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22)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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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육체'라면 주님은 그 '육체'에 대한 '영혼'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죄 값으로 내가 죽음에 이르러야 하고 그 죽음의 증거로의 마땅한 피 흘림에 대하여 내 안의 주님께서 보증이 되어 계시니, 이는 주님의 피 흘리심이 아직도 내게 유효한 까닭이다(요일 1:7,9). 그래서 우리 죄를 자백하여 회개함으로써 버리면 이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피가 나를 깨끗하게 하신다. 그러나 이런 보증은 다시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는 확고한 신념과 의지가 동시에 되어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다(요일 1:6,7).

즉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하는 조건부이다. 그리 되어야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어" 주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 죄 짓지 않는다는 신념이 확고한데 또 무슨 죄를 지어 죄 씻음 받는다는 말인가, 모순이 아닌가" 하겠지만, 가령 요한 사도가 이 편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형제 사랑에 관한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일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형제에 대한 사랑 없음'을 혹자는 죄로도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으나 성경은 이를 심각한 죄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여전히 사망에 있다"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것을 죄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동안 행했을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고로 이를 죄로 인정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라 한 것이다. 그 외에는 고범죄 즉 고의로 죄 짓는 것에 가까우니 극히 조심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행위가 된다. 요한 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죄 지을 수 없다 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말을 한다고 했거니와(2:1), 엄밀히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음을 명확히 밝힌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요일 5:16). 과연 요한다운 치밀함을 엿보게 되는 대목이다. '형제 사랑이 없는' 죄를 우습게 보지 말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주님께 하지 않은 것"이므로 이런 사람은 심판의 대상이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형제가 다 그 안에 주님을 모시고 있는 새 피조물들이기 되어 있어 이전과는 아주 다른 양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은 과거 나의 지은 죄에 대한 죽음이라는 보응의 확실한 보증이 되시고 형제 사랑하지 못한 현재의 죄에 대해서도 확실한 죄 씻음의 근거가 되신다. 또한 내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과거처럼 육신대로 살지 않을 수 있게 하는 보장이 되어 계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의 모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그런 것이 다시는 내게 없음이다. 이는 물론 내가 그렇게 믿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세상의 어느 종교처럼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없어도 있는 것처럼 하는 그런 자기 최면의 속임수와는 전혀 다르다. 실제 사실에 근거한 것이므로 그래서 그 사실을 믿음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다시 부활하신 주님이 내 안에 영원히 자리잡아 계시어 나와 영원히 함께 사시므로 내가 아무리 나를 부인하여 나를 없는 것처럼 한다 해도 나를 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요 나의 삶을 사시는 쪽이 엄연히 계셔 바로 주님이시니, 나는 여전히 있는 것이다.

과거 내가 나를 위하던 때보다 그래서 내가 나를 위함으로써 이루었을 결실의 백배 아니 무한대의 곱절을 사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므로 전혀 거기 개의치 않음이니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주님은 문자 그대로 "내 님"이시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선포하시기를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 하셨듯이 나 또한 이 부활하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심으로써 교회 앞에서 선언하게 되는 말이 곧 "내 하나님, 내 아버지이시자 여러분의 하나님, 여러분의 아버지이시자 곧 우리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다"가 된다.

우리 한국 사람은 "우리"라는 말을 친근히 쓴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우리 집 등의 말을 쓰지 영어처럼 '내'라는 말을 쓰면 아주 어색하게 들려 쓰지를 않는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내 주님, 내 하나님, 내 아버지"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아주 적절하도록 모든 것이 새로 완전히 변한 것이다. 하늘에 계심과 더불어 바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에는 일시적으로 성령께서 계시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지만 이제 새 피조물된 구조로서는 영원히 나와 함께 하나되어 사시는 것이고 그것도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그리운 내 님"(어디 다른 데에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도 아니고 오직 "고운(이 뜻은 아름답다는 의미만 아니라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여 극진히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알아 들을 말이다) 내 님"이 되어 계시는 것이다. 이런 삶, 이런 생명체의 구조는 과거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된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가리켜 구약 특히 시편에서는 왕성하게 성령 충만한 글로써 표현되어 노래하고 있으니 한둘 예를 들어도 시편 139편이 있고 또한 시편 73편도 있으니 그 중에 25절은 "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제가 사모할 이 없습니다" 한 것이다. 하늘에서 내 고운 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내 님밖에 나의 사모할 이 없어라. 사람으로서 나와 하나되시는데 그 사람되어 계심은 영원히 하나님되심을 겸하고 계시므로 즉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심이므로 아버지 친히 내 안에 계셔 내가 명실 상부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음이다.

그러니 주님을 믿어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된 "지극히 작은 자"를 누구나 업신여기거나 소홀히 대접하거나 하찮게 여길 때 그에게 진실로 화가 있다. 바울 사도는 같은 의미로 "만일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 하였다. 즉시 회개하여 죄 씻음 받을 일이니 그 죄를 그냥 두고 심판대에 이르면 멸망 길로 질러 간다는 사실을 부다 명심할진저. 이렇게 범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또는 범죄할 필요가 없게 된(이렇게 삼위일체의 원리로 하나님 친히 당신 자신과 나를 하나로 여기시므로 너무나 풍성하여 문자 그대로 우주 만물을 상속 받아 내 것으로 주님과 함께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성경이 지어낸 것이라면]가 세상에 있을까.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성경을 지어낸 이야기라, 거짓말이라, 속임수를 쓰는 것이라 세상이 말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내용을 거짓말로 만들어 세상에 낸다면 어떤 목적에서일까. 이 "고운 내 님"은 내가 진실로 다시 십자가에 못박지 않는 한 나와는 문자 그대로의 불가분(不可分)의 관계, 나눌래야 나눌 수 없는, 나누어질 수가 없는 관계로 계시는 것이다.

남편/아내보다 "주님을 어떻게 해야 기쁘게 해드릴꼬"[고전 7:32,34] 한다는 말은 절대로 허언(虛言)이 아니고 빈 소리가 아니다. 진실 그대로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 그 어느 사랑도 아무리 그것이 최고의 것이라도 여기 비할 수 없다. 한 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남편/아내를 기쁘게 해주려는 것을 "세상 일"이라, 속된 것이라, 세상에 속한 일이라 함은 너무나 지당하다.

성경이 진실이라는 것을 자체 증명하는 것 한 가지를 더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구원 받은 우리들 각자에게 천사[들이]가 배당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마 18:10/행 12:15]. 미리 분명히 해 둘 것은 성경이 거짓말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냐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께서 단 하나의 거짓말이라도 개입되는 것을 용납하실 리 없다. 그 말씀이시므로 친히 챙기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진실된 기록이라는 것만 입증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함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고 성경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하인들을 보내 예수님을 잡아들이라고 보냈을 때 빈 손으로 돌아오므로 묻기를 "왜 잡아오지 않았느냐?" 하니,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습니다"[요 7:46] 한 것과 같다.

가르치시는 말씀 자체가 그 절대적인 권위를 드러내고 있었으므로 거기 완전히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고 있었기에 감히 포박하여 붙들어 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여기서의 그 자체 증명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계신다고 하면서 어째서 각 사람에게 천사가 대령해 있다고 즉 천사가 그 주변에 진(陣)을 치고 있다고[시 34:7] 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거짓말쟁이가 지어낸 것이라면 막강하신 하나님 친히 그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지 굳이 천사가 동원되어 우리를 보호한다는 거짓말은 도저히 지어낼 수 없다는 그 뜻이다. 그리 되면 일개 피조물인 천사가 조물주 하나님을 지키고 보호한다는 모순된 발언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면 그 어떤 피조물[나를 해치고자 하는]도 감히 그 앞에서 서성거리지도 못하고 꿈쩍도 못할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군 소리는 영리한 거짓말쟁이가가 하지 않는 법이다.

진실이기 때문에 그런 일견 모순된 표현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켜 보호해 준다는 의미만 아니라 우리 위한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항상 대기 중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하나님 친히 내 안에 계시는 것이 분명하다면 심부름이라는 것은 상대가 서로 멀리 있어 직접 관계하지 못할 때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그러니 무슨 천사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바로 그 뜻인 것이다.

이제 그 의미를 풀이하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되 하나님으로 계시지 않고 사람으로 계신다고 하는 사실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함은 나와 하나되어 계신다는 뜻인데 하나님과 사람은 둘이 하나되지 못한다. 너무나 일방적으로 압도하고 압도당하는 그런 부조화, 불균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내 안에 계실 때는 나와 같은 사람[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의 연약성을 지닌]으로서 계심이다.

내 안에 임하여 계시는 방법으로는 하나님으로서 그러하심이니 곧 성령으로야 내 안에 계실 수 있음이다. 인간으로서는 그 육체로도 영혼으로도 내 안에 이와 같이 나와 하나되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아닌 '내용'으로는 하나님으로서가 아닌 사람으로서 그러하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특성이신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시라면 어디서 어디까지가 사람이시고 또한 하나님이신지 이해하는 데에 헷갈리기 쉬운데 이상 설명과 같이 구분이 되시는 것이다.

고로 이와 같이 내 안에 계시는 실질적인 모습으로서는 나와 다름없는 현재 자연계의 연약한 육체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의 실상이시므로, 이러한 "인간"[그리스도나 나 자신이나]에게 막강한 천사가 배당되어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왜냐면 악령 사탄 또는 그 일당이 나[나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포함하여]를 상대하여 수시로 적대적인 행동을 감행하는 까닭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 인자(人子, 그리스도)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다"[요 1:51] 하심도 그러하다.

또 광야 시험에서 마귀 사탄이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실 때[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하게 되어 있음을 이로써 밝혀지는 것이다] 사탄이 물러가자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 들었다 한 대목도 그러하고[막 1:13/마 4:11],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써 기도하실 때 천사가 나아와 힘을 돕게 된 것도[눅 22:43] 모두 그러한 뜻에서다. 우리가 바로 그러함은 물론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이시니 우리의 대표이시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를 따름이다. 영원히 사람으로서 나의 단 짝이 되어 계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그리고 천사를 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안내자로 두고 있다는 것은 역시 흐뭇한 진실이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본무(本務)로 삼는 것이다. 왜냐면 만일 그 믿지 않는 이들이 그냥 그대로 영원한 멸망에 들어간다면 반드시 하는 말이 "누가 내게 그 좋은 복된 소식을 들려주었다면 내가 반드시 믿었을 터인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그렇게 되어도 반드시 그런 말을 할 것이 아닌가. 이것이 "남이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그와 같이 해 주라"는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산 자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이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다른 이들을 위해 사는 자기 부인의 삶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십자가 죽으심]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전신(全身) 무장 혹은 정신(精神) 무장(武裝)을 하라-엡 6:11].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죄인으로서의 형벌에 의해 죽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라 한 것이[벧전 4:1] 이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고후 5:14]이라 전제한 다음, 그러므로 이제 "산 자는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라 함과 같은 의미이다[15절]. 회개하고 믿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각 개인의 개별적인 결심과 의지 표명이요 그리고 그 기본 원칙에 따르는 일상생활인 것이다. 죄 짓기를 두려워하지[히 6:6/10:26,29] 않는 것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이니, "구원", "믿음", "영생", "죄"의 의미부터 정확하게 성경을 통해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운 것이라고는 사람이 가르친[막 7:7] 종교 교리였을 뿐이다.

사람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다. 촌수(寸數) 를 따지면 그리스도["하나님의 형상"-고후 4:4]와 나는 바로 1, 2촌보다 더 가까운 0촌 사이다. 신체 즉 한 몸으로 치면 머리와 몸의 관계다. 가장 직접적인 관계로서의 불가분성이다. 그래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 하셨다.

때문에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는 것인데[고전 7:31] 그런 지나가는 세상 일을 염려하는 것이 "아내/남편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줄꼬"[:33,34]가 되어,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관계가 되는 그리스도[혹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니까]를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드릴꼬 하는 것과 상충된다 한 것이다. 부모 자식, 부부 관계보다 더 가까운 관계다. 그래서 '또 하나의 나 자신'으로 존재하시는 의미가 그리스도시다.

만사가 다 질서와 순서를 따라 되는 법이다. 한 몸 원리에서 각 지체는 상호간 위하면 그것이 선(善, 모든 좋은 것)이 되고 의(義, 모든 올바른 것)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머리를 위함으로써 그 지시를 따라 각 지체 상호간을 위해야 정상이고 제대로 된 순서이고 최대 행복을 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신체 구조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진실이다. 조물주를 인정함이 없이 인간 상호간의 우정과 우애를 도모함은 수박 겉 핥기 식의 선이다.

그러므로 첫째,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다음[둘째]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서 이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綱領-마 22:40)"이라 하셨다. 이런 질서대로 하지 않으면 서로 엉키고 설켜 삶의 능률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이를 금하는 것이고 이를 어길 때 죄가 된다. 고의적으로 그러할 때에는 악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주의력 산만]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 7:35,36] 하였다. "섬긴다"는 것은 갑과 을의 둘이 하나 됨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을 가리킴이다. 그리스도 친히 우리를 섬기시는 위치에 영원히 계신다[눅 22:27]. 이것이 삶의 영원한 원리다. 즉 머리 역시 몸을 섬기는 것이니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이치다.

그리스도께서는 악령 '사탄'의 시험에서 그 도전에 대응하실 때 반드시 "기록된" 말씀으로 하셨다. 사람의 대표로서 우리의 본이 되시어 본을 보이심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 성령의 검(劍)이라고 했으니[엡 6:17]. 따라서 이 말씀이 진실 그대로의 기록이 아니고는 악령과의 전쟁에서 무기(武器)일 수가 없다. 이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따라서 진실 그대로의 기록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이런 성경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거짓이나 속임수가 어떤 실수에 의해서라도 개입되는 것을 방치하시거나 용납하실 리도 없다.

그리고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 있었다"[눅 4:13] 했으니, 이런 식의 '판에 박힌 내용'으로 마귀가 재탕(再湯), 삼탕으로 연거푸 써 먹어도 그런 동일한 내용의 시험이 그대로 먹혀 든다는 이 한심한 실태가 너무 두려운 것이다. 학습 효과는 무색하게 되고 그대로 그래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니, 때문에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것일 수밖에 없고,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는"[고전 10:12]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이렇게 시험의 덫, 함정, 올가미만 충만해 있는 것이 이 세상 현실이다. 이런 세상에서, '사는 낙'을 누리자는 것은 제 정신을 가지고 이런 모든 실상을 아는 자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하는 이유[요 12:25]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않아야 하는 첫째 이유는 이미 지적한 대로 이 세상이 인간이 원수 사탄이 관장하는 세계이기에 그렇고①, 그 둘째 이유는 이 세상 존립의 목적이다. 즉 그리스도 구원의 희소식(喜消息, 복음)만 세계 곳곳에 모두 전파되면 지체 없이 즉각 폐기될 세상이기에[마 24:14] 그러하다②. 이 전파 작업이 완료될 무렵이면 구원 얻을 사람은 다 구원된 상태임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인생 구원이 미리 아시고 미리 예정하신데 따라 이루어짐이 확인된다.

미리 정해놓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유 의지와 선택에 의해 스스로 믿을 줄을 '미리 아시고' 그래서 그 믿음에 지장이 없도록 정하시는 것이다. 세상을 마무리 지으실 때는 더 이상 구원될 사람이 없음을 미리 아시기 때문이다. 이 미리 아심이 없다면, 세상을 절대로 끝내실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향후라도 인간으로 태어나는 자 중에 혹 구원 얻을 사람이 생길까 하여 세상을 종결 짓지 못하시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런 결정에는 한 치의 차질도 없게 된다. 물론 서서히 인구 감소가 시작되는 등의 현상이 일어나겠지만 그보다도 아무리 많은 인구가 계속 태어나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인간의 실상을 낱낱이 꿰뚫어 보심으로써 그래서 구원 받을 사람이 없다고 결론 내리실 때 당연히 세상은 막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믿음이 특정 사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단순히 사실로서 인정하는 것만을 말함이 아니라 그 믿음 따라 순종하고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음에 있음이 드러난다.

단지 특정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써 그것을 믿는 것이라 한다면야 억지로라도 믿게 하면 믿는 것이지 아니 믿을 사람도 없다. 믿음 따라 행동하는 순종, 다시 말해 "선을 행함"[롬 2:7/계 20:12,13/딤전 4:16/고후 5:9-11]이 핵심인 것이다. 각자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되는 일인즉 하나님께서 이를 좌지우지하실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바꾸어 말하면 선을 행하는 자만 구원 얻고[롬 2:7,10] 자기중심이 되어 악을 행하는[:8,9] 경우 구원에서 제외된다[요 5:29/롬 2:7-10/마 16:27/고후 5:9-11].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것이라고 성경은 누차 경고하고 있다[약 2:20,26]. 다시 말해 선인(善人, 의인) 이 될 사람들만 걸러내고 악인은 모두 버리시는 것이다. 특별히 악을 선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일단 기회는 부여된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이는 많으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적다고 하셨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여 지키기로 작정하는 이는 얼마든지 차별없이 부르심이다.

창조하신 영물들이야 많지만 그 중에 '사탄'과 같은 악령들은 걸러지고 거룩한 천사들만 영생을 누리는 이치 그대로다. 첫 사람 아담이라도 범죄했을 때는 가차없이 죽음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세상은 인생들을 그렇게 선별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때다. 영물들과 관련된 작업은 이미 끝났다. 악령들이 지금까지 세상에서 준동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악인들이 세상에서 때로는 창달하며 제 세상을 누리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그래서 앞에서 지적하기를 이 세상이 뒤죽박죽인 것처럼 보이나 실은 뒤죽박죽이 아니라 세상사 되어져 가는 목적이 분명한 것이니 곧 악인과 의인을 분류하는 작업을 인함이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악을 행해도 흥하고 왕성하는 것처럼 보여야 되고 의를 행해도 고난의 대가만이 따르는 불이익이 뒤따라야 그래야 의가 좋아서 의를 행하는 것이 입증됨이다. 만일 의를 행한데 대해 포상이 뒤따르고 악에 대한 응징이 금방 시행된다면 누가 감히 악을 행하고 의를 행하지 않으랴.

그러니 이런 '시한부 생명'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급선무요 가장 먼저 할 일임과 동시에 끝까지 맨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인데,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안일과 여유가 어디 있다기에 이런 저런 아무 실상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 코를 박고 살고자 할 것인가. 강둑이 터져 홍수가 날 위기를 알았으면 곳곳이 다니며 이를 알려야 하고 불이 났으면 불이야 하고 외쳐야 하지 않는가. 이 세상은 물난리 불난리가 난 곳이지 정상적인 평온한 데가 아닌 것이다.

③셋째로는, 사람 사는 이치 즉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풍성하고 아주 이상적인 ‘한 몸’의 체제 속에서 사는 세계가 이 세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로 가히 삶이라고 할 수조차도 없는 이 세상 삶을 어찌 살겠다고 할 것인가. 그러므로 사람 삶일 수가 없는데도 "온 천하를 꾀는"[계 12:9] '사탄'이 "정상적으로 사람 사는 것"이라고 속이기 때문이니, '사탄' 자신도 이런 것을 삶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는 터이다.

'한 몸'의 이치에서 살아야 나 자신의 확충, 확장, 확대된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모두가 자기중심이므로 기껏해야 나 하나로서의 삶이니 그래서 남의 것을 부러워하고 남을 시기하고 욕심 내어 밤잠을 제대로 못자고 따라서 평안도 만족도 안정도 있을 턱이 없다. 이런 바늘방석과 같은 삶을 어찌 삶이라 여겨 이 세상과 더불어 사이 좋게 살고자 하는가. 서로가 방향이 다른데 사이가 좋을 리가 있는가.

한 몸의 원리로 살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악이 가득하지 않은가. 악아 가득하므로 대개 사람 마음은 남의 것을 떼어 먹고 훔치고 빼앗고 하는 데에 이력이 나 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하듯이 그렇다면 이 세상 살면서 불의한 권력이 작용하여 내 것을 빼앗았다 가정할 때 나는 어찌해야 할까. 나도 권력을 키울까 해도 사람 일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마음대로 되는 수가 있다 해도 극소수에게만 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이런 세상에서는 최고 정상의 권력을 쥐어야 안심하는 판인데 모두가 다 그렇게 되고자 하여 갖은 음모술수를 꾀하는데다 결국 어느 누구든 한 사람만이 차지하니 불공평 불공정은 항상 존재한다. 이런 세상임에도 그래도 세상 살고자 하는가. 최고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그것이 영원한 것도 아니고 다음 사람이 결국 차지하게 되어 있다.

④또 이 세상이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신령한 몸이 아닌 때문이기도 하다. 애초 인간[아담]의 몸은 본시 이런 구차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었다. 영물들처럼 공중에도 바다 속에도 마음대로 휘젓고 들락거릴 수 있는 신령한 몸이었다. 영물 '사탄'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고 천사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바로 그런 몸이었는데 '사탄'이 거짓말로 인간을 속임으로써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하는 비극을 낳은 것이다.

영물들의 신령한 몸은 그 자체의 신축 작용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신령한 몸에 비할 때 현재 우리의 몸은 얼마나 비극적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참상 그대로다. 이런 몸으로 감히 이 세상 살고자 하나님의 뜻[구원의 말씀을 땅 끝까지 전하라 하시는 분부]을 저버리면서까지 노심초사하는가. 우리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결코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그 부활하신 몸이 신령한 몸이 되신 것으로써 이미 입증해 주신 것이다.

⑤그리고 이 세상은 현재 축복 받은 땅이 아니라 저주 받은 것이기에 또한 그렇다[창 3:17].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르렀고 그래서 온 인간이 죽은 자이니 인간 아래에 있는 땅이므로 원칙적으로 또한 죽음이요 저주다. 이런 데에서 어찌 살기를 바랄 것이며 또한 사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삶의 낙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에서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부유하여 삶의 낙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위로를 이미 받은 것"이라 선언하셨다 [눅 6:24,25/16:25]. 도대체 부유하지 않고 무슨 삶을 누리겠다는 것인가. 이 말씀을 통해서도 이상 사실 즉 이 세상은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이 재확인되는 것이다.

⑥앞에서 우리 인생이 악령 '사탄'과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밝혔거니와, '사탄'의 압제를 받아 자유 없는 억압의 삶이기 때문에 또한 이 세상 삶을 우리는 배격하는 것이다. 몰랐을 때는 몰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어째서 알면서도 이런 마왕(魔王)에게 허리를 굽히고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가. 성삼문 등 사육신{死六臣}은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던 불의한 세조 앞에 무릎 꿇기를 거부하여 절개를 지키느라 갖은 악형을 당해도 굴하지 않았다. '사탄'은 말하자면 자기 손위의 인간[아담]을 감히 깔고 뭉개어 그 위에 앉아 있는 꼴로서 불의한 자인데, 하나님 아들로서의 충절이 그런 사육신보다도 못하다는 말인가.

⑦죄인 가인이 의인 아벨을 아무 이유도 없이 단지 시기해서 죽인 데에서 이 세상이 사람 사는 곳이 아님을 하나님께서는 일찍부터 그 증거로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살인자를 적당히 응징하는 쪽으로 조처를 취해 주셨다면 우리가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하겠지만, 오히려 가인이 자기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한 것을 들어 주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이 세상에서 의인의 고난 받음은 여전히 되풀이된다는 뜻이요 따라서 죄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것만이 유일한 의미임을 확인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使徒) 요한은 가인이 악한 자에게 속(屬)함으로써 그리하였다고 명백히 했다[요일 3:12]. 그리고 이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고 했다[5:19].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악령 '사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죄인 혹은 악인들인지라, 의인이면 그 누구든 절대로 제대로 명줄도 이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아벨이 가인의 손에 죽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악인만이 이 세상 한 때나마 네 활개 치고 살 수 있는 곳이 이 세상이다. 그리고 이들 죄인들은 당연히 이 세상 끝나기가 무섭게 영원한 형벌이 대기하고 있다. 악인이 되고 죄인으로 남을 요량이라면 이 세상 살려는 마음을 먹을 일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고자 함에서나 이 세상에서 권력을 잡고자 함에서나, 천주교나 개신교의 행티는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나아가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종교의 일종임을 스스로 천명하고 있는 셈이다. 분명히 성경은 '사탄'이 이 세상 지배자[王, 임금-요 14:30]라고 가르치고 있는데도, 어떻게 된 영문으로 이 세상 권력으로 군림하려 하는 천주교이고,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여 여전히 육신대로 살겠다고 "약한 육신" 타령을 거침없이 감히 입밖에 내는 것이 개신교의 교리다.

육신대로 사는 것이 허용되는 것이라면[허용이고 말고 할 것도 없으니, 죽을 목적으로 육신대로 살 것인가]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이라"[고전 15:19]는 말이 있을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처럼 육신대로 사는데 왜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사람"이겠는가. 육신대로 살지 않아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천주교나 개신교를 논박한다고 해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조직체를 감히 당신이 무엇이건대 힐난하느냐?" 할 것인가. 천주교나 개신교는 천 몇 백년의 전통이 있다지만 악신(惡神)의 이 세상 지배는 그보다 더 오랜 수천 년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고로 전통을 논하지 말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각 사람은 이 악령과 맞잡이요 그의 적수(敵手)다. 같은 인간으로서 우리는 인간의 종교나 제도나 조직과는 아무 원한 관계가 없다. 오직 인생들로 하여금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는 악령 일당과의 대결이므로 우리는 그런 악령들을 상대하는 것뿐이다. 때문에 성경에,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므로 저들을 이겼으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하였다.

⑧사람은 살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죽기 위해 세상에 나는 것이다. 이 죽는 것도 예외 없이 일정 기간 지체하다가 세상 떠나는 것도 아니고 갓나서 죽고 10, 20, 30대에 죽어 나간다. 그러므로 나 역시 그런 사람들과 같이 갓나서 혹은 10살 미만에 죽었을 수도 있는 몸이다. 왜 그런 사람은 그렇게 죽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려 하지를 않는다. 같은 인생으로서 나도 그와 같이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는 고로 결국 "나는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결론만이 정확한 것이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내일도 기약할 수 없으니 기약할 수도 없는 내일까지 또는 그 이상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너무나 불확실한 것이고, 따라서 "왜 인간이 죽는지, 죽지 않고 살 수는 없는지"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 그 이유를 알려고 하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 마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않고 마치 내일도 확실하고 거의 7,80년은 확실하다는 식으로 무턱대고 살려고만 하니 "미친 마음"[전 9:3]이라 하는 것이다.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지극히 이성적이지 못하기에 그렇다.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성경도 믿는다고 하면서 이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살겠다는 이들은 더욱 그렇다. 가끔 소문이 들리기를 누가 갑자기 죽었다 한다.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그것이 만일 '나'라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는 일이건만 전혀 생각이 없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인생들을 시도 때도 짬도 없이 죽어 나가게 하시는 것은 이상과 같이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도록 하려 하심인데 전연 그런 기색이 없다.

이 자체가 희한한 일이니 이미 설명한 대로 이 세상 신이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의 마음을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에 대해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인데, 이마저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씨가 되어 뿌려지는데 길 가에[마 13:4/막 4:14/눅 8:11] 잘못 뿌려지기도 하고 바위 위에 또는 돌 밭에 잘못 뿌려지기도 하고 가시떨기에 잘못 떨어지기도 한다. 불행한 일이다.

뿌리는 자의 잘못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에게 달린 일이다. 각자 스스로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길 가", "돌 밭", "가시떨기"로 자신을 분류하고 있는 두려운 현실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고도 전혀 그에 대해 생각을 하려 하지 않을 때, "'사탄' 곧 마귀가 즉시 와서"[지체하지 않고]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눅 8:12]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비유[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것]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용서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막 4:12]이라고 설명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주의하라"[막 4:24/눅 8:18] 하셨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라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단 마음에 담아 두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진리를 깨닫는 일에 흥미가 없을 때 구원과는 멀어지는 것이다. 또 돌 밭에나 바위 위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믿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 시험을 받을 때에는 배반하여 곧 넘어지는 자"[막 4:17/마 13:21] 하셨으니, 믿기는 믿었어도 시험 받아 그 믿음을 배반하는 일이 빈번함을 명시하신 것이다.

또 가시떨기에 뿌려지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 지내는 중 이생[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재리의 유혹]와 일락[逸樂]에[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이 막혀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게 되는 경우다. 천국에 관한 구원의 하나님 말씀을 대중들에게 직접 설명하시지 않고 비유를 들어서만 말씀하셨고 제자들이 그 비유를 깨닫지 못할 때 제자들에게만 설명하신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진리 말씀은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만[마 7:7,8] 성령의 계시로 그 문이 열려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실 때 이에 대해 가르치심을 받고자 하는 이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따르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그 비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따랐어도 떠나는 사람은 떠났다. 한번 따른다고 해서 끝까지 따른 것은 아니었다. "내 살과 피를 너희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제공한다"는 자기 부인의 말씀을 하셨을 때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6] 하고 많은 제자가 물러가고 다시는 따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서도 드러난다. 즉 아버지께로부터 배우지 않고는[:45] 아무나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아무나 '믿고 구원 얻는' 것이 아님이다. 그러면 누가 구원 얻느냐, 이 세상이 죽음이요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취할 것이 없는 줄 절감하는 자에게만 임하는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다시 말해 죽기 위해 태어난 인생으로서 죽음밖에 아무 의미가 없는 세상이요 인생인 줄 알지 못하고는, 절대로 그리스도께 올 수 없고 믿어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죽음의 세상에 있는 한은 죽음 외에 달리 그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8] 하셨다. 죽음으로서의 실상을 통감하고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모른 채 단지 영생이나 얻으려 하고 4천명 5천명을 기적적으로 먹이시던 것만 생각하여 배 부르고 편안한 삶을 꿈꾸는 이마다 그리스도를 따라보아야 아무 의미도 없고 결국은 그리스도를 떠나가든가 아니면 심판대에 가서 강제로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든가[마 7:21,25:45] 오직 그리스도와는 결별인 것이다.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어떤 이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더니 대답이 부친상을 당했으므로 부친 장례식을 치르고 따르겠다 하므로 이에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 9:60] 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알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이 일 외에는 일체가 죽음으로서의 무의미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왜 죽은 자이냐, 왜 세상이 죽음이냐, 그 설명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 사람[인자]은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으로 밝히셨다. 즉 범죄함으로써 그 대가로 죽음에 이르니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인데 이 죽음의 의미가 바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자연계의 생명체가 되어 있음을 가리킴이다. 자연계에 속한 여우나 새는 자기 세계이고 자기 삶의 고장이나, 인생은 제 고장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인간은 여기가 제 삶의 터전이 아니니까 새나 여우보다 못한 것이다. 인간은 자기 삶의 터전이 영계인지라 신령한 육체로 빛으로써 옷을 입는 것이 정상인데 이 죽음의 자연계에 와서 아무리 모든 부귀영화로 옷을 해 입어도 자기 고장에서의 백합화가 옷 입은 것보다 나을 턱이 없다[눅 12:27].

죽음은 비단 첫 사람 아담의 죄 때문만 아니니, 이러한 자연계에서 자기중심이 속성인 본능적[동물적]인 삶을 살다보니 "육신"[롬 7:5-8:13]에 사로잡혀 내 스스로 지은 죄만 해도 태산이다.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다면, 나 역시 죄인이므로 죽은 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님, 저를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이올시다"[눅 5:8] 한 것이다.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이 어려운 말씀을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며 떠나는 것을 보시고 "너희도 가려느냐" 하실 때 "주님, 영생의 말씀이 계신데 저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그리스도]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요 6:68,69] 하는 믿음의 고백이 나올 수 있었다.

죄인으로서 죽은 자이니 그 어떤 말씀을 하시고 어떤 분부를 내리시더라도 절대 복종하겠다는 뜻이다. 죽음과 생명이 선명히 부각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자석에서 N극과 S극으로 극이 서로 달라야 엉겨 붙는 것이지 같은 극끼리는 분리될 수밖에 없다. 내가 죽음인 줄 알아야 즉 죽은 자임을 절감해야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신 줄 알지 내 스스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한 그리스도와 하나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말씀이 어렵다"[어려울 수밖에 없으니 스스로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라고 여기고 있는데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바쳐 죽는 것을 말씀하셨으니 이에 반발할 수밖에 없다] 하고 그리스도를 떠난 그 많은 제자들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구원의 희소식]은 믿지 않고 기독교라는 종교는 믿어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영생을 주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줄로 착각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신"[딤전 1:15] 것을 그리스도 친히 설명하시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눅 5:32] 하신 것이다. 즉 스스로 죄인인 줄 알아 죽은 자임을 자각하고 있는 이들을 불러 회개시켜 순종하게 하심으로써 의인으로 만들고자 오셨다는 그 뜻이다. 이 세상에서만은 부득불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서 "나는 죄인이라" 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사람은 영원을 두고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입증함이다.

또 "죄 용서를 얻게 하는 회개"[눅 24:47]라 하셨으니 그래서 베드로도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하심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행 2:38/3:19/5:31] 하였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막 1:25] 하심과 같이 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을 설명하여 베드로는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다"[행 3:26] 한 것이다.

내 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하여,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히 6:6]이라 하였다. 짐짓[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가리켜 이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 "다시"라고 했으니 언제 처음 십자가에 못박았던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로 그 대답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근거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감히 죄를 다시 지을 수가 있겠는가 스스로 숙고해볼 일이다.

모든 인생은 죽기 위해 세상에 나는데, '죄인으로서 죽는' 과정으로서의 이 세상 목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이들은, 그렇게 죽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하나님 아들로서 죽기 위함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을 이룬 각 지체들로서 죽기 위함'이다. 죽기는 죽되 그 의미가 이렇게 완연히 다르다. 다시 말해 구원 받은 현재의 증거가 '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는 데에 있음'이니 여기에 오묘한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즉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신 대로 어디까지나 믿음으로 얻는 구원으로서,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구원 받은 증거'다. 믿는 본인만이 아는 증거니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지 않는 세상에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오직 믿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줄잡아 5백명 정도-고전 15:6] 나타내신 것과 같은 이치다. 구원 받았으니 당당히 산 자가 되었으므로 이 세상에서도 당당히 사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하다 하겠는데 그 당당한 산 자로서의 모습이 다름아닌 이 세상에서는 고난 받는 죄인의 모습[육신으로 계셨던 그리스도처럼]으로 변형되어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이 특징은 죄인으로서의 죽음은 불가항력으로 마지못해 억지로 죽는 것이어서 더 오래 살고 싶었던 세상에 대한 한없는 미련을 두고 죽는 것이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죽음의 필요성을 절감함으로써 죽는 보람찬 죽음이기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랑이라고 하면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는 환호성을 올린 것이다. '자랑'이니 '환호'가 아니고 무엇인가.


전자는 피동적이고 후자는 능동적인 적극성을 띠는 것으로서 내가 좋아서 내가 선택해서 하는 일이므로 나의 의지가 작용하는 까닭에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0,11]는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능동성을 가리켜, 누구나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침입해서 들어간다 하셨고 쳐서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설명하셨다[눅 16:16/마 11:12].

성경을 읽지 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해(自害) 자멸 행위를 하고 있는가! 이런 자살 행위는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마다 저지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희소식을 전달[전파]함으로써 사람 건지는 일을 하지만, 악마 '사탄' 역시 사람 낚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이마다 그 낚시에 걸려들게 마련이다[벧전 5:8].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이야 원래 그의 장악 아래 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으나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예로부터 이에 대해서는 자신 만만하다. 많은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 낚시에 걸려 들어 비극적 말로(末路)로 끝났기 때문이다[딤후 4:10/요일 2:15/요 12:25]. 멸망에 들어가니 비극적이지 않고 무엇인가.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진해서 기쁨으로 죽음에 뛰어든다는 말이 옳다. 왜냐면 그것이 바로 사는 길이요 '산 자'의 당연한 자세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다는 당당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사탄'의 주무기, 주특기가 바로 "사망의 권세를 쥐고"[히 2:14] 그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는 이 "죽음"이기 때문에, 이 '죽음'에 적극적으로 '죽음'으로 대응하는 것이 곧바로 '사탄'에 대한 승리로 직결되기에 그렇다. 죽음의 고난이라는 위협에 처음부터 주눅들어 살고자 할 때 가차없이 그 칼날에 쓰러지는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구원 받아 그리스도의 죽으심 자체가 '사탄'에 대한 승리로 끝났듯이, 우리 역시 당연히 그러하니 곧 우리의 고난 받음이 아직도 구원 받을 사람들의 고난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도 함께 고난을 받는 차원이기도 하지만[롬 8:17], 교회가 사람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 친히 우리를 통해 사람 살리시는 일을 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이 고난 받음은 세상 사람들의 구원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사탄'이 그리스도를 십자가 죽음의 문전까지만 몰고 가게 한 것이었고 실제로 죽으시는 것은 그가 절대로 원하는 바가 아니었던 것과 같다. 죽음의 고통과 굴욕 등으로 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광경만 상상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사탄이다. 죽음의 고통을 실제 당하시는 것과, 당하시기 전에 단지 예상하시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실제 당하시는 고통 중에서 그 마음이 변해지시기를 '사탄'은 바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승리가 바로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신 말씀으로 극명하게 드러났던 것과 같이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바울이 그와 같은 죽음에 스스로 임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표명할 수 있었다[고전 15:31/빌 3:10,11].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예수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11]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인간이 창조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창조의 구조를 보면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맨처음 그룹[cherub]과 스랍[seraph]과 같은 영물들을 지으셨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셔 직접 부리시는 영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6일 창조" 때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다"[욥 38:7] 한 그 "새벽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바로 그들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들처럼 낳고 낳아짐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 창조에 의해 생겨난 독립 개체[생명체]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거룩한 천사들이나 악령들도 그런 "하나님의 아들들"[1:6/창 6:2]이라 칭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날으신다"[삼하 22:11]는 표현이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날고 말고 하실 일이 없으시지만 어쨌든 그런 정도의 필요성에서 이들 두 종류의 영물들을 지으신 것이다.

이 영물 가운데 ‘그룹’ 하나가 후대(後代)에 생겨날 '사탄'처럼 교만해져 결국 그 죄의 대가로 "밑이 없는 구덩이[無低坑, bottomless pit]"에 영원토록 갇히게 된다. 에덴낙원에서 인간[아담]이나 영물들이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그룹'이나 '스랍'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말씀하시는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시거나 말씀하실 때 모두 천사들을 통해서 하셨기 때문에 같은 이치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자연계와 영계의 대칭 국면을 고려할 때, 당시 스랍과 그룹 등이 창조될 때 먼저 그에 상응하는 당시의 자연계가 창조되었고 그 증거가 오늘날 화석으로 나타나는 거대한 공룡 종류의 창조가 아닌가 여겨진다. 한 "그룹[cherub]"의 범죄로 당시의 자연계는 파괴되어 창세기 첫머리에 나오는 '물'["수면(水面)에 운행(運行)"-창 1:2]의 출처로 확인되고 "흑암"과 "혼돈"의 원인으로 판명된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노아 홍수 당시 모든 동물들이 암수 한 쌍씩 노아 앞으로 나왔으므로 그들을 모두 방주(方舟, an ark)에 수용하였는데 거기에는 화석화된 매머드[mammoth] 같은 거대 동물은 없었으며, 또한 당시는 모두 초식 동물이었고 홍수 이후에 가서나 사람도 육식을 하고 동물들도 그러했던 것이다. 왜냐면 그 이전에는 동물들 역시 초식으로 정하신 까닭이다[창 1:30]. 만일 그렇지 않고 방주 안에 들어감으로 해서 동물들이 서로 잡아먹지 않게 막으시는 조처를 취하셨다면 그렇게 하셨다고 반드시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영물["그룹"과 "스랍"]들을 지으신 그 다음 창조가 '6일 창조'다. 이전 창조의 자연계처럼 먼저 자연계가 생성되고 그 최고 정점을 이루는 것이 인간 창조다.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양"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지으실 때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리고 그 다음 순서로 영혼을 지으셨다. 아담[첫 사람]의 코에 숨[生氣, the breath of life]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영혼이 조성된다.

사람 안에 이 영혼을 조성하심으로써, 자연계와 상칭(相稱)인 영계(靈界)를 지으시고 사람을 그 안에 살게 하신다. 처음부터 이런 영계[에데낙원]에서 살도록 하시려고, 인간[아담]의 피부는 매끈하기만 할 뿐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의 피부처럼 털북숭이가 아니었다.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면 광채가 피부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자연 우리가 아는 대로의 '옷[의복]' 역할을 하게 되어 있음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계 생명체의 종결이자 그 정점[climax]이고 영계[이 자연계에 대칭되는]의 생명체의 시작이자 출발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의미가 아니더라도 창조의 순서상으로도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그런 '그룹'과 '스랍'이라는 영물들이 창조된 과정도 이런 상칭(相稱) 원리에 따라 즉 양면성의 이치로 된 것임이 분명하다. 즉 6일 창조 이전의 창조["스랍"과 "그룹"이 창조되던 때]에서도 자연계와 영계로 구분되었으니 왜냐면 6일 창조 시초에 느닷없이 물이 등장하고 그 물 속에 땅이 [풀어져 있었든 어쨌든] 있었던 것으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덴낙원[동산, garden]을 지으실 때도 "에덴의 동편"이라고 했으니 이미 에덴이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 외의 것 즉 그 이상으로는 우리가 알도록 허용되어 있지 않다. 현재 이런 상태에서, 알아서 덕될 것은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왜 이러한 비극적인 한정된 초라한 육체[자연계에 속한]에 속해 있는지 그 이유만 알면 족하다. 이런 육체를 벗어나 신령한 몸을 입게 될 때 자연적으로 모든 것은 알아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아담]이 범죄하여 그 대가로 죽음에 이르게 되자[롬 5:12], 그 죽음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아오는 것이었으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어 있는 그 신령한 몸은 사라지고[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시한부 생명인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 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 두뇌의 지능적 용량(容量)도 신령한 몸을 입었을 때와 같을 수가 없다.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처를 삼으시고 우리 안에 상주(常住)하시는데 그래서 이 우리 각 사람의 육체를 가리켜 "성전(聖殿)"[요한복음 2장 19절]이라 하시고 "만인을 위한 기도의 집"(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이라 명명하셨습니다. 마지막 아담께서 자기 육체를 두고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입어 인간이 되는 것처럼, 이제는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이것이 "성령으로 출생함"(요한복음 3장 6절)의 의미]을 물려받는 모든 이들의 영광스러운 몸의 상태입니다[요한이서 1장 9절].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란 역어(譯語)는 '만민이 와서 기도하는 집'이란 뜻인데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모든 믿는 사람의 본이 되는 사도들의 삶은 먼저 기도고, 그 다음이 말씀을 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은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이 제사장은 제물과 성전을 온전히 갖추고 있습니다. 자기 몸이 "살아있는 제물"이요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심으로써 성전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이 성전의 이름이 "만인을 위한 기도의 집"인만큼 명실상부하게 "만인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서의 소임을 다함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 중의 하나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신 그대로입니다. 이는 하나님 의식,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과도 통하는 말이다.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

사랑의 보금자리가 가정이라는 말들을 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나] 어머니의 사랑이다. 가정의 의미가 이와 같다. 그런데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 화평이 아니요 칼을 주러 왔다. 내가 온 것은 아들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다"[마 10:34-39] 하셨다.

성경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했으니 가정 그리고 한 식구로서의 사랑의 연대를 강조하실 법한데도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한 인간으로서의 감성보다 이성, 지성을 앞세우심일까. 친소(親疏) 관계를 말씀하신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랑'이다. 가족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엄연한 질서가 있고 법칙과 원칙이 서려 있고 깃들여 있다고 말하면 놀랄 것인가. 사실이 그러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 한 대로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몸과 머리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처럼, 이런 본류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지류(支流)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을 알면 족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근거로 하지 않고 몸과 머리 관계에서 오는 자기 부인이 아니면 그 어떤 사랑이라 자처하는 것도 실제로는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 곧 자기중심의 한 형태일 뿐이다. 이기주의, 이기심의 발로에 그칠 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열심일 따름이다. 그 이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흔히 말하는 어버이의 사랑은 이런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로서의 의미만 있을 뿐이지 그것이 무슨 절대 가치가 아닌 것이다.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계시는[요이 1:9]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있으면[고전 6:19] 이는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막 11:17]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무릇 구원 얻은 자이면 모름지기 그 육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있음을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같이 선언하신 것이다[요 2:19].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있어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어 있으면 우리의 신분과 위치와 현재의 역할은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제사장이다[계 1:6].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사실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 중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모든 고난이니 곧 "교회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골 1:24]이니, 곧 희생 제물로서의 당연한 모습을 띰이다. 왜냐면 구원 받은 이후의 우리의 새 생명 자체가 그리스도요[빌 1:21]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이기 때문이다[갈 2:20].

왜냐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아 사는 이들 곧 하나님 앞에서의 "산 자로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기 때문이니 우리가 받는 고난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음"[빌 1:29]인 까닭이다. 이런 것이 우리 구원 받아 "새 생명"[롬 6:4] 가운데 있는 이들의 구원 받은 증거인 것이다. 따라서 세상 사랑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선언하신 것이다[요 12:25].

그러면 당신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는 것은 믿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속박당하는 일이라 할 것인가. 사랑이 무엇인가. 상대에게 속박당하여 우리를 형성하는 일이다. 홀로 있을 때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이를 스스로 자유로 여겼었다. 남녀가 처녀 총각으로 혼자 살 때에는 그러하였다. 그러나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룰 때에는 여자의 몸은 더 이상 남자의 것이 아니고 남자의 몸은 더 이상 남자의 것이 아니다. 서로가 자기 상대의 것이 된다[고전 7:4].

이것이 바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창 2:24] 의미다. 그것은 한 몸이 되는 이치요 우리는 "한 영이 되는"[고전 6:18] 이치에 매여 있다. 모두 공통적으로 '둘이 하나되는' 이치 아래에 있는 것이다. 둘이 하나됨이 사랑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구원 받은 자로서의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전 16:22]고 선언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랑"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다 주셨다[갈 2:20].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을 다 주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의 의미가 이러하므로 요한 사도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3:16] 한 것이다. 내 목숨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형제를 위하여 내어주고 나로서는 버리는 격이 되니 즉 "자기 부인"[눅 9:23]이 되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름이다. 이것은 물이 흘러내림과 같은 흘러내림이고 흘러줌이다.

흘러내리지 않으면 그 물은 고여 썩는다. 끊임없이 흘러야 하는 것이다. 받은 대로 받은 족족 흘러내려 주어야 한다. 흘러내린다고 그 물이 없어지지 않는다. 항상 채워져 있어 흘러내리는 동작만 되풀이할 뿐이다. 이와 같은 것이 자기 부인이다. 자기로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결코 '부인되지' 않는 비법(秘法)이다. 비법이라기보다 삶의 평범한 이치다. 이와 같은 삶의 이치대로 하지 않고 생명의 법질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은 자기중심이 되어 있고 자기 부인을 마치 사형선고나 되는 것처럼 여기고 기피하는 것이다.

누가 사랑을 '속박'이라 하던가. 오히려 '생명'이요 '환희'요 '평안'이요 '풍성함'이요 '부유함'이다. 둘이 하나됨이니 곧 '우리'를 이룸으로서 하나로 있을 때보다 더욱 넉넉하게 됨이다. 이것이 줌으로써 더 풍성히 받아 누림이다[눅 6:38/마 19:21].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는"[행 20:35] 일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거꾸로 살아온 것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이 정상인 양 착각해 왔던 것이다.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요한이 지적한 것과 같이 우리는 비로서 삶의 비결, 참 삶의 도리를 터득한 것이다. 즉 앞에서 지적한 대로 흘러감의 비결, 물의 순수함과 청순함을 항구적으로 보전할 수 있는 원리를 깨닫는 것이다. 곧 흘러감, 흘러줌이다. 억지로 붙들고 있으면 안된다. 송두리째 내보내어야 새로운 것으로 항상 채워진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신진대사(新陳代謝,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것이 대신 생김)다.

자기중심에만 익숙해온 즉 죽음밖에 몰랐던 우리에게 주는 충격이요 그리고 이를 받을 만한 이들에게는 신선한 청량수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살기를, 사랑하기를 배운 것이다[요일 3:16]. 영원히 사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우리는 항상 반대 방향으로만 생각해온 것이다. 청개구리[항상 그 어미의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반대로만 행동해 왔던 청개구리 어미의 자식들 앞에서 그 어미가 죽어가면서 하는 유언이 "나를 산에 묻지 말고 개천 가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으므로 자식들이 생각하기를 이번 한번만은 엄마 말대로 하자고 하여 개천가에 묻었더니 비가 오자 엄마 시신이 물에 떠내려 가므로 비가 올 적마다 그 일이 생각 나 청승스럽게 애곡(哀哭)을 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되는 민화(民話)에서]처럼 반대로만 행동해온 것이다.

이 사실은, 이 세상 자체가 생명과는 먼 죽음의 세계임을 자체 증명함이니 자기중심으로서는 영원한 삶이 유지될 수 없음이다. 죽음으로서의 세상을 사랑하니 그 결과가 죽음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세상과 함께 패망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상 모든 설명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비로소 깨닫고[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함 외에[요일 4:19] 아무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사랑은 곧 생명을 의미함이니 생명을 풍성하게 누림 그 이상의 뜻이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니 곧 생명을 사랑함이다. 생명을 사랑함 외에 별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필요한 것은 이런 악한 세상에서의 인내, 오래 참음이다. 그래서 성경은 참고 선을 행하는 것임을 자상스럽게 설명한다[롬 2:7]. 우리가 구원 받음은 열매를 맺기 위함인데[요 15:2/눅 13:7] 이렇게 결실하는 것은 "인내로써"[눅 8:15]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 이런 열매 맺는 "좋은 땅"[:15]의 특징을 가리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실 것이요 지체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요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다...우리는 뒤로 물러가 패망[perdition, destruction]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히 10:36-39]라 하였다.

이와 같으므로 우리의 고난 받음 자체가 사랑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골 1:24],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름'[:11]이라 하는 것이다. 사랑은 기쁨이고 평안이기 때문이다. 생명 그 자체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 하나님 의식이라는 말은 이 사랑을 의미함이다. 사랑은 그 사랑하는 상대를 항상 생각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의 상대를 봄으로써 자기 자신을 늘 보는 것이기에 자기 상대를 보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기에 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해야 마땅하다고 가르치고 명령하는 것이다[살전 5:17]. 우리가 마땅히 기쁨으로써 취할 자세이기에 그러하다. 성전이요 제사장이요 제물이니 모든 요소를 우리 스스로 우리 육체로써 다 구비하고 있음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명령을 내리심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풍성한 삶을 목적함이니 영원하고도 찬연한 미래를 기약함이다. 왜냐면 우리 신체의 구조를 보아서도 모든 지체의 각 부분이 두루 풍성하게 갖추어져야 몸이 건강체로서 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필수 불가결의 지체 각 부분을 찾아 맞추는 작업이 우리의 기도요 전도요 선행으로써 이루어지는 "사람 낚는 어부"[막 1:17]의 일인 것이다.

이런 모든 일을 기쁨으로 하지 않을 때 그것이 곧 율법행위로 얻으려는 구원임을 명심할 일이다. 모세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도 그런 것이 바로 율법 행위인 것이다. 사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전부 그런 '율법 행위로 얻으려는 구원'을 가리킴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율법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과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사랑 유무다. 즉 "율법행위로 얻으려는 구원"은 자기 구원이 유일한 목적이다. 사랑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상대를 위해 사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세상 종교가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모든 행위의 최종 목표가 자기 구원에 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자기가 자기를 위함[자기 구원을 목적하는 것을 포함해서]이야말로 생명에는 비상(砒霜, 비석(砒石)을 태워 승화(昇華)시켜 만든 결정체의 독약)과 같은 것이니 이에 유의할 일이다. 오직 자기부인만이 생명을 누리는 처방이요 영원한 "먹을 양식"[요 4:34]인 것이다. 왜냐면 생명이라는 것 자체가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한 몸이 됨, 하나됨에 있기 때문이다.

홀로 있을 때에는 당연히 자기 자신을 위할 수밖에 없으나 그 자기 자신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놓은 것이 바로 내 이웃[여기서 가리키는 우리의 이웃은 믿음의 형제들]이라고 생각하면 좋은 것이다. 그러면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자기 자신 대신으로 상대를 생각함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이웃"은 같은 공통의 머리를 모신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체의 구성원을 말함이다. 왜냐면 그것이 애초 피조물을 만드실 때의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함으로써 이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이런 비극과 부조리가 있게 된 것이다. 고로 이 세상의 모든 인생들이 다 내 이웃이 아니라 머리이신 하나님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공동운명체를 말함이다. 머리를 인정하지도 않고 머리에게 복종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이 조직의 구성원일 수가 없다. 오직 회개함으로써 이 한 우리[fold, 양 떼를 가두어 두는 곳] 속으로 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전도(傳道, 사람 사는 도리, 구원 얻는 도리를 전함)요 그들을 위한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다.

이런 자기중심의 세상에서 자기 부인으로써 일관하는 결과로 받는 모든 불이익과 당하는 모든 부당(不當)함은 우리의 지조(志操)와 절조(節操)를 시험하기에는 안성맞춤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신라의 박제상박제상(朴堤上)을 상기하게 된다. 볼모로 일본에 잡혀간 왕의 혈육을 탈출시키기 위해 왜의 땅에 들어가 성사시킨 후 자기는 잡혀서 갖은 회유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나는 우리 신라의 개 돼지는 될지언정 왜의 신하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하다가 참살당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이다. 현재의 위치가 그러하다. 장차 될 것이 아니라 현재 그러하다[요일 3:1,2]. 당당하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보내심 받아[요 20:21,22] 임해 있는 것이다. 볼모로 잡혀 있는 왕의 혈육을 탈출시키기 위해 왕명을 받들어 파송된 것과 똑같은 이치다. 박제상과 같이 그 당당함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당한 것과 같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핍박이다.

박제상은 그 의기(義氣) 하나로 죽은 것이지만 우리는 당당히 이 우주 삼라만상의 상속자로 주인이니 주인으로서 주인 행세를 해야지 현재는 [그들도 회개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으나 아직은 회개를 아니하므로] 일개 하인배와도 같은 그들의 일시적인 위세에 못이겨 굴복한다면, 아무 대가도 없이 오직 의를 사랑한 까닭에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린 한 '인간' 박제상만도 못한 것이다. 우리는 명색이 하나님의 아들, 우주의 주인이 아닌가. 그러므로 일언이폐지하고, 믿지 않는 까닭, 이밖에는 없다.

사랑과 생명, 이 두 가지 빼면 그리스도의 구원에 남는 것은 없다.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요 사랑은 반드시 사랑의 법칙을 따라 자기 부인이 그 생명이다.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보아 너는 나를 생각하고 나는 너를 생각하여 나는 너의 뜻을 행하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주고 나 역시 너를 위해 사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복종하는 것이고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의 상대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니 곧 우리로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나 위하여 죽으심으로써[갈 2:20] 나만을 위해 사시는 영원한 삶이심을 확증해 보이신 다음이다.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을 단순히 인류 위한 고난 받으심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라 바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한 죽으심, 나에게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주신 것으로[갈 2:20] 성경이 특별히 명시하고 있는 사실에 우리가 반드시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밝히고 있는 대로 반드시 거기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신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여기서의 핵심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이 사실에 있는 것이다.

이 핵심되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어린 아이 같이 되고"[마 18:3] 아니 되고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3] 하셨으므로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에 대해 주목을 하지 못하고 있어 단지 우리 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니까 단지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은 틀림 없다는 식으로 오해함으로 인하여 실제로는 구원되지 못하는 비극적인 현실을 감안할 때 보통으로 생각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나를 극진히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죽으시고 그리하여 당신 자신을 모두 내게 바치시고 주신 가장 아름다우시고 고우시고 미쁘시고 늠름하신 가장 완전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마치 나와만 계시는 것처럼 1년 365일 1일 24시 나와 함께 계시니 그 사랑이야 가히 어떤 것인지 가히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랑은 아담 이래 그 어느 때 어느 인간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고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러하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고 그것도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으니 우리 각자 나름이다. 즉 각자가 주님께 어떤 자세로 임하는지 거기 달려 있어 좌우되는 사랑의 강도(强度)이다. 즉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듯 하면 제대로 된 사랑이라 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도저히 바라볼 수 없는 일이 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가장 이상적이고 완벽한 우리의 위치는 '엄마 품속의 아기'와 같음이기 때문이다. 품속의 아기는 항상 엄마의 얼굴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38] 하신 것이다. 부모의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숭고한 것이 없으련만 이상 설명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는 다 미치지 못할뿐더러 여차하면 장애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부모자식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을 높이 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뿌리로 하여 생긴 줄기요 가지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정함이 없고 사랑함이 없이 제아무리 그런 인간 사랑을 강조해보아야 알갱이 빠진 빈 껍질만 붙들고 있는 꼴일 뿐이다. 그래서 이기적인 것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 자체가 무조건 선(善)이 아니고 의(義)가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뿌리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건물이 아니고는 그 건축물이 무너지기는 시간 문제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가까이 하실 것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가까이하셔서 우리를 산 자로 만들어주셨다. 이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니 반드시 거기 상응하는 나의 반응을 기대하심이었다. 무엇을 기대하시는고 하니 내가 믿어야, 회개해야 즉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알았으니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작정해야 그래서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하기로 다시 말해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기로 결단해야 그 구원이 내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고' '받음'의 관계, 일방적이 아닌 쌍방의 교류 관계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니 이를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가까이 하실 것이라"[약 4:7]이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 사랑함으로써 그 뜻을 행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은 다시 내게 가까이하시고 즉 그 구원의 역사가 지속되는 것이고 따라서 내가 가까이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가까이하시지 않는다는 뜻이니 이는 그 구원[우리를 위해 이미 이루신]의 효험이 내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냐면 우리의 구원["육신의 무할례와 우리 자신의 허물로 죽은"(골 2:13/엡 2:1,5) 나를 살리셔서 내게 "새 생명(롬 6:4)의 힘을 주신 그 힘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께 가까이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을 가리킴]은 우리가 믿음으로써 이루어졌으나, 그것이 사랑이 핵심이므로 하나님 일방적으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내 스스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빌 2:12] 것이다. 따라서 천국은 스스로 쳐서 빼앗아 차지하게 되어 있다[눅 16:16/마 11:12]. 우리가 받는 고난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빌 1:29] 고난으로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받는 것이니 그리스도 때문에 피동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고난을 기피하여 핍박을 유발할 일을 아무 것도 아니하면 고난 받을 일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니 그 뜻에 순종함으로써 구원 받기 위해[왜냐면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가 성경에 있으므로-빌 2:12] 고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음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교회, 내가 나 자신처럼[왜냐면 모두가 한 몸의 각 지체들이니까] 사랑하는 "교회를 위하여"[골 1:24/고후 11:28] 고난 받음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아도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지 아니하면"[골 1:11] 그 고난이 자기 구원을 위해 받는 것으로 낙인 찍혀져 그 고난 자체가 자기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처럼 되므로 아무 의미가 없을뿐더러 구원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면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인데 입으로는 아무리 믿음으로 얻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행위로써 구원 얻으려고 하는 것이 명백한 까닭이다. 구원 얻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구원 얻은 자로서의 마땅한 열매를 맺지 못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구원을 얻지 못함 즉 자기 구원을 이루지 못함으로 연결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구원을 이룸'이 목적이 아니니 왜냐면 구원을 이미 받은 까닭이다. 구원을 받은 그 생명력으로 자기의 산 자로서의 본분을 다함이니, 만일 이 본분을 다하지 못할 경우 그것은 필시 자기 중심 때문이므로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이나 아담이 바로 이 "자기를 위해 살고자"[고후 5:15] 함에서 범죄하여 죽음의 파멸을 맞은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산 자의 세계에서의 질서를 말하기 때문이다.

질서 없이 무슨 집단이든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무질서가 얼마나 심각한 폐해를 낳는지는 이 세상 질서를 보아서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오직 차이는 영원한 생명 세계인 천국에서는 그것이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율적이라는 데에 있다. 즉 모두가 법 자체가 스스로 좋아서 그것을 사랑해서 그 법질서를 지킴이다. 이 세상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강제력으로 비쳐짐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 사회를 기뻐하실 리 없다.







보기 나름 인식하기 나름이니 항구적인 실패로 보느냐, 악착 같은 끈기로 보느냐, 후자로 본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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