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4일 월요일

사탄의 사슬을 끊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무이의 방법




사탄이 그와 같이 철통 같이 통제하게 되면 그러면 사람이 구원은 어떻게 받게 되는가. 헤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야 철저한 통제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틈이 없다면 어떻게 인간이 구원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강압적으로 사탄을 억누르심으로써 사람들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뜻이고 합당하시다면 처음부터 사탄이 아예 이 세상 지배자가 되는 것부터 막으시면 될 일이다. 철두철미 원리원칙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는 하시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 위해 일하심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양면성과 동시성으로 함께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기도는 제사장의 기도다. 모두가 평안하고 행복한 천국에서 기도가 필요할 리 없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므로 이 사람 살리는 일은 한 몸이 되는 이치에서, 그 죄인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그 죄인의 위치에 있어야 그래서 그 죄의 대가로서의 저주를 함께 짊어지는 차원에서 다시 말해 희생 제물의 위치에 서 있는 제사장의 기도라야 함은 정한 이치다.

그래서 그림자로서의 모세 시대 당시 제사장은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 했다. 제물이 없으면 제사장 직 수행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 제물이셨고 동시에 제사장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산 제물"(롬 12:1)로서의 기반 위에 드려지는 기도가 아니고는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의 일을 하실 수 없는 것.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셨다"(사 53:12)"한 그대로다.

성령께서 다시 말해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의 영이 말할 수 없는 탄식(groaning)으로 우리 위해 기도하심도(롬 8:26)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몸된 교회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남은 고난-골 1:24)과 함께 하여 드리는 제사장의 기도로서, 그 신음하심은 고난 받는 그 몸의 고통 중의 신음 즉 산통(産痛)의 신음과 함께 하심인 것이다. 악령이 인간을 무자비하게 지배하는 것도 죄로 인한 저주의 일환으로서 인간이 받는 마땅한 보응이기에, 이 사탄의 쇠사슬 굴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그래서 이러한 희생 제물의 고난을 기반으로 하는 기도라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기본적으로는 같은 뜻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위해 모든 것을 하시고 그래서 인생들을 구원하시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 우리 또한 하나님을 위하는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쓰는 그래서 그 영광 나타나시도록 그래서 영광스럽게 사람들이 구출되는 일이 성사되도록 힘써 기도하여 구하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이다. 무엇이든 일방적으로 되어지는 일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6,37) 하신 것.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다. 이 기도 없이는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으니 우리의 기도 없음이 하나님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어드린다는 사실은 실로 너무나 엄청나고 엄중한 것이다.

성경에 "Yea, they turned back and tempted God, and limited the Holy One of Israel"(KJV-사 78:41) 즉 저들이 등을 돌려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제한하였다"인데 우리말 번역 "격동하였다"는 것은 오역이다. 어떻게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제한할 수 있느냐 하는 선입관이 역시 만들어낸 것으로서 이런 그릇된 관점은 "사람이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할 것이요 시인하면 나도 시인할 것"(마 10:32)이라는 말씀을 제대로 수용하려 들지 않은 탓이다.

양면성과 동시성의 진리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생명의 핵심인 사랑에서의 완전한 자주 독립성을 부여하셨으므로, 먼저 본은 보이시되 그 본을 따름으로써(내 쪽에서) 이후부터는 완전히 쌍방이 동시에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는 번역자들은 그냥 통념상 인간이 하나님을 어찌하지 못한다는 한 가지 생각만 하고 그 잣대로써 성경을 해석하려 한 불찰이다.

Biblegateway에 따르면 이렇게 정확한 해석을 하고 있는 번역본이 KJV, NKJV, KJ21, AKJV, BRG, TLB, MSG, NOG, GNV, GW, LJB, YLT, JUB 등 13종이다. 그래도 이나마라도 정확한 번역을 하고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죄의 저주의 결과로 사탄이 이와 같이 철통과 같은 지배를 하고 있으므로, 이 압제의 사슬을 끊는 일에는 그 저주의 대가를 치르는 일 없이는 즉 그 죄의 저주를 함께 짊어지는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일이 없이는 그래서 그런 희생 제물을 바탕으로 하는 간구와 기도가 없이는 한 마디로 불가능한 것이다.

위 구절에서 왜 이스라엘의 범죄가 하나님을 제한시켰느냐 즉 속수무책이 되시게 만들었느냐 하면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을 위하시는 위치이신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하는 자기 본분을 다하지 않으므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이치는 아담이 범죄했을 때 이를 하나님 일방적으로 아담을 범죄 못하도록 막으실 수는 없었다는 의미와 통한다. 사탄 등 악령들의 범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하나님 위하기를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하기를 기대하시느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심이 없기 때문. 모든 것을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요 그것이 마땅하고 옳은 것이다.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고 그래서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기로 서로 간에 약속을 하자"는 것이 창조의 근본 뜻이요 또한 새 창조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고 싶으셔서가 아니라 사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홀로 계실 때에는 자기를 위하심이었는데 피조물이 생겼으니까 전적으로 자기 위하시던 모든 힘을 피조물을 위해 쏟으시니 과거 당신 자신을 위하시던 그 위함의 공백을 당연히 우리 피조물들이 채워드리게 되어 있음이니 여기에 아무 하자가 있을 수 없는 것.  

그리고 앞서 소개한 악령의 발자국 건에 관한 것인데, 영물 치고는 발자국이 너무 작지 않으냐 한다면, 악령의 몸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투명성에다 신축 작용이 뛰어나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자기 형체(체형)를 확대 또는 수축시킬 수 있는 초능력의 보유자임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실상 우리가 이런 말을 하지만 초자연계나 그 존재에 대해 아는 바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런 초능력의 신축성으로 인해 자기 몸을 얼마든지 축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만 이런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면 되는 것. 물론 어느 정도까지 확대할 수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초자연계 몸의 체격이나 크고 작음을 따라 판단할 여지는 아주 없다.


아래 그림은 1855년 발자국이 발견되었던 영국의 데븐셔(Devonshire) 지방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고, 그 말발굽(말의 편자 형상) 모양의 발자국 사진으로 youtube에 나와 있는 것을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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