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27)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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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孤兒]"

지금까지 사랑이면 사랑이지 별 것이냐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왔고 스스로도 사랑해왔다고 생각했으나, "사랑이 하나됨이요 그 핵심이 자기 부인이요 사랑의 법칙이 곧 생명의 법칙이라" 하니 복잡하게 생각할지 모르나, 이를 주님께서는 아주 간단히 설명하셨으니 곧 사랑은 '나를 기준하여 남이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그것'이다[마 7:12].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 같이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라고는 없으니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 인간을 이지적인 존재로 아예 만드시지를 않았을 것이다.

양심을 주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랑에 대해서나 이웃을 위하는 것에 대해서나 양심으로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로서 사랑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뜻과 계명과 그 말씀을 능히 알아 듣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공연히 자기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말씀을 곡해하는 것은 무지해서 그렇다기보다 의식적으로 그 말씀을 싫어하기 때문에 피해 가기 위한 변명이라 보면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 간다고 해서 하나님의 정하신 모든 것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역지사지와 같은 의미이다. 상대의 위치를 나의 위치로 바꾸어 놓고 상대의 처지를 생각함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그리고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하는 것도, 내가 주님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때 과연 내가 무엇을 원하고 바라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바로 그대로 하면 되는 것뿐이니 어려운 것도 복잡할 것도 애매 모호한 것도 없다. 엉뚱하게 내 식(式)대로 내 위치에서만 주님을 위한다고 하고 사랑한다고 하니 웃기는 일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오해하고 있다. 이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해라기보다 자기 욕심의 발로일 뿐이다. 자기 욕심에 맞추어 상대를 대하는 순수한 이기심 곧 자기중심이다. 가령 특정한 날 특정 장소에 나가 특정된 집회에 참석하고 특정 의식을 따라 그 날 하루를 보내는 것으로써 '하나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그러하다. 사람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사랑하면 되는데 사람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스스로 구분해서 생각함으로써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그 결과는 다름아닌 주님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비극 그대로다[마 7:21/25:45].

주님께서 "너희를 고아(孤兒)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다시 오겠다"[요 14:18] 하셨는데 이는 물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나 하나님되신 위치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생각해 볼 때 모든 인간 전 인류가 바로 그런 고아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그 고아들에 대한 어버이로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고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함과 같이 내가 너희를 거두어 들이려고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히 아니하였다"[마 23:37] 하신 데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 새끼를 모으려 하는 암탉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이요 자식들을 고아로 만들어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마음이 하나님 마음이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 곧 그 마음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복음 전도이고 "하나님의 나라 전파"[눅 9:60]이고 그리고 이를 위해 즉 하나님의 심정이 되어 만인을 위해 소원하며 매달리는 것이 제사장의 기도이다. 다시 말해 그와 같이 새끼를 모으려 하는 암탉의 마음, 자기 자식을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으려는 절절한 그 어머니의 마음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보내심 받은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이 세상 지내지 않으면 그 자신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무시함이 되고 이는 그 스스로 버림 받음과 같은 의미가 된다는 것이야 우리의 양심과 이지(理智)로 판단해도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이런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 사들이신 이들만 들어가는 천국에 감히 들어갈 마음이나 먹을 수 있으리요. 이는 탕감해 준 신하의 빚을 왕이 취소해버렸다는 비유 말씀에서 확인되고 있다[마 18:34].

항상 강조하는 바이지만 '구원'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왜 은혜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단순히 우리 피조물을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영생하도록 구원해 주심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첫 사람 아담도 범죄하기 전에 미리 강제하셔서 범죄하지 않도록 막으시면 될 일이다. 사탄도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것이 애처로우시니 처음부터 범죄하려 할 때마다 얼마든 간섭하시고 막으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상 두 가지 예에서 보듯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이미 확정적으로 선례가 되어 있어 더 이상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그 누구도 구원될 수가 없다. 여기서 많은 오류와 이단이 속출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믿음으로 순수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한마디로 새 창조이기 때문이다.

새 창조로 우리를 새로 만드셨으니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 지으셨으므로 그 지으심을 받은 그대로 즉 애초 아담을 창조하셨던 그 목적대로 살라고 하심이다. 아담은 그 목적에서 벗어남으로써 쓸모없이 된 것이다. 즉 우리의 구원은 은혜로 우리를 새로 창조하신 대로 하나님 앞에서 산 자로서 살라고 하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사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의 구원 받았음을 "확증할"[고후 13:5] 수가 없다. 즉 구원 받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둘이 하나됨으로써 되는 구원이다. 그렇다면 더욱 더 주님과의 사귐, 교제로서의 삶이 필수가 된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이 나로 하여금 단지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한 필요한 구조적 장치로서 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인격 대 인격간의 하나됨이니 즉 사랑이다. 사랑은 삶이다. 그리고 영원불변한 것이니,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변할 수가 없는 매양 한 모습 한 모양의 시종일관하는 삶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토록 경고에 경고를 거듭하는 이유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바로 그 같은 삶을 살라는 것이다. 산 자로서 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자일 수밖에 더 있는가.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와 같은 죽은 자일 뿐이다. 그렇게 죽은 자가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과거처럼 나 혼자 살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주님과 함께 하나로 되어 있으니 주님과 하나로서 사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왜냐면 갑과 을이 둘이서 하나됨에는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나의 구원을 이룸"[빌 2:12]이다. 즉 반드시 주님과 함께 살라는 것이다. 산 자가 되어 있으니 산 자답게 충실히 살라는 것 이외에 달리 아무런 뜻이 없다. 살되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니 그야 당연히 주님의 뜻대로 즉 순종해야 주님과 함께 살고 하나로 사는 것이 아닌가.

"항상 복종함"[빌 2:12]으로써 구원을 이룸이니, 복종하지 않으면 산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면 생명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두 그 한 몸의 각 지체로서의 역할로 사는 데에 있음이다. 산 자가 아니라면 죽은 자이다. 죽은 자이면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다는 말이 된다.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지 누가 나를 대신하여 살아 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주체는 나 자신이다. 주님도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주인이다. 따라서 내가 들어 구원을 이루고 못이루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말하자면 나를 살려 주셨으니, 살리시는 것 죽은 자를 산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몫이다. 이렇게 내가 산 자가 되는 데에는 나 자신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죽은 자이므로 죽은 자가 무엇을 한단 말인가. 따라서 하나님 역시 이 죽은 자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시지도 바라시지도 않는다. 그래서 거저 주시는 것이고 나는 그 거저 주시는 선물을 값없이 받는 것뿐이다.

창조가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 단독 행위인 것이다. 거저 받기만 하면 되고 그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일 즉 하나님의 새 창조 차원에서 하신 일을 믿기만 하면 되니 은혜다. 나의 일한 것 없이 거저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믿으면 되니 은혜이고 또한 믿음으로 얻는 구원 곧 산 자됨이다. 그런데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고 아버지께서 인도하셔야 즉 이끄셔야 누구든지 비로소 내게 올 수 있다"[요 6:44,65] 하셨으니 이는 다름아니라 앞에서 말한 대로 세상과 나 자신의 죽음의 실상을 깨닫는데 있음이다.

내가 죽었으니 당연히 나를 위해 사는 것은 완전히 종료되고 일절 단절된 것이다. 바로 그 상태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니 나는 죽었으므로 일절 나 자신을 위해 살 명분도 이유도 필연성도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 죽음의 의미를 따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나 자신이란 것은 이로써 완전히 끝난 것이다. 바로 이런 상태에서 그리스도께 나아와 '사는 자'가 되어 있으니 즉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루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

바로 이 모습이 그리스도께 정상적으로 나온 상태이다. 이렇지 않고는 주님 말씀대로 그 누구도 그리스도께 나올 수 없고 나왔다고 하나 나온 것이 아닌 것이다. 구원과는 일절 무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바 그리스도의 구원은 '얻는 것[取得]'이 아니라 '사는 것[生活]'을 말함이다. 단순히 그리스도를 얻음으로써 종결되는 것이 아니니 얻었어도 내가 소홀히 하고 무시하고 멸시하여 버리면 그래서 그 가치를 인정 않으면 그만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내 자신 나의 구원을 이루어야 함과 같이 "그리스도를 얻는"[빌 3:8] 것도 이 세상에서는 부단한 연속 행위라 할 것이다.

얻었으면 한번 얻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어째서 연속적으로 그렇게 하느냐 하겠지만,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되는 관계에서 갑이든 을이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를 이루어 있는 상대를 위해 사는 것이므로, 그리고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어 있는 성격상 을이 갑을 위함으로써 갑이 을을 위하게 되는 동시성의 특성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면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해 사시는 그런 관계가 형성되므로 이는 바꾸어 말해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 적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된다. 왜냐면 나를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 곧 생명력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기계적인 것은 한번 그렇게 장치가 되면 연속적으로 자동화가 되어 그대로 움직여지는 것이지만, 삶 자체가 갑과 을의 사이로서 둘이 하나되어 있을 때는 사는 것은 한 때만 살든가 또는 간헐적으로 살다가 중지하다가 다시 살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인즉 나는 의식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순간순간 그리스도를 얻음이요 나의 구원을 이룸이니 그리스도 구원의 생명력이 나의 그렇게 움직임과 동시에 역사(役事)하시는 까닭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우리 구원의 특성인 것이다. 이 세상은 시험의 무대이어서 우리의 행동 여하에 생사(生死)가 달린 것이므로 [사탄의 시험에 넘어가면 죽음이요 시험을 이기면 살아남는 말 그대로의 전쟁 상황이기에] 살지 않으면 죽는 것이요 따라서 죽는 것이므로 보통으로 넘길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그 숱한 경고가 있는 것이다. 영생의 가치를 다 아는데 누가 감히 버리겠느냐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영생의 가치가 단지 삶을 누리고 생명을 향유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아무도 그것을 버릴 자는 물론 없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부인으로 표현되고 그것과 직결되어 나타날 때, 자기 부인을 하지 않고 자기중심 그대로 나가기 위해 엉뚱한 해석으로 즉 에덴낙원에서처럼 하나님을 말씀을 억지로 비틀어 자기 구미에 맞게 풀이하여 나가는 경우 그 때는 멸망에 이른다 하는 것이다[벧후 3:16]. 왜냐면 자기 부인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을 말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죽음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불신자보다 더 악한 "믿음 배반"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딤전 5:8)라 한 것은 오늘날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성경보다 더 믿는 우리 거의 모두에게 가히 폭탄선언이라 할 수 있다. 무턱대고 "믿음, 믿음", "은혜, 은혜" 하여, 행함을 강조하면 마치 율법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나 되는 양 '율법주의자'로 매도하는 오늘날의 "배도[背道]"[살후 2:3] 현실에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얼마나 그리스도 복음에서 멀리 떠나 완연하게 "다른 복음"으로 변질되어 버렸는지 그 단적 증거라 할 수 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교회에서 돌보는 나이 많은 과부들 중에 만일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孝)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도록 하라"고 한 다음에 한 경고다. 다시 말해 당연한 사람 도리로서 효를 다하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고 일반적으로 말하는데 성경이 당연히 이에 동의하는 것은 이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런 인간 도리가 우리가 아는 구원 얻는 믿음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확정한 것이니 어찌 충격이 아닌가. 어찌 효뿐인가. 사람으로서 할 도리를 못할 때 그것을 성경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 하고 그것을 "죽은 것"이라 경고하는 것이다[약 2:20,26]. 사람으로서 할 도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릇 인간이면 다 장치해 두신 양심을 따르고 그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행하는 모든 것이다. 애초 사람을 지으신 의도대로 행함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람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선(善, 무릇 좋은 것)이요 의(義, 모든 올바른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대뜸, "그것, 무슨 소리!" 할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효자, 효녀가 있게 마련인데 그러면 그들 모두가 얼마든지 천국에 간다는 소리가 아니냐?" 할 것이다. 실상을 말하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 누구도 인간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라는 바탕 위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선이요 의이다. 이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와 하나되지 않고는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이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인간이 일절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다시 말해 우리 구원은 그런 모든 선과 의를 행할 수 있도록 처음에 완벽하게 인간을 창조하셨던 바로 그 상태대로 되돌려놓으시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써 이 상태에서 영구적으로 벗어난 것이다.

올바른 상태에서야 의와 선을 행할 수 있는데 그 기본 바탕을 범죄로써 상실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행함 즉 율법행위로써 구원 받을 자가 아무도 없다고 성경이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구속(救贖)을 받음으로써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위치해 있던 그 원상태로 회복되었은즉 당연히 의와 선을 행할 것이 요구되고 있음이다. 만일 이런 행함이 없을 때는 죽은 믿음, 헛 믿음이라고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대로 구원과 일절 관련 없는 것이다.

인간이 보기에는 물론 훌륭한 효자 효녀다. 그러나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 면전에서는 그런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함이 구원으로 연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생사(生死) 즉 영원히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오직 중요한 현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사는 자로 지으신 것이다. 따라서 영원히 살지 못하는 현 시점에서 인간이 아무리 인간적 표준을 따라 도덕적으로 무흠하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이니 왜냐면 여전히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살게 되어 있는 바탕에서 다시 말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위치에서 그런 선행을 이루어야 그것이 제값을 받고 의미 있는 것이 됨이요 구원 받은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런 것이 없을 때 믿음에 있는지 그 자체부터 의심할 충분한 사유가 된다.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즉 영원히 사는 위치에 있다고 하면서 그런 선행이 없을 때는 그 자체 즉 구원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허위가 됨이다. 왜냐면 구원이 이루어진 바탕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영생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답게 즉 구원 받은 자답게 사는지 여부가 현안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우리 위해 죽으신 목적이 우리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음에 있기 때문이다[고후 5:15].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자연적으로 그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새 계명"을 따라 이웃 사랑 곧 선행으로 이어지는 것이 필연이다. 이 이웃 사랑의 목적이 또한 뚜렷하다. 즉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건져 구원해내기 위함이다[벧전 3:1]. 하나님의 표준과 죄 많은 인간의 표준이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사람 사는 도리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비결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에 있다. 즉 자기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롬 14:7/갈 2:20/빌 1:21]. 가령 효는 사람 사는 도리 중 하나다. 그러나 차이는,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당시 본시 그대로의 완벽함이 그 보시는 기준이고 인간은 단지 그 흉내라도 내게 될 때 즉 자기 나름으로 최선을 다하면 그것을 최상으로 쳐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자나 전자나 '사람 도리'를 다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말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본질로 따질 때 하늘과 땅 차이로서 차원부터 달라진다. 다시 말해 인간은 아무리 그 최선을 다하지만 그 최선 자체[종교적이든 아니든]가 하나님 바라시는 전부가 아닌 것이다. 오직 그 바탕이 바른 것이어야 하고 이 올바른 바탕은 하나님의 새 창조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인간의 모든 의(義), 선행이 헌 누더기 같다고 하신 것이 그 때문이다.

부모가 그 자식을 양육하고 훈육할 때 우리는 부모의 은공을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차이를 설명하여,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는데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하고,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지만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신다"[히 12:9,10]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직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하시는 것과 대조하였으니 인간은 오직 그 자식만을 위함이 아니라는 결론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 유익을 위하신다는 여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이 종과 상전과의 관계를 말할 때 종이 그 주인을 위하여 주님 섬기듯이 한다면 주님께로부터 상급이 있다고 가르침과 같다. 성경에서 "상[賞-reward]"이 있다고 말하면 구원 외에 가외로 특별히 받은 상급인 줄 알고 있는데 그 "상"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고 있으니 곧 종이 그렇게 주인을 주님 섬기듯이 섬긴 대가 곧 상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상속(相續) 받는 것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골 3:24].

즉 특별히 받는 상이 아닌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마 7:21] 자체이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에게서 상속 분을 받는 것은 아들이기 때문에 받는 몫이다. 아들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것을 상속 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됨은 하나님의 아들됨에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받는 상속이니 상속 받지 못하면 아들이 아니라는 그 뜻이고 이는 우리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함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인데 그런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그 결과 얻는 것이 하나님의 상속이라면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당연히 그런 행함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런 열매를 당연히 맺을 줄 알고 약속하는 것인데 그 열매가 없을 때는 상속 받지 못함 즉 하나님의 아들되지 못함 즉 구원되지 못함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이 차이를 두고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 그런 행함이 없을 때 그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서 선지자 노릇도 하고 능력도 행하고 귀신도 쫓겨가고 했지만 결국 그런 행함으로써 온전한 결실을 못했기 때문에 그는 멸망에 들어갈 수 없고 심판자이신 주님으로부터 "불법을 행함으로써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7:23/25:41]는 선고만 들을 뿐이다.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 했고, 형제 사랑이 없는 자는 사망에 처해 있고 생명 가운데 있지 않으며[요일 3:10], "음란한 자, 우상 숭배자, 간음하는 자, 여색을 좋아하는 자, 남색[동성행위]하는 자, 도둑, 탐욕이 있는 자, 욕하는 자, 착취하는 자들(고전 6:9) 및 점치는 것,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질시하는 것, 술 취함,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갈 5:20,21)에 해당하는 모든 불의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성경의 선언을 따라 다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롬 8:13] 자는 회개하여 그 모든 행위를 버리지 않는 한 구원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은 억지 주장하기를 이 세상을 끝내고 천국에 들어가면 온전히 순종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영계인 에덴낙원에 있었으니 천국과 똑 같은 주위 환경 속에서 삶을 누렸던 것이나 결국 순종치 않고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닌가. 고로 그런 주장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천국에 가서도 여전히 범죄할 것이라면 그래서 천국에 살다가 범죄하여 불 못에 들어가는 것보다, 아예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이 세상에서 모든 일이 치러지는 것이 합당하다.

천국에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다고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까닭이니 그래서 마지막 심판이 있음이다. 심판으로서 모든 것을 가려지고 걸러지고 추려지고 솎아지는 것이며 그 후로는 다시는 이런 선별 작업이 없음은 명백하다. 천국에 있으면서 범죄하는 경우 죽음에 처해지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의 경우 하나만의 사례로도 충분한 것이다. 다음부터는 그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걸러내지는 그런 차례이다. 에덴낙원이라는 극락[極樂] 속에서도 범죄했으니 그런 것은 아담의 경우 단 한번만으로 족하고 이제부터는 고난 가운데에서 범죄 여부를 지켜 보게 되는 차례이다.

이 세상에서 순종하면 순종하는 것이고 불복하면 그것은 영원히 불복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취급되어 결정된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깨끗이 해결된다. 더 다시 이 세상과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는 존재하지 않고 용납하시지 않는다. 지금은 새 창조의 시기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하나님의 작업장(作業場)인 고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첫 창조 곧 6일 창조가 혼돈과 공허, 암흑 가운데서[창 1:2] 진행되었던 사실을 상기할 일이다. 바로 그와 같다.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는 사탄 및 첫 사람의 범죄 행각으로 와해 아니면 새 창조라는 극단 상황에까지 내몰린 것이다.

간교한 사탄의 술책으로 하나님 창조의 정점(頂點)이라고 할 인간이 범죄 타락하자 그런 위기에 직면한 것인데, 하나님의 지혜는 이를 타개하여 새 창조로 임하신 것이다. 아직도 하나님은 일하시는 중에 있고[고후 6:1] 따라서 새 창조는 진행 중임을 잊지 말 일이다. 하나님 편에서의 모든 일 곧 창조에 관계된 일은 끝났고 완료되었으나 사람 편에서의 일은 아직 진행 중인 것이니 사람은 육체인지라 시간 간격을 두고 생멸(生滅)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구원 받을 사람들의 정원(定員)이 채워져야 하고 그 숫자가 다 차야 하는 것인데, 이제 그런 종말도 가까워 오고 있다.

물론 이런 구원 받을 사람은 모든 것을 미리 내다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택하심으로 나타난다. 이제 그 모든 것이 미리 예지[foreknowledge]하신 그대로 되어져 종결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 택하심은 하나님께서 임의로 누구는 멸망하고 누구는 영생하고 하는 식으로 결정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각 사람을 미리 아시는 그 지식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결단코 무리가 있거나 억지로 되거나 강제나 간섭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이웃을 사랑하여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신 원래의 목적에 맞추어 모두가 다 행복하게 사는 삶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멸망에 이르지 않는 것으로 백 번 믿어도 좋다. 고로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누구나 하나님께 오라"이다. 오는 자는 결단코 내어 쫓지 않으리라는 약속이 만세반석으로 확립되어 있다[요 6:37]. 그러나 여하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그와 같은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자에 한하므로 "아무나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요 6:44,65] 하신 것이다.

이 사실은 택하심을 부르심과 구별해서 말씀하신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적다고 하신 것이다. 먼저 믿는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믿는다고 불리한 것도 없다. 부르심을 받음과 동시에 택하심을 받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인데 그래서 베드로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고 경고했다. "굳게 하는 택하심"이므로 그 택하심이 나에게 달려 있다는 증거다. 즉 나의 굳게 하고 하지 않음에 달려 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이를 미리 아셨다는 것뿐이다.

이 경고는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 모두가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결과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임의로 정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우리가 굳게 해서 될 일이 아니므로 굳게 하라고 굳이 경고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오는 자를 내쫓지 않으신다는 것도 우리 스스로 물러가지 않는 한 주님께서 임의로 쫓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된다.

심판대에 이르러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나를 떠나라" 하시는 것은 당사자들이 이미 주님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나타냄이다. 떠나 있으면서도 그 떠난 줄을 모르고 그대로 주님께 속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가 있게 된다. 주님 앞에서의 그런 식의 대답[마 25:44/7:22]은 항변인데, 그러나 이런 모든 항변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눅 13:27]가 된다.

마태 복음은 이상 사실을 두 번에 걸쳐 제각기 다른 주님의 비유를 들어 소개하고 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되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 각종 능력을 행하였다고 항변할 때 그런 능력을 행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으시고 오직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하시는 것이다. 불법을 행했기 때문에 멸망이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실 때에도[마 25:32]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하신다고 했다.

이 모두 성경에 명시된 대로의 "하나님 백성에 대한 심판"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하는 심판"인 것이다[벧전 4:17/히 10:30]. 심판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자기의 구원 받음을 확신하고 의심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그래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면서도"[빌 3:18] 여전히 교회에 남아 있기 때문에 심판대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실태를 본인도 모르고 있게 된다. 이런 사람들을 교회에서 축출할 수도 없으니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은 외부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개별적으로 그들을 관찰하면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이 분명하여 자주 그들을 상대로 경고를 해주나 당사자들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므로 그리고 두드러진 비행이 드러난 경우는 아니므로[] 본인님 말씀대로 하면, 아무나 누구나 그리스도께 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고 이끄심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배워야 오는 것이니 그것이 첫 단계다. 그래서 이것이 부르심을 받음이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이들 가운데 많이 탈락하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고 택하심을 받은 이는 적다고 하신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임의로 정하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라면 그런 부르심과 택하심이 구별될 리가 없고 굳게 하라는 경고를 할 리도 없다. 그냥 처음부터 불러내시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분명 그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가르치시고 불러내시고 이끄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던 그 애초의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불복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이는 철두철미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여되어 있음을 입증함이다.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손쓰실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변경하도록 하신다면 그것은 간섭하시는 것이 되어 버리고 강제가 된다. 그럴 바에야 자연계의 동식물처럼 인간을 기계적인 존재로 만드신다면 될 일이다. 그런 것으로 만족하실 수 없다는 사실이 인간을 창조하심으로써 입증이 된 셈이다. 친히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영혼을 만드시니 친히 그 숨으로써 만드셨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의 본질을 소재(素材)로 하여 영적인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육체가 있으셔서 우리와 같은 호흡기관으로 날숨 들숨을 만들어내신다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지닌 우리 인간을 기준해서 설명하자니 그런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호흡하지 않으면 죽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그러한 숨쉬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생명과 관계된 것이므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생명의 특성이 되는 것으로써 영혼을 지으셨다는 뜻이어서 영이신 하나님의 특질과 같은 것으로써 영혼이 조성되어 있음을 말한다.

즉 인격성을 갖추어 있음을 뜻하고 이 인격성의 특질이 바로 자유 의지, 자유 선택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택하신다는 것은 그렇게 미리 아신 피조물이 그 온전한 자유 의지와 선택권을 구사하여 구원에 이르는데 아무 지장이 없도록 길을 정리해 주시는 것을 말함이 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미리 아심을 따라 아무리 그런 조처를 취해주신다고 해도 그것이 무용지물이므로 그런 택하심을 따른 별도의 조처와 같은 것이 필요 없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이치는 지금은 우리의 한정된[자연계에 속한] 지능으로는 파악하지 못하나 신령한 몸이 되어 천국에서는 우리에게도 대낮 같이 밝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바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등의 일은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했듯이, 주님께서 그 마지막 심판 때 믿노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 내리실 주님의 멸망의 선고는 한결 같이 "불법(不法)을 행함", "행악(行惡)"이 그 원인임을 명백히 하셨다.

다시 말해 자기중심의 비참한 결말이다. 자기 부인이 없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주님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신 그대로다. 이 자기중심이 모든 불법, 불의의 뿌리인 것이다. 자기중심은 사랑 없음이다. 사탄이 바로 그러했고 이 악한 자에 속하였다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가인이 그래서 아벨을 죽였다. 이유는 아무 것도 없고 단지 "자기 행위는 악하고 아벨의 행위는 의롭다"[요일 3:12]는 그 시기, 질투심뿐이었다.

남이 잘 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 여기는 것이 자기중심의 지독한 속성이다. 가인으로 말미암아 입증된 것처럼 살인 근성인 것이다. 자기 왕국이니 이 왕권에 도전하는 자는 그 누구도 용납이 안된다. 고로 자기중심과 자기 부인은 상극으로서 양립할 수가 없다. 양자택일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그와 같은 말씀은 장차 오늘날과 같은 현상이 있을 줄을 미리 내다 보심이다. 즉 소위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수긍하기만 하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라 착각하여 그 믿음이 수반되는 "참고 선을 행함"[롬 2:7]이 없어도 구원된다는 안일한 생각에 젖어 "배도(背道)"[살후 2:3]의 온상(溫床)을 이루고 있음을 꿰뚫어 보심이었다.

물론 그 날 심판 때 일반 불신자들도 그들의 불법, 불의, 행악으로 인하여 즉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대하여 멸망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고후 5:10] 했기 때문이다. 양자의 차이는 이렇다. 즉 전자는 자기중심을 버리고 자기 부인이 얼마든지 가능한 믿음을 지니면서도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킬"[고전 9:27] 생각은 않고 그냥 자기의 "육신의 생각"[롬 8:7]대로 자신을 방임한 결과다.

반면 후자는 이제 그리스도 오신 후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그 구원의 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데도 구원하시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양심의 소리도 귀 막아 버린 탓으로 그 스스로 구원에 들어오지 않은 책임을 물음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리스도께 올 생각을 않은 것이나 그리스도께 요행히 오기는 했으나 중도에 시험과 유혹에 이끌려 그 처음 사랑과 믿음을 저버린 것이나 악을 행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므로 차별이 없게 된다. 그래서 결론이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구원을 얻는 것이다[2:7].

그러면 불신자도 만일 참고 선을 행하였다면 구원을 얻는 것인가 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그들은 아무리 참고 선을 행한다 해도 기본적으로 죽은 자이므로 죽은 자가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그런 사람이 행했다는 선이라는 것은 실은 선이 아님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영생을 얻기 위한 종교 신념으로 그렇게 해도 역시 자기중심이기는 마찬가지다.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기 구원을 위해 행한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행동일 뿐이다.


겉으로는 착한 일이라고 해서 외형만으로 판단하는 세상 사람의 이목에는 선행으로 비쳐졌지만 그것은 자기 구원을 위한 한낱 포상을 바란 행위였을 뿐이다. 또 양심을 따라 선을 행함이 마음의 편안과 즐거움을 가져오기에 선을 행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시종일관해서 선을 행하는 것이라기보다 일시적 기분을 따라 그리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의 선행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과는 무관하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심판을 면하는 "참고 선을 행함"이란 반드시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니, 세상에서 자기 구원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구원을 받은 사실을 아는 사람밖에는 없다. 세상 그 어느 종교가 이런 교리로 그들을 가르쳤는가. 이 세상에서 구원 받는 것으로 가르칠 그런 종교는 없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하게 되면 다시는 구원 받기 위한 일체의 종교 행위를 중단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거짓 속임수로라도 그런 "이미 구원됨을 선언하는" 종교란 없는 것이다. 신도들이 자기네 종교를 찾지 않는다면 그 종교 자체가 사멸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미 구원 받음을 선언하고 있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가? 처음부터 말해온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서 그 현격하게 다른 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 종교 중 그 어느 것도 그 교주(敎主)를 사랑하라고 하거나 또는 신을 사랑하라고 강조하지 않는다. 구원이 오직 목표이고 그 구원을 위해서만 선행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은 이웃 사랑으로 통한다. 머리를 사랑하고 따라야 각 지체는 자기 이웃들인 모든 지체를 위해 자기 몫을 따라 차별없이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함이 전제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라면 자기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라 편파적인 것이 되거나 자기의 호불호를 무시하고 똑 같이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부담이 되고 강제가 될 수 있다. 사랑의 속성상 그런 데가 한 점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뜻대로 행하고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므로 당연히 그 몸된 지체들로서 머리의 일을 대행하게 된다[고후 5:20].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임을[고후 6:1] 성경은 명시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믿는 즉시로 구원되어 있음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니 이는 당연하다[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세상 종교는 영생이 목적이므로 그 종교를 믿은 즉시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도 못하거니와 그렇게 단정한 근거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진실에 기초하는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요 악령 사탄의 속임수에 그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오늘 당장이라도 믿고 영생하는 자가 되는 구원의 희소식]은 '영생'이 목적이 아니라 '올바른 삶'이 목표이다. 왜냐면 영생하는 자로 있다가도 아담은 범죄함으로써 즉 올바른 삶의 목표에서 이탈한 결과 영생하기커녕 오히려 죽은 자가 되는 비극을 맞았으니 이는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새 창조로서의 구원은 아담처럼 다시 남에 있다. 죽었다가 다시 출생하였으니 애초 아담이 처음 창조되었던 [범죄하기 전] 바로 그 상태와 똑같은 것이다.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이 범죄하기 전 역시 그들도 현재의 거룩한 천사들처럼 거룩한 자들로서 창조되었던 바로 그런 상태인 것이다. 그러니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어도 스스로를 죽은 자 또는 멸망당할 자로 만든 것과 똑같이 우리 다시 출생한 자들에게 당연히 올바르고[의롭게] 훌륭한[선을 행하는] 삶을 사는지가 거룩한 천사들처럼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사탄처럼 영원 멸망에 처해지느냐 하는 것을 결정 짓게 되는 관건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형제들 안에도 모두 그리스도 친히 계시므로 형제를 사랑함은 곧 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된다. 그러므로 똑 같은 한 그리스도시니 누구는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 하는 차별이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 25:40]라도 업신여길 수가 없다. 똑 같이 사랑하게 되어 있다. 만일 이를 어기고 여기서 벗어나게 되면 그것은 자기중심으로 나갔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으므로 자기중심으로 나간 결과로 사탄이 된 것처럼 사탄과 같은 종말을 맞게 됨은 필지이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창조하신 뜻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 모두가 하나되어 살도록 설계하신 것이 피조물의 원래 삶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이 구원이다. 천국에 들어감이다[마 7:21].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살라고 하나님께서 지으심인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 행복이 어디서 온다더냐. 머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피조물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할이다.

곧 전지전능하시어 그 피조물을 속속들이 다 아실뿐더러 동시에 그 뜻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몸 가운데 암 세포가 생겨 전체를 망치는 것과 같은 일을 막기 위해 머리의 지시에 불복하는 자들을 제거하시는 역할을 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머리에게 부과된 구실이다. 이런 일은 피조물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머리로서 그 몸을 이룬 각 지체를 위하신다는 증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받으심을 통해 이미 확증된 바다[롬 5:8].

자신을 다 송두리째 바쳐 선물로서 자신을 주실 정도로 사랑하심을 나타낸 영원하신 증거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은 서로 한 몸을 이루어 있는 데에서 가능한 것은 더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서로가 한 몸이니 모두가 다 실상 나 자신인 것이다. 나 자신이니 나 자신을 아끼지 누구를 아끼랴[엡 5:29]. 나 자신인데 어찌 나를 사랑하지 않으리요. 나 자신이니 내가 나를 아낌없이 선물로 준들 무엇이 아까우랴. 바로 이런 사랑을 하나님 친히 본으로 보이신 것이요 우리 각자로 이 본을 따르게 하심이다. 즉 영원한 생명의 법도다. 모든 일을 이 생명의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말하기를, "남을 위해도 한 몸의 이치에서 결과론적으로는 나를 위함이요 나를 아끼고 사랑함이라 할 것이니 그러면 결국 이것이 자기중심이 아니냐. 그리고 자기 부인으로 나가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인데 종국적으로는 자기를 위한다는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느냐?" 할 것이나, 이를 명확히 답하면 자기 부인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음"[고후 5:15]이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과 '자기를 아끼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의 차이다.

결과론적으로 그렇다는 것과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하는 것과의 현저한 차이다. 전자는 한 몸이라는 전제하에서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니 남 곧 내 이웃이 자기를 위해주니 결국 자기가 위해진다는 [자기 스스로 직접 위하지 않아도] 의미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고 아끼는 결과로 나타남이다. 오히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보다 더 풍성하게 한량없이 위해지는 방법이다. 정확히 말하면 진정 자기를 사랑하고 아끼는 방법이 바로 이 한 몸 구조에서의 자기 부인인 것이다.

반면 자기가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여 살게 되면 자기를 위하는 것은 자기뿐이다. 뿐만 아니다. 모두가 그런 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위하게 되니 상호간 충돌, 알력, 다툼, 분쟁이 끊일 새 없어 결국 그것은 상호 증오, 시기, 전쟁으로 이어져 얼마 안가서 똑 같이 망하는 공동 파멸이 초래됨은 필지이다. 그러니 이런 자기중심이 자기를 위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이 아님이 명백하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고 모두가 다 그렇게 되면 그래서 머리를 사랑하고 각 지체를 사랑하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머리의 이름으로 공평하게 위하게 되는지라 내가 나 자신을 홀로 위함보다 주님 말씀대로 "백배" 즉 가장 완전한 숫자대로 그 여러 갑절 자기가 위해지게 된다.

모두가 각자 자기를 위하지 않고 나를 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쪽이 진정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고 위하는 것인가? 자기 부인인가, 아니면 자기중심인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계명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순리 그대로이고 무리가 없고 억지가 아니며 자연 그대로의 물 흐름과 같은 것이다. 거북살스러움이 있을 수 없다. 아름답고 그리고 너무나 좋은 것뿐이다. 세상 종교에서는 당연히 이런 아름다움이 없다.

자기 구원을 위해 선행을 하자니 힘들고 그리고 한편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이며 흉물스러운 위선이란 말인가. 그 선행의 속셈이 다 들여다 보이는 까닭이다. 물론 이웃도 위하고 나의 구원도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 서로가 함께 위한다는 말은 좋지만 자기 구원을 소원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그렇다.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라는 말처럼 내가 모든 행위의 주체이고 그리고 나 자신에 관한 문제가 걸린 만치 내 자신의 구원의 일이 우선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음이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사랑이어야 하는 것이지 어느 틈에라도 자기 구원이 개입해 있는 한은 그 순수성을 잃기 때문에 위선이라고 해도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다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나 그 현재의 상태가 과연 구원 받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하는 차이는 이 사랑 유무에서 우선 가름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그 편지에서 사도들은 거의 모든 경우에 이 "믿음과 사랑" 두 가지를 겸하여 말한 것이다. 둘은 이런 의미에서도 불가분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성령을 모심으로써 구원 받는 것인데 성령께서 사랑을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모시고 있다고 하면서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처음부터 성령을 실제로는 모시고 있지 않든가, 아니면 성령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근심하시게 하고 소멸해오고 있든가 그래서 이대로 나가면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다시 말해 영생의 약속을 받지 못하는 아주 위험스러운 상태에 돌입해 있든가 하는 것이 된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비로소 배운다고 했으니 곧 사도 요한이 말한 바,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안다"[요일 3:16]고 한 그대로다. 그래서 결론이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다" 한 것이다[:16].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림이 아니라 형제들이 그 대상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구원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약 2:5/고전 2:9/약 1:12)/롬 8:28].

하나님께서 어떻게 피조물의 사랑을 구하시겠는가. 그럴 리 없다. 앞에 이미 지적한 대로 머리로서의 위치로 우리 모두를 한 몸으로 결속시키심이다. 사람의 법칙대로 생명의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선언하고 경고하는 성경의 모든 말씀인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의 토대가 된다. 한 몸으로서의 사랑인데 한 몸을 이룬 지체들 상호간의 사랑은 가장 먼저 머리 사랑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지체들 상호간의 사랑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형제 사랑은 형제 개개인에게 대한 사랑이라는 의미로 압축된다. 모든 형제 개개인에게 그와 같은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주님의 비유에서 드러난다. 즉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사랑하고 하지 않는 것이 나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심이다. 곧 그에게 하는 것은 주님께 하는 것이요 않는 것은 주님께 하지 않음이다. 주님께 하지 않음은 주님을 머리로 인정하지 않음이니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님, 소유주로 인정하지 않는데 구원이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랑은 한 몸의 이치에서 오는 것이요 이 한 몸의 이치는 머리와 지체 사이에서 머리가 그 중심이 됨은 당연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아 머리로서의 존재를 무시하는 데에서는 그 어떤 사랑도 존립할 수가 없다 하는 것이다. 이런 이치에서도 불 못이 존재하는 원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거기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머리로서 인정하지 않은 영물이나 인간의 집합체이다. 뿔뿔이 저 혼자다. 하나로 뭉쳐 있지 못하고 그야말로 '풍비박산'으로 나가려는 경향의 각자를 무리하게나마 억지로 붙들어 한 곳에 수용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강제 수단으로서 "꺼지지 않는 불"이 제 역할을 하는 곳이다.

거기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수가 없다. 우리가 처음에 사랑을 모르고 사랑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우리 위해 내어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신 것은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 서로 사랑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그러나 끝내 사랑을 배우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데에서야 더 이상 그 같은 사랑이 나타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타내는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이웃 사랑도 나오는 것이다. 형제 사랑과 불신자에 대한 사랑은 상대가 성령을 받았는지 여부가 그 관건이다. 성령을 받은 전자의 경우 한 몸된 이치가 그 기준이 된다. 그러나 후자에 대해서는 그럴 가능성 즉 장차 한 몸이라는 테두리 안으로 들어올 것에 대비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한 몸 밖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웃 사랑으로서의 본질적 차이가 나는 것이다. 즉 복음 전파를 위해 자기 자신을 다 바치는 즉 생명을 바치는 경우도 있지만[롬 9:3] 대체적으로 그 강도(强度)와 질(質)이 다른 것이다[갈 6:10].

즉 형제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다. 이 경우 그 형제가 분명히 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한한다. 따라서 형제가 아닌 일반적으로 전도 대상이 되는 불신자일 경우 그와 같은 계명이 적용될 수 있는 범주는 아닌 것이다. 이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있으니 초대교회에서 나타내 보인 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므로[행 2:44,45] 그 중에 궁핍한 사람이 없었다"[행 4:34] 한 대목이 그것이다. 그 재산과 소유를 일반 사람들이 아닌 믿는 형제들끼리 나눈 것이다. 일반인들은 한 몸 체제 안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불신자라도 전도 대상이 되어 있는 만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전도 차원에서 모든 선행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악을 선으로 이기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차원에서 원수 사랑도 하고 기타 모든 선행이 뒤따르게 된다. 그들로 구원 얻도록 즉  사울이 바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끝까지 견디고 참는 것이다. 그런즉 아무리 믿음이 있노라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각종 권능을 행함이 명백히 나타나더라도 그 믿음이 사랑과 선행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 한 무용지물이 된다.

저주 받은 무화과 나무[막 11:21]의 운명을 면치 못한다. 우리를 구원하심은 우리로 열매 맺도록 하심이다. 때문에 주님께서 임하실 세상 끝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마 24:12,13] 하신 것이다. 고로 여기서 말씀하신 뜻은 믿음이 아니라 믿은 다음의 당연히 나타나져 있어야 할 열매이다. 열매 없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이므로 논외가 되기 때문에 믿는 자의 "믿음"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줄 것이다"[계 2:10] 하셨으니 그러면 죽도록 충성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함이 당연하다. 계시록에서 구원 받는 자를 "이기는 자"로 표현한 것도 이를 가리키고 이를 근거로 한다. 이것을 '행위로 구원 얻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처음부터 은혜에서 시작하였으니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그것은 시종일관 은혜로 얻는 구원일 따름이다. 왜냐면 내가 이미 은혜 안에 있어 그 은혜의 능력으로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므로 은혜가 아니라면 나의 모든 산 자로서의 움직임 자체가 불가능하고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바라고서 애쓰고 힘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 받았으니 하나님의 아들답게 죽도록 충성함이 당연하지 않은가! 나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주시기까지 하신 그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우리가 어찌 감히 잊을 것인가. 요한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다" 한 것이다[요일 3:16]. 마땅하다는 것은 당연히 그런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열매가 없다 하면 그 구원 얻었노라 하는 믿음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사랑에서의 충성이다. 사랑으로써 충성함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하심이다[고후 5:15/롬 14:8].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위함이니 주님을 위해 산다면 주님께서 나 위해 자신을 버리셨으으므로[갈 2:20] 나도 주님 위해 자신을 버림으로써 죽도록 충성함이 당연하지 않은가. 어린 아이라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삶의 ABC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식으로 사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오해하도록 유도하여 이런 어처구니없는 착각에 빠지게 한 것은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연면히 내려온 전통처럼 되어 있다. 계시록에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단'[Nicolaitansㅡ도덕율 폐기론자들]의 행위를 미워한다. 나도 이것을 미워한다"[계 2:6] 하신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믿음 따로 행함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믿음이란 말 자체부터 오해하고 혼동함이다.

믿음은 반드시 행위가 따른다는 것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것은 세상에서 믿음이라 쳐 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유독 구원 얻는 이 믿음에서만 별나게 해석하고 있으니 이는 사람으로 난 것이라기보다 사탄의 방해 책동인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랑은 자기 부인이 그 핵심이다. 자기 부인이 없으면 사랑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자기 부인은 조물주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으면 또 역시 불가능한 것이다.

고로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심으로써 생겨난 것이니 곧 만유(萬有)를 만드신 조물주를 머리로 하고 그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지체(肢體)로 하는 한 몸의 원리가 사랑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이 왜 조물주 하나님께서 존재하셔야 가능하느냐 하면 피조물이 그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는 배경 또는 토대에는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자기를 위하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니까 내가 나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어서다.

이것은 간단한 이치이지 무슨 특별 나게 어려운 일도 복잡한 말도 아닌 것이다. "내가 너를 위하고 위해도 네 자신이 위하는 것보다 더 잘 위하는 것은 내가 너를 지은 까닭인데 어째서 너는 네 자신을 위하려고 덤비느냐? 또한 각자가 저마다 자기 자신을 위하면 그것은 파멸인 줄 모르느냐. 서로 자기를 위하고 자기 욕심을 이루려 하고 자기가 머리되려 하므로 밤낮 싸우다가 날을 보내게 된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다 멸망시키는 어리석은 자살 행위인 줄 모르느냐?"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서에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릇 하나님의 피조물된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다. 자기를 위하면 파멸에 이르기 때문이라는 사실 이전에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 친히 각자를 위하시는 까닭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이시라 한다[요 4:24]. 왜냐면 영이 아니시고 피조물처럼 어떤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형태[육체]를 지니신 경우에는, 피조물 각자가 같은 피조물 전체를 위할 수 없고 오직 접촉하는 그 피조물을 상대로 개별적으로만 상관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제약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영으로 계셔야 전체를 상대하실 뿐만 아니라 그와 똑 같이 개별적으로도 충분히 상관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영이 아니시고 그래서 우리가 보고 듣고 접촉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인식하려 하는 것은 그 조물주께서 피조물과 같은 존재이기를 바람과 같은 것이니 이는 이지적인 사고 방식도 질문도 아님이 드러난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것 자체가 꽉 막힌 석두(石頭)만이 발설할 수 있는 우문(愚問)인 것이다.

지능 발달이 아직 덜 된 철부지 아이들이 낼 수 있는 말밖에 되지 않는 것은 생각해보라, 하나님께 일정 형태가 있으시다면 이 너무나 너른 우주를 지으셨으니 이 우주보다 당연히 크시거나 그 정도는 크시다고 해야 옳을 것인즉 그런 거대한 하나님의 형상을 어느 인간이 제대로 초점을 맞추어 볼 수 있어 인식한다 하리요. 

이 우주 하나도 망원경을 빌려서야 겨우 그 윤곽이나 짐작할 정도가 아닌가. 망원경으로나 볼 정도로 그렇게 멀리 계신다면 멀리 계신다고 불평일 것이요 가까이 계시면 개미 한 마리가 인간의 몸체를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니 그래서도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보여야 있다고 하지" 하는 말은 여전히 튀어나올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충분히 우리 각자를 개별적으로 위하시되, 우리와 같은 피조물 중 어느 누구가 내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친숙, 친밀하게 가까이하시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이고 하나님으로서의 특징이시니 곧 하나님은 영이신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 마치 하나님과 나 단 둘뿐인 것처럼 개별적으로 가까이하실 수 있음이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장점이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철두철미 관심을 가지시고 오직 나를 위하시니 각자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런데 미련하게도 사탄은 이 삶의 법질서 또는 원리원칙을 어긴 것이다. 똑똑하다는 자가 도리어 자기 명철함을 의지하는 교만에 빠질 때 그것이 역으로 어리석음으로 작용되는 하나님 창조의 기묘한 조화라 할까. 욕심을 낸 것인데 이 욕심이 화근이다. 곧 성경에서 죄를 잉태시키는 근본 요인으로서 지적하는 탐심이다. 즉 "욕심이 잉태하니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니 사망을 낳는다"[약 1:15]고 한 대로다. 쉽게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한없이 미련한 배포다.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의 지위 즉 자기 위에 올라 서 있는 인간의 자리가 못마땅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육체의 근본이 자연계의 흙이라는 사실을 두고 인간을 경멸했다. 그리고 자기의 이러한 자기중심으로 야기된 범죄 결과가 영원한 형벌로 귀착될 것을 알고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해서 인간에 대한 반역을 시도한 것이다. 인간이 만약 자기 말을 들으면 자기가 인간 위에 올라서는 것이다.

당시는 창조 질서가 한창 확립되기 시작하는 무렵이므로 먼저 하고 나중에 하는 즉 시작하고 거기 따르는 양상을 따라 우열과 선후가 가려지는 터이다. 먼저 나고 나중에 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의 질서 개념이었다. 인간이 영물들보다 먼저 창조된 것이다. 말하자면 먼저 영적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우세한 그런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교만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시고자 하는 의미에서도, 나중 창조되는 영물들은 자연계의 흙["dust"]이 아닌 영계인 에덴낙원의 땅["ground"]을 소재로 하여 만드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영물들은 말하자면 지식 면에서는 인간보다 우위였고 따라서 당당하게 인간의 조력자가 되게 하신 것이니, 어느 쪽이든 일방적인 우위가 아니고 상호 보완 관계에서의 우열을 함께 나누는 구조로서 상호간 조화를 이루게 하심이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그 조력자(助力者-"helper")가 아담에게 필요하시다 해서 그 짝을 만드시려고 지으신 것이 바로 이 영물들인 것이다. 이 "조력자"라는 의미는 인격성을 갖춘 존재가 주변에 아무도 없어 고독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인간과 교제의 대상이 되는 상대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도 그렇지만 사람[아담] 역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는 것처럼 둘이 하나되는 이치로 사랑이라는 것을 보다 더 실감하면서 살 수 있도록 조처하심이라 할 것이다. 때문에 그들 영물[우리가 오늘날 '천사"라고 부르는]들 가운데 그런 적임자를 아담 스스로 찾는지를 보려 하셨으나 아담의 눈에는 하나도 마음에 드는 자가 없었다.

이름을 다 지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되게 아주 "괴상야릇하게" 생겨먹은 영물들이므로 그 별명을 지어주었다는 의미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마음에 흡족한 형상을 갖춘 자가 없으므로 자신과 빼닮은 인간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는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의 암수 구별처럼 그런 육체의 특징대로 지으실 수밖에 없어 아담의 신체 중 일부[갈빗대 하나]로 여자를 만들어 주시게 된다.

영물들의 창조된 형상은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의 대칭형인지라 모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되어 있는 아담의 눈에는 도무지 들지 않았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래서 자기 자신처럼 친근감을 느낄 수 없어 마치 별명처럼 그 생김새의 특징을 따라 이름을 지어 부르게 된 결과가 되니, 그런 "조력자가 없다"[창 2:20]는 판단을 하신 것이다. 우리말 번역 "배필"은 번역자가 처음부터 남녀 개념이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해 그렇게 한 것이고 영역(英譯)은 모두 "조력자"["helper"]로 되어 있다.

이렇게 서로 인격적인 존재로 말은 통하고 의사 전달은 할 수 있어도 온통 '괴물'[적어도 아담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 것이다]들에 둘러 싸여 아담 홀로 외로워 할 것이므로 부득불 하나님은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 즉 육체의 방법대로 다시 말해 암수["male and female"] 개념으로 여자를 만드시게 된다. 그래서 아담은 지식 면에서 그 조력자들 즉 영물들의 힘을 빌리게 되고 그러나 먼저 존재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측면에서는 당연히 그들 위에 군림하게 되어 이렇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조화를 사탄이 깨뜨리기를 시도했고 아담은 어리석게도 이 시도에 응함으로써 그 수하(手下)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사탄이 이 인간 세상 위에 군림하여 이 세상 신으로 되어 있고 지배자가 되어 인간을 완전 장악하고 있는 것도 이런 면으로 보면 합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동기가 불순한 것이고 죄에서 나온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를 하나님께서 방치해두실 리가 없음은 물론이다. 고로 구원 받은 사람들을 시험하는 일정한 시험 기간이 종료되면 이 세상은 지체없이 폐기하게 되어 있고 따라서 사탄의 활동도 종료된다.

이것이 우주 질서이니 즉 먼저 난 것은 나중 난 것의 위에 있고, 먼저 일을 저지르면 나중에 그것을 따라서 같은 일을 하는 자의 위에 올라서게 된다. 말하자면 사탄은 하극상(下剋上)을 한 것이다. 인간의 자리를 넘겨다본 셈이다. 그것이 이전에 지은 자기 자신의 범죄로 인해 불 못이 준비되어 있으므로 인간을 인질처럼 삼고 원리원칙대로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알고 이를 기화로 자기 형벌을 모면해보려고 한 수작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인간의 그러한 특수 위치를 알고 인간을 자기 아래 두려는 단순한 탐심의 발동으로서 그 결과로 불 못이 준비되었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모든 범죄는 질서 유린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전 14:33] 한 것처럼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질서가 확립되어 있는 바탕에서만 화평이 있는 법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는 것도[사 48:22] 서로 탐심을 내어 자기가 먼저 위에 올라 서고 지배하려는 욕구 때문에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려고 선수 치기가 능사가 되면 질서가 잡혀지지 않고 혼돈의 난장판을 만드는 것이 죄인들의 속성 곧 자기중심인 것이다. 이런 것을 가히 어떻게 삶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런 속성을 알면서도 자기중심을 증오하지 못하고 육신대로 살고자[롬 8:13] 하는가. 그런 불의, 불법은 목숨을 걸고라도 어떠한 고초의 대가를 당해도 한사코 미워하여야[히 1:9] 사람답다 할 것이 아닌가. 주님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이 되셨다. 십자가 죽음도 개의치 않으신 것이다. 그래서 그 받으신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웠다고 되어 있다[5:8].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순종하기를 바라시고 그렇게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명시했다[:9].

어찌하여 한 때만 살려는 짐승 같이 되려는가. 한 때만 사는 것이 아니다. 그 대가로 영원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그것 하나 제대로 믿지 못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믿는다고 감히 말하려는가. 이야말로 구제 불능이다. 이 하극상은 여자가 남자를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종의 반란이었다. 아래 있는 자가 위에 있는 자를 거스르고자 하는 것이다. 여자는 사탄의 말을 듣고 거기 동화(同化)되어 버렸다. 자기도 지식이 있어 그 지혜로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는 어이없는 자랑으로 마치 군림하듯이 남자를 대한 것이다.

여자는 남자와 한 몸이 되어 남자에게 속한 것이다. 물론 남자 역시 여자에게 속한 것이다. 원래는 한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속해 있는 하나이지만 그 창조된 순서가 다르다. 하나는 먼저 있었고 하나는 나중에 존재하게 된 그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위계 질서다. 다시 말해 남자에게서 여자가 났으니 만일 스스로 아담이 여자를 만들었다면 아버지 아들 관계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하나님 친히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대등한 것처럼 되어 남녀로 구분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당연히 그런 조력자들 중의 하나인 사탄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먼저 남자와 상의를 하고 난 다음 합의하에 행동에 들어가야 즉 선악과에 손을 대든지 말든지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손으로 직접 따서 입에 넣고 그 후 남자에게 가서 자기가 먹었으니 당신도 먹으라는 식으로 나오게 된다. 즉 내가 '먼저'이고 너는 '나중'이라는 그런 의미가 되는 것이다. 여자나 남자나 이 경우 자기 주견과 신념대로 나가지 못하고 주위 환경에 쉽게 동화되고 수동적인 자세로 나가는 것이 모든 범죄의 한 가지 특성이라 할 것이다.

아담은 다른 면에서의 지식에서는 영물들의 도움을 입어야 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시행하는 면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이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간 아담의 유일한 권위요 권능인 것이다.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만물을 다스리는 자리에 서 있는데도 자기 위상(位相)을 망각하고 혹은 그 가치를 제대로 음미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버리는 행동을 취했으니 어리석기 그지없다.

여자는 사탄의 말 한 마디에 그렇게 되고 남자는 여자의 말 한 마디에 그렇게 허무하게 넘어가고 무너진 것이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자기의 장자(長子) 명분(名分)을 판 것도 똑 같은 양상이다. 이와 같이 여자가 남자 위에 올라서려는 속성은 하나님의 저주 말씀에서도 드러난다. "여자가 너를 주관하려 하니 너는 여자를 다스리라"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내리신 저주의 하나다. 우리말 번역 "여자는 너를 사모하고" 하는 것은 오역이다.

사모하는 것이 어찌 저주가 될 수 있는가. 사모하는 것이야 사랑하는 것이니 그런 것이야 천만번 적용되어도 복이 되었으면 되었지 저주일 수는 없다. 이 대목은 나중에 가인에게 경고하실 때도 똑 같게 나온다. "죄가 너를 주관하려고 문턱에 엎드려 있으니 너는 그것을 다스리라"[창 4:7] 하셨으나 물론 가인은 다스릴 수 없었다. 이미 선악과를 먹은 결과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있는 채로 아담이 낳은 자식이니 똑 같은 육체로서 "육신"[롬 7:14-8:13]의 포로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선을 행치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웅크린다]" 하신 것이다. 물론 선을 행할 수 없었다[3:12]. 따라서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창 4:15]는 세상 모든 죄인들에 대한 긍휼, 구속의 은혜를 나타내심이다. 일벌백계로 가인을 응징하시지 않고 왜 의인 아벨만을 죽게 버려두셨느냐 한다면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는 요한 형제가 자기네를 영접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응징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던 것과 같다[눅 9:54].

이런 어리석은 하극상은 오늘날 소위 남녀평등이라는 무지무식에서도 드러난다. 왜 무식한가 하면 단 둘만 있어도 거기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는데 이 질서는 당연히 먼저 생겨나고 나중 생겨난 그 선후 차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둘 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니 어린 아이라도 사려 깊은 아이라면 알 수 있는 기본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대등하면서도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우기기 때문이다. 이런 위계 질서가 없으면 단 둘이라도 공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필요 불가결한 질서를 성경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 한 것이다[고전 11:3]. 이 모든 것은 그 먼저 존재하게 되는 순서를 따라서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에서 만물, 만상이 나지 않았다면 이런 질서 정연한 하나의 자연 법칙으로 만유가 운용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니 인간이 이토록 무지하다는 것이다. 실상은 무지한 것이 아니라 그 좋은 이성, 이성적인 판단력이 이 세상 신(神)인 사탄으로 말미암아 강제로 무디어져 그 온전한 판단력을 제대로 활용을 못하는 비극적 결과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은혜로 믿음으로써 구원 얻는 것이라고 소리 높여 부르짖는 이들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을 영원한 멸망을 대신하심이라고 오해하는 이 많다. 영원한 멸망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죽음' 바로 그것일 뿐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불경과 모독의 소리라 할지 모르나 생각해 보면 알 일이 아닌가. 만일 영원한 멸망을 대신 지신 것이라면 다시 부활하실 리가 없다. 영원한 멸망이라면 말 그대로 영원한 죽음인데 어찌 다시 살아나실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은 당신의 죽으심을 들어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심으로써 자연법칙처럼 창조 때부터 확립되어진 삶과 죽음의 순환으로 설명하셨다. 바울 역시 우리의 부활을 가리켜 그런 대칭적인 개념으로 밝혔고 주님의 죽으심도 그와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여 설명했다[고전 15:12-58]. 단지 주님의 죽으심은 많은 인생들 즉 모든 구원 얻은 또는 얻을 사람들의 저주를 그 한 몸에 지심으로써 자기 죄과로 인한 일개인으로 당하는 죽음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형언 못할 극심한 고통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영원한 멸망 자체의 의미는 아닌 것이다. "비록 그것이 영원한 멸망의 죽음의 고통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못하시는 것이 없는데 왜 못하시겠는가"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못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하신다는 그것이다. 만일 영원한 멸망을 우리 대신하여 당하신 것이라면 그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면[그리스도 친히 다시 살아나심을 근거로] 그것은 우리 인간 또는 범죄한 모든 피조물의 멸망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 된다,

즉 <영원한> 멸망일 수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왜냐면 우리를 대신해 멸망을 당하셨어도 그 다시 살아나심을 인하여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었으므로 그렇다. 그러면 그것은 "영원한 멸망"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영원한 멸망을 대신하심이 아니라는 뜻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성경 어느 곳에도 그런 뜻으로 뜻 풀이가 되어 있는 데는 없다. 실상 영원한 멸망이라는 것은 영원한 불 못을 가리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셨다는 기록은 없으니 불 못은 마지막 심판 때 비로소 나타날 것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악질적으로 군 악령들도 그 악행에 대한 형벌로 겨우 들어가는 곳은 무저갱 정도다. 고로 그리스도께서 만일 영원한 형벌을 대신 지신 것이라면 그런 모습 정도는 나타내셔야 하는 것인데 그런 표현도 그리고 그런 실제 모습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준 바가 없다. 오직 죽으신 후 그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 곳은 죽은 자가 가는 곳이고 불 못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우리 위하신 죽으심은 한 인간으로서의 죽으심이다. 이를 밝혀 주는 것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심은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갈 5:14]는 대목이다. 이는 분명 "모든 사람이 영원한 멸망에 이른 것이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영원한 멸망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최종 결정이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비록 하나님이시라 하더라도 그 한번 내리신 결정을 번복하실 수 없다.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 없이 인간이 죽으면 그 죽음은 영원한 멸망으로 통하고 직결된다 함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위의 성경 구절이 밝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나 우리의 죽음이나 같은 한 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죽음으로 취급되고 특별한 의미로 해석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사람으로서의 죽으심이 내게 적용되는 것은 첫째는 이제 다시는 내가 죽은 자가 아니요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기 위해서다.

그리스도로 인해 죄 값을 모두 치렀으니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다. 둘째는 죄에게서 해방되기 위함이다. 산 자가 되지 않으면 일체의 하나님 명령을 지킬 수가 없다. 그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산 자에게 그 생명을 유지 존속하기 위한 법도로 주신 것을 지킴이요 따라서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연계 생물체가 자연법칙을 제대로 지킴으로써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모세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을 사람이 지켜 영생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은 자로 있기 때문에 지킬 수가 없음을 교육시키기 위하심이었다. 그래서 오직 장차 오실 그리스도만을 기다리게 하심이었다. 물론 모세 당시에도 그 모세 율법을 지킬 때는 생명에 이르는 것이었으니 다윗이 그러했고 모세가 그러했고 기타 의인들이 다 그러했으나, 이는 장차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 믿음으로 될 것이므로 그 믿음이라는 차원에서만은 동일하기에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 것뿐이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미 그 사실을 밝히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내게 적용되는 두번째 이치를 말했거니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서는 죄가 발 붙일 터전을 완전히 상실함이다. 죄는 자기중심인데 자기가 죽어 장사 지내져 무덤 속에 있는데 다시 살아날 리 없으니 자기중심일 수가 없다. 즉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므로 다시는 죽어 없어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무릇 산 자들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도록 하심이라 한 그대로다[고후 5:15].


이상 두 가지를 하나로 뭉쳐 요약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죄 짓지 않게 즉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아담처럼 또는 사탄 등 악령들처럼 되지 않도록 하심이다[요일 3:8]. 구원의 목표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항상 순종하는 아들로 삼으시기 위함이다. 아들로서도 그렇지만 둘이 하나됨 즉 머리와 몸 관계에서 몸의 생존은 머리의 지시를 따름에 달려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 목표에 미달하는 자마다 낙오되고 탈락되는 것은 불문가지다.

왜냐면 순종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서 암적 존재이므로 아예 이 세상에서 걸러내는 것이 상책이 아니랴. 그가 회개의 가능성이 있으면 얼마든 오래 참으심으로 그가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지만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이김도 이 오래 참음으로 인함이다] 그럴 가망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미리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은 그를 탈락시키실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미달하고 탈락하는 이유는 뚜렷하다.

내 힘으로 그 표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 즉 구원 받음으로써 그 은혜로 누리고 나타내는 힘이니 이 힘을 제대로 활용하느냐 그 여부에 달린 것인데 그 힘을 썩인 결과다. 어찌하면 그렇게 썩이는 것이 되느냐 하면 앞서의 설명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해 사실 수 없어 나를 위해 능력을 나타내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다.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인 것이다[빌 2:12].

이 같이 모든 것은 항상 우리 믿음의 영역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심을 믿을 때는 절대로 나를 위해 살 수가 없으니 [나를 위하시는데 또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바보 짓을 할 턱이 없는지라] 나를 위하는 일체의 행위 즉 자기중심은 믿음 없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사랑과 불가분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롬 5:8] 것으로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선물로 주셨고[갈 2:20] 선물로 영구적으로 자신을 주셨다는 것

은 오직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시고 또한 존재하심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 여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머리를 사랑해야 한 몸을 이루어 있는 다른 모든 지체도 사랑하여 [이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신 말씀 그대로다] 행복한 세계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신대로 살아도"[롬 8:13] 여전히 구원 받음은 변함이 없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배워 믿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대열에서 탈락되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 세상의 것에 동화되어 날을 지새는 자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히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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