 또 그렇게 지내노라면 무슨 별다른 수도 생길 것이라 하여 그래서 내심(內心) 어쩌면 자기의 존재도 확실히 보장 받을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있는 것을 두고 앞에서 자기 '구원'을 위해 인생 구원을 사력을 다해 방해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계획이 치밀하고 완벽하다 해도 자기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인 만큼 악으로 일관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에서 결코 형통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고집스러운 희망을 버리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오로지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시고 자신께서 조물주시라고 해서 마음대로 하시는 일이 없다는 확신만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원칙주의를 악하게 역으로 이용하겠다는 심산이나,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피조물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피조물보다 강하십니다[고전 1:25]. 그의 잘난 체 하는 교만이 그의 눈을 멀게 했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세상 종교도 선한 것을 가르치고 올바르게 살도록 지도함을 표방하지 그냥 아무렇게나 악하게 막되게 살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차이가 어디 있느냐, 차이가 명백합니다. 세상 종교는 선을 행해도 그 궁극적인 목표가 자기 구원입니다. 아무리 이웃을 불쌍히 여겨도 그 근저에는 그렇게 선을 행함으로써 자기가 영생하게 된다는 소망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악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모든 것이 악인 것입니다. 까발리고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함이고 자기 구원을 위함이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입니다. 까놓고 악을 행하는 사람의 악행과 본질상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드러내놓고 악행하는 사람에 비해 솔직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남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는 자기 구원이 궁극적인 목표이므로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위선이라는 죄목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 외에 의미가 없습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지금 이 시간이라도 그 ‘최종적으로 바라는 구원’을 당장 이룸에 있습니다. 내일도 기약 못하는[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 인생으로서 이런 측면에서도 합리적인 구원입니다. 그래서 “은혜로[선물로] 받는” 것이라 하고 “믿으면” 되는 구원입니다. 당연합니다. 내일도 기약 못하는 처지에 이것 저것을 하면 된다는 구원론은 참으로 비현실적입니다. 현실은 내가 이 시간 후에 어찌 될지 모르는 판이므로 내일 또는 이 시간 후를 기다릴 것 없이 이 시간 당장 구원된다고 해야 현실적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시간 당장 구원 얻음에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입으로 예수님을 주(主,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 그러므로 나는 그 종으로서 적대 복종함)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롬 10:9]. 하나님의 단독적인 창조 행위인 까닭입니다. 그것도 이미 이루어놓으신 까닭입니다. 단지 내가 이 사실을 수용하고 주님으로 모시면 즉 절대 복종하겠다는 약속을 하면 그것으로 구원입니다. 

이 스스로의 다짐과 결의, 결심, 약속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면 죄가 용서되고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시어 나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문자 그대로 하나가 됩니다. 즉시 구원, 현장에서의 구원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가 그 예이면 빌립고 간수가 그 날 밤으로 믿고 세례 받은 것이 그 예이고,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던 환관이 그 예입니다[행 8:38]. 과연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즉석 창조의 구원입니다.

고로 내 스스로 이루는 구원이 아니니 왜냐면 천하 인간으로서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자는 없는 것입니다. 선행으로써 구원 얻을 것입니까. 특정 종교 행위로써 구원을 보장할 것입니까. 내일 불시에 죽으면 선행을 해보지도 못하고 나의 생은 끝납니다. 그렇다면 선행도 거기 맞추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논리도 서지 않고 모순으로만 가득한 것이 세상 종교의 특징이니 처음부터 진리가 아닌 인간의 망상으로부터 출발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 아래 되어진 일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논리성도 합리성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엉거주춤하게 엉성하게 짜 맞추어놓은 것뿐입니다. 세상 종교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나 예컨대 선행 한 가지만 놓고 보아도, 이 선행을 하는 것이 자기의 구원을 목적하는 것이냐 아니면 순수하게 이웃을 위한 것이냐 할 때 앞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자기 구원이 최종 목표입니다. 자기 구원을 위하면서도 이웃을 위하는 것으로 치장하고 위장하니 참되지 못하고 위선이라는 죄목(罪目)까지 가중(加重)되는 격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자기를 구원할 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하지 말아야 그것이 선이고 올바른 것이고 가치가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보듯이 상식 수준의 판단이요 결론입니다. 왜냐면 모든 죄악은 자기중심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점에서는 그 누구도 동의하는 것입니다. 학문이나 지식이 그런 결론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양심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는다는 것은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그리 하자면 앞에서 말한 대로 사는 법도를 따라 즉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은 한 몸 체제에서 사는 것 외에는 달리 방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몸 구조에서는 반드시 자기 부인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지 말아야 하고 자기 구원을 목적하는 일도 당연히 없어야 합니다. 고로 자기 자신을 위하는 한, 설혹 구원을 이룬다 가정해도 그 구원이 무의미한 것이니 왜냐면 여전히 자기를 위함으로써 이룬 것이므로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남는 터라 불행의 씨앗은 그대로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결과'는 '원인'이 있기 때문인데, 동일한 결과를 이루지 않으려면 동일한 원인은 극력 피해야 하건만, 다시 말해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 자신을 위한 결과[아담의 범죄] 이렇게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다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아야 하는데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하니까 항상 동일한 결과 외에는 거둘 것이 없고 그래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선행을 하지 말 것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정리해 오기를 무조건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을 죄, 악, 불의, 불법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것은 무조건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없고 자기를 위해 사는 일체의 의도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선도 있고 의도 가능해지고 그것이 진정 사람 사는 모습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실상 가능할까. 무슨 말로 설명을 해도 불가능하고 무슨 이론을 내세워도 안되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유일한 해답이 나옵니다.

진리는 평범한 상식 가운데 묻어 있습니다. 결코 진리는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면 진리는 보편성을 생명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느 곳 어느 때에든 손에 잡히듯이 흔하게 볼 수 있는 손 가까이 있는 것이 진리의 정체입니다. 그러므로 나 스스로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고 부정하려 해도 안됩니다. 남이 나를 위해 주면 내가 나를 위하지 않게 되는데 그 경우에만 가능해집니다. 너무나 평범한 말이지만 그러나 확고한 진리입니다.

내 스스로 나를 위하지 않는 것과, 남이 나를 위해 주니까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 나를 위하지 않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전자는 목적과 의도가 있습니다. 그 특정 목적을 바라고 하니까 아무리 나를 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자체가 이미 나를 위하는 것입니다. 특정 목적을 바라고 나를 위하니까 의도성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목적을 일단 달성하면 다시 나를 위하게 됩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말 그대로 나를 위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위하지를 않습니다. 삶 자체가 나를 위하지 않는 것으로 영원히 고정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그가 나를 위해 주니까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나만을 위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내가 나를 100프로 위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렇게 나를 백 프로 위해 주는 이가 있는가?

없습니다.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나와 성정(性情)이 똑같으니 나를 위해 주는 것이 현실상 불가능합니다. 사람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나를 능히 위하실 수가 있습니다. 오직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만 그렇게 나를 위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어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된 경우가 아니라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이 부처가 되는 등 초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 신불(神佛)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헛소리입니다. 신불이 될 수 있을 만한 자유가 있고 능력이 있다면 왜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서 자기를 만들지 못했는지, 영생은 고사하고 천년 정도는 살 수 있는 존재로는 왜 스스로 되지 못했는지 그것부터 따지고 물어야 합니다. 백년도 겨우 살지 못하는 주제에 영생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신불이 될 수 있다고 우기는 교주(敎主)나 교조(敎祖)도 실제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의 상상 또는 자기의 특정 정신 상태를 사실처럼 착각하고 피력했을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는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니,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우리가 이성적으로 부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자유를 속박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까지 우리 손에 의해 결정됩니다. 미리부터 마음대로 정해 놓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리 아시는 것[豫知]이 가능한 것도 인간 역시 제조자라면 그 제조품의 미래를 미리 예측하지 않고는 감히 제조할 생각을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인격성이 없는 물질에 속한 것을 만들고, 창조주 하나님은 인격성을 지닌 생명체를 만드셨다는 그 차이뿐입니다. 미리 아시는 까닭에 처음부터 자유를 구속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자유를 무한정 주면 어찌 될까 하는 의구심이 필요 없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자유를 주실 때는 온전한 자유를 주시고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자유를 주신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움직인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 자율성이 강조되는 분야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억지로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람은 자기의 자유 의지를 백 프로 행사할 수 있고 우리가 목표하는 이상적인 생명 세계도 사랑이 그 바탕이므로 모두 하나 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이 존재한다 해서 우리 개인의 생활에서나 집단생활에서나 방해가 되고 장애가 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몸과 머리로 되어 있는 것이 피조물과 조물주의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몸과 머리는 말 그대로 한 몸입니다. 머리도 몸을 가리켜 자기 자신이라 하지 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몸도 머리를 가리켜 그렇게 확신하여 의심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관계로써 하나님은 우리 모든 피조물[특별히 인격성이 있어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나 자신처럼 알고 인식하는 터에 무슨 스스러움이나 어색함이나 서먹서먹함이나 부자연스러움이 있을 것입니까.

오히려 칸트[1724-1804]가 소위 “요청적(要請的) 유신론”을 말했듯이 인간의 이상적인 삶에는 필요 불가결한 존재가 우리 모두 한 몸으로 구성하여 살 때 그 머리 역할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 중에는 아무도 머리 역할을 할 사람이 없는 까닭에[왜냐면 서로가 머리되기 위해 다툴 것부터가 그 첫째 원인이 되므로] 인간을 창조하고 파생시킨 근원으로서의 하나님 외에는 이상적인 머리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 구조를 보아도 머리는 몸의 그 어느 기관이나 지체와는 달리 모든 몸 각 부분을 통할하는 특이한 독보적 기능을 합니다. 그러므로 머리 역할로서는 각 지체로서의 모든 인간을 초월하여 월등한 위치에 있는 창조주의 존재를 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필요하면 필요하였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자주 독립성을 확보해 주셨다는 의미이므로 이는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이 이 우주의 주인처럼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도록 인간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머리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 지으신 모든 만물의 머리일 뿐입니다. 인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지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자유 의지를 따라 주동적으로 움직여도,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데 이는 강제가 아니라 그 스스로 원해서 자진 자발적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자기 아래에 있는 피조물의 지시를 따르듯이 했으니 망령 아닌 망령을 부린 것입니다. 머리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순복(順服)하는 것이 도리인데 기쁨으로 하지 않았다는 증거일까요. 아담의 자율성이 시험대에 올랐는데 여기서 아담은 그 부적격(不適格)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께 억지로 복종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스스로 판단해서 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위하고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 모든 이웃을 위하는 '한 몸의 원리에서의 하나 됨'을 위한 그런 ‘자유’ 행사(行使)가 자기 부인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입니다. 이는 속박이 아니라 내 스스로 이 한 몸으로 하나 됨을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기에 아무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자율성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악인의 특성은 이런 하나 됨 즉 공동체로서의 구조나 체제를 원하지 않는 고로 자기중심 곧 자기 마음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악인은 모든 사람의 공동 명의로 추방해야 마땅한 공적(公敵)의 성격을 띱니다. 암적 존재입니다. 자기도 망하게 하고 남까지도 망하게 하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아담 부부에 나타낸 살의(殺意) 그리고 가인이 아벨에게 가한 살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규제하시지 않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이런 암적 존재는 단절시켜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좋아하고 의를 사랑하는 자로서 이런 생명에 역행하는 일 즉 불법을 사랑할[히 1:9]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또한 자율성입니다. 하라고 해도 아니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원치 않는 것은 아니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의 개념입니다. 그 원하는 것이 악이냐 선이냐, 불의냐 아니면 올바른 것이냐 하는 것으로써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정해지고 이런 정리 작업을 머리되신 하나님께서 친히 맡으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암세포로 번진 암 덩어리는 머리의 지시에 따라 제거되는 작업을 거쳐 제거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 때는 비록 나 자신에 속한 나의 몸의 일부였으나 전체에 해를 끼치는 독소가 되어 버렸으니 전체의 이름으로 그 이단자, 불복종자, 국외자를 제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때는 정상 세포였으나 스스로 변질되어 암세포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경우 순수하게 우리의 자유 선택으로 된다는 사실에 "두렵고 떠는"[빌 2:12] 이유가 있습니다. 영원한 운명을 우리 스스로가 정한다는 사실에 누가 아니 떨겠습니까.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교훈에서 얻는 실질적 교훈은, 자기중심의 '나'원균이 망칠 뻔했던 국운을 이공의 공동체 의식이 번번이 다시금 일으켜 세웠다는 것이니, 단 한 사람의 그런 정신 또는 자세가 어떻게 전체 모든 사람에게 해악(害惡) 아니면 막대한 덕을 끼치는지가 여실히 입증된 사례라는 데에 있습니다. 한 사람의 그런 올바른 자세가 얼마나 위력을 나타내고 한 사람의 그런 흔히 볼 수 있는[너나없이 대개 공통으로 갖는] 자기중심의 자세가 일조유사시 얼마나 무서운 파괴력을 드러내는지 모두 그 훌륭한 증거가 되고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왜 세상이 이토록 악한가, 왜 이공과 같은 공동체 의식이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고 따돌림을 받는가 할 때, ①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첫째로서 이미 설명한 그대로이고, ② 악령들이 “네피림”[창 6:4]이라는 불법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 패거리를 많이 만들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 다수의 힘으로서 이런 악행이 세상에서 횡행하는 것입니다. ③ 네피림만 아니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이 영물(靈物)로서의 그 능력으로 이 세상의 신(神)이요 지배자라는 사실에 걸맞게 인생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작용하여 그 정신세계를 조종한다는 것도 충분한 사유가 됩니다.

④ 그리고 군중 심리라는 것도 있듯이 대세에 기울어져 덩달아 분위기에 젖어 본의 아니게 부화뇌동하는 사례도 있어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죄 많은 세상”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감히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런 불법 행위를 자행할 수 있는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악인들이 득세(得勢)하여 악행을 감행하는 것과 같은 현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철저한 원리원칙주의를 말했지만 아담 자신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따랐다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머리로서 부지중 인정했다는 의미가 되므로, 그래서 그 결과가 충실히 드러나졌다는 의미이니 역시 그런 원리원칙을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이공과 같은 올바른 삶이 제대로 이 세상에서 대접 받지 못한 것으로도 이미 이 세상의 실상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올바르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은, 이공이 그와 같이 소위 복장(福將) 즉 세상에서 형통하는 소위 팔자를 잘 타고 난 것이 아니어서 못된 무리들의 모함을 당하고 그 진로에 방해를 받고 전쟁에 임하여 그처럼 큰 공을 세워도 하마터면 형장(刑杖) 아래 목숨을 앗길 뻔했었던 것과 같음과 비교할 때 당연지사로 여겨 마땅한 것입니다.

생리적으로 세상은 그런 올바른 것을 수용할 만큼 올바르지 못함이 입증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아도 누구나 의롭게 살려고 하면 이처럼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삶에서 초연해 있을 충분한 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공과 같은 정신 앞에 우리는 허리 굽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공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충신 열사가 많은 가운데 사육신이 있고 신라의 박제상이 있고 고려 말 정몽주가 있습니다. 기타 많은 충절의 사람들보다 우리가 못해서야 될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을 사람들이 모두 다 구원 얻기까지는 부득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죽은 자로서의 인간 세상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악하다고 인생에 대하여 징벌 위주로 나가 죽여 없애면 그들이 언제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어 생명 길을 찾겠습니까. 불이익을 준다고 해도 그것은 강제가 되고 간섭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행을 오래 참으시고, 오직 그 스스로 회개(悔改)하여 올바른 길로 돌아서기만 기다리십니다.

단 악령들은 회개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이 존속하고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유는, 인간[아담]이 처음 범죄로 그 수하(手下)에 들어감으로써 빚어진 결과임을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즉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덩달아 존속할 수밖에 없고[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또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악령들의 활동도 '필요악'으로서 그 기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묵과하시는 것입니다. 악령들 스스로 기여하고자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들의 악행을 역 이용하시는 셈입니다. 인생들을 시험하는 차원에서입니다.

앞에서 이공의 공동체 의식을 예로 들고 '나'원균의 일반적인[평범한] 자기중심의 삶의 자세를 예로 든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올바른 사람 삶이라는 것이 이런 공동체 의식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은 것으로서 본질로나 이치적으로나 같은 것이고, 성경에 말하는 죄란 것 역시 자기 위주, 본위, 중심의 삶으로서 그 결과가 그렇게 치명적이라는 것['나'원균으로 말미암아 입증되어진 결과]임을 드러내는 데에 있습니다.

공동체 의식에 역점을 두는 것은 모두를 살리는 위력을 발휘하는 진정한 삶의 기본 자세임을 밝힘이고, 누구나 이공과 같이 살기만 하면 그것이 곧 구원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살아야 그것이 "참고 선을 행함"[롬 2:7]이 되어 영생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자처하는 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 얻은 사람은 누구나 그 기본 삶이 공동체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바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즉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롭게 산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공동체 의식 즉 한 몸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뿐이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아도 그런 삶 자체가 구원이 된다는 말은 아니니,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운 삶 또는 죄 짓는 생활을 이공의 공익정신과 '나'원균의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대비시켜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그들의 삶은 오직 이 삶의 근본 이치를 '그림자'로 나타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그림자가 아닌 실체로서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입니다. 앞에서 자기 구원을 목적 삼아 선을 행하는 것을 ‘위선’이라 했는데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내 힘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새 창조에 의해 구원되는 것을 말함이고 따라서 창조라는 것은 하나님의 단독 행위이니까 나로서는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일 필요가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 친히 내 구원을 위해 이루신 기정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이와 같이 나로서는 아무 것도 한 일 없이 선물로 주시는 구원이므로 “은혜”가 되는 것임을 설명한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지은 것은 죄뿐이고[나 자신을 위해 살아왔고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죄이므로] 이 죄로 말하면 그 대가가 죽는 것밖에 없는데 도리어 값 없이 구원 받는 것이 되니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이라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이 됩니다. 즉 산 자로 당당히 위치하게 되므로 내일 죽어도 나는 그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처럼 천국 행입니다. 아무 문제 없는 영생입니다.

내일도 어찌 될지 모르는 인생이기에 오늘 내가 구원 얻어 이 시간 후라도 죽으면 그대로 영생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 중 회개한 강도가 그 예입니다. 이렇게 완성된 구원을 수용하면 되므로 다시는 내 구원을 목표로 하여 선행을 하지 않게 되고 그야말로 순수하게 선이 좋아서 하고 올바른 것을 사랑해서 사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모든 순종이니 하나님은 이미 내게 대한 그 사랑을 확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롬 5:8].

여기에 둘의 차이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니, 행위로 얻고자 하는 구원은, 선이 좋아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목적으로 하여 임시 방편으로 삼는 데에 있지만, 구원 받은 다음의 선행은 선이 좋아서 하는 것이니 곧 한 몸 구조에서의 생명의 가치를 알고 있는 까닭에 영원히 그렇게 선을 행하고 그리고 누가 자기를 죽인대도 그 선을 행함을 변치 않으니 왜냐면 좋아서 하는 자기의 자유를 누구도 간섭하거나 강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이루는 것은 무엇이며 왜 항상 복종함으로써 이루라[빌 2:12]고 하는가" 할 때, 바로 이와 같이 선이 좋아서 하고 의를 사랑해서 하는 행동이 삶 자체의 모양새 곧 머리께 대한 복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아담이 범죄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범죄한 것처럼 자기 중심으로 사는 모양이 되므로 한 몸 체제에 있지 않아 장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행동하고 가인처럼 행동할 것이 분명하기에 생명의 한 몸 체제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곧 범죄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사는 도리를 벗어나니 하는 짓은 남을 해치고 불행에 빠뜨리는 결과밖에 없으니 아담 부부에 대한 에덴낙원에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짓거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니까 이는 그 ‘사람’을 사랑함이 되고 그 모든 말씀을 따르고 지키고 그 말씀에 나타나 있는 뜻대로 행함을 가리킴은 당연합니다[요 14:21,23]. 그 '말씀을 지키고 그 모든 명령대로 행함'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으니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말씀입니다. 곧 이 말씀대로 살고 행하는 것이 "선을 행함"롬 2:7,10]이요 죄를 짓지 않음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명확하게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할 때,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내게 주셨다”[갈 2:20] 함과 같이 당신 자신을 우리 각 사람에게 하나도 남김 없이 몽땅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아버지께서 그 아들[우주를 창조하신]을 내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개인적인 선물이 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이 되셨던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들께서는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시고 아버지께서는 그 자신과 똑같으신 아들을 내게 선물로 주심입니다.

내게 주신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나를 전적으로 위하시는 분이 되어 계신다는 의미이니 곧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됨에서 갑은 전적으로 을을 위하고 자신을 위하지 않으며 을도 그러합니다. 즉 몸과 머리의 관계로 계심은 이미 앞에서 누차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바로 나 자신, 제2의 나 자신으로 계시는 의미입니다. 내가 또 하나 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의미입니다. 아기로 치면 엄마입니다. 아기와 엄마는 짝입니다. 왜냐면 불가분성으로 둘이 하나가 되어 있음입니다.

선물은 나의 소유, 영원히 내 것입니다. 누가 내게 무엇을 선물한다면 그 유익한 용도가 분명히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선물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게 주시는 선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께서 어떤 의미가 되시는가 다른 각도에서 살피면, 아들께서 가르치신 기도[주기도문]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꼭 그대로입니다.

①아버지의 이름을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것이니 곧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가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단 한번에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 이상으로 아는 것은 아들 친히 자기를 나타내 주시는 것으로써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요 14:21]. ②그리고 우리의 삶의 터전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 곧 영계(靈界)임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를 "아버지의 나라"라 하셨습니다. 성경은 또한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하늘의 나라[천국]"라 하기도 합니다.

③우리를 창조하신 뜻 즉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가 하는 그 뜻을 밝히셨습니다. 한 몸 체제에서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는 사람 삶의 영원한 구조이니 머리의 지시를 따라 나는 함께 된 내 이웃을 위하는 삶입니다. 자기 부인을 터전으로 하여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 자기 부인이야말로 가장 순탄하게 막힘 없이 나를 확장, 확대, 확충시켜 사는 삶의 지혜입니다. 이런 말은 얼마든지 되풀이해도 신바람이 나는 진실로 사람 삶의 영광이요 자랑이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또는 "우리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이름이십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형상은 사람이 되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모습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로 아버지의 이름이라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신 이름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타난 모든 내용이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드러내셨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친 어버이보다 더하신 자정(慈情)의 창조자이십니다. "창조"의 개념을 우리 인간의 기준으로 하면 '물건 제조'가 아닌 '자녀 출산'으로 정확히 인식해야 함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는 그 자식을 사랑하여 자기의 전부를 희생하고 아끼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나타내신 아들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실상을 완벽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된 것이니 우리가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때 알 수 있고 우리 자신 부모가 되어 자식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설명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합니다. 그 사랑으로 울기도 많이 하셨으니[눅 19:41/요 11:35] "심한 통곡과 눈물"[히 5:7]의 사람이셨던 것입니다. 어버이로서의 자정이 아니시라면 이렇게 우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모든 세상 사람이 또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이 사랑을 알고 사랑 가운데 하나님을 어버이로써 모시고 순종하느냐 하면 그렇지를 않습니다. 우선 가장 먼저 에데낙원에서 영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뜻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자기 손위인 인간[아담]을 죽음에 빠뜨린 예로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 인간[아담] 자신이 자기 본분[하나님을 대리하는]을 저버리고 그런 범죄에 동참하여 그 자신 스스로 그 아래에 복속하여 오늘날과 같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과 같이, 불복종의 범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은 물론 자기 이웃까지 해치는 행위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해서 그냥 무골호인(無骨好人)처럼 그냥 묵과하실 수 있을까요.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죽이는 가인이야 자기 목적을 이루었으므로 시원하겠지만, 아벨의 고통은 상상도 할 수 없는데 이런 일이 용납될 수 있을까요. 마땅히 처단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요. 처단되어 질서가 바로 잡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서 의식이 생명의 법칙의 준수로 나타나고 법이 존재할 때는 반드시 그 지키고 지키지 않음의 보응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그 법 집행을 누가 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이니 하나님께서 담당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인자]만 아니시고 "엄위(嚴威)"가 분명하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은 "소멸(燒滅)하는 불"[히 12:29]이라는 사실에 의아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양면성입니다. 이 양면성을 따라 그 지으신 모든 것이 똑같은 양면성으로 조화 통일되어 있는 현상을 가리켜 '삼위일체의 법칙'이라 하고 그 증명이 마침내 '3운법칙'으로 확실히 되어 있음이 오늘날 나타나진 것입니다.

가인은 그러면 자기 아우 아벨을 이유 없이 죽인데 대한 처벌을 받았느냐 하면, 이는 영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범죄하여 저주는 받았으나 처벌은 아직 받지 않아 지금도 세상 중에 활동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니, 즉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요 구원의 때로서[고후 6:2]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요 12:47]. 오히려 가인의 청원[기도]까지 들어 주신 사실이 성경에 명백하게 드러나져 있는 것입니다. 가인도 구원 받아야 할 인생들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부를 우리 각자에게 영원하신 선물로 주셨다고 증명하신 이상 우리가 여기서 더 무엇을 바라고 알고 하겠습니까.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것을 다 알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신 것은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이 그 자식이 죽을 것을 예상하여 목놓아 울던 것과 똑같은 심정이셨던 것입니다[창 21:16]. 하갈이 울었던 것은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에 봉착했기 때문이요 그리스도[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께서 우신 것도 하나님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데 하실 수 없는 일이 있다니 웬 말인가 하겠지만 분명히 그러하시기 때문에 우신 것이지 우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 하실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 우리의 자유 의지를 꺾지 못하시고 간섭, 강제하실 수 없다는 그 점입니다. 그래서 "내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겔 18:23]. 어버이로서의 자정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못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지만 자정이 넘치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욥 1:7]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모르는 바가 없이 우리가 알아야 하는 대로 알 만한 것까지는 다 알고 있으니 곧 우리의 어버이가 되시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 부모에 대하여 알아도 그 이상으로 무엇을 안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 부모를 안다고 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명백히 밝히고 있는데도, 성경을 읽지 않고, 읽어도 성령의 계시를 통해 알려고 하지 않는 고집이 여전합니다.

때문에 오늘날 사이비 집단이 하나님을 가리켜 "어머니라" 하니 거기에 무슨 큰 진리나 발견한 것처럼 감지덕지하여 온 세계 곳곳에서 흥분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한심한 실정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지가 이천 년이 넘게 흘렀어도 얼마나 성경에 대하여 무지한지를 이로써도 증명이 됩니다. 이상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여실히 그대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세계가 지금 우리의 이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하셨을 때는 이곳이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는 증명이 됩니다. 그래서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 그 하신 첫 마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에 앞서 와서 그리스도를 대변하는 세례 요한 역시 당연히 이 말로써 복음 사업, 인류 구속 사업의 개시를 알린 것입니다. 이제는 천국이 가까운 것이 아니라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해온 대로 사람 사는 법,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살아 영생하게 되느냐 하는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상 소개한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일용(日用)할 양식"[눅 11:3]을 구하는 대목에서도 밝혀졌듯이 그리고 "나의 살과 피는 너희가 먹을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요 6:55] 하심에서도 드러나듯이 먹고 마시는 것은 매일의 작업입니다. 동면하는 동물이나 낙타처럼 사람은 미리 먹어 두거나 마셔 두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엄마 품속의 어린 아기처럼 때마다 젖을 먹어야 하는 것이니 이 또한 사람 사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즉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입니다[눅 9:23]. 매일 주님과 함께 사는 삶입니다. 나 홀로 결정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 혼자만의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내져 무덤 속에 있습니다. 항상 주님과 의논하고 즉 매사 주님께 여쭙고 해야 주님의 뜻을 제대로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다.

앞에서 설명하기를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나는 영생하지 못하므로 죽은 자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대로 가면 어떻게든 죽게 마련입니다. 죽으면 그냥 사라져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낙과는 반대 현상만이 영원히 내 몫으로 태이게 되는 그런 뜻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위치로 말하면 적극적으로 피할 것이 있고 적극적으로 움켜쥐어야 하고 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둘 중 후자는 생명이고 전자는 그 반대인 멸망[죽음]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멸망이고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면 생명입니다. 적극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가 바로 "믿으면 구원 얻는다" 할 때의 믿음 다시 말해 "회개"입니다. 믿음의 의미가 회개와 직결되어 있으니 믿음을 단지 소극적으로 피동적인 자세에서 특정 사실을 수용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회개는 내 스스로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불복종하지 않겠다 즉 죄 짓지 않겠다는 나 자신의 결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도 이 선물이 다름아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둘이 하나 되는 원리를 따라 절대로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는 의지가 필수이고 그렇게 해야 이 선물[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을 영원히 유지하게 됩니다. 즉 앞에서 지적한 대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아니라 일상생활임을 언제나 강조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영원히 하나로서의 관계, ‘영혼’과 ‘육체’로서의 하나 관계를 유지함입니다. 하나님의 단독 창조 행위이니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냐 한다면, 물론 과거에는 가만히 있는 정도가 아니라 죽은 자였으므로 옴쭉달싹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이기에 "은혜"이고 "믿기만 하면 되고" 내 편에서는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산 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 과정에서는 나는 내 할 몫이 일절 없다는 뜻이지, 그렇게 새로이 창조되고 산 자가 되고 “다시 난[출생한]” 다음에는 아주 문제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산 자로 만드셨으면 반드시 살아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산 자로 만드셨는데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죽은 자이지 산 자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 움직이는 것 역시 일부러 하나님께서 손으로 움직이도록 해 주셔야 움직인다면 그것은 산 자가 아니라 물건일 것입니다.

물건이라 그래서 기계나 비록 장난감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내장된 장치를 따라 작동하여 스스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자유를 주셔서 영적 존재로 만드신 다음에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즉 스스로 움직여야 비로소 산 자로서의 제 값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손을 놓으십니다.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아담이 그런 죽을 일 즉 어리석은 짓을 해도 막으실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범죄를 해도 그것을 강제로 제지하시지 않은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은 모두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산 자로서 생명체를 창조하신 것은 당연히 살도록 하려 하심이고, 산다는 것은 최대의 삶의 행복이 보장되는 방법[법칙]대로 사는 것이고 그리고 자유를 주신 것은 그 법칙[하나님의 계명, 율법]을 기계적으로 적용되게 하심이 아니라 그 스스로 자기의 자유 선택을 따라 그렇게 사는 이치가 좋아서 사랑해서 스스로 따르도록 하심입니다. 그 법칙의 내용인즉 한 몸의 원리 즉 공동체 의식으로 사는 것으로서 자기 부인임은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자기를 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고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다름아닌 사람 사는 법이요 방법입니다. 이 법질서를 버렸으니 생명 아닌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고전 2:9/약 2:5/1:12],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으로[행 5:32/히 5:9] 한정시키신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 총을 주어도 어린 아이에게 주어 살상을 일으키면 아니 줌만 못함이니 이는 당연한 일 중에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전제가 필수이므로 회개해야 죄 용서가 되고 성령을 받아 모시게 되는 것이요, 이 회개를 위해서는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 함입니다. “믿어야 구원 된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으니 ①앞서 설명한 대로 은혜이기 때문에 ②그리고 순종이 필요불가결이 되는 까닭에 그렇습니다. 새 창조라고 해서 처음 창조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모두 ①의 과정을 거쳤고 ②의 단계에서 탈락된 것입니다.

그들 역시 ①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은 그들이 창조될 때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거저 주신 것을 선물로 받아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탈락이란 것은 생명을 누리는 자로 창조되었으나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생명 아닌 죽음[또는 멸망]의 결말을 보았다는 그 뜻입니다. 생명[영생]의 속성이 머리를 중심한 한 몸으로서의 체제에 있은즉 필연적으로 머리를 사랑하여 위해야 하고 그래서 그 지시를 따라야 제대로 몸의 지체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는 의사를 나타낼 경우 그 때에는 만부득이 그런 사람들은 한 몸의 구성원으로 영입해 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전제되는 믿음이요 죄 용서요 성령 받음입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면 믿지도 않았는데 혹은 처음 믿는 때인데 어떻게 그런 순종, 불순종을 가려낼 수 있느냐 할 것인데, 그것은 아주 간단하니 사랑 여부가 이를 가려냅니다. 앞서의 설명대로 사랑은 그 사랑하는 상대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내 일로 여겨[둘은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함께 움직이는 것이 그 특성이므로 사랑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으로 충분히 가려질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실 앞에서 내가 나타내는 반응 여하입니다. 그 반응이 사랑으로 나타날 때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의 희생 양이 되셨다는 특정 사실만 사실로서 인정하고 그 이상으로는 아무 반응도 없을 때 즉 개별적으로 나 자신이 나타내는 사랑이 없을 때 그래서 오직 자기의 영생에만 관심이 있을 때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런 것을 믿음이라 착각하고 있으나 결단코 믿음일 수 없으니 스스로 상식 선(線)에서 판단해야 할 일입니다.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논리적인 이성의 존재로 인간을 애당초 만드시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육체가 영혼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몸[’머리‘에 대칭되는]’으로서의 나 또는 한 몸을 이룬 체제에서 그 ‘지체(肢體)’를 이루어 있는 나는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절대 복종해야 그 한 몸으로서의 생명의 체제에 있게 됩니다.

이것이 사는 법도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현재의 우리 육체가 생명을 구가(謳歌)하는 것도 자연법칙을 충실히 따르기 때문입니다. 자연법칙을 준수할 때 억지로 마지못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기분 좋게 스스로 자진해서 지키는 모양새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의 낙을 주는 것이므로 그렇습니다. 일례로 먹지 않으면 건강을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은 죽습니다. 먹어야 산다는 것은 엄연한 자연법칙입니다.

그러나 ‘법칙’이라 해서 마지못해 먹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면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삶의 최대 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법칙 곧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을 따르고 지키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이같은 생명의 이치를 알고 그 도리를 기쁨으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을 사랑하고 그 말씀과 법칙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고로 자기 부인을 기쁨커녕 생활의 부담으로만 느낀다면 아직도 진리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혹은 그리스도의 “선물”의 의미를 믿지 않고 있음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선물의 의미를 모르고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아무렇게나 돌리다가 그 선물을 잃거나 망가뜨리거나 해서 선물을 받지 못한 즉 선물을 소유하지 않는 것과 똑같게 되어 버리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할 줄을 알고서 선물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이라는 막연한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신이시니 그래서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없는 자는 없다"[요일 5:12] 했습니다. 그리스도 친히 선물이시니[요 4:10] 그래서 "성령의 선물"[행 2:38]이시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게 임하여 오시기 때문이니 곧 내 '영혼'으로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그리스도이시니 사람이시므로 내가 목숨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나와 항상 함께 사시는 주님을 나의 생활 속에서 반드시 의식해야 한다는 뜻을 강조하여 "그리스도 의식 생활 운동"[Christ-conscious Life Movement]을 펴는 것입니다. 과거 "그리스도인 생활 운동"[Christian life movement]와 같은 개념이나, 단지 나와 함께 사시는 주님을 항상 의식하면서 언행 일체를 하자는 데에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이미 지적한 여호수아처럼 나의 한 발 쪽은 내가 디디고 서 있는 땅이요 다른 발 쪽은 주님께서 디디고 서 계시는 땅인 것이니 참으로 이런 묘사는 시적(詩的)이고 한 폭의 그림과도 같고 즐거운 멜로디와 같은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아기가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모든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물음을 연거푸 세 번이나 하신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그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또 설명하기를 육체에 영혼이 임할 때 비로소 그 육체는 영원히 사는 영혼을 따라 신령한 즉 썩지 않는 육체로 변환된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친히 그 영으로[혹은 나의 영혼 격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나는 즉 내 영혼과 육체는 영원히 살게 되고 따라서 내 몸도 신령한 몸 즉 영적인 몸, 영원한 몸으로 변화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왜 변하지 않느냐 하겠는데, 내가 과연 최종적으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는지 이 세상에서 그 진위(眞僞)를 다루어보는 과정을 거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나는 이미 구원 받아 있으므로 다시 말해 내 영혼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영과 “합하여 한 영이 되어”[고전 6:17] 말 그대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되어 있기 때문에 더 다시는 죽은 자가 아니요 산 자가 되어 있으나, 앞에서 말한 그런 공동체 의식에서 오는 올바른 삶을 사는지 여부를 가름해보아야 하므로 아직은 신령한 몸을 입는 것이 유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최종 결정을 보아야 합니다. 이 결정은 내 스스로가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 몸의 이치대로 살지 않을 때 그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차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천사”들에 비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그 결격 사유를 스스로 입증해 보인 것입니다. 이미 영구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아담 역시 죽음으로 전락했으니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이와 같이 모든 것은 간단 명료합니다. 공연히 자기의 선입견으로 성경을 읽으려 하니 뒤죽박죽이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 나는 '내 구원을 목표하고' 그런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나 자신 천국 들어가는 것이 최종 목표로서 처음부터 나 자신의 구원을 목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할 수 있습니다. 즉 낙오되지 않고 탈락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므로 결국 나의 구원[천국 들어가게 되는 것]을 목표함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구원은 영원히 한 몸의 구조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그 영으로 내 안에 모시고 있는 관계로 영원히 사는 것이 되어 있는데 영원히 사는 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그 영원히 사는 법이 있고 이는 우리의 자연계에 속한 몸이 자연법칙을 지킴으로써 그 건강을 유지하고 생명을 지속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당당히 이제는 영원히 사는 자로서 이 생명의 법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충실히 기쁨으로[내 스스로 즐겨서] 지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 생명의 계명,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가 앞에서 음식의 예를 들었듯이 기쁨이고 낙입니다. 이미 구원 받아 내가 산 자가 되어 있고 그 생명의 원칙대로 따름으로써 그렇습니다. 한 몸의 체제에서 각 지체는 자기를 위하지 않음으로써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이 생명의 법을 따르는 핵심이 되어 있습니다. 고로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면 그뿐이지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발걸음입니다. 몸도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강조되는 것은 그와 같은 내용의 하나님의 계명[율법이지만, “모세의 율법”은 여기서 더 다시는 언급될 필요가 없으니 이미 지나간 옛 시대의 것으로서 무의미하기 때문]을 지키되[고전 7:19/롬 13:9/요일 2:3,4/3:22-24/5:2,3/계 12:17/요 14:15/15:10,12] 마지못해 지키면 그 역시 믿음일 수 없고 구원 받은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지못해 지킨다고 스스로 판단되면 그것을 더 이상 지키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율법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 되는 까닭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 여러 편지에서 사람이 자기 행위로 구원되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된다고 역설한 그 "행위로 얻으려는 구눵"의 범주에 속함이 되는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면, 당시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할례를 받는 등 그런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된다고 주장한 것과 똑같이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율법[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설명대로 당연히 멸망입니다. 그러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어떻게 하는 것이냐, 여전히 답은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그 모든 말씀을 사랑하게 되는데 사랑하는 것은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앞의 설명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모든 계명의 말씀이 즐겁지 않고 달갑지 않은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정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 분을 믿어야 합니다. 특정 사실을 믿는 것을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착각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논하건대,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어 있다”[롬 13:9] 한 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10]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8] 한 그대로입니다[마 7:12/갈 5:14/6:2/고전 9:21/요 13:34/약 1:25/2:8,10-12]. 계명을 지키지 않음이 죄 짓는 것이요 즉 공동체 의식에서 자기 부인이 없이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필요 없는 과민 반응은 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신다”[렘 17:10] 하고 “의인을 시험하셔서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신다”[렘 20:12] 한 것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다 또는 선을 행하고 의인인 체 해도 속으로는 자기를 위하는 성향을 하나님께서 결코 간과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지 않을 때 모든 죄 문제는 해결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구원 받은 자] 중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가 없다”{롬 14:7] 하고 단언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이다[고후 5:15]. 자기를 위해 산다면, 자기를 위하면,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없으면, 한마디로 그는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롬 14:9/고후 5:15].

자기를 위하는지 않는지는 스스로가 알 수 있습니다[고후 13:5]. 자기를 위해 살 때 그는 위선자요 사이비이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 때 그는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고후 5:15]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라는[요 20:21,22] 말씀과 일치하고, 이는 다시 “보내심을 받아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다[죄를 짓지 않는다]”[요 7:18]는 말씀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보내신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려고 작정한 사람은 근원적으로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이나 베드로나 바울이나 그 편지에서 모두 죄를 짓지 말라 경고하고, 또한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강조함이 여기에도 그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계적으로 피동적 수동적으로 죄를 안짓는 경우는 없고 반드시 죄를 짓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가 바탕이 되고 근거가 되며 이것이 축(軸)이 되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의 의지입니다. 때문에 ‘자유’ 의지입니다. 자유 의지가 사랑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이기에 ‘시험하고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과연 생명의 법대로 사는지 여부를 가름하느냐’ 한다면, 그렇게 보내심 받은 과업 수행에만 일심으로 몰두하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앞에서 말한 대로 이 세상이 자기중심 일변도로 나가고 그런 사람들만 차 있다시피 되어 있으므로 혹 그들과 뒤섞여 거기 동조되어 그 물결에 휩쓸려 같이 행동하게 될 수 있다 함입니다.

아담 부부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는 주위 환경'에 물들어 그렇게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금도 백방으로 그렇게 되도록 선동하므로 그 힘 역시 과소평가할 수 없어 그렇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도록 충동 질하고 부추기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시험 무대라 하고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시험하는 자”라 합니다. 사람이나 사건 기타 등을 통한 시험의 수단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조종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를 시험할 때, 첫 사람 아담이 그와 같이 시험에 넘어가 버린 실례를 보아서도 나만은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 성경에 보면 그런 사례가 많음을 알 수 있고 또 성경은 숱하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 갖가지 수단과 유혹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온갖 구실을 붙여 부당하게 옥에 가두고 조롱하고 탄압하고 구박하고 죽이기도 하는 등 그런 사례 역시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와 같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잡아 처형합니다. 비인도적으로 참살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여전히 견지할 수 있느냐, 물론 견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믿음을 버리고 타협하는 수도 허다하기에 성경의 경고가 있습니다. 또 각종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짓게 될 때는 용서가 안됩니다. 영원한 멸망입니다. 믿는다는 이들 중에도 그런 죄를 짓는 것을 실제 보게 되고 때문에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실례를 직접 목도하고 온 교회 즉 믿는 사람들 모두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행 5:1-11].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즉 그와 같이 범죄하지 않으려고 조심은 해도, ‘범죄하지 않는 것’ 자체에다 목적을 두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연법칙을 따라 먹고 마셔도 “죽지 않는 것”, “건강을 해치지 않는 것”, “몸을 해치지 않는 것” 자체에다 목적을 두고 그렇게 먹고 마시는 경우는 없음을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신경과민이 되어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되고 위장도 나빠져 역효과만 날 것입니다. 우리가 죄 짓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범죄하지 않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니까, 순종하기를 목적하는 것입니다. 아니, 순종하는 것도 목적하지 않습니다. 순종하는 것은 내 안에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힘쓰는 것이니까 그렇게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그것을 목적하고 움직인다고 해야 옳은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목적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상대가 있으면 그 사랑하는 이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즐거움(樂)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고전 7:32] 하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일 즉 사람 구원하는 일이 다름아닌 한 몸을 이루는 구성원을 찾아 마저 채우는 일이므로, 결국 나 자신의 충실을 기하는 의미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곧 내 뜻이고 내 자신의 일입니다.

내가 주인입니다. 주인 의식, 주체 의식으로 임합니다. 사랑은 원래 쌍방이 상대의 일에 대하여 주인 의식으로 일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자기 일처럼 상대를 위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내 일을 하지마는 나를 위하지 않고 이웃을 위함으로써 그리고 이웃을 위하되 몸 전체를 통할하는 머리의 지시를 따름으로 즉 머리를 위함으로써 위한다는 그 위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입니다. 주인으로서 이렇게 힘쓰고 애쓰는 와중의 어느 틈에 혹 내가 범죄하지 않을까 구원이 결국 수포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초조해하고 신경 쓰고 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자기 중심으로서 자기를 위해 사는 죄, 악, 불법, 불의 바로 그것입니다.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할지 모르나 원래 마음 먹는 것이 그런 차이입니다. 그 차이 하나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하는 것은 사람 구원하는 일로서, 내 자신의 뜻이고 내 일이므로 나는 나의 일에 보람과 한없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끼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거기에만 마음을 쏟으니 바쁜 벌은 근심할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제사장으로서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힘쓰며[엡 6:18]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을 전달하며 그리고 그와 같이 사람 살리는 차원에서의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선행을 해도 자기의 구원을 의식하고 그것을 목표로 할 때 위선이라 했지마는, 관점과 시각을 약간 돌려 보면 명확해집니다. 자기의 구원을 목적하고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한 마디로 자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인 것입니다. 생명의 법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공동체 의식 즉 한 몸으로서의 삶의 체제이므로 자기를 위하지 않고도 즉 자기를 사랑하지 않아도 내 이웃이 그리고 우리의 머리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위해 주시니까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나는 오로지 눈을 돌려 머리를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함에만 전념하는 것입니다. 그득하고 넉넉하고 든든한 마음으로 그리고 느긋하게 그렇게 하게 됩니다.

위한다는 것이 사랑한다는 의미이고 위하지 않는 것은 미워한다는 뜻이니,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미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내 동료 즉 나와 같은 지체로서의 이웃을 또한 머리의 지시를 따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와 반대되는 자기 사랑, 내가 나 자신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이 한 몸의 체제에 내가 가입하여 당당히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의 일원으로서 현재 대접 받고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대 가족(大家族)의 일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되 머리를 통해서 그리고 내 이웃을 통해서 사랑하는 방식으로서 내가 직접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머리께서 그리고 내 이웃들이 나를 사랑하게 되어 있는 체제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면 나라는 1로서의 사랑으로 그치지만 한 몸으로서의 전부가 나를 사랑해 주게 되면 가령 나의 지체 곧 나와 함께 몸의 지체를 이룬 각 부분이 백이라면 그 100으로서의 사랑을 내가 받아 누리는 효과를 거두니 1과 100이라는 현격한 차이입니다.

나 자신을 1로써 사랑하지 않는 대신 100으로써 나를 사랑하는 사랑을 그 대신 누리게 되는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니 100 대신 1의 사랑을 받자고 고집하는 것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을 내 스스로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99 정도의 손해를 끼치려고 달려드는 것이 자기 사랑, 자기중심이니 내가 왜 이를 멀리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원인은 내 스스로 믿지 않는데 있습니다.

다른 데에서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충동 질을 따라 자기 사랑이라는 것이 끈질기게 달려드니까 자연 이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고자 하고 나를 위해 살고자 하는 성향이 집요하게 나를 사로잡고자 한다면 이것이 어찌 나의 원수가 아닙니까. 이와 같이 사랑함과 미워함이 분명해야 합니다. 과거 구원 받기 전에는 나를 사랑하였고 이와 반대되는 것을 한사코 멀리하고 싫어했습니다.

미워했다는 것은 나를 위함에 방해가 되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 받은 뒤로는 모든 진리와 진실과 진상을 꿰뚫고 있는지라 나를 위하던 것을 미워하고 머리를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을 행하고”[롬 2:7] “의를 사랑함”[히 1:9]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다고 하는 것이 실제는 나를 해치는 것인 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배워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해치니 내가 당연히 미워할 뿐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가 나를 해치려 하는 경우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할 것인가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 하시므로 나는 그 말씀을 따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인 줄 알므로 나는 그 말씀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중심과 자기 부인의 차이는, 머리의 지시대로 따르느냐 여부 그리고 나를 위해도 나 혼자만을 위함이 아니라 나와 함께 모두[한 몸을 이룬]를 위하는 그런 인식 차이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머리가 누구냐 하는 것으로 좌우됩니다. 머리가 국가를 대표할 때 애국심으로 나타납니다. 머리를 단지 내 이웃으로 한정시킬 때 집단 이기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머리가 누구인지가 이렇게 중요하므로, 우리 모든 피조물로서의 머리로서 하나님을 첫째로 위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집단 이기주의가 해소됩니다. 그런 필요성에서 하나님을 위한다기보다 실상 하나님 친히 우리 각자에게 어버이 같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자기 부인이 자기 부정과는 다른 것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엡 5:28]이라 한 데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하되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내와 하나가 되어 있는 즉 둘이 하나되어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를 사랑함입니다. 만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있는 그래서 여럿이 한 몸을 이룬 많은 지체(肢體) 중에서 그 한 지체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을 인식함입니다. 자기중심은 그런 인식이 없습니다. 자기 부인은 그렇게 자기를 인식하여 자기를 위한다는 생각이 없이 오직 머리를 위하고 자기 이웃[함께 지체를 이루고 있는]을 위하는 데에만 마음을 쓰는 것을 말합니다. 머리와 몸의 불가분성입니다. 나를 사랑하되 나 자신의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과거와는 인식이 다르고 방향이 틀립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 하나님을 머리로 삼지 않고 그 지시대로 움직일 의사가 없는 이들은 한 몸의 체제에 있지 않으니 내 이웃이 아닙니다. "내 이웃"의 정의(定義)가 그러합니다. 영원한 불 못과 천국이 그래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의 같은 피조물이라고 해서 영원 멸망에 있는 이들과 아무런 유대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미 한 몸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만은 광의(廣義)의 "이웃"이 있습니다. 혹자가 그리스도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유대인이 빈사지경이 되어 쓰려져 있습니다. 제사장도 성전 일을 보는 레위[Levi]인도 지나쳐 가버리는데 유대인이 상종하지 않는다는[요 4:9] 그런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 구출해 줍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다" 하시면서 가르치시기를, "무엇이든지 남이 네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남에게 그렇게 해 주라"[마 7:12] 하셨습니다. 유대인이 원래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기를 꺼려하므로 그 앙갚음으로 그 사마리아 사람도 그 길가에 쓰려져 있는 상대가 유대인이니까 그냥 지나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해 관계를 떠나서 그는 적극적으로 그 유대인을 보살펴 준 것입니다.

이해 관계를 떠나 원수도 사랑하는 것이 "내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나 형제 사랑과 형제가 아닌[같은 믿음의 사람이 아닌 즉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아 한 몸으로서의 '우리'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을 위하는 것과는 격차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갈 6:10] 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들은 그들을 이 한 몸의 생명의 체제 안으로 이끌기 위한 차원에서의 선행이요 믿음의 형제들은 한 몸 차원에서의 선행인 것입니다.

악을 사랑하고 불의, 불법을 좋아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나 자신을 사랑하여 불법, 불의, 악과 죄를 사랑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인 줄 알아 크게 부끄러워하므로[롬 6:21] 그 사랑하던 것을 미워하게 되고 과거 미워하던 것을 이제는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지으면 탈락된다, 순종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여 죄를 짓지 않으려 하고 순종하려고 끙끙 대며 애쓰고 힘쓰는 것이 구원 받은 증거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도 그는 여전히 자기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구원이 목적이니까 그런 것입니다. 말은 구원 얻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기 구원이 목적이니 그것은 아직 그가 구원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힘쓰고 애써 순종을 하려고 해도 자기 구원을 목적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이웃의 구원을 목적하는 것과 완연히 다른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구원 얻은 증거는 사랑하고 미워함에서 드러납니다.

여기서 우리의 자유가 선명히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하고 자기 구원을 의식하고 목표하는 것을 미워하고 그 대신 머리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내가 즐겨서 하는 일이므로 누가 억지로 시켜서 될 일도 아니고, 하라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간섭이나 강제가 두려워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스스로 자진해서 하고 싶어서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아니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래서 주인 의식이라 합니다. 내 스스로 사랑해서 하는 일이니까 당당히 주인처럼 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반대가 노예처럼 종처럼 움직이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려 하고 그 이상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 차이입니다. 다시 말해 순종하지 않으면 형벌을 준다, 또는 순종하면 영생을 준다 하고 으르고 달래기 때문에 하는 것이면 그것은 간섭이고 강제이고 타율적입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좋아 해서 하면, 하고 싶어서 하니까 한도가 없고 무작정 하고 또 더 하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주인 의식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까닭입니다.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그렇게 사랑함으로써 하는 것이 되어야 자유인(自由人)이고[롬 8:2] 또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 얻음과 그렇지 못함의 차이가 선명하게 부각됩니다. “천성이 그렇다”는 말도 있듯이, 이렇게 과거에 죄를 좋아하여 죄를 짓던 것이 이제는 확 바뀌어 죄를 미워하게 되고 의와 선을 좋아하여 선을 행하게 됩니다.

이제는 모든 진상을 깨달아 생명의 진리를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인 줄 아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압니다. 길인 줄 알면 길로 가지 왜 길을 두고 뫼로 가겠습니까. 그 길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한히 친근해합니다. 따라서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모든 것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여 그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셨으니, 나도 이 사랑에 호응하고 화답하여 그를 당연히 사랑하고 나 자신을 기꺼이 선물로 드리는 삶이 매일 매시의 생활 곧 영원한 일상생활이 됩니다.

당연히 나는 주님의 것이니까 나를 소유하시면 되는 것이지 하고 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나를 스스로 바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일절 간섭이나 강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섬기는 것이므로, 동시에 섬기는 종이고 그리고 섬김을 받는 주인 격입니다. 이런 것이 동시성이고 양면성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님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너희를 섬기는 자 중에 있다"[눅 22:27] 하셨으니 영원히 그러하시다는 뜻입니다. 즉 아기를 엄마는 섬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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